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내 코로나 휴교령 장기화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 혼돈
디지털 차이로 교육격차 우려도
일방향 교육체계 개선 기회 삼아야
“평소 수업의 40% 정도만 배우는 것 같아요.”
내년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팔로마 양(15)은 지난 3주간 학교에 가지 않고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인근 자택에서 온라인 원격 수업을 들었다. 프랑스 정부가 지난달 16일(현지 시간)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모든 학교에 무기한 휴교령을 내린 탓이다.
평소 하루 7시간씩 진행하던 수업이 휴교령 기간에 3시간으로 줄었다. 수업 과목도 수학 물리 등에만 집중됐다. 그는 “수업 중 장난치는 소리가 나도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고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기가 쉽지 않다. 집중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인터넷 속도가 느려지면서 강의 화면이 자주 멈추는 점도 불만 대상이다.
○ 전 세계는 ‘교육 실험’ 중
코로나19의 여파로 온라인 수업을 도입한 국가가 적지 않다.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휴교령이 내려진 유럽국에서는 각종 형태의 온라인 동영상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 주요 도시도 지난달 말부터 원격 교육 체제에 돌입했다.
8일 유네스코에 따르면 188개국에서 15억7602만 명의 학생이 휴교령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전 세계 학생의 91.3%에 달한다. 유네스코 오드레 아줄레 사무총장은 “이런 규모의 교육 차질은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갑자기 온라인 수업을 도입한 탓에 곳곳에서 잡음이 나온다. 프랑스 교육당국은 6만2000여 개교에 재학 중인 학생 약 1200만 명의 교육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내 교실은 집’이란 온라인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활용해 동영상 강의와 진도표, PDF 교재, 자습 자료 등을 제공한다.
공영방송 채널은 물론 팟캐스트, 애플리케이션(앱)까지 동원됐지만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선 학생마다 학교에서 배운 진도가 제각각 다른 점이 문제로 꼽힌다. 수업 방식과 수준도 균질하지 않다. 이메일로 학습 자료만 보내는 학교가 있는가 하면 하루 종일 동영상 수업을 하는 학교도 있다. 동영상 강의도 부족한 편이다.
한국 ‘강남 학부모’ 못지않게 교육열이 높은 아나벨 씨(50)는 7일 기자에게 답답함을 호소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급작스레 휴교한 초기 상황은 어쩔 수 없지만 원격수업이 시작된 지 3주가 지나도 각종 문제점이 보완될 기미가 없다고 했다. 그는 “그냥 둬도 알아서 공부하는 소수의 학생만 수업을 따라가는 수준이다. 휴교령이 5월까지 지속될 것 같은데 온라인 수업 보완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내 교실은 집’의 부실함을 빗대 “집은 집, 학교는 학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다. 고교생 에반 군(17)도 “휴교령 동안 시골에 내려갔고, 우리 학교 교사들은 온라인 수업도 안 했다”고 밝혔다. 학교 교사들은 한목소리로 “학생 중 3분의 1만 모니터 앞에서 제대로 공부한다”고 걱정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매년 6월 시행되는 200여 년 전통의 프랑스 대학입학시험 바칼로레아도 3일 전격 취소됐다.
학업 성취와 과제 평가로 시험을 대체하기로 하자 파리 시내 상위권 사립학교 학부모들은 “좋은 학교는 경쟁이 심해 내신이 불리하다”며 거센 불만을 표출했다. 이 밖에 전교생의 3분의 1이 온라인 수업에 접속하지 않거나 반 학생 4분의 1이 집에 인터넷이 없는 등 문제가 속출하고 있다. 일간 르몽드는 “장기간 친구들과 만나지 못하면서 우울감이나 고립감을 느끼는 학생들이 생겼다”고 전했다.
○ 전염병의 시대 ‘디지털 디바이드’ 심화 우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규모의 전염병 발생 주기는 과거 20∼30년에서 점차 짧아지고 있다. 2002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이후 2012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2013년 에볼라, 2015년 지카, 2020년 코로나 등 2∼5년 주기로 반복됐다. 코로나 사태가 종결돼도 언제든 다른 전염병으로 이동 제한과 학교 폐쇄가 일어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온라인 수업 같은 비대면(非對面)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사실 유럽에서는 2000년대 초반 디지털 환경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e북, 온라인 콘텐츠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유럽연합(EU) 차원에서도 2010년 이전부터 디지털 정보와 교육의 중요성 및 정보격차 관련 각종 제도가 정비됐다. 그럼에도 2020년 현 시점에서 크게 나아진 점이 없다는 게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드러나 최근 유럽 각국에서는 교육당국의 대비가 불충분했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교사들의 온라인 교육부터가 시급하다. 파리 외곽 쉬시앙브리에 사는 15년 차 초등교사 올프룸 로랑스 씨(52)는 프랑스 교육 당국의 플랫폼이나 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았다. 정부의 자료는 그간 수업 프로그램과 차이가 있는 데다 사용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부가 학년별 성취 학습 내용은 정해주지만 세부적인 진도와 교재 선택 등은 학교와 교사의 재량이다.
그는 온라인 수업을 포기하고 기존 교재를 일주일 단위로 나눠 진도를 짰다. 학생들에게 e메일로 숙제를 내주고 주말마다 점검했다.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하도록 자료를 찾다 보니 수업 준비에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그는 “지난 3주간 휴교 기간이 학교에서 근무할 때보다 더 힘들었다. 휴교가 길어지면 학생에 따라 학습량이 크게 차이 날까 봐 우려된다”고 말했다.
실제 휴교가 길어지면 각 가정의 경제 수준과 국가별 인프라 차이 등으로 인한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정보격차)가 본격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가구당 인터넷 접속률을 보면 프랑스 90%, 스페인 91%, 폴란드 86%, 그리스 78%, 미국 80% 등이다. 10∼20%는 접속이 어렵고 국가별 차이가 뚜렷하다.
국내외 교육 전문가들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 속에서 원격 수업이 성공하려면 △온라인 접속 보장 △접속 도구(디바이스) 확보 △교육 플랫폼 △양질의 콘텐츠 모두를 갖춰야 한다. 휴교령으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미국 뉴욕주는 학생 30만 명에게 아이패드 2만5000개를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제대로 된 콘텐츠가 없으면 교육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자칫 코로나 사태로 부유층 자녀와 그렇지 못한 가정의 자녀 간 교육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며 “온라인 교육의 장점을 잘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 일방향 교육 체계 개선 기회
휴교령이 계속되는 동안 기자도 하루에 2시간씩 원격 수업을 듣는 자녀의 학습을 도왔다. 그간 겪은 시행착오를 토대로 전문가에게 자문을 했다. 학부모가 직접 자녀를 가르치는 선생님 역할을 하기보다는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문해력)’를 갖춘 조력자가 돼야 한다는 조언이 가장 많았다. 상당수 유럽 학교들은 휴교령 기간에 수학, 외국어는 물론이고 체육 과목까지 온라인 수업 플랫폼인 ‘구글 클래스룸’이나 실시간 동시 대화가 가능한 ‘줌 비디오’를 통해 진행했다. 이럴 때마다 자녀에게 디지털 기기 사용법을 알려주고 자료 검색을 돕는 역할이 중요했다.
현지 교사들은 또 온라인 원격 교육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생의 교육 수준과 가정의 경제력, 그리고 디지털 환경 등은 해당 지역 학교 교사들이 가장 잘 안다는 것이다. 로랑스 씨 등 현직 교사와 교육 전문가들은 정부의 원격 수업을 대안으로 고집하기보다 전화 교육, 소규모 순회 교육, 학부모 커뮤니티와 연계한 가정 2, 3곳 단위의 공동교육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박주호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는 “온라인 수업이란 틀에 함몰되지 않고 학교, 학부모, 학생들이 전염병 휴교 시 가장 적합한 학습 방법을 함께 찾아가는 집단지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화상 수업, 개인 탐구 활동, 문제 해결 능력 학습 등 여러 장소에서 수시로 지식을 습득하는 미래형 교육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지만 미래형 교육 체계를 실천한 국가는 드물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도 교사가 교실 속 학생 앞에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리처드 카란자 뉴욕시 교육감은 지난달 20일 “알 수 없는 세상이 펼쳐지겠지만 기대도 된다. 코로나19 사태를 교육 개혁의 기회로 삼겠다”고 밝혔다고 AP통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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