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가 군부 독재 정권 아래 신음하던 시절에 태어난 작가 이반 나바로 씨(42). 1997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네온 아트’ 작가로 주목받는 그가 빛을 주제이자 소재로 쓰는 데는 유년기 체험이 녹아있다. 1970년대 피노체트 정권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저녁마다 통행금지와 단전 조치를 내렸다. 억압의 수단으로 활용된 전기에 대한 암울한 기억을 작가는 예술작품으로 녹여냈다. 자유와 희망을 향한 목마름에 빛을 활용한 작업으로 접근한 것이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는 작가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 현대에서 27일까지 열린다. 네온조각과 설치작품 14점을 선보인 전시의 제목 ‘299 792 458 m/s’는 빛의 속도를 뜻한다. “나에게 미술가가 된다는 것은 멋진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 그 메시지는 생경한 구호 대신 은유적 표현으로 재해석되면서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가 네온과 거울로 만들어낸 착시현상은 벽과 바닥이 무한대로 뚫린 듯한 놀라움을 맛보게 한다. 02-2287-3500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디자인(DZINE·본명 카를로스 로롱·44)의 ‘Thinking of forever’전도 재미와 의미를 버무린 전시다. 그는 미국의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2세대 작가다. 이번 전시에는 자전적 요소와 이민 가정의 독특한 문화를 아우른 작업을 내놨다. 26일까지. 02-730-2243
미국에서 활동하는 히스패닉계(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계 미국 이주민과 후손) 작가로서 이들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과 고민을 주류 미술계가 이해할 수 있는 현대미술 어휘로 풀어냈다. ‘비주류’란 약점을 강점으로 바꾼 사례다. 서구 문화에 대해 해박하지만 정작 자신의 뿌리에 무지한 국내 젊은 작가들이 배울 만한 점이다. 미술과 담 쌓은 사람도 흥미롭게 볼 만한 전시들이다.
○ 네온과 거울의 신기한 마법
나바로 씨는 정치사회적 주제를 대중이 공감하는 작품으로 녹여내는 데 능숙하다. 최근 뉴욕의 공원에 ‘이 땅은 너의 땅’이란 문구를 네온으로 쓴 대형 급수탑을 선보여 이민자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이번 전시에는 보안 펜스를 백색 형광등으로 제작한 ‘울타리’를 비롯해 네온 거울 문자를 활용해 마법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이미지의 환영을 제시한 작업을 내놨다. ‘울타리’는 ‘벽은 폭력으로부터 선을 긋고 보호하는 힘을 가진 것’이란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말에 영감을 받아 만든 것으로 공간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2011년부터 실재하는 초고층 빌딩을 네온 조각 작품으로 변환하는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취조실에서 쓰는 일방 투시 거울과 보통 거울, 조명을 조합한 작품은 초현대식 건물의 꼭대기나 우물에서 까마득한 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아득한 느낌을 준다. 건물의 높이가 정치, 경제적 권력을 상징한다고 얘기하는 작가는 접근이 불가능한, 추상화된 공간으로 권력을 은유하는 듯하다.
○ 장신구와 거울의 눈부신 마법
디자인 작가는 그라피티 작업을 하던 무명시절, 저명한 화상인 제프리 다이치에게 발탁되면서 주류 미술계로 진입했다. 번쩍거리는 화려함으로 시선을 끄는 작품의 소재는 오래된 장신구나 잡다한 기념품들. 빈티지 트로피를 크리스털과 순금 등으로 장식한 설치작품 ‘이민자들’은 푸에르토리칸 이민자에게 보내는 경의를 담은 것이다. 이 밖에 거울과 낡은 장신구로 제작한 샹들리에, 거울에 기하학적 균열을 만들고 그 틈을 크리스털로 채운 색다른 거울회화 등 10여 점이 어우러지면서 눈부신 공간을 연출한다. 고급과 하위문화, 예술과 일상 등 상반된 것을 뒤섞은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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