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의 현대식 수장고(가칭 ‘훈민정음 수장고’) 신축에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44억여 원을 투입한다는 소식이 지난달 전해졌다. 앞뒤 다 잘라 놓고 보면 사립미술관에 이 정도 규모의 지원을 하는 건 특혜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의를 찾기 어려운 건 약관을 갓 지난 나이에 조선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富)를 물려받아 민족문화유산의 보존에 털어 넣은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의 정신이 지금도 간송 가(家)에 이어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팔아서 사익을 챙길 수도 없는 보물창고의 문지기랄까. 지난해 별세한 전성우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의 아들인 ‘간송 3대’ 전인건 간송미술관장(48)을 18일 서울 송파구 보성고에서 만났다. ―2014년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연 전시가 올해 초 끝났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5년 동안 58만9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아 주셨다. ‘간송문화전’ 시리즈는 고미술 전시로는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다. 미디어나 현대미술과 고미술의 협업도 DDP에서만 가능했던 새로운 시도였다고 본다.”
간송미술관은 오랫동안 법적 지위가 없는 ‘임의단체’였다. ‘박물관미술관법’에 따라 미술관으로 등록하려면 1년에 300일 이상 일반 공개해야 했는데(현재는 90일 이상) 이를 충족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간송 가는 2013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한 데 이어 지난달 미술관의 법적 등록을 마쳤다. 간송이 1938년 보화각을 세웠고 ‘간송 2대’인 전성우 전 이사장과 전영우 현 이사장이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1971년 간송미술관을 출범시킨 데 이어 약 50년 만에 다시 일대 전기를 맞은 것이다.
전 관장은 “미술관은 출범 이후 연구와 교육, 그리고 보존을 중심으로 운영해 왔지만 앞으로는 수장고 공사를 마치는 대로 법에 따라 봄, 가을에 적어도 한 달 반 이상씩 전시를 열 것”이라며 “지금 시대는 국민께 더욱 적극적으로 보여 드리고 알리는 게 간송의 뜻에 맞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축 수장고의 세미나실에서는 일반인 대상의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간송 컬렉션은 99% 이상, 거의 전부를 비영리 공익법인인 간송미술문화재단으로 귀속했다고 한다. 전 관장은 “재단이 취득한 데 따른 세금을 내야 하는데 부담이 작지 않지만 잘 풀어 가고 있다”고 했다.
세무당국에 신고하기 위해 문화재의 가치 평가를 올해 진행했는데 문화재위원급 인사들도 평가를 못 하고 손을 든 문화재가 딱 하나 있다. 국보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실로 ‘무가지보(無價之寶·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인 셈이다. 지정문화재여서 얼마로 평가하든 법에 따라 과세되지 않는다.
‘대구 간송미술관’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미술관과 정부, 지방정부가 협력한 ‘루브르 아부다비’나 ‘빌바오 구겐하임’ 같은 모델로 국내에서는 새로운 시도다. 이달 말 설계공모에 들어가 이르면 2022년에는 문을 열 계획이다.
―어떤 문화재가 대구로 내려가나.
“프로젝트에 따라 다르지만 간송의 컬렉션을 100% 활용할 것이다. 대구에 안 내려 보낸다고 정한 것도 없고, 반대로 대구에만 가 있는 유물도 없을 것이다. 대구 시립미술관의 운영을 간송 측이 위탁받는 형식이다. 대구 문화계의 일부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이사장실의 가운데 의자에 잠깐 앉아달라고 하니 전 관장이 머뭇거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앉던 자리”라는 거다. ―아버지 전성우 이사장은 어떤 분이었나.
“간송의 정신을 오롯이 지켜내려 노력하셨고, 예술가로서도 많은 것을 이룬 분이었다. ‘휘트니 비엔날레’(미국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리는 세계 3대 비엔날레 가운데 하나)의 ‘영 아메리카’ 행사에 네 번이나 초대됐다. 백남준 이전 우리나라 화가 최초로 미국에서 성공 가도를 달렸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아와서 귀국전을 열 때 신문기사 제목은 ‘간송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1964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와 보화각을 정리하고 미술관을 출범하지 않았으면, 미술관과 보성중고교도 지금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故) 전성우 이사장은 귀국 뒤 이화여대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잠시 일했다가 쭉 보성고 교장, 이사장을 맡았다. 학교와 미술관 업무에 전념하느라 이후 작가로서 활동은 방학 때 동인 그룹전에 작품을 내는 정도에 머물렀다고 한다. 우리는 간송미술관을 얻은 대신, 전도유망했던 한국인 화가 한명을 잃은 셈이다. 전 관장은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자’ 간송의 손자라는 게 부담이 되느냐고 묻자 “안 되겠습니까” 하며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할아버지 이야기는?
“집안에서는 굉장히 자상하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자랄 적 화가의 꿈을 꾸는 것을 알고 할아버지가 유화 화구 세트를 사 왔다. 한데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다가 뒷정리를 안 하고 공을 차다 왔다. 유화는 뒷정리를 안 하면 물감이고 붓이고 다시 쓸 수가 없다.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가 다 정리해 놓으시고,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고 한다. 그 뒤로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조수를 두지 않고 직접 붓을 정리하셨다.”
―간송이 남긴 ‘무가지보’는 무엇인가.
“할아버지가 문화재와 보성학교를 가족을 위해 남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문화가 빼어난 민족은 잠시 다른 민족에게 복속될 수는 있지만 반드시 빛을 되찾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언어까지 빼앗으며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 했던 일제로부터 독립한 이후를 준비했던 거다. 할아버지의 유산은 문화보국(文化保國)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전 관장은 “간송이 중국 일본과 확연히 구분되면서 우리 문화 황금기를 보여주는 것을 근간으로 수집해 지켜낸 것을 봐도 일제가 파괴한 우리 문화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보성고 행정실장이기도 한 전 관장은 “3·1운동 당시 중학생이던 할아버지는 종로에서 보성학교 학생들이 전면에 나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는 것을 다 봤다”며 간송이 총독부의 탄압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보성학교를 인수한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우수성, 문화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평생을 노력한 간송의 정신을 잇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숙부(전영우 이사장)가 한 일도, 내가 할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전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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