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작가의 작품을 다뤘더라도 어떤 전시는 깊게 작품을 이해했다는 느낌을 주고, 어떤 전시는 눈이 즐겁다는 감각에서 그치고 만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큐레이팅 등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전시 공간 디자인’도 큰 역할을 한다. 전시 공간 디자인이란 전시장 구도와 벽, 조명, 음향 등 모든 실내 구성 요소를 통칭한다.
동아일보는 전문가 5명에게 올해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진행된 전시 가운데 공간 디자인의 기능과 의미 측면에서 인상 깊었던 전시 3개를 꼽아달라고 요청했다. 참여자는 김용주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운영디자인기획관과 김성태 리움미술관 수석디자이너, 이대형 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 전시디자인회사 시공테크의 오서현 선임디자이너, 공간디자인 스튜디오 Nonstandard의 이세영 대표.
전문가들은 좋은 전시 공간 디자인이란 “전시의 기획 의도를 관람객에게 입체적·철학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설문 결과, ‘문신: 우주를 향하여’(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가 3명에게 표를 받아 가장 많이 거론됐다. ‘대지의 시간’(국립현대미술관 과천)과 ‘사유의 방’(국립중앙박물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서울시립미술관)도 각각 2표씩 받았다.
●작품 질감과 작가 세계관 강조한 ‘문신: 우주를 향하여’
▽김성태=문신 조각은 물성이 특징이다. 목조 작품의 좌대는 따로 디자인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혼합재 보드를, 브론즈 작품의 좌대는 철재를 사용하는 등 작품과 진열장의 재질이 비슷해 조각의 물성이 강조된 연출이었다.
▽오서현=문신 작품은 대칭미와 매끈한 질감만 돋보이기 쉽다. 하지만 이 전시장은 곡선을 그리는 벽체와 좌대, 그 위에 조각을 올려놓음으로써 작품들이 우주의 거대한 흐름 위에 피어난 강인한 생명처럼 보인다. 관람객들이 작가가 천착했던 우주에 대한 사유를 함께 탐구하도록 유도했다.
●평가 갈렸던 ‘대지의 시간’
▽이대형=내용뿐 아니라 공간 디자인을 통해서도 생태학적 가치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전시. 폐기물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벽을 없앴으며, 그 결과 작품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듯 연출됐다.
▽오서현=공간 설계부터 폐기까지 생태담론이란 취지를 생각한 전시. 특히 구형의 반사체는 전시 공간, 작품, 관람객을 한데 비춤으로써 관람객 또한 생태담론 주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세영=아쉬웠다. 구체들의 정체를 한참 고민했다. 디자인의 요소가 특정한 조형성을 갖고 작품보다 압도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이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작품과의 만남이 기다려지는 ‘사유의 방’
▽김용주=작품을 만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계획한 우수 사례. 긴 진입로와 흙을 사용한 전시장 벽의 재질과 색감, 아주 미세하게 기울어진 바닥 등을 통해 결국 작품과 자연스럽게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공간이 작품 감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하게 했다.
▽이대형=오감을 전부 자극하는 공간이다. 미디어아트 작품의 소리, 천장과 벽의 색감과 질감, 공기 등 분위기를 만드는 디테일한 디자인을 통해 적합한 명상 공간을 만들어냈다. 공간 전체가 작품으로 인식되는 전시.
●작가 삶이 녹아있는 ‘권진규-노실의 천사’
▽김성태=권진규라는 인물의 내러티브가 돋보인 전시. 좌대 밑을 삼공블록과 벽돌이 받치고 있는데, 작가가 첫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전시공간을 차용한 것이라 그의 삶을 상기시킨다.
▽김용주=좌대에 사용된 삼공블록이 전시 이후 버려지지 않고 산업 현장으로 돌아가 제 기능을 다시 할 수 있다는 측면도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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