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고독을 향해 호퍼가 비춘 ‘희망의 빛’[미술을 읽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3일 03시 00분


이진숙 미술평론가
이진숙 미술평론가
잔잔한 물결이 오래 흘러서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마음에 와닿았다. 8월 2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에드워드 호퍼전은 개막전에만 13만 장이 예매되는 등 새로운 전시 기록을 세우고 있다. 마음 챙김이 중요해진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현대적 감정의 대가인 호퍼는 각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호퍼는 재즈 시대라 불리던 1920년대, 대공황이 집어삼킨 193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빠른 경제성장 시대를 겪어내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길 위에서 영감을 얻었고, 스튜디오에 돌아와서 장면을 재구성했다. 그의 그림은 현대화되어 가는 시대의 단순한 외관을 그린 것이 아니다.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호퍼는 말한다. 그리고 고독, 소외감, 욕망, 좌절, 권태, 감정적인 부조화 같은, 당시에는 심리학의 영역에서도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던 인간의 감정들을 그림 속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2차대전 이후 현대미술은 전쟁 기간의 참혹했던 체험과 비인간적인 소외 등 현대적 감정을 아방가르드적인 형식으로 강도 높게 표현했다. 그 결과 미술관은 고통의 비명과 심각한 사색, 아니면 난해한 초월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반면 호퍼는 풍경화나 풍속화 같은 전통적인 장르의 그림을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사이에 있는 편안한 방식으로 그린다. 덕분에 현대인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은 응시가 가능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 된다. 요즘 우리가 컴퓨터 윈도를 통해서 세상을 보듯이, 호퍼의 그림 속 일들은 유리창을 통해 보인다.

호텔 방 창문 너머 장면을 그린 ‘밤의 창문’(1928년). 호퍼는 거리에서 본 장면을 통해 고독, 욕망, 권태 등 현대인의 감정을 드러냈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호텔 방 창문 너머 장면을 그린 ‘밤의 창문’(1928년). 호퍼는 거리에서 본 장면을 통해 고독, 욕망, 권태 등 현대인의 감정을 드러냈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밤의 창문’은 고가철도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싸구려 호텔 방 장면을 그렸다. 발터 베냐민은 19세기 말 인상주의 시대를 분석하면서 근대 사회의 모든 것이 ‘볼거리’가 되어간다고 했다. 20세기 초 호퍼의 시대에 대도시의 ‘볼거리’는 ‘욕망’이라는 감정과 밀접하게 엮여 들어간다. 세상의 아름다운 모든 것은 쇼윈도 안에 있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존재들은 욕망을 더욱 자극한다. 모든 것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방에 분홍색 속옷을 입은 여인의 뒷모습이 얼핏 보인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인의 뒷모습만 보고 느낀 욕망은 창문의 커튼처럼 가볍게 날린다. 속절없는 욕망과 좌절은 도시의 고독을 더 깊게 만든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라 불리는 ‘잠 못 드는 사람들’(1942년)은 카페의 유리창 안에서 본 ‘대도시의 고독’이다. 지나가다 본 어느 가정집 창 안의 장면을 그린 ‘뉴욕의 방’(1932년)에서는 권태라는 감정이 포착되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1857년)부터 피터 투이가 쓴 ‘권태’(2011년), 웨스 앤더슨의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2021년)에 이르기까지 권태는 현대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중요한 감정이다.

호퍼의 그림은 쇼윈도처럼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통로의 두 사람’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세 사람인데, 제목은 굳이 ‘두 사람’이라고 콕 집어 말한다. 환한 빛이 모든 것을 비추지만 문제적 상황만 뚜렷해질 뿐 해결책은 없다. 호퍼가 그린 도시의 밤을 비추는 빛은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빛이다. 호퍼가 고안해 낸 회화적인 빛이다. 이 빛 덕분에 그림 속에 위험 요인이 없음에도 심리적인 긴장감이 배가되고, 그림에 어떤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우리의 감정에 자연의 빛은 도시의 인공적인 빛과는 다른 영향을 미친다. 호퍼는 실제로 여행을 많이 했고, 여행길에 있는 사람을 많이 그렸다. 흥미롭게도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인들이다. 그림 속 여인들은 모두 아내 조지핀(조)이 모델이었다. 카메라 앞에서는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지만, 성격 차이로 둘 사이 싸움이 잦았고, 때로 육탄전을 벌이기도 했다. 호퍼는 조를 크산티페(소크라테스의 악처)라고도 불렀지만, 조가 없으면 자신이 이 정도 성과를 낼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호퍼의 그림 속에는 당시 플래퍼(Flapper·말괄량이)라고 불리던 모던 걸이 많이 등장한다. 플래퍼는 이전 시대의 전통적인 여성과는 달리 욕망을 가진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호퍼는 거리에서 본 모던 걸을 그림으로는 그렸지만, 집안의 모던 걸인 아내 조와의 감정적인 불화를 해소하는 데는 미숙했다. 조 역시 화가였지만, 호퍼를 만나면서 매니저 역할을 맡는 데 만족해야 했다. 평화롭지 않지만 파탄으로 끝나지도 않은 40여 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호퍼는 조가 느꼈을 복잡한 감정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에드워드 호퍼가 1961년에 그린 ‘햇빛 속의 여인’. 호퍼는 작품에서 빛을 즐겨 활용했다. 인공광은 도시의 고독을 드러내고, 자연의 빛은 현대의 낯선 감정을 다독이는 역할을 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에드워드 호퍼가 1961년에 그린 ‘햇빛 속의 여인’. 호퍼는 작품에서 빛을 즐겨 활용했다. 인공광은 도시의 고독을 드러내고, 자연의 빛은 현대의 낯선 감정을 다독이는 역할을 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호퍼는 그림 속에서 여인에게 끝없는 빛의 축복을 내린다. 도시의 인공광이 도시의 고독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빛이라면 자연의 빛은 호퍼가 그린 여러 낯선 감정을 견딜 만하게 만들고, 그의 그림을 결정적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마법적인 요소이다. 그림 ‘햇빛 속의 여인’ 속 여인도 문득 햇빛을 향해서 일어섰다. 손에 들려 있는 타 들어간 담배는 그녀가 꽤 많은 시간을 침대에서 지체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햇빛이다. 빛이 강렬한 만큼 그녀의 뒤에 따르는 어둠도 깊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어쨌든 한 걸음 나갈 것 같다. 빛을 향해서 말이다.

빛은 너무 보편적인 해결책이어서 뾰족한 답은 아니겠지만 그 의미는 작지 않다. 21세기 우리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의 종류와 크기는 호퍼의 시대와 비교할 수 없다. 고립감, 고독감, 소외감, 권태감, 불화, 좌절감, 슬픔, 분노 등등이 매일매일의 우리의 삶에서 위세를 떨친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절망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희망에는 사실 이유가 없다. 희망을 갖고자 하는 이는 작은 풀잎에서도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 호퍼의 많은 그림들에서 인물들은 빛을 향한다. 그처럼 우리는 호퍼의 그림에 모여든다. 빛이 거기에 있으므로.

#도시의 고독#에드워드 호퍼#희망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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