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불안을 다룬 세계 공연 거장의 작품들이 서울로 몰려온다. 3일 개막한 제19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는 20일까지 ‘시대를 조명하다’라는 주제로 작품 19편을 선보인다. 덴마크, 러시아, 이스라엘, 벨기에, 독일, 프랑스 등 10개국 작품이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세종문화회관, 한국예술종합학교 일대에서 무대에 오른다. 연극과 무용이 각각 9편씩 선정됐고 장르가 복합된 다원극도 1편 있다. 한국의 대표적 공연예술 축제인 SPAF는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동 주최한다.
벨기에 연극 ‘잊혀진 땅: 포인트 제로’(18∼20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정면으로 마주한 작품이다. ‘자연방사능보호구역’이라는 이름이 붙은 불가사의한 지역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유령도시처럼 방사능에 오염된 농작물, 동물, 그리고 일부 지역민만이 사는 곳을 그리기 위해 연출진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직접 방문했다. 원전의 위험성을 조명하기 위해 체르노빌 사고로 고통받는 지역민들을 만났고 이들의 증언과 기억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었다. 2018년 한 벨기에 언론은 이 작품을 최우수 공연으로 선정하며 “기억 속으로 사라진 진실, 알 수 없는 미래의 두려움을 그린 한 편의 시”라고 설명했다.
일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의 연극 ‘그 숲의 심연’(19∼20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는 한국 프랑스 일본의 배우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소재 연구실에서 영장류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통해 다문화, 공생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일본의 수출 규제를 비롯해 8월 일본 아이치트리엔날레에서 벌어진 소녀상 전시 중단으로 한일 관계가 급격히 경색되면서 주최 측은 작품을 초청하는 과정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한국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김도일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는 “예술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양국 간에 정치 경제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문화적 현상으로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연극 작품도 눈여겨볼 만하다. 극공작소 마방진의 ‘낙타상자’(17∼20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는 인력거꾼의 비참한 인생을 담은 작품이다. 1937년 발표된 중국 장편소설을 각색했다.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해피투게더’는 1980년대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일을 적나라하고 속도감 있게 그렸다. 극단 서울괴담의 ‘보이지 않는 도시’는 평생 가꿔온 집을 재개발로 잃게 된 노인이 철거에 맞서는 이야기를 통해 추억을 담은 공간인 집의 의미와 도시 개발을 돌아보게 한다.
무용 작품도 탄탄하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차세대 안무가 인발 핀토는 신작 ‘푸가’(12∼13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로 한국을 찾는다. 다양한 색상과 감각, 소리를 통해 잃어버린 과거와 세계, 내면의 소리를 찾아가는 작품이다.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핀란드 출신 무용가 수산나 레이노넨의 ‘네스티: 여성, 억압과 해방’(12∼13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여성의 몸을 주제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잔인함을 폭로한다. 왕 라미레즈 컴퍼니의 ‘보더라인: 경계에서’(18∼19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프랑스와 독일 안무가의 합작품으로 애크러배틱한 움직임을 기반으로 중력을 거스르는 이색적인 무대를 선보인다. 최상철 SPAF 무용 프로그래머는 “국가 간의 분쟁, 이민자로서 정체성, 뜨거운 이슈인 여성의 몸 등 지금 이 시대에 대해 무용가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보여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 처음 선보였던 개막작 ‘카프카’는 러시아 고골센터의 작품으로, 카프카의 글에 나타난 부조리와 20세기의 광기를 연결지었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공연자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을 연구하는 ‘연극인류학’의 창시자인 에우제니오 바르바 연출가와 그가 이끄는 오딘극단의 ‘크로닉 라이프’도 5일까지 무대에 오르며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2031년 제3차 세계대전 이후를 상상해 전쟁, 실업, 경제적 위기를 그렸다. 한국을 찾은 에우제니오 바르바 연출가는 “불확실성과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체험이 이해 불가능한 것들을 수용하게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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