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대전의 한 호텔 강연장. 김강호(가명·57) 씨는 책상에 놓인 이력서를 30분째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력서에 이름과 주소는 썼지만 경력란은 비워 둔 채였다. 김 씨는 올해 9월까지 설렁탕 가게 사장이었다. 그런데 매출이 줄어 석 달 연속 가게 월세를 내지 못하자 폐업을 결심했다. 김 씨는 지난해 최저임금이 16.4% 오른 뒤 종업원 3명을 내보냈다. 그래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강연장에선 김 씨처럼 폐업한 자영업자 30여 명이 이력서를 쓰고 있었다. 대부분 50, 60대였다. 이들은 본격적인 구직에 앞서 이력서 작성법을 익히고 있었다. 본보 기자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재기 교육’ 장소를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구직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각종 교육장을 찾는 ‘폐업 자영업자’들이 늘고 있다. 경기 불황으로 가게 문을 닫는 자영업자가 많아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올 1월부터 10월까지 진흥공단의 ‘재기 교육’을 들은 폐업 자영업자만 해도 8432명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교육을 들은 폐업 자영업자(4026명)의 2배가 넘는다. 교육을 받은 폐업 자영업자들에게 지급된 수당도 30억여 원 수준으로 역대 가장 많다.
○ 재취업 막막한 자영업자들
25년간 서점을 운영해온 신모 씨(48)는 이력서를 작성하다가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신 씨는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떤 일이든 괜찮다”며 “그런데 ‘사장’ 경력뿐이라 어떤 회사에 지원해야 합격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1994년 대전 시내에 서점을 차린 신 씨는 올해 폐업을 결심했다. 2000년대 초반엔 한 해 수익이 8000만 원 수준이었지만 이후 계속 줄어 올해는 4인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려앉았다.
취업이 가능한 일자리를 안내받은 뒤 실망하는 자영업자들의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강연자로 나선 취업컨설팅 강사는 “현실적으로 폐업한 50, 60대가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공무직”이라며 “주차관리 요원이나 분리수거 담당자 같은 일자리가 있다”고 했다. 이런 설명을 들은 윤모 씨(62)는 “급여나 근로 환경은 안 따지고 어떤 일자리라도 구하겠다고 생각해왔다”며 “그래도 이런 얘기를 들으니 조금 씁쓸하다”고 말했다. ○ “어차피 취업 못 할 것” 빚내서 다시 자영업
일자리를 구해 보려고 강연장까지 찾아왔지만 구직을 단념하고 돌아가는 자영업자들도 있었다. 살수차 운행업체를 차렸다가 4년 만인 올 8월 폐업한 최연식 씨(58)는 “내가 사장을 해봐서 이 나이엔 취업 못 한다는 걸 안다”며 “제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 음식점을 차리려고 한다. 이번엔 잘되기를 바라야 한다”고 했다.
올해 폐업 자영업자는 1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관측된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83만884명의 개인사업자가 폐업 신고를 했다. 국세청은 올해 폐업 신고 건수를 아직 발표하지 않았다. 그런데 올 한 해 폐업 관련 상담을 한 자영업자 수가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많아졌다. 올 1∼10월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1만706건의 폐업 상담을 했다. 2018년 한 해 상담 건수(4132건)의 2.6배다. 민간 컨설팅업체 ‘폐업119’가 올 1∼8월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한 폐업 상담은 1050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76건)의 2.2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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