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슨 가족이 사는 법/윌리엄 어윈, 마크 T 코너드, 이언 J 스코블 엮음·유나영 옮김/492쪽·2만2000원·글항아리
“호머 심슨에게는 윤리적으로 존경할 만한 구석이 있다?”
미국의 한적한 소도시 스프링필드에 살고 있는 호머 심슨. 미국 시트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주인공인 그는 맥주를 좋아하고 소파에 누워 TV 시청을 즐기는 전형적인 중년의 가장이다. 원자력발전소 안전관리원으로 일하는 그는 속물 근성과 습관적인 거짓말, 저속한 익살을 즐긴다.
‘심슨 가족’의 캐릭터를 통해 위대한 철학자들의 핵심사상을 엮어낸 철학자 20명의 글을 모았다. 첫 번째 주제는 ‘호머 심슨은 악인(惡人)인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나오는 인간의 네 가지 성품 유형을 논리적 범주를 통해 고찰한다.
“호머는 트림을 하거나 방귀를 뀌거나 엉덩이를 긁거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먹고 마시는 등 우리 상당수가 피하는 행동을 공공장소에서 서슴없이 한다. 이게 전부라면 호머는 그저 천박한 인간에 불과할 것이다. 요는 호머가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사랑하고 즐기며, 남들의 시선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러한 자질 때문에 호머는 자신의 욕망과 욕구에 노골적으로 솔직해진다. 그는 거침없는 유형의 인간이다.”
저자는 “호머는 미덕의 본보기도 아니지만, 악의적인 사람도 확실히 아니다. 우리가 그에게 보일 수 있는 가장 가혹한 반응은 연민이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는 그는 탁월하진 않지만 존경스러운 면을 갖도록 만들어준다”고 평가한다.
호머의 큰아들 바트는 온갖 말썽을 부리는 악동이고, 딸 리사는 스프링필드에서 손꼽히는 영재로 IQ는 156이며 멘사 회원이다. 심슨가의 구성원을 통해 심오한 철학적 주제를 계속 던진다.
“니체는 철학계의 악동이고, 바트는 스프링필드의 악동이다. 바트는 전통과 도덕에 반기를 든 니체적 영웅 같은 인물일까? 슬프게도, 바트는 우리 시대에 만연한 데카당스와 허무주의 퇴보의 본보기일지도 모른다!”
똑똑한 딸 리사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며 스프링필드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던져준다. 그러나 잘난 척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저자는 리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지식인에 대한 존경심과 적개심이 필요에 따라 채택되는 반지성주의 사회에서 지식이 무용화되고, 전문가 집단이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상황을 묘사한다. 이외에도 성정치학,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하이데거, 롤랑바르트와 기호학적인 관점에서 심슨 가족과 이웃들의 세계를 살펴본다.
1989년부터 30년째 방송되는 미국 최장수 시트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는 수많은 대중문화에 대한 패러디가 등장한다. 종교나 인종 갈등, 소득 격차, 전쟁, 페미니즘 등 ‘최고의 현대 풍자극’으로서 심슨 가족을 다룬 수많은 학술서적도 쏟아졌다. 이 책의 편집을 주도한 펜실베이니아 킹스칼리지 철학교수 윌리엄 어윈은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헝거게임을 비롯해 슈퍼 히어로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와 철학’ 시리즈 발간을 이끌어 온 인물. 그는 “과학이 대중화돼야 하듯이 철학도 대중화돼야 한다”는 신념을 밝혔다.
국내에서도 최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방탄소년단(BTS)의 가사와 뮤직비디오의 상징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 유행이다. 미국 스프링필드에 호머 심슨이 있다면, 한국에는 서울 쌍문동에 사는 고길동(‘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꼰대 아버지)이 있다. 연민이란 감정을 자아내는 두 중년 아저씨를 비교한 책이 나오면 반가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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