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고지대에 내린 비가 지하로 흘러내리다 해안 바위틈에서 솟아났다. 용천수로 불리는 이 물은 제주 사람에게는 ‘생명수’이자, 마을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과거에는 용천수를 쓰기만 했을 뿐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물이 나오는지를 알지 못했다.
● 지하수, 성장과 번영을 견인하는 에너지
제주도개발공사 수석연구원인 고기원 박사(59)는 이런 용천수를 비롯해 제주지역 지하수 생성 과정과 흐름을 규명한 선도적인 인물로 꼽힌다. 수문지질을 전공한 그는 그 성과를 인정받아 16일 2020년 제주도문화상 학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고 박사는 “제주도의 지질과 지하수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 온 선후배 연구자들께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함께하고 싶다”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연구들을 더욱 열정적으로 진행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제주는 한반도와 떨어진 섬으로, 수자원 함양량(涵養量·포화대에 합류 또는 흡수되는 물의 양)이 한정됐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용 가능한 수자원은 지하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제주에서 지하수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 생명을 좌우하는 물이기에 ‘생명수’로 불린다.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제주 지하수의 가치는 단순한 생활용수를 뛰어넘어 성장과 번영을 견인하는 에너지이자 성장 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주 땅속의 암석과 지질 구조, 형성 순서를 밝히는 것이 크나큰 연구 주제였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땅속 지층 사이를 지하수가 흐르고 있고, 지하수의 분포와 산출 특성이 지질 구조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질 구조를 연구하다 보니 지층을 채우거나 흐르는 지하수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죠.”
고 박사는 1992년 제주도 수자원연구실장으로 공직에 발을 들이면서 본격적으로 지하수 탐사와 연구를 시작했다. 온천 시추 등 지하수 착정 현장을 쫓아다니며 지질 구조와 지하수 상태를 직접 확인했다. 빗물이나 눈에 녹은 물은 지하 지층 틈을 따라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 ‘대수층’이라 불리는 곳에 도달하면서 지하수가 된다. 지하수는 땅속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유체이고, 이동 속도는 지층의 투수성(透水性·물 빠짐)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화산암반수로 변하는 지하수 특성 규명
화산섬 제주는 두께가 얇은 용암이 시루떡처럼 겹겹이 쌓인 지질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땅속으로 스며든 물은 이런 용암층을 통과하면서 여과가 이뤄진다. 용암층 자체가 거대한 ‘천연정수기’인 셈이다.
고 박사는 수많은 용암층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물과 암석이 반응을 일으켜 용암층에 함유돼 있는 물질들이 지하수에 녹아들고 깨끗하고 유용 성분이 많은 화산암반수로 탄생하는 과정을 밝혀냈다.
제주는 180만 년 전부터 1000여 년 전까지 이어진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된 비교적 젊은 화산섬이다. 뜨거운 용암이 식으면서 생겨난 여러 가지 틈들이 비교적 잘 보존돼 물 빠짐이 원활하다.
제주에서 ‘송이’로 불리는 오름(작은 화산체)의 화산쇄설물(스코리어)도 스펀지처럼 물을 잘 흡수한다. 용암동굴이 무너져 내린 곳이나 용암이 부풀어 올랐다가 내려앉은 함몰지 등은 ‘숨골’로 불리는데, 이를 통해 다량의 빗물이 막힘없이 지하로 흘러간다. 제주의 하천이 비가 많이 올 때 물이 흐르고 평소에는 대부분 물이 없는 건천(乾川)인 이유다.
“물이 잘 빠지는 지질 구조가 무수히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빗물의 45%가량이 땅속으로 침투해 지하수로 만들어집니다. 이는 국내 내륙지역 평균 침투율(14%)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맛이나 성분도 육지 지하수와 다소 다릅니다. 제주 지하수는 경도가 낮은 ‘연수(soft water)’로 약알칼리성을 띠는데 바나듐과 실리카 등 유용 성분이 육지 지하수에 비해 월등하게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죠.”
화산암반수인 지하수가 먹는 샘물 상품으로 출시되는 등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지만 지하수 개발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61년 제주지역에서 첫 지하수 관정 굴착이 이뤄졌고 1967년까지 59곳에서 진행됐다. 당시 지하수 개발 성공률은 30%가량에 불과했고 1970년대 지하수 기초조사 등을 거치면서 본격적인 지하수 굴착이 이뤄졌다. 현재 제주지역 지하수 관정은 4800여 곳에 이른다. 관정이 많다 보니 고 박사는 허술한 관정 시공이나 관리에 따른 지하수 오염을 우려하고 있다.
● 심층 연구와 인력 양성 필요
제주도는 지하수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993년부터 10년 주기로 지하수 함양량 평가를 하고 있다. 1993년부터 2018년까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지하수 함양량은 연간 16억 t 수준이며 지속적으로 이용 가능한 지하수량은 함양량의 41% 정도인 연간 6억5200만 t가량으로 분석됐다. 지난해 기준 제주지역에서 사용한 지하수량은 2억4000만 t으로 지속 이용 가능량의 37% 수준이다.
지하수는 땅속 지층의 틈을 따라 움직이는 물이기 때문에 지층 특성과 지하수의 생성과 흐름 방향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지하수의 분포 특성이나 오염물질 이동 및 확산, 지하수 취수로 인한 영향, 토지 이용에 따른 지하수 함양량의 변화 등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수위하강, 수질오염 해수침투의 원인을 규명하고 이에 대한 합리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도 필요하다.
“초기에는 지하수를 연구하는 연구기관이나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대학이 없어 연구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지질학과 지하수학은 여러 세부 전공으로 이뤄져 있어 혼자서 연구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다행스럽게 최근 제주연구원에 ‘제주지하수연구센터’가 발족했습니다. 지하수 연구를 견인하는 기관으로 성장하려면 유능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시스템 구축이 중요합니다.”
지속적인 연구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고 박사는 “지금까지 지하수의 개괄적인 특성을 밝히는 데 주력해 왔다면 앞으로는 지역별 세부 연구를 통해 지하수체의 특성을 보다 세밀하게 밝히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며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한라산 고지대 지역의 심부지질과 지하수 부존관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고 기후변화에 따른 지하수의 수량 및 수질 변화도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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