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원수]계엄 목격자의 폭로, 국정원은 시작일 뿐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9일 23시 18분


정원수 부국장
정원수 부국장
윤석열 정부 초기 전직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국정원장 특보가 왜 그렇게 많냐. 뭘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실제 당시 국정원엔 원장특보 여러 명이 전문 분야를 나눠 맡고 있었다. 국정원 청사에 사무실을 두는 원장특보는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한다. 외교관 출신의 당시 김규현 국정원장을 크게 신뢰하지 않던 윤 대통령이 원장특보들을 통해 국정원 내부를 통제하는 비정상적 운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전직 간부의 불만 취지였다.

“대통령 신뢰와 부당 명령은 다른 문제”

재임 내내 대통령 신임 논란을 겪었던 국정원장은 지난해 6월 초유의 인사 파동을 겪더니, 같은 해 11월 해임됐다. 원장 해임 직후 국정원 1차장에 홍장원 원장특보가 임명됐다. 대통령 실세와의 인연으로 차기 국정원장 후보로도 오르내렸고, 새 국정원장이 임명되기 전 두 달 가까이 국정원장 대행으로 정보기관장 역할을 했다. 북한 동향 등에 대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도 했고, 대통령이 주재한 술자리에도 몇 번 불려 갔다고 한다. 말 그대로 ‘실세 특보’의 영전이었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2시간 전인 3일 밤 윤 대통령은 당시 홍 차장에게 안보폰으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한두 시간 후에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전화기를 잘 들고 대기하라.” 두 시간 뒤 윤 대통령은 “대공수사권을 줄 테니 국군방첩사령부를 도와 지원하라”며 “이번 기회에 다 잡아들여 싹 다 정리하라”고 했다. 우원식 한동훈 이재명 등 여야 정치인을 위치 추적해 방첩사령부의 체포 활동을 도우라는 명령이었다. 시대착오적 계엄의 한복판에 정보기관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는 평소 멘토로 여기던 국정원 전직 고위 간부와 이 같은 내용을 상의했고, 결국 ‘정보기관을 동원한 정치인 불법 체포 및 구금 계획’으로 6일 폭로됐다. 당일 국회에서 홍 차장은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2차 비상계엄 우려와 정의감이 폭로의 계기였다는 것이 그의 폭로를 지켜본 공직자의 설명이다. 그는 “대통령의 신뢰 문제와 부당한 명령은 다른 문제”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경질된 홍 차장은 폭로 뒤 주변에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기는 한데….”

육군사관학교 졸업 때 대표 화랑으로 뽑힐 정도였던 그는 국정원 해외파트에서 근무하면서 자부심이 컸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상처를 남긴 게 ‘윤석열 검찰’의 국정원장 특수활동비 상납 의혹 수사였다. 검사 윤석열의 이름을 알린 게 댓글 조작 등 국정원 수사였고, 특활비 의혹은 국정원을 상대로 한 두 번째 수사였다. 검사 윤석열은 “국정원이 이러면 안 된다”며 수사를 밀어붙였다. 국정원 일탈을 두 번씩이나 수사한 검사가 수사 대상이던 국정원 간부를 대통령이 된 뒤 요직에 중용하고, 그 간부에게 불법 행위를 지시했다가 거부당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자기 파괴를 부른 분열적이고 모순된 행동을 이보다 더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 있을까.

국무위원, 참모도 ‘있는 그대로’ 말해야

국무총리를 포함한 국무위원들, 대통령실의 참모들은 대통령의 신뢰를 받았으니 고위직에 임명됐을 것이다. 중요한 건 홍 차장의 말처럼 대통령의 신뢰를 받는 것과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날 밤의 목격자들인 국무위원과 대통령의 참모들, 군인, 경찰 등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의 조각을 ‘있는 그대로’ 국민들에게 고해야 한다. 비상계엄의 진상 규명에 협조하는 것은 대통령의 배신자가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역사의 기록자가 되는 길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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