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지우기. 작업실에서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작품이 어찌 작가의 마음대로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화가들은 그렸다 지웠다 반복하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하지만 전시장에 출품까지 했던 작품을 지운다는 행위는 상식에서 벗어난다. 완성했기에 출품했던 것이고, 이는 사회적 공공재산으로 쌓이게 된다. 전시장에서 돌아온 캔버스의 그림을 지우는 화가. 누가 자신의 완성작을 폐기할까.
재일 화가 송영옥(1917∼1999)의 이야기다. 일본에서의 어려운 화가 생활은 비싼 미술 재료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했다. 물감도 비쌌지만 캔버스 역시 비쌌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한번 출품했던 작품은 지우고 그 위에 새 그림을 그렸다. 출품작 지우기는 생활 습관처럼 자연스러워졌고, 이는 마침내 예술철학으로 발전했다. 공공장소에서 발표했으면 그것으로 작품의 생명은 마감된 것으로 보았다. 더군다나 미술작품은 상품이 아니어서 판매 목적으로 남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송영옥은 유존 작품이 많지 않다. 빈곤한 생활이 특이한 습관을 불러왔고 예술작품의 상품화는 체질적으로 거부하게 되었다.
송영옥은 제주 출신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주와 오사카 사이에 직항 항로가 있었다. 그래서 오사카에는 제주 출신 동포들이 많다. 부모를 따라 도일한 송영옥은 1940년대 초반 오사카미술학교를 다녔다. 동기생으로 윤재우 등이 있고, 절친한 화가로 뒤에 월북한 청계 정종여가 있다. 송영옥은 1982년 재일동포 추석성묘단의 일원으로 55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다. 나는 일본의 한 미술행사에서 송 화백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이내 친해졌다. 우리는 각자의 집을 왕래하면서 가족과도 가깝게 지냈다. 말년에 살았던 그의 도쿄 닛포리 집은 단칸방으로 둘이 마주 앉으면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좁았다. 어쩌다 화가의 집에 들러 쌀을 팔아주고 오기도 했다.
광주시립미술관의 분관 하정웅미술관의 하정웅 컬렉션 특별전 ‘씨앗, 싹트다’에서 오래간만에 송영옥 작품을 보았다. 항상 조용한 성품으로 인자했던 화가가 살아온 듯 반가웠다. 주옥과 같은 명품들은 전율처럼 다가왔다. 차별받는 재일작가로서 고통 어린 모습의 ‘슬픈 자화상’이라든가,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이라는 삼각관계에서 자리매김해야 하는 화가의 자화상인 ‘삼면경’ 등, 그리고 말년의 개 소재 연작들을 배관했다.
송영옥 작품 가운데 나는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에 그린 ‘절박한 상황’의 그림을 좋아한다. 그 무렵 상당수의 재일교포는 북송선을 타고 평양으로 이주하는 사업에 동참했다. 유화 ‘갈림(귀국선)’(1969년)은 ‘69’라는 숫자가 표기된 선박의 안에서 동그란 창에 비치고 있는 우울한 표정의 인물을 그린 것이다. 외벽에 매달려 있는 사다리는 낡고 부서져 있어 정상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벽’(1973년)은 옆으로 기다랗게 뚫린 틈새에 비치고 있는 얼굴들, 처절함의 극치이다. 극한 상황 속에 내몰린 군상의 모습이다. ‘검은 비’(1971년)는 아예 둥그런 원형 창이 있는 외벽 위에 해골이 눕혀 있기도 하다.
송영옥 작품은 상징성이 강하다. 그래서 울림이 크다. 그의 ‘작품 69’(1969년)도 그렇다. 화면의 4분의 3 정도는 새까맣게 칠해진 벽면이고 그 한편에 기다란 사다리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사다리는 부서진 폐물, 이를 타고 상층부로 올라갈 수 없다. 끊어진 사다리 아래의 육중한 담장 뒤로 사람들이 갇혀 있다. 밀폐된 공간에 갇힌 사람들, 처절한 극한 상황이다. 암흑, 압박, 질곡… 이런 단어가 떠오르게 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이런 암흑으로부터 탈출을 기도하는 사람들의 처절함이 화면에 담겨 있다. 인간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담장 위 두 사람의 손, 오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밖을 내다볼 수도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두 사람이 각각 떨어져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중첩되어 얽혀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손이 한 사람이다. 서로 교차되어 있는 손. 합쳐야 살 수 있다는 의미인가. 꼭 분단 조국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 같다.
나는 작가 말년에 서울에서 회고전 개최를 추진했다. 살아생전 조국에서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고 싶었던 화가의 염원을 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작품을 모을 수 없어 전시는 불발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경남 진주 출신으로 1950년대 일본 화단에서 중요한 작가로 활동했던 조양규, 그는 북송선을 타고 평양으로 떠났지만 이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양규와 가깝게 지냈던 송영옥, 그들의 인생 항로는 사뭇 달랐다. 송영옥은 외지에서 외롭게 눈을 감았지만 그의 작품은 오늘도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미술작품이란 무엇인가. 작품은 꼭 영원히(?) 살아남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했거늘, 이 땅에 영원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출품작을 지우는 화가의 행위, 거기서 나는 많은 시사점을 챙기게 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