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와중에 미국의 경제지표까지 시장의 예상치를 웃돌면서 원-달러 환율이 심리적 마지노선인 1400원 선을 터치했다. 환율이 연일 급등하자 외환당국은 즉각 구두 개입에 나서면서 시장 안정화에 나섰다.
16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10.5원 오른 1394.5원에 마감했다. 장중 한때 1400.0원까지 올랐다. 환율이 장중 1400원대로 오른 건 2022년 11월 7일(1414.5원) 이후 처음이다.
이날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등 외환당국은 긴급 공지를 통해 “외환당국은 환율 움직임, 외환 수급 등에 대해 각별한 경계감을 가지고 예의주시하고 있다”면서 “지나친 외환시장 쏠림 현상은 우리 경제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두 기관이 공동으로 구두 개입에 나선 건 22개월 만이다.
최근 강달러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환율은 연일 고점을 높이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하 시점이 밀리는 상황에 중동에 전운이 감돌면서 안전자산인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간밤에 발표된 미국의 3월 소매판매 지표가 전월 대비 0.7% 증가하며 시장 예상치(0.4%)를 웃돌자 연준의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한풀 더 꺾였다. 이에 따라 코스피(―2.28%)를 비롯해 일본 닛케이평균주가(―1.94%), 대만 자취안지수(―2.68%) 등 아시아 주요 증시가 일제히 2% 안팎으로 급락했다.
환율 사상 네번째 1400원 터치… ‘외화 빚 226조’ 기업들 비상
“연말까지 강달러… 1450원 갈수도” 기업 이자부담에 실적악화 우려 해외 주재원-유학생들도 부담 커져 엔화 ‘달러당 154엔’ 34년만에 최고
“이렇게 빨리 환율이 오르면 원가 상승과 매출 하락이라는 이중고를 함께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식품 수입업체 대표 조모 씨(54)는 최근 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환율이 천천히 오르면 판매 가격에 환율 상승분을 반영할 여지가 있지만 환율 급등기에는 통상 내수 경기도 내리막이기 때문에 판매를 생각하면 가격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조 씨는 “2022년 말에도 환율이 급등하면서 손해를 봤는데, 올해도 실적 하락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조기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꺾인 데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 충돌로 중동 지역에서 전운이 감돌면서 환율이 연일 10원 가까이 뛰고 있다. 국내 기업들의 외화 빚이 역대 최대 수준으로 불어난 가운데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실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 환율 1400원 찍자 기업들 ‘초비상’
16일 한국은행 국제투자대조표에 따르면 지난해 말 한국의 비금융기업(기업) 대외채무는 역대 최대인 1626억1200만 달러(약 226조6811억 원)로 집계됐다. 2022년 말(1540억2820만 달러) 대비 85억8380만 달러 늘었다. 국내 기업들의 외화 관련 채무가 늘어난 것은 해외 투자가 늘어난 데다, 올해 달러 약세를 예상하고 달러화 빚을 많이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고금리 장기화 등의 여파로 환율이 치솟으면서 이자 비용 증가로 인한 기업들의 실적 악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해 말 기업별 외화부채 규모를 살펴보면 SK하이닉스(29조7348억 원), LG에너지솔루션(8조6942억 원), 아시아나항공(5조2903억 원) 등이 조 단위의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찬희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환율도 문제지만 국제유가가 상승한다는 것도 국내 기업으로서는 큰 부담”이라며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질 경우 내수 기업들의 고통은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환율 상승 여파로 해외 주재원과 유학생들도 울상을 짓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3년째 근무 중인 황모 씨(33)는 “현지 물가가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환율 급등까지 겹치면서 유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소비를 확 줄였다”며 “다들 외식을 안 하다 보니 한인 식당이 썰렁하고, 고유가 영향으로 운전도 잘 안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 연말까지 강달러… 환율 1450원 전망도
전문가들은 달러화 강세 기조가 올 하반기(7∼12월)까지는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2022년 9월 28일 기록했던 전 고점(1439.9원)을 넘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환율이 1400원대로 올라선 건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미국이 고강도 긴축에 나섰던 2022년 이후 네 번째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원은 “외환 당국에서 개입하더라도 환율이 1450원까지는 상승할 것으로 본다”며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시점까지는 강달러 현상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 경제도 강달러의 영향으로 타격을 받고 있다. 이날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54.28엔에 거래되며 1990년 6월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이 “주시하면서 만전의 대응을 하겠다”며 구두 개입성 발언을 했지만 엔화 약세를 막진 못했다.
국내 외환·금융 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자 기획재정부는 이날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중동사태 관련 관계부처 합동 비상점검회의를 열고 “시장이 우리 경제 펀더멘털과 괴리돼 과도한 변동성을 보일 경우에는 즉각적이고 과감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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