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할 때부터 불길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았거든요. 1924년 이야기입니다. 경상북도에서는 벌써 모내기가 끝났을 7월에도 실적이 70%가 안 됐죠. 곡창이었던 호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광주에서는 4월 이후 내내 가물어 모내기 한 논이 예년의 10%에 그쳤죠. 전북평야는 절반 이상이 백사장으로 변한 상태였습니다. 마실 물까지 부족했죠. 어디를 가나 농민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공포가 어려 있었습니다. 결국 가뭄은 수십 년만의 한재(旱災)가 됐습니다. 정도와 범위 모두 가공할 수준이었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충 벼멸구가 기승을 부리고 동남풍까지 불어 남은 벼까지 말려 죽였습니다. 논바닥이 섭씨 54도를 넘기도 했죠. 한재에 충재(蟲災)와 풍재(風災)가 겹쳤던 겁니다. 황해도에는 7월 말에 물난리까지 났죠. 좁은 땅에 한재와 수재(水災)가 이어지는 총체적 재난상황이었죠.
농민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하고 타들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눈물 흘렸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우제뿐이었습니다. 남부 일부지방에서는 무덤을 파헤쳤죠. 가뭄이 심한 이유는 명산에 묘를 썼다는 미신 탓이었습니다. 얼마나 애가 탔으면 그랬을까 싶습니다. 광주에서는 이런 부인들을 막으려던 일제 순사들이 ‘백성이 아사지경에 이르면 관리라고 좋을 것이 무엇이냐’고 따지자 멈칫하기도 했죠. 가을이 되면서 쌀이 귀해져 쌀값이 폭등했습니다. 무려 30% 넘게 뛴 곳도 있었죠. 그때는 쌀을 일본으로 실어가고 좁쌀을 만주에서 들여왔습니다. 쌀값이 치솟자 좁쌀가격도 급등했죠. 질경이 부들 고구마줄기나 소나무껍질로 연명하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말 그대로 초근목피였죠. 거지들이 넘쳐나고 봇짐을 싸들고 방황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가뭄 이재민만 수백만 명에 이른다고 추산됐을 정도였죠.
호남에서는 학교를 그만두거나 도시락 없이 오는 학생이 속출했습니다. 한 보통학교에서는 전교생 867명 중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은 203명뿐이었죠. 집에 가서 먹고 오겠다는 학생 중 다수는 풀뿌리 밥이 창피하거나 굶는다고 말하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먹지 못하니 한창 뛰어놀 학생들이 교실에서 꼬박꼬박 졸았죠.
동아일보는 7월 27일자 사설에서 ‘조선 안에는 상당한 구제기관이 없다. 하루라도 빨리 실태를 조사해 곡물의 준비, 곡가의 조절, 공과의 면제 등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총독부는 ‘부업 장려’니 ‘산림 양성’이니 한가한 소리만 했죠. 동아일보는 8월 27일자 사설에 ‘오직 바라는 것은 민중이 서로 애호하는 것’이라고 호소했습니다. 이것이 계기였을까요? 9월 24일 조선기근구제회가 창립됐습니다. 3000여 각종 단체에 통지서를 보내 성금을 요청했죠. 특이한 점은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했던 점이었습니다. 임원 25명의 절반이 넘었죠.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합체라는 점에서 기근구제회는 신간회의 선구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경성의 한 처녀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치마 솜바지 토시 귀이개 30전이 든 보따리를 건넸고 한 보통학교 학생들은 코 묻은 돈을 아껴 22원40전을 모아 보냈죠. 황해도 학생들은 콩밭에서 주운 콩을 팔아 만든 4원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일본 도쿄에서도 유학생을 중심으로 구제회를 만들고 200원을 걷어 송금했죠. 액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동포애가 넘쳐났습니다.
동아일보와 시대일보 조선일보도 알림을 공동 게재하고 관련 기사를 적극 실었죠. 동아일보는 기자 국기열을 호남에 파견해 생생한 르포를 싣기도 했습니다. 배달원들은 기근구제회 선전문을 무료로 배달하고 지국 사무실은 지역 기근구제회의 거점이 됐죠. 하지만 일제는 대구에서 열려던 기근참상 연설회를 ‘불안을 준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보통학교 학생들이 배포하던 선전문을 압수하는가 하면 도쿄에서 개최한 기근구제 강연회를 중간에 해산시켰습니다. 기근구제회를 통해 우리 민족이 다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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