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다. 말은 겉보기에 화려하게 꾸밀 수 있지만, 그림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 진실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에 가서 떨어진 나무를 주워 무언가를 조각하기도 했고, 흙으로 조형물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미술을 통해 창작하는 것을 즐거워했고, 미래에 화가가 되거나 미술관에서 일하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입시가 벽이 됐다. 아버지가 미대 진학을 반대했다. 미술을 고수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활약하는 기모노 디자이너 밑에서 3년간 일했다. 그 기간 동안에 많은 어른과 만났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 나의 재능이 미술세계에서 살아남을 만큼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동안 대학에 입학할 만큼의 돈을 모았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며 사회학과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몇 년 뒤 나는 한국에 오게 된다. 한국에 오면서 그동안 공부했던 사회학을 뒤로하고 다시 미술에 빠져버렸다. 한국의 풍토와 자유로운 예술성이 터무니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옛 애인과 재회한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애인을 만난 것 같기도 했고, 그때부터 나에게 있어 미술은 영원한 짝사랑의 애인처럼 늘 함께하게 됐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며 지내던 나는 이따금 칠판에 그림을 그리며 학생들과 소통하기도 했고, 작은 손작업을 하며 지내왔다. 그러다가 2004년부터 미술 작업을 전시장에 내놓고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일과 육아, 그리고 학교생활에 바쁜 시기여서 전시회 개최를 도와주는 것에 급급했다. 작품도 은입사, 불화, 동양화, 목공예 등 생각 없이 이것저것 내놓았다. 그러다가 조금씩 오브제 작업을 시작했다. 테마는 ‘소통’이었다. 관람객들이 참여해서 완성해가는 작품이었다, 작품은 전시회가 진행돼가며 완성되어 갔고, 이렇게 관람객들과 소통하는 것에 매력을 느낀 나는 관람객과 함께 이뤄가는 작업에 한동안 몰입했다.
내게 있어 중요한 화두는 소통이었고, 어쩌면 미술 작업만큼 중요한 것이 소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전시를 기획하고, 참여할 사람들과 자료를 모으고, 이것을 토대로 리플릿을 만들거나 작품을 전시장에 걸어두고 관람객들에게 선보이는 작업이 무척 즐거웠다. 물론 그 안에 내 작품을 한쪽에 두고 관람객들과 소통을 지속적으로 시도해오면서 말이다.
이달 말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서 열게 된 ‘산수회’도 소통의 일환이다. 나를 포함해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자라 한국에 살고 있는 여성들이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한국 전통문화를 배우고, 자신의 삶과 생활 속의 한국 문화를 자신만의 작품으로 표현해 전시장에 내놓은 것으로 올해로 13번째 개최를 맞는다.
올해는 모두 7명이 참가한다. 각자의 인연에 따라 한국에 오게 된 사람들이다.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40년 이상 한국에서 살아왔다. 남편의 주재업무로 한국에 오거나 한국 남성과 결혼해서 사는 경우도 있다. 나이는 물론 거주하는 지역도 서울에서 제주까지 다양하지만 한국 문화와 예술, 그리고 한국의 자연과 이웃들을 사랑하고 배우며 지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각자의 삶터에서 작품 활동을 해가는 사람들이다.
작품 내용도 한국의 전통적인 민화에서부터 도예, 그리고 조금 생소한 보태니컬아트(꽃, 과일 등을 주제로 다양한 기법으로 정교하게 표현하는 페인팅 예술), 비즈공예, 하와이안퀼트, 그리고 모빌까지 다양하지만 특히 ‘한국살이(韓國に暮らして)’라는 주제를 담아 한국과 일본의 깊고 오랜 역사적 교류의 뜻을 담았다. 몇 해 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과 도쿄의 국립박물관에 함께 전시됐던 한국과 일본의 반가사유상을 모티브로 한 작품도 있다.
미술을 통해 한국에 살고 있는 기쁨은 물론 디아스포라로서의 아픔 등 여러 감성을 표현해 놓았다. 요즘처럼 얼어붙은 한일 간의 감정의 골을 따뜻하게 녹여볼 수는 없을까?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작품을 감상하며 여러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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