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일본 에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제때 광화문 철거 막은 日人 육필원고 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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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소재문화재재단, 日민예연구가 야나기의 본보 기고문 확인


“만약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해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궁성(에도성)이 폐허가 되며 그를 대신해 그 위치에 큰 서양풍의 일본총독부 건물을 짓게 되고, 저 푸른색 물이 흐르는 해자를 넘어 높고 흰색 벽으로 솟는 에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본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사진)가 1922년 일제의 광화문 철거 방침에 반대하며 동아일보에 게재한 기고문 가운데 일제의 사전검열로 실리지 못한 내용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최응천)은 야나기가 광화문 철거에 반대하며 1922년 7월 작성한 육필 원고를 일본 도쿄 니혼민게이칸(日本民藝館·일본민예관)에서 최근 발견했다고 7일 본보에 밝혔다.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이 원고는 1922년 8월 24∼28일 동아일보 1면에 5회에 걸쳐 실리면서 광화문 철거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육필 원고에는 일제의 사전검열 탓에 신문에는 실리지 못하고 같은 해 일본 잡지 ‘가이조(改造)’ 9월호에만 실렸던 200자 원고지 2장 분량의 내용도 포함돼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장을 지낸 이상해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광화문의 아름다움을 추도사 하듯 애절하게 묘사하며 철거를 반대한 야나기의 글은 당시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며 “일제가 광화문을 헐어 조선의 상징을 말살하려는 데서 한발 물러섰고, 광화문은 비록 제자리는 아니지만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져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고 말했다.

“너(광화문)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발언의 자유를 가지지 못했으며 또는 너를 산출한 민족 사이에서도 불행히 발언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 그러나 침묵 가운데 너를 파묻어 버리는 것은 나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비참한 일이다.”

야나기의 원고는 식민지 문화재의 운명과 나라를 빼앗긴 이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절창(絶唱)이다. 야나기는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에도성(江戶城)이 헐린다면 “반드시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이라며 “그런데 이와 똑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고발했다.

야나기에게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와도 같았다. 그는 “나는 마치 너(광화문)를 낳은 민족이 저 견고한 화강석 위에 끌을 깊이 파서 기념할 영원의 조각을 새긴 것과 같이 너의 이름과 자태와 영(靈)을 결코 스러지지 아니할 싶은 힘으로 잘 새기겠다”고 썼다. 총독부 건물의 신축은 “아무 창조의 미를 가지지 못한 양풍(洋風)의 건축이 돌연히 이 신성한 지경을 침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헐고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철거하고자 했고, 결국 1926년 경복궁 동쪽의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이상해 교수는 “의궤(儀軌)도 없는 광화문이 사라졌다면 원형 복원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4, 2015년 니혼민게이칸 소장 한국 문화재를 조사했고 이후 도쿄예술대의 관련 연구를 지원했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스기야마 다카시(杉山享司) 니혼민게이칸 학예부장은 “니혼민게이칸 학예사들도 (야나기 육필) 원고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검열된 부분을 파악하고 의미를 고찰해서 확인한 것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재단은 최근 동아일보에 당시 자료(야나기의 원고)가 존재하는지 물어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야나기 무네요시#기고문#광화문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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