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평등 [우아한 청년 발언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3일 14시 00분


카리브 해의 어느 마을에서 가난한 청년 플로렌티노가 어린 소녀 페르미나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페르미나는 엘리트인 우르비노 박사와 결혼한다. 플로렌티노는 페르미나를 잊지 못하고 51년 9개월 4일을 기다린다. 전염병의 시대 가운데 시간이 지나간다. 그리고 남편의 사후, 비로소 페르미나는 플로렌티노에게 마음을 연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줄거리다.

이렇게만 보면 어려움을 견뎌낸 헌신적 사랑이 이루어졌다는 낭만적인 소설 같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독자들을 착각에 빠지게 하는 ‘기만’의 방법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페르미나를 기다리는 51년 동안 플로렌티노는 자그마치 622명의 여자와 사랑을 했다. 이 중에는 자신보다 60세 어린 소녀와 동거한 경력도 있다. 늙은 그가 페르미나를 다시 만났을 때 느꼈던 설렘은 그녀의 매력이 아니라 놓쳤던 사랑의 아쉬움이 만들어낸 환상적 이미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인류 보편의 가치가 기만당하는 설정을 통해 사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마르케스가 담아낸 주제 중 하나다.

팬데믹의 세계적 위기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평등’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범죄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평등의 측면에서 우리가 우려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보건·복지정책의 실질적 평등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와 비슷하게, 겉으로 평등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평등이 아닐 수도 있다. 경기도의 재난기본소득이 특히 걱정된다.

경기도는 1300만 명에 달하는 도민들을 대상으로 소득과 관계없이 1인당 10만원의 ‘재난기본소득’을 지원하기로 했다. 3개월 후 소멸하는 지역화폐로 지급할 계획인데, “단기간 전액 소비를 통해 자영업자의 매출을 증대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3개월간 10만원은 상식적으로도 꽤 적은 돈이고, 코로나19로 감소한 도민의 소득을 보전하려는 의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말에 따르면 재난소득은 ‘소상공인을 중심으로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편’이다.

경제학적 논리에 따르면 재난소득의 정책적 효과는 심히 의심스럽다. 소비 진작 효과가 기대에 못 미칠 확률이 농후하다. 지역화폐와 같은 ‘쿠폰’을 받을 경우 사람들은 어차피 했을 소비를 지역화폐로 결제하는 대신, 그만큼의 현금을 저축하는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경향은 고소득층으로 갈수록 더 심화된다. 2015년 보고된 저소득층의 한계소비성향(새로 늘어난 소득 중 소비로 향하는 비율)은 0.47인데 비해, 고소득층은 0.29에 불과했다. 해석하면, 10만원이 추가로 생겼을 때 저소득층은 4만 7천원을 더 소비할 것이나 고소득층은 2만 9천원밖에 쓰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에게 동일한 소득을 주는 방안은, 저소득층에게 몰아주는 경우에 비해 더 효율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정부와 다른 광역지자체는 돈이 꼭 필요한 소득 하위 50~70%에게만 지원금을 지급한다. 재난소득은 이러한 저소득층 기본수당에 비해서 정책효과가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연구원은 산업연관표를 이용한 계산결과, 생산유발 효과 1조1천235억원, 부가가치유발 효과 6천223억원, 취업유발 효과 5천629억원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소비가 소득을 낳고 소득이 다시 소비를 낳는 경제적 선순환의 반복인, 승수효과의 가정을 통해 나온 결론이다. 그러나 고객이 지역화폐로 결제해도 업주는 현금으로 받게 된다. 경기도가 설정한 ‘자영업자 보호’라는 목적은 필경 영업중지(shut-down)를 막기 위한 것일 텐데, 업자들에게 수입이 생긴다면 이들은 소비보다는 임대료 등 생산비용으로 활용할 것이다. 그 돈을 받는 임대업자들은 일반적으로 막대한 부자들인데, 이들의 한계소비성향은 ‘고소득층’ 카테고리의 그것보다도 더 작을 것이다. 연구원의 계산처럼 승수효과가 이어지기 어려운 이유다. 재난소득은 경기부양의 측면에서 좋은 정책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재명 지사는 “고소득자를 정책에서 제외한다면 기본소득의 이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적 효과는 차치하고서라도, 부자를 차별하지 않겠다는 ‘평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난소득은 오히려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더 큰 문제가 있다.

재난소득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산업 내에서도 양극화가 발생할 수 있다. 한 가지 가설은 코로나19 와중에서 각 재화·서비스별로 수요의 소득탄력성이 상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소득이 일정비율만큼 늘어났을 때 수요가 증가하는 비율의 크기가 각 품목별로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사람들은 방역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음식점은 꺼리는 대신, 구매과정이 일시적인 편의점에서 소비할 것이다. 정책입안자의 기대대로 음식점 등의 매출이 증대되려면, 도민들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만약 이 때문에 새로운 감염사례가 발생한다면, 인구가 1300만 명에 달하는 경기도는 국가적 방역에 큰 피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또한 공적 자금을 투입한다면, 재난에 의한 피해가 큰 업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공평하다. 그리고 자영업자 중에서도 본인이 직접 건물을 갖고 있는 경우와 달리, 임대료를 내야 할 업자들에겐 코로나19가 더 힘겨울 것이다. 이들에 대한 대책은 정책적으로 차등되어야 하나, 경기도의 구상에 따르면 역시 현실화되기 어렵다. 소비자들이 이를 고려해 돈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돈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작 돈이 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정책이 불평등하게 작용할 위험성이 있는 가운데, 구태여 강행하는 경기도의 방침을 이해하기 어렵다. 경기도는 선별에 따른 행정비용 절감이라는 근거를 내세우고 있다. 2018년 전국적인 아동수당을 도입하면서 신청자 중 소득 상위 10%인 사람들이 받지 못하도록 하는데 약 1626억원이 드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여기에는 국민들의 신청 준비에 따른 시간적 기회비용이 약 723억 정도 포함된다. 하지만 아동수당 당시에는 신청자가 제공해야 할 정보가 약 60여 건으로 매우 많았다. 비상상황을 고려해 신청자가 제공하는 개인정보의 수를 줄이면, 국민의 시간 기회비용이 감소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경기도 인구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약 25%를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관공서의 행정비용도 그만큼 비례해 줄어들 것이다. 이 비용이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의 소비성향 차이나, 정책에서 소외되는 사람을 만들 확률을 고려한다면, 재난소득 전체 지급에 필요한 예산에 대비해 꼭 크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노란우산공제회를 통해 자영업 폐업시 지급하는 공제금 건수가 올 1분기 크게 늘었다. 경기도의 경우 전년 동기 대비 25.1% 증가했다. 공제회 가입자수가 비슷한 크기로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해야 하나, 증가율이 4.6%에 불과했던 작년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경기도 내 폐업이 실제로 상당히 증가했다는 것으로 읽힌다. 폐업한 업자들은 아마 임대료 등 생산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한계기업이 되었을 것이다. 열악한 자영업자들의 피해를 고려할 때, ‘소상공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도민에게 10만원씩 주는 정책이, 다분히 호사스럽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이른바 ‘평등’이 불러올 불평등의 가능성이 걱정된다.

재난소득은 중앙정부의 기조와도 반대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실제 사용처가 없는 상태에서 돈을 푸는 엇박자 정책이 될 가능성이 지적된다”며 재난기본소득을 비판했다. 부총리는 여러 차례 난색을 표했다. 경기도의 방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1조3000억 원이 넘는 예산이 필요하다. 참고로 고용불안을 막기 위해 최근 정부가 확대한 고용유지지원금이 총 5000억 원 규모에 ‘불과’했다. 일각의 주장과 달리, 예산조달로 인해 경기도나 우리나라가 경제위기를 겪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우려와 함께 앞에서 살펴본 여러 기회비용들을 고려한다면, 이 정책의 가격은 너무 비싸다.

한편 중앙정부의 마스크 정책에도 한계가 있었다. 2월 말 정부 주도로 마스크가 판매되기 시작됐다. 그러나 본인의 직접 현장구매만 허용되어, 방문이 어려운 노약자는 사실상 구할 수 없었다. 모두에게 똑같은 조건으로 판매하겠다는 기계적 평등이, 사회적 소외로 이어질 수 있었던 대표적인 사례였다. 다행히도 마스크 구입 5부제를 시작하면서, 정부는 장애인·임신부에 더하여 만 10세 이하 어린이와 만 80세 이상 노인들에 대해서 대리구매를 허용했다. 한편 주민등록등본 상 동거인만 대리구매가 가능하다는 점이 다시 문제된다. 장기요양급여를 받지 않는 독거노인들은 지원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도 문제점을 인식해 15만개의 마스크를 노인복지기관에 지급하기로 했으나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다. 코로나19에 특히 취약한 기저질환자도 대리구매 대상자에서 제외됐다.

언제나 그렇듯 전면 수정되어야 할 정책들이 있는 반면 지금보다 더 좋은 대안을 찾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경기도의 재난소득은 중앙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마스크와 관련해서는, 안 그래도 부족한 판국에 더 노력하기는 힘들 것이다.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조건 정부가 잘못하고 있으니 시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평등이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평등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보건과 천재지변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건강권·안전권 등의 기본적인 성질이다. 따라서 이는 특별히 ‘형평(equity)’으로 생각되어야 옳다. 더 아픈 사람은 더 많이 치료받아야 하고, 더 취약한 사람은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평등을 추구하기 위해, 힘든 상황에서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먼저 보호하기를 소망한다. 특히 정책적 사각지대에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절실하다. 이에 대해서 독자들이 따뜻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해보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말 조금이었지만 짬짬이 모아놓던 마스크 다섯 개를 독거노인 지원센터에 기부했다.

손세호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한반도문제연구회 소속)
손세호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한반도문제연구회 소속)
정책 감독자로서 국민의 역할 역시 더욱 중요해졌다. 사회적 위기의 국면에서는 누가 더 위기에 취약한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로써 당국의 비상대책이 평가되고 운영되어야 마땅하다. 모두에게 동일한 혜택을 주는 것 같으면서도 약자를 소외시키는 정책이 있다면, 그것은 전혀 평등하지 않다. 이러한 ‘기만’에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의 진정한 평등은 국민의 손에 달렸다.


손세호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한반도문제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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