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 판문점 북·미 정상회담을 놓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 음흉한 사업가 출신이라던 세평이 트위트 한 방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굴복시킨 영웅이라는 극찬으로 바뀌었다. 김정은은 이런 평가가 나올 것을 몰라 판문점에 온 것일까. 다양한 루트를 통해 구한 사실들을 토대로 최근 각국의 외교전과 심리전을 ‘복기(復棋)’해본다.
미·중 무역분쟁은 화웨이에 대한 제재를 계기로 미국 우세로 기울었다. 미국은 6월 1일 발간한 인도태평양전략보고서에서 대만을 국가로 표기했다. 중국이 주장해온 ‘하나의 중국’과 ‘신형(新型)대국관계’를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홍콩에서 대규모 반중시위가 터졌으니 누가 봐도 중국의 열세가 분명했다. 그렇게 중국이 몰리고 있을 때 북한이 ‘회심의 한 수’를 던졌다. 트럼프에게는 김정은 명의의 친서를 보내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는 방북을 요청한 것.
北, 궁지에 몰린 시진핑 활용
이에 대해 한 원로 정치인은 “북한 외교 엘리트들은 궁지에 몰린 시진핑 활용안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6월 11일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김정은으로부터 아름답고 따뜻한 친서를 받았다’고 발표했는데, 북한 처지에서 이는 ‘그린 라이트’였다.
그리고 6월 17일 북한과 중국은 6월 20~21일 시진핑이 북한을 국빈 방문한다고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시진핑은 대국 지도자라는 명예를 버리고 부인과 함께 아들뻘도 안 되는 김정은을 만나러 가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시진핑이 김정은을 활용해 트럼프에게 도전하려 한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중국은 6·25전쟁을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도운 ‘항미원조(抗美援朝)전’이라고 부른다.
6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시진핑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고 헌화했다. 14년 전 2박 3일간 평양을 방문한 후진타오도 하지 않은 친북(親北) 행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에야 북·중 우의탑을 참배했는데, 이는 ‘북·중은 항미로서 하나가 되자’는 의도로 읽혔다.
미국은 동북아보다 하루가 늦다. 북·중 정상회담 발표가 있은 다음 날인 6월 17일(현지시각) 트럼프는 ‘타임’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돌연 “김정은으로부터 생일축하 편지를 받았다” “어제(16일) 전달받았다”며 친서를 흔들어 보였다. 트럼프의 생일은 6월 14일이니, 이 친서는 11일 밝힌 것과 다른 친서로 추정됐다. ‘타임’은 이 내용이 들어간 인터뷰 기사를 시진핑의 방북이 이뤄진 다음 날인 6월 20일(현지시각)자 잡지에 게재했다.
트럼프와는 친서외교
그리고 6월 23일 시진핑의 방북을 요란하게 보도한 북한 ‘노동신문’이 1면에 트럼프가 보낸 친서를 보고 있는 김정은의 사진을 대문짝만 하게 실었다. 북·미 간 친서외교가 펼쳐지고 있음을 북한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그제야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시진핑을 끌어당겼기에 트럼프가 딸려왔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시진핑의 방북은 충격이었기에 청와대는 해명에 나섰다. 6월 25일 “우리는 공개되지 않는 활동을 많이 한다”며 6월 1일과 2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중국 방문을 공개한 것. 이어 “정 실장의 방중으로 우리는 시 주석이 한국을 방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북한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6월 26일 6개국 통신사와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북·미 협상 재개를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며, 그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달려 있다”고 언급했다.
6월 27일 북·미 회담의 미국 측 실무대표인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한국과 대북 문제를 조율한다는 명분으로 방한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북한 외무성의 권정근 미국 담당 국장이 “우리가 협상해도 조·미가 직접 마주앉아 하게 되는 만큼 남조선 당국을 통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개인담화를 발표했다.
권 국장의 담화가 비건을 대표로 한 미국을 향한 것이라는 점을 관계자들이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사카 G20 정상회담을 위해 오사카에 간 문 대통령은 시진핑을 만났지만, 시진핑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오사카에서 역시 관심을 끈 것은 6월 28일 짧은 만남에 이어 29일 80분간 회담을 한 트럼프와 시진핑의 담판이었다.
소식통들은 6월 28일의 짧은 만남에서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김정은이 만나고자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본다. 트위터를 해보라는 권유도 이때 한 것으로 추정한다. 80분간의 2차 미·중 정상회담이 있기 직전 트럼프가 “만약 김(김정은) 위원장이 이 글을 본다면 (판문점) 비무장지대에서 그와 만나 악수하고 인사하고 싶다”는 트위트를 날렸다는 점에서다. 북한은 5시간 만에 트럼프의 트위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왔다.
그날 오후 한국에 온 트럼프는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과 만찬을 하고 다음 날 아침 기업인들과 만났다. 하지만 관계자들의 관심은 온통 트위트 한 방으로 성사된 북·미 정상회담에 쏠렸다. 북·미 정상회담은 즉흥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6월 29일 오사카에서 시진핑과 2차 담판을 하기 전 트럼프는 “어젯밤 그(시진핑)와 함께 있었다. 어젯밤에 사실상 많은 것이 이뤄졌다”고 말했고, 시진핑과 회담을 끝낸 후에는 미·중 무역분쟁을 일시중단한다는 발표를 했다. 그때 중국 라인과 함께 서울에 있던 비건 등을 통해 북한과 충분한 논의를 했을 수 있다.
그 시기 문 대통령은 자신도 참여하는 남북미 정상회담 실현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서는 트럼프부터 설득해야 했다고 판단한 듯, 6월 30일 판문점으로 가기 전 트럼프와 함께 한 기자회견에서 “개방·포용·투명성이라는 역내협력 원칙에 따라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을 조화롭게 추진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는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지만 경제는 중국과 해야 한다 보고,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외교를 강조해왔다. 미국과 일본이 추진하는 대중(對中) 포위 전략인 인도태평양전략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것이다. 그리고 경제 위주의 신남방정책을 내놓았는데, 미국은 한국을 인도태평양전략에 참여시키고자 신남방정책과 인도태평양전략은 유사성이 많다는 주장을 해왔다. 북한과의 관계 모색을 위해서는 미국의 협조를 받아야 하니 문 대통령은 인도태평양전략을 조화롭게 추진한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트럼프 위해 경호 쇼 포기
북한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북한은 회담 하루 전 김정은의 1호차를 개성으로 보내놓고, 김정은은 당일 헬기를 타고 개성으로 와 대기하다 판문각으로 갔다. 김정은은 미국의 요구로 경호쇼는 하지 않는 대신, 문 대통령은 같이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전했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자유의 집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때 문 대통령은 옆방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트럼프는 2분간 단독 만남이 있었던 4월의 한미정상회담을 의식한 듯 2분간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해놓고 53분간 그와 대화했다. 그러나 통역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대화는 26분간이고, 상대의 발언시간을 빼면 그가 활용한 시간은 13분에 불과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서 인사말을 나눈 시간을 뺀다면 양측이 주고받은 대화는 ‘별로’가 된다. 이는 중요한 합의는 비건과 권정근을 대표로 한 실무진이 이미 했다는 의미다. 이 회담 후 트럼프는 김정은을 미국에 초청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실무회담에서 충분한 논의가 있었다는 암시다.
한 소식통은 “북한은 하노이 실패를 계기로 좀 더 영악한 방법을 찾아냈다. 김영철, 김여정, 이선권 등 강온파를 막론하고 남북관계 개선에 참여했던 세력을 일선에서 배제함으로써 한국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리고 외무성을 중심으로 친서외교를 펼쳐 통미봉남에 성공했다. 그런 점에서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로 시작해 평양 2차 남북정상회담까지 이어진 남북화해는 미끼였다”고 말했다.
전직 국가정보원 요원은 “트럼프는 김정은의 꾀에 속지 않았다. 트럼프는 하노이 망신을 당한 김정은이 5월에 미사일을 쏜 것을 사소한 일이라고 하면서 제재를 강화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북한이 친서외교를 펼치자 중국으로부터 북한을 떼어내기 위해서인지 덥석 받아주며 미국으로 초청까지 했다. 이런 점에서 중재를 한 시진핑은 무역제재 일시정지만 받아냈으니 트럼프에게 이겼다고 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중국의 간판 철거 몽니
흥미로운 것은 중국의 태도다. 중국은 판문점 북·미 정상회담이 준비되자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베이징 시내의 현대차와 삼성전자 등의 간판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철거했다. 이에 대해 한 소식통은 “한국이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을 지지하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중국은 한국이 미국으로 기운 지난해 7월에도 유사한 행동을 했는데, 이는 한국 측에 보내는 ‘꼼짝도 하지 말라’는 신호로 이해된다.
문 대통령은 평화무드 조성을 위해 중재하겠다며 한반도 평화프로세서를 강조하지만, 미국과 중국, 북한은 코리아 패싱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강제징용 판결 문제로 갈등을 빚던 일본마저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에 나섰으니, 문재인 정부의 중재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심각해지는 동북아 외교대전에서 한국은 중국에게조차 심각한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평화무드 조성은 북·미·중, 그리고 일본이 일으키는 바람에 흔들리는 초롱불이 될 공산이 크다.
군사적으로 미국을 이길 수 없는 김정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김정은의 방미가 이뤄진다면 북한은 핵개발도 하지 못한 채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이란과 달리 트럼프가 낙선하거나 임기를 마칠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다. 북한 엘리트들은 엄중한 시기에는 경쟁자를 최대한 누르면서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상책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북한 인민에게 시진핑과 트럼프를 상대하는 김정은을 강조하면 김정은의 내부 권력도 공고히 할 수 있으리라고 봤을 것이다. 동북아의 심리전·외교전은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