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참변(간도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외부의 현장 조사를 막기 위해 기독교장로회 선교사에게도 “현장에 가면 죽여 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간도출병사’에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1920년 10월 31일 장암동 참변을 조사한 푸트(W R Foote) 선교사는 다른 현장을 조사하러 가기 위해 그해 11월 2일 간도 용정촌에서 병참사령관 쓰쓰이(筒井) 소좌와 만났다. 일본군이 장악한 도로의 통행증을 요청했지만 답변은 이랬다.
“병졸이 귀하에게 하는 행위에 대해 나는 책임질 수 없다. 귀하는 …사살 당할 위해에 접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우리 병졸 중에는 인민의 불량(不良) 계급에 속하는 자도 일부 있으므로…즉, 만에 하나 귀하가 사살 당할 경우에는 많은 문제가 야기되며….”
국제 여론 때문에 일본군이 중요시하는 서양인 선교사에게도 이렇게 대응했으니 조선인 기자에게는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 창간기자이자 논설기자로 간도참변을 취재하러 떠났다가 현지에서 피살된 장덕준 선생(1892∼1920·건국훈장 독립장·사진)은 더 센 협박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신문은 그의 최후에 관해 “밤중이 되어 …일본군은 말(馬)까지 가지고 다시 와서 가자고 강요하여 하는 수 없이 따라간 것인데 그 후로는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은 장덕준을 미워하고 기피하여 그날 밤 밖으로 유인하여 암살한 것이 틀림없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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