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투자하는 세계 거물들
2021년 AI시장 730억 달러… 매년 50%씩 성장세 이어갈 듯
손정의, 100조 펀드로 투자 이어 2차 펀드도 조성해 선점 나서
일부 스타트업은 투자만 받으려 ‘테크 버블’ 생기고 있다 비판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62)은 만 19세에 설계한 ‘50년 인생 계획’을 대부분 이뤄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30대에 1000억 엔(약 1조 원)의 자금을 마련해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걸고 50대에 1조 엔 매출을 보이는 사업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모두 이뤘다. 그런 그가 아직 미뤄두고 있는 인생 목표가 있다. ‘60세에 다음 세대에 사업을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당초 손 회장은 59세이던 2016년 6월 주주총회에서 은퇴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여러 차례 “60세에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언했고, 당시 삼고초려 끝에 구글에서 데려온 니케시 아로라 전 부사장을 후계자로 낙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주주총회 전날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며 돌연 ‘은퇴 선언’을 뒤집었다. 이 같은 은퇴 번복에 세계 정보기술(IT) 업계는 그 사유가 무엇인지에 관심이 쏠렸다. 그는 계획 변경의 이유에 대해 “인간 역사상 가장 큰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려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빅데이터를 값진 정보로 만드는 AI
인류 역사의 패러다임이 인공지능(AI)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확신을 가진 사람은 비단 손 회장뿐만이 아니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회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키워드로 ‘빅데이터’와 ‘AI’를 꼽았다. 모든 사물이나 기기가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 시대에는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빅데이터가 쏟아진다. 정제되지 않은 데이터 덩어리를 어떻게 분석하고 해석해 정보로 만들어 내느냐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베이조스 회장은 ‘빅데이터는 소비자의 마음이고, 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눈이야말로 AI 기술’임을 수차례 강조해 왔다.
바이두 리옌훙 회장은 “증기·전기·정보기술혁명 등 지난 3번의 혁명이 인류가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었다면 AI 시대에는 인류와 기계가 공동으로 세계를 혁신하게 될 것”이라며 “AI가 전 세계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 역시 “AI가 인류 전체에 혜택을 가져다주는 기술로 발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AI 찬양론을 역설했다.
세계적 IT 업계 거물들이 이토록 AI를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지능을 뜻하는 AI는 업계에서 다양한 기술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으로 쓰인다. 딥러닝(학습)과 자연어 처리 기술(음성 인식), 컴퓨터 비전 기술(시각화 기술) 등이 AI 관련 기술들로 꼽힌다. 모두 기계나 시스템이 인간의 감각과 지성을 닮아가거나 결국엔 뛰어넘는 자체 처리 능력을 갖게 하는 기술들이다.
구글의 엔지니어링 고문이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이 되면 AI가 인간을 넘어 인간 지능보다 10억 배 이상 높은 ‘컴퓨팅 능력’을 가질 것으로 예측했다. IT 시장조사기관인 IDC는 이 시장의 규모가 2016년 80억 달러(약 9조7000억 원)에서 2021년 730억 달러 수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해마다 50%씩 급성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진정한 가치는 관련 시장의 성장세가 아니라 AI가 4차 산업혁명의 ‘기반 기술’이라는 점에 있다고 IT 업계는 풀이한다. 모바일 생태계 위에 구축돼 있는 현행 산업 구도가 향후 AI 기술 위로 급격히 재편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IT 업계에서는 현 시점에 승차공유 업체가 ‘자율주행차 시대’를, 전자제품 업체가 냉장고가 알아서 필요한 음식을 주문하는 ‘사물인터넷(IoT) 시대’를, 이동통신사가 좋아하는 음악을 자동 추천하는 ‘AI 비서 시대’를 전망하는 것 모두 AI로의 패러다임 전환기가 다가왔음을 뜻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 비전펀드, “선제적 투자? 테크 버블?”
손 회장은 2017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와 손잡고 10조 엔 규모의 ‘비전펀드’를 마련한 데 이어 최근 이와 비슷한 규모의 새 펀드를 조성하고 있다. 새 펀드는 1차 비전펀드와 비슷한 규모인 데다 AI에 대한 그의 신념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비전펀드 2호’로 불린다. 두 차례에 걸쳐 비전펀드를 마련한 것에 대해 손 회장은 여러 공식 석상에서 “대격변기를 이끌 주역을 발굴하고 AI 혁신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1차 비전펀드는 이러한 의중이 반영돼 AI라는 신성장 산업과 관련한 핵심 기술 기업들에 집중적으로 투자됐다. 이미 세계 80여 개 IT 업체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면서 100조 원에 이르는 자금을 거의 소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투자 포트폴리오에는 빅데이터, 공유경제, 헬스테크 등 신성장 산업의 1위 사업자나 독보적인 기술력의 ‘잠재적 시장독점자’가 다수 포함됐다.
특히 공유경제 부문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는데 우버(미국), 디디추싱(중국), 그랩(말레이시아) 등이 투자처로 이름을 올렸다. 공유오피스 업체 위워크에도 44억 달러라는 거액을 들였다. 또한 모바일 반도체 칩 시장의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는 반도체 설계 업체 ARM(영국)에도 자금을 대거 투입했다. IoT의 보급이 활발하게 이뤄지면 저전력, 초소형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한국 기업으로는 오픈 마켓 ‘쿠팡’이 유일하게 비전펀드의 투자처로 이름을 올렸다. 적자 운영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신세지만, 쿠팡이 국내 유통·배송 정보를 장악할 가능성을 크게 본 것이라고 업계는 해석한다. 김진영 키움증권 글로벌리서치팀 연구원은 “최고의 기업을 하나로 묶는 ‘무리(군) 전략’을 쓰는 손 회장은 1차 투자로 산업별 막대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선두 업체들을 섭렵해 일종의 연합전선을 만들었다”며 “2차 비전펀드로는 이들 간의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AI 핵심 기술을 개발한 업체가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 같은 거침없는 투자에 대해 일각에서는 미래를 담보로 ‘테크 버블’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있다. 규모가 100조 원이 넘어가는 대규모 자금이다 보니 비전펀드의 투자처가 됐다는 것만으로 해당 업체는 역량에 비해 가치를 과다하게 평가받는다는 것이다.
○ 글로벌 AI 경쟁력 지형도
비전펀드가 있긴 하지만 국가별로 보면 일본은 세계 AI에 대한 경쟁력에서 선두 그룹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AI 시장은 미국이 선두에 서있고 중국과 유럽연합(EU)이 그 뒤를 쫓는 형국이다.
미국 데이터 혁신 센터가 최근 펴낸 ‘AI 경쟁에서 누가 이기고 있나’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20년간 AI 관련 회사를 가장 많이 인수한 상위 10개 기업은 모두 미국 기업이다. 알파고를 개발한 ‘딥마인드’를 2014년 5억 달러에 인수한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이 대표적이다. 알파벳은 2000년 1월부터 2019년 5월 사이 AI 관련 회사 19곳을 인수했다. AI 애플리케이션(앱) 관련 특허 취득 건수(2012∼2016년)로 봐도 IBM(3677건)과 알파벳(2185건), 마이크로소프트(1952건) 등 미국 기업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중국은 막대한 자금력과 14억 명의 인구가 쏟아내는 데이터를 앞세워 미국과의 격차를 줄여 나가고 있다. AI 관련 스타트업이 2017년 투자금을 모집한 규모로 보면, 중국(81억 달러)이 미국(62억 달러)을 앞지른 데다 AI의 주요 자산으로 불리는 슈퍼컴퓨터 보유량도 중국이 미국을 추월했다.
국내에서도 AI 투자가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한국과 미국에 이어 영국 캐나다 러시아에 각각 AI 센터를 세우고 글로벌 AI 인재 및 기술 확보에 나섰다. 한국 ‘AI 총괄센터’가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AI 연구센터의 허브가 되겠다는 계획이다.
SK의 AI 사업을 주도하는 SK텔레콤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5세대(5G) 등 미래 사업 분야에 총 11조 원을 투자했다. 정부 또한 최근 AI를 비롯한 미래 기술 연구개발(R&D) 예산으로 4조7000억 원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는 등 민관이 AI 투자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AI 주도권을 잡기 위한 세계 각국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보다 유기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업의 투자 활성화와 함께 AI 핵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 인프라, 스타트업이 혁신 기술을 마음 놓고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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