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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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5-01-18~202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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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법재판소 왜 사진취재 불허하나…100년전 법정과 비교해보니[청계천 옆 사진관]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 선택한 사진은 1925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법정 사진입니다. 재판을 받는 피의자의 얼굴과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줄을 선 시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사진 위에는 피의자가 직접 쓴 붓글씨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 헌법재판소 제공 사진의 의미최근 온 국민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재판과 관련하여, 어제(2025년 2월 14일)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사진을 먼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서울 일부 지역에서는 늦은 오후에 열린 겨울아시안게임 여자 피겨에서 금메달을 딴 김채연선수의 사진이 1면을 장식했지만, 전국판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문형배 소장 권한대행에게 오른손을 들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동시에 왼손으로는 항의하는 변호사를 만류하는 순간이 포착된 사진이 실렸습니다. 해당 사진의 출처는 ‘헌법재판소 제공’으로 표기되었습니다.이와 관련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헌법재판소에는 이렇게 완벽한 보도사진을 촬영하는 전담 사진가가 따로 있는 것일까요? 혹은 윤 대통령의 얼굴이 다소 부어 보인다는 이유로 부적절한 사진을 선정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헌법재판소 내부에서 실시간으로 촬영하는 사진기자는 없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고정형 카메라를 통해 변론 과정을 녹화하고 있으며, 언론사는 이 영상 파일을 웹하드에서 다운로드한 뒤, 필요한 장면을 캡처하여 보도에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 제공’이라는 출처가 붙게 됩니다. 그런데 영상을 캡처해서 만드는 사진은 사진기자가 스틸 카메라로 포착하는 현장 사진에 비해 덜 또렷합니다. 대통령과 변호사의 얼굴이 부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입니다. ●사진은 풀로 취재. 사진기자협회에서 4명. 일종의 포토 타임 포토세션에만 촬영그렇다면 신문사에 소속된 사진기자들은 재판을 직접 촬영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진기자들은 헌법재판소와 사전 협의를 통해 ‘POOL(집단 취재)’ 형식으로 변론 장면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진기자협회 및 인터넷 언론에 소속된 사진기자들이 매번 변론이 열릴 때마다 4명씩 들어가 취재합니다. 다만, 전체 변론 과정을 촬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재판 시작 후 약 3분~5분 정도 허용되는 ‘포토 세션(photo session)’ 동안만 촬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 공방 과정은 카메라로 기록할 수 없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변론이 끝나면 동영상 파일을 웹하드에 올려놓습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유받은 언론사들이 영상을 다운받은 후 캡처 프로그램을 이용해 장면 장면을 사진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의미있는 순간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이 이번 2025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을 보도하는 신문사들의 방식입니다. 물론 풀 취재를 통해 확보된 고해상도의 사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워낙 초반부에만 촬영한 장면들이라 뉴스의 흐름을 보여주기 어렵습니다. 과거 탄핵 심판 당시에는 헌법재판소가 변론 과정을 영상으로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POOL 취재 사진이 더 많이 사용되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릅니다. 게다가 최근 동영상 해상도가 향상되고 캡처 프로그램이 발전하면서, 작업이 더욱 용이해진 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00년 전 재판 보도의 방식이번에 소개하는 1925년 동아일보 속 재판 보도 역시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이완용 암살을 기도한 이동수의 공판이 열린 장면이었으며, 방청을 위해 500~600명의 시민이 몰려들어 법원 앞이 혼잡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동수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의 필적(서명)까지 함께 실렸는데, 이는 필체를 통해 피의자의 성격이나 심리를 파악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당시 재판부는 ‘공안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방청을 금지한다고 발표하였고, 이에 변호인단은 재판이 공공 질서에 미칠 영향이 없으므로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며 방청 금지 조치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재판을 취재하던 신문 기자들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며, 재판 방청 금지가 과도한 결정임을 지적했습니다. 특히 법정 내에서 사진 촬영을 금지한 조치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당시 동아일보 김동진 기자 조선일보 박팔양 기자, 시대일보 강호 기자 등이 직접 법원장을 만나 교섭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기존 방침을 유지하였고, 기자들의 촬영은 결국 허가되지 않았습니다.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재판과 관련한 피의자 사진과 방청객의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헌법재판소가 고정 카메라로 촬영 후 익명처리가 필요한 부분만 드러내고 언론과 국민에게 동영상을 공개하는 현재 상황도 살펴보았습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재판의 공개 수준은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법정 내 촬영 및 보도 방식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을 느끼셨나요?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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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목공 도구부터 예술

    톱, 펜치, 먹줄, 롤러 등 각종 목공 도구 모양의 장식이 벽에 붙어 있습니다. 젊은 공예가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합니다. ―서울 중구 신당창작아케이드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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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손대면 톡! 하고”

    잘 포장된 과일을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봐달라는 안내문이 붙었습니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라는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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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각기 다른 색

    각기 다른 색깔의 재봉실이 벽면에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데 저마다 역할을 하겠지요? ―서울 중구 신당지하상가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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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들의 모임 -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청계천 옆 사진관]

    ● 사회부 기자들이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열다백년사진 99번째 포스팅입니다. 오늘은 개인 소회를 먼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백년사진이라는 코너를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가능한 1주일에 한 번씩 사진 관련 얘기를 올리려고 했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이면 100회가 됩니다. 아무도 해보지 않은 포맷의 글이라 서툴기도 하고 이 방법이 독자들에게 유용한 콘텐츠인지에 대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이 글을 쓰는 저는 동아일보 사진기자입니다. 졸업 후 현재까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몇 번의 고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후회보다는 만족이 큰 직업입니다.현장기자와 에디터 역할을 하면서, 한국의 사진기자들이 지금 찍고 지면과 인터넷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사진이 제대로 길을 잡고 가는 것인지, 혹시 또 다른 방법은 없는지를 생각하다가 ‘온고지신’의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100년 전 근대 신문이 처음 만들어지고 사진기자들이 일을 시작하면서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카메라로 기록하기 시작했던 방식은, 우리가 지금 찍고 유통시키는 이미지의 원류 같은 것일 겁니다. 100년 전 사진기자들이 세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방식은 지금까지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하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연구와 고민이 있었을 겁니다. 미국이나 유럽 사진기자들의 현실 재현 방식이 차용되기도 하고, 미술이나 그래픽의 소통 방식이 사진에 응용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분단 사회라는 특수함과 군부 독재와 민주화의 과정도 우리 사진에는 특징으로 녹아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오늘의 신문 사진 형식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이유로 옛날 사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야 더 적절하고 좋은 사진을 신문 지면과 인터넷에 남길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백년사진은 그런 점에서 신문 사진의 답을 구하기 위한 저의 자구책일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고른 사진은 1925년 2월 7일 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기자들 모임” 사진입니다. 철필 클럽이라고 하는 사회부 기자들의 모임인데 한국 신문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진일 수 있겠습니다. 아래 여자 토론 사진은 기자들 강연과 관계없는, 조선 여자학원 주최로 천도교 기념관에서 열린 신춘 남녀토론회 모습입니다. 기사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문 강연 성황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서울 안 각 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조직된 철필(鐵筆) 구락부(club)에서 주최한 신문강연회(新聞講演會)는 조선에 아직 이 종류의 강연이 처음이었음과 또 연사가 일반 사회에 날마다 ‘뉴스’를 제공하는 신문 꾸미는 기자이었으므로 정각 전부터 청중이 답지하여 근래에 처음 보는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제 그 경과를 자세히 보도하면 정각에 동아(東亞)의 김동진(金東進)씨의 간단한 개회사가 끝나자 뒤이어 조선의 민태원(閔泰瑗)씨의 광장설이 있고 그 다음 동아의 최원순(崔元淳)씨 조선의 리서구(李瑞求)씨 매신(每申.매일신보)의 홍승구(洪承耉)씨 등 여러 변사의 장시간 강연이 끝나자 그다음 자유 등단이 되어 계속하여 조선의 리석(李奭)씨와 동아의 최긍(崔兢)씨의 강연이 있어 청중에게 많은 감흥을 주고 10시 경에 산회하였는데 예정한 변사 동아의 송진우 (宋鎭禹)씨가 사고에 의하여 미참석하였음은 섭섭한 일이었으며 더욱 이번은 전부 사회부 근무 기자로써 한 강연이므로 조선 신문사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을 끼쳤다더라.게재지 동아일보 저작권게재일 1925-02-07● 1924년 겨울 결성된 사회부 기자들의 모임 사회부 기자는 사건 사고를 담당합니다. 경찰서 담당 기자, 법원과 검찰청 담당 기자, 시청과 구청 담당 기자 등이 있습니다. 100년 전에도 그랬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가장 힘들고 바쁜 기자들입니다. 2024년 말 전남 무안공항에 추락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와 윤석열 대통령 계엄 발표 이후 이어지고 있는 시위와 헌법재판소 변론, 법원에서의 공방 등이 사회부 기자들의 취재 몫입니다. 그런 사회부 기자들이 100년 전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강연을 연 것입니다. 철필 구락부가 어떻게 구성되었던 조직인지 기사를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강연을 열기 3개월 전인 1924년 11월에 관련 기사가 있었습니다. 사회부 기자 중에서 일본인을 제외하고 조선인 기자들만 가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전에 있던 동우클럽의 후신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철필 구락 조직 - 각 신문 사회부 기자로 기자단체 조직부내 4군데의 조선문 신문사 사회부 기자 (社會部記者) 20여 명은 그저께 오후 5시경부터 부외 청량리 (淸凉里永導寺)에 모여 철필 구락부 (鐵筆俱樂部)라는 신문기자 단체를 조직하였는데부원의 자격은 어떤 신문사를 물론하고 부내에 있는 신문사에 재근하는 조선인 사회부 기자에 한한다하며 취지는 서로 친목하며 결속하여서 기자생활의 향상을 도모한다는 것인데 형식은 이번에 새로 조직한 것이나 그 전부터 있던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의 후신이라더라게재지 동아일보 저작권게재일 1924-11-21 게재여부 게재 [석간]판/면 0 / X2강연이 끝난 후 철픽 클럽이라는 기자협회는 일본인 기자까지 포함하는 조직으로 재편됩니다. 1926년 11월 기사입니다. 사회부 기자단 - 각 사 사회부 기자단체경성(京城)시내에 있는 각 신문 통신사 (新聞通信社) 사회부 기자로 발기한 경성 사회부기자단 (京城社會部記者團)은 그제 3일 오후 5시 반에 시내 돈의동 (敦義洞) 명월관(明月舘)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조선사람 일본사람을 합하여 참가자가 24명이었으며 『신문통신기자 본령(本領)을 본받아 정의(正義)에 입각하여 사회의 순정(純正)한 발달을 기함』이란 강령과 5개조의 규약을 통과하고 간사 5인을 아래와 같이 선거한 후 만찬과 여흥이 있은 후 동 10시 반에 산회하였더라.▲徐範錫(朝鮮日報)▲秋山(京城日報)▲栗原(朝鮮新聞)▲吉浦(電報通信)▲柳志永 (東亞日報)게재지 동아일보 저작권게재일 1926-11-05● 기자들의 모임 - 변한 것, 변하지 않은 것오후 5시를 조금 넘겨 만나서 10시 반쯤 회의와 식사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생활 습관 같습니다. 현재 기자들이 소속된 단체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한국기자협회는 취재기자, 편집기자, 사진기자 등을 포괄합니다. 관훈클럽은 중견 취재기자들 모임입니다. 편집기자협회와 사진기자협회, 어문기자협회 등은 신문사의 직능이 동일한 기자들끼지의 친목 단체입니다. 여기자협회도 따로 존재합니다. 방송사 기자들의 경우 한국기자협회와 함께 방송기자, 영상기자협회에 별도로 가입합니다. 인터넷 언론사의 경우도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단체들을 단체의 공식 홈페이지 내용을 참고해서 설명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기자협회는 전국의 신문·방송·통신사 소속 현직 기자들 1만 3천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대의 언론단체입니다.언론자유 수호의 기치를 내걸고 1964년 8월 17일 창립된 한국기자협회는 당시 군사정권이 추진하던 비민주적 악법인 언론윤리위원회법 저지를 위한 투쟁의 구심체로 창립되었습니다.언론자유수호, 기자 자질향상, 기자권익옹호, 조국의 평화통일, 국제교류 강화 등 5대강령을 표방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출처: 한국기자협회()-관훈클럽은 언론 연구와 친목 도모를 위해 1957년 1월 11일 창립한 언론인들의 모임입니다. 창립회원 18명의 작은 모임으로 출범한 관훈클럽은 가장 오래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한국의 대표적 언론단체로 성장하며 한국의 언론 발전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회원은 전현직 언론인 1,000여명입니다. - 한국사진기자협회는 사진기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취재 환경 개선을 통한 언론 문화의 발전과 보도사진의 지속적 연구를 목적으로 지난 1964년 4월 24일 한국사진기자단으로 출발했습니다. 한국사진기자협회 ● 개인적인 기자협회 활동사진기자인 저는 한국기자협회에 회비를 내고 사진기자협회에도 회비를 냅니다. 요즘처럼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는 기자들에 대한 비판 정도가 높아집니다. 안타깝지만 카메라를 메고 있기 때문에 신분을 속이기 어려운 사진기자들에게 집회나 행사 현장에서 따지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기자협회가 언론노조 산하에 있다고 해서 기자들이 민주노총의 지시를 받는다고 단순화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기자단체에 얼마나 참여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매년 열리는 기자협회 축구대회는 10년 전까지는 참가했었고 그 외의 행사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끔 언론의 미래에 관한 세미나 안내가 오면 관심을 갖기는 합니다. 사진기자협회 체육대회는 매년 참가하고 협회 부회장과 감사 역할도 몇 년간 하기도 했습니다. 사진기자협회 회원 중에 국회에 출입하는 기자들은 기자실을 같이 사용하면서 국회사진기자단이라는 임의 단체를 만들어 두고 있습니다. 기자실에서 노트북을 펴놓고 대기하고 있다가 일정이 생기면 국회 내외부에서 사진취재를 합니다. 대통령실출입사진기자단도 있습니다. 이들은 회비를 걷어 기자실 사무용품과 간식비 등을 충당하지만 홈페이지가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헌법재판소와 서울구치소, 법원 취재 등을 하는 사진기자들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그날 그날 인원 배치를 하는 에디터들의 결정에 따라 움직입니다. 사회부 기자들의 경우 경찰청 출입기자단과 검찰청 출입기자단, 법원출입기자단 등이 있지만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지는 않습니다.오늘은 100년 전 사회부 기자들의 강연을 기록한 사진을 통해 요즘 기자들 단체에 대해 대략 살펴보았습니다.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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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한때는 다이버!

    한때 다이빙 선수였는데 육지에 올라와서 포즈를 취하려니 영 어색하네요. 손님의 요청에 상인이 굴비를 말리는 중이랍니다. ―서울 중구 서울중앙시장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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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각양각색

    고기를 굽는 불판 모양이 다양하네요. 맛도 조금씩 다르겠죠? ―서울 중구 서울중앙시장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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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바닥에서 세계로: 전통 놀이의 놀라운 부활”[청계천 옆 사진관]

    색동옷을 차려입고 머리를 곱게 땋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땅바닥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어린이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놀이인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공기놀이를 하는 걸까요? 팽이를 돌리는 걸까요? 당시 사진기자는 아이들이 즐기던 놀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나 봅니다. 어떤 놀이인지 사진설명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사진 설명과 함께 아이들의 옷과 몸에 드리운 그림자는 반대편에 따뜻한 태양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각자 따로 추운 겨울 바깥에 나와 햇볕을 쬐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매주 토요일 한 주간 실렸던 백년 전 사진을 살펴보는 이번주 ‘백년 사진’에서 고른 사진은 1925년 1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귀여운 모습입니다. 내친 김에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릴 적 놀이를 동아일보 DB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아래 사진이 익숙하시다면 여러분은 아마 나이가 50은 넘으셨을 겁니다. 그 놀이를 하러 나간다고 할 때, 그리고 늦게까지 놀다 들어왔을 때 여러분의 부모님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최근 한국의 드라마 제작자들은 사라졌던 전통 놀이를 스토리텔링에 접목하고 있습니다. 각종 전통 놀이가 생존 게임으로 바뀌면서 글로벌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시즌 2까지 흥행에 성공한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딱지치기 한 판으로 승패를 가르는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구슬치기의 묘미는 긴박한 심리전으로 재구성되고, 팽이치기는 화려한 특수 효과를 더해 액션 장면으로 변모합니다. ‘둥글게 둥글게’가 생과 사를 가를 수 있는 인생사의 한 장면이라는 것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릴 적 놀던 놀이가 요즘 드라마의 소재로 활용되고 그게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현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말을 붙여도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된 걸까요? 한때 딱지와 구슬에 모든 것을 걸었던 유년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잘 논다는 것이 지금의 개념으로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게임 또는 핫플레이스를 여기저기 둘러보는 것이라면 옛날에는 팽이치기, 공기놀이, 고무줄 놀이, 딱지치기 뭐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제 유년시절이라고 해 봐야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이니 사실 전통 놀이에 사용할 노리개들을 문방구점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리개의 양과 질에서 선수(?)별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딱지치기를 한다치면, 신문지로 만든 딱지보다는 마분지 재질의 딴딴한 과자 박스로 만든 딱지의 경쟁력이 높았습니다. 구슬도 개수를 많이 갖고 있는 아이가 베팅이나 경기 참여 횟수가 많기 때문에 더 많은 구슬을 딸 확률이 높았습니다. 팽이도 가격대별로 크기와 회전 안전성에 차이기 있었습니다. 물론 팽이를 완벽하게 만드는 삼촌이 있다면 그 친구는 놀이터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놀이 도구를 준비하는데 드는 비용은 아주 크지 않았고 일단 준비가 끝나면 도구가 주는 변별력은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집중력과 기술이 중요했고 그 능력은 노는데 투입한 시간에 비례했습니다. 나름 공정한 게임이 펼쳐졌었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즐기는 놀이였기에 소통과 상호작용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전통 놀이는 이제 세대를 넘어 공감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중장년층에게는 잊고 있던 추억을,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놀이들이 콘텐츠로 진화하며 한국적인 정서를 전 세계에 알리는 매개체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설날 즈음 흙바닥에 앉아 놀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에서 시작해, 잊혀질 뻔했다 오히려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수도 있는 우리의 전통 놀이 사진을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시나요? 그리고 댓글로 여러분의 경험을 공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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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연휴 남사당 묘기 보다 박수가 절로

    설 연휴 마지막 날인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공연마당에서 열린 ‘버나돌리기’ 공연을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관람하고 있다. 버나돌리기는 남사당패의 두 번째 재주로 대접과 쳇바퀴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놀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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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지켜보고 있다!

    건물 주차장 입구의 나무에 인형이 올려져 있습니다. 마치 외부 차량이 주차하러 들어오는지 지켜보는 듯하네요.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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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날이 공휴일이 아니던 시절의 고향 방문 풍경[청계천 옆 사진관]

    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백년 전 풍경사진을 하나 골라보았습니다. 1925년 1월 25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색동옷을 비롯한 설빔을 입고 세배를 다니는 소녀들 모습입니다. 가운데 자그마한 어린이는 기쁨이 온 얼굴에 묻어있습니다. 세뱃돈을 받는 즐거움 때문일까요? 앞의 네 명 뒤로 흐릿하게 한복을 입은 어린이들 무리가 보입니다. 지금은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지만 설을 보내던 옛날 한국의 모습입니다. 사진 오른쪽의 흰 무명저고리를 입은 사람은 엄마일수도 있지만 맏언니일 수도 있겠습니다. 형제자매가 많던 시절이라 맏딸들이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는 것이 자연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고보니 같은 설명절이지만 신문에 실리는 사진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도심을 활보하는 사람들보다는 이제는 긴 연휴를 맞아 해외로 나가는 인파로 가득한 인천공항 출국장 풍경이 2025년 설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아일보 DB에 접속해서 옛날 설 풍경 사진을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사진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저 어린이들 사진이 나온 후 50년이 조금 넘은, 지금으로부터 50년이 조금 안되는 중간 쯤 되는 1978년도 사진입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질서 유지를 위해 누군가가 사람들 머리 위로 긴 나무 막대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어깨에 계급장이 있고 목에 털이 달린 점퍼를 입고 있습니다. 경찰인지 아니면 질서유지를 위한 별도의 공무원인지 제가 과문해서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은 고향으로 가는 차표 예매를 위해 줄을 서 있는 시민들입니다. 지금의 인권 기준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왜 저런 풍경이 벌어졌을까요? 기를 써서라도 고향을 가려고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늘이 두쪽 나는 일이 있어도, 집에 누가 큰 병을 앓거나 죽는 일이 아니라면 추석과 설에는 고향에 가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문제는 연휴가 길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설날은 1989년 이전까지 정부와 기업이 인정하는 공식 휴일이 아니었습니다. 개인 휴가에서 제하는 방식이었을테니 휴가가 짧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989년부터 설날이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설날 전날, 당일, 다음 날까지 총 3일이 연휴로 확정되었습니다. 중간에 휴일이 낄 경우 하루를 더 쉬는 대체 공휴일 제도는 2013년에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대체 공휴일과 주5일제 정착으로 1주일 가까운 휴가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새마을호 무궁화호 같은 철도가 편하기 하지만 인원 제한이 있었을 것이고 기차가 가지 않는 지역은 고속버스가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모든 가정에 자가용이 있는 시대도 아니다보니 고속버스 터미널은 명절 때면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많은 인원이 몰리다보니 공권력이 질서 유지를 위해 시민들에게 큰 막대기를 휘두르는 사진까지 등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그러나 여러분들과 부모님들이 주인공이었던 우리의 설날 전후 풍경 사진 몇 장을 함께 감상하시면서 행복한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 설날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으신가요? 댓글로 여러분의 추억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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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쓸쓸할 때 더 잘 보이는 것

    나뭇잎이 무성하던 계절에는 보이지 않던 담벼락 타일이 보입니다. 누군가 남긴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가 쓸쓸한 겨울이 돼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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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엔 구룡포 대게를 즐겨보세요”

    21일 오전 경북 포항시 구룡포항에서 대게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3∼4일 전 조업에 나갔다가 들어온 배들에서 내린 대게들은 경매를 통해 전국으로 배달된다. 포항=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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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 앞두고 제수용 생선 준비

    21일 오전 경북 포항시 죽도시장에서 시민들이 제수용 생선을 사고 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 따르면 올해 4인 기준 설 차례상 차림 비용은 전통시장 기준으로 평균 28만7606원이었다. 포항=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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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겉만 봐선 몰라요

    겉보기엔 그저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뭇가지이지만 옻, 오가피, 느릅 등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각종 약용수 가지입니다. 들여다보니 보이네요. ―서울 중구 서울중앙시장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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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별 따러 가자

    지붕 위 철로 만든 인형이 사다리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별을 따러 가는 걸까요? 조금 짧다면 옆집 사다리를 빌려서라도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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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명사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담아야할까 - 52세 독립운동가의 증명사진[청계천 옆 사진관]

    두번째 임기를 앞두고 공개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식 초상사진이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정면을 강하게 응시하는 모습입니다. 본인의 마음에 쏙 들었기에 선택된 커트일 것입니다.여러분은 평생 몇 번 증명사진을 찍어보셨나요?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 여권과 비자 발급, 운전면허나 주민등록증 발급, 입사 시험 등으로 대략 20여 차례 증명사진을 찍은 것 같습니다. 증명사진은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개인의 얼굴 변화를 기록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최근 저는 증명사진이 기록이 아니라 피사체인 저를 미화하는 도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해 말,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려 동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었습니다. 동네 사진관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으러 와 있었습니다. 증명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 가족사진을 찍으러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간단한 헤어 고정 제품과 빗을 받아 머리를 정리한 후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셔터가 10번도 채 눌리지 않은 채 촬영이 끝났습니다. 보통 사진기자들이 피사체를 촬영할 때 100장 이상을 찍어서 가장 자연스럽고 뉴스에 적합한 표정을 골라내는 과정과는 차이가 컸습니다. 이어서 저는 사진사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사진사가 고른 3장의 베스트 컷 중 하나를 골랐습니다. 1시간 후 사진을 찾으러 갔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사진 속 저는 너무 어려 보였습니다. 머리는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다듬어져 있었고, 피부는 지나치게 뽀얗게 보정되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던 눈가의 주름도 모두 펴져 있었고, 눈꼬리도 살짝 올라간 듯했습니다. 규정상 6개월 이내에 촬영한 사진을 제출해야 했고, 젊어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그대로 주민센터에 사진과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이 과정에서 한 선배 사진기자가 떠올랐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딸의 증명사진을 보고 다시 찍으라고 했다는 일화였습니다. 저도 다시 찍어야 했던 걸까요?보름 후, 주민등록증을 수령하며 지갑에 ‘몰래’ 넣었습니다. 사진 속 모습이 내 기억 속의 젊은 시절 같기는 했지만, 현재의 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진작가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미국 입국 심사대에서 사진과 얼굴이 달라 혼란을 준다며 “죄송합니다”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5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나이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사진이 오히려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그럴듯하게 기록”하는 게 정답인가하는 질문을 다시 해봅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5년 1월 1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의 증명사진입니다. 선생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이며 호는 성재(誠齋)입니다. 이날부터 닷새간 동아일보는 이동휘 선생이 국내 시민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연재했습니다. 1873년에 태어나 1925년 당시 52세였던 선생의 모습은 지금의 50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대의 무게를 짊어진 어른의 모습입니다. DB에는 선생의 사진이 5 종류 정도 남아 있으며, 그 중 증명사진 형식은 2장뿐입니다.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사진이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구요. 사진을 보며,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시나요?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이동휘 선생의 철학과 그가 꿈꾸었던 미래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100년 전 신문에 연재된 글을 읽기 쉽게 정리해서 아래 첨부합니다. 사랑하는 내지 동포에게-러시아에서, 성재 이동휘-나는 지금 동아일보를 통해, 극심한 기근에 고통받고 있는 수백만의 형제들의 고통에 함께 울며, 이 고통을 해결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살펴보려 합니다.현재 우리 민중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혹독한 억압을 받으며, 굶주림까지 겪게 된 것은 그야말로 눈 위에 또다시 서리를 맞는 격입니다.기근은 자연재해가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자연재해와 인위적인 착취가 겹치면서, 조선의 무산 계층은 생존의 길을 찾으려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지주들의 창고에는 곡식이 썩고, 부자들의 금고에는 돈에 녹이 슬어가지만, 사회에는 ‘형이 배부르면 동생이 굶주린다’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은 현대 사회 제도의 부끄러운 유산입니다.얼마 전, 통천의 한 학교에 다니던 14세 박춘혁 군이 책보를 맨 채 길에서 얼어 죽은 사건은,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비극입니다.조선의 무산 계층은 굶주림을 피해 만주와 시베리아로 흩어지고 있지만,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합니다.우리는 이제 사회의식을 바꿔야 합니다. 민중의 의식으로 사회를 지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비정한 세상은 계속될 것입니다.열심히 일하고도 굶주리는 노동자들, 이 불합리하고 비정한 세상을 누가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동아일보에서 해외 동포를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중러 국경 지역의 학교와 공공단체에 기부해 공익사업을 펼치고 있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고려도서관에도 많은 책을 기증해주신 것에 감사를 표합니다.내지 동포들은 해외 생활을 동경하기도 하지만, 이곳의 현실은 단조롭고 문화적으로 매우 빈약합니다. 과거 러시아의 구황제 시절, 이민족에 대한 억압이 심했을 뿐 아니라, 우리 동포들 대부분이 생활기술이 부족했던 탓입니다.다행히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계급과 민족의 차별 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조국이 있다는 원칙이 적용되었습니다. 그 결과 현재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20만 명에 달합니다.그러나 60여 년 동안 입적한 고려인 중 실제로 땅을 분배받은 사람은 30여 가구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하지만 1922년 소련이 연해주까지 점령한 후, 불과 2년 만에 고려인들에게 분배된 땅의 규모가 이전 60년 동안과 맞먹게 되었습니다.또한 교육 측면에서도, 과거 40여 개 학교에서 러시아어만 가르치던 것을 현재는 200여 개 학교에서 한국어를 정규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이 같은 변화는 소련 헌법과 공산당의 방침 덕분이며, 현재 노동자와 농민의 문화 수준이 급격히 향상되고 있습니다.최근 동아일보에 ‘연해주 고려인이 자치공화국을 세웠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이는 다소 성급한 보도입니다. 소련 헌법상 각 민족은 자유롭게 자치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통계와 특정 지역에의 집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현재 준비 중입니다.러시아 당국은 1918년 이전 이주한 고려인에게는 입적권을 허용하고, 그 외에도 가난한 농민에게는 최소 3만 4천 평의 땅을 나눠줄 방침입니다.고려인 대표들은 모든 고려인에게 제한 없이 러시아 시민권을 부여하고,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민권으로서 토지를 나누어줄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무제한 시민권 부여는 일본의 토지 공황을 완화시키고, 조선 내 무산자의 해외 이주로 인해 국내 혁명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습니다.이 말을 들으며 우리는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토지를 아끼기 위함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무산자들의 연대를 강화하려는 것임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동아의 동지들이여! 앞에서 말한 것처럼 러시아 영토에서 고려족의 장래 생활은 더욱 번영할 것입니다. 자치가 성립됨으로써 정치적으로 발전할 것은 물론이며, 그 지도 역시 특정 개인이 좌우할 수 없고, 세계 혁명을 지배하는 중심 기구의 계획에 따라 우리는 이를 따르고 실행할 뿐입니다. 러시아 영토의 주민은 자신의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하여 내지나 다른 동포들의 생활이 파괴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이제 중국 영토의 동포들에게 한 마디 하고자 합니다. 그들도 러시아 영토 주민들과 함께 60~70년의 이주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길림성 동남로 연길도 8현(연길, 화룡, 왕청, 훈춘, 동녕, 영안, 돈화, 액목)을 중심으로, 연길과 화룡 두 현만 해도 거의 10만 호에 달합니다.1920년에 일본이 북간도에서 무명 지휘관으로 토벌을 감행하면서 정치적 관계자들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현재는 수백 호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이주할 장소는 충분합니다. 만일 길회 철도가 개설된다면,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이익은 불분명하지만, 고려 이주민들에게는 많은 편의를 제공할 것입니다.그리고 봉천성 전 현에 흩어져 있는 주민 수는 10만 호가 넘지만, 일정한 지역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욱이 소작 생활로 인해 북간도 일대의 주민만큼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입니다.장래 이주가 유망한 지역은 중동선 일대와 길림성 동북로 의란도이며, 송화강 연안의 부금, 보청, 요하, 수원 등의 현은 중국 토착민이 적고, 기름진 땅이 수천 리에 달하며 수리 농업이 유망합니다. 이 지역들은 저도 일찍이 답사한 바 있으며, 지금도 우리 동포들이 개척 중입니다. 교통의 편리성과 미개간지의 개척 가능성을 고려할 때, 위의 지역들이 가장 유리할 것으로 보입니다.최근에 일부 인사들이 하얼빈을 중심으로 위 지역 개척 운동을 한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만일 정치적 목적이나 대자본 투하를 통한 중국 관료들과의 결탁으로 농민 착취를 경영한다면, 이는 허황된 광고일 뿐, 실제로는 여러 난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지에서 신뢰할 수 있는 단체, 더 나아가 동아일보의 중재로 이루어진다면 성공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동아의 동지들이여! 우리는 자신의 금수강산을 버리고 남의 영토에서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고달픕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차별받고, 동양척식회사의 횡포와 지주의 착취로 생활의 안전이 없는 현실입니다. 일본인을 우선시하는 총독정치는 아무런 보장이 없습니다.가까운 예로, 최근 진주 도청을 부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조선인을 무시하고 일본인의 번영만 도모하는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이에 경남도민이 결사적으로 반대 운동을 한다는 귀보의 특파원 보도는 저의 상념을 자극합니다.이런 점을 고려할 때, 조선의 무산 대중과 일본의 무산 대중은 자연히 연대하여 생활의 쾌락과 자유를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동아의 동지들이여!최근 세계 정세, 특히 동양에서 중국의 군벌들이 제국주의자들의 분열 정책에 이용당해 동족 간의 싸움이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하여 봉옥상이 갑작스럽게 반란을 일으켜 오패부가 타도되고, 조곤이 퇴위하자 단기서가 집권하게 되었고, 장작림이 실권을 장악하며 손문의 이상적인 정책이 발표되는 등 흥미로운 정국이 펼쳐졌습니다. 마치 사냥터에서 누가 사슴을 차지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 사슴을 얻는 것은 중국 군벌들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제국주의자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요즘의 정세를 보면 안복파가 득세하고, 봉천군이 일본 군벌의 조종을 받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큰 이익을 얻고 있으며, 남북 만주의 세력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장강 일대에서 영국과 미국의 기득권을 빼앗을 기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국제 자본들이 시장을 놓고 다투며 전쟁을 벌이는 이유라고 합니다.우리 조선인의 입장에서 일본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는 것을 반길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을 지혜롭게 이용할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이번에 손문이 제시한 정책이 일부라도 실현된다면, 중국령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새로운 정부에 정치적 참여를 강력히 요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자치 운동을 펼치며 생활의 실력을 기르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저는 현재 러시아령 주민들의 경험을 보며, 중국령 주민들도 정치적 실력을 갖추기를 갈망하고 꿈꾸어 봅니다. 이는 현재 중국령 주민들이 국적과 정치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에서 무모한 희생을 치르는 것보다, 운동 방식을 바꿔 대세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혁명 지도자의 역할일 것입니다.동아의 동지들이여!제가 미숙한 정치적 논평을 늘어놓아 다소 경솔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미 말문을 연 김에 감추지 않고 솔직히 밝히는 것은 저의 성격이며,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현 상황의 흐름이라 여깁니다.일본의 현재 상황은 신문 보도만 보더라도, 지난해 대지진의 충격으로 국민들의 불안이 커졌고, 여러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는 듯합니다. 최근 일본 정부는 학교에 군사 교육을 강요하고 있으며, 이에 학생들과 재야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국수주의 세력의 발호와 무산계급 운동의 좌경화, 보통선거 실시로 무산 정당의 조직 가능성이 커진 것도 흥미로운 문제입니다.조선의 무산계급 대중은 일본의 무산계급과 같은 운명에 처해 있기에 함께 행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포 수단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운동이 아직 기반이 확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압박이 심해 선전 활동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발표된 언론을 조선에서는 금지하고, 일본에서 출판된 서적을 조선에서 압수하는 것만 보더라도, 조선총독부의 지배가 얼마나 특별하게 차별적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동아의 동지들이여!최근 세계 정세와 동양에서의 변화는 특히 중국 군벌들이 제국주의자들의 분할 지배 정책에 이용되어,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 참혹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펑위샹(馮玉祥)의 갑작스러운 반란으로 우페이푸(吳佩孚)가 무너지고, 차오쿤(曹錕)이 퇴위한 후, 돤치루이(段祺瑞)가 정권을 잡고 장쭤린(張作霖)이 실권을 쥔 가운데, 쑨원(孫文)이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 견해를 발표한 일은 무척 흥미로운 정국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그러나 이 혼란의 결과로 중국의 미래가 누구 손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상황이 결국 중국 군벌들이 아닌, 그 배후에 있는 제국주의 세력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최근 정세를 보면, 안푸파(安福派)가 고개를 들고 펑텐 군벌(奉天軍)이 일본의 조종을 받으며 움직이는 듯합니다. 이를 보면 일본 군벌들이 큰 이득을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들은 남북 만주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고, 장강(長江) 지역에서 이미 확보했던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마저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세는 결국 국제 자본의 시장 쟁탈전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원인이라고 하겠습니다.우리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는 것을 기쁘게 바라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이번 쑨원의 정책이 실현된다면 중국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은 신정부에 정권 참여를 적극 요구해야 합니다. 점진적으로 자치 운동을 벌여 생활 기반을 확보해야 합니다. 저는 러시아에 있는 동포들의 현재 경험을 보며, 우리도 정치적 실력을 갖추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지금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정치적으로나 국적상으로도 주장을 펼쳐야 할 중요한 시점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에서 무모하게 희생되는 것보다, 오히려 운동 방식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현명하게 이끄는 혁명 지도자가 필요합니다.동아의 동지들이여!제가 다소 미숙한 정치적 견해를 펼친 것 같아 송구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제 생각을 솔직하게 전하는 것이 제 본성이고, 이 시대의 흐름을 보며 침묵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일본의 현 상황을 신문 보도만 보아도, 지난해 대지진의 충격으로 민심이 불안정하고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듯합니다. 최근 일본 정부가 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강제하자,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국수주의 세력의 날뛰는 모습, 무산운동의 좌경화, 보통선거법의 시행으로 무산정당이 결성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조선의 노동자 대중도 일본의 노동자 대중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만큼, 이들의 움직임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지만 우리는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운동 기반이 아직 취약할 뿐 아니라, 탄압이 극심해져 선전 활동에 지장을 줄 것입니다. 일본에서 발표된 기사조차 조선에서는 허용되지 않고, 일본에서 출판된 서적이 조선에서 압수되는 현실만 보아도 총독부의 특별한 차별 정책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공포 수단에 대한 것은 나의 의견만이 아닙니다. 1921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레닌 동지를 만났을 때의 대화가 떠오르는군요. 그때 그는 특히 소규모의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일본의 무산자와 연대할 것, 대중을 선전으로 각성시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조선 철도 노선을 가리키며, 조선의 3.1운동이 이 교통의 편의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조선의 민족운동은 이제 첫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했습니다.그런데 지금 조선에서 모든 운동의 경향을 보면, 각 단체의 발표된 정강을 막론하고 모두 사회운동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큰 진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무산운동 단체들이 상호 연대하여 실행에서도 일치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동아의 동지들이여!무산계급을 대표하는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상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와 농민이 직접 참여하는 운동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더욱이 비밀 지역에서 활동하는 방법, 국제적 운동과의 연계, 조직의 중심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현재 조선의 무산운동은 다만 경성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으며, 상호 경쟁하며 실제 노동자와 농민 계층에 기반을 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따라서 지도자들은 서울에서 광고성 운동만 하지 말고, 각 지방으로 흩어져 실제 노동자, 농민 계층과 접촉하여 그들의 기초 문화부터 계몽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실생활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은 모든 대중이 일치단결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레닌 동지는 말하기를, 혁명 사업은 결코 거창한 일이 아니라, 노동자는 공장에서, 농민은 들판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여성은 부엌에서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혁명 정신만을 일관되게 유지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지금 의회를 통한 문화운동이 ‘제3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한창입니다. 첫 번째 전선은 사회를 건설하는 시기였고, 두 번째 전선은 파괴된 경제를 회복하는 시기였으며, 현재의 세 번째 전선은 문화를 일으키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 조선의 무산운동은 첫 번째, 두 번째 전선보다도 세 번째 전선에 먼저 힘써야 하는 것이 현세의 요구에 맞는 운동일 것입니다. 따라서 대학을 운영하는 것보다 강습소나 강연회를 열어 노동자와 농민의 무지를 퇴치하고, 인격 향상과 생활 평등을 점진적으로 깨우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과거 민족운동은 분열로 인해 대동단결이나 기관 통일 등을 주장하며 위기를 타개하려 했지만, 이익의 상충과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언제나 대동통일은 불가능했습니다.그러나 무산운동은 반드시 단결할 수 있으며, 다만 지도자들 간의 의견 충돌로 인한 분열이 문제일 뿐, 결코 무산계급 자체가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운동이든 지도자의 책임은 무겁고도 어렵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동아의 동지들이여!이제 글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준비 없이 흥분된 언어를 쓰거나 조리가 부족하고, 문맥이 연결되지 않거나 혹은 모순된 구절은 없는지 검토해 주시고, 많이 다듬어 주시기 바랍니다. (끝)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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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르신, 마스크 단단히 하세요”

    16일 서울 성동구의 한 요양병원에서 요양보호사가 환자들의 마스크 착용을 돕고 있다. 이날 성동구는 법정 감염취약시설인 장기요양기관 등에서 실내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독감(인플루엔자)이 전국적으로 유행하면서 지난해 12월 말 국내 독감 의심 환자 수는 2016년 이후 8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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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위 주춤하자 초미세먼지 기승

    서울 초미세먼지 농도가 ‘나쁨’ 수준을 보인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 사거리 상공이 뿌옇게 흐리다. 이날 오후부터 북서쪽에서 찬 공기가 남하하면서 초미세먼지는 점차 걷힐 것으로 전망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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