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사 기획전’ 김훈展 개최
김원진 박광수 정현 최요한 작가, 간명한 무채색의 작품들 선보여
책을 태운 재-그을린 나무 소재… 왜곡되고 폐기되는 이야기 조명
“글을 쓰는 것에 즐거울 일은 하나도 없어요. 그저 고통스러운 일인데…. 쓸 때 몇 가지 원칙을 갖고서 써요. ‘수다를 떨면 안 된다’, ‘말을 극도로 아껴서 줄여 쓰자’는 원칙. 그런데 그게 참 지키기가 어려워요. 쓰다 보면 더 설명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죠. 그걸 억제하고 말을 압축하면 거기서 전기 같은 게 나와요. 찌릿찌릿한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3월 27일까지 서울 성북구립미술관 성북예술창작터에서 열리는 ‘문인사(文人史) 기획전 6: 김훈’전. ‘여기에서 나는 산다’라는 표제를 내건 전시 공간 2층 아카이브실에서 김훈 작가(73)의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담은 19분 51초 길이의 인터뷰 영상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다. 영상 옆에는 에세이 ‘자전거 여행’, 소설 ‘칼의 노래’ 등 그의 책 여러 권을 가지런히 꽂아 두었다. 도서관 분류번호가 붙은 책들은 수많은 독자의 손을 거친 듯 표지가 모두 부옇게 바랬다.
이 기획전은 성북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문인 중 시대정신을 표상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을 선정하고, 대표작의 주제의식에 연결점을 가진 미술 작품과 더불어 살펴보는 전시다. 2015년부터 신경림 조지훈 황현산 박완서 신동엽 작가를 차례로 조명했다. 김훈 작가는 서울 종로구에서 출생해 6·25전쟁 이후 성북구 돈암동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올해 전시명은 그가 2011년 발표한 소설 ‘흑산’ 앞머리에 적은 작가의 말에서 발췌한 것이다.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멀고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 4명은 “문학이란 공허한 언설로 싸구려 힐링을 주는 게 아니다”라는 소설가의 이야기에 호응하는 간명한 무채색 형상과 이미지로 전시실을 채웠다.
도서관에서 폐기된 책을 불로 태운 재, 밀랍, 석고를 재료로 제작한 김원진 작가의 설치작품 ‘깊이의 바다’와 ‘너를 위한 광장’이 1층 전시실 복판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그는 글로 기록된 기억의 변이와 망각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2층 설치작품 ‘Melting Strata(녹아내리는 지층)’에서는 김훈 작가의 문장을 양각한 밀랍 활자가 열에 녹으며 서서히 왜곡되는 모습을 표현했다.
‘검은 숲속’ 연작을 포함한 박광수 작가의 아크릴 드로잉 9점은 김훈 작가의 소설 표지로 어울리겠다는 인상을 준다. 캔버스 위 여러 존재의 형상과 움직임이 명확한 윤곽선 없이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 모호하고 유동적인 자아를 드러낸다. 최요한 작가는 당연한 듯 개인을 소외하는 대도시 공간의 구석구석을 촬영한 흑백사진 ‘Q_EXHALE’ 연작을 내놓았다.
철로의 침목, 아스팔트 덩어리, 철근, 폐차장 파쇄구 등을 소재로 폐기된 사물의 시간성을 표현해 온 정현 작가는 2019년 강원 고성 산불 현장에서 채취한 나무를 활용한 신작 ‘무제’를 선보였다. 10일 전시실에서 만난 정 작가는 “속수무책의 거대한 재난의 시간을 견디고 난 후 날 선 불기운을 시커멓게 품은 채 남겨진 존재가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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