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나가와현 하다노시에 사는 재테크 블로거 곤다 다카시 씨(31)는 중학생이던 14세 때부터 이런 생각으로 해외 투자를 시작했다. 당시에도 일본은 워낙 저금리여서 중학생조차 해외 투자에 눈을 떴던 것이다. 그는 게이오대 경제학부에 입학한 뒤에도 금융 관련 강의를 들으며 외환 투자에 몰입했다. 졸업 뒤엔 대기업 미쓰비시그룹에 들어가 급여의 80%가량을 미국 영국 홍콩 호주 주식에 넣었다. 투자에 집중하려 회사를 박차고 나왔지만 아쉬움이 전혀 없다. 다카시 씨는 “원래 있던 금융자산에 더해 요즘엔 배당 소득도 연간 400만 엔(약 4280만 원) 정도로 불었다”고 말했다.
금리, 성장률, 물가가 일찍이 꺾인 일본에선 20, 30대 젊은층도 해외 투자에 적극적인 편이다. 1990년대 수익률이 낮은 자국을 벗어나 해외 고수익 자산에 투자했던 ‘와타나베 부인’들을 보고 자랐기 때문일까. 다카시 씨 같은 ‘와타나베 주니어’들은 단순히 환 투자에 집중했던 수준을 넘어서 배당 소득까지 쏠쏠하게 챙길 정도로 진화했다.
경제 상황이 일본을 닮아가는 유럽에서도 ‘해외 투자족’들이 늘고 있다. 부모들은 저성장 기조가 길어질 것으로 보고 자녀에게 일찍이 주식 계좌를 만들어주며 해외 투자를 가르치고 있다.
○ 보수적인 독일에서도 “글로벌 투자 늘려”
일본, 유럽 등 금리가 마이너스이거나 0%대인 국가에선 투자자들이 경기가 비교적 좋은 미국이나 동남아의 주식 채권 부동산 등에 돈을 굴리고 있다. 일본에선 과거 신흥국 투자가 인기였지만 최근엔 안정적 투자처로 꼽히는 미국이나 고금리 선진국인 호주가 각광받고 있다. 지난달 31일 일본 현지에서 만난 미즈호은행의 마사키 만다이 매니저는 “예전엔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가 유행이었지만 요즘은 환율 불안 때문에 미국이나 호주 달러에 투자하는 상품이 인기”라고 설명했다.
보수적인 성향으로 유명한 독일 투자자들도 동유럽, 미국 등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독일의 전직 은행원인 A 씨(24)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러시아 펀드와 미국, 일본의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 중이다. 그는 “동유럽에서 각종 개발 사업이 많이 생길 예정이고, 미국은 유럽보다 경제가 건실하다”고 투자 배경을 얘기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재무컨설턴트로 일하는 프랑크 카스트너 씨(46)는 “요즘 저금리여서 은행 예금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 30대 중후반을 중심으로 많이들 상담하러 온다”며 “동남아 주식 투자나 안정적인 채권 투자를 권유하고 있다”고 했다.
○ “저성장 길어진다” 자녀에게도 투자비법 전수
이런 해외투자 트렌드는 미래 세대엔 더욱 익숙해질 것으로 보인다. 부모들이 저금리, 저성장의 경제 환경에서 해외 투자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깨닫고 노하우를 자녀에게 전수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핀테크 서비스들이 다양해지며 쉽고 빠르게 해외 자산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3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만난 군고르 옌스 씨는 구글을 비롯한 미국 정보기술(IT)주에 주로 투자하는데, 요즘엔 배당주인 수도시설 관련 주식에도 돈을 굴리고 있다. 옌스 씨는 “두 살배기 딸 명의로 계좌를 만들어서 주식을 일정액씩 사서 넣어주고 있다”며 “앞으로 딸이 크면 자연히 주식 포트폴리오에 관심을 갖게 할 것”이라며 웃었다.
각국 투자자들은 해외 투자 외에도 저마다 쥐어짜낸 재테크 아이디어로 저성장, 저금리에 맞서 자산을 지키고 있었다. 일본에선 타지에 살면서도 고향에 돈을 기부하고 절세 효과를 볼 수 있는 ‘고향납세 테크’가 유행이다. 미즈호 은행 관계자는 “고향에 기부금을 내면 주민세를 경감받는 등 세제 혜택도 누리고, 지역이 답례품으로 제공하는 특산물 등도 챙길 수 있다”고 소개했다. 금융 선진국 영국에선 환테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핀테크 서비스가 대중화됐다. 런던의 한 헤지펀드 운용사에 다니는 B 씨(32)는 “핀테크 서비스 ‘레볼루트’는 실시간 환율을 반영해 외환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잘만 이용하면 환전 이익이 상당하다”고 소개했다.
프랑스에선 ‘에어비앤비 재테크’가 인기다. 임대용 주택을 매입해 에어비앤비를 통해 집을 빌려주고 월세를 받는 것이다. 프랑스 서북부 도시 캉에 사는 40대 미술작가 C 씨는 대출을 받아 허름한 스튜디오를 구입해 임대와 매매를 하며 수익을 올린다. 대출 이자는 집에서 나온 월세로 충당한다. 그는 “월급은 오르지 않고 금리는 낮다 보니 프랑스에서 임대업으로 재테크를 하려는 사람이 많다”며 “파리는 더욱 이런 경향이 심하다”고 말했다.
▼ “수익률보다 안정성 우선” 日중장년층은 국채 선호 ▼
장기불황 경험… 원금 보호 중시 0%대 금리에도 꾸준히 투자… 獨-佛-스위스 등도 국채수요 많아
“저는 항상 국채에 주로 투자합니다. 굳이 위험한 투자로 내 노후 종잣돈을 까먹고 싶지 않으니까요.”
지난달 28일 일본 도쿄 히비야 인근에서 만난 오야마 씨(59)가 항상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빼놓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국의 국채다. 그는 미즈호그룹의 개인용 국채 판매 광고문을 직접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연 0.05%이지만 1000만 엔(약 1억700만 원)의 거금을 투자하면 4만 엔(43만 원)의 ‘보너스 포인트’를 증권사에서 지급한다는 것. 보너스 포인트를 감안하면 약 0.45%의 투자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셈이다.
장기화된 저금리 국면에도 일본 중장년 투자자들의 일본 국채와 엔화를 향한 뿌리 깊은 믿음은 여전하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일본 국채(총 1041조 엔)의 외국인 보유분은 7.4%다. 나머지 92.6%는 일본 중앙은행, 시중은행, 보험사 등이 나눠 갖고 있다. 가계에서 보유한 금액도 13조3000억 엔(약 142조3100억 원)에 이른다. 국채를 찾는 이들이 꾸준하기 때문에 미즈호뿐만 아니라 대다수 일본 금융회사에서는 주요 상품 중 하나로 국채를 취급하고 ‘보너스 포인트’ 같은 이벤트도 경쟁적으로 한다.
국채에 대한 관심은 일본뿐만이 아니다. 올 들어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의 국채 금리는 오랜 기간 마이너스(―) 상태였다. 금리가 낮다는 것은 국채 수요가 꾸준하다는 뜻으로, 이는 향후 경기 전망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자가 보잘것없거나, 심지어 이자 없이 수수료를 토해내더라도 원금을 지켜야겠다는 심리가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깔려 있는 것이다. 20년 이상 장기 불황을 생생하게 경험한 일본의 중장년층은 이런 경향이 특히 심하다. 이들은 “높은 수익률을 노리기보다는 안정성을 더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일본을 비롯한 주요국 통화는 경기가 흔들릴 때마다 미국 달러화와 함께 안전자산의 기능을 하고 있다. 올해도 미중 무역분쟁 등으로 국제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자 엔화로 자금이 몰리고 있다. 이 때문에 엔화 가치는 연초 대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3월 초까지만 해도 유로당 127엔이었던 것이 현재 120엔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한국에서도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커지면서 엔화 예금이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엔화 예금은 전월 말보다 1억4000만 달러 늘어난 44억8000만 달러로 집계됐다.
:: 와타나베 부인 ::
자국의 저금리를 피해 해외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일본 개인투자자를 가리키는 말. 와타나베는 우리나라의 김씨처럼 일본에서 매우 흔한 성(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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