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1932∼2006)의 이름을 내건 국내 미술관들에는 ‘슬픈’ 비밀이 있다. 그의 작품 저작권자인 백남준 에스테이트(the Nam June Paik Estate)와 소통이 거의 끊겼다는 사실이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는 백남준 회고전이 한창이지만 국내 백남준 관련 어떤 미술관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 전시는 다음 달 9일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 시카고 현대미술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미술관, 싱가포르 국립현대미술관을 순회하지만 국내에서는 전시 계획이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경기 용인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는 작가가 살아있을 때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이후 국내 기관과 저작권자간 일련의 갈등 이후 백남준 에스테이트와 과거만큼 원활한 소통을 못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산하로 2017년 문을 연 백남준기념관 역시 백남준 에스테이트와는 관련이 없다. 우리 미술관들은 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 희박한 저작권 개념
예술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작품 복원이나 다른 용도로 쓸 때에도 작가나 저작권 보유자와 협의해야 한다. 임의로 변경된 작품은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작가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작가미술관은 해당 작품의 저작권자나 관련 재단이 운영하는 게 일반적이다. 일본계 미국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1904∼1988)의 이름을 내건 미국 일본의 작가미술관 모두 재단이 운영한다.
국내 작가미술관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많이 운영한다. 미술가의 명성을 행정에 이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백남준의 장조카이자 저작권 보유자인 켄 백 하쿠다는 2006년 백남준아트센터 기공식에 참석해 달라고 경기도로부터 요청을 받자 “경기도가 (백남준의) 49재를 협의도 없이 진행하는 등 미술관을 정치적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다”며 불참했다. 2011년 문화체육부가 백남준 기념사업을 추진하자 백남준 에스테이트는 “사전 협의 없이 추진해 무척 당황스럽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저작권 개념이 희박해 벌어진 ‘사건’은 최근에도 있었다. 지난달 미국의 저명한 조각가 알렉산더 콜더의 복제품이 승인도 받지 않고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며 콜더 재단이 공식 유감을 표했다. 그러자 해당 미술관은 문제된 ‘재현물’을 철거했다.
이 같은 문제는 결국 국내 관객의 피해로 귀결된다. 국내 미술관에 대한 불신이 해외에서 쌓이면 세계적 명성을 지닌 작가의 전시를 국내에서 관람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 관객 중심의 작가미술관 만들어야
세상을 떠난 작가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작가미술관이 해당 작가의 명성을 이어가려면 과거 작품에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피츠버그 앤디 워홀 미술관은 관람객의 65%가 워홀을 잘 알지 못한다는 데서 착안해 그의 생애와 시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생애주기별로 작품을 정리하고 다양한 시각장치를 활용해 전시관을 꾸몄다.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다루는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은 소장품과 기록을 꾸준히 연구해 작가 이름을 알리고 있다. 오키프를 중심으로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예술가들을 엮어 현대적 맥락을 제공해 작가를 잊지 않도록 한다.
전문가들은 국내 작가미술관도 작가를 일종의 문화상품으로만 보는 근시안적 시각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은 “작가 측과 원활하게 협의해 ‘카탈로그 레조네(전작 도록·全作 圖錄)’ 제작부터 공익적 차원의 기록 정리를 해야 한다”며 “학술 연구를 토대로 작품을 국제적 인류문화유산으로 만드는 장기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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