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김종인과 ‘32년 대결’ 3승 1몰수패…대미를 압승으로 장식

  • 뉴스1
  • 입력 2020년 4월 16일 09시 42분


1988년 13대 총선 서울 관악을 포스터.  당시 학생운동권 중심인물이었던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야당인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나와 집권여당의 김종인 후보를 누르고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뉴스1
1988년 13대 총선 서울 관악을 포스터. 당시 학생운동권 중심인물이었던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야당인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나와 집권여당의 김종인 후보를 누르고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뉴스1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김종인 미래통합당 총괄 선거대책위원장과 32년 악연을 통쾌한 승리로 시원하게 끝맺음했다.

1988년 첫 대결을 펼친 이래 지금까지 이 대표는 김 위원장을 상대로 4전 3승 1몰수패라는 압도적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8선 고지를 눈앞에 두고 여권 물갈이에 모범을 보이겠다며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배수진을 쳤던 이해찬 대표는 지난 15일 진행된 21대 총선에서 압승이라는 표현만으로 부족할 만큼 2/3에 이르는 의석을 차지하게 만들었다.

반면 “80인생 마지막을 걸겠다”며 통합당 선거 운전대를 잡았던 김 위원장은 겨우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는 데 그치며 초라하게 퇴장했다.

◇ 1988년 서울 관악을 지역구 맞대결…36세 이해찬, 48세 재선의원 김종인 꺾어

학생운동권 버팀목 중 한명이었던 이해찬 대표와 빼어난 거시경제 안목을 지녔던 김 위원장이 지금까지 직접 결투를 겨룬 적은 딱 한차례 있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이 대표는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관악을에 출마, 여당인 민주정의당 간판을 달고 나왔던 김 위원장과 싸움을 펼쳤다.

36살의 팔팔한 나이와 학생운동권 스타였던 이해찬 대표는 서울대를 에워싸고 있는 관악을이라는 프리미엄에 힘입어 31.1%를 득표, 27.1%에 그친 집권여당의 재선의원이던 김종인(당시 48세)후보를 눌렀다.

◇ 2016년 김종인, 몰수승 선언…이해찬 재경기서 승리로 설욕

진영을 달리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2016년 20대 총선 때. 민주당 주도세력에 대해 호남을 중심으로 한 반발이 일어 당이 흔들리자 당시 문재인 대표가 김종인 위원장을 구원투수로 등판시켰다.

민주당 비대위원장에 오른 김 위원장은 ‘새로움’을 보여야만 중도층 표심을 움직일 것으로 판단, 친노 상징격이었던 이 대표를 공천에서 배제했다. 6선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당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이 대표는 “당선 뒤 복당”을 외치며 무소속으로 세종에 출마, 7선 고지를 밟았다.

김종인 위원장이 일종의 출전자격 몰수를 통해 ‘승’을 따냈다면 이해찬 대표의 무소속 당선은 재경기 끝에 승리한 셈이다.

◇ 21대 총선…이해찬 ‘역사적 승리’ vs 김종인 ‘무참한 패배’

이해찬 대표는 21대 총선 1차 목표를 ‘1당 유지’, 2차 목표를 ‘과반획득’으로 잡았다. 총선을 앞두고 이러한 이 대표 목표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자 다급해진 미래통합당은 ‘선거전략의 귀재’라는 김종인 위원장을 삼고초려 끝에 모셔왔다.

총선 직전 ‘민주당 180석, 통합당 개헌저지선 확보 위태’라는 관측이 나돌자 이 대표는 “우린 겸손해야 한다”며 마지막 표 다지기에 나섰고 김 위원장은 “틀린 예측이다, 패배주의에 빠지지 말라”며 독려하기 바빴다.

압승을 위해 이해찬 대표가 ‘(열린민주당이라는) 그런 자식 둔 적 없다’며 악역을 자처하면서 표단속, 성공을 거뒀지만 김 위원장은 이렇다 할 메시지를 내 보낼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침몰했다.

이 대표는 원외로 물러나지만 친여진영서 나름의 영향력을 유지하게 됐지만 김 위원장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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