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책임 돌린 정치권, 맞장구친 정부[현장에서/최혜령]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11일 03시 00분


10일 국회에 출석한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과 정승일 차관. 뉴시스
10일 국회에 출석한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과 정승일 차관. 뉴시스
최혜령 경제부 기자
최혜령 경제부 기자
“국내에서 (소재·장비가) 개발됐다 해도 대기업에서 써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가) 기업들이 대단히 각성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정승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10일 오전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기업들이 국내 소재·부품 기업을 키우지 않고 외국에서 재료를 갖다 써서 일본의 수출 규제가 가능했다는 뉘앙스였다. 이에 앞서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정말 분통이 터진다. 삼성전자 같은 반도체 회사가 오히려 일본 업계를 1위로 띄워 올린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친 것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 발표 이후 정부가 뾰족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자 민주당과 민중당 등 정치권에선 반도체 기업이 국내 기술개발과 협력업체 육성을 외면해 왔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산업정책을 책임진다는 산업부의 고위 당국자까지 코드를 맞추고 있다. 칼을 뽑아든 일본에선 정부와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규제의 정당성을 부각하는 판에 공격당한 한국의 정부와 정치권은 대기업, 중소기업 간 편 가르기를 하며 내분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엄밀히 말하면 소재·부품산업 육성은 정부가 할 일이다. 정부는 2001년 “대일 역조 개선을 위해 부품, 소재 국산화가 필요하다”면서 소재부품특별법을 제정한 이후 4번에 걸쳐 중장기 기본계획을 내놨다. 정부 차원에서 약 20년간 예산 9조 원을 썼지만 소재·부품산업의 경쟁력은 제자리걸음이고 이번 사태도 막지 못했다. 정책성과를 내지 못한 정부가 일이 터지자 대기업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수출 규제 발동 이후 정부의 대응에서도 ‘준비된 전략’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일본 산케이신문이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검토 사실을 보도한 6월 30일, 우리 정부는 확인에 나섰지만 주일대사관은 다음 날 일본 정부가 공식 발표할 것이라는 것조차 몰랐다. 일본 정치권이 한국 정부의 전략물자 관리를 문제 삼자 산업부는 “일본 측 담당 국장이 공석인 탓에 지난해 한일 정례협의가 열리지 않았다”고 설명했지만 당시 일본 측 담당 국장은 정상적으로 재직 중이었다. 한일 무역 갈등으로 정부 간 논리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민감한 국면이다. 상대방에서 스스로 반격의 빌미를 제공하고도 기업에 책임을 묻는 정부를 보면서 기업은 누구를 믿고 어디로 뛰어야 할지 헷갈리고 있다.

한국 경제가 목매는 반도체 매출은 결국 다른 나라가 우리 것을 사 가는 데서 나온다. 외국산 부품을 수입해 부가가치를 높여 중간재와 완제품을 수출하는 건 일반적인 글로벌 분업체계다. 완성품 업체가 국산 부품을 쓰면 더 좋겠지만 기초소재는 정부 차원의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정부가 국내 기업에 “왜 다른 나라 것을 쓰냐”고 비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정 차관은 ‘정부가 지금 기업에 책임을 묻는 것은 애플에 휴대전화 만들면서 왜 삼성 반도체를 쓰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지적을 아프게 들어야 한다.

최혜령 경제부 기자 herstory@donga.com
#일본 수출 규제#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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