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 뒤에 숨기고, 경매로 세탁… 문화재 범죄 ‘007영화’ 뺨친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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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히는 문화재 절도-은닉 세계

문화재 범죄는 나날이 지능화된다. [1] 5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권도 동계문집 목판 반환식’에서 되찾은 목판을 들고 있는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 [2] 1994년경 도난당했다가 지난해 회수한 보물 ‘만국전도’. [3] 안평대군의 글씨로 2001년 도난당해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는 국보 ‘소원화개첩’. 문화재청 제공·게티이미지코리아
문화재 범죄는 나날이 지능화된다. [1] 5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권도 동계문집 목판 반환식’에서 되찾은 목판을 들고 있는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 [2] 1994년경 도난당했다가 지난해 회수한 보물 ‘만국전도’. [3] 안평대군의 글씨로 2001년 도난당해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는 국보 ‘소원화개첩’. 문화재청 제공·게티이미지코리아
‘물컹.’ 왜 ‘바스락’도 아니고 물컹인가. 지난해 봄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40)은 압수수색하던 집에서 침대 밑에 손을 넣었다가 예상치 못한 감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색을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난 시점. 막노동하러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던 문화재 은닉범이 침대 아래 높이 30cm도 안 되는 공간에서 욕설을 내뱉으며 기어 나왔다.

범인을 추궁한 결과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의 벽과 벽지 틈에서 국내 현존하는 서양식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앞선 보물 ‘만국전도(萬國全圖)’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문중에서 보관해 오다 1994년경 도난당한 물건이다.

앞서 전국을 돌며 탐문하던 단속반에 지난해 초 만국전도가 매물로 나왔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단속반은 매매업자 두어 명을 추적한 끝에 만국전도를 가지고 있다는 범인이 누군지 확인했다. 문제는 ‘범인이 순순히 이 지도를 내놓을 것인가’였다. 최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한 반장은 “문화재 도난 사건은 도난품을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다른 사건과 비교가 안 된다. 이 때문에 절도, 은닉 혐의자들과의 기 싸움도 심하다”고 말했다. 범인도 처음에는 “내가 가진 건 보물이 아니라 다른 지도”라고 주장했다. 단속반은 “무슨 헛소리냐. 얼른 가져오라”고 했지만 범인은 “(지도를) 태워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단속반이 설득과 회유를 거듭했지만 범인은 끝내 지도를 내놓지 않았다.

결국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아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압수수색에 나섰던 것. 침대 밑에서 나타난 범인은 뒤늦게 “한 반장님, 지금이라도 내놓으면 좀 봐줍니까”라고 물었다. 이미 범인의 차량 트렁크와 방에서 지도와 함께 도난당한 문중의 고서적 100여 권을 찾아낸 상황이었다.

도난당했던 조선 중기 문신 권도(1575∼1644)의 ‘동계문집’ 목판이 최근 회수된 일을 계기로 문화재 절도 범죄와 추적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1809년 간행된 이 목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교 책판’들과 비슷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사 결과 2016년 종중 장판각(藏板閣·인쇄용 책판을 보관하는 전각)에서 목판을 훔친 범인은 이 종중 사람으로 매매업자에게 1000만 원에 팔아넘겼다. 범행 동기는 ‘생활고’였다.

한 반장에 따르면 동계문집 절도범은 순진한 경우에 속한다. 문화재 사범은 대략 자금책(유통책)과 절도책, 판매책이 팀으로 움직인다. 자금책이 의뢰해 절도책이 유물을 훔쳐 오면 판매책을 거쳐 또 다른 매매업자나 수집가의 손으로 넘긴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대표적인 사례가 해저 문화재 도굴범이다. 자금책이 선박과 진흙을 빼는 장비를 임대하고 절도책의 숙박비 유류비 일당(日當) 등을 댄다. 현장에서는 선장과 잠수부, 조수가 일한다. 근래에는 아예 인근 양식장을 빌린다. 도굴한 도자기를 망에 담아 양식장 바닷물 속에 숨겨 놨다가 ‘고객’이 찾아오면 판매책이 늘어뜨린 끈을 감아올려 도자기를 보여준다.

도굴꾼들끼리도 속고 속인다. “어마어마한 보물이 잠들어 있으니 자금을 대면 건져 주겠다”며 자금책의 돈만 챙기고는 자취를 감추는 사기꾼도 있다. 2015년 충남 태안군 당암포구 앞바다에서 고려와 조선시대 도자기를 건져낸 일당은 자신의 몫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은 잠수부의 제보가 계기가 돼 붙잡을 수 있었다.

최근 문화재 범죄는 지능화, 음성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장물인 게 뻔한 불화(佛畵)를 화기(畵記)를 훼손한 채 경매에 내놔 마치 정상적인 물건인 양 세탁한다는 얘기다. 해외 밀반출 시도도 꾸준하다고 한다. 석물 같은 경우 수사망이 좁혀지는 데 압박을 느낀 절도·은닉범이 인적이 드문 도로가에 버려 놓고 공중전화로 위치를 통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정문화재는 ‘장물인 줄 모르고 샀다’고 해명해도 소용이 없다. 이른바 ‘선의 취득 배제’다. 비지정문화재는 도난신고가 됐는지,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는지를 확인해 형사처벌 여부를 따진다. 그와 무관하게 원소유자가 반환소송을 낼 수도 있다. 한 반장은 “선의의 구매자라면 최소한 사려는 물건이 장물은 아닌지 지역 박물관이나 문화재청 등에 확인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안에서 물려받은 문화재를 지키고자 한다면 “적어도 사진과 수량 기록을 남기고 가치가 있는 물건은 국공립 박물관에 기탁하는 게 좋다”고 덧붙였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재 도난#문화재 은닉#만국전도#동계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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