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시작된 베니스(베네치아) 비엔날레는 ‘비엔날레’라는 명칭이 붙는 세계 행사들의 원조다. 한국은 1995년 국가관을 건축해 미술전을 개최한 후 격년으로 열리는 건축전과 미술전에 매년 참여하고 있다.
베니스 비엔날레 행사와 전시 무대는 크게 베네치아 내 자르디니 공원과 아르세날레로 나뉜다. 자르디니 공원은 비엔날레의 중심으로, 소수의 국가관들이 있다. 1987년 호주관을 마지막으로 한정된 땅과 보호수목 때문에 사실상 추가 건축이 불가능해졌다. 그렇기에 1995년 한국관 건립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과 아르헨티나도 공원에 자국관을 만들려 애썼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기적은 사람이 만들었다. 1993년 백남준 선생(1932∼2006)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설치의 필요성을 귀띔했다고 한다. 독일관에서의 전시로 그해 황금사자상을 받은 선생은 베니스 비엔날레의 파급력을 알았다.
이것이 씨줄이라면 날줄도 있다. 김석철 건축가(1943∼2016)와 프랑코 만쿠소 전 베네치아건축대(IUAV) 교수(86)다. 1992년 베네치아건축대에 방문교수로 있던 김경수 명지대 건축학부 교수가 둘의 만남을 주선했다. 김 건축가에게 한국관 건립 계획을 들은 만쿠소 교수는 냉소적이었지만 결국 그 열정에 설득됐다. 공원에서 어렵사리 한 뼘 땅을 찾아낸 끝에 건축 허가를 받았다. 한데 조건이 가관이었다. ‘지면을 건드리지 말고 나무를 베지 말라’는 것. 사실상의 불허였다.
둘은 머리를 쥐어짰다. 한국관의 파동 치는 벽면은 보호수목을 비켜가며 디자인한 결과이고, 초석 위 철골기둥으로 건물을 띄운 건 지면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다. 놀라운 묘수로 설계조건을 만족시킨 한국관은 1995년 자르디니 공원에 ‘비집고’ 들어선 마지막 정식 국가관이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기적이다.
두 번째 기적은 만쿠소 교수의 한국관 자료 기증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15년부터 한국관 아카이브 구축을 만쿠소 교수와 논의했지만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관 건립 30주년까지는 단 2년 남았다.
예술위 정병국 위원장과 담당자들은 만쿠소 교수가 서울시 국제콘퍼런스에 초청돼 지난달 방한하자 한국관 역사와 미래를 다루는 라운드테이블을 열고 구술채록을 했다. 사회와 구술채록 대담을 맡은 필자는 지지부진했던 일들이 며칠 사이 정리되는 것을 봤다. 게다가 만쿠소 교수는 한국관의 도면, 사진, 행정서류, 서신 등 실물 자료 850여 건과 디지털 자료 3300여 건까지 모든 사료를 아르코예술기록원에 기증하고 소유권까지 넘겼다.
그가 졸업하고 평생 재직한 베네치아건축대에는 중요 사료를 모교에 기증하는 것을 명예로운 의무로 여기는 전통이 있기에 한국관 자료 모두를 한국에 기증한 것은 두 번째 기적이라 할 만하다. 그에게 한국에 기증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베네치아건축대에 기증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예술위 담당자들을 만나 보니 진지하고 열정적이었어. 믿음이 갔지.”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은 한국의 문화 영토다. 아시아 국가 중 일본(1967년 건립)과 한국만 정식 국가관이 있다. 만쿠소 교수가 작별할 때 한 말이 귓가를 맴돈다.
“잘 결정한 것 같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의 아카이브가 있어야 할 곳은 한국이야. 마음의 짐을 덜었어.”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