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나노튜브(CNT)로 만든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다. 탄소나노튜브는 탄소원자가 벌집 모양으로 연결돼 원통형 다발을 이룬 물질이다. 전기를 잘 흐르게 하고 강도도 강하지만 잘 휘어지는 성질이 있어 미래 전자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그간 소재 연구에만 머물렀던 탄소나노튜브를 활용해 전자소자(트랜지스터)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동작하게 한 것은 처음이다.
맥스 슐레이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팀은 이달 28일 탄소나노튜브로 만든 트랜지스터 1만4000개가 들어가는 16비트 프로세서 ‘RV16x나노’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공개했다. 16비트 프로세서는 0 또는 1의 값을 갖는 디지털 데이터 16개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요즘 컴퓨터에 사용되는 64비트 프로세서보다 성능은 떨어지지만 프로그램을 통해 문자를 출력하는 데 손색이 없다. 연구팀은 이 프로세서를 통해 “헬로 월드! 저는 CNT로 만들어진 RV16x나노입니다”라는 문장을 출력하는 데 성공했다.
탄소나노튜브는 1991년 일본 NEC 연구소의 이지마 스미오 박사가 처음 발견했다. 지름은 수 nm(나노미터) 수준에 불과하면서 강도는 철의 100배 이상에 전기가 통하는 성질(전기전도도)도 높아 미래 소재 중 하나로 주목받아 왔다. 특히 현재 반도체 칩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주재료인 실리콘을 대체할 차세대 소재로 손꼽힌다. 실리콘은 집적도가 10nm 이하로 내려가면 누설 전류가 발생하는 등 한계가 발생한다. 반면 탄소나노튜브는 소재 자체가 수 nm에 머문다.
노용영 포스텍 화학공학과 교수는 “탄소나노튜브의 가장 큰 장점은 빠른 전자이동도”라며 “중앙처리장치(CPU) 등 논리회로가 들어가는 반도체는 속도가 중요한데, 탄소나노튜브가 이들 반도체의 소재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메모리반도체보다는 계산에 활용되는 반도체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슐레이커 교수는 “이론적으로 탄소나노튜브 프로세서는 실리콘 프로세서보다 효율이 10배 높고 동작 속도도 3배 더 빠르며 전기도 3분의 1만 사용한다”고 말했다.
탄소나노튜브 트랜지스터가 등장한 지는 20년이 넘었다. IBM은 1998년 탄소나노튜브로 만든 고밀도 집적회로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인 전계효과트랜지스터(FET) 하나를 시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를 회로로 만들고 집적하는 기술 개발이 어려워 이후 진척이 더뎠다. 그러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2013년 네이처에 탄소나노튜브 트랜지스터 178개로 만든 1비트 프로세서를 공개하면서 다시 연구에 속도가 붙었다. 2016년에는 미국 매디슨 위스콘신대 연구팀이 실리콘 트랜지스터의 성능을 1.9배 뛰어넘는 탄소나노튜브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데 이어 2017년에는 중국 베이징대 연구팀이 선폭 5nm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탄소나노튜브 트랜지스터를 양산하려면 여러 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탄소나노튜브는 서로 잘 뭉치는 성질이 있어 이를 제거해줘야 한다. 탄소나노튜브 소재 자체는 금속성과 반도체성 2개의 성질을 띠는데, 트랜지스터를 만들려면 반도체성을 분리해내야 한다. 현재는 99.99%까지 뽑아낼 수 있는데 앞으로 그 수치를 더 높여야 한다.
연구팀은 뭉쳐 있는 탄소나노튜브와 단일 탄소나노튜브가 트랜지스터 기판에 붙어 있는 힘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뭉쳐 있는 탄소나노튜브 제거법을 개발했다. 또 순도가 떨어질 경우 회로에서 잡신호(노이즈)가 발생하는데, 이런 노이즈를 논리회로 설계 최적화를 통해 피하도록 하는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이미 해외에서는 탄소나노튜브 반도체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IBM은 2014년 5년간 30억 달러를 투자해 7nm 칩을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탄소나노튜브가 가장 유력한 차세대 반도체 재료”라고 말했다. 혁신적인 연구를 지원하는 것으로 유명한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도 2018년부터 슐레이커 교수의 연구를 비롯한 탄소나노튜브 차세대 칩 개발에 15억 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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