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최소화로 전환”… 흔들림없이 장기전 준비하는 방역수장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일 03시 00분


[코로나19 확산 비상]
정은경 질병본부장의 ‘사투 42일째’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 지난달 26일 코로나19 관련 브리핑을 준비하고 있다. 오송=뉴스1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 지난달 26일 코로나19 관련 브리핑을 준비하고 있다. 오송=뉴스1
“지역 사회 감염이 확산되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피해 최소화를 목적으로 하는 전략의 전환이 필요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첫 확진 환자가 발생한 지 42일째를 맞은 1일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코로나19 특성은 과거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나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와는 다른 양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확진자가 폭증하자 정부 방역전략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인한 것.

질병관리본부(질본)는 발병 초기 비교적 신속히 대응해 진단검사 물량을 하루 1만 건까지 확보했다. 이를 통해 신속하게 환자를 걸러내 격리 치료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지역 사회 전파를 막지는 못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여당 관계자와 보건당국 수장의 잇단 실언으로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정 본부장이 성실한 소통으로 신뢰감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확진자가 급증하는 국면에서 안정감 있는 태도로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 메르스 징계의 ‘아픔’ 딛고


올해 설 연휴를 불과 나흘 앞둔 1월 20일 국내 첫 확진 환자가 발생했다. 그전까지 중국 상황을 관망하던 보건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이날 정 본부장의 일성은 “원인불명 폐렴에 대해 확진검사를 신속히 수행하겠다”였다. 앞서 질본은 한국으로의 전파에 대비해 진단검사법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다.

새로운 진단검사법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19 검사에만 1, 2일이 걸렸다. 모든 코로나바이러스 유형에 대해 검사하는 ‘판코로나바이러스’ 검사법이 유일했기 때문. 검사기관도 18개 시도 보건환경연구원에 한정됐다. 질본은 의약품 긴급사용승인제를 통해 RT(실시간) PCR 검사법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검사 가능 물량을 하루 1만 건까지 대폭 확대할 수 있었다. 하루 검사 물량 기준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범정부 차원의 대응도 비교적 신속했다. 정부는 1월 3일 대응반을 꾸렸다.

초기 감염병 위기경보 상향도 비교적 빨랐다. 보건당국은 내국인 환자가 나온 설 연휴 이후 위기경보를 ‘주의’에서 ‘경계’로 격상했다. 첫 환자가 발생해 경보가 한 단계 격상된 지 일주일 만인 1월 27일이었다. 이런 대응 역시 정 본부장을 비롯한 질본의 자문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계에서는 정 본부장이 메르스 사태 당시 대책본부 현장점검반장으로 일하며 쌓은 실전 경험이 신속한 초동 대처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당시에도 정 본부장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지만 워낙 피해가 컸던 탓에 다른 담당자와 함께 정직(최종 결정은 감봉) 징계를 받았다. 의료계 인사들은 지금도 당시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이번에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가 많다.

서울대 의대 동문인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꼼꼼’ 그 자체다. 디테일에 강하고 성실한 사람이라 집에도 안 들어가고 일하는 것으로 안다”고 평했다. 한 의료계 인사는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도 유연하게 받아들여 대책에 적용한 걸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초기부터 위생수칙 준수를 당부한 점도 눈에 띄는 점이다. 정 본부장은 브리핑마다 기침 예절을 강조했다. 그가 브리핑 중간중간 보여준 옷소매, 팔꿈치 기침은 온라인상에서 캡처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방심 경계하면서 ‘국민 안심’ 강조



2월 들어서며 국내 확산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유입 지역도 일본, 싱가포르 등으로 다변화됐다. 정부는 2월 4일 입국 제한을 확대했다. 7일에는 코로나19 진단검사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을 넓혔다. 예상치 못한 환자들이 등장하면서 정부 방역대책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정 본부장은 아직 방역망 내에 있는 환자들이라며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진단검사 범위가 확대 시행된 7일 그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검사를 받을 필요는 없다. 의료진의 판단을 신뢰해 달라”고 국민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만일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검사 확대 이후 한동안 환자가 나오지 않았다. 일각에서 이제 ‘소강기’에 들어선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나왔다. 정 본부장은 12일 브리핑에서 “아직 정점을 찍고 감소 추세라고 판단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예의주시할 단계이지 변곡점이나 낙관 또는 비관할 상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은 환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구에서 확진된 29번 환자 등이다. 이들은 해외에 다녀온 적도 없고 기존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도 아니었다. 환자가 급증할 신호가 여럿 감지된 것이다.

○ 입국금지 논란 속에도 신중한 모습


지난달 18일 대구에서 31번 환자가 발생하며 코로나19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들어섰다. 지역 사회 곳곳에 퍼져 있던 숨은 환자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불과 이틀 만에 확진 환자가 34명으로 급증했다.

진작 입국 제한을 확대했어야 했다는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질본은 그때까지 ‘범부처 협의사안이다’라며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달 19일 브리핑에 나선 정 본부장은 “방역하는 입장에서 고위험군이 (국내에) 덜 들어오는 게 좋은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입국 제한 조치가 늦어진 데 따른 방역당국의 고충을 에둘러 이야기한 셈이다.

질본이 진작 정부에 입국 제한 확대를 요청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중앙방역대책본부의 지난달 25일 브리핑에서 정 본부장은 “초기에 주요 감염 지역인 후베이성에 대한 입국 차단 부분이 중요한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입국 제한이 제한적이었던 것은 내국인들의 입국이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들이 고려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방역을 위해 필요하지만 다른 사항들이 고려돼 입국 제한 확대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 최근 들어 방역 어려움 토로


대구와 신천지예수교(신천지) 신도 환자들이 드러나면서 환자 수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정 본부장은 23일 브리핑에서 “특정 환자, 특정 지역,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는 감염병 위기 상황에서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지역 사회 감염이 기정사실화하자 정부는 지난달 23일 위기경보를 가장 높은 ‘심각’ 단계로 상향했다. 질본 내 원인불명 폐렴 대응반이 꾸려진 지 51일, 경계 단계를 발령한 지는 27일 만이다.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신종플루) 이래로 감염병 심각 단계가 발령된 것은 처음이다.

지난달 24일 브리핑에서 정 본부장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타났다. 심각 단계에 들어서자 “머리 감을 시간도 아껴야 한다”며 머리를 자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1시간도 못 주무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이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1시간보다는 더 잔다”고 답했다. 직원들과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질문에는 “직원들 업무 부담이 크긴 하지만 잘 견디고 잘 진행하고 있다. 그 정도 답변 드리겠다”고 답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서울대 의대 83학번 동기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평소 주변 사람을 잘 챙기고 누나 같은 따뜻한 사람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폭증하는 환자 추이에 곤혹스러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 본부장은 26일 확진 환자가 1000명을 돌파한 날 브리핑에서 “한 달 정도 환자 발생 양상을 보니 감염력이 굉장히 강하고 전파 속도는 너무나 빠르다”며 방역의 어려움을 전했다.

이미지 image@donga.com·강동웅 기자

#코로나19#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질본#피해 최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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