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차례상 차리기 만큼이나 호칭 스트레스 커
국립국어원 ‘OO 삼촌·고모’, ‘OO 씨’ 호칭 제시
관련 기관 지속적 캠페인에도 변화 지지부진
여가부 관계자 “시간이 지나면 차츰 개선될 것”
“이번에는 또 어떻게 안 부르고 지나갈지 고민이다. 나보다 어린 남편의 사촌동생에게 ‘아가씨’라고 부르며 존대를 해야하니 내가 마치 양반집 종이 된 기분이다.”, “도련님이나 아가씨라는 호칭은 며느리 종 부리듯 하던 시대의 소산 같다.”
올 추석에도 시가 방문을 앞둔 기혼 여성들의 ‘호칭’ 불만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나 갓 결혼한 여성들은 익숙하지 않은 호칭을 두고 명절 차례상 차리기 만큼이나 큰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실제로 시대에 맞지 않는 불평등한 호칭을 두고 결혼한 여성들 사이에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하지만 관련 기관들의 캠페인 등 노력에도 변화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대표적 성차별적 호칭으로는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남편의 남동생)을 부르는 ‘도련님’과 손아래 시누이(남편의 여동생)를 일컫는 ‘아가씨’가 꼽힌다. 이는 과거 노비가 양반집 자제를 불렀던 호칭으로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다.
맘카페와 커뮤니티 게시판 등에서는 이같은 호칭과 관련한 불만의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시가에 가면 내가 하녀가 된 기분”, “조선시대 종들이 쓰던 말을 여성에게 쓰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대하는 문화가 만들어진다”, “현 시대와 괴리가 너무 큰 호칭” 등 거부감을 드러냈다.
“나는 나보다 어린 남편 동생들에게 ‘도련님’, ‘아가씨’라고 부르면서 존댓말까지 사용하지만, 남편은 내 동생들에게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해도 다들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라는 토로도 있다. 이 글에는 “내가 아마 시동생에게 반말하고 이름 불렀으면 난리났을 것”, “시부가 10살이나 어린 남편 사촌동생에게도 호칭을 쓰고 존대하라고 하더라” 등 공감한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결혼한 시동생이나 손아래 시누이의 남편을 부를 때 쓰는 ‘서방님’이라는 호칭도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많다. “내 남편도 아닌데 왜 다른 남성을 ‘서방님’으로 불러야 하느냐”는 것이다.
2019년 국민권익위원회와 국립국어원에서 실시한 ‘일상 속 호칭 개선 방안’에 참여한 여성 응답자의 94.6%와 남성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6.8%가 ‘도련님·서방님(남편 여동생의 남편)·아가씨’라는 호칭을 ‘바꾸자’고 답했다.
이에 여성가족부와 국립국어원, 여성민우회 등 관련 기관들은 성차별적 호칭 개선을 위해 명절을 앞두고 지속적으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국립국어원은 지난해 호칭 관련 안내서를 발간했다. 안내서에는 자녀의 이름을 넣어 ‘OO 삼촌·고모’라고 부르거나, ‘OO 씨’ 혹은 직접 이름을 부를 수 있다고 제시했다. 여가부도 ‘OO 씨’로 통일하는 비슷한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도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도련님’, ‘아가씨’ 등의 호칭 대신 ‘OO 씨’ 등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서울시 성평등 명절사전-2020 추석편’을 발표하는 등 호칭과 관련한 시민참여 캠페인을 2018년부터 진행해오고 있다.
다만 당사자인 며느리들이 느끼는 효과는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호칭 개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윗세대와 발 벗고 나설 수 없는 ‘며느리’의 가족 내 위치가 변화를 가로막는 주된 요인으로 꼽았다. 또 호칭 개선안이 많은 사람에게 홍보가 덜 됐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한 맘 카페 회원은 “예전에 가족간의 호칭 관련해서 바뀌었다는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이후에 호칭을 바꿔서 부르냐”면서 “바꿔보고 싶지만 쉽지 않다. 어른들이 알아서 정리해주면 좋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며느리가 직접 나서 시도하기가 어렵다는 토로다.
용기낸 며느리들도 있지만, 어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는 경우도 있다. 지난 9일 한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처음으로 도련님이 아닌 OO 씨라고 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시동생을 ‘도련님’으로 불러왔다는 그는 “이번에 (식구들이) 모였을 때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는데 시모가 보기 그렇고, 듣기도 거북하다면서 ‘도련님’이라고 하라더라”고 했다.
여가부 관계자는 동아닷컴과의 통화에서 “호칭은 언어 생활 부분이기 때문에 전문가들도 단시간에 바꾸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면서 “법률 등 강제적으로 시행할 수도 없는 탓에 사회적으로 논의가 되도록 판을 깔아주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르신들의 문제라고 탓하기보다는 젊은층들이 호칭 문제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확산될 수 있게끔 만드는 게 중요하다”라며 “시간이 지나면 차츰 개선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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