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은 세계적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1932∼2006·사진)의 14주기입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서 세계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그의 유해는 생전 그가 주로 활동했던 독일과 미국에 분산 안치돼 있으며, 일부는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도 안치돼 있습니다.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 전위예술(아방가르드)을 추구했던 백남준은 여러 분야의 예술가와 함께 플럭서스(fluxus)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플럭서스는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용어입니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미술 분야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음악, 이벤트와 공연, 출판물 등에서 폭넓게 사용되면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일본에서 음악사와 미술사를 공부한 백남준은 독일에서 아방가르드 작곡가인 존 케이지(1912∼1992)를 만나면서 그의 영향으로 플럭서스 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합니다. 퍼포먼스 형식이 결합된 새로운 예술을 지향했던 그가 선택한 것은 텔레비전입니다. 그의 첫 개인전은 1963년 독일에서 ‘음악-전자 텔레비전’이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당시 열두 대의 텔레비전 세트를 화랑에 배치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전시회는 그의 비디오 아트의 방향을 가를 만큼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백남준은 수많은 작품을 통해 첨단 기술 매체와 인간이 어떻게 공존하고 소통할지를 고민했습니다. 텔레비전이 바보상자 취급을 받던 시기에 미래에 닥칠 현실을 재구성해 독창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상상력과 통찰력이 뛰어난 백남준에게는 ‘혁신적’ ‘선구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백남준은 1993년 동아일보(9월 26일자)에 ‘재미없으면 예술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비디오 예술이란 예술이 고급화되던 당시 정서에 반해 만인이 즐겨 보는 대중매체를 예술 형식으로 선택한 예술 깡패”라고 밝히며 그가 가진 예술관의 단면을 드러냈습니다.
현재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대규모로 열리고 있습니다. ‘로봇 K-456’(1964년) ‘TV부처’(1974년) 등 각국에 흩어진 대표작 200여 점을 엄선했다고 합니다. 다음 달 폐막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미국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 싱가포르 등에서 순회전이 계획돼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전시 계획은 없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 아카이브전’을 추진하는 대안을 발표했습니다. 친필 편지, 도록, 포스터, 사진 등 백남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물품이나 작품, 전시 등과 관련된 각종 기록물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백남준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다다익선’(1988년)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지 못하는 것은 아쉽습니다.
백남준이 태어난 한국에서 회고전을 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백남준의 저작권을 승계한 맏조카 켄 백 하쿠타(69·한국명 백건)와 한국 미술계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는 최근 한국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의 미술인들이 백남준을 이용하려는 욕망이 크다”며 우리 미술계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백남준이 남긴 소통과 공존의 메시지처럼 한국 미술계와 저작권자 간의 소통으로 신뢰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번 기회에 우리 미술계의 국제적 역량과 네트워크를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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