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해요, 시간이 없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아트 컬래버레이션(협업)을 할 수 있을까요?”
2016년 한류 박람회 참가를 앞둔 뷰티 화장품 기업이 KOTRA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던 ‘그림 읽어주는 여자’ 한젬마 씨를 찾아왔다. 그가 가져온 제품 샘플에는 유명 한류스타 배우와 미키마우스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유명 스타와 캐릭터는 저작권료가 너무 비싸 사용할 수 없었다. 한 씨는 ‘명화(名畵)’에서 답을 찾았다.
“화장품이나 가방을 제조하는 분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반고흐 그림을 활용할 때는 저작권료가 비쌀 거라고 지레짐작하세요. 그런데 기업인들에게 사후 70년이 넘은 작가의 작품은 저작권료가 공짜라는 말을 해주면, 속된 말로 눈이 튀어나오게 좋아합니다.”
그는 이 회사에 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비롯한 여성들의 초상화, 꽃그림 명화들을 추천해주었고, 케이스를 고급화한 이 화장품은 대박이 났다. 아트 컬래버레이션의 효과를 맛본 이 회사는 젊은 세대를 공략하기 위해 현대작가와의 협업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팝아트, 일러스트, 캐릭터 등으로 커버가 바뀔 때마다 선호 계층이 바뀌었다. 내용물은 바뀌지 않았지만 포장에 따라 20대 ‘젊은 언니 같은 느낌’에서 30, 40대 ‘청담동 며느리 같은 느낌’까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화장품으로 변신했다.
“지금은 ‘콜라보(컬래버레이션)’라는 말이 대중화됐지만 불과 5, 6년 전만 해도 생소했죠. 대기업은 사회공헌사업(CSR) 차원에서 예술을 후원하는 메세나를 했지만, 중소기업은 예술이란 단어만 나오면 큰돈이 들어가는 일인 줄 알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런데 아트를 활용해 기업이 수익을 얻고, 홍보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한 씨는 1990년대 후반부터 방송프로그램 진행자, 작가, 칼럼니스트, 비즈니스 분야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해왔다. 그의 인생 자체가 컬래버레이션이었던 셈. 그는 “대중들에겐 사랑받았지만 미술계 내부에서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며 “20년이 넘게 활동해오다 보니 예술과 세상을 이어주는 ‘연결자’로서의 정체성을 나 스스로도 찾게 됐다”고 말했다.
15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있는 그의 아틀리에를 찾았을 때 흡사 철물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수많은 종류의 못과 경첩, 파이프, 플러그 등이 쌓여 있었다. 그는 1995년부터 연결 도구인 못, 지퍼, 경첩, 똑딱단추, 옷핀 등의 오브제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문’이 아닌 ‘경첩’과 같은 연결하는 인간으로서의 성찰이 담긴 작업이다. 작가로서 한 씨는 삼성주택문화관을 설계하고, 대웅제약에 ‘못사람’ 조형물을 설치하는 협업을 하기도 했다.
연결자로서의 재능이 가장 빛난 것은 2012년부터 5년간 KOTRA에서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려는 기업과 예술의 만남을 주선해주는 일을 맡았을 때이다. 이 경험을 그는 지난해 ‘아트 콜라보 수업’(비즈니스북스)이라는 책으로 출간했고, 책은 경제경영서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컬래버레이션은 루이뷔통과 일본의 현대미술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 앤디 워홀과 앱솔루트 보드카, 제프 쿤스와 BMW의 아트카, LG그룹의 명화 캠페인, 현대카드의 갤러리카드 등 국내외 명품 브랜드들이 경쟁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작업이다. 한 씨는 “KOTRA에 찾아온 기업과 함께 제품을 보면서 상담하다 보면 어떤 아티스트의 작품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그림 읽어주는 여자’로 현실의 삶과 미술을 연결해서 해설해왔던 덕분에 생긴 재능이다.
그는 유럽시장에 생들깨기름을 판매하려는 한 중소기업에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을 라벨에 장식할 것을 추천했다. 서양인에게 익숙한 밀레의 명화는 오랜 전통과 신뢰감, 친환경 이미지를 주었고, 러시아 업체와 20만 달러어치 수출계약을 맺는 성과를 거뒀다. 두통약 펜잘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워 부인’ 초상화 그림으로 박스를 포장해 대박이 났고, 몸매 관리를 해주는 의료기기에는 앵그르의 비너스 그림을 새겨 넣어 국제박람회에서 바이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코카콜라, 루이뷔통, BMW, 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들도 신진 아티스트와 협업한 ‘리미티드 에디션(한정판)’을 내놓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변화의 노력이죠. 리미티드 에디션은 희소성 때문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인기를 얻으면서 제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엄청난 홍보효과를 줍니다.”
한 씨는 “전동칫솔, 스팀다리미 등이 모두 이종 간의 교배로 탄생한 히트상품”이라며 “협업은 예상치 못한 이종 간에 이뤄질 때 효과가 배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새우깡 티셔츠’ ‘바나나맛우유 화장품’ ‘메로나 칫솔’과 같이 식품기업이 패션과 화장품과 같은 기상천외한 조합으로 협업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꼽은 컬래버레이션의 기본 원칙은 ‘수평적 동행’이다. 한쪽이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콜라주’(오려 붙이기)가 될 뿐이며, 브랜드와 아티스트가 서로 윈윈하는 파트너 관계로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어야 협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2018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팝가수 비욘세가 협업을 한 적이 있어요. 루브르박물관이 비욘세의 뮤직비디오를 찍게 허락한 것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나리자 그림에만 몰려드는 현상을 타개할 묘수가 됐어요. 비욘세는 세계적 명소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기회를 얻었고, 루브르는 비욘세가 촬영한 17점의 명화를 찾아 투어 하는 새로운 관람 동선을 홍보할 수 있게 됐죠. 1억9000만 회가 넘은 유튜브 조회수 덕분에 2018년 루브르는 처음으로 관람객 1000만 명을 넘겼습니다.”
한 씨는 앞으로 고령사회를 맞아 휠체어와 지팡이, 환자복에 패션을 도입한 ‘메디컬 컬래버레이션’을 구상 중이다. “아트는 소비가 아니라 치유의 역할도 합니다. 허리를 감싸주는 복대가 꼭 검은색이어야 할까요? 누구나 병원에 입원할 수도, 잠시 휠체어를 탈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환자복이나 휠체어에 감각적인 컬러와 패션이 접목된다면 우울해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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