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한 이야기인데 우리 대학 건물이 낡아서 물이 샜어요. 예산 잡힌 게 없어 한동안 개보수도 못했죠.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라고요? 대학이 붕괴 직전인데….”
이름조차 못 들어본 어느 산골짜기 대학의 이야기가 아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알 법한 수도권 4년제 A대학의 교수가 전한 말이다. 전 세계 대학이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인공지능(AI)과 같은 첨단산업을 이끌 인재 육성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당장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게 상아탑의 현주소라고 대학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시발점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년 급격히 오르는 대학등록금에 부담을 느낀 학생과 학부모들의 원성이 커지자 정부는 ‘반값 등록금’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등록금을 올리면 재정지원 사업 선정이나 국가 장학금 지급에 불이익을 주는 식으로 등록금 인상을 억제했다.
그렇게 등록금을 동결한 지 11년째. 대학가에선 “다 죽겠다”는 곡소리가 나오고 있다. 등록금 동결로 인한 재정난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급기야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는 최근 “대학교육의 내실화와 경쟁력 제고를 위해 2020학년도부터 법정 인상률 범위 안에서 등록금 자율 책정권을 행사하겠다”고 선전포고까지 했다.
● ‘이게 21세기 대학이라고?’
대학이 어렵다는 말은 쉽게 와 닿지 않는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지방은 몰라도 대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이른바 ‘인서울’ 대학마저 재정난에 허덕인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각 대학에서 보직교수 이상을 맡고 있는 교원들에게 “대학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것이냐”고 묻자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1. 시대 흐름에 맞춰 공학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교원 스카우트에 나섰다. 현업에서 기술 책임자를 맡고 있는 전문가들을 영입하려 했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반 토막도 안 되는 연봉을 받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몸값을 인정해 더 올려주고 싶어도 재정이 여의치 않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에게 지식과 실무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다.(서울 B대 대외협력처장)
#2. 대학생의 특권 중 하나가 학교의 기관 아이디를 이용해 학회지를 부담 없이 읽고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11년째 등록금이 동결되는 동안 저널 이용료가 크게 올라 학교마다 일부 구독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아는 교수들끼리 “그쪽 학교는 ○○학회지 구독하느냐”고 수소문한 뒤 복사해서 학생들에게 배포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서울 C대 사범대 교수)
#3. 대학 건물이 아무리 길어야 60년을 못 간다. 매년 1억2000만 원 정도는 건물의 ‘감가상각’에 대비한 적립금을 쌓아야 한다. 시간이 흘러 학교시설을 개보수할 때 필요한 돈을 모아야 한다. 하지만 이조차도 하지 못한다. 매년 예산 중 90%가 인건비나 전기료 등 꼭 지출돼야 하는 경직성 비용인데 건물 고칠 비용까지 적립할 여유가 없어서다.(지방 D사립대 교수)
답변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원인은 하나로 설명된다. 대학 재정이 바짝 메말랐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사립대 관계자는 “지난해엔 거의 200억 원 적자가 나서 적립금으로 메웠고, 올해도 176억 원 적자예산을 편성해야 했다”며 “대학이 돈 쌓아두고 우는 소리 한다는 오해를 받는 게 답답하다”고 말했다.
● 학원보다 싼 등록금…추락하는 경쟁력
10년 넘게 이어진 등록금 동결은 대학 재정난으로 이어졌고, 결국 대학경쟁력 하락이라는 악순환을 불러왔다는 게 대학 관계자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실제로 공신력 있는 다양한 평가지표가 이를 보여준다.
국가경쟁력을 매년 평가하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 따르면 한국의 대학교육경쟁력은 2011년엔 59개국 중 39위였지만, 추락을 거듭한 끝에 2017년엔 63개국 중에서 53위가 됐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발표한 결과도 유사하다. ‘고등교육 및 훈련’ 분야의 국가경쟁력 순위를 살펴보면 2011년 한국은 142개국 중 17위였지만, 2017년엔 137개국 중 25위로 떨어졌다.
김병주 영남대 교육학과 교수는 “재정이 부족해 투자가 소홀해진다면 교육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며 “선진국일수록 초중등보다는 대학 교육의 투자 비중이 큰데, 한국은 정반대”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사립대 관계자는 “인건비, 전기료 등 학교 유지를 위한 경직성 경비가 올랐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등록금 동결이 아니라 30% 줄어든 셈”이라고 말했다. 2019년 기준 평균 대학등록금은 연간 670만6200원이다. 2023년부터는 입학금도 전면 폐지돼 학생과 학부모들의 부담은 더욱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전히 대학등록금은 학부모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스러운 수준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학생 윤모 씨(26)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자녀인데, 매 학기 400만 원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며 “이보다 더 인상된다면 부모님께 큰 짐을 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자금 대출을 통해 대학을 다녔던 정모 씨(31)는 “졸업 직후 수천만 원의 빚이 쌓여 있었는데 언제 다 청산할지 막막했다”며 “취업도 어려운데 등록금까지 오르면 청년들은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고 말했다.
반론도 있다. 월 100만 원이 넘는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등 사교육에 쓰는 돈을 생각하면 한국의 등록금은 절대 높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대학교수는 “우리 학교 문과대 등록금이 학기당 300만 원대인데, 이는 중학생의 6개월간 영어학원비보다도 적은 액수”라며 “비싼 영어유치원이나 사립초교 비용에도 못 미치는데 비싸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학생들 중에서도 이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이 있다. 2012년 반값 등록금을 최초로 도입했던 서울시립대 재학생들은 2016년 박원순 서울시장이 ‘등록금 면제’를 추진하자 오히려 반대하고 나섰다. 반값 등록금 시행 약 3년 만에 강의 수가 300개 가까이 줄어드는 등 교육서비스의 질이 떨어졌다는 불만 탓이다. 교육계에선 “당장은 수요자의 부담이 줄어도 결과적으로 수요자에게 피해가 돌아온다는 걸 보여준 사례”라는 평가가 나왔다.
● “등록금 동결은 한시적 조치…누가 풀겠나”
정작 이 제도를 설계하고 지금까지 이끌어 온 교육부는 팔짱을 낀 모습이다. 15일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측에서 내년부터 등록금 자율 책정권을 행사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했을 때에도 교육부 측은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금을 높여 어려움을 해소하겠다”는 입장만 밝혔다. 엉킨 실타래처럼 남아 있는 ‘등록금 동결’은 손대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이다.
2008년 이 정책의 도입 과정을 지켜본 한 고위공무원은 “당시에는 3, 4년간 등록금이 계속 올라 사회적 문제가 컸다. 그래서 한 5년에 걸쳐 이를 상쇄하겠다는 ‘한시적 조치’로 생각하고 추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대로라면 2009년 시작된 등록금 동결정책은 늦어도 2014년에 종료됐어야 한다. 그는 “넉넉히 잡아도 5년 정도 등록금을 동결하면 학생들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들 것이고, 이후 풀어주면 될 것으로 내다봤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제 와서 누군가 총대를 메고 등록금 동결정책을 폐지하기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게 문제다.
지금도 법적으로는 고등교육법 제11조 제7항에 따라 대학이 직전 3개 연도의 평균 소비자 물가상승률의 1.5배 이하 수준에서 등록금을 올리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 등록금을 올릴 경우 교육부의 각종 재정지원 사업 및 국가장학금 지급에서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선뜻 등록금을 올리지 못할 뿐이다. 한 지방대 관계자는 “차라리 국가장학금을 지원받는 것을 포기하더라도 등록금 올리자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그만큼 정부의 ‘당근’으로 버티기도 힘든 상황까지 왔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영철 서강대 경제학과 부교수는 지난해 발표한 ‘등록금 동결정책과 고등교육의 재정위기’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정부의 재정 투입이 수반되지 않는 등록금 인상 억제는 필연적으로 교육경쟁력 후퇴로 이어진다”며 “과감한 재정지원이 어렵다면 등록금 동결정책 자체를 즉각 폐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송기창 숙명여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고등교육법에 명시된 수준(3개년 물가상승률의 1.5배 이내)에서라도 등록금을 인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대다수 사립대가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대학총장들까지 나서 ‘정책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 상황에서 ‘등록금 동결’ 이슈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정치적 문제까지 된 상황에서 과연 꼬인 실타래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할지, 등록금을 다시 올리기 시작한다면 그 적정 수준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시점이다. 특히 교육부는 정치적 부담이 따르더라도 한국 고등교육의 미래를 위해 지난 11년의 역사를 돌아보고 최선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