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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주요 공약 중 하나가 연방 교육부 폐지다. 그는 “미국 학생들은 막대한 교육비를 쓰고도 전 세계 또래들보다 뒤처지고 있다”고 했다. 또 “교육부가 여러분 자녀들에게 허튼 훈계를 늘어놓는 데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며 “연방 교육부를 없애버리겠다”고 했다. 이는 그가 2016년 대선 때도 공약했으나 실행하지 못한 정책이다. ▷트럼프는 연방 교육부를 폐지하고 그 권한을 주 정부에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미국 교육은 헌법상 주 정부 권한이고 실제로도 주 정부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신입생 선발과 교육과정 운영, 학교 설립 인허가권은 주 정부에 있고 연방 교육부는 학자금 지원 같은 제한된 업무만 한다. 1957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하자 충격을 받고 수학 과학 교육에 연방 예산을 지원하기 시작했지만 학교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도 안 된다. 교육부를 폐지하든 않든 학교 현장에 주는 영향은 크지 않은 셈이다. ▷연방 교육부 폐지는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처음 시도했다. 교육부는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보건교육복지부에서 교육을 떼어내 13번째 부로 신설했는데 주 정부 권한을 침해하는 데다 대선 당시 교원단체의 지지에 대한 답례 성격이어서 집권 민주당에서도 반대가 나왔다. 레이건이 집권하자마자 폐지를 시도했으나 뜻밖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교육부 관료, 의회 교육위원회, 교육 단체들이 ‘철의 삼각(iron triangle)’ 동맹을 맺고 막았다. 연방 교육부의 지원금 정책은 양당 의원들이 모두 좋아해 이번에도 교육부 폐지안이 의회 표결을 통과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 교육 정책은 양당이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당 빌 클린턴 정부가 공화당의 성과 위주 정책을 채택한 이후 학교 선택권 보장과 학업 성취도에 따른 학교 책임 강화 기조가 초당적으로 유지돼 왔다. 트럼프의 교육부 공약은 교육 정책이라기보다 문화 전쟁에 가깝다. 현 정부의 성 소수자 보호 정책에 대해 보수적인 유권자들은 “학교를 타락시키고 있다”며 반발하는데 교육부 폐지도 이런 표심을 의식한 정치적 수사라는 분석이다. ▷국내에서도 “교육부가 없어야 교육이 산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한국 교육부는 막강한 권한으로 교실 크기부터 강사 수업 시수까지 시시콜콜 간섭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런 교육부는 폐지해야 한다”고 했고, 이주호 장관도 입각 전엔 “대학을 교육부 산하에서 떼어내야 한다”고 했다. 교육부 말고도 17개 시도교육청에 국가교육위원회까지 있는데 누구 하나 개혁다운 개혁 과제를 챙기지 않고, 문제가 생기면 서로 책임만 떠넘긴다. 교육부 폐지 논의가 어느 곳보다 필요한 나라가 한국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국 연방 상원의원은 “한 명 한 명이 대선 후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상이 높다. 주별로 2명씩 총 100명으로 하원의원(435명)보다 숫자는 적은 반면 임기는 3배인 6년이다. 이 중 백인이 80여 명, 아시아계는 현재 일본계(하와이)와 태국계(일리노이) 여성 의원 2명이 있다. 5일 한국계 앤디 김 민주당 하원의원(42)이 당선되면서 아시아계가 3명으로 늘었다. 아시아계로는 동부지역 최초 상원의원이고, 120여 년 한국 재미교포 역사상 첫 상원의원이다. ▷이민 2세대인 앤디 김은 외교 분야 전문가다. 시카고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 국무부에서 이라크 전문가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고, 버락 오바마 정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을 지냈다. 2018년 뉴저지주 제3선거구에서 공화당 현역 의원을 꺾고 첫 아시아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내리 3선을 했다. 하원의원으로서 78만 지역구 주민을 대표하던 그는 이제 상원의원으로서 900만 뉴저지 주민을 대표하게 됐다. ▷뉴저지주는 민주당이 52년간 줄곧 상원의원을 배출한 민주당 텃밭으로 당내 경선이 더 치열했다. 뉴저지주 토박이인 그는 “우리 가족에게 기회를 준 뉴저지와 미국을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한편 기득권에 도전하며 새바람을 일으켰다. 지역 정치권이 지지하는 후보 이름을 투표용지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배치하는 관행을 소송으로 바로잡고, 경쟁자인 뉴저지 주지사 부인을 ‘남편 찬스’ 논란으로 주저앉혔다. 그는 취임하면 세 번째로 젊은 상원의원이 된다. ▷선거 유세에선 “분열된 나라를 치유하겠다”고 했는데 현지 언론은 “냉소적인 유권자조차 그 말을 믿었다”고 전했다. 2021년 1월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폭도들로 난장판이 된 연방의회 건물에서 혼자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긴 덕이다. 공화당 후보 커티스 바쇼(64)와는 품위 있는 경쟁으로 박수를 받았다. 바쇼 후보가 TV토론 도중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거리자 그가 바로 달려가 부축했다. 우파 팟캐스트 진행자가 앤디 김의 인종 문제를 제기했을 땐 바쇼 후보가 제지했다. “앤디 김은 평생을 공공에 헌신한 애국적 미국인이다.” ▷소아마비 환자로 한국 보육원에서 자란 그의 부친은 국비 장학생이 돼 매사추세츠공대와 하버드대에서 유학하고 암과 알츠하이머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어머니는 간호사, 누나는 역사학자로 매디슨 위스콘신대 교수다. 앤디 김은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 관여하도록 돕고 싶다면서도 “한국계뿐만 아니라 미국인을 대표하는 리더가 되겠다”고 했다. 이민자 가족의 대를 잇는 성공 스토리는 대선 한 번 치르려면 감시 드론 띄우고 저격수 배치해야 할 정도로 불안해진 미국의 미래를 낙관하게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제왕적 대통령의 측근들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하는 황태자(crown prince), 대통령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실세 측근들(acolytes), 대통령과 사적 인연이 깊은 가신 측근들(retainers), 그리고 궁정 광대(court clown)다.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국가정보원 차장, 주영 대사와 주일 대사를 두루 역임한 정치학자 라종일 박사가 왕정 시대 용어로 소개한 유형화다. 현실에서는 한 인물이 두 개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의 황태자는 김건희 여사다. 대통령실과 여당의 ‘찐윤’이 실세 측근, 공식 직함 없이 대통령 부부와 사적 인연으로 입길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가신 측근들이다. 현대인들에겐 생소한 유형이 궁정 광대인데, 올 9월 한 언론의 단독 보도로 갑자기 등장해 연일 놀라운 이야기를 쏟아내는 정치 브로커 명태균 씨가 궁정 광대에 가깝다. 궁정 광대는 남다른 재주와 친화력으로 왕의 압박감을 덜어주고 말 못할 고민을 들어주는 인물이다. 점잖고 잃을 것 많은 권세가들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막말로 왕이든 누구든 금기 없이 조롱하는 특권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희곡에는 광대가 자주 등장한다. ‘리어왕’의 광대는 가짜 효심을 내세운 딸들에게 속아 나라 땅을 나눠주고 버림받은 리어왕에게 “지혜로운 자가 멍청이가 되어 하는 짓이 숙맥 같구나” 한다. 명태균과 그의 측근이었던 인물이 폭로하는 용산 이야기를 한 편의 희곡이라 생각하면 명태균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그는 대선 당시 윤 대통령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김 여사가 ‘어젯밤 꿈에 남편이 젊은 여자와 어딜 떠나는’ 같은 민망한 이야기도 털어놓는 상대였다. 대통령은 ‘장님 무사’, 김 여사는 ‘앉은뱅이 주술사’라 했고, 대통령에게 5년을 버틸 내공이 없으니 ‘젖은 연탄’ 보수의 ‘번개탄’ 역할만 2년 하고 내려오라 했단다. “오빠, 대통령으로 자격 있는 거야?” 하고 김 여사 흉내도 냈다. 대통령 탓에 총선에서 참패하고도 총선 백서에 감히 ‘대통령 탓’이라 쓰지 못하는 여당이다. 금기를 깨고 무례를 범하는 건 광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광대가 광대만의 특권을 누리는 이유는 그가 국정에 힘이 되는 존재여서다. 외로운 왕에게 위안을 주고, 때론 직언으로 세상 이치와 민심도 전한다. 왕은 속으로 뜨끔 하면서도 “고놈 입버릇 참 고약하구나” 하고 만다. 어차피 광대가 하는 말이다.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는 권력 중심부에서 특유의 흰소리로 긴장을 해소하거나, 권력에 대한 조롱과 풍자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흉흉한 민심이 임계점을 넘지 않도록 압력을 빼주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명태균의 광대 짓은 불길하다. 그를 매개로 대통령 부부가 공천에 개입했다거나 공천 거래를 했다는 법적인 의혹 탓만은 아니다. 대통령은 광대의 무례를 대범하게 웃어 넘기지 못하고 그의 조롱에 쩔쩔매는 듯하다. 명태균의 존재가 알려지자 대통령실은 “명 씨와 2번 만났다”고 했는데 곧 여러 번 만난 사실이 들통났다. “당내 경선 막바지 이후 관계를 끊었다” 했으나 취임식 전날 통화하는 대통령 육성이 나왔다. 김 여사와의 카카오톡 문자 대화에서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가 공개된 후론 대통령과 무관한 ‘배 나온 오빠’란 표현에 당내에서 발작적으로 정색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광대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어도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존재다. 광대의 말은 누구도 곧이듣지 않기 때문이다. 광대가 내로라하는 책사들을 제치고 “이 정권 창출엔 내가 일등공신”이라 하면 누가 믿겠나. 그런데 명태균은 어떤가. 그가 ‘꿈자리가 사납다’고 해서 대통령이 해외 순방 출국 일정을 바꾸었다고 한다. 대통령 부부를 앉혀 놓고 초대 총리로 아무개를 임명하라고 했단다. 이런 황당한 얘기가 그럴듯하게 들린다면 정권이 위기라는 뜻 아닌가. 대통령실은 명태균 의혹에 ‘법적으로 문제될 것 없다’고 했다. 법적 책임보다 더 심각한 건 명태균 의혹이 용산의 권위를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마천의 ‘사기-골계열전’에는 세 가지 리더십 유형이 나온다. 유능해 속일 수 없는(不能欺) 지장(智將), 존경스러워 차마 속일 수 없는(不忍欺) 덕장(德將), 감히 속일 엄두를 못 내게 하는(不敢欺) 용장(勇將)이다. 유능하지도 않고, 존경받지도 못하면서, 위엄도 없다면 무엇으로 국정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전원일기’는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최장수 드라마다. 요즘도 케이블 채널에선 전원일기를 방영하는데 양촌리 김 회장 댁 최불암(84) 김혜자(83)부터 큰아들 김용건(78) 고두심(73) 내외와 둘째 아들 유인촌(73)까지 톱스타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이들 중 ‘일용 엄니’ 김수미가 25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전원일기의 추억이 생생한 이들에겐 ‘일용이 모친상’ 같다. ▷김수미가 일용 엄니를 맡았을 때가 일용이 박은수보다 두 살 어린 31세였다. 요즘 잘나가는 김고은(33) 박은빈(32)보다 어린 나이다. 젊은 배우에게 노역을 맡기는 건 모험이었다. 그런데 방송 첫날부터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인물은 이 하나 빠진 감초역 일용 엄니였다. 일찍 홀몸이 돼 일용이 키우며 김 회장네 덕을 보고 살면서도 때론 용심을 품는 인간적인 조연으로 국민 배우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맞는 일용 엄니 명대사가 있다. “인생사는 계산이 안 맞는겨.” ▷전북 군산에서 김영옥으로 태어나 1970년 MBC 공채 3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동기생 김영애 못지않게 외모에 자신 있었는데 이상한 배역만 들어왔다”고 한다. “연기로 승부 보겠다”고 마음먹었고 드라마 ‘아다다’의 앙칼진 첩실, ‘새아씨’의 몸종 화순이 등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으로 연기상을 휩쓸었다. 머리가 희끗해질 무렵엔 ‘센 캐릭터’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영화 ‘마파도’의 욕쟁이 할매, ‘가문’ 시리즈 홍덕자 여사, 드라마 ‘전설의 마녀’의 일자무식 재소자가 그렇다. 배우로서 독보적 영역을 개척한 그는 “돌멩이도 모양이 다 다른데, 배우들도 다 달라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입담 좋은 예능 스타로 최근까지 웃음을 선사했고, 요리 예능에선 남다른 손맛도 뽐냈다. 드라마 촬영 땐 대형 전기밥솥에 직접 만들고 담근 반찬과 김치를 싸들고 가 스태프 수십 명을 밥해 먹이는 후한 인심으로 유명하다. 고인의 어머니가 없는 살림에도 보따리장수들까지 밥 먹여 보내는 분이어서 “어머니가 지은 복으로 내가 잘산다”고 했다. 친자매 같았던 김혜자에겐 이런 말을 했단다. “혜자 언닌 김치 담글 줄도 모르면서, 내가 밥하고 반찬 해다 주면 먹기만 하면서 왜 국민 엄마야.” ▷“내 얼굴 보면 상욕하고 곗돈 챙길 사람 같지만 사실은 책 좋아하고 꽃만 보면 환장한다.” 에세이집을 포함해 8권의 책을 썼고, 3년 전 써둔 유서시 제목은 어머니가 생전 애지중지 키웠던 ‘나팔꽃’이다. “난 울 엄니 만나러 가요. … 꽃피는 봄도 일흔 번 넘게 봤고 함박눈도 일흔 번이나 봤죠. … 누군가 내 잔디 이불 위에 나팔꽃씨 뿌려주신다면 가을엔 살포시 눈을 떠 보랏빛 나팔꽃을 볼게요. 잘 놀다 가요. 굳바이 굳바이.”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코네 그룹이 다음달 7일과 28일 글로벌 히트 서비스 ‘리블리 아일랜드’와 ‘포켓트윈’ 한국어 버전을 내놓는다.코코네 그룹은 한국 IT 기업인 천양현 회장이 2008년 일본에 설립한 후 ‘포케코로’, ‘헬로 스윗 데이즈(한국 서비스명 헬로키티 스윗파티)’ 등 아바타를 이용한 소셜 서비스 앱 부문에서 일본을 석권해왔다. ‘리블리 아일랜드’는 연금술에서 태어난 생명체 리블리를 키우는 서비스앱으로 2021년 출시 후 현재까지 1000만 다운로드를 앞둔 히트작. 10대에서 성인까지 즐길 수 있다. ‘포켓트윈’은 10대를 위한 롤 플레이 서비스로 1600만 다운로드를 눈 앞에 두고 있다. ‘리블리 아일랜드’는 10월 28일, ‘포켓트윈’은 11월14일부터 홈페이지와 앱스토어를 통해 사전 예약을 하며, 사전 예약에 참여하는 이용자들에게는 특별 아이템 제공을 포함한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KBS 박장범 앵커(54)는 ‘파우치 앵커’ 혹은 ‘쪼만한 백’으로 불린다. 올 2월 윤석열 대통령과의 단독 대담 방송에서 디올백 사태에 대해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뭐 쪼만한 백이죠”라고 말해 사안을 축소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은 뒤부터다. ‘파우치 앵커’는 23일 KBS 이사회에서 신임 사장 후보로 선임됐는데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면 기자로 입사한 지 30년 만에 12월 임기 3년의 사장 자리에 오른다. ▷처음엔 박민 현 사장이 유임될 것으로 점쳐졌다. 윤 대통령이 임명한 첫 공영방송 수장으로 어렵게 국회 인사청문회까지 거친 박 사장이 전임자의 잔여 임기 1년 1개월만 채우고 그만둘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박 사장이 취임 첫날 발탁한 ‘뉴스9’ 앵커가 박 사장을 제치고 최종 후보가 됐다. 24일 국감에서 야당 의원은 “대통령의 술친구 박민 사장이 김 여사 머슴을 자처한 박장범에게 밀린 것”이라고 했다. ▷KBS 이사회 면접에서도 디올백 질문이 나왔다. 박 후보자는 “사치품을 명품이라 부르는 것은 부적절” “제조사에서 붙인 이름(파우치)을 쓰는 것이 원칙” “파우치는 한국말로 ‘작은 가방’”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대담을 떠올려보면 궁색한 변명 같다. 박 후보자는 ‘명품백 수수 논란’이라 하지 않고 “방문자가 김건희 여사를 만나서 앞에 놓고 가는”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4월 총선 최대 악재인 명품백에 대해 처음 공식 입장을 밝히는 자리였지만 질문이 뭉툭해서인지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다. 18개월간 공식 회견을 거부하던 대통령의 녹화 대담을, 그것도 녹화 3일 후 내보내는 방식을 수용한 것 자체가 공영방송의 흑역사로 남을 일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KBS 이사회가 임명 제청권을 행사하면서 이른바 ‘민선 사장’ 시대가 열렸다. 한동안 명망가들이 사장에 임명돼 공영방송으로서 제자리를 잡아가나 싶었지만 2000년대 초중반부터 정치색 짙은 인물이 사장이 돼 정권 바뀔 때마다 새 사장이 전임자 시절 ‘용비어천가’를 반성하는 게 관례가 됐다. 박 사장도 첫 공식 행보로 대국민 사과를 했는데 그 후로도 KBS 시청자위원회에서 ‘뉴스9가 땡윤뉴스라는 조롱을 많이 받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장 선임 표결을 거부한 KBS 야권 추천 이사들은 “박 후보자 선출은 원천 무효”라며 소송을 예고했다. 표결에 참여한 여권 추천 이사들이 최근 위법 판결을 받은 방송통신위원회 ‘2인 체제’ 의결로 임명됐으니 이사들 임명부터 무효라는 주장이다. 소송에서 이기고 인사청문회 마치고 사장이 돼도 웬만한 공적을 남기지 않으면 그저 ‘쪼만한 백’ 덕에 큰 감투 쓴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어르신들은 못마땅해하지만 요즘 아내들이 남편을 부를 때 가장 많이 쓰는 호칭이 ‘오빠’다. 연애 시절부터 쓰던 말이 입에 붙은 것이다. 남편은 대부분 ‘○○야’ 하고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서로를 ‘여보’라고 부르는 부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재혼하는 남성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호칭도 ‘오빠’다. 그런데 국민의힘 김혜란 대변인(48)이 소셜미디어에서 남편을 ‘오빠’라고 했다가 일부 당원들의 문자 폭탄과 대변인직 사퇴 요구를 받고 있다. 대통령 부부를 조롱했다는 주장이다.▷‘오빠’ 논란의 발단은 지난달 결혼 20주년을 맞은 김 대변인이 최근 페이스북에 결혼식 가족사진과 함께 올린 게시글이다. “오빠, 20주년 선물로 선거운동 죽도록 시키고 실망시켜서 미안해…. (이때 오빠는 우리 집에서 20년째 뒹굴거리는 배 나온 오빠입니다)”. 춘천지법 원주지원 판사 출신인 김 대변인은 지난 4·10총선에서 국민의힘 강원 춘천-철원-화천-양구갑 후보로 나왔다가 떨어졌다.▷그런데 이 게시물에 ‘그 오빠가 누구냐’고 따지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의 핵심 인물인 명태균 씨가 김 여사에게 받았다고 공개한 카카오톡 문자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를 비꼰 것 아니냐는 의혹 제기였다. 결혼기념일이 한참 지난 시점에 ‘오빠’ 게시글을 올린 것도 의혹을 키웠다. ‘배 나온 오빠’는 대통령 부부에 대한 “명백히 의도적인 조롱” “피아 구분 못 하는 내부 총질”이라는 비난에 “피해망상일 뿐” “배 나온 오빠는 집집마다 있다” “영부인 아니면 오빠란 단어도 못 쓰나”라는 반박 글도 쇄도 중이다.▷오빠 논란은 ‘친윤’과 ‘친한’의 대결로 흐르는 양상이다. 김 대변인은 황우여 비대위원장 시절 임명된 후 유임돼 친한으로 분류된다. 그는 “제 개인정보를 악의적으로 유출하고 집단적인 사이버 테러를 한 정황이 드러났다”며 “문명사회가 묵과할 수 없는 중대 범죄 행위”라고 했다. 그의 대변인직 사퇴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 강명구 의원(47)은 대통령실 국정기획비서관, “엄중한 시기에 저런 글을 올리는 ‘국민의힘 대변인’의 부박함”이라 비판한 여명 보좌관(33·강승규 의원실)은 대통령실 정무수석 행정관 출신이다.▷오빠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도 ‘oppa’로 올라 있는 단어다. 혈육 관계가 아닌 남자에게 ‘오빠’라 했다간 징역 2년형에 처하는 북한 말고 이 단어에 이토록 과잉 반응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원래 내부 싸움이 더 잔인한 법이라지만 집권당이 어쩌다 ‘오빠’ 소리에 둘로 쪼개져 문자 폭탄으로 치고받는 지경이 된 건가. 문제의 ‘오빠’에 대해 ‘친오빠는 논할 상대가 아니다’ ‘친오빠 맞다’며 온 국민을 농락하는 명 씨에겐 큰소리도 못 치면서 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전공의 복귀 문제로 갈등하던 정부와 의료계가 의대생의 휴학 승인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가 의대 중 처음으로 휴학을 일괄 승인하자 교육부가 서울대를 감사하는 등 ‘휴학 도미노’를 막기 위해 단속에 나섰다. 교육부 차관이 4일 의대를 둔 40개 대학 총장을 온라인으로 소집해 “휴학 승인 시 현장 점검”을 압박한 데 이어 11일엔 교육부 장관이 총장들에게 “내년 복귀를 조건으로 휴학을 승인하라”며 학칙 개정을 요구했다.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이종태 이사장은 “정부가 학생들의 미복귀에 대비한 대책은 세우지 않고 재정 지원을 끊겠다고 겁박하며 무조건 휴학을 막으라고 한다. 교육 정상화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휴학 승인”이라고 했다. 이대로 내년이 되면 휴학생과 증원된 신입생들까지 7500명이 한꺼번에 길게는 11년간 교육과 수련을 받아야 한다. 의료계에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윤석열 세대’ 의사들의 등장을 우려하고 있다.》―교육부는 학생들이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몰아서 수업을 받고 유급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의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강 없이 꽉 짜인 시간표대로 수업한다. 2배속 3배속으로 몰아서 배우는 건 불가능하다. 의학은 연계성이 중요해 기초과학을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임상의학을 배운다. 어느 것 하나 빼먹을 수도 순서를 바꿀 수도 없다. 내년 수업 대책을 세우려면 일단 휴학을 승인해야 한다. 이런저런 조건을 달면 학생들이 교수들과 만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교육부는 ‘국민 건강과 직결돼 있어 의대생들에겐 휴학의 자유가 없다’고 했다. “휴학원을 제출한 학생들과의 일대일 면담을 통해 자유의사인지 확인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의무교육도 아닌 대학생 휴학을 무슨 수로 막나. 교육부가 수시로 학칙 개정을 요구하며 헌법이 보장하는 대학의 자율성조차 훼손하고 있다. 국립대 사립대 모두 정부 재정 지원 사업에 묶여 있어 의대 사정을 들어주려다 다른 단과대까지 피해를 볼까 전전긍긍이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의대를 5년제로 변경하는 방안에 대해 대학 의견을 수렴했느냐”란 질문에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KAMC와 정례적으로 대화했다”고 밝혔다. “5년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다. 교육부와는 의대 교육 정상화를 위해 8월부터 대화해 왔다. 하지만 휴학 승인을 해달라는 협회 요구에 교육부는 기다려 달라는 말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 수시모집이 시작되고, 조금 더 있으면 수능 치고, 정시 시작되면 진짜 손 못 댈 거라고 믿는 듯하다. 이대로 가면 내년에도 전공의 의대생 모두 안 돌아온다.” ―정부는 의대 증원에 대비해 국립대 의대 교수를 3년간 1000명 늘리고, 내년도 지원 예산 4877억 원을 편성했다. 수업 준비가 제대로 되고 있나. “국립대는 교수를 뽑는 절차를 시작했지만 시설은 예산이 집행되기까지 시차가 있어 당장 필요한 수요를 맞추기 어렵다. 서남대 의대 폐교 후 전북대 의대가 한시적으로 특별편입정원 177명을 받았는데 정부가 지어준다던 건물은 편입생들이 졸업한 뒤에야 완공됐다.” ―의대 증원 인원의 60%가 사립대에 몰려 있다. 그런데 사립대에는 융자 알선 외엔 시설 투자나 교수 채용에 대한 정부 지원이 없다. “지방 사립대들은 등록금이 주요 재원이어서 대부분 재정적으로 취약하다. 의대생 교육비가 등록금의 3배가 든다고 한다. 학교 입장에서는 증원을 할수록 손해 보는 구조다. 그렇다고 등록금 재원을 의대에만 쓰면 다른 단과대들이 반발한다. 대출 받아 건물 짓고 뭘 하고 하는 게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정원이 동결된 서울 지역 8개 의대도 내년 1학년은 정원의 두 배가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한다. 서울대 의대는 135명이니 거의 270명이 한꺼번에…. “서울 지역 의대들은 형편이 낫기 때문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대폭 증원된 지방 대학들은 답을 찾기 굉장히 어렵다. 앞으로는 서울 지역 의대와 지방 의대 간 격차가 더 커질 것이다. 특히 서울 지역 의대와 대폭 증원된 대학들 간의 초격차가 우려된다.” ―정부는 예과 2년간은 강의실 수업 위주여서 대형 강의실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옛날 얘기다. 지금은 예과도 소규모 토론수업, 임상술기, 지역사회 실습, 의료인문학 교육, 프로젝트 수업 등 실습과 소규모 학습 비중이 크다.” ―정부가 대학별로 증원된 정원을 배분하면서 회의록을 남기지 않았다. 배분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합리적인 기준을 찾기 어렵다. 학생을 많이 뽑아놔도 지역에 환자가 없으면 졸업 후 지역에서 의사 생활을 할 수 없다. 의사가 부족한 지역을 중심으로 증원하고, 지역 의사로 남을 수 있도록 정책을 짜야 하는데 2000명이란 규모부터 정하고 마음대로 뿌려놓았다.” ―입학 정원이 10% 이상 늘어난 30개 의대를 대상으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평원)이 평가해 내년 2월에 결과를 통보할 예정이다. 불인증 판정을 받는 의대가 나올까. “당장의 교육 여건뿐만 아니라 향후 연차별 교수 채용과 시설 확충 계획을 평가하기 때문에 1학년의 수업 공간이 마련돼 있고, 앞으로의 계획을 설득력 있게만 쓴다면 첫해는 큰 문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평가는 6년간 매년 하게 된다. 첫해는 한 학년만 증원되지만 그 다음 해엔 두 개 학년이 되고, 임상 실습에 들어가면 임상 교수와 시설 투자도 해야 한다. 해가 갈수록 어려움이 누적돼 2, 3년이 지나면 대학이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의평원이 엄격한 평가 인증을 예고하자 교육부가 의평원 이사회 구성이나 평가 방식에 개입하거나 의평원 지정 취소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의평원은 2016년 아시아 최초로 세계의학교육연맹(WFME)에서 의대 평가인증기관으로 인정받았다. 의평원 인증을 받은 대학들은 자동적으로 WFME의 인증을 받는 셈이 된다. 의평원의 인증이 없으면 미국 같은 의료 선진국에서 수련의로 선진 의료 기술을 배우고 교류하는 게 다 막혀 버린다. 국내 의대 나와봐야 밖에선 후진국 의사 취급을 받게 된다.” ―서남대 의대처럼 평가 인증에서 탈락해 폐교될 경우 피해 학생들이 정부와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나. “정부는 전국 의대 수요 조사를 근거로 증원을 결정했다. 증원 규모에 최종 서명한 사람은 대학 총장들이다. 소송이 제기돼도 정부는 빠지고 결국 대학만 책임지게 될 것이다.” ―의정 갈등 사태가 장기화한 데는 한목소리를 내지 못한 의사 단체의 책임도 크다. “인정한다. 그런데 정부도 부처마다 딴 목소리여서 누구와 협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복지부 장관이 유감 표명을 하고 나면 대통령실 수석이 나와 강경 발언을 한다. 총리가 ‘전제조건 없이 대화하자’고 한 다음 날 대통령실 수석은 ‘올해 증원은 못 건든다’고 했다. 교육부의 ‘의대 5년제 단축’에 대해서도 복지부 장관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고 했다. 이러니 의정 간에 서로를 신뢰 못 하는 상황만 계속된다.” ―정부가 신설하는 ‘의료인력 수급추계위원회’에 의사단체들이 불참을 선언했다. 이 위원회 구성은 의사들도 요구했던 것 아닌가. “추계위가 독립성도 결정 권한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계위가 추계하면 복지부 산하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가 정원을 정하게 돼 있다. 그동안 의사 인력 수급 추계 관련 연구가 40여 개 있었는데 정부가 발주한 연구는 의사가 부족하다 하고, 의료계가 발주한 보고서는 모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의대 정원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은 ‘항구 정원’ 외에 ‘임시 정원’을 두어 수요에 따라 줄이거나 늘린다. 이렇게 하면 정원을 재조정할 때마다 홍역을 치를 필요가 없다.” ―결국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돌아와야 사태가 해결된다. 장상윤 대통령실 수석은 최근 토론회에서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왜 나갔는지 모르겠다”고 발언해 비난을 받았다. “의사 집단 내에서도 기득권과는 거리가 먼 전공의와 의대생들을 직역 카르텔이라며 악마화하고 모욕했다. 사직한 전공의들은 대부분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흉부외과 등 필수 의료를 택했던 의사들이다. 이들이 지금의 의사를 대신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 의료 정책을 미래 세대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분노하고 좌절한다.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선 대통령이 젊은 의사와 의대생들에게 진정성을 담아 사과해야 한다. 여야의정 협의체든 뭐든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돌파구가 열린다.” ―의대 교수들도 제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의대 증원 수요 조사에서 각 대학이 써낸 숫자를 합하면 3401명이다. 대학의 증원 요청에 의대 학장들도 동원됐으니 학생들의 배신감이 클 것이다. 이제는 대학병원까지 망가지고 있다. 최근에 부산의 중학생 응급 환자가 대전 건양대까지 가서 수술을 받았다. 부산에 대학병원이 6개나 있는데…. 참담하고 부끄럽다.”이종태 KAMC 이사장(66)인제대 의대 명예교수. 예방의학 전문의, 의학교육 전문가로 인제대 의학교육실장과 학장을 역임하고, 40개 의대 학(원)장을 중심으로 전체 의대를 회원 기관으로 두고 있는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교육이사와 정책연구소장을 지냈다. 올 8월 임기 2년의 KAMC 제9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사람이 누리는 오복(五福) 중 하나가 고종명(考終命), 제명대로 살다 편히 죽는 것이다. 의술의 발달로 장수하기는 쉬운데 편히 죽는 건 어려워졌다. 대부분 의료장비 주렁주렁 달고 차가운 침상에서 임종을 맞는다. 고통스럽고 무의미하게 사느니 평온한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 연명치료 중단 환자가 7만720명으로 관련 법(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첫해인 2018년의 2.2배로 집계됐다. 전체 사망자 5명 중 1명은 연명치료를 중단한 경우다. ▷환자의 권리엔 의사의 치료에 동의할 권리뿐만 아니라 치료를 거부할 권리도 있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치료 거부권을 헌법상 자기 결정권에 근거한 권리로 인정해왔다. 대표적인 판례가 미국의 1976년 ‘퀸란 판결’이다. 식물인간 상태인 아이(캐런 퀸란)의 부모가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청했다 거부당하자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원은 ‘헌법상 프라이버시권은 치료 거부권을 포함한다’고 판결했다. 세계의사회는 2015년 발표한 ‘의료윤리설명서’에서 치료 거부로 사망에 이르게 될 경우라도 치료 거부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대만은 2000년 말기 환자의 연명치료 거부권을 법제화했다. 법 제정 이전에도 ‘마지막 한 숨은 남겨 집으로 돌아가 죽는 것이 좋다’는 전통에 따라 임종 직전 퇴원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한다. 일본은 2007년 말기 환자의 연명치료 거부를 허용하기 시작했는데 특이하게도 법이 아니라 후생노동성 가이드라인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법으로 세세하게 규정하면 의사들이 소송 부담에 소극적으로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하게 돼 환자의 치료 거부권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우려에서다. ▷한국은 치료 거부권 행사를 엄격히 제한하는 나라다. 의사 2명이 ‘임종 과정’에 들어갔다고 판단하고, 환자의 중단 의사가 확인돼야 한다.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도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인공호흡기 착용 중단 등으로 방법이 제한적이다. 임종 시점을 며칠 앞당기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말기 환자도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2022년 ‘국민신문고’가 6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말기 환자나 그 이전 환자에게까지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66%였다. ▷연명치료 거부를 비판하는 이들은 삶이란 주어진 대로 끝까지 살아내야 하는 의무라고 한다. 치료 거부권을 요구하는 쪽에선 삶은 권리이며 아프거나 무의식 상태에선 인생을 향유할 수 없으니 존엄한 죽음을 허용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건강할 때 연명치료 중단 의향서를 미리 등록해 둔 사람이 법 시행 5년 만에 244만 명을 넘어섰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는 것은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뜻일 게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원전 세일즈 외교는 윤석열 정부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윤 대통령은 최근 필리핀을 국빈 방문해 바탄 원전 재개 타당성 조사 MOU를 체결했다. 중동 유럽에 이어 동남아에도 원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지난달 말에는 24조 원 규모의 체코 원전 수주 소식에 20%까지 내려갔던 지지율이 23%로 반등했다(한국갤럽). 하지만 원전으로 벌어들인 돈과 끌어올린 지지율을 의대 증원과 김 여사 문제로 다 까먹고 있다. 이번 보건복지위 국감은 ‘의대 국감’이다. 국감 자료에 따르면 올 2월 ‘의대 2000명 증원’ 발표 후 다음 달 초까지 의료 공백 수습에 투입되는 재정이 2조3448억 원이다. 이와는 별개로 의료개혁에 총 30조 원을 쓴다지만 의료 체계가 붕괴 직전인 데다 개혁안 설계가 잘못돼 혈세만 날릴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그 돈의 반의 반만 필수의료 원가 보상에 썼더라면 이 난리를 겪지 않고 의료 질도 좋아졌을 것이다. 대통령 긍정 평가 이유 1위였던 의대 증원은 부정 평가 1위로 바뀌었다. 더불어민주당이 예고한 대로 이번 국감은 ‘김건희 국감’이다. 김 여사 의혹과 관련해 채택된 증인만 69명이고, 김 여사 의혹을 다루는 상임위가 17곳 중 10곳이다. 행정안전위는 대통령 관저 증축 의혹, 법제사법위는 디올백 수수 등 의혹, 정무위는 김대남 낙하산 인사 개입 의혹, 국토교통위는 양평 고속도로 개발 특혜 의혹, 교육위는 석박사 학위 논문 표절 의혹, 문화체육관광위는 KTV 문화행사 황제 관람 의혹을 다룬다. 여당은 “이재명 방탄 국감”이라고 비판하는데 10개 상임위가 다종다양한 김 여사 의혹들로 난타전을 치르고 나면 대통령 지지율만 더 떨어질 것 같다. 의대 증원과 김 여사 문제가 정부의 최대 성과만 까먹고 말까. 지금으로선 윤 정부를 겨누는 두 개의 칼이 돼 치명상을 입힐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정치학자들의 공저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에는 희망으로 시작했으나 불행하게 끝난 역대 대통령들의 공통적인 패인이 나온다. ‘5년 임시직’으로서 역대 정부를 계승 발전시키겠다는 겸손보다는 ‘대권 잡았으니 새로운 세상 만들겠다’는 오만, 대통령 권한을 제 것인 양 휘두르는 ‘황태자’와 측근들, 대통령의 오판을 바로잡지 않고 편법을 써서라도 실행시켜 자리보전하는 천민 공직 윤리다. 의대 증원과 김 여사 문제에서도 확인되는 요인들이다. 의료 붕괴로 가고 있는 ‘무데뽀’ 의대 증원은 영화 한 편 보고 강행했다는 전임자의 ‘탈원전 자해극’을 닮았다. 대통령이 “2000명은 그냥 나온 숫자가 아니”라고 선언한 후 참모와 장차관들은 국민 건강이야 어찌 되든 ‘숫자 지키기’에 올인하고 있다. 그 결과 의료개혁으로 살리고자 했던 필수 의료와 지방 의료부터 죽어가는 중이다. 당장 내년도 군의관과 공중보건의 공백 사태가 예견되자 “의대 5년제 단축”까지 발표했다가 “대통령 임기나 단축하라”는 비난을 샀다. 수술 대기 줄 더 길어지고, 초과 사망자 집계 나오고, 내년 의대 신입생들까지 교수도 시설도 형편없는 학교에 실망해 집단 휴학에 동참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대통령 부인은 그냥 가족에 불과”하다며 ‘내조형 영부인’을 시사했다. “제 처는 정치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주요 정치적 결정을 할 때 부인과 상의) 잘 안 한다. (아내가) 섭섭하게 생각할 때도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김 여사의 행보는 ‘내조형’보다는 ‘황태자’에 가까워 보인다. 공개적으로는 ‘개 사육 농장주 폐업 지원’과 ‘전 국민 마음건강 투자’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정부는 총사업비가 각각 3562억 원, 7892억 원인 양대 ‘김 여사 사업’에 예타 면제까지 해주었다. 밀실에선 공천과 인사 개입설에 “용산 십상시 쥐락펴락설”까지 터지고 있다. 역대 대통령 부인들이 알게 모르게 남편 하는 일에 관여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희호 여사는 장상 국무총리 내정 인사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국회에서 제기된 적도 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하는 것과 녹취록을 통해 온 국민이 다 알도록 하는 것은 법적인 문제를 떠나 정치적 파장이 전혀 다르다. 역대 대통령을 보좌했던 이들은 청와대에 근무할 땐 “청와대는 높고 세상은 넓다”고 했다가 나중엔 “청와대를 나와 보니 세상이 넓은 줄 알겠다”고 했단다. 듣기 좋은 보고만 올리는 참모들에 둘러싸여 ‘모르는 것도 못 할 것도 없다’고 자만하는 것 아닌가. 용산 밖 넓은 세상의 성난 민심을 외면했다가는 또 한 명의 불행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국 저출산 문제의 해결사로 주목받아 온 것이 에코붐 세대다. 2차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로 출생률이 높았던 연령군이다. 올해 28∼33세로 결혼 적령기가 된 이들이 코로나로 미뤄둔 결혼과 출산을 하면 올해 출산율이 바닥을 찍고 반등해 2040년엔 1.19명이 된다는 것이 정부 추계다. 그런데 올 7월 출산과 혼인 건수가 모두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출생아 수는 2만601명으로 1년 전보다 7.9% 증가했다. 17년 만에 최고 증가율이다. 혼인 건수도 33% 늘었다. 코로나 기저효과 덕분일까, 정말 출산율이 반등하는 걸까. ▷출산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많고 그 방향도 일정하지 않다. 다만 산업 국가의 경우 이민자의 유입이 없으면 현재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대체출산율(2.1명) 이하로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후 서구 선진국들의 출산율이 반등하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은 성평등 수준이 높아진 덕분이라고 해석한다. 여성의 학력과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아지면 출산율은 떨어지지만 부부가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하고 일과 가정 양립이 수월해지면 1.5명 안팎까지 반등한다는 것이다. ▷이는 같은 서유럽 국가들 중에도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은 출산율 반등에 성공한 반면 이탈리아는 저출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프랑스(1.83명)는 ‘셋째 낳기’를 목표로 현금, 서비스, 시간 지원 정책을 펴고 있다. 독일(1.58명)은 ‘남편은 생계, 부인은 양육’이라는 전통적 가족 모델부터 바꿨다. 스웨덴(1.67명)은 부모가 동시에 쓸 수 있는 육아휴직을 30일에서 60일로 늘리는 방안까지 추진 중이다. 유독 이탈리아(1.25명)만이 1.3명 이하의 초저출산 문제로 시름이 깊은데 뿌리 깊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 탓이라는 분석이다. ▷한국도 남성의 가사 분담률이 선진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특히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출산율을 좌우하는 새로운 요인으로 꼽히는 것이 불안감과 좌절감이다. 엄마, 아빠가 되는 나이는 각각 32.5세와 35세인데 평균 퇴직 연령이 49세다. 14∼17년 정도 일할 수 있으니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출산을 꺼리게 된다. 소셜미디어로 유통되는 온갖 출산과 육아 정보도 불안감과 박탈감을 부추기고 있다는 진단이다. ▷‘2023년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자녀를 가질 계획이 있는 청년들의 비율이 3년 전보다 늘어났다. 하지만 출산의 희망이 실제 출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이탈리아의 희망 자녀 수 차이가 0.2명일 때 출산율 차이는 0.8명이었다. ‘출산 의도 실현의 실패’ 탓이다. 원하는 만큼 낳고 키우도록 불안감과 부담감을 덜어준다면 기적처럼 출산율도 반등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평소 건강하던 사람도 추석 연휴엔 응급실 신세 질 일이 생긴다. 차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성묘 갔다 벌에 쏘이고 진드기에 물려, 산행을 즐기다 발목이 접질려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하루 평균 2만3000명으로 평소의 2배다. 추석 전날보다는 당일과 추석 다음 날 응급실이 더 붐빈다. 가뜩이나 연휴엔 문 닫는 병원이 많은데 올해는 응급실 대란 위기가 고조되고 있어 추석 연휴를 앞둔 기쁨보다는 ‘아프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크다. ▷추석 연휴 응급 환자의 상당수가 집 안에서 발생한다. 많이 먹거나 잘못 먹어 탈이 난 장염 환자와 두드러기 환자들이 평소 2∼3배로 불어나 응급실로 달려온다. 더위가 이어지는 추석엔 음식도 쉽게 상한다. 식중독 환자가 많이 나오는 계절은 여름이 아니라 9월 초가을이다. 전을 부치다 화상을 입은 환자도 평일의 3배로 늘어난다. 어른들이 차례 준비에 분주한 사이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삼키거나, 씹는 기능이 약한 노인들이 송편을 먹다 떡 조각이 목에 걸려 오기도 한다. ▷성묘하러, 친지를 만나러 오가는 길에서도 조심해야 한다. 벌 쏘임 사고의 80%는 벌초객들이 몰리는 7∼9월에 집중돼 있다. 성묘를 가다 미끄러지고 발을 헛디뎌 발목이 접질리고 삐어 구급차 타고 응급실을 찾는 경우가 평일의 2배다.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오는 환자는 1.5배로 늘어나는데, 들뜬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는 추석 연휴 전날이 가장 위험하다. 음주 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도 연휴 전날과 첫날에 평소보다 23∼25% 많이 일어난다. ▷응급실이 제대로 돌아가던 시절에도 명절 연휴 감기가 심해 응급실에 가면 1시간 3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올 연휴엔 감기나 복통 정도의 경증이면 본인부담금으로 진료비의 90%를 내야 한다. 지역응급의료센터는 예전보다 4만 원 오른 10만 원, 권역센터는 9만 원 오른 22만 원이다. 의사가 부족하니 가급적 오지 말라는 뜻이다. 큰 병이 아니면 응급의료포털에서 문 여는 곳을 찾아 동네 병원부터 가보고 소화제, 해열제, 두드러기용 항히스타민제, 종합감기약 정도는 상비약으로 챙겨두는 것이 좋다. ▷올 추석 연휴는 19, 20일 휴가를 내면 최장 9일을 쉴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연휴 나들이 계획에 들뜨기보다 “응급실 뺑뺑이를 내가 당하면 어쩌나” 우려하며 ‘추석 연휴 응급실 가지 않는 법’ ‘경증과 중증 판별법’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말 못하는 아이가 경증인지 중증인지 어떻게 알고 오라는 것이냐”며 젊은 부모들 걱정이 크다. 찬 바람 나면 코로나와 독감이 유행하고, 뇌졸중 뇌경색 환자들이 응급실로 몰려들 것이다. 추석 연휴 무탈하게 지나면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준비 없이 ‘별의 순간’을 잡은 정치 행운아다. ‘공정과 상식’ 말고는 윤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공약이 없다. 그래서 2022년 5월 취임 엿새 만에 첫 국회 연설을 통해 연금 노동 교육 3대 개혁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을 때 ‘국정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고 안도했다. 직후 실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의 지지율은 51%였다. 올 2월에는 의료개혁을 추가해 4대 개혁을 추진 중인데 마키아벨리가 개혁이 어려운 이유로 지목했던 “강력한 적과 미온적인 동지” 사이에서 골든타임만 흘려보내고 있다. 전문가들에게 임기 전반기 4대 개혁 점수와 하반기 만회 방안을 물었다.● 연금개혁=C+. 정부는 4일 내는 돈(보험료율)과 노후에 받는 돈(소득대체율)을 13%와 42%로 올리는 개혁안을 내놨다. 21년 만에 단일안을 낸 것, 26년 만에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인상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어렵게 낮춰 놓은 소득대체율(40%)을 올린 건 개혁에 역행하는 일이다. 기금 고갈 시기는 16년 늦춰질 뿐인데 그것도 기금 수익률을 1%포인트 끌어올려야 가능하다. 기초연금 수급자의 3분의 1은 가난하지 않은데 소득 하위 70%까지 기초연금을 40만 원으로 인상하는 것도 문제다. 정부의 지급 보증 법제화는 개혁의 힘을 뺄 우려가 있어 과거에도 시도하다 포기했던 정책이다. 기금이 바닥나도 정부가 메워 준다는데 누가 어렵게 개혁하겠나. 남은 임기에 여야가 합의한 보험료율 13% 인상부터 처리하면 B학점, 기금 고갈 시기를 30년 이상 늦출 수 있는 자동안정장치까지 도입하면 B+, 여기에 더해 기초연금을 취약 노인에게 몰아주도록 재설계하면 A다. 지난번 국회처럼 ‘13%, 44%’로 결론 날 경우 개혁 지연으로 매일 1400억 원씩 쌓이는 부담을 감안하면 F학점도 아깝다. ● 교육개혁=D. 정부 출범 후 한동안 교육개혁이 뭔지 교육부 공무원들도 헷갈려 했다. 대선 공약과 국정과제 연계율이 15%로 역대 정부 수준(69∼85%)을 한참 밑돈다. “스스로 경제부처라 생각하라” “킬러문항 빼라” 같은 대통령 지시 사항에서 헤매던 교육부가 뒤늦게 늘봄학교를 포함한 9대 개혁 과제를 정리했는데 “개혁이라 부르기 어렵다”는 평가다. 교육계의 시급한 개혁이란 인구가 팽창하던 산업화 시대의 교육제도를 인구가 급감하는 인공지능 시대에 맞게 바꿔내는 작업이다. 획일적인 고교 평준화, 오지선다형 수능제도, 나이 든 교사 한 명 내보내면 젊은 교사 2.6명을 뽑을 수 있는 연공서열식 임금체계를 손봐야 한다. 그런데 저항이 거셀 개혁 과제는 건들지도 못하고 디지털 교과서 도입과 킬러문항 제거를 교실개혁, 입시개혁 과제로 설정했다. 고등교육도 규제 철폐나 좀비대학 구조조정 같은 욕 먹는 일 말고 대학들에 돈 나눠주는 글로컬대학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남은 임기에 제대로 된 과제를 설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노동개혁=C. 정부는 노동개혁의 성과로 ‘노사법치’ 확립을 내세운다. 대규모 불법 파업이 사라져 근로손실 일수가 전 정부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고, 노조 회계 투명성도 높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노동개혁의 핵심인 노동시간 유연화와 임금체계 개편은 ‘주 69시간’ 프레임에 걸려 넘어진 후 멈춰 선 상태다. 노동개혁 과제를 논의할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올 2월 지각 출범 후에도 노정 갈등 속에 한동안 공전했고, 개혁의 세부 주제를 다룰 회의체들도 5, 6월에야 시동을 걸었다. ‘노조개혁’의 성공이 노동계를 자극해 노동개혁을 늦추고 있다. 그래도 교육개혁과 달리 과제 설정을 제대로 해 C학점이다. 개혁과제 중 어느 하나라도 이뤄내면 B학점 이상이 될 수 있다.● 의료개혁=F. 필수의료와 지방의료 공백을 의사 수 확 늘려 ‘낙수 효과’로 해결하려다 “우리가 낙수 의사냐”며 필수와 지방 의료 지키던 전공의들부터 줄줄이 사직했다. “2000명은 그냥 나온 숫자가 아님”을 입증할 회의록도 없다니 개혁의 권위가 서질 않는다. 추석 연휴 응급실 대란을 막으려 사력을 다하는 의사들은 10월 1일 임시 공휴일 지정도 원망하고 있다. 추석 연휴 지나면 10월 최장 9일 연휴가 오고, 단풍철 지나면 낙상 환자, 뇌졸중 환자 몰려드는 겨울이다. 의료계는 올해 증원부터 철회하자 하고, 정부는 수험생 혼란을 이유로 안 된다고 한다. “버티면 이긴다”고 오판한 탓에 ‘입시대란’이냐 ‘의료대란’이냐는 차악과 최악의 선택지만 남았다. 의대 2000명 증원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나머지 3대 개혁에서 성과를 내더라도 의료대란에 가려 실패한 정부로 기록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국회의원들이 지켜야 하는 법에는 ‘일하는 국회법’도 있다. 세비는 따박따박 받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으니 상임위원회별로 월간 최소한의 회의 개최 횟수를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요즘 국회 회의장을 분주히 오가며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는 의원들을 보면 일하는 국회가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5월 30일 개원한 22대 국회의 입법 활동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기록 갱신이 목표인 것 같다. K칩스법이나 예금자보호법처럼 이견이 적고 시급한 민생 법안은 제쳐 두고 정부가 ‘불법파업조장법’(노란봉투법), ‘현금살포법’(25만 원 지원법)이라며 반대하는 법안만 골라서 통과시키고 있다. 특검법도 ‘김건희 특검법’ ‘윤석열 김건희 특검법’ ‘권익위 김건희 윤석열 특검법’을 포함해 9건이 발의된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횟수는 19회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45회)에 이어 2위 기록이다. 입법 취지가 좋더라도 무력화될 게 뻔한 법을 통과시키는 것은 더불어민주당 출신인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말을 빌리면 “국회의 입법권을 훼손하는 행위”다. 개원 두 달여 만에 탄핵을 7건이나 추진한 것도 기네스북 감이다. “이재명 대표님과 가족, 동지들을 괴롭힌 무도한 정치 검사들” 4명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발의됐고, 공영방송 경영진 인사를 담당하는 방송통신위원장은 임명되는 족족 탄핵 압박에 사퇴하거나 직무 정지를 당하고 있다. 야당은 “윤 정부의 방통위원장 인재 풀이 고갈될 때까지” 탄핵하겠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 임명된 이진숙 위원장은 취임 하루 만에 탄핵당했다. 어차피 탄핵할 위원장 인사청문회는 왜 역대급으로 사흘씩이나 한 건가. 이번 국회에선 인사청문회 말고도 현안 청문회가 8번이나 열렸다. 예정된 것까지 합치면 16번으로 역대 최다 기록을 세울 것으로 전망된다. 국회가 부지런히 정부 정책 집행 과정을 챙기고 감시하겠다니 박수 칠 일일까. 아니다. 악명 높은 정청래, 최민희 위원장이 진행하는 ‘동물 상임위’뿐만 아니라 다른 상임위도 여야 편 갈라 싸우다 끝나는 ‘맹탕 청문회’ 수준이다. 의대 증원 청문회에서 여당 의원은 어려운 전문 용어를 써가며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의대 증원임을 강조했고, 야당 의원은 “의대 증원 2000명이 역술인 이천공 때문이냐”고 따져 물었다. 자기 지역구에 의대 신설을 해달라고 장관을 달달 볶는 의원도 있었다. 한국 국회는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입법 품질이 떨어지고 효율도 낮은 편이다. 다른 나라는 법안 발의 건수에 큰 변화가 없는데 한국은 20년간 10배 늘어 연간 2만 건 넘는 법안이 발의된다. 하지만 같은 기간 가결률은 40%에서 10% 안팎으로 하락 추세다. 고비용인데 저효율이다. 왜 그럴까.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은 최근 방송에서 “왜 이렇게 한국 정치가 자꾸 나빠지는 거냐”는 질문을 받고 국회의원 연봉을 거론하며 “정치인이 아주 뛰어난 전문직 인사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직업이 돼 버렸다”고 했다. 대신 “선거 기득권 지키기는 잘하고 논리적 변설엔 약한” 사람들이 국회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연봉을 올린다면, 그래서 뛰어난 인재가 몰려들면 나아질까. 국회의원 올해 연봉은 1억5690만 원으로 국민 소득 수준에 비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민생 법안 처리는 미뤄도 세비는 때마다 올려 받은 덕분이다. 의원실 운영비에 보좌진 연봉 등을 합하면 의원 1인당 연간 예산이 8억1400만 원이다. 의원실 규모도 45평으로 책상 하나 겨우 들어가는 영국 의원실(1.8평)의 25배나 된다. 의원들이 누리는 특혜가 180가지라고 한다. 다른 공공기관은 에너지 절감을 위해 여름에도 실내 온도를 28도로 맞춰야 하지만 ‘공공기관 냉난방 카스트’의 최상위에 위치한 국회는 회의장에 들어가면 긴팔 입고도 으슬으슬 추울 정도다. 지금 받는 연봉과 특혜도 줄여야 한다는 게 여론인데 어떻게 늘리겠나. 21대가 22대가 되고 새 사람이 들어와도 나빠지기만 한다면 이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필요하다.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문제 자체가 돼 가고 있는 국회 개혁 없이는 될 일도 안 되겠다. ‘일하는 국회’도 정착되지 않은 시점이지만 생산적으로 경쟁하는 국회, ‘일 잘하는 국회’를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당장은 쌈박질할 땐 에어컨이라도 끄고 했으면 한다. 폭염 재난 문자를 하루에 34번씩 받는 상황이라 정장 갖춰 입고 열 올리며 막말 주고받는 동안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의원들을 보고 있으면 열불 난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요즘 감기에 걸렸다 싶으면 가능성은 크게 세 가지다. 두통 콧물 재채기로 2∼3일 힘들다 괜찮아질 경우 여름 감기, 감기 증세에 더해 쉽게 피곤해지고 온몸이 아프면 실내외 온도 차로 인한 냉방병이다. 감기인 것 같은데 열 나고 독감처럼 많이 아프면 코로나를 의심해야 한다. 요즘 감기인 줄 알고 병원을 찾는 환자 4명 중 1명은 코로나 환자라고 한다. ▷정부는 코로나 전수조사 대신 전국 220개 병원의 코로나 발생 추이를 표본 조사하고 있는데 이달 첫째 주 코로나 입원 환자 수가 861명으로 집계됐다. 올 2월 초 875명으로 정점을 찍고 줄어들다 6월 말부터 증가 추세로 돌아서더니 한 달 새 환자가 6배로 급증한 것이다. 바이러스는 고온다습한 여름철에는 전파력이 떨어지지만 냉방기 사용과 밀폐된 실내 생활이 전파를 부추기고 있다. 현재 유행하는 바이러스는 오미크론 변이인 KP.3로 전파력과 중증도가 증가했다는 보고는 없다. 코로나 유행은 이달 말∼다음 달 초 정점에 이를 전망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1년 연기한 끝에 ‘무관중’으로 개최됐던 도쿄 올림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파리 올림픽도 코로나 비상이 걸렸다. 코로나 검사를 하면 5명 중 1명은 확진 판정을 받는다. 남자 100m에서 0.005초 차이로 우승한 미국 육상 선수 노아 라일스(27)는 200m에서 동메달을 결정짓고 쓰러졌는데 이틀 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감염 사실을 알릴 의무는 없다. 라일스는 동메달 시상식 때는 마스크를 쓰고 참석했지만 400m 계주와 1600m 계주는 컨디션 난조로 포기했다. ▷현재 코로나 치명률은 독감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아져 확진돼도 격리 의무는 없다. 다만 증상이 사라진 뒤 하루 지나 일상에 복귀하는 것이 좋다. 먹는 치료제는 기저질환자와 60세 이상만 유료로 처방받을 수 있고, 코로나 검사비는 치료제 처방 대상자가 아니면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코로나 확산세로 자가진단키트 가격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정부는 10월 신규 백신 접종을 개시한다. 65세 이상은 무료다. ▷감기인 줄 알았는데 드물게는 심각한 병인 경우가 있다. 10세 이하 어린이의 경우 감기 증세가 심각하고 열이 잘 안 떨어지면 뇌수막염 가능성을 의심해야 한다. 성인이라면 일본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유행하고 있는 ‘연쇄상구균 독성 쇼크 증후군(STSS)’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대개는 가벼운 감기 앓듯 쉽게 회복되는데 고령자, 당뇨 환자, 최근 수술을 받아 상처가 있는 경우 매우 드물지만 폐렴 같은 중증으로 진행될 수 있고, 이 경우 치명률이 30%가 넘는다. 모든 감염병이 그렇듯 손 씻기와 마스크 쓰기만 잘해도 발병률은 크게 낮아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승리의 환호와 패배의 탄식이 교차하는 올림픽에서는 오래도록 기억될 명언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2016년 리우 올림픽 때는 펜싱의 박상영(29)이 남긴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가 최고 유행어였다. 에페 결승전에서 4점 차로 뒤져 다들 포기하는 순간 그는 이 말을 되뇌며 역전의 드라마를 썼다. 2021년 도쿄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 결승에선 슛오프까지 가는 접전 상황에서 ‘3관왕’ 안산(23)이 했다는 속엣말이 화제였다. “쫄지 말고 대충 쏴!” 파리 올림픽에서도 새로운 어록이 만들어지고 있다. ▷신예들은 패기로 승부한다. 여자 총잡이 금메달리스트 삼인방이 대표적이다. 오예진(19)의 좌우명은 “내 갈 길은 내가 정한다”, 양지인(21)은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다. 반효진(17)은 “나도 부족하지만 남도 별것 아냐”라는 생각으로 쐈다. 남자 펜싱 사브르 3연패에 기여한 도경동(25)은 결승전 후반 1점 차로 쫓기는 상황에서 교체 투입돼 28초 만에 5연속 득점하고 내려와 포효했다. “질 자신이 없었다.” ▷양궁 남자 개인 결승전은 역대급 명승부였다. 마지막 슛오프에서 원샷으로 승부를 결정지은 김우진(32)은 통산 5번째 금메달을 따내며 한국 최다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그는 잠깐 웃더니 “오늘 딴 메달도 이젠 과거다. 오늘까지만 즐기고 내일부터는 새 목표를 향해 달리겠다”고 했다. 후배들에게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메달 땄다고 (그 기분에) 젖어 있지 마라. 해가 뜨면 마른다.” 김우진에게 패한 미국 브래디 엘리슨(36)은 “간발의 차로 졌다고 속상하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챔피언처럼 쐈다. 중요한 건 그거다.” ▷한국 패장들의 소회도 인상적이다. 남자 유도 100kg 이상급 결승전에서 한국에 첫 은메달을 안긴 김민종(24)은 금메달을 놓친 후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삐약이’ 탁구 선수 신유빈(20)은 “패배의 경험이 저를 더욱 성장시켜줄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서늘한 총잡이 김예지(32)는 사격 주 종목 예선에서 탈락하고도 쿨했다. “한 발 놓쳤다고 세상 무너지지 않는다.” ▷이번 올림픽은 테니스 노장들의 고별 무대였다. 노바크 조코비치(37)는 16세 어린 카를로스 알카라스(21)를 꺾고 커리어 골든 그랜드슬램을 완성한 후 “내가 꿈꾸었던 그 모든 것을 넘어섰다”며 오열했다. 8강전에서 탈락한 앤디 머리(37)는 재치 있는 은퇴사를 남겼다. “어차피 테니스 좋아하지도 않았어.” 룩셈부르크 탁구 노장 니샤롄(61)은 ‘언제 은퇴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다”고 답한다. 신예든 노장이든 승자든 패자든 선수들이 공유하는 명언이 있다.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지금까지 이런 올림픽 개회식은 없었다. ‘물 위의 개회식’이라는 형식부터 파격이다. 단두대에 머리가 잘린 마리 앙투아네트가 노래하고, 여장 남자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하며, 남성 여성 성소수자 3명의 결혼식이 연출됐다. “개회식의 새 지평을 열었다.” “역대 최악의 무례한 개회식이다.” 올림픽 개회식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갈라진 적도 드물다. 1900년, 1924년에 이어 100년 만에 다시 열린 프랑스 파리 여름올림픽이 시작부터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개회식은 센강을 중심으로 파리 전체를 무대 삼아 펼쳐졌다. 206개국에서 참가한 선수들이 에펠탑 근처 광장까지 6km 구간을 85척의 배를 타고 입장하는 동안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파리의 명소 곳곳에서 2000명의 예술인들이 발레, 캉캉, 뮤지컬, 패션쇼 등을 선보였다. TV 시청자들은 선수단 입장 사이사이 화려한 쇼와 영상을 한눈에 즐길 수 있었지만 현장에 있던 관중은 개회식의 일부만을 지켜봤을 뿐이다. TV 속 이미지가 더 진짜 같다는 점에서 ‘보드리야르적인’ 개회식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내용도 ‘개최국의 역사와 문화 홍보’라는 통념을 깨는 것이었다. 헤비메탈 밴드와 합창단이 협연한 프랑스 혁명의 노래 공연이 대표적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두었던 파리 최초의 형무소에서 펼쳐졌는데 머리가 잘린 왕비 분장을 하고 나와 합창하고, 형무소 창문 밖으로 붉은 색종이 피가 분출되는 장면은 19금 영화처럼 기괴하고 전위적이었다. 여장 남자들의 ‘최후의 만찬’ 패러디는 가톨릭계로부터 “역겹고 경박한 조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행사 막바지 성화 주자 중에는 프랑스 축구 영웅 지네딘 지단과 함께 스페인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 미국의 테니스 선수 세리나 윌리엄스와 육상의 칼 루이스, 루마니아 체조 전설 나디아 코마네치가 포함됐다. 개최국 스타만이 성화 주자로 등장하는 고정관념을 깬 시도에 대해서는 ‘포용적’이라는 호평이 나왔다. 개회식 마지막 희귀병을 앓고 있는 캐나다 가수 셀린 디옹이 ‘사랑의 찬가’를 열창하는 장면은 논쟁적 행사에서 드물게 보편적 감동을 주는 순간이었다. ▷파격의 개회식을 놓고 프랑스 내부 평가도 “환상적이다” “자기 비하적이다” 등으로 엇갈린다. 한 프랑스 작가는 “자부심의 역사를 기념하는 순간 혁명의 끼가 발동했다. 저급한 취향과 고급스러움, 노골적 유머와 진보적 깨어있음이 뒤섞여 논쟁을 유발하는 혼란의 도가니는 프랑스 정신의 완벽한 구현”이라고 평가했다. 이쯤 되면 오륜기가 거꾸로 걸리고, 한국을 북한으로 소개한 실수도 프랑스적으로 보인다. 파리의 레전드급 개회식에 다음 개최 도시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고민이 깊어질 듯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충청권 최대 규모인 충남대병원이 도산 위기를 맞아 정부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2020년 개원한 세종 분원의 누적 손실이 막대하고 전공의 이탈 후 매달 100억 원씩 적자를 보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직원 월급과 약품 대금 지급도 어려운 지경이라고 한다. 의대 증원 발표 후 전국 대학병원들의 줄도산 우려가 있었지만 정부가 지원하는 지역 거점병원부터 도산 위기에 내몰릴 줄은 몰랐다. 충남대병원과 세종 분원이 잘못되면 하루 5500명 규모인 환자들이 큰 불편을 겪게 된다. 충남대 의대생들의 실습 교육 파행은 장기적으로 더 심각한 문제다. 충남대 의대 정원은 110명에서 올해 입시에선 158명, 내년부터는 200명으로 늘어난다. 수련시설도, 교수진도 대대적으로 늘려야 하건만 증원된 학생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수련병원은 문 닫을 처지이고 교수들은 수도권 대학과 개원가로 빠져나가고 있다. 다른 지방 국립대 의대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정부 지원을 못 받는 사립대들은 훨씬 열악하다. 대학병원 지원금은 기대하기 어렵고 15년째 동결된 등록금 수입마저 급감하고 있어 의대 교육에 투자할 돈이 없다. 의대생들은 본과생들까지 서울 지역 의대로, 비의대생들은 의대 가려고 휴학하고 N수 대열에 합류한 탓이다. 이대로 가면 수련병원 없이 개교했다가 평가인증에서 탈락해 2018년 폐교된 서남대 의대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 지방의 필수 의료를 책임질 지역 의사를 양성한다던 의도와는 달리 지방 의대 증원 발표 후 서울과 지방 의대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고 있다. 상황이 급박한데도 정부는 6월 내놓겠다던 의대 지원 대책을 9월로 미룬 채 돈 안 드는 엉뚱한 대책들만 쏟아내고 있다. 교수 자원 부족에 대비해 개원의 경력 4년이면 연구 교육 실적 없이도 교수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지 않은 개원의에게도 인턴 레지던트 끝나고 전임의 과정 2년을 마쳐야 자격이 주어지는 교수 자리 지원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수업 거부 중인 학생들의 집단 유급을 막기 위해 F학점도 유급시키지 말라는 권고안을 내놓았다. 한국은 대부분의 선진국과 달리 의대 졸업 후 면허만 따면 별도 수련 없이도 어떤 진료과목이든 독립적 진료가 가능하다. 그만큼 대학 교육이 중요한데 오히려 학사 기준을 완화하겠다 하니 학생들도, 잠재적 환자들도 반발하는 것이다. 그나마 자격 미달 의사 배출을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의대 평가인증 제도다. 정부는 여기에 손을 대겠다고 한다. 20세기 초 미국이 평가 결과를 토대로 131개 의대 중 50개를 폐교시킨 후 의대 평가인증 의무화는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제대로 못 배운 의사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라 있어서는 안 될 흉기나 다름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도 1980, 90년대 정부가 지역마다 공항 지어주듯 의대 20여 개를 무더기로 신설하자 의학계가 2004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을 설립해 자율적으로 평가인증을 시작했고, 2016년 아시아 최초로 국제 의대 평가인증기관으로 인정받았으며, 2017년부터는 인증을 못 받은 의대 졸업생들은 면허시험을 볼 수 없도록 법도 개정됐다. 정부가 인증기관 지정 권한을 이용해 국제 기준에도 맞는 의대 평가인증 기준 변경을 압박하는 이유는 증원된 대학들이 평가인증을 통과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입학 정원이 10% 이상 늘어난 30개 의대는 올 12월 증원에 따른 교육계획서를 재정계획과 함께 제출해 평가받아야 한다. 대학들이 자체 검증한 결과 30개 의대 모두 인증평가에서 탈락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처음부터 개별 의대 교육 여건에 맞춰 증원 인원을 조정했으면 될 일이다. 배정 기준도, 회의록도 없이 ‘깜깜이 배정’을 해놓고 인증평가 통과가 어려워지자 기준을 낮추려 한다면 지난 정부 시절 집값이 잡히지 않아 부동산 통계를 조작한 혐의로 재판받고 있는 공무원들과 뭐가 다른가. 의대 증원으로 교육 파행을 겪고 있는 지방 의대를 보면 조민 씨가 생각난다. 부산대 의전원 4년 과정을 두 번 유급 끝에 6년 만에 졸업하고 면허시험도 통과했지만 입학 당시 제출한 서류가 허위로 판명 나 면허가 취소됐다. 면허 취소 전 조 씨가 인턴 과정을 시작하자 당시 야당이던 국민의힘 의원들은 “우리 가족이 아플 때 조민을 마주치지 않을까 너무너무 두렵다”며 무자격자 진료 배제를 주장했다. 의대 입시에 정당하게 합격하고도 조 씨가 다닐 때보다 헐거워진 평가인증을 받은 의대에서, 낙제해도 봐주는 학사 관리를 받은 의사를 만나면 어떨 것 같은가.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의사들 군기는 군대 못지않다. 사소한 실수가 인명 피해로 이어지는 직업적 특성 때문이다. 짧게는 예과와 본과 6년, 길게는 전공의 기간까지 10년 이상 관계가 이어지는 좁고 폐쇄적인 사회인 탓도 크다. 의사들의 기강 잡기는 환자의 안전에 도움이 되는 순기능도 있지만 내부적으로 집단의 결정에 동조와 복종을 강요하는 부작용도 작지 않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간 대치 국면에서 의료계의 집단행동 불참자 신상 공개와 조리돌림도 의사 군기 문화의 폐해를 보여준다. ▷최근 텔레그램에는 ‘감사한 의사-의대생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의 채팅방이 개설돼 ‘감사한 의대생’ ‘감사한 전공의’ ‘감사한 전임의’ 명단이 올라오고 있다. 의대생은 학교와 학년, 전공의와 전임의는 소속 병원과 진료과, 출신 학교 학번 같은 개인정보가 이름과 함께 공개된다. 채팅방 개설자는 ‘이 시국에도 의업에 전념하고 계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려 한다’고 했지만 복귀자들을 조롱하며 추가 이탈을 막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경찰은 병원과 수업 복귀를 방해하는 불법 행위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동료들의 복귀를 방해하는 행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3월엔 집단 사직에 불참한 전공의들 명단이 ‘참의사… 안내해 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의사와 의대생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참의사’ 명단 유출 사건을 수사해온 경찰은 최근 개원의 2명을 포함한 의사 5명을 업무방해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지난달에는 수업에 참여한 학생에게 공개 사과와 수업 거부를 강요한 혐의로 모 대학 의대생 6명이 입건됐고, 다른 3개 의대도 집단행동을 강요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폐쇄적인 집단에서 동료 사이의 평판은 결정적이다. 의대는 거의 모든 과목이 전공 필수로 6년 내내 함께 수업을 듣는다. 팀별 과제나 실습이 많아 ‘왕따’ 당하면 학교생활이 매우 어려워진다. 이번 동맹 휴학 중엔 ‘불참자는 시험용 족보를 공유하지 않겠다’며 휴학을 강요하는 대학도 있었다. 의사 면허를 딴 후에도 동료 선후배 관계는 이어지기 때문에 배신자로 찍히는 건 면허 정지보다 무서운 일로 통한다. 2020년 의사 파업 때 불참자도 블랙리스트로 ‘박제’돼 공공연히 배제되는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의대생과 전공의들은 정부가 의대 증원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의사를 악마화’한다고 반발한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집단행동을 강요하며 이탈자들을 ‘악마화’하고 있다. 환자 곁을 지키고 수업을 받겠다는 동료들의 소신을 조롱하고 사이버 폭력을 휘두르면서 어떻게 집단행동의 대의명분을 이해받으려 하나.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엘리트들의 건강하지 못한 집단주의 문화가 유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교통사고 사망자는 해마다 줄고 있지만 다른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많은 수준이다.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5.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4.7명)을 훌쩍 웃돈다. 38개국 중 28위로 많다(2021년 기준). 한국은 보행자와 고령의 사망자 비중이 특히 높은데 고령 운전자가 내는 교통사고가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사망에 이르는 교통사고에서 고령자는 핵심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셈이다.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연평균 4.6% 증가하는 동안 운전면허 소지자는 10.2% 늘었다. 내년이면 고령자 중 운전면허 가진 사람이 절반가량이 된다. 고령 운전자가 느는 만큼 이들이 내는 교통사고도 증가 추세다. 문제는 고령 운전자가 교통사고를 낼 경우 치사율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인구 대비 교통사고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20세 이하지만 사망자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65세 이상이다. 지난해 고령 운전자로 인한 사망자 비중은 전체의 29.2%였다. ▷정부는 구체적인 사고 원인별 통계는 따로 집계하지 않는다. 한국보다 고령 인구 비중이 높은 일본의 경우 75세 이상 운전자가 낸 사망사고 중 33%가 브레이크와 가속 페달을 착각하거나 핸들 조작 미숙으로 발생했다. 전방 부주의나 안전 미확인(각 21%)보다 비중이 컸다. 최근 3일간 서울광장 앞, 국립중앙의료원, 서울 강남 어린이집 근처에서 고령 운전자가 낸 사고도 ‘돌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운전에 가장 중요한 시력은 60대가 되면 30대의 80% 수준이 되고, 돌발상황 반응 시간은 1.4초로 2배로 늘어난다. ▷한국이 고령 운전자로 인한 치사율이 높은 원인으로는 허술한 면허 관리가 꼽힌다. 면허 갱신 주기가 65∼74세는 5년, 75세 이상은 3년으로 다른 선진국보다 길고, 면허를 갱신할 때 적성검사와 인지능력 검사만 하고 도로 주행 시험은 하지 않아 실제 운전 능력을 평가하기엔 한계가 있다. 평가 결과 면허 유지나 취소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것도 고령자들이 면허 관리 강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인이다. ▷같은 고령자여도 신체와 인지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나이에 따라 일률적으로 제한하기보다 운전 능력에 따라 낮시간이나 일정 지역 내에서만 운전하게 하거나 페달 오작동 방지 장치 설치를 의무화하는 등 안전과 이동권을 조화시키는 규제가 합리적이다. 고령자가 많이 사는 시골 지역에 가로등 같은 안전 인프라를 강화하고 대체 교통수단도 늘려야 한다. 고령자 보행 속도에 맞춰 신호 시간을 조정하는 등 OECD 1.9배나 되는 고령 사망자 비중도 낮출 필요가 있다. 고령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함께 줄이는 것이 고령화 시대 주요 교통정책 과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