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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터 영상 매체를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변형한 예술 작품을 선보였던 빌 비올라(1951∼2024)의 작품들이 한국을 찾았다. 3일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K1, K3에서 개막한 빌 비올라 개인전 ‘Moving Stillness’는 7월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전시다. K1 전시장 로비에 가면 비올라가 대학을 졸업하고 만든 작품 ‘정보’(Information)가 보인다. 이 작품은 비디오가 망가졌을 때 등장하는 일그러진 화면을 추상화처럼 일부러 만들어내 하나의 영상으로 구성했다. 백남준이 자석을 이용해 텔레비전 화면을 일그러뜨린 것과 비슷하다. 영상 매체가 너무나 친숙해진 지금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활용할 수 있는 기법이지만, 이 작품은 1973년에 제작됐다.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 영상을 멈추고 늘어뜨리는 등의 방식을 이용해 작가는 시간과 인식의 의미를 돌아본다. K1 전시장 2층의 ‘반사하는 연못’(The Reflecting Pool, 1977-9/1997)은 이런 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비올라의 초기 작품이다. 이 영상은 비올라가 여섯 살 때 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우선 영상에서는 한 남자(비올라)가 숲에서 등장해 연못으로 걸어가 점프한다. 남자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멈추고, 아래의 연못에는 파동이 인다. 공중의 남자는 서서히 사라지고 7분 뒤 물에 젖은 비올라가 나타나 걸어서 숲으로 사라진다. 즉 남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면만 삭제된 형태다. 비올라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물에 빠졌을 때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빠진 즉시 완전히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무중력 상태에서 평생 잊지 못할 시각적인 경험을 했다. 푸른색, 빛, 그리고 꿈을 꾸는 것 같았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내가 천국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삼촌이 나를 물에서 꺼내주었다.” 영상에서 남자가 허공에 멈춰 있는 장면은 이때의 초현실적인 경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전시는 초기의 실험적인 형태가 주를 이룬다. 내년 1월 2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0세기부터 영상 매체를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변형한 예술 작품을 선보였던 빌 비올라(1951~2024)의 작품들이 한국을 찾았다. 3일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K1, K3에서 개막한 빌 비올라 개인전 ‘Moving Stillness’는 7월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전시다. 비올라가 1970년대 비디오테이프를 이용해 만든 작품을 포함해 총 7점을 만날 수 있다.K1 전시장 로비에 가면 비올라가 대학을 졸업하고 만든 작품 ‘정보’(Information)가 보인다. 이 작품은 비디오가 망가졌을 때 등장하는 일그러진 화면을 추상화처럼 일부러 만들어내 하나의 영상으로 구성했다. 백남준이 자석을 이용해 텔레비전 화면을 일그러뜨린 것과 비슷하다. 영상 매체가 너무나 친숙해진 지금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활용할 수 있는 기법이지만, 이 작품은 1973년에 제작됐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 영상을 멈추고 늘어뜨리는 등의 방식을 이용해 작가는 시간과 인식의 의미를 돌아본다. K1 전시장 2층의 ‘반사하는 연못’(The Reflecting Pool, 1977-9/1997)은 이런 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비올라의 초기 작품이다. 이 영상은 비올라가 6살 때 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우선 영상에서는 한 남자(비올라)가 숲에서 등장해 연못으로 걸어가 점프한다. 남자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멈추고, 아래의 연못에는 파동이 인다. 공중의 남자는 서서히 사라지고 7분 뒤 물에 젖은 비올라가 나타나 걸어서 숲으로 사라진다. 즉 남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면만 삭제된 형태다.비올라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물에 빠졌을 때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빠진 즉시 완전히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무중력 상태에서 평생 잊지 못할 시각적인 경험을 했다. 푸른색, 빛, 그리고 꿈을 꾸는 것 같았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내가 천국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삼촌이 나를 물에서 꺼내주었다.”영상에서 남자가 허공에 멈춰있는 장면은 이때의 초현실적인 경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전시에서는 이 밖에 비올라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품 ‘인터벌’(Interval)과 수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흔들리는 이미지를 표현한 ‘정지 속의 움직임: 레이니어산 1979’(Moving Stillness: Mount Rainier 1979)도 감상할 수 있다. 후기 비올라의 작품은 종교적인 내용을 담거나, 극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는데 이번 전시는 초기의 실험적인 형태가 주를 이룬다. 전시는 내년 1월 2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소설가 한강(54)은 현지에서 기념 행보도 이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그가 6일(현지 시간) 의자에 사인을 한 것과 찻잔을 기증한 것. 해당 의자는 노벨상 박물관 1층 식당에서 실제 손님을 맞는 의자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의미가 남다르다. 한강이 사인한 의자 밑바닥에는 아니 에르노(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욘 포세(2023년 수상)의 사인도 보인다. ‘의자 사인’은 노벨상 100주년인 2001년부터 시작된 전통. 손님들은 의자를 뒤집어 보며 노벨상 수상자의 서명을 확인하는 이색 경험을 할 수 있다. 그해 수상자가 사인한 의자는 4주간 전시된 후 식당으로 옮겨지는데 이후로는 ‘한강 의자’에도 앉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강은 노벨상 박물관에 자신이 쓰던 옥색 찻잔도 기증했다. 그는 ‘작은 찻잔’이란 제목의 짧은 메모도 함께 남겼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가장 맑은 정신으로 전날까지 쓴 소설의 다음을 이어 쓰기, 집 근처의 천변을 하루 한 번 이상 걷기, 보통 녹차 잎을 우리는 찻주전자에 홍차 잎을 넣어 우린 다음 책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한 잔씩만 마시기.’ 한강은 자신의 일상 한 부분을 떼어내 스웨덴에 놓고 온 것이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산업계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부결 후폭풍을 거세게 앓고 있다. 팬데믹 이후 회복세를 나타내던 관광산업은 해외 주요 국가들의 여행제한 권고로 회복의 불씨가 꺼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정치적 불안은 이미 침체된 내수 경기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 수 있어 연말 특수로 반등을 노리던 유통 및 소비재 산업도 직격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체 무슨 일” 불안한 외국인 관광객 8일 호텔업계에 따르면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 여행이 안전한지’를 묻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한 특급호텔 관계자는 “비상계엄령 발표 당일과 다음 날 아침 ‘무슨 일인 것인지 설명해 달라’는 요청이 프런트에 쏟아졌다”고 했다. 호텔업계에서는 이에 더해 각종 행사·연회 일정 취소를 우려하고 있다. 사회적 분위기가 위축되는 데다 도심 지역 대규모 집회 등으로 행사에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사들도 정치적 갈등이 장기화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일부 국가는 자국민에게 한국 방문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영국 외교부는 “광화문과 대통령실(삼각지), 국회(여의도) 일대에서 시위가 예상된다”고 했고, 이스라엘 외교부도 한국 여행에 대해 “방문 필요성을 검토해 보라”고 공지했다. 이종우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속되는 시위 등으로 불안감을 느낀 외국인들이 발길을 줄일 것”이라며 “외국인 매출 비중이 높은 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민간과 공동 대응반을 구성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6일 여행 관련 민간 협회, 단체와 관광 분야 현안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해외 여행객의 문의나 예약 취소 상황을 매일 모니터링하고 필요한 조치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공동 대응 체계를 만들기로 했다. ● 소비 심리 위축에 ‘연말 대목’ 사라질 위기 불안정한 정치 상황은 소비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지난 두 번의 탄핵 정국 때도 내수 경기가 급락한 바 있다. 한국은행의 소비자동향조사 통계에 따르면 2004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통과 직후인 그해 2분기(4∼6월) 소비자심리지수는 89로 전 분기(1∼3월)의 95보다 6.3% 떨어졌다. 같은 해 4분기(10∼12월)에는 85까지 하락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2016년 12월 소비자심리지수는 94로 두 달 전보다 10% 가까이 급락한 바 있다. 전통적으로 12월은 완성차 업체들이 각종 할인 이벤트를 공격적으로 펼치는 자동차 판매 성수기로 꼽힌다. 올해는 정치적 이슈와 함께 파업까지 진행돼 악재가 겹쳤다. 이달 5, 6일 현대자동차와 한국지엠(GM) 노동조합이 부분 파업에 들어간 데 이어 11일에는 전국금속노동조합이 전면 파업을 예고했다. 사회의 관심이 탄핵 이슈로 쏠리며 소비자들의 자동차 구매 관심도가 떨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올해 내내 국내 판매가 부진했는데 연말에 또 다른 대형 암초를 만난 셈”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연말 시즌 특수로 반등을 꾀하던 백화점 등 유통 기업들도 비상이 걸렸다. 이들은 내년 사업 계획 재검토를 포함한 긴급 경영 전략회의를 여는 등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한 유통 대기업 임원은 “지금 같은 대형 악재가 생기면 내수 기업들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며 “내년 상반기(1∼6월)까지는 투자를 포함한 모든 경영 활동에 보수적으로 접근할 것”이라고 했다.이민아 기자 omg@donga.com한재희 기자 hee@donga.com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폐하께서 현재 전심전력하는 계획이 두 가지 있다고 들었다. 하나는 황제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 있는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것이다. 폐하 주변에는 이런 헛된 계획을 부추기는 지옥의 사냥개 무리가 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황제가 되려고 하자 윤치호는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이어 제국 수립 하루 전, 신축된 환구단에서 고종이 제사를 올리는 광경을 본 그의 생각이다. “진지함이나 아름다움,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렬을 보니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전 세계 역사상 이보다 수치스러운 황제의 칭호가 있을까?’” 그런가 하면 궁내부 주사였던 정교는 제국 수립에 앞장섰으며 황제 즉위를 지지한다. 고종이 자주독립의 기틀을 세웠고 명분을 바르게 했다는 이유다. 또 역사 속의 다양한 예를 들어 영토가 크고 작은 것은 황제국에 중요한 요건이 아니라는 논리도 펼친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을 거쳐 일제 강제 병합이라는 망국의 결말을 맞게 된다. 이 시기를 당대 다양한 인물의 목소리로 돌아보는 책이다. 책이 인용하는 것은 다섯 인물이 남긴 기록이다. 서구 문물을 앞장서서 수용하고 국내외 인사를 만나며 광범위하게 활동한 정치인 윤치호, 천주교를 포교하러 한반도에 와서 대한제국 권력을 가까이 지켜본 프랑스 신부 귀스타프 뮈텔, 당대 인물을 관찰하며 역사책을 남긴 지식인 정교와 언론인 황현, 그리고 일반 백성의 시각을 전할 상공인 지규식 등이다. 윤치호가 남긴 것은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60여 년에 걸쳐 쓴 ‘윤치호 일기’다. 이 일기는 지식과 명망, 재력을 갖춘 인물의 일상과 속내가 들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풍문들도 남아 있어 한국 근현대 인물과 지성사, 민족운동, 친일파 연구에 필수적인 사료다. 뮈텔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부터 1933년까지 ‘뮈텔주교일기’를 썼다. 여기에는 조선 정계 인물의 활동, 외국 열강의 움직임이 수시로 언급되며 고종이나 관료들과 뮈텔이 나눈 대화도 남아 있다. 정교와 황현은 당대 신문 자료와 공식 기록을 활용한 역사서 ‘대한계년사’와 ‘매천야록’을 남겼다. 앞선 두 인물의 일기와 달리 시차를 두고 과거 사건을 회상하며 다른 기록을 참고해 서술해 갔다는 점이 다르다. 또 정교는 도시형 개화 지식층이며 황현은 농촌형 유학자에 가까워 두 사람의 다른 역사관과 현실 인식도 비교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재일기’를 남긴 지규식은 도자기를 왕실과 관부에 조달하는 평민 출신 공인(貢人)이다. 1891년부터 1911년까지 매일 일기를 남겨 외세 침략과 정국 변동이 심했던 시기 평범한 사람의 고민과 고통이 드러난다. 책은 대한제국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며, 역사적 사건을 이 다섯 명의 목소리를 통해 풀어낸다. 또 주인공들과 관련된 정부의 조치를 ‘승정원일기’ 등을 통해 기술했다. 이를 통해 일제가 편찬한 ‘고종, 순종실록’의 편향성을 벗어나 당대의 역동적인 삶과 다채로운 인식을 조명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영국 팝스타 엘턴 존(77·사진)이 자신이 작곡에 참여한 뮤지컬 공연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시력을 잃고 있다고 밝혔다. 1일(현지 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존은 이날 런던에서 열린 뮤지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자선 공연에서 “시력을 잃어 (앞선 뮤지컬) 시사회에 갈 수 없었다”며 “보는 건 힘들지만 듣는 건 좋아서 오늘 밤 기분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9월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감염으로 오른쪽 눈이 시력이 좋지 않다고 처음 밝혔다. 지난달 미국 ABC방송 ‘굿모닝 아메리카’에 나와선 “7월 프랑스 남부에서 감염병에 걸려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지 4개월이 됐고 왼쪽 눈도 상태가 좋지 않다”고 고백했다. 영국 팝의 전설인 존은 2023년 고별 공연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다만 이번에 소설 원작이자 영화로도 인기를 얻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뮤지컬 공연의 작곡자로 참여했다. 해당 영화에 등장하는 잡지사 편집장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 보그 편집장 애나 윈터도 이번 자선 공연에 참석했다. 윈터는 공연을 보고 “재밌다”고 말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레바논 출신 예술가 타레크 아투이는 지난해 접경지대인 강원 철원 지역 초중학생들과 함께 사탕, 탁구공 등 여러 가지 물체로 만든 악기로 소리를 내보는 워크숍을 열었다. 홍영인 작가는 겨울철 철원으로 날아오는 두루미를 관찰하고, 양혜규는 서울대 기후연구실의 꿀벌 연구를 함께 했다. 이처럼 국내외 현대미술가들이 지난해 철원의 여러 기관 및 마을 공동체와 협업해 연구, 워크숍을 하며 시작된 전시 ‘언두 플래닛’이 3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개막했다. 전시는 철원에서 현장 연구를 한 작가 5팀을 비롯해 총 17팀의 작가가 기후 변화와 생태계를 고찰한 작품을 아트선재센터 1, 2층에서 선보인다. 크게 ‘비인간’ ‘대지 미술’ ‘커뮤니티’ 등 3개의 주제로 나뉜다. ‘비인간’ 전시장에서는 두루미를 관찰했던 홍 작가가 하얀 모래 위 두루미 발 모양의 신발을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신발을 신은 두루미를 관객에게 상상하게 함으로써 ‘새들’이 아니라 각자의 정체성을 가진 개별 존재로 바라보게 한다는 의도다. 양혜규는 꿀벌을 주인공으로 인간 세계를 돌아보는 영상 작업 ‘황색 춤’과 양봉용 벌통에서 영감을 얻은 조각 ‘가마벌 신당’ ‘등대벌 이중 맨션’을 만들었다. 덴마크 작가 실라스 이노우에는 소우주처럼 만든 유리 상자 속 조형물에 곰팡이 포자를 심었다. 전시 기간이 지날수록 곰팡이가 자라 색채와 형태가 변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대지 미술’ 전시에는 1970, 80년대 생태와 환경을 주제로 한 작품을 볼 수 있다. 대지 미술 선구자로 꼽히는 로버트 스미스슨의 영상 ‘나선형 방파제’(1970년), 낸시 홀트의 ‘태양 터널’(1978년)이 소개된다. 또 한국의 자연 미술 작가인 임동식의 회화와 퍼포먼스 기록,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커뮤니티’에서는 아투이의 워크숍 영상 기록, 태국 어촌 공동체의 생태 문화를 탐구한 팡록 술랍의 판화 등이 전시된다. 아트선재센터 3층에서는 작가 그룹 이끼바위쿠르르(조지은, 고결, 김중원)의 개인전 ‘거꾸로 사는 돌’이 열린다. 한국의 곳곳에 방치된 미륵 석상을 탁본과 영상으로 기록해 작품으로 만들었다. 영상 작품 ‘거꾸로 사는 돌’은 망가진 축사나 폐교 옆에 덩그러니 미륵 조각상이 놓인 장면들을 풍경화처럼 재구성했다. 또 미륵을 숯으로 탁본한 종이 회화 ‘더듬기’는 벽면에 걸려 있다. 작가들은 미륵이 미래를 상징하는 부처로 한국의 곳곳에 자리 잡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잊힌 것에 주목했다. 여러 미륵 불상의 탁본을 뜰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버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방치된 불상들을 찾아가며 더듬어보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미륵이 말했던 미래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품으며 ‘거꾸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됐고, 그것이 작업의 토대가 됐다고 설명했다. 전시 기간인 7일에는 양혜규, 14일에는 이끼바위쿠르르의 아티스트 토크가 열린다. 두 전시는 모두 내년 1월 2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영국 팝스타 엘턴 존(77)이 자신이 작곡에 참여한 뮤지컬 공연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시력을 잃고 있다고 밝혔다. 1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존은 이날 런던에서 열린 뮤지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자선 공연에서 “시력을 잃어 (앞선 뮤지컬) 시사회에 갈 수 없었다”며 “보는 건 힘들지만 듣는 건 좋아서 오늘 밤 기분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9월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감염으로 오른쪽 눈이 시력이 좋지 않다고 처음 밝혔다. 지난달 미국 ABC방송 ‘굿모닝 아메리카’에 나와선 “7월 프랑스 남부에서 감염병에 걸려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지 4개월이 됐고 왼쪽 눈도 상태가 좋지 않다”고 고백했다. 영국 팝의 전설인 존은 2023년 고별 공연으로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다만 이번에 소설 원작이자 영화로도 인기를 얻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뮤지컬 공연의 작곡자로 참여했다. 해당 영화에 등장하는 잡지사 편집장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 보그 편집장 애나 윈투어도 이번 자선 공연에 참석했다. 윈투어는 공연을 보고 “재밌다”고 말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레바논 출신 예술가 타렉 아투이는 지난해 접경지대인 강원도 철원 지역 초∙중학생들과 함께 사탕, 탁구공 등 여러 가지 물체로 만든 악기로 소리를 내보는 워크숍을 열었다. 홍영인 작가는 겨울 철원으로 날아오는 두루미를 관찰하고, 양혜규는 서울대 기후연구실의 꿀벌 연구를 함께했다. 이처럼 국내외 현대미술가들이 지난해 철원의 여러 기관과 마을 공동체와 협업해 연구, 워크숍을 하며 시작된 전시 ‘언두 플래닛’이 3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개막했다. 전시는 철원에서 현장 연구를 한 작가 5팀을 비롯해 총 17팀의 작가가 기후 변화와 생태계를 고찰한 작품을 아트선재센터 1, 2층에서 선보인다. 크게 ‘비인간’, ‘대지 미술’, ‘커뮤니티’ 등 3개의 주제로 나뉜다. ‘비인간’ 전시장에서는 두루미를 관찰했던 홍영인 작가가 하얀 모래 위 두루미 발 모양의 신발을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신발을 신은 두루미를 관객에게 상상하게 함으로써, ‘새들’이 아니라 각자의 정체성을 가진 개별 존재로 바라보게 한다는 의도다. 양혜규는 꿀벌을 주인공으로 인간 세계를 돌아보는 영상 작업 ‘황색 춤’과 양봉용 벌통에서 영감을 얻은 조각 ‘가마벌 신당’과 ‘등대벌 이중 맨션’을 만들었다. 덴마크 작가 실라스 이노우에는 소우주처럼 만든 유리 상자 속 조형물에 곰팡이 포자를 심었다. 전시 기간이 지날수록 곰팡이가 자라 색채와 형태가 변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대지 미술’ 전시에는 1970~1980년대 생태와 환경을 주제로 한 작품을 볼 수 있다. 대지 미술 선구자로 꼽히는 로버트 스미스슨의 영상 ‘나선형 방파제’(1970), 낸시 홀트의 ‘태양 터널’(1978)이 소개된다. 또 한국의 자연 미술 작가인 임동식의 회화와 퍼포먼스 기록,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커뮤니티’에서는 아투이의 워크숍 영상 기록, 태국 어촌 공동체의 생태 문화를 탐구한 팡록 술랍의 판화 등이 전시된다. 아트선재센터 3층에서는 작가 그룹 이끼 바위 쿠르드(조지은, 고결, 김중원)의 개인전 ‘거꾸로 사는 돌’이 열린다. 한국의 곳곳에 방치된 미륵 석상을 탁본과 영상으로 기록해 작품으로 만들었다. 영상 작품 ‘거꾸로 사는 돌’은 망가진 축사나 폐교 옆에 덩그러니 미륵 조각상이 놓인 장면들을 풍경화처럼 재구성했다. 또 미륵을 숯으로 탁본한 종이 회화 ‘더듬기’는 벽면에 걸려 있다. 작가들은 미륵이 미래를 상징하는 부처로 한국의 곳곳에 자리 잡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잊힌 것에 주목했다. 여러 미륵 불상의 탁본을 뜰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버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방치된 불상들을 찾아가며 더듬어보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미륵이 말했던 미래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품으며 ‘거꾸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됐고, 그것이 작업의 토대가 됐다고 설명했다. 전시 기간 중인 7일에는 양혜규, 14일에는 이끼바위쿠르르의 아티스트 토크가 열린다. 두 전시는 모두 내년 1월 2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친 사람만 그릴 그림’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가 세기말의 불안을 담아 그린 걸작 ‘절규’(1893년)에는 이 문장이 적혀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크기여서 뒤늦게 발견된 데다 내용도 특이해 누가 왜 적었는지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비밀을 풀어낸 건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연구팀. 적외선 카메라 촬영과 뭉크의 일기, 관련 기록을 대조해 본 끝에 연구팀은 뭉크가 직접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그림을 공개한 뒤 ‘미치광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던 그가 연필로 조그맣게 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걸작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전 세계로 보도됐고, 연구 결과 발표 1년 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은 리모델링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뭉크의 절규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았던 미술관을 직접 찾았다.● 뭉크 품은 초대형 미술관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은 전시 공간만 1만3000㎡(약 4000평)로 구겐하임 빌바오, 네덜란드 레익스미술관보다 크고 북유럽 3국 중에선 최대 규모다. 뭉크의 작품은 미술관 2층 가장 중심부 전시관에서 볼 수 있었다. ‘절규’뿐 아니라 ‘마돈나’를 비롯한 뭉크의 대표작을 감상할 수 있어 가장 붐비는 전시장으로, ‘절규’ 바로 옆은 경비원이 항상 지키고 서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뭉크의 방’을 둘러싸고 좌우로 연결되는 전시장의 구조다. 뭉크를 중심으로 미술관 왼쪽 공간은 19세기 이전 미술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 요한 크리스티안 달의 작품부터 대표 컬렉터이자 기업인이었던 크리스티안 랑오르(1849∼1922)가 기증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이어 뭉크의 방을 지나면 20세기 이후 근현대 미술 컬렉션이 펼쳐진다. 이러한 구조는 유명 작가인 뭉크를 매개로 노르웨이 문화를 소개하는 데 효과적이다. 미술관이 대규모 리모델링을 마치고 개관하기 전 ‘절규’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해 관심을 모았듯, ‘절규’를 보러 온 사람들이 자연스레 노르웨이 미술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것이다. 잉리 뢰위네스달 국립미술관장은 “뭉크의 작품은 물론 노르웨이 여왕이 입었던 드레스, 노르웨이 디자인과 건축에 음악까지 함께 볼 수 있는 곳이 우리 미술관”이라고 설명했다.● 디자인, 건축, 공예도 한자리에 뢰위네스달 관장의 말처럼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의 공식 명칭은 노르웨이 국립 미술·건축·공예 박물관으로, 세 기관을 커다란 건물 하나에 합쳐 운영하는 ‘메가 뮤지엄’이다. 소장품은 40만 점에 달하고 이 중 약 6500점이 90개 전시장에 나뉘어 선보이고 있다. 2층이 뭉크를 비롯한 회화를 중심으로 전시가 이뤄진다면 1층은 건축부터 고미술, 공예, 산업 디자인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시품을 혼합하여 전시해 눈길을 끌었다. 일부 전시장은 가구와 옷을 함께 배치해 방처럼 꾸미고, 그 시대에 관련된 음악을 틀기도 했다. 이렇게 장르 구분을 없애는 과감한 결정에는 각 박물관의 소장품 규모가 작다는 이유도 있었다. 뢰위네스달 관장은 “노르웨이는 덴마크,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 1905년 독립해 역사가 짧다”며 “국립미술관이나 건축박물관이 나뉘어 있을 때 건축물은 아름다웠지만 해외에서 찾을 만큼 눈길을 끌 큰 규모는 아니었다”고 했다. 이에 각 분야를 담당하는 큐레이터들이 소통을 늘리고 창의적인 큐레이팅을 만들어 보자는 전략을 세웠다. 박물관과 미술관 역사가 짧고 특히 소장품 규모가 빈약한 한국도 참고할 만한 대목이었다. 뢰위네스달 관장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섞여 새로운 소통을 함으로써 기존에 보지 못했던 전시가 꾸준히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은 개관 1년 반 만에 230만 명이 방문했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가 600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숫자다.오슬로=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노르웨이 남부에 자리 잡은 도시 오슬로는 해상 교역이 이뤄졌던 경제 중심지이자 수도다. 특히 해안가를 둘러싼 항구 지역은 산업 단지가 들어서 있었는데, 2000년대부터 오슬로시가 추진해온 도시 재생사업 ‘피오르 시티 프로젝트’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다. 최근 수년간 이곳에는 문화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에드바르 뭉크 등 노르웨이의 대표적 문화자산을 내세운 실험적인 건축물과 문화 기관, 예술 작품이 설치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뭉크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뭉크 미술관도 그중 하나다. 뭉크 미술관에서 바닷가를 따라 중심부로 가면 지붕을 걸어 올라 피오르 해안을 조망할 수 있는 오페라 하우스, 쇼핑몰처럼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데이크만 도서관이 나온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은 오슬로 시청, 아케르스후스 요새와 함께 시 중심부에 자리 잡았다. 잉리 뢰위네스달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장은 “노르웨이는 인구는 적지만 땅이 길고 넓은 국가”라면서 “문화 기관을 어디에 두는 것이 적절한가를 놓고서 긴 고민 끝에 장소를 정하고 있다”고 말했다.오슬로=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친 사람만 그릴 그림’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가 세기말의 불안을 담아 그린 걸작 ‘절규’(1893)에는 이 문장이 적혀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크기여서 뒤늦게 발견된 데다 내용도 특이해 누가 왜 적었는지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비밀을 풀어낸 건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연구팀. 적외선 카메라 촬영과 뭉크의 일기, 관련 기록을 대조해 본 끝에 연구팀은 뭉크가 직접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그림을 공개한 뒤 ‘미치광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던 그가 연필로 조그맣게 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누구나 아는 걸작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전 세계로 보도됐고, 연구 결과 발표 1년 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은 리모델링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뭉크의 절규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았던 미술관을 직접 찾았다.● 뭉크 품은 초대형 미술관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은 전시 공간만 1만3000㎡(약 4000평)로 구겐하임 빌바오, 네덜란드 라익스미술관보다 크고 북유럽 3국 중에선 최대 규모다. 뭉크의 작품은 미술관 2층 가장 중심부 전시관에서 볼 수 있었다. ‘절규’뿐 아니라 ‘마돈나’를 비롯한 뭉크의 대표작을 감상할 수 있어 가장 붐비는 전시장으로, ‘절규’ 바로 옆은 경비원이 항상 지키고 서 있었다.흥미로운 것은 ‘뭉크의 방’을 둘러싸고 좌우로 연결되는 전시장의 구조다. 뭉크를 중심으로 미술관 왼쪽 공간은 19세기 이전 미술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 요한 크리스티안 달의 작품부터 대표 컬렉터이자 기업인이었던 크리스티안 랑가르드(1849~1922)가 기증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이어 뭉크의 방을 지나면 20세기 이후 근현대 미술 컬렉션이 펼쳐진다.이러한 구조는 유명작가인 뭉크를 매개로 노르웨이 문화를 소개하는 데 효과적이다. 미술관이 대규모 리모델링을 마치고 개관하기 전 ‘절규’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해 관심을 모았듯, ‘절규’를 보러 온 사람들이 자연스레 노르웨이 미술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것이다. 잉그리드 로이네스달 국립미술관장은 “뭉크의 작품은 물론 노르웨이 여왕이 입었던 드레스, 노르웨이 디자인과 건축에 음악까지 함께 볼 수 있는 곳이 우리 미술관”이라고 설명했다.● 디자인, 건축, 공예도 한자리에로이네스달 관장의 말처럼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의 공식 명칭은 노르웨이 국립 미술∙건축∙공예 박물관으로, 세 기관을 커다란 건물 하나에 합쳐 운영하는 ‘메가 뮤지엄’이다. 소장품은 40만 점에 달하고 이중 약 6500점이 90개 전시장에 나뉘어 선보이고 있다. 2층은 뭉크를 비롯한 회화를 중심으로 전시가 이뤄진다면 1층은 건축부터 고미술, 공예, 산업 디자인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시품을 혼합해 전시해 눈길을 끌었다. 일부 전시장은 가구와 옷을 함께 배치해 방처럼 꾸미고, 그 시대에 관련된 음악을 틀기도 했다.이렇게 장르 구분을 없애는 과감한 결정에는 각 박물관의 소장품 규모가 작다는 이유도 있었다. 로이네스달 관장은 “노르웨이는 덴마크, 스웨덴 지배를 받다 1905년 독립해 역사가 짧다”며 “국립미술관이나 건축박물관이 나뉘어져 있을 때 건축물은 아름다웠지만 해외에서 찾을 만큼 눈길을 끌 큰 규모는 아니었다”고 했다.이에 각 분야를 담당하는 큐레이터들이 소통을 늘리고 창의적인 큐레이팅을 만들어 보자는 전략을 세웠다. 박물관과 미술관 역사가 짧고 특히 소장품 규모가 빈약한 한국도 참고할 만한 대목이었다. 로이네스달 관장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섞여 새로운 소통을 함으로써 기존에 보지 못했던 전시가 꾸준히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은 개관 1년 반 만에 230만 명이 방문했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가 600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숫자다.오슬로=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첫눈이 내린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 문신미술관.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미술관에서 한 여인이 분주히 작품을 설명했다. ‘도슨트’ 일을 마치자 여인은 전시장 밖 테이블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올해로 7번째 공예 전시기획에 직접 나선 구혜원 푸른그룹 회장이다. 이날 개막한 ‘아라크네 아이’전은 그리스 신화에서 뛰어난 바느질 실력으로 신에게 도전하다 거미로 변해버린 여인 ‘아라크네’가 주제다. 목장갑이나 가느다란 말총으로 만든 브로치부터 재활용 포일로 만든 드레스, 거미 다리를 형상화한 목도리 등이 눈길을 끈다. 전시는 금기숙 김지민 오주연 백재원 윤순란 최성임 등 작가 25명의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 주제부터 참여 작가 선정까지 직접 한 구 회장은 “따스하게 알을 품다가도 치명적인 독을 뿜는 거미처럼 이중적 매력을 지닌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경영이 본업인 구 회장이 여는 공예 전시는 첫눈엔 ‘우아한 취미’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시장 면면을 보면 수십 년째 이면지를 잘라 메모장으로 쓰는 구 회장의 ‘짠순이’ 기질과 원칙주의가 배어났다. 작품을 놓는 좌대는 재활용하고, 큐레이터부터 도슨트 역할까지 구 회장이 직접 한다. 구 회장은 “비즈니스인에게 전시 기획은 수지가 안 맞는 일이지만 ‘찐사랑’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9년 아트 주얼리를 처음 접하고 대학 졸업전까지 찾아다니며 ‘덕후’가 됐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도 학부 전시에서 발굴한 20대 작가부터, 아트숍에 있던 작품을 우연히 보고 출산 후 경력 단절 상태에 있다 다시 작업실로 나오게 만든 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전시 준비를 위해 작가를 만나는 것 외엔 사적 교류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외부 영향 없이 실력 있는 작가가 기회를 얻는 장을 만들자는 생각이에요. 그 ‘순수한 즐거움’을 깨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직접 노력하는 이유가 ‘찐사랑’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물었다. 그의 답이다. “전시를 위해 작가와 대화하며 작품의 변화를 보고, 그 결과로 해외에 진출하는 경우까지 생기니 희열을 느낍니다. 자식 키우는 것 같은 기분도 들죠. 돈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엄청난 보람이 있어요.” 많은 것의 기준을 돈으로 생각하는 시대. 구 회장은 “비용을 써서 화려하게 연출한 전시를 보면 부러울 때도 있지만 결국 좋은 작품으로 승부하자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게 절제하며 만든 전시는 제한된 상황에서 창의성을 끌어모아 ‘나만의 것’을 만드는 힘이 느껴졌다. 전시장 속 작품들도 각자 지닌 개성의 힘을 믿고 서로 얽히고설켜 유연하지만 단단한 거미줄을 만들고 있다. 전시는 1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첫눈이 내린 지난 달 27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 문신미술관.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미술관에서 한 여인이 분주히 작품을 설명했다. ‘도슨트’를 마치자 여인은 전시장 밖 테이블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올해로 7번째 공예 전시기획에 직접 나선 구혜원 푸른그룹 회장이다. 이날 개막한 ‘아라크네 아이’ 전은 그리스 신화에서 뛰어난 바느질 실력으로 신에게 도전하다 거미로 변해버린 여인 ‘아라크네’가 주제다. 목장갑이나 가느다란 말총으로 만든 브로치부터 재활용 호일로 만든 드레스, 거미 다리를 형상화한 목도리 등이 눈길을 끈다. 전시는 금기숙 김지민 오주연 백재원 윤순란 최성임 등 작가 25명의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 주제부터 참여 작가 선정까지 직접 한 구 회장은 “따스하게 알을 품다가도 치명적인 독을 뿜는 거미처럼 이중적 매력을 지닌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경영이 본업인 구 회장이 여는 공예 전시는 첫눈엔 ‘우아한 취미’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시장 면면을 보면 수십 년째 이면지를 잘라 메모장으로 쓰는 구 회장의 ‘짠순이’ 기질과 원칙주의가 배어났다. 작품을 놓는 좌대는 재활용하고, 큐레이터부터 도슨트까지 구 회장이 직접 한다. 구 회장은 “비즈니스인에게 전시 기획은 수지가 안 맞는 일이지만 ‘찐 사랑’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9년 아트 주얼리를 처음 접하고 대학 졸업전까지 찾아다니며 ‘덕후’가 됐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도 학부 전시에서 발굴한 20대 작가부터, 아트숍에 있던 작품을 우연히 보고 출산 후 경력 단절 상태에 있다 다시 작업실로 나오게 만든 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전시 준비를 위해 작가를 만나는 것 외엔 사적 교류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외부 영향 없이 실력 있는 작가가 기회를 얻는 장을 만들자는 생각이에요. 그 ‘순수한 즐거움’을 깨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직접 노력하는 이유가 ‘찐 사랑’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물었다. 그의 답이다. “전시를 위해 작가와 대화하며 작품의 변화를 보고, 그 결과로 해외에 진출하는 경우까지 생기니 희열을 느낍니다. 자식 키우는 것 같은 기분도 들죠. 돈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엄청난 보람이 있어요.” 많은 것의 기준을 돈으로 생각하는 시대. 구 회장은 “비용을 써서 화려하게 연출한 전시를 보면 부러울 때도 있지만 결국 좋은 작품으로 승부하자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게 절제하며 만든 전시는 제한된 상황에서 창의성을 끌어모아 ‘나만의 것’을 만드는 힘이 느껴졌다. 전시장 속 작품들도 각자 지닌 개성의 힘을 믿고 서로 얽히고설켜 유연하지만 단단한 거미줄을 만들고 있다. 전시는 1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606년 어느 날 밤 이탈리아 로마. 테니스 코트에서 남자들이 싸움을 시작합니다.누군가가 칼을 꺼내고, 도망치던 남자는 허벅지를 맞아 쓰러집니다. 피가 흐르자 지켜보던 사람들도 가담해 4명 대 4명이 맞붙는 패싸움으로 번지는데….이날 1명은 목숨을 잃고, 칼을 꺼냈던 남자는 죽을 때까지 도망자로 살게 됩니다. 도망자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란 이름으로 유명세를 떨친 화가였습니다.이탈리아 법정 기록과 기사로 남겨진 이 사건으로 카라바조에겐 수백 년간 ‘광기의 화가’, ‘악마의 재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어떤 역사가는 그를 ‘그림 실력은 있었지만 높은 지성은 없었다’고 평가했죠. 카라바조는 정말 미친 재능을 감당하지 못한, 광기의 화가였을까요?야만의 시대, 17세기카라바조가 살인에 이르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 반격했다는 기록, 상대방도 칼을 꺼내 친구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기록 등이 엇갈립니다.이외에 길거리나 식당에서 시비가 붙거나 경찰과 말다툼하다 체포된 기록도 남아 있죠. 카라바조가 다혈질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보는 범죄와 17세기 현실은 달랐습니다.카라바조 전기를 쓴 미술사가 앤드루 그레이엄 딕슨은 “카라바조는 폭력적이었지만, 17세기 유럽도 폭력적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이때 유럽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모욕하거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하면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 흔했습니다. 여기서 결투란 상대가 죽거나 치명상을 입을 때까지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게다가 카라바조에 관해 남은 기록이 많지 않고, 그나마 있는 것이 법정 기록이라는 점은 그가 ‘문제적 화가’라는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일조했습니다.죽은 화가는 말이 없고 그림은 입이 없으니, 그가 남긴 예술적 자산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묻혔다 20세기가 되어서야 제대로 연구됩니다.글 대신 그림으로 제시한 화두카라바조는 글 대신 그림으로 17세기 종교 미술이 마주한 질문을 제기합니다.당시 유럽은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종교 개혁이 일어났으며, 이에 반대해 권위를 지키려는 반 종교개혁의 움직임으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니 평화롭고 조화로운 르네상스 예술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죠.이런 가운데 카라바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밀라노의 대주교는 성직자들을 매주 집합시켜 고해성사 방식을 감시하거나, 교구 내 모든 교회의 그림들을 검사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이에 어떤 화가들은 ‘검열’을 벗어나지 않는 그림을 그리려 애를 썼죠.이렇게 억압적인 분위기에도 로마에서는 성매매 여성이 너무 많아 교황이 칙령을 내려 이들을 몰아내는가 하면, 흑사병으로 충격을 받은 신자들이 스스로를 괴롭게 하며 믿음을 다지는 ‘고행 신앙’이 유행합니다.폭력과 고통, 성이 뒤섞인 극단의 시대. 카라바조는 사람들이 처한 절박한 현실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것을 연극 무대 위에 올리듯 극적인 조명을 비추어 드러냅니다.순례자를 거리 위의 부랑자처럼 표현한 ‘로레토의 성모’, 세상을 떠난 예수의 육중한 몸을 버거워하며 땅에 묻는 ‘그리스도의 매장’, 부활한 예수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찔러보는 ‘토마스의 의심’ 등이 그러합니다.르네상스보다 강력했던 ‘바이럴’이렇게 현실을 적나라하게, 장엄하게 드러낸 그림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들은 카라바조의 ‘결점’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러나 눈 밝은 교회와 귀족의 컬렉터들은 앞다투어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감각 있는 예술가들은 재빠르게 그의 스타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했습니다. 루벤스, 렘브란트 같은 거장들이 그들입니다.피렌체 유력 가문의 후원이 있었던 르네상스 미술이나 아카데미라는 권위 있는 기관의 인정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몇몇 미술 사조에 비하면 카라바조의 바로크는 오로지 실력으로 ‘입소문’을 탄 것으로, 요즘 시각에서 본다면 마케팅 없이 감각만으로 ‘바이럴’하게 전 유럽에 퍼진 예술입니다.그 배경에는 북구 플랑드르 예술의 사실적 묘사부터 미켈란젤로 등 고전 화가에 대한 경험, 어린 시절 받은 교육의 영향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미술사가 딕슨은 “카라바조는 (성경과 같은) 텍스트를 깊이 읽고 해석해 혁신적인 결과물을 내놓은 화가”라고 했죠.이렇게 보면 카라바조 예술이 20세기 이후에 재조명받은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이성과 논리만이 아니라 감각, 감정과 결합한 ‘감성’의 가치를 과거에는 눈 밝은 사람들만 알아봤다면, 이제는 그것이 진지하게 연구되고 경제적 가치로도 평가받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죠.그러니 예술가가 새로움을 창조하는 과정을 더 이상 ‘광기’나 ‘순간의 영감’으로 치부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그 고뇌의 과정이 지금은 모두가 알고 싶은 생존 전략이니까요. 카라바조, 빈센트 반 고흐, 미켈란젤로….. 수많은 ‘판타지’에 가려졌던 예술가들의 끈질긴 창조의 과정은 ‘입이 없는’ 예술 작품 속에 들어 있습니다.그러한 예술 작품들이 말없이 건네는 이야기를 먼저 마음으로 느껴 보는 건 어떨까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606년 어느 날 밤 이탈리아 로마. 테니스 코트에서 남자들이 싸움을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칼을 꺼내고, 도망치던 남자는 허벅지를 맞아 쓰러집니다. 피가 흐르자 지켜보던 사람들도 가담해 4명 대 4명이 맞붙는 패싸움으로 번지는데…. 이날 1명은 목숨을 잃고, 칼을 꺼냈던 남자는 죽을 때까지 도망자로 살게 됩니다. 도망자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란 이름으로 유명화 화가였습니다. 이탈리아 법정 기록과 기사로 남겨진 이 사건으로 카라바조에겐 수백 년간 ‘광기의 화가’, ‘악마의 재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그를 ‘그림 실력은 있었지만 높은 지성은 없었다’고 평가했죠. 카라바조는 정말 미친 재능을 감당하지 못한, 광기의 화가였을까요?야만의 시대, 17세기 카라바조가 살인에 이르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 반격했다는 기록, 상대방도 칼을 꺼내 친구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기록 등이 엇갈립니다. 이 외에 길거리나 식당에서 시비가 붙거나 경찰과 말다툼하다 체포된 기록도 남아 있죠. 카라바조가 다혈질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보는 범죄와 17세기 현실은 달랐습니다. 카라바조 전기를 쓴 미술사가 앤드루 그레이엄 딕슨은 “카라바조는 폭력적이었지만, 17세기 유럽도 폭력적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이때 유럽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모욕하거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하면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 흔했습니다. 여기서 결투란 상대가 죽거나 치명상을 입을 때까지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카라바조에 관해 남은 기록이 많지 않고, 그나마 있는 것이 법정 기록이라는 점은 그가 ‘문제적 화가’라는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죽은 화가는 말이 없고 그림은 입이 없으니, 그가 남긴 예술적 자산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묻혔다 20세기가 되어서야 제대로 연구됩니다.글 대신 그림으로 제시한 화두 카라바조는 글 대신 그림으로 17세기 종교 미술이 마주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당시 유럽은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종교 개혁이 일어났으며, 이에 반대해 권위를 지키려는 반종교개혁의 움직임으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니 평화롭고 조화로운 르네상스 예술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죠. 이런 가운데 카라바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밀라노의 대주교는 성직자들을 매주 집합시켜 고해성사 방식을 감시하거나, 교구 내 모든 교회의 그림들을 검사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이에 어떤 화가들은 ‘검열’을 벗어나지 않는 그림을 그리려 애를 썼죠. 이렇게 억압적인 분위기에도 로마에서는 성매매 여성이 너무 많아 교황이 칙령을 내려 이들을 몰아내는가 하면, 흑사병으로 충격을 받은 신자들이 스스로를 괴롭게 하며 믿음을 다지는 ‘고행 신앙’이 유행합니다. 폭력과 고통, 성이 뒤섞인 극단의 시대. 카라바조는 사람들이 처한 절박한 현실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것을 연극 무대 위에 올리듯 극적인 조명을 비추어 드러냅니다. 순례자를 거리 위의 부랑자처럼 표현한 ‘로레토의 성모’, 세상을 떠난 예수의 육중한 몸을 버거워하며 땅에 묻는 ‘그리스도의 매장’, 부활한 예수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찔러보는 ‘토마스의 의심’ 등이 그러합니다. 이렇게 현실을 적나라하게, 장엄하게 드러낸 그림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들은 카라바조의 ‘결점’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눈 밝은 교회와 귀족의 컬렉터들은 앞다투어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감각 있는 예술가들은 재빠르게 그의 스타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했습니다. 루벤스, 렘브란트 같은 거장들이 그들입니다. 피렌체 유력 가문의 후원이 있었던 르네상스 미술이나 아카데미라는 권위 있는 기관의 인정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몇몇 미술 사조에 비하면 카라바조의 바로크는 오로지 실력으로 ‘입소문’을 탄 것으로, 요즘 시각에서 본다면 마케팅 없이 감각만으로 ‘바이럴’하게 전 유럽에 퍼진 예술입니다. 그 배경에는 북구 플랑드르 예술의 사실적 묘사부터 미켈란젤로 등 고전 화가에 대한 경험, 어린 시절 받은 교육의 영향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미술사가 딕슨은 “카라바조는 (성경과 같은) 텍스트를 깊이 읽고 해석해 혁신적인 결과물을 내놓은 화가”라고 했죠. 이렇게 보면 카라바조 예술이 20세기 이후에 재조명받은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이성과 논리만이 아니라 감각, 감정과 결합한 ‘감성’의 가치를 과거에는 눈 밝은 사람들만 알아봤다면, 이제는 그것이 진지하게 연구되고 경제적 가치로도 평가받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죠.르네상스보다 강력했던 ‘바이럴’ 그러니 예술가가 새로움을 창조하는 과정을 더 이상 ‘광기’나 ‘순간의 영감’으로 치부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고뇌의 과정이 지금은 모두가 알고 싶은 생존 전략이니까요. 카라바조, 빈센트 반 고흐, 미켈란젤로…. 수많은 ‘판타지’에 가려졌던 예술가들의 끈질긴 창조의 과정은 ‘입이 없는’ 예술 작품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한 예술 작품들이 말없이 건네는 이야기를 먼저 마음으로 느껴 보는 건 어떨까요?※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한국 미술에서 유화 물감으로 그린 회화의 역사는 100년이 조금 넘었을 정도로 짧다. 이런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한 화가들은 일본 유학파였고, 그중 한 명이 오지호(1905∼1982)다. 오지호는 1938년 한국 최초의 원색 화집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을 펴냈고 ‘순수회화론’, ‘구상회화선언’, ‘현대회화의 근본 문제’ 등을 통해 진지하게 그림을 탐구했다. 그런 그의 작품과 기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15일 전남도립미술관에서 개막했다. ‘오지호와 인상주의: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는 2025년 오지호 탄생 120주년을 맞아 전남도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기획했다. 오지호가 일본 동경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의 졸업 작품으로 그린 ‘자화상’(1931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만든 데스마스크와 유품까지 생애를 아우르는 회화 100여 점과 기록 100여 점이 전시된다. 오지호의 작품은 19세기 프랑스에서 시작해 유럽은 물론 일본까지 전파된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회화론을 통해 “회화는 빛의 예술이며, 태양에서 태어났다”고 밝힌 그는 한국의 초가집, 자연과 남도 바다의 풍경을 인상주의적 기법으로 담았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남향집’은 이런 한국 20세기 미술의 단면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밖에 1938년 화집에 수록된 ‘임금원’, ‘처의 상’ 등을 볼 수 있다. 전시는 시기별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인상주의를 탐색하다’는 1920년대 동경미술학교 유학 시절부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초기 작품들을, 2부 ‘남도 서양 화단을 이끌다’는 광복 이후 산 풍경, 항구와 배를 그린 바다 풍경, 꽃과 식물 등 남도 서양 화단을 주도한 시기의 작품을 선보인다. 3부 ‘한국 인상주의를 구현하다’에서는 1970년대 이후 작품으로 유럽 여행에서 본 풍경, 유작인 미완성 작품 ‘쎄네갈 소년’(1982년)을 볼 수 있다. 오지호는 1930년대에는 개성 송도고보에서 미술 교사를, 광복 이후에는 조선대 미술과 교수를 지낸 교육자이기도 하다. 전시장 속 기록을 통해 그가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세우고 국한문혼용운동을 펼치거나, 우리문화재보존운동에 나선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또 1950년대 광주 무등산 원효사가 불에 탔을 때 재건하는 과정에서 그린 ‘아미타후불탱화’도 전시된다. 일본과 프랑스 인상주의에 관한 작품이나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일본 도쿄예술대 교수였던 오카다 사부로스케, 후지시마 다케지의 작품을 볼 수 있으며,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을 오르세미술관이 개발한 가상현실(VR)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VR기기로 감상할 수 있다. 28일에는 김이순 한국미술사연구회 회장, 구마자와 히로시 도쿄예술대 교수, 박미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관리과장,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김허경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가 참여하는 국제 학술 세미나 ‘프랑스, 일본, 한국의 인상주의 미술’이 열린다. 전시는 내년 3월 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한국 미술에서 유화 물감으로 그린 회화의 역사는 100년이 조금 넘었을 정도로 짧다. 이런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한 화가들은 일본 유학파들이었고, 그중 한 명이 오지호(1905~1982)다. 오지호는 1938년 한국 최초의 원색 화집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을 펴냈고 ‘순수회화론’, ‘구상회화선언’, ‘현대회화의 근본 문제’ 등을 통해 진지하게 그림을 탐구했다. 그런 그의 작품과 기록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15일 전남도립미술관에서 개막했다. ‘오지호와 인상주의: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는 2025년 오지호 탄생 120주년을 맞아 전남도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기획했다. 오지호가 일본 동경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의 졸업 작품으로 그린 ‘자화상’(1931)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만든 데스마스크와 유품까지, 생애를 아우르는 회화 100여 점과 기록 100여 점이 전시된다. 오지호의 작품은 19세기 프랑스에서 시작해 유럽은 물론 일본까지 전파된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회화론을 통해 “회화는 빛의 예술이며, 태양에서 태어났다”고 밝힌 그는 한국의 초가집, 자연과 남도 바다의 풍경을 인상주의적 기법으로 담았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남향집’은 이런 한국 20세기 미술의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밖에 1938년 화집에 수록된 ‘임금원’, ‘처의 상’ 등을 볼 수 있다. 전시는 시기별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인상주의를 탐색하다’는 1920년대 동경예술대학 유학 시절부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초기 작품들을, 2부 ‘남도 서양 화단을 이끌다’는 해방 이후 산 풍경, 항구와 배를 그린 바다 풍경, 꽃과 식물 등 남도 서양 화단을 주도한 시기의 작품을 선보인다. 3부 ‘한국 인상주의를 구현하다’는 1970년대 이후 작품으로 유럽 여행에서 본 풍경, 유작인 미완성 작품 ‘쎄네갈 소년’(1982)을 볼 수 있다. 오지호는 1930년대에는 개성 송도고보에서 미술 교사를, 해방 이후에는 조선대 미술과 교수를 지낸 교육자이기도 하다. 전시장 속 기록을 통해 그가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세우고 국한문혼용운동을 펼치거나, 우리문화재보존운동에 나선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또 1950년대 광주 무등산 원효사가 불에 탔을 때 재건하는 과정에서 그린 ‘아미타후불탱화’도 전시된다. 일본과 프랑스 인상주의에 관한 작품이나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일본 도쿄예술대 교수였던 오카다 사브로스케, 후지시마 다케지의 작품을 볼 수 있으며,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을 오르세미술관이 개발한 가상현실(VR)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VR기기로 감상할 수 있다. 28일에는 김이순 한국미술사연구회 회장, 히로시 쿠마자와 도쿄예술대 교수, 박미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관리과장,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김허경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가 참여하는 국제 학술 세미나 ‘프랑스, 일본, 한국의 인상주의 미술’이 열린다. 전시는 내년 3월 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중국 전설에는 술을 처음 만들었을 때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대 하나라의 군왕인 두강(杜康)의 꿈에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 나타나 “맑은 샘물을 줄 테니 서로 다른 세 방울의 피를 구해 샘물에 부으면 천하에서 제일 맛있는 음료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두강은 문인, 무사, 멍청이에게 피를 얻어 샘물에 부었고, 샘물은 끓어올라 향기가 진동했다. 마시면 정신이 아찔하고 황홀해지는 이것이 바로 술이었다. 무사의 피가 호탕하게 술을 들이켜게 하고, 멍청이의 피가 술이 사람을 마시는 지경에 이르게 하지만, 문인의 피가 시를 짓게 만든다는 술. 술과 얽힌 한시에 관한 이야기를 두 여성 중문학자가 함께 썼다. 두 저자는 중국 허난성 낙양의 강가를 산책하던 어느 날, 점심에 마신 백주에 취해 이백과 두보의 시를 술잔처럼 주고받는다. 이때 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시인들의 작품을 우리의 시각으로 다시 써보자는 생각에 이르러 책이 탄생했다. 책은 도연명, 이백, 두보, 소식, 왕유, 백거이 등이 지은 술에 관한 시 100여 수를 통해 술과 인간의 관계를 짚어본다. “술 없으면 시 짓는 일 멈춰야 하고, 시 없으면 술 마시는 일 그만두어야 하리”(이규보), “저 강물 변해서 모두 술이 된다면 좋겠다”(이백), “신선이 될 때까지 (술을) 끊어 보리라”(도연명), “(친구와 작별하며) 술 한 잔 더 권하며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왕유)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여기에 이색, 이인로, 이숭인, 노수신, 박은 등 우리나라 문인들의 시는 물론 중국의 마원, 고굉중, 석도, 양해, 문징명과 조선 화가 김홍도, 윤두서의 그림 35점도 함께 수록됐다. 어린 시절 막걸리 심부름을 하다 호기심에 주전자 뚜껑에 몰래 조금 따라 마시며 술을 독학(?)했다거나, 중국 고전 시를 해석하려면 술을 마셔야 한다는 말에 음주에 열성을 보였다가 뒤늦게 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발현하는 사람의 감성이 중요함을 깨달았다는 이야기 등 저자들의 솔직한 일화도 만날 수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화려한 무늬가 그려졌지만 갈색 톤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옷을 입은 여인. 벽돌로 된 바닥 위 의자에 앉아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습니다.아래로 떨군 얼굴 위로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 옆으로는 조금 전 벗어 던진 듯한 장신구들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그녀는 아주 작은 나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남겨진 건 옷과 장신구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죠.이 여인은 누구이고 그림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맨바닥,나무 의자 위참회하는 성인티치아노의 막달라 마리아가 신의 음성을 듣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드라마틱한 포즈를 짓고 있다면 카라바조의 막달라 마리아는 일상에서 좌절하는 누구나 그렇듯 고개를 숙이고 홀로 괴로움을 삼키고 있습니다.이 그림은 초상화도, 정물화도 아닌 성경의 내용을 그린 종교화입니다. 그것도 카라바조가 처음으로 교황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종교화,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그림 속 주인공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예술에서는 전통적으로 ‘죄 많은 여인’이나 ‘참회’의 상징으로 표현되곤 했습니다.그런 점에 비춰보면 지금의 관점에서는 어색할 것이 없는 그림입니다. 가만히 앉아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인의 모습이니까요.그런데 16세기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고, 어떤 이는 이 작품을 비난도 했습니다. 무엇이 신선했던 걸까? 카라바조보다 약 30년 먼저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그린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겠습니다. 이 그림이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성인’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는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옷이 아니라 종교화에서 신성한 사람들이 주로 입는 가운을 걸치고 있습니다.또 그녀의 뒤로는 나무와 저 먼 들판, 그리고 하늘이 있는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또 펼쳐진 책 아래에는 해골이 놓여 메멘토 모리라는 상징까지 부여했습니다.이렇게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으로 구성된 그림은 그녀가 일반인과는 다른 ‘성인’임을 다양한 장치를 통해 주장하고 있습니다.카라바조의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티치아노의 막달라 마리아가 신의 음성을 듣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드라마틱한 포즈를 짓고 있다면 카라바조의 막달라 마리아는 일상에서 좌절하는 누구나 그렇듯 고개를 숙이고 홀로 괴로움을 삼키고 있습니다.또 약간 화려하지만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옷을 입고 있으며. 그림 실력을 뽐내기 위해 곁들여졌지만,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걸림돌이었던 자연 풍경은 과감하게 삭제되었습니다.여자의 옷에 칠해진 갈색 톤과 비슷한 벽과 바닥이 배경의 전부이고, 맨바닥에는 장신구와 막달라 마리아의 상징인 향유가 마치 소지품처럼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던 당대 누군가는 이런 기록을 남길 정도였죠.“(그림 속 여자가 성인이 아니라) 밤에 귀가해 혼자 방에서 머리를 말리는 옆집 여자아이 같다”이렇게 누군가의 눈에는 ‘성인답지 않았’던 카라바조의 그림은 외면받았을까요? 글과 현실은 달랐습니다. 카라바조가 그림으로 보여준 신선함은 귀족과 교회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는 현실주의를 더욱 과감하게 밀고 나가 새로운 예술, ‘바로크’의 문을 열었습니다.뻣뻣한 다리를 드러낸마리아의 죽음마리아의 머리에는 성인임을 상징하는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지만, 그 외 그림 속 광경은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동그라미만 지우면 평범한 누군가의 죽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이죠.이 그림을 거절한 로마 산타 마리아 델레 교회의 입장은 ‘성인은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신성하게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카라바조의 ‘마리아의 죽음’은 거절당한 뒤 버림을 받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막달라 마리아를 그리고 약 10년 뒤 카라바조가 교회에 걸기 위해 의뢰를 받고 그린 ‘성모 마리아의 죽음’입니다. 역시 지금 우리의 눈에는 성스러운 종교화이자 아주 잘 그린 그림으로 보입니다.가로로 눕혀져 있는 마리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리며 그 죽음을 슬퍼하는 성인들. 그리고 마리아의 붉은 옷과 호응을 이루며 장엄하게 천정에 드리워진 붉은 천과 빛과 그림자의 대조가 두드러지는 조명까지. 바로크 걸작의 전형입니다.그런데 역시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호불호’가 갈리는 그림이었습니다. ‘호’를 느낀 사람은 이 그림에서 어떤 것이 새로운 도전이었는지를 알아보았을 것이고, ‘불호’를 느낀 사람은 그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겠죠.불호를 느낀 사람들의 감정은 역시 글로 남겨져 있습니다.어떤 사람은 ‘마리아의 모델을 창녀로 했기 때문에 잘못됐다’고 비판했고, 또 다른 사람은 ‘마리아의 발이 드러나 있어 옳지 못한 그림’이라고 했습니다.이 그림이 정말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분명한 건 마리아에 걸맞은 성스러운 표현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불호자’들이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이지요.이 그림을 전달받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는 그림을 거절했고, 대신 이런 모양의 작품을 걸었습니다.마리아는 죽었지만, 사람처럼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머리에 천사가 화관을 씌워 주고 있으며, 성인들은 당황한 듯 웅성이긴 하지만 절망에 잠기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이 그림을 보고 카라바조의 마리아를 다시 볼까요. 마리아의 머리에는 성인임을 상징하는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지만, 그 외 그림 속 광경은 너무나 현실적입니다.동그라미만 지우면 평범한 누군가의 죽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이죠. 이 그림을 거절한 로마 산타 마리아 델레 교회의 입장은 ‘성인은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신성하게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그렇다면 카라바조의 ‘마리아의 죽음’은 거절당한 뒤 버림을 받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눈 밝은 루벤스,“카라바조의 최상급 작품” 조언에만투아 공작 소장품으로…이 그림의 가치를 알아본 눈 밝은 사람은 바로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활약했던 화가 루벤스였습니다.루벤스는 카라바조의 ‘마리아의 죽음’이 거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투아의 공작 빈센초 곤차가에게 “카라바조의 최고 작품 중 하나”라고 귀띔을 해주고, 곤차가는 이 작품을 매입합니다.1607년 4월 1일부터 7일까지 곤차가는 이 작품을 전시하는데, 보고 따라 그리는 것을 철저히 금지 시켰다고 합니다. (카라바조의 작품은 당시 인기가 너무 좋아 어떤 작품들은 주문이 밀려 같은 그림을 수십 점씩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카피를 금지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작품도 베끼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죠.)그리고 20년 뒤 곤차가의 컬렉션을 영국 찰스 1세 왕이 사들였고, 찰스 1세가 처형된 다음엔 프랑스의 컬렉터가 이 그림을 매입해 루이 14세에게 되팔았습니다. 그 후 줄곧 프랑스 왕실 컬렉션에 소장되었다가,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는, 불멸의 걸작이 되었죠.카라바조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를 그린 그림과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두고 벌어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스러움이란 무엇인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카라바조의 종교화는 날개도 후광도 없이. 일상 속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에 극적인 조명을 비추거나, 누구나 느끼는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내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그 ‘흔들림’의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누군가는 그 가치를 알아봤다면, 그것을 불안과 공포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지요.뒷골목의 싸움, 부랑자, 살인자이자 현상수배범으로 빛과 그림자를 오갔던 카라바조의 삶. 그런 삶 속에 있었기에 어쩌면 그가 사람들이 거부하거나 외면하는 것에서 신성함을 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그리고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예술가들이 그에게 많은 영감을 얻어 수많은 예술 작품으로 재생산하며 ‘바로크’라는 움직임을 만들었던 것이죠.카라바조의 굴곡진 삶 때문에 비록 글로는 그의 예술이 기록되지 못했지만, 20세기에 와서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이런 글이 포착하지 못해도 끝내 꺾지는 못했던 ‘마음의 역사’ 때문일 것입니다.성스러움은 어디에 있을까?우리가 보지 못하는 신성한 어딘가에?아니면 규칙으로 만든 울타리 속 어딘가에?어쩌면 우리의 바로 옆에 늘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수백 년 전 카라바조가 예술로 던진, 끝내 꺼지지 않고 다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이 질문.맨바닥 나무 의자 위 막달라 마리아를 보며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