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일을 다짐하는 지금, 문화재 유감[기고/최종덕]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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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조선을 강압적으로 점령하고 흔적을 지우고자 했던 일본은 조선의 상징이었던 궁궐을 철저히 훼손했다. 궁궐의 전각 대부분을 헐어버리는가 하면 경복궁 앞마당에는 거대한 총독부청사를 세웠다.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만들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조선 궁궐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같은 대상을 두고 일본제국주의와 대한민국이 파괴와 복원, 정반대의 행위를 한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역사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화재에는 우리의 역사관이 투영되어 있기에 이에 걸맞은 관리가 요구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쉬운 점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문화재’라는 용어부터 불편한 구석이 있다. 용어에는 그 대상의 성격과 정체성이 함축돼 있다. 1949년 일본 참의원에서 일본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면서 문화재라는 법률용어를 새로 만들었다. 광복 이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 용어를 그대로 따라 했고 문화재보호법이라는 법 이름까지 갖다 썼다. 우리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시대까지 널리 쓰였던 ‘고적(古蹟)’과 같은 우리말도 있다. 순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지냈던 유본예는 서울의 고사를 소개한 책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당시의 관점에서 옛 유적을 고적이라 했다.

창덕궁에 희정당과 대조전이 있다. 두 전각 모두 1985년 보물로 지정됐다. 각각 임금과 왕비의 거처로 궁궐의 가장 핵심적인 전각이어서 지정된 듯하다. 그러나 두 전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원래의 전각은 1917년 화재로 불타버렸다. 현재의 희정당과 대조전은 당시 조선왕실의 살림을 관장하던 이왕직이 조선총독부와 협의해 본래의 모습을 무시하고 새로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옛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이왕직은 일본왕실 소속 궁내부 기관이었다.

창덕궁 주합루는 2012년에야 보물로 지정됐다. 정조 즉위년인 1776년 어명으로 세워진 주합루는 정조 당시 개혁과 학문의 산실이었던 규장각이 있었던 역사적인 건축물로 편액은 정조의 어필이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목민심서’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긴 정약용이 이곳에서 일했다. 결과적으로 1985년 당시 대한민국정부는 정조 임금이 세운 주합루보다 조선총독부와 일본왕실이 관여한 희정당과 대조전이 더 가치가 있다고 공인한 셈이다.

2000년대 초에 도입한 ‘등록문화재’ 제도는 어떤가. 일본은 1990년대에 경제침체로 부동산 거품이 걷히면서 은행 등 기업이 소유하던 개항기 건축물들이 개발업자의 손에 넘어가 사라지는 일이 흔했다.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자 그 대책으로 마련한 장치가 일본의 등록문화재 제도다. 우리는 일본 등록문화재 제도를 그대로 갖다 쓰고 있다. 이름은 물론이고 등록된 건축물에 네모난 동판을 달아주는 것까지 일본 제도 그대로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다. 일본이 도발한 경제전쟁으로 온 국민이 ‘극일’을 다짐하고 있는 지금이다. 일본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야 우리의 정체성은 물론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의 문화와 역사, 정체성이 내재된 ‘우리 옛것’을 지키는 일에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장
#한경지략#고적#등록문화재#극일#일제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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