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 한국식 독음으로 ‘류종열’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흔히 민예연구가로 알려졌지만, 철학 과학 종교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다. 일본의 인물사전에는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 미학자, 종교철학자’라고 돼 있다. 20대이던 1916년 조선을 처음 방문해 그 문화에 매료됐다. 백성들이 집에서 쓰던 오래된 밥상이나 막그릇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고, 평생 조선의 공예품과 고미술품을 수집했다. 1919년 3·1운동을 일본이 탄압하자 “반항하는 그들보다 한층 어리석은 건 압박하는 우리들”이라고 공개 비판하는 등 식민지 조선의 아픔을 함께하고 대변했다.
▷1920년 4월 창간 때부터 ‘문화주의’를 주창한 동아일보와도 인연이 깊다. 동아일보는 첫 문화사업으로 5월 4일 지금의 YMCA회관에서 경성(서울) 최초의 서양음악회를 열었다. 야나기의 부인이자 성악가(알토)인 가네코(柳兼子·1892∼1984)의 독창회였다. 장안의 화제를 모은 음악회에는 1300여 명이 몰렸고 이듬해에도 여러 차례 열렸다. 2005년에는 이 부부의 장남 무네미치(柳宗理) 일본민예관장이 어머니의 기록을 모은 다큐멘터리 영화 ‘가네코’를 동아일보에 보내와 이듬해 일민미술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야나기가 1922년 8월 동아일보에 5회에 걸쳐 게재한 광화문 철거 반대 기고문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의 육필 원고가 발굴됐다. 여기에는 사전 검열로 신문에 실리지 못한 부분이 포함돼 있다. 당시 일제는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지으면서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철거하려 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에 합병돼 에도(江戶)성이 헐린다면 일본인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이라며 “이와 똑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고발했다. 양국에서 발표된 이 기고문은 큰 반향을 일으켜 광화문은 1926년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져 보존됐다.
▷도쿄 메구로의 고급 주택가에 있는 일본민예관에는 그가 일본과 한반도, 대만 중국 유럽 등지에서 수집한 민예품 1만7000여 점이 소장돼 있다. 이 중 한반도 관련은 1600점 정도인데, 오래된 도자기나 목공예품이 최고의 상태로 보존돼 있다. 자칫하면 고물상에 가 있거나 버려졌을지도 모를 이 작품들의 운명을 생각하다 보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야나기에 대해서는 조선 문화와 예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보전해준 점에 대한 감사와 호평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그가 조선에 대해 제국주의적 시선을 버리지 못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없지 않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