4년 전 처음으로 칸영화제를 찾았을 때 천국처럼 여겨졌다. 영화에 대한 존중이 살아 있는 5월의 칸은 비현실적일 만큼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세계적인 작가주의 감독들의 영화를 먼저 감상할 수 있고, 우수한 작품을 알아보는 세계 영화인과 교류할 수 있으며, 관객이 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입고 레드카펫에 올라 오페라극장처럼 웅장한 시설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곳. 영화미학을 공부한 사람에게 이만큼 환상적인 공간이 또 있을까.
그러나 이후 매년 칸을 찾으면서 그런 낭만은 차츰 일에 파묻혔다. 한국 영화가 황금야자상(상자기사 참조)을 수상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국내 언론의 채근에 적절한 답변을 찾아내는 게 나의 주요 임무였다. 매년 21편 정도의 영화가 초청되는 경쟁부문에서, 그것도 뽑히고 뽑힌 뛰어난 작품 중에서 1등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참 곤란한 일이다. 운동경기처럼 예전 기록으로 결과를 예측할 수도 없고, 심사위원단의 결정 역시 현지 반응과 다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칸발(發) ‘희망고문’에 대한 변명
지난 3년간 필자가 칸에서 보낸 글들은 우리 영화를 향한 응원과 기대가 얼마간 얹어진 글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결과는 알 수 없기에 긍정적인 부분을 부각했지만, 번번이 수상이 불발되면서 국내 영화 팬에게는 매년 ‘희망고문’이 됐다.
지난해 ‘스크린 데일리’에서 역대 최고 평점인 3.8점(4점 만점)을 받고 외신의 극찬이 잇따르던 ‘버닝’(감독 이창동)마저 빈손으로 돌아오자 그 불신은 절정에 달했다. 나조차도 단지 우리 영화의 수상을 보기 위해서라면 다시 칸에 올 필요가 있을까 낙담하며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5월 21일 오후 10시(이하 현지시각) 칸 뤼미에르 극장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공식 상영됐다.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화 초반부터 폭소와 박수가 터지는 등 몰입감이 높았고, 빠른 전개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으로 숨 가쁘게 흘러간 2시간 12분간의 상영이 끝나자 관객들은 걸작의 탄생에 환호했다.
알려진 대로 공식 상영에서 기립 박수야 의례적인 행동이지만, 감독과 배우들이 나갈 때까지 거의 모든 관객이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영화에 열정적이면서도, 평가에는 냉정한 것이 칸 관객들이다.
일례로 올해 프랑스 국민과 칸영화제가 사랑하는 감독 그자비에 돌란이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그의 작품 ‘마티아스 앤드 맥심’의 공식 상영에서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도중에 많은 이가 극장을 나가버렸다. 레드카펫 행사에서의 열렬한 호응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감독의 인기와 별개로 영화 자체는 그리 흥미롭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봉 감독과 배우들을 향한 관객들의 태도에는 분명 영화에 대한 큰 만족도가 실려 있었다. 칸영화제에서는 폐막식 당일 경쟁부문 초청작을 다시 상영한다. 외신과 영화제 관계자들은 오후 1시 드뷔시 극장 1000석을 가득 메운 채 ‘기생충’을 관람했고, 공식 상영 때처럼 영화가 끝나자 큰 갈채를 보냈다. 같은 날 오전 8시 30분 ‘기생충’의 경쟁작으로 예상되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페인 앤 글로리’ 상영회에서는 그만한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봉준호 영화의 정점
‘기생충’은 그동안 봉 감독이 전작들을 통해 보여준 장점이 망라되면서도 한 단계 더 정교하게 세공됐다. 풍성한 아이디어가 만들어낸 디테일, 물샐 틈없이 직조된 각본, 매력적인 캐릭터 등은 영화 공개 직후 영화 잡지 ‘버라이어티’ ‘인디와이어’ 등이 지적했다시피 그의 커리어가 현재 정점에 있음을 보여준다.
‘기생충’은 봉 감독이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이는 모든 감독이 부러워하는 재능이다. 이번 칸영화제 심사위원이 대부분 감독이거나 연출을 겸하는 크리에이터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심증을 뒷받침한다.
‘기생충’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부모, 아들, 딸 등 4인 가족으로 구성됐지만 부자 가족에게 빌붙어 살아야 하는 다른 한 가족이 주인공이다. 가족 구성원 전부가 백수인 기택(송강호 분)네의 장남 기우(최우식 분)가 친구의 도움으로 박사장(이선균 분)네 딸 다혜(정지소 분)의 영어 과외를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첫 장면에서 반지하에 사는 기우가 다른 집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 휴대전화를 높이 들고 다니다 동생 기정(박소담 분)과 함께 화장실에 쭈그려 앉는 모습은 이 영화의 제목과 주제를 단번에 드러낸다.
기우는 첫 수업에서 다혜와 연교(조여정 분) 모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취업에 성공하고, 이어 다혜의 동생 다송(정현준 분)의 미술 선생님으로 기정을 소개한다. 기정 역시 기지를 발휘해 연교와 다송을 쥐락펴락하며 신임을 얻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이번에는 기택을 운전기사로 취업시킨다.
기택은 마지막으로 부인 충숙(장혜진 분)을 이 집에 불러들인다. 기택네 가족은 원래 박사장네 있던 기사와 가정부를 내보내려고 치밀한 작전을 펼치는데, 이들이 기민하고 용의주도하게 계획을 실행하는 장면들에는 생존을 위해 발휘되는 인간의 본능적 처세술이 코믹하게 담겨 있다.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기택네 반지하 집과 언덕 위 박사장네 저택, 저택 밑 지하실의 시각적 대비다. 이 공간들은 직관적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경제적 계급 차를 보여준다. 박사장네 저택의 넓은 통유리창 밖으로는 푸른 잔디가 깔린 정원이 보이는 반면, 기택네 반지하 집에서는 지상 쪽으로 뚫린 작은 창 너머로 쓰레기가 쌓여 있고,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만장일치에 가까운 ‘Two Thumbs Up’
봉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2000), ‘살인의 추억’(2003) 등에서 ‘지하’라는 공간의 상징성을 보여줬다. ‘설국열차’(2013)에서는 밀폐된 공간 안에 존재하는 계급 차의 비정함에 대해 말했다. ‘기생충’ 속 공간은 ‘설국열차’에서 수평선의 극점에 놓여 있던 머리 칸과 꼬리 칸의 수직적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반지하, 고액 과외, 대만 카스텔라 등 한국인만 잘 이해할 수 있는 소재도 있지만,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자본을 위시한 권력관계와 그에 따른 삶의 양태를 보여주면서 부익부 빈익빈, 실업 문제, 갑을관계까지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칸의 관객이 대부분 ‘기생충’에 좋은 평가를 내린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일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러한 주제의식은 2017, 2018년 각각 황금야자상을 수상한 ‘더 스퀘어’(감독 루벤 외스틀룬드), ‘어느 가족’(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과 상통하는 데가 있다.
영화제 기간에 만난 외국 기자와 영화제 관계자들의 반응은 황금야자상 수상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올겨울 박찬욱 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 촬영차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 BBC 저널리스트 호세인 샤리프는 “올해 본 영화들 가운데 상영 도중 시계를 보지 않은 유일한 영화”였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평론가 론 포겔도 대담한 사회적 풍자를 보여준 이 작품이 “경쟁작 중 최고 작품이었으며, 몇몇 장면은 걸작(마스터피스)”이라고 평했다. 시상식 직전 만난 아부다비국제영화제 아티스트 디렉터 출신인 테레사 카비나도 ‘기생충’을 최고로 뽑으며 “우리가 영화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다 보여준 작품”이라고 말했다.
‘기생충’에 대한 비상한 반응을 다각도에서 감지하면서도 ‘버닝’의 트라우마 때문에 시상식 마지막에 호명될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던 것은 이제 추억으로 남을 테다.
황금종려상이 아니라 황금야자상이 맞다 칸영화제 최고상 명칭 오해…그랑프리는 2등상인 심사위원대상의 별칭
프랑스 칸영화제 최고상인 팔므도르(palme d’or)에 대해 한국에선 두 가지 착종(錯綜)이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 칸영화제의 역사를 잘 모르거나 관행이라며 잘못된 표현을 고집하기에 발생한다.
첫 번째는 이 상을 ‘그랑프리(grand prix)에 해당하는 상’이라고 설명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프랑스어로 그랑프리가 대상을 뜻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칸영화제에 국한했을 때 그랑프리는 2등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의 별칭이다.
여기에는 남다른 역사가 숨어 있다. 칸영화제의 최고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그랑프리였다. 그러다 1955년 그보다 한 등급 위인 상의 명칭으로 팔므도르를 도입했다. 지중해 해변 도시인 칸 곳곳에서 자라는 야자수(palm tree) 잎을 형상화한 최고상을 제정한 것이다. 1964?1973년 10년간 그랑프리로 되돌아갔지만, 1974년부터 지금까지는 팔므도르가 최고상이다. 따라서 팔므도르가 칸영화제의 그랑프리에 해당한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두 번째는 이 상을 황금종려상으로 부르는 것이다. 종려(棕櫚·영어로 lady palm)는 중국 쓰촨성 일대에서 주로 자라는 나무로 부채꼴 모양의 잎을 가졌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받은 상패에서 확인되듯 팔므도르 잎은 길쭉하게 생겼다. 칸에서 흔한 야자(椰子) 잎사귀다.
히브리어로 ‘타마르’라 부르는 성경의 야자수는 하나님이 가나안지역에 선사한 7가지 선물 가운데 하나다. 모든 과일 중 당도가 가장 뛰어나다는 이 나무의 열매를 맘껏 먹고 줄기와 가지, 잎으로 거처도 마련할 수 있어서다. 게다가 최고 30m까지 자라는 이 나무를 불태워도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는 놀라운 생명력을 자랑한다. 그래서 ‘생명의 나무’(2011년 황금야자상을 수상한 테런스 맬릭 감독의 영화제목)로도 불린다. 정확히는 2600여 종이나 되는 야자수 중에서도 대추야자나무(date palm)다. 성경에서 이 나무는 불멸과 다산(풍요)을 상징했다. 그러다 4세기 이후 기독교 국가가 된 로마에서 부활과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로 변모한다. 기독교 성경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환영 인파가 흔든 것이 대추야자 나뭇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야자가 종려로 번역됐을까. 중국에서 성경을 번역할 때 야자를 본 적이 없어 자신들에게 익숙한 종려로 번역한 부분을 그대로 수입한 것이다. 김영숙 씨의 2017년 박사학위 논문 ‘성경의 식물 명칭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2005년 발행된 우리말 성경에서는 야자나무 38회, 종려나무 5회, 대추야자 3회로 여러 명칭이 혼재한다. 반면 일본 성경에서는 이를 대추야자나무를 뜻하는 나쓰메야시(なつめやし)로 통일해 표기한다.
오늘날 한국인 대다수는 야자 하면 바로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반면 종려라고 했을 때 그 모습을 떠올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종려는 야자와 생김새가 전혀 다르다. 키도 4m까지밖에 안 자라고 열매도 먹을 수 없다. 봉준호 감독의 수상을 기점으로 황금야자상이라는 제대로 된 명칭을 되찾아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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