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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8일 서울구치소에서 풀려나 관저로 돌아갔다. 법원의 구속 취소에 이은 검찰의 항고 포기로 이제부터는 불구속 상태에서 ‘내란 우두머리’ 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됐다.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충분한 방어권을 보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든 법치의 근간에 해당하는, 공정성과 형평성을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식의 뒤틀린 정의(正義)로는 ‘법치’가 유지될 수 없다. 계엄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구속 기소된 피고인은 윤 대통령을 빼고 10명이다. 건강이 좋지 않은 조지호 경찰청장만 조건부로 보석을 허가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다. 헌정 질서를 통째로 무너뜨릴 수도 있는, 내란죄의 위험성과 중대성에 비춰 볼 때 이들에 대한 ‘구속 재판’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풀려남으로써 ‘내란의 종사자’들은 구속 재판을 받고 그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피고인만 불구속 재판을 받는 불공정하고 차별적인 상황이 연출되게 됐다는 점이다. 공정성과 형평성의 문제는 비단 내란 피고인 그룹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 법원이 윤 대통령에 대해 구속 취소 결정을 내리면서 처음으로 꼽은 사유는 ‘검찰의 구속기간 계산 잘못’이다.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위해 수사 서류가 법원에 있었던 기간을 ‘구속기간’에서 뺄 때 날짜 단위가 아닌 실제 시간 단위로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체가 잘못된 법 해석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더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은 이 결정이 지금까지의 관행을 180도 뒤집는 결정이라는 점이다. 즉, 기간 계산을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하필 윤 대통령 사례에 이를 처음 적용하는 것은 ‘법불아귀(法不阿貴·법은 권력자나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의 정신에 심각한 의문부호를 찍는 일이다. 물론 법원이 일부러 특혜를 주기 위해 이런 결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윤 대통령과 변호인들이 끝없이 공세를 펴 온 공수처의 수사권 행사 절차 및 과정과 관련해서 재판부가 설명자료를 통해 밝힌 내용을 보면 그 나름의 깊은 고민이 배어난다. 재판부는 “윤 대통령 측의 주장과 관련해 공수처법 등 관련 법령에 명확한 규정이 없고, 대법원의 해석이나 판단도 없는 상태”라면서 “이런 논란을 그대로 두고 재판을 진행할 경우 상급심에서 파기 사유나,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재심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의 이런 우려에는 공감이 가는 대목이 적지 않다. 국회는 공수처법을 만들면서 시비와 분쟁이 생길 수 있는 여지를 여기저기에 남겼다. 공수처와 검찰은 수사 초기에는 주도권 경쟁과 공 다툼을 하느라, 기소 임박 단계에서는 우왕좌왕 시간을 끄느라 ‘절차적 시비’의 단초를 제공했다. 여기에 더해 검찰은 항고를 통해 상급 법원의 판단을 받아 볼 수 있는 권리마저 스스로 내팽개쳤다. 과거 기계적, 습관적으로 항소·항고를 하던 검찰의 기세가 유독 윤 대통령 앞에서만 고분고분해졌다. 책임 소재를 떠나, 하나 분명한 사실은 윤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라는 중대한 혐의를 받으면서도 5100만 우리 국민 중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별한 방어권’을 적용받게 됐다는 사실이다. 과거 어느 정치지도자보다 ‘법치’와 ‘공정’을 소리 높여 강조해 온 윤 대통령이 ‘법아귀(法阿貴)’의 주인공이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윤 대통령과 변호인단은 내란죄 수사뿐 아니라 헌재 탄핵 심판 과정에서도 끊임없는 방어권 논란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총 11차례의 변론 중 8차례 참석해서 발언했고, 마지막 변론에서는 무제한 최후진술까지 했다. ‘트럼프 태풍’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인용이든 기각이든, 리더십 공백을 하루속히 메워야 하는 시급성에 비춰 볼 때 변론을 무한정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방어권은 충분히 보장되고도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더 이상 ‘절차’를 놓고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 이제는 ‘실체’를 말할 때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았던 계엄의 진짜 동기는 무엇인지, ‘500명 수거 및 처리’ 등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고 지시했는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해야 한다. 헌재든 형사재판에서든 어떤 결정이 나와도 수용하고 승복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고, 지지층에도 당부해야 한다. 그것이 5100만분의 1, 특별한 방어권을 누리고 있는 윤 대통령이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인공지능(AI)용 반도체 제조업체인 엔비디아의 21일 현재 시가총액은 약 4736조 원이다. 올해 우리나라 총예산의 7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요즘 반도체 주식이 약세인데도 이 정도다. 엔비디아는 본사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있는데, ‘발상지’도 멀지 않다. 자동차로 15∼20분 거리다. 치즈버거를 비롯해 토스트, 팬케이크 등을 파는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가 그곳이다. 10대 시절부터 데니스에서 접시닦이 알바를 한 경험이 있는 젠슨 황은 데니스 구석 자리에 죽치고 앉아 동료들과 함께 사업을 구상했고, 그 결과로 1993년 엔비디아가 탄생했다. 미국 전역에 1300여 개 점포를 가진 데니스는 한국으로 치면 롯데리아 같은 곳이다. 한국 젊은이들도 롯데리아에 앉아 ‘조 단위 시총’ 기업을 창업하는 꿈을 키울 수 있을까. 가벼운 상상만으로도 무리일 것 같다. 검찰과 경찰의 내란 혐의 수사로 백일하에 드러났듯이, 불명예 전역한 예비역 군인이 현역 정보사령관과 영관급 장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선거관리위원회에 쳐들어가 서버를 탈취하고, 직원들을 감금·폭행할 모의를 한 장소가 롯데리아다. 한 공간에 이 두 행위가 공존하는 것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당나라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롯데리아 모의’가 2024년 한국에서 벌어진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특별히 가슴이 쓰려 오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햄버거집에서 시총 3조 달러짜리 기업을 창업하는 나라’와 ‘햄버거집에서 내란 모의하는 나라’의 극명한 대비가 요즘 현실 세계에서 너무나 실감 나게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한 달여간 행보를 보면, 2기 트럼피즘의 실체는 더 볼 필요도 없이 명확하다. 모든 문제를 미국 국익과 관련된 돈과 비즈니스로 환원시키는 ‘경제 지상주의’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가자지구 해법에 230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생존권이나 인권은 안중에 없다.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답게 그의 눈에는 해안 휴양지로서의 개발 가능성이 우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終戰)과 관련해서도 ‘약소국을 침탈하는 강대국의 횡포’나 ‘전통적인 우방인 유럽 국가들의 안보’ 따위는 트럼프 사전에 없다. 미국의 도움 없이는 전쟁 수행이 불가능한 우크라이나의 처지를 이용해 희토류와 같은 자원을 챙길 계산부터 하는 게,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이다.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고 부르는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 예상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노선이 옳고 그른지는 둘째 문제다. 힘의 논리가 우선하는 국제 정치의 세계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트럼프 대통령 ‘코드 맞추기’나 ‘대응 태세 구축’에 들어간 상태다. 캐나다는 “미국의 51번째 주”라는 거듭된 조롱까지 꾹꾹 참아가며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맞춰 대대적인 펜타닐 단속에 나서고 있다. 일본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이달 초 일찌감치 트럼프 대통령을 찾아가 ‘1조 달러짜리 대미 투자’와 ‘방위비 증액’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상호관세의 주요 표적 중 하나인 유럽 국가들의 정상도 잰걸음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각각 24일과 27일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중국은 빅테크 기업들을 대미(對美) 전선의 선봉에 세우고 ‘경제 대 경제’로 대응하는 카드를 빼 들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17일 중국의 간판급 빅테크기업 CEO들을 부르면서, 그간 ‘괘씸죄’에 걸려 은둔 생활을 해온 마윈 알리바바 창업주를 함께 불렀는데 작년까지의 중국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다. 더 주목해야 할 게 있다. 경제보다 이념을 앞세우고 ‘공동부유(共同富裕·분배중시론)’를 주창해 온 시 주석이 CEO들 앞에서 “선부(先富·성장우선론)”까지 공공연히 언급하고 나선 점이다.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이다. 트럼피즘과 함께 밀려오는 거대한 파고 앞에 오직 한국만이 속수무책이고 무사태평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최상목 부총리는 여태껏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 한 통 못 하는 처지다. 여당은 ‘12·3 비상계엄’의 후폭풍에 휩싸여 국정을 주도할 의지와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야당은 “먹사니즘”이다 “잘사니즘”이다 말만 요란했지, 입법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여야정이 마주 앉은 국정협의회이니 뾰족한 결과물이 나올 리 만무하다. 자동차·반도체 등 한국의 주력 수출품을 겨냥한 관세 폭탄의 시곗바늘만 무심하게 돌아가고 있다. 중요한 시기에 나라를 이런 궁지에 몰아넣은 ‘대한민국 1호 세일즈맨’의 책임이 크고도 무겁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지금 대한민국을 틀어쥐고 있는 거악은 정치권력조차 쥐락펴락하는 경제권력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재벌 체제 해체에 정치생명을 걸겠습니다.” “(지금은) 기업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인 시대, 일자리는 기업이 만들고, 기업의 성장 발전이 곧 국가경제의 발전입니다.” 앞은 2017년 1월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신의 지지자들이 모인 ‘손가락혁명단 출정식’에서 했던 말이다. 뒤는 지난달 23일 이 대표가 신년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이다. 두 발언 사이에 놓인 8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을 감안하더라도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극과 극을 달리는 발언들이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대표의 ‘우클릭’이 올 들어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지난해 7월 당 대표 연임 도전에 나서면서는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유일한 이데올로기여야 한다”며 ‘먹사니즘’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강도가 세진 것만은 분명하다. ‘먹사니즘 선언’ 때만 해도 자신의 간판 정책인 ‘기본시리즈’에 집착과 미련을 보였지만, 이제는 이것마저도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달 3일 ‘반도체 산업 주 52시간 근로 예외’와 관련한 토론을 이 대표가 직접 주재한 것도 이목을 끌 만한 장면이었다. 노동계의 반발이 예상되는데도 이 대표는 “특정 산업의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할 경우 예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냐고 하니 (나도) 할 말이 없더라”며 관련 법안의 국회 통과를 시사하는 듯한 발언까지 했다. 이런 이 대표의 행보에 ‘중도 확장’을 통한 집권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민주당의 이른바 집권플랜본부가 이 대표의 성장 담론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발 벗고 나선 것도 한 방증일 것이다. 민주당 집권플랜본부가 6일 개최한 세미나에서 제시된 이 대표 집권 후 경제 청사진은 한마디로 ‘장밋빛’이다. 1%대인 경제성장률을 5년 내 3%대, 10년 내 4%대로 끌어올리고 삼성전자급 ‘헥토콘 기업’ 6개를 육성하겠다고 한다. 말대로 된다면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이를 담보할 만한 구체적인 정책이 있는지, 단순히 말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할 의지가 있는지 여부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일단 간단한 예로 ‘헥토콘 기업 6개 육성’만 놓고 한번 생각해 보자. 헥토콘 기업이란 기업 가치가 1000억 달러 이상인 비상장 스타트업을 말한다. 미국의 리서치기관인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작년 12월 17일 기준으로 이런 기업은 전 세계에 3개뿐이다. ‘숏폼 동영상 신드롬’에 불을 붙인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댄스, 우주개발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스페이스X, 그리고 인공지능(AI) 분야에서 두말할 나위 없는 선두 주자로 입지를 굳힌 오픈AI다. 이런 기업을 3개도 아니고 6개씩이나 만들겠다고 한다. 그러자면 창의성으로 이런 기업을 능가하거나, 창의성이 달리면 최소한 부지런함으로라도 이런 기업들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헥토콘 기업 중 하나인 스페이스X의 경영자 일론 머스크의 경우 스스로는 주 120시간을 일하면서, 회사 핵심 인재들에게는 주 80∼100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AI시대의 총아로 등극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나는 눈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일한다. 1주일에 7일간 일한다. 일하지 않을 때는 일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했다. 당연히 이런 CEO 밑에서 일하는 엔비디아의 핵심 인재들이 주 7일, 때로 밤 1∼2시까지 일하는 것은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런 기업들과 경쟁하거나 협업하기 위해서 우리 기업계가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 52시간 근로 예외’다. 근로시간을 늘리자는 것이 아니다. 주 52시간 틀은 지키되, 반도체 등 일부 업종의 R&D 등 직군의 억대 이상 고연봉자에 한해 회사와 근로자가 합의하면 한꺼번에 몰아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앞서 주 52시간 관련 토론회의 발언을 보면 이 대표는 이런 취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론회가 열린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민주당은 ‘주 52시간 예외’ 입법을 ‘백지’로 돌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선택은 자유겠지만, 그 선택이 ‘이 대표의 변신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 ‘이 대표가 앞세운 실용주의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지’ 등 많은 의문들에 대한 답이 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지식 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계몽의 정의다. 23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4차 변론에서 윤 대통령 측 조대현 변호사는 “국민들은 비상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폈다. 12·3 비상계엄이 ‘계몽령’이면, 윤 대통령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이고 국민은 무지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우민(愚民)’이라는 말인가. 헌재 탄핵심판에서 윤 대통령 측 궤변이 도를 넘고 있다. ‘계몽령’처럼 국민을 바보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황당한 주장이 난무한다. 12·3 비상계엄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핵심 증거인 계엄포고령을 둘러싼 강변도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엔 윤 대통령이 있다.‘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계엄포고령 1항이 헌법과 계엄법 등에 비춰 위헌·위법하다는 데 대해서는 이견을 찾아보기 어렵다. 윤 대통령조차도 이 조항이 “상위법규에 위배된다”는 점은 자신의 입으로 인정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윤 대통령은 ‘포고령은 계엄의 형식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집행할 의사가 없었고 집행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불법이 아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윤 대통령은 그 연장선상에서 “일부 (국회의원이 국회에) 못 들어갔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서울경찰청에서도 입구에서 다 들여 보냈다”는 억지까지 늘어놨다. 작년 12월 3일 밤 온 국민이 TV와 SNS를 통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명백한 사실조차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윤 대통령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해 헌재 탄핵심판 4차 변론에 출석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진술조차도 윤 대통령의 주장과 배치된다. 다음이 반대신문에서 국회 측 변호사와 김 전 장관이 주고받은 문답이다. 변호사: “포고령이 집행 가능성도 없고 실효성도 없다, 이렇게 피청구인(윤 대통령)이 말씀하셨어요.” 김 전 장관: “대통령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주무장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변호사: “그러면 효력이 있으니까….” 김 전 장관: “그렇습니다.” 변호사: “실제로 집행하려고 하셨어요?” 김 전 장관: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검찰의 수사 결과도 김 전 장관의 증언 쪽에 가깝다. 윤 대통령은 포고령 발령 무렵부터 국회의 계엄해제요구안 가결 전까지 조지호 경찰청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해 “조 청장, 국회 들어가려는 국회의원들 다 체포해 잡아들여, 불법이야, 국회의원들 다 포고령 위반이야, 체포해”라고 지시까지 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당초 포고령에는 ‘야간 통행금지 항목’이 있었는데 검토 과정에서 윤 대통령이 빼라고 해서 뺐다는 게 김 전 장관의 증언인데 실행하지도 않을 포고령이면 굳이 왜 빼라고 했다는 말인가, 명백한 불법 조항은 그대로 방치하면서. 윤 대통령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공수처에 체포된 15일에 공개된 장문의 손편지에서 “우리나라 선거에서 부정선거의 증거는 너무나 많다”면서 “칼에 찔려 사망한 시신이 다수 발견됐는데, 살인범을 특정하지 못했다 하여 살인사건이 없었고 정상적인 자연사라고 우길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음모론이나, 검찰 수사와 법원 판결에서 이미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난 사실 외에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불법 계엄을 뒷받침하는 진술과 증거는 넘칠 정도로 많다.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은 “본회의장으로 가서 4명이 1명씩 둘러업고 나오라고 해”라는 지시를, 곽종근 특전사령관은 “빨리 국회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부수고라도 사람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각각 윤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고 했다. 홍장원 국가정보원 1차장도 윤 대통령으로부터 “이 기회에 싹 다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들었다고 했다. 불명예 퇴역한 전직 장성이 현직 정보사령관을 수하처럼 부리면서 “부정선거와 관련된 놈들을 다 잡아서 족치겠다”고 준비시킨 야구방망이도 물증으로 확보돼 있다. 실행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불법행위가 없었고 정상적인 계엄이라고 우기기에는 ‘시신’이 너무 많은 ‘사건 현장’인 것이다. 지금이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구한말도 아니고, 윤 대통령 측이 쏟아내는 허무맹랑한 궤변에 ‘계몽 당할’ 국민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국민의힘 지도부와 여권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반대하는 명분으로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국격’을 내세우고 있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0일 “관저에서 수갑 채워 끌고 가는 것은 국격을 엄청나게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같은 날 박종준 전 대통령경호처장도 “국격에 맞는 적정한 수사”를 언급했다. 앞서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국격을 거론하며 공수처의 체포영장 신청을 비판한 바 있다. ‘법원에서 발부된 체포영장을 집행하는 것이 국격을 훼손하는 일인지’ 묻기에 앞서 윤 대통령이 선포한 12·3 불법 계엄은 과연 우리 국격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부터 다시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군사독재, 내란, 쿠데타, 정정 불안, 치안 부재, 절대빈곤…. 계엄이 연상시키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계엄’은 서구 선진국에선 사어(死語)가 된 지 이미 반세기가 넘었고, 동남아나 중남미에서도 이젠 그닥 흔한 일이 아니다. 최근 10년 이내에 계엄을 선포한 적이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9개국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타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계엄을 선포한 나라와 한국을 빼면, 튀르키예(2016년) 필리핀(2017년) 미얀마(2021년) 에콰도르(2024년) 정도다. 민주주의 수준으로 보나, 경제 발전 성과로 보나 한국이 과연 이 나라들과 동렬(同列)에 설 나라인가. 영국 이코노미스트 부설 연구소인 EIU는 매년 세계 167개국의 민주주의 발전 수준을 평가하고 있는데 2023년 기준으로 한국은 22위, 필리핀은 53위, 에콰도르 85위, 튀르키예는 102위였고, 미얀마는 북한보다도 떨어지는 166위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튀르키예가 한국의 3분의 1, 에콰도르가 6분의 1, 필리핀이 9분의 1, 미얀마가 30분의 1수준이다. 윤 대통령의 난데없는 계엄 선포로 한국은 미얀마와도 국격을 견주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직후 미국의 포브스는 “투자자들이 현대 아시아의 계엄령 집행자를 생각할 때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태국 그리고 이제는 한국을 떠올리게 됐다”고 했는데, 이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아니, 어쩌면 인도네시아와 태국은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우리를 거기에 넣느냐’고 억울해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국격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도, 윤 대통령은 계엄 후 한 달이 넘게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무장한 정예부대를 시켜 국회와 선관위 등 헌법기관을 유린하려 해놓고도 “경고성 계엄”이라는 억지를 부렸고, 이마저도 부족했던지 이제는 변호사들을 앞세워 “평화적 계엄”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이런 식이면 “계엄령 포고문에 적시된 ‘처단’은 ‘평화적 처단’을 의미한다”는 궤변이 등장할 일도 머지않은 것 같다. 윤 대통령의 국격 훼손은 12·3 계엄 그 자체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달 3일 공수처와 경찰이 체포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대통령 관저에 진입했다가 경호처와 대치하는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공권력과 공권력이 서로 충돌하는 모습에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은 정정(政情) 불안 국가’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BBC는 ‘관저 공방전’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면서 “합법적 체포영장을 집행하려는 시도를 병력이 막고 있는 데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했는데 ‘한국은 기본적인 법치(法治)조차 이뤄지지 않는 나라’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국제적으로 각인되지 않았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권 위원장 등의 주장처럼 ‘내란 우두머리’ 혐의가 있는 대통령이라도 ‘수갑을 채워 관저에서 끌어내는 것’은 국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치자. 애당초 무모한 불법 계엄을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체포를 놓고 논란이 벌어질 일도 없었겠지만, 이 또한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치자. 윤 대통령은 지금까지 공수처가 3번, 검찰 특수본이 2번 등 총 5차례나 자진 출석해서 진술할 기회를 줬지만 모두 거부했다. 이 중 한 번이라도 응했다면 ‘체포영장’이 등장할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윤 대통령이 ‘품격’을 잃지 않고 관저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윤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계엄으로 가뜩이나 상처 입은 대한민국 국격이다. 그런데 이제 여권이 국격 훼손 장본인의 책임을 면탈해 주기 위한 방패막이로까지 국격을 이용하려 한다면 너무나 염치없는 일이다. 국격에 두 번 먹칠을 하는 일만큼은 제발 이쯤에서 그만두기 바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아직도 못 들어갔어? 본회의장으로 들어가서 4명이 1명씩 들쳐 업고 나오라고 해.” “문짝을 도끼로 부수고서라도 안으로 들어가서 다 끄집어내라.” “뭐 하고 있냐, 문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 12월 3일 ‘계엄의 밤’ 윤석열 대통령이 당시 수방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을 채근하며 쏟아낸 말이라고 한다. 검찰이 27일 김용현 전 국방장관을 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기소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언젠가 이 장면이 연극 무대에 오르거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주연배우의 손에 위스키 병이라도 하나 들려 있지 않고서는 현실감을 자아내기 어려운 대사들이다. 취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런 흉포한 언사를 쏟아낼 수 있겠는가. ‘나와바리 전쟁’ 중인 조폭 보스도 아니고. “질서 유지를 위해 소수의 병력을 잠시 투입한 것이 폭동이란 말입니까?” 윤 대통령이 12일 담화에서 했던 말이다. 검찰이 이번에 발표한 자료에는 선관위 직원 체포를 위해 준비한 야구방망이, 망치, 송곳 등의 실물 사진이 첨부돼 있다. 대체 야구방망이와 망치를 어떻게 쓰면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소수의 병력”도 속이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다. 윤 대통령은 담화에서 “300명 미만의 실무장하지 않은 병력”이라고 했다. 하지만 국회로 출동한 특전사와 수방사 정예 요원만 해도 678명, 국회를 에워싼 경찰력이 1768명, 여기에 선관위와 더불어민주당 당사 등으로 출동한 병력과 경찰을 모두 합하면 4749명에 달했던 것으로 수사 결과 확인됐다. “실무장하지 않은”도 불법 계엄의 실상을 축소하고 왜곡하려는 교묘한 ‘언어 장치’ 중 하나다. 지금까지 계엄군의 총에 실탄이 장전됐다는 증언은 없지만, 부대 단위로 1000∼4000여 발씩 모두 9000여 발의 실탄을 탄약통에 넣어 갔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이 끝난 상태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 윤 대통령이 “총을 쏴서라도”라는 발언을 했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자칫 유혈참극이라도 벌어졌다면 그 죄를 어떻게 씻으려 했나. 윤 대통령은 또 “국회를 해산시키거나 마비시키려는 의도 자체가 없었으며, 국회 관계자의 국회 출입을 막지 않도록 했다”고 주장해 왔다. ‘40년 지기’를 통해 ‘체포의 체’자도 꺼낸 적이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포고령 발령 무렵부터 조지호 당시 경찰청장에게 “국회 들어가려는 국회의원들 다 체포해, 잡아들여”라며 여러 차례 독촉 전화를 했다는 것이 검찰 수사 결과다. 이뿐 아니다. 검찰은 윤 대통령이 “국회를 무력화시킨 후 별도의 비상 입법기구를 창설하려는 의도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고 언론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무참하게 짓밟은 전두환의 ‘국가보위입법회의’가 44년 만에 되살아날 뻔했던 셈이다. 유신의 ‘폭압 장치’인 ‘비상대권’도 여러 차례 언급했다고 한다.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이 있으면 바로 병력을 철수시킬 계획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윤 대통령의 주장도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명백한 허위다. 국회에서 계엄해제안이 가결된 이후에도 이진우 수방사령관에게 “해제됐다 하더라도 내가 2번, 3번 선포하면 되는 거니까 계속 진행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물론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경찰청장의 진술들은 앞으로 법정에서 사실관계를 다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마치 사전에 입이라도 맞춘 듯이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를 물리력으로 저지하라는 지시를 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일제히 거짓 주장을 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윤 대통령의 거짓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2일 담화만 해도 지금까지 언급한 것 외에 “체코 원전 수출 지원 예산 90% 삭감”, “딥페이크 범죄 대응 예산 대폭 삭감” 등 깨알 같은 거짓말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 ‘명태균 게이트’와 관련해서는 녹취가 나올 때마다 윤 대통령의 거짓말이 양파 껍질처럼 벗겨지는 중이다. 잘 알려진 대로 ‘워터게이트’로 탄핵 직전 하야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탄핵으로 내몰렸던 결정적인 원인은 도청이 아닌 거짓말이었다. 거짓말로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정치지도자는 그 자체만으로 자격 상실이다. 오직 윤 대통령만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이중삼중으로 쌓아 올린 ‘거짓말의 성(城)’ 안에서 윤 대통령이 얼마나 더 버티기를 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성벽의 두께가 상식과 양심의 두께에 반비례할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해 보인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주식시장이나 카지노에서 흔히 쓰이는 말로 ‘초보자의 행운(beginner’s luck)’이란 게 있다. 우연한 행운이 몇 번 이어지다 보면 대개는 자신이 그 분야의 타고난 천재라는 착각과 자만에 빠지기 쉽다. 그러면 점점 무리한 ‘베팅’을 하게 되고 운이 다하는 순간 패가망신하게 되는데, 이를 경고하는 의미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연금술사’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보자의 행운으로 시작되고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 것이네.” 한국 정치에서 초보자의 행운을 이야기할 때 윤석열 대통령보다 더 적절한 사례는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윤 대통령은 2021년 6월 29일 정치에 첫발을 디딘 지 넉 달 만에 제1야당인 국민의힘 대선 후보 자리를 꿰찼고 다시 그로부터 넉 달 뒤에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초보자의 행운을 만난 많은 이들이 흔히 착각하듯이 윤 대통령은 이를 100% 자신의 실력으로 이룬 성취로 받아들였고, ‘정치든 뭐든 내가 최고’라는 자아도취는 이내 독선으로 이어졌다. 많은 검토와 협의, 공사 등의 준비 기간이 필요한데도 “단 하루도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취임 전 집무실 이전’을 당선 즉시 기정사실화하고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였다. 약간의 시차는 있었지만 관저 이전도 비슷했다. 아니 한술 더 떠 ‘촉박한 일정’을 이유로 온갖 불법과 변칙이 행해졌다. 독선은 다시 불통으로 이어졌다. 윤 대통령이 엄청난 무리를 해가며 집무실을 이전한 명분은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 즉 소통이었다. 하지만 도어스테핑은 특정 언론사와의 갈등을 이유로 취임 6개월 만에 중단됐다. 이후 공식 기자회견은 윤 대통령이 ‘편하게’ 생각하는 특정 언론사와의 인터뷰나 대담으로 대체됐다.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기자회견이 재개되기는 했지만,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당 부분은 끊임없이 의혹과 리스크를 생산해 내는 김건희 여사를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두둔하는 내용이었다. 독선과 불통은 정책이고 정치고 예외가 없었다. ‘카르텔 척결’이라는 외마디성 구호를 앞세워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가 거센 후폭풍을 맞았고, 밑도 끝도 없이 ‘2000명’이라는 숫자를 앞세워 의료개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의료계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찬성 여론이 70%가 넘는 김 여사 특검 여론에 대해서는 시종 귀를 막았고,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와 관련해서는 ‘런종섭 사태’로 의혹과 비판 여론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연금술사’에서 말하는 ‘가혹한 시험’이 찾아왔다. 4·10 총선 참패와 거대 야당의 탄생이 그것이다. 국정과 인사에 대한 대대적 쇄신, 야당과의 협치, ‘여사 리스크 해소’만이 ‘가혹한 시험’을 돌파하는 해법이었지만, 윤 대통령은 그것을 선택하는 대신 한국 정치사의 어두운 지하에 45년간 잠들어 있던 ‘비상계엄과 내란의 망령’을 불러냈다. ‘야당 경고용’이라는 윤 대통령의 주장과는 딴판으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한 뒤 특급 보안시설인 수도방위사령부의 B1 벙커 안에 이들을 구금하려 했다는 섬뜩한 증언도 있다. 까딱했으면 불법 구금으로 악명을 떨쳤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 되살아날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4일 국회에서 가결된 탄핵소추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윤 대통령의 자업자득이고, 50년 후퇴할 뻔한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불법 계엄으로 인한 비용을 우리 국민이 고스란히 지게 된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제 전문 포브스는 최근 “투자자들이 현대 아시아의 계엄령 집행자를 생각할 때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태국, 이제는 한국을 떠올리게 됐다”면서 “결국 5100만 국민이 이기적인 정치적 도박의 대가를 할부로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더 독해진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2기’가 출범도 하기 전에, 선장 없는 한국 경제에는 내수 부진과 환율 불안 등의 ‘삼각파도’가 줄줄이 밀려오고 있다. 비용은 할부가 아닌 일시불, 외상이 아닌 현찰로 치러야 할 참이다. 윤 대통령은 ‘내란 시도’가 실패한 뒤에도 구차한 변명과 남 탓, 금세 탄로 날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다. 2년 7개월이나마 국가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던 정치인의 도리가 아니다. 떠나는 뒷모습만이라도, 다만 한순간이라도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의 언행일치를 보여주기 바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반환점을 전후해 정부·여당에서는 낯간지러운 자화자찬성 홍보 자료나 발언이 적지 않게 쏟아졌다. 압권은 국민의힘 김민전 최고위원이 한 라디오쇼에 나와서 한 발언이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90점 이상 점수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업적을 냈다. 현 정부가 출범할 때만 해도 굉장히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지금 취업률이 70%에 육박하고 있다. … 세계적인 경제 평가기관들이 한국 경제를 슈퍼스타라고 할 정도로 실적이 굉장히 좋다.” ‘자화자찬 릴레이’로부터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지난주, 한국은행은 내년과 내후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성장전망치로 1.9%와 1.8%라는 충격적 수치를 내놨다. 지금까지 우리 경제성장률이 2%를 넘지 못한 것은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54년 이후 6번뿐이었다. 원조 물자를 빼면 경제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던 1956년, 오일쇼크와 함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은 1980년,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에 전염돼 국가 전체가 부도 상태에 빠진 1998년,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부실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 전대미문의 글로벌 팬데믹과 맞닥뜨린 2020년, 그리고 작년이다. 한은의 전망이 현실화할 경우, 우리 경제가 개발 궤도에 오른 이후 ‘블록버스터급’ 외부 충격 없이 내재적 요인으로 2% 미만 성장을 하는 것은 2023년에 더해 2025년과 2026년 이렇게 3차례가 된다. 모두 윤 대통령 임기 중이다. 물론 모든 것을 현 정부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경제의 기초체력에 해당하는 잠재성장률의 추락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12년 3.8%를 기록한 이후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하락에 하락을 거듭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윤석열 정부의 책임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지난해와 올해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각각 2.025%와 2.004%로, 경제 규모가 한국보다 15배나 큰 미국에 2년 연속 역전당했다. 비유하자면 조그만 스포츠카가 짐을 잔뜩 싣는 대형 덤프트럭보다 최적 주행 속도가 낮게 설정돼서, 출고된 셈이다. 실제 성장률이 잠재성장률보다 낮은 1%대가 된다는 것은 가뜩이나 낮게 설정된 최적 주행 속도만큼도 달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저성장의 늪’에서 우리 경제가 허우적대지 않게 하려면, 조금 늦은 감이 있더라도 지금까지 경제 운용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먼저 ‘착시’를 걷어내야 한다. 고용률이 대표적인 예다. 평생직장을 원하는 청년들은 취업이 어렵고, 노년층은 부실한 연금 때문에 허드렛일이라도 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한국에서 저출생-고령화의 진행과 함께 고용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기 임시직만 잔뜩 늘어나는, 일자리 질의 저하의 슬픈 단면이다. 이걸 놓고 ‘역대 최대 고용률’이란 미몽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임기 초반 잠시 시늉만 내다 내팽개쳐버린 기업 규제 완화에도 시동을 걸어야 한다. 이 정부는 불합리한 경제 형벌 규정 186건의 ‘개선 추진’을 대표적 규제개혁 성과 중 하나로 꼽는데 “삼라만상이 처벌 대상”인 배임죄를 손보거나 폐지하지 않는 한 무의미한 ‘숫자 채우기’일 뿐이다. 명백한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는 배임을 민사 분쟁의 대상이 아닌 형사 처벌 대상으로 삼는 선진국도 드물거니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까지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할 수 있게 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당론 강행을 추진하면서 기업 경영의 최대 불안 요인 중 하나가 된 상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이 나서서 빨리 매듭을 지어야 한다. 최근 금융위원장 등이 나서서 상법 개정에 대한 반대의견을 밝히기는 했지만, 윤 대통령이 올해 초 직접 “상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한 ‘말빚’을 빨리 청산하지 않으면 ‘기업 할 의욕’을 꺾는 불확실성이 계속 남아있게 될 것이다. 현 정부는 2022년 말 ‘5년 후 10위 이내 경제대국’이란 청사진을 내건 바 있다. 하지만 그해 13위였던 한국의 경제 규모 순위는 1년 뒤인 지난해 14위로 한 계단 더 미끄러졌다. 한은이 예고한 ‘1%대 성장률’이 현실화하면 ‘10위 이내 진입’은 고사하고 14위에서도 영영 밀려나게 될 것이다. 이런 추세가 더 이어지면 한국 경제가 20위 밖으로 밀려나는 것도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는 아니다. ‘슈퍼스타의 추락이 윤석열 정부에서 시작됐다’는 흑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군 통수권자가 군 시설인 체력단련장에서 운동하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골프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14일 대통령실 관계자가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잘못된 논리다. 골프 인구가 600만 명이 넘는 나라에서 사인의 골프를 놓고 시시비비를 따질 일은 드물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정서상 공인은 다르다. 누구와 하는지, 빈도가 얼마나 잦은지에 따라 큰 문제가 될 수가 있다. 설령 단 한 번을 하는 경우라도 삼가야 할 ‘때-장소-상황’이란 게 있다. 작년 7월 전국에 폭우가 내린 가운데 ‘주말 골프’를 해 물의를 빚은 홍준표 대구시장에 대해 국민의힘이 어떤 처분을 했는지 떠올려 보자. 당시 국민의힘 윤리위원회는 “국민의 윤리 감정과 정서에 반하는 행위”라며 홍 시장에게 ‘당원권 정지 10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홍 시장은 당 대표와 대통령 후보를 지내는 등 국민의힘 정치지도자로서 더 엄격한 윤리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당원이고, 홍 시장보다 더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윤 대통령의 골프가 적절했는지 논하는 것은 여당의 잣대로도 괜한 시비가 아니다. 대통령실이 확인을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 나온 야당의 주장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8월 24일부터 11월 9일까지 7차례 골프를 했다. 8월 24일의 경우는 한미연합 군사훈련으로 군 골프가 금지돼 있던 기간이고, 19명이나 사상자가 나온 부천호텔 화재에 대한 추모 기간이었다고 한다. 또 10월 12일은 북한이 쓰레기 풍선 도발을 감행해 군 장성과 장교들이 줄줄이 골프를 취소하던 때라고 한다. 이 시기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 대통령이 골프를 한 것이 사실이라면, 부적절한 처신이 아닐 수 없다. 거짓 해명 논란은 더 심각한 문제다. 윤 대통령의 골프와 관련한 의혹은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의를 통해 지난 9월부터 제기돼 왔다. 하지만 경호처장 출신의 김용현 국방장관은 “모른다”로 일관했고, 여당 의원이 나서서 “윤 대통령은 골프를 안 친다”며 ‘역공세’를 펴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을 대통령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윤 대통령의 골프가 한 언론사의 취재망에 걸려들고 보도가 확실해진 시점이 돼서야 “윤 대통령이 트럼프 당선인과의 외교를 위해 최근 골프 연습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윤 대통령이 트럼프 당선 이전부터 골프를 해 온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골프가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트럼프 외교를 핑계로 댔다’는 의심을 대통령실이 자초한 셈이다. 미필적이라도 고의에서 나온 거짓말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대통령실이 선택적 침묵과 석연찮은 해명으로 문제를 키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명태균 게이트에서도 익히 본 패턴이다. 대통령실은 쏟아지는 보도에도 한 달 이상 침묵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폭로들이 나오자 등 떠밀리듯 ‘(윤 대통령이) 두 번 만났고,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막바지 이후로는 통화 사실이 없다고 기억한다’는 해명을 내놨다. 하지만 만난 횟수도 최소 4차례였고, 취임식 전날 직접 통화까지 한 사실이 얼마 안 가 드러났다. 부적절한 골프 라운딩과 거짓 해명 논란은 용산이 감당해야 할 자업자득 ‘업보’라 치자. 어찌 됐든 국내에서 ‘지지고 볶으면’ 될 일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외신까지 너도나도 보도하는 바람에 기정사실이 돼 버린 골프 외교가 자칫 국익에 부메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골프 외교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트럼프 1기에 ‘완결판’을 보여준 아이템이다. 어설프게 해선 괜히 비교만 될 뿐이다. 아베 전 총리는 트럼프 당선에 앞서 골프 스윙에 관한 그의 개인적인 고민에 대해서까지 정보 수집을 했다고 한다. 아베 전 총리가 2016년 11월 트럼프 당선 9일 만에 ‘고탄도에 슬라이스 방지’ 기능을 어필하는 50만 엔짜리 금장 드라이버를 선물로 싸 들고 미국까지 직접 날아간 것도 이런 치밀한 사전 준비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끈끈한 브로맨스’를 연출해 보였는데도, 그의 골프 외교가 얼마나 실리를 챙겼는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트럼프 당선인은 아주 거칠고 노련한 협상가다. 외교적 무례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멘털’을 흔드는 것은 기본이다. 즉흥적이고 어설픈 ‘아베 따라 하기’로 그를 상대하겠다는 것은 맨몸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용산이 보여주는 게 이런 모습 같아서 걱정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높은 지지도가 물론 아니겠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서방 국가를 보더라도… 직전의 (일본) 기시다 총리도 뭐 계속 15%, 13% 내외였고… 유럽의 정상들도 20%를 넘기는 정상들이 많지 않습니다.”한국갤럽 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 국정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가 처음 10%대로 떨어진 1일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이 국회운영위원회에서 한 말이다. 앞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더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겠다” 등의 상투어가 따라붙기는 했지만, 낮은 지지율 때문에 퇴진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 사례까지 끌어다 대며 ‘나보다 못한 애도 있어요’라고 강조한 것을 보면 어느 쪽이 진짜 하려는 이야기였는지는 쉬 짐작이 간다.‘뭐가 문제인데…’는 비단 정 실장 한 명만의 속내는 아닌 것 같다. 또 다른 대통령실 관계자는 “지난주의 20%와 사실 한 끗 차이 아닌가”라고 동아일보에 말했다고 한다. 이만저만한 ‘집단 정신승리’가 아니다.우선 “20%를 넘기는 유럽 정상이 많지 않다”는 정 실장의 말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미국의 모닝컨설트는 한국 미국 유럽 남미 등 세계 25개국 정상의 지지율을 매달 조사해서 발표하고 있는데, 가장 최신 버전에 해당하는 ‘9월 25일∼10월 1일 조사’에 따르면 유럽 정상 14명 중 20% 미만이 1명, 20%가 2명, 29%가 1명이었고 나머지 10명은 31∼59%였다. 오차를 감안해 20% 2명을 10%대 그룹에 넣더라도 20%를 넘는 정상이 11 대 3으로 훨씬 많다는 이야기다. 유럽을 쳐다보면서 ‘위안거리’를 찾을 일이 아니다. 참고로 이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16%, 25명 중 최하위였다.10%대 지지율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알려면, 올해 6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미국의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는 G7 정상회의에 맞춰 내보낸 기사에 ‘레임덕 6명과 조르자 멜로니’라는 제목을 달았다. 당시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만 지지율이 40%를 넘고 나머지는 그 미만이라고 해서 붙은 제목이다. 당시 모닝컨설트 기준으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30%대,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은 20%대, 기시다 일본 총리는 10%대 지지율이었다. ‘레임덕 잣대’로 40%는 너무 높은 허들이 아닐까. 이후 벌어진 일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바이든 대통령은 선거 전 도중 연임 도전 포기를 선언했고, 수낵과 기시다 총리는 이미 퇴진했다. 각각 내년 9월과 10월 총선을 앞둔 숄츠 총리와 트뤼도 총리는 국정 주도권을 상실한 채 퇴임 압력을 받고 있고, 재선 임기가 2027년 5월까지인 마크롱 대통령은 ‘내년 봄 조기 퇴진론’이 나오는 중이다. 서방의 어느 잣대를 빌려오더라도 윤 대통령 10%대 지지율은 심각한 레임덕 수준인 셈이다.문제는 이대로 레임덕을 맞기에는 윤 대통령이 해놓은 일이 너무 없다는 점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노동·교육·의료·연금 4대 개혁 및 저출생 극복을 강조해 왔지만, 손에 쥘 수 있는 구체적인 성과는 거의 없다. 남은 절반의 임기 중에라도 개혁 성과를 내려면 내부 결속과 국민의 안정적 지지 확보가 필수적인데, 여당은 ‘여사 리스크’를 둘러싼 갈등과 윤 대통령의 고집으로 이미 두 동강이 났고 중도층은 지지를 접은 지 오래다.그런데도 용산의 위기의식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의혹 규명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갈수록 높아지는데 특검은 고사하고, 특별감찰관 도입마저 싫다고 버티는 중이다. 대통령 부부의 진솔한 사과는 감감무소식이다. 대통령 참석이 관행인 국회 시정연설에도 총리를 대신 보낸다고 한다. 야당이 뭐라건 중도층 민심이 어떻건,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핵심 지지층만 단단히 붙잡고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산(誤算)이다.이번 갤럽 조사를 보면 여당 지지층에서도 윤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와 부정 평가가 44 대 44로 갈렸고, 핵심 지지기반 중의 하나인 대구·경북의 긍정 평가는 전국 평균보다 오히려 1%포인트가 낮았다. 스포츠 경기를 떠올려 보면, 잘하는 상대편 선수보다 느슨한 플레이로 실수를 연발하는 우리 편 선수에게 더 많은 비난이 쏟아진다. 정치에서도 기대나 희망이 포기나 절망으로 변하는 순간 ‘못하는 우리 편이 가장 미운 법’이다. 이번 조사를 보면 이미 임계점을 넘었는지도 모른다. 한가한 정신승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검찰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김건희 여사를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한 가지 점에서만큼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사법시스템이 통째로 희화화되는 사태를 ‘일단’ 면했다는 점에서다. 검찰이 마지못해 기소를 했다면, 지금까지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법정에서 검찰과 변호인이 경쟁적으로 피고인을 변호하는 전무후무한 코미디가 펼쳐질 뻔했다. 검찰은 17일 불기소 결정을 하면서 11쪽짜리 보도참고자료를 내고, 수사 결과를 4시간에 걸쳐 브리핑했다. 김 여사를 왜 주가조작 공범이나 방조범으로 볼 수 없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보도참고자료 서술과 브리핑의 주체를 검찰이 아닌 변호인으로 바꿔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내용이었다. 우리 검찰이 ‘억울한 피의자’를 막기 위해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었던 게 한 번이라도 있었나. 그건 그렇다 치자. 정말 고약한 것은 추리소설 등에서 독자가 최종 순간까지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낚시성 복선, 가짜 암시와 같은 ‘트릭’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한두 개가 아니지만 개중 가장 대표적인 게, 보도참고자료 7쪽에 등장하는 주가조작범들의 진술과 통화기록이다. ‘김 여사는 주가조작을 몰랐을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주가조작범들의 어록은 죽 이어지다가, 다음 대목에서 하이라이트를 맞는다. ▼2차 주포 김○○=“(김건희) 걔? 뭐 먹은 것도 없을걸, 괜히 뭐 하고 뭐 하고 권오수가 사라고 그래 갖고, 샀다가 뭐 하고 팔았지.” ▼1차 주포 이○○=“아이 김건희만 괜히 피해자고.” 소설로 치면, ‘독자’는 여기서 김 여사는 피의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강력한 인상을 ‘주입’ 당하게 된다. 그런데 보도참고자료 어디에도 김 여사가 도이치모터스 주식으로 23억 원(모친 포함)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23억 차익’과 ‘피해자’라는 단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모순과 인지부조화를 해소할 방법이 없어서일 것이다.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소설가라도 ‘주가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결과적으로 23억 원을 벌었다’는 비현실적인 반전 플롯을 짜낼 수 있겠는가. 애초에 ‘김 여사=피해자’라는 암시에 1, 2차 주포의 대화를 동원한 것부터가 온당치 않은 설정이다. 이 사건을 경기 조작 스포츠단에 비유한다면 권오수 도이치모터스 전 회장은 구단주, 이종호 블랙펄인베스트 전 대표는 총감독(후반), 이○○은 전반전 주장, 김○○은 후반전 주장이다.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가 2심에서 주가조작 방조로 유죄를 선고받은 ‘전주’ 손○○ 씨는 후반 주장 김○○과의 인연으로 ‘크게 한판 벌어진다’는 정보를 귀동냥해 판에 끼었다가 손해를 본 인물이다. 이에 비해 김 여사는 ‘로열박스’ 유리창에 그림자만 비치는 ‘구단주의 VIP 손님’이다. 장기판 말에 불과한 이○○과 김○○이 찧고 까불 대상이 아니다. 14억 원(모친 제외)을 챙긴 김 여사를 놓고 “피해자” 운운하는 것부터가 뭘 모른다는 반증이다. 추리소설에서 작가의 트릭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핵심 팩트’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다. 주가조작 게임의 가장 중요한 장치와 도구는 계좌와 실탄(돈)이다. 주장이 무능해서 실패한 전반전은 논외로 치고, 후반전에서 김 여사의 통장 3개가 통정매매에 동원됐다. 전체 통정매매 98건 가운데 김 여사 계좌를 통해 이뤄진 거래가 47건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김 여사가 주가조작을 알고 있었다는 관련 진술이나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자발적인 진술이 없으면 통화나 문자, 메모를 압수수색해 증거를 찾아 나서는 것이 수사의 ‘기본’일 텐데, 검찰은 단 한 차례도 압수수색을 하지 않았다. 김 여사의 유무죄를 떠나 ‘수사가 부실하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런 데다 브리핑에서 코바나컨텐츠 협찬 의혹과 관련 사실을 교묘히 뒤섞어 마치 ‘압수수색을 하려고 했으나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당했다’는 것처럼 ‘트릭’을 부렸다가 들통이 나기까지 했다. 해마다 노벨상 시즌이 끝나면 ‘이그노벨상’이 화제에 오른다. 미국 하버드대 유머 과학잡지인 ‘황당무계 리서치 연보’가 매년 황당하거나 욕먹어 마땅한 과학연구 등을 선정해서 시상하는데, ‘먼저 웃게 만들고 이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수상 요건이다. 검찰의 도이치모터스 수사 발표를 보면 먼저 황당함에 웃지 않을 수 없고, 이어 특검의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이그노벨상에 문학작품 분야가 없지만, 만약 만들어진다면 이보다 적합한 수상감이 또 있을까.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의혹과 구설이 어지러울 정도로 쏟아지고 있다. 마치 저수지 둑이 터진 것 같다. 여당 공천 개입, 주가조작 의혹, 관저 공사 특혜 등 분야도 가지가지다. 인터넷 매체 등에서는 김 여사가 2022년 6·1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와 올 4·10총선의 공천에 개입했다는 의혹과 관련된 녹음파일과 주장들이 연이어 공개되고 있다. ‘정치 브로커’로 알려진 명태균 씨가 김 여사와 윤석열 대통령을 통해 김영선 전 의원의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행사하려 했다는 의혹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명 씨는 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대선 당시 윤 대통령 부부 자택을 수시로 방문하며 국무총리 후보를 추천했다는 주장까지 내놓으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과 관련한 추가 의혹도 쏟아지는 중이다. JTBC 보도 등에 따르면 도이치모터스 2차 주가조작의 ‘선수’ 김모 씨는 2021년 10월 검찰 조사에서 “자기들 말로는 BP(블랙펄인베스트의 영문 약칭으로 추정됨) 패밀리가 있는데 권오수, 이종호, 김모 씨, 김건희, 이모 씨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권오수 씨는 ‘선수’ 김 씨에게 주가조작을 의뢰한 도이치모터스의 오너, 이종호 씨는 주가조작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 블랙펄인베스트 전 대표다. 김 씨와 이종호 씨는 주가조작 사건이 시작되기 전부터 김 여사와 함께 도이치모터스 주요 주주로 참여해 온 인물들이다. ‘선수’ 김 씨의 “BP 패밀리” 운운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긴밀한 관계였을 수 있다. 또 이들 중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구명 로비 의혹도 받고 있는 이종호 씨는 2012년 이후에는 김 여사와 연락한 적이 없다고 주장해 왔으나, 도이치모터스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 시작된 2020년 9, 10월경 김 여사 번호로 40차례나 통화와 문자를 주고받은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관저 공사는 지난달 감사원 감사 결과 발표로 불신과 의혹이 오히려 커진 경우다. 감사원은 관저 공사를 총괄한 업체인 ‘21그램’이 계약도 하기 전에 공사에 착수했고, 15개 무자격 업체에 하도급업체 공사를 맡겨 건설산업기본법을 위반했다는 등의 지적 사항을 발표했다. 하지만 종합건설업 면허도 없는 영세업체에 국가 최고 보안시설인 관저의 확장과 보수공사를 수의계약으로 맡기도록 결정한 이가 누구인지, 가장 핵심적인 특혜 의혹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맹탕 감사 결과를 내놨다. ‘21그램’은 김 여사가 경영해 온 코바나컨텐츠에서 오래전부터 일감을 받아온 사실이 익히 알려진 업체다. 이러니 누가 감사 결과를 믿겠는가. 이상 언급한 세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관련자들이 모두 윤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는 점이다. ‘정치 브로커’ 명 씨, ‘BP 패밀리’로 언급된 김 씨와 이 씨, ‘21그램의 대표’ 김모 씨가 초청장을 받거나 취임식 당일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1심 재판 중이었던 권오수 이종호 씨는 취임식에 가지 않았지만, 그 대신 권 씨의 아들과 부인이 참석했다. 이들 외에 김 여사와 서울대 EMBA 과정을 함께 다닌 인연으로 김 여사의 어머니 최은순 씨의 잔액증명서를 위조해 준 김모 씨, 김 여사와 공동 작성 논문으로 위조 및 표절 논란에 휩싸인 김모 교수, 무속인 천공의 측근 등도 취임식에 참석한 사실이 언론의 취재를 통해 밝혀졌다. 모두가 김 여사와 인연을 빼고 나면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될 만한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지만, 취임식은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철학과 비전, 주요 정책 등을 전 국민에게 밝히는 엄숙한 자리다. 당연히 참석자 한 명 한 명이 5000만 국민에 대한 대표성을 가져야 하며, 선정 과정은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주가조작 패밀리, 문서위조범, ‘업자’, 무속인, 정치 브로커 등이 무더기로 섞여 들어 있었던 것이다. 취임식이 ‘여사 의혹의 중간 저수지’였다고 해도 할 말이 없고, 뒤탈이 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면면이다.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윤 대통령 취임식 직후 참석자 명단을 놓고 논란이 일자 당시 대통령비서실장과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나서 “전부 파기했다” “일부 남아 있다” 등 오락가락 해명 끝에 명단의 일부를 공개했다. 하지만 정작 의혹과 관심의 대상이었던 대통령 부부의 초청 명단은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 이 ‘저수지’에서 얼마나 많은 ‘오물’이 쏟아질지 모른다. 지금 그 전조를 보는 것 같아 걱정스러울 따름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체코 정부가 향후 원전 건설을 추진하기로 결정할 경우 우수한 기술력과 운영·관리 경험을 보유한 한국 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달라.” 2018년 11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원전 세일즈차’ 체코를 방문해 안드레이 바비시 체코 총리에게 한 말이다. ‘탈원전 선언’으로 국내 원전산업 생태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문 대통령의 ‘원전 세일즈’에 얼마나 진심이 담겼겠으며, 또 상대국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느냐는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뭐 하나 틀린 지적이 아니었다. 다만 일부에서는 ‘원전 건설이 확정되지도 않은 나라에 가서 무슨 원전 세일즈냐’는 비판도 있었는데, 이것만큼은 ‘원전 수주전(戰)’의 세계를 잘 몰라서 나온 소리다.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에너지 안보의 영역이자 1기당 10조 원이 넘는 건설비용이 드는 원전은 기술과 가격 경쟁력이 있다고 해서 수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식 계획이 확정되기 전부터 해당국 정부는 물론이고 국회, 산업계와 학계 등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공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체코 원전만 하더라도 이미 10년 전 박근혜 정권 때부터 우리 업체들이 입찰 참여 의사를 체코 정부에 공식 표명하고 꾸준한 수주 활동을 해왔다. 그런데도 사실 4년쯤 전까진 한국의 체코 원전 수주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이미 체코가 운영 중인 원전 6기 모두를 건설한 실적이 있고, 압도적 세계 1위 경쟁력을 가진 러시아 국영 원자력기업 로사톰의 수주가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한국에 갑작스러운 ‘천운’이 찾아든 것은 2021년 4월. 과거 체코에서 발생한 탄약고 폭발 사고의 배후에 러시아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양국 관계가 사상 최악의 상태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체코 정부는 러시아 로사톰을 퇴출시켜 버렸다. 이로써 수주전은 한국수력원자력, 프랑스전력공사(EDF), 미국 웨스팅하우스 간 3파전이 됐다. 하지만 웨스팅하우스는 2017년 파산 이후 지식재산권을 무기로 ‘삥’이나 뜯는 존재로 전락했고, EDF는 방만한 경영 탓에 기술·가격 경쟁력 없이 덩치만 큰 공룡으로 추락한 상태였다. ‘프랑스의 정치력’이란 변수 하나만 빼면 승부가 이때 이미 결정됐다고 할 수 있다. 새삼스럽게 체코 원전 수주전의 경과를 되짚어본 것은, 이 과정을 모르면 최근 더불어민주당 등 일부 야당 의원들의 ‘무리한 체코 원전 수출 전면 재검토’ 주장에 현혹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판을 엎자’고 주장하는 핵심 논거는 ‘덤핑 입찰’과 ‘공사비 증가 가능성’이다. 먼저 이들은 “체코 언론들은 윤석열 정부가 ‘덤핑 가격을 제시했다’고 지적했다”고 주장한다. 국익이 걸린 수주전에서 우리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주장을 펴려면 어느 언론사의 어떤 기사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 기사를 믿는 근거는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야 할 텐데, 밑도 끝도 없는 외마디 주장뿐이다. 행여라도 경제 포털인 ‘에코노미츠키 데니크’의 올해 5월 16일자 58행짜리 장문의 기사에서 딱 두 문장 언급된 “정통한 소식통은 한수원의 가능성을 더 높게 보고 있다. 덤핑에 가까운 가격으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를 침소봉대한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또 의원들은 공기가 예정보다 길어지고 공사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요 근거로 영국 힝클리 원전과 핀란드 올킬루오토 원전의 사례를 들었는데, 황당할 따름이다. 힝클리 원전은 프랑스 EDF의 대표적 실패 사례 중 하나고, 올킬루오토 원전은 EDF에 원자로를 납품하던 회사가 떨어져 나와 공사를 맡았다가 회사를 통째로 말아먹고 다시 EDF에 흡수 통합된 사연이 있는 프로젝트다. EDF가 탈락한 가장 큰 이유는 형편없는 가격 경쟁력과 함께 이들 프로젝트의 실패로 ‘시공능력’에 의문부호가 찍혔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수원이 선택된 가장 큰 이유가 ‘예정된 공기(工期) 안에 주어진 공사비’로 시공을 해온 그간의 ‘검증된 능력’ 덕분이다. 경쟁력이 한참 떨어지는 EDF의 실패를 한수원이 답습할 것이라고 보는 근거가 대체 뭔가. 한수원은 아직 체코 원전의 ‘우선협상 대상자’다. 내년 3월로 예상되는 최종 계약까지 갈 길이 멀다. 넘어야 할 고비도 많다. 웨스팅하우스는 계속 몽니를 부리고 있고, EDF도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중이다. 10년 동안 노심초사하며 갖은 공을 들여온 우리 기업들의 인수전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아예 판을 깨자’는 의원들의 마음속에도 국적이나 국익이라는 게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5년 단임제인 한국 대통령의 ‘하산길’은 험하고 가파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봉우리가 높은 만큼 레임덕의 골짜기는 더 깊고, 추락은 더 아득하다. “영광은 짧았고 고뇌는 길었다.” 표현은 달랐을지언정, 권력을 내려놓는 순간 이렇게 탄식한 이가 비단 김영삼 전 대통령(YS) 한 명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지 2년 반이 되는 날이다. 윤 대통령이 공식 취임한 것은 2022년 5월 10일이지만, 현실적으로 당선인에게 실리는 권력과 관심의 무게를 생각하면 윤 대통령의 임기는 사실상 당선과 함께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로써 반환점을 도는 셈이다. 유감스럽게도 윤 대통령의 중간 성적은 낙제점에 가깝다. 한국갤럽의 ‘역대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에 따르면, 지난주 조사를 포함한 ‘집권 3년차 1분기 평균’ 윤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는 24%에 그쳤다. 부정 평가는 3배 가까운 67%에 이른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당선된 8명의 대통령 중 최악이다. 윤 대통령을 빼고 긍정 평가 비율이 28%로 가장 낮은 노태우 전 대통령도 부정 평가는 40%에 불과했다. 부정 평가 비율이 높은 축에 속하는 박근혜, 노무현 전 대통령도 각각 56%와 55%로 윤 대통령보다는 10%포인트 이상 낮았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에게 ‘블록버스터급’ 반전의 기회가 찾아올까. 전례를 보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역대 대통령의 경우 굵직굵직한 성과는 대부분 ‘힘이 센’ 임기 초반에 달성했다. 금융실명제 실시, 하나회 해체, 공직자 재산공개제 도입 등 YS의 개혁은 당선 후 1년 이내에 단행한 조치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국제통화기금(IMF) 조기 탈출’은 임기 시작에 앞서 당선인 시절부터 주도권을 잡고 제때 추진했기에 가능했다. 이런 YS와 DJ도 반환점을 돌기가 무섭게 레임덕에 접어들었고 ‘아들·측근 비리’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불행한 퇴임을 맞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반환점을 돌 무렵이던 2010년 6월 여당인 한나라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는데도,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이 당시 박근혜 의원과의 불협화음으로 국회에서 부결되는 ‘쓴맛’을 봤다. 권력의 내리막길에서는 여당의 다수 의석도 안전판이 되지 못하는 법이다. 하물며 역대급으로 낮은 지지율에, 108석 소수 의석으로 180석이 넘는 거야(巨野)까지 상대해야 하는 윤 대통령의 하산길은 어떻겠는가. 한 발만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다. 하지만 윤 대통령에게 이런 현실에 대한 자각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국정브리핑에서 연금 의료 교육 노동 등 4대 개혁과 ‘저출생 위기 극복’을 “반드시 이뤄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다짐과 각오 자체는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우호적인 민심과 여의도 지형에서도, 역대 대통령들이 임기 후반기에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지난(至難)한 개혁 과제를 이뤄낼 정도로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느냐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국정브리핑에서 4대 개혁 등에 대해 국회의 협조를 당부한 것을 보면, 입법 뒷받침 없이는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나흘 뒤 열린 22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 개원식 첫 불참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까지 국회를 외면했다. 대통령실은 “대통령을 향해 언어폭력과 피켓 시위가 예상되는 상황”을 이유로 들었는데, 이런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가 걸린 4대 개혁을 제 궤도에 올리는 것보다 중요한가. 윤 대통령은 앞서 국정브리핑에서 “의대 증원이 마무리됐다”는 말도 했다. 의료 현장의 위기가 응급실을 넘어 중환자실로까지 번지고 있고, 의대 강의실이 6개월 넘게 텅텅 비어 있는 현실이다. 의대 증원은,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둘째 치고, 최소한 파행을 겪고 있는 의료 현장이 의정 갈등 이전의 정상을 회복하고 대학들이 늘어난 정원을 제대로 교육하는 것을 확인했을 때 비로소 마무리되는 것이다. 지금의 윤 대통령을 보고 있으면 ‘개혁은 법안이나 숫자를 던지면 끝’이라는 식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이래서는 의료개혁도, 연금개혁도, 교육개혁도, 노동개혁도 단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지금 이대로라면 윤 대통령이 퇴임 무렵 ‘긴 고뇌’와 함께 언급할 ‘짧은 영광’이 존재할지 의문이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이원석 검찰총장이 23일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의혹 사건’을 직권으로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 회부했다. 이 총장이 5월 본격적인 수사 의지를 내비치기가 무섭게 대통령실과 법무부가 서울중앙지검 지휘부를 ‘친윤 라인’으로 교체하고, 이어 교체된 지휘부가 총장을 ‘패싱’하고 ‘비공개 출장 조사’를 벌인 뒤 무혐의 결론을 내기까지 용산의 의중대로 수순을 밟아온 듯한 검찰 수사가 마지막 변수를 만났다. 이 총장은 앞서 올 1월 핼러윈 참사에 부실하게 대응한 혐의를 받은 김광호 당시 서울경찰청장에 대해 수사팀이 불기소 의견을 내자, 직권으로 수사심의위에 회부한 적이 있다. 수사심의위는 기소를 권고했고, 검찰은 이에 따라 김 청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이 총장이 이 사례를 얼마나 깊이 염두에 뒀는지는 알 수 없다. 일단 공개된 발언만 보면 김 여사에 대한 수사팀의 불기소 결정을 뒤집겠다는 의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대검에 따르면 “이 총장은 서울중앙지검의 수사 결과를 보고받고 증거 판단과 법리 해석이 충실히 이뤄졌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공정성을 제고하고 더 이상의 논란이 남지 않도록 매듭짓는 것”이 수사심의위 회부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총장의 의중이 무엇이든 ‘증거 판단과 법리 해석이 충실히 이뤄졌다’는 발언 자체는 부적절해 보인다. 수사심의위 위원들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면죄부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요식 절차”라는 야당의 비판은 이 총장이 자초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이 ‘더 이상의 논란이 남지 않도록 매듭지어질’ 가능성을 스스로 깎아내렸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왕설래에도 수사심의위 회부는 필요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우선 법조계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민간 분야의 인사들로 구성된 수사심의위 위원들이 물러가는 총장의 ‘가이드라인’을 따를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 또한 ‘총장 패싱’에서 ‘특혜 조사’ 논란까지 신뢰를 잃을 대로 잃은 검찰 수사의 무혐의 결론이 그대로 확정되는 것보다는 수사심의위라도 한 번 거치는 것이 공정성 측면에서 조금이라도 나을 것이다. 제도의 연원을 되짚어 봐도 수사심의위 회부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수사심의위 제도는 2017년 검경 수사권 조정 이슈가 제기되자 검찰이 내놓은 ‘셀프 개혁안’이다. 검찰은 이에 앞서 2010년 현직 검사들이 건설업자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받은 사건으로 큰 파문이 일자, “기소권에 대한 국민의 통제를 강화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수사심의위의 ‘이전 버전’에 해당하는 검찰시민위원회 제도를 도입했었다. 수사심의위를 도입하면서 검찰은 일반 시민들로 구성되는 미국의 대배심과 일본의 검찰심사회를 모델로 삼았다고 밝혔는데, 두 제도와 비교해 보면 수사심의위는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배심이 의무화된 주에서는 중요 사건 기소의 대부분을 검사가 아닌 대배심이 결정한다. 단순 자문기구인 한국의 수사심의위와 달리 독자적인 수사권도 갖고 있다. 일본의 검찰심사회도 법적인 구속력을 갖고 검찰의 불기소 결정을 걸러주는 실질적인 기능을 한다. 특히 제도의 활용 면에서 한국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수사심의위가 소집된 횟수는 7년간 통틀어 15차례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일본 검찰심사회의 심사 건수는 매년 평균 2500건에 이른다. 미국과 일본의 일반시민에 의한 검찰 권력 통제 사례를 보거나, 당초 검찰이 제도를 도입하면서 국민 앞에 한 다짐을 돌이켜 봐도 ‘디올백’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큰 사건을 수사심의위에 올리는 것은 망설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도 마찬가지다. 현행 대검찰청 예규는 수사심의위 대상을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거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는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작년 말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의혹 관련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했을 무렵 실시된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60∼70%에 이르렀다. 그만큼 국민적 의혹이 집중된 사건이라는 뜻이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의 경우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 등의 항소심 선고가 열리는 다음 달 12일 이후 사건을 처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총장은 다음 달 13일 퇴임식을 할 예정이어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심의위 소집 여부에 대한 결정권이 후임 총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후임 총장이 ‘국민의 눈높이’를 존중한다면 길은 외길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김건희 여사에 앵글을 맞춰 보면,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올해 여름휴가는 1년 전, 2년 전과는 많이 달랐다. 작년에는 경남 거제시 저도로 휴가를 떠나는 길에 새만금에서 열린 세계 잼버리 개영식에 윤 대통령과 함께 들른 것이 김 여사 관련 공개 일정의 전부였다. 재작년에도 서울에서 부부가 함께 연극을 봤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는 부산에서 이틀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적극적인 단독 일정을 소화했다. 6일에는 동구에 있는 명란브랜드연구소에 이어 중구에 있는 깡통시장을 방문했고, 수영구 광안리에 있는 카페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7일에는 영도구 흰여울문화마을, 사하구 감천문화마을, 중구 근현대역사관을 줄줄이 찾았다. 당초 비공개라고 했지만, 대통령실이 이틀간 뜸을 들인 뒤 8일 해당 사진들을 뿌리면서 화제성 면에서 어떤 공개 행사보다 화려한 나들이가 됐다. 통상의 경우라면 대통령 부인이 휴가를 맞아 전통시장이나 지역 명소를 찾는 것은 크게 관심 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제2부속실 부활을 코앞에 둔 시점에, 김 여사가 명품백 사건 이후 이어져 온 ‘잠행 모드’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공공연히 연출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제2부속실 부활과 함께 시작될 적극 행보를 염두에 둔 ‘몸풀기’라는 해석이 많은데, 만약 그렇다면 걱정과 불안이 앞선다. 제2부속실 폐지는 대선 국면에서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김건희 리스크’에 대한 국민적 우려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나온 윤 대통령의 주요 공약이다. 김 여사가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국민 앞에 맹세한 것도 그 연장선에서 나왔다. 내조에 전념하겠다는 영부인에게, 더구나 경호처의 경호까지 제공되는 마당에, 공약까지 뒤집어 가면서 제2부속실을 설치해 보좌하는 것은 어디를 봐도 적절치 않다. 그럼에도 제2부속실 설치를 주문하는 여론이 비등하게 된 것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줄곧 커져온 ‘김건희 리스크’가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제2부속실을 설치하면, 정체조차 불분명한 인물이 관저로 찾아가 명품백을 건네는 황당한 불상사는 최소한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울며 겨자 먹기이자 고육지책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김 여사는 제2부속실 부활에 앞서 자신의 부적절한 처신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난맥상이 펼쳐지고 있는지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현직 대통령이 ‘거부권’을 자신의 배우자 특검을 막기 위해 행사하는 것부터 듣도 보도 못한 기막힌 풍경이다. 검찰청사 밖 제3의 장소에서 휴대전화까지 제출하고 비공개 ‘출장 조사’를 벌인 검찰은 더는 “법 앞의 평등”을 운운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반부패 청렴기관이라는 국민권익위원회는 명품백 사건을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 논리로 ‘무혐의 종결’해 국민적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마침내 이 사건을 맡았던 권익위 핵심 간부가 8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안타까운 일까지 벌어졌다. 고인은 명품백 사건 무혐의 종결로 “20년 가까이 부패 방지를 해온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것 같다”는 괴로움을 주위에 토로했다고 하니, 김 여사와 결코 무관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김 여사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김건희 리스크’ 해소에 대한 어떤 보장도 없이 제2부속실 보좌를 받겠다고 한다면 곤란한 일이다. 제2부속실 가동에 앞서 김 여사는 적어도 두 가지를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먼저 그동안의 잘못된 처신과 잡음에 대한 분명한 사과다. 올 1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게 보낸 문자에 비치는 ‘정무적 저울질’이나 ‘간보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출장 조사’ 나온 검사 앞에서 비공개 사과를 하고, 그것을 다시 변호인이 유튜브 방송에 나와 전하는 식의 사과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국민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해야 한다. 또 하나는 다짐이다. 김 여사가 대선 전에 했던 ‘내조 전념’ 서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동안의 국정 간여 및 비선 인사 논란으로 색이 바랜 만큼 다시 한번 분명한 단어로 국민 앞에 약속해야 한다. 영부인으로서의 활동은 정상외교 등 필요 최소한에 그칠 것이고, 모든 것을 비선이 아닌 제2부속실을 통해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진행할 것을 다짐해야 한다. 이런 사과와 다짐이 없다면, 제2부속실 부활 방침을 차라리 철회하는 것이 그나마 ‘공약 파기’라는 짐 하나라도 더는 길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참 별일이 다 있다. 4·10총선 승리로 압도적 다수당이 된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최근 ‘자멸 전당대회’로 온갖 진상 행태를 보인 국민의힘에 뒤진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18∼25일 중 실시된 전국 단위 정당 지지율 조사는 모두 8건. 이 가운데 한국갤럽 조사, 엠브레인퍼블릭 등 4개사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전국지표조사, 리얼미터 조사, 미디어리서치 조사 등 4개 조사에서 국민의힘이 오차범위를 넘어 민주당을 앞섰다. 앞의 3개 조사의 경우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가 ‘먹사니즘’ 선언을 한 10일을 전후해 실시된 조사에서는 두 당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 안에 있었다. 즉, 1∼3주 사이에 민주당이 열세로 밀리고 국민의힘이 치고 올라왔다는 이야기다. 미디어리서치 조사는 두 시기 모두 국민의힘이 오차범위 밖에서 민주당을 앞섰다. 8개 조사 중 민주당이 오차범위를 넘어 앞선 것은 여론조사꽃의 무선전화 면접 조사뿐이었다. 8개 중 나머지 3개 조사는 두 시기 모두 오차범위 내였다. 이 전 대표의 ‘먹사니즘 선언’부터 최근까지의 기간은 여당에서 전무후무한 ‘진흙탕 전대’가 한창이던 때다. ‘명품백 사과 의사’를 밝힌 문자를 한동훈 후보가 ‘읽씹’했다는 논란으로 모자라 댓글팀 의혹 공방, 지지자 간 물리적 충돌, 공소 취소 청탁 폭로 등 온갖 ‘막장극’이 쏟아지고 그 후폭풍이 이어지던 때다. 그런데도 이런 지지율이 나왔다는 것은, 자중지란에 빠진 무기력한 여당보다 민주당의 행태가 국민 눈에 더 한심하게 비쳤다는 것 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이재명이 곧 민주당이고 민주당이 곧 이재명인 일극체제’란 걸 고려하면, 최소한 이 전 대표의 ‘먹사니즘’ 행보가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는 해석을 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전 대표가 표방한 ‘먹사니즘’의 내용 중에서 고장 난 축음기처럼 반복되는 ‘기본○○ 타령’을 빼고 나면,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성장’이다. 이 전 대표는 출마선언문에서 “성장의 회복과 지속 성장이 곧 민생이자 먹사니즘의 핵심”이라며 ‘성장’을 14차례나 언급했다. 방향은 옳다. 문제는 그 방법론과 실천이다. 시장경제에서 성장을 견인하는 기본 주체는 기업이다. 성장엔진을 점화하려면 기업의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고, 국가는 건전한 재정·금융정책을 통해 안정적인 경제 환경과 ‘위기 안전판’을 만들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과도한 규제를 혁파하고, 과격한 노사분규 문화를 개선하며, 국가 재정을 축내는 선심성 포퓰리즘을 과감히 배척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전 대표가 먹사니즘 선언 이후 보여준 행보는 이와는 정반대다. 가뜩이나 과격한 노동쟁의를 더 과격하게 끌고 갈 ‘노란봉투법’, 포퓰리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전 국민 25만 원 지원법’은 해당 상임위에서 여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의결을 강행토록 했다. 조만간 본회의 통과까지 해치울 기세다. 이 중 기업 활동에 즉각적인 부담을 안기게 될 노란봉투법은 21대 국회에서 밀어붙였다가 대통령 거부권에 부딪혀 무산된 ‘이전 버전’보다 훨씬 개악된 내용이다. 이뿐 아니다. 이 전 대표가 먹사니즘 선언과 함께 신성장 전략의 키워드로 제시한 것이 ‘전력망’과 ‘인공지능(AI)’이다. 이를 뒷받침하려면 21대 국회에 상정됐다가 흐지부지된 ‘전력망특별법’과 ‘AI 기본법’의 제정이 필수적이다. 전력망특별법이 늦어지면 민간에서 480조 원이 투입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상당 부분이 전기 부족으로 무용지물이 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는데, 이 법안의 처리는 까마득한 후순위로 밀려 있다. AI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필수적인 ‘AI 기본법’은 방송통신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여야 간의 정쟁에 밀려 제대로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 오죽 답답했으면 경제계에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과학기술과 방송통신으로 분리해 달라”는 하소연이 나올까. 도대체 ‘MBC 사장’이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길래 시급한 ‘경제·민생법안’ 논의는 제쳐두고 국회 과방위와 본회의를 온통 ‘MBC 판’으로 만드나. 국무총리도 아니고 경제부총리도 아닌, ‘MBC 사장 선임을 위한 일회용 방통위원장’ 저질 청문회를 국민이 사흘씩이나 봐야 하나. 이 전 대표의 먹사니즘 행보는 차기 대선을 겨냥해 지지세를 중도로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 따로 행동 따로, 겉 다르고 속 다른 빈껍데기 ‘먹사니즘’에 현혹될 중도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참 딱한 노릇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저주는 병아리와 같아서 항상 제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사람에게 원한을 품으면 무덤이 두 개(하나는 상대방, 하나는 자기 것).’ 앞은 영국 시인 로버트 사우디의 장편 서사시에서 유래한 말이고, 뒤는 오래된 일본 속담이다. 사람을 향한 원한과 저주는 그 화(禍)가 상대방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신에게도 미친다는 뜻을 공통적으로 담고 있다. 총선 참패로 인한 혼란과 무기력을 수습하고 윤석열 대통령 집권 후반기 당정 관계의 틀을 짜야 할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집단 자해극’을 보면서 떠오르는 말들이다. 공식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한동훈(가나다순) 후보 간의 경선극은 ‘김건희 여사 문자 무시’ 논란에 밀려나 전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갈수록 ‘김건희 대 한동훈’의 구도만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작년 3·8 전당대회에서도 윤심(尹心)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반 국민 상대 여론조사에서 5등을 할 정도로 약체였던 김기현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당심 70%, 민심 30%’ 룰을 ‘당심 100%’로 바꿨고, ‘친윤’ 초선 의원들에게 연판장을 돌리게 해 선두 나경원 후보를 주저앉혔으며, 대통령실이 나서 안철수 후보를 ‘저격’하는 등의 반칙과 무리수들이 총동원됐다. 하지만 ‘너 죽고 나 죽자’ 식 ‘살기(殺氣)’가 감지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전당대회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당내 경선이라고 해도 총선 패배를 둘러싼 책임론 공방, 자질이나 도덕성 검증, 네거티브 공세가 어느 정도까지는 오갈 수 있지만, 이번 전당대회는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상대방을 망쳐놓을 수만 있다면 내 한 몸 망가져도 괜찮다는 원한과 저주의 기운이 느껴진다. ‘여사 문자’의 최초 유포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다만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타격 효과’가 누구를 향했는지를 생각하면 친윤 진영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정황이나 보도도 적지 않다. 당장 문자가 공개되자마자 한 후보는 “정치적 판단 미숙”, “수십 년간 모셔 왔던 형님이고 형수님이고 넥타이 받고, 반찬 받고 했는데 정치 이전에 인간의 감수성 문제”, “혹시 총선을 고의로 패배로 이끌려고 한 게 아닌지…” 등의 집중 공세를 다른 후보들로부터 받았다. 이번 전당대회 승부가 어떻게 결론 나건 ‘배신자’ ‘정무 감각 미숙’과 같은 프레임이 두고두고 한 후보를 따라다니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김 여사와 친윤 진영이 반사이익만 챙긴 것은 아니다. ‘여사 문자 무시’ 공방 이후 한 후보의 지지율이 되레 올라간 결과는 둘째 치고, ‘당무·국정 개입 논란’이라는 더 무거운 짐을 안게 됐다.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국민 앞에 다짐했던 영부인이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내밀하게 보낸 텔레그램 문자를, 누군가 전당대회 한복판에 이슈로 내던지거나 내던져지게 했을 때는 이 정도 후폭풍쯤은 스스로 예상하거나 각오했을 터다. 정치적 공세와 같은 평범한 언어가 아니라 저주, 원한, 악의와 같은 극단의 언어가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여사 문자’의 최초 유포자가 누구인지와는 무관하게, 한 후보가 ‘이판사판식의 악의’를 드러내는 장면도 있었다. TV 토론에서 “제가 이걸 다 공개했었을 경우에 위험해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꺼낸 이상, 한 점 의문이 남지 않도록 구체적인 내용을 상세하게 공개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해서도 당당하고 공정한 태도다. 살짝 냄새만 피우고 중간에 말을 끊는 것은 오직 상대방에게 ‘의혹의 오물’을 뿌리는 데만 목적이 있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디를 봐도 여당 안에서는 이번 진흙탕 싸움의 승자가 보이지 않는다. 쾌재를 부르는 것은 오직 야당뿐이다. 윤 대통령 탄핵 청원 청문회를 밀어붙이면서 역풍을 걱정했던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여당 아니면 어쩔 뻔했냐”는 말까지 나온다. 당 대표가 정해지기까지는 아직 1주일 이상 남았지만 여당은 벌써부터 전당대회 이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김건희 댓글팀’이나 ‘한동훈 여론조성팀’은 양측의 공방 과정에서 심각한 국민적 의혹으로 떠오른 상황이어서 진실을 규명하지 않고 그냥 묻어두기는 힘들 것이다. 한 후보가 말한 “위험해지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제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저주 병아리들’의 발걸음이 더없이 총총해 보인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이재명 대표를 아버지처럼 모시자.’ ‘이재명 대표를 임금님처럼 모시자.’ 둘 중 어느 쪽이 더 부적절한 표현이고, 더 심한 아부가 될까. ‘군사부일체(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이니 거기서 거기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차이가 있을까. 엄밀한 유교적 잣대로 보면 전자(前者)가 아닐까 싶다. 유교 경전인 ‘예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아버지의 잘못을 감추는 것은 괜찮지만 들춰내고 지적해서는 안 된다. 설령 지적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낯빛이 바뀌지 않을 정도의 선까지만 부드럽게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다(유은무범·有隱無犯). 반면 왕의 잘못은 왕이 싫은 표정을 짓건 말건 굽히지 말고 직언(直言)해야 한다. 왕의 허물을 못 본 척해서는 안 된다(유범무은·有犯無隱).” 요컨대 아버지는 직언이 허용되지 않는 존재, 왕은 허용되는 것을 넘어 의무적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전근대적인 왕정 체제조차도 맹목적인 복종과 아부가 아닌,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비판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는 함의도 담겨 있다. 하물며 민주국가의 민주적 정당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은 어떨까. “민주당의 아버지는 이재명”이라는 강민구 최고위원의 발언은 민주당이 나가고 있는 방향이나 전체적인 당내 분위기와는 무관한 돌출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강 위원의 발언은 민주당 안에 이미 존재하는 흐름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최고위의 다른 멤버들만 봐도 그렇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최고위원이 되기 전인 2021년 12월 ‘인간 이재명’이라는 책에 대한 독후감이라며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인간 이재명과 심리적 일체감을 느끼며 아니 흐느끼며 읽었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최고위원이 된 뒤인 올 2월에는 “당의 시대정신이자 상징”이라며 이 대표를 축구 스타 손흥민에 비유하기도 했다. 정 의원이 최고위원이라는 당의 요직과 ‘국회 내 상원’이라는 법제사법위원회의 위원장을 동시에 꿰찰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봐야 쉽게 이해가 될 것 같다. ‘명심(明心)’과 ‘개딸’의 지지를 얻고 단독 입후보 끝에 사실상 추대된 박찬대 원내대표(당연직 최고위원)도 부쩍 피치를 올리는 중이다. “대표가 너무 착하다. 나보다 더 착하다. 이 대표가 너무 반대를 많이 해서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민주당 당무위가 당 대표의 사퇴 시한을 ‘대선 1년 전’으로 규정한 당헌의 예외 조항을 둘지 여부를 논의한 지난달 12일 회의가 길어진 이유를 설명하며 박 원내대표가 한 말이다. 당헌 개정은 대선 직전까지 ‘이재명 일극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고 2026년 지방선거의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까지 열어주는 내용이다. 민주당의 오랜 전통인 ‘대권-당권 분리 원칙’을 허무는 중요 현안을 설명하는 와중에도 틈을 놓치지 않고 아부성 발언을 잊지 않는 게 놀랍다. 다가오는 8·18 전당대회에서 선출될 최고위원직 5자리의 면면도 지금보다 못할 것 같지 않다. 가장 먼저 출마 의사를 밝힌 강선우 의원은 “이재명을 지키는 일이 민주당을 지키는 일”이라며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어대명(어차피 대표는 이재명)이 아니라 당대명(당연히 대표는 이재명)”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대표의 연임을 ‘대세론’을 넘어 누구도 의견을 개진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당위(當爲)’로 격상시킨 것이다. 추가로 출마 의사를 밝혔거나 밝힐 예정인 10여 명도 ‘친명’ 일색으로, 벌써부터 낯 뜨거운 ‘명심 마케팅’만 난무하는 중이다. 민주당이 이렇게 된 데는 이 대표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고 보이거나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당내 인사들에 대해 ‘벌떼’처럼 달려들어 집단항의를 하고 ‘문자폭탄’을 날려대는 개딸의 존재가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도 이 대표와 지도부는 여기에 브레이크를 걸기는커녕 개딸의 입김을 점점 더 키우고 있다. 최고위원 선출 본투표에서 권리당원의 비율을 올리는 것으로 부족했던지 예비경선까지 권리당원이 좌우할 수 있게 하는 길을 텄다. 이렇게 되면 개딸은 갈수록 폭주하고 이 대표에 대한 ‘직언’이나 ‘비판’은 더욱더 질식될 것이다. 비판 너머의 존재인 ‘아버지 이재명’에게 개딸은 박수를 보낼지 모르지만, 다수 국민이 참아줄지는 의문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델라웨어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크기가 작은 주다. 인구는 100만 명에 불과하다. 미국인들조차 어디에 붙어 있는지 잘 모른다는 델라웨어의 ‘회사법’이 한국 재계와 법조계의 뜨거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일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지난 21대 국회에서 델라웨어 회사법을 모델로 상법 개정을 추진하면서부터다. 민주당이 22대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법 개정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됐는데, 최근 윤석열 정부의 실세로 통하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까지 더불어 ‘총대’를 메고 나서면서 법 개정의 영향권에 들게 된 기업들의 ‘불안 지수’는 급격히 치솟고 있다. 상법 개정안의 내용은 이사가 ‘충실(loyalty) 의무’를 지켜야 할 대상을 기존의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한 단어가 추가되는 것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사와 회사, 이사와 주주, 회사와 주주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는 ‘대지진급 변화’이다 보니 기업계에서는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예컨대 주주 중에는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이야 어찌 되건 단기적인 배당과 시세차익 확대에만 관심을 두는 주주들도 있는데, ‘주주’라는 이름으로 이들에 대한 충실 의무까지 상법에 명문화된다면 ‘리스크’를 동반한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은 할 엄두를 못 내게 된다는 것이 기업계의 우려다. 특히 해외 투기자본들이 적은 지분만으로도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지렛대 삼아 한국 대기업을 상대로 무더기 소송전을 하는 데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의문은 기업 환경과 토양이 다른 델라웨어의 회사법을 베끼다시피 한국으로 ‘이식’하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델라웨어는 기업에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곳이다. 정해진 양식만 채워 넣으면 1시간 안에 법인 설립이 가능하다. 증빙자료는 전혀 필요 없다. 실명(實名)도 필요 없고, 사무실도 필요 없다. 그러다 보니 조그만 2층짜리 건물에 30만 개가 넘는 기업이 주소지를 두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국의 기업인들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식 배임죄로 처벌당할 일을 걱정할 일도 없다. 포이즌 필(적대적 M&A에 대항해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으로 지분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처럼 강력한 경영권 방어장치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 같은 것 하나쯤 회사법에 명시돼 있다고 해서 기업 활동에 짐이 될 일은 없다. 하지만 이중삼중의 처벌과 규제에 변변한 경영권 방어장치 하나 없는 한국은 다르다. 이 원장은 상법 개정에 대한 자신의 발언으로 재계 반발이 거세지자 14일 ‘배임죄 폐지 병행론’을 들고나왔다. 배임죄는 주요 선진국 어디에도 없는 제도이고, 배임죄로 인해 이사의 의사결정이 과도하게 형사처벌 대상이 되고 있다는 취지다. 이것만 놓고 보면 일리 있는 이야기다. 배임죄는 폐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의적인 구성요건과 과도한 형량에 대해서는 시급한 개선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배임죄 폐지와 상법 개정이 등가(等價)로 맞바꿀 사안인가. 배임죄만 없애면 상법 개정에 따른 부작용은 완전히 해소되는 것인가. 입법권을 장악한 민주당을 설득해 배임죄 폐지를 실현할 전략과 능력은 있나. 배임죄는 상법 개정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폐지 또는 개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 꼬리를 무는 의문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게 소관도 아닌 ‘차관급’ 금감원장이 책임 있게 답할 수 있는 문제인가. 현행법에 금융감독원은 ‘금융위원회나 증권선물위원회의 지도·감독을 받아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감독 업무 등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규정돼 있다. 금감원장의 역할을 아무리 확대 해석해 봐도 상법 및 형법 개정과 같은 중대 현안에 대해 정부를 대표해서 발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기업 경영 패러다임을 바꾸는, 이 정도 사안이라면 주무 장관인 법무부 장관이나 경제 운용을 총괄하는 경제부총리가 설명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야 불필요한 혼선과 동요, 국정 난맥을 막을 수 있다. 이 원장은 최근 “세제가 됐건 회사법 이슈가 됐건 상류에 있는 공장에서 폐수가 흘러들어서, 발생은 거기에서 하지만 하류를 거쳐 가면서 저희가 경작하는 들판에 영향을 강하게 미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인식이면 앞으로도 부총리나 주무 장관들을 제쳐두고 자신이 앞장서 나서겠다는 신호로 읽히는데, 여야 합의로 만든 법안을 폐수에 비유하는 것이 공직자로서 합당한 태도인지, ‘상류’에는 나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기본적인 질문부터 스스로 던져 보기 바란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