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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54)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우리 사회 전반에 파장을 몰고 왔다. ‘종이책의 종말’이 임박한 듯했던 서점가에는 다시 손님이 장사진을 이뤘고 인쇄소는 밀려드는 주문량에 24시간 인쇄기를 풀가동했다. 해외에서도 한강의 번역본뿐 아니라 한글판 원서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인쇄소는 ‘풀가동’, 중고책도 ‘웃돈’ 10일 노벨 문학상 발표 이후 닷새가 지난 15일까지 국내에서 판매된 한강의 책들은 전자책을 포함해 총 100만 부를 돌파했다. 15일 오후 4시 기준으로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에서 판매된 한강의 종이책은 총 97만2000권이다. 전자책을 포함하면 총 105만 부를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뿐만 아니라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희랍어 시간’ 등 다소 생소했던 한강의 작품들도 함께 조명을 받고 불티나게 팔렸다. 총 200만 부를 넘어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간 책 판매량을 공개하는 데 인색했던 서점가는 이례적으로 날짜별, 시간별 판매량을 생중계하듯 공개했다. 출판계에서는 노벨 문학상 발표 이후 5일간 한강이 벌어들인 인세만 15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보통 저자는 책 판매액의 10%가량을 인세로 받는다. 출판사와 인쇄소도 바빠졌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13일 오후 찾아간 경기 파주시 천광인쇄사는 말 그대로 ‘비상 상황’이었다. 주말도 반납하고 출근한 직원 20여 명이 쉴 새 없이 ‘작별하지 않는다’를 찍어내고 있었다. 인쇄사 관계자는 “인쇄기 두 대가 24시간 풀가동 중이다. 1분도 쉴 수가 없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흰’을 낸 문학동네 역시 증쇄를 결정했고 문학과지성사는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 6종을 수상 소식이 발표된 이후 주말 내내 인쇄했다. 새 책을 구하기 어렵다 보니 중고책에도 ‘웃돈’이 붙어 팔려나갔다. 당근마켓이나 중고나라 등 주요 중고 거래 플랫폼에는 한강 저서의 초판본, 1쇄, 작가 사인 한정판 등이 20만∼50만 원대 가격에 거래됐다.● 한강 모교, 고향 등에서는 잔치 한강의 고향과 모교 등은 세계적인 문인을 배출했다는 소식에 흥겨워했다. 한강은 초등학교 1∼3학년을 광주 북구 중흥동 효동초에서 다녔는데 이달 16일 이 학교에서는 ‘한강이 궁금해’란 주제로 야외 수업이 열렸다. 이 학교 6학년 학생들은 ‘소년이 온다’에 담긴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야기 등을 들었고 한강에게 보내는 ‘희망편지’를 썼다. 한강의 부친 한승원 작가(86)가 사는 전남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에서는 13일 주민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마을 잔치가 열렸다. 한승원 작가 역시 주민들의 초대를 받았지만 딸의 뜻을 존중해 감사 인사만 전하고 잔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한강의 모교 연세대는 시인 윤동주에 이어 노벨 문학상 작가 한강을 배출했다는 소식에 뿌듯해했다. 연세대는 “윤동주 이래 지금까지 이어진 연세 문학의 감수성인 동시에 140년 가까이 이어온 연세 교육의 지표”라고 축하했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신촌캠퍼스에서 만난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은 “한강 작가의 후배로서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 “국문과라는 진로에 확신이 서는 계기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 프랑스, 중국 등에서도 뜨거운 반응 해외서도 한강의 수상 소식은 뜨거운 반응을 몰고 왔다. 일본 도쿄에 있는 기노쿠니야 서점 신주쿠 본점에는 ‘축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이라는 홍보 문구가 적힌 서가에 한강의 책에 내걸렸다. 일본어로 번역된 책들은 들여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갔고 영문판과 한글판 등만 조금 남아 있었다. 서점 관계자는 “한국 문학은 원래도 일본에서 인기가 높다. 다른 노벨 문학상 발표와 비교했을 때 반응이 뜨겁다”고 전했다. 프랑스 파리에서도 한강의 책이 빠르게 팔려나간 덕분에 현지 출판사도 ‘작별하지 않는다’ 긴급 추가 인쇄에 들어갔다. 중국 최대 온라인 서점인 당당왕에서도 인기 검색에서 ‘한강’ ‘채식주의자’가 각각 1, 2위에 올랐다. 이 서점은 한강 작품의 재고가 없는 탓에 일단 예약 판매로 주문을 받았다. 영국 런던에서도 한강의 책은 실시간으로 팔려나갔다. 한 대형 서점 관계자는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강의 책을 사 갔다”고 전했다. 일부 고객은 비록 한국어를 모르지만 한국어판이라도 구하려고 수소문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어떻게 내가 어떻게 너를/이후에 우리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별일 텐데.’ 이 노래를 발표한 2019년 당시 남매 그룹 악동뮤지션(악뮤)의 오빠 이찬혁은 23세, 동생 이수현은 20세였다. 사랑, 이별, 죽음을 몇 바퀴는 경험했을 중장년도 아닌, 갓 20대 문턱에 선 남매의 손끝에서 나온 문장이라는 사실이 서늘했다. 이 노래로 노벨 문학상 작가 한강을 울린 악뮤는 학교를 다닌 기간이 짧았다. 남매는 초등학생 때 선교사 부모님을 따라 몽골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정규 학교를 안 다니고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가장 큰 이유는 “밥에 간장을 비벼 먹고 스키니진 한 벌 맘대로 사기 어려운” 가계 상황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환경 덕분에 악뮤의 천재성은 만개했다. 악보도 쓸 줄 몰랐지만 오빠가 콧노래를 부르면 동생은 멜로디로 만들었고, 밥공기 위에서 줄줄 흐르는 계란프라이를 노래로 만들었다(‘후라이의 꿈’). 0교시부터 보충수업까지 이어지는 수업 시간표 대신에 자율이 주어졌고, 학교가 정한 교과서 대신에 원하는 소설책을 잡을 수 있었다. 남매의 부모는 홈스쿨링 초반에 학교처럼 수업 시간표를 만들어 놓고 집에서 몇 번 해봤다가 나중에 찢어버렸다고 한다. 대신 아이들이 고드름을 보면서 글을 쓰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면 일부러 “정말 잘한다”고 과장하듯 칭찬했고 그게 신이 나서 더 하더라고 회상했다. 한강 역시 부친 한승원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어렸을 때 혼자 방에 누워 공상과 몽상을 즐겼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고 어디 갔는지 찾아보면 혼자 자기 방에 누워 ‘멍 때리고’ 있는 때가 많았다. 뭐 하냐 물으면 “공상을 해요”라고 했단다. 조급한 요즘 부모들 같았으면 아이가 사교성이 부족하다며 놀이학원이나 태권도장이라도 끌고 갔을 법한데, 부친은 “일어나 공부해라”, “나가서 좀 놀아라” 채근한 적이 없었다. 대신 자기의 본업인 글쓰기를 했고 딸은 이를 지켜보며 자랐다. 한강과 악뮤. 이 둘을 ‘천재’ 따위 수식어로 묶는 건 좀 얄팍하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환경과 마음껏 고민하고 공상하고 도전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이 만든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는 환호를 보내는 동시에 초조한 모습이다. 벌써 제2의 한강을 배출해야 한다, 제2의 악뮤로 만들어야 한다며 분주하다. 학원가에는 ‘한강처럼 글쓰기’, ‘한강 독서 스터디’ 광고가 내걸렸고, 학부모들은 글쓰기 교실을 수소문 중이다. 서점 매대에는 ‘한강처럼 아이 키우기’ 등 책이 조만간 깔릴지 모른다. 모든 위대한 사람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공부법과 교육법으로 치환하고, 결국엔 사교육으로 환원시키는 이 나라의 고질병이 또 도질 모양새다. 노벨상은 세계 1등에게 주는 상이 아니다. 굳이 따지면 누구보다 많이 고민하고, 공감하고, 실패하면서도 다시 시도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제2의 한강, 제2의 악뮤는 나올 필요 없고 나올 수도 없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데 굳이 ‘제2의 누구’를 배출해야 할까. 아이에게 주어진 기질을 믿고 키워 주다 보면 언젠간 그들 인생에 꽃을 피울 때가 오지 않을까. 굳이 그게 노벨상이 아니더라도.이은택 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영화 ‘은교’에서 박해일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요즘 벌어지는 현실은 노인들에게 가혹하다. 특히 60대 이상은 ‘고령층’이란 카테고리로 한데 묶이는데 이들이 사건 사고에서 언급될 때마다 비난 댓글이 넘친다. 7월 벌어진 서울 시청역 역주행 참사의 가해 운전자 차모 씨가 1956년생, 신문 나이로 68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먹먹했다. 기자의 아버지와 동갑이었다. 차 씨는 자신이 가속 페달이 아닌 감속 페달을 밟았다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그의 신발 자국은 가속 페달에 남아 있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조사 결과 ‘여러 번’ 밟은 것으로 확인됐다. 평생 운전을 업으로 해왔고 ‘운전 베테랑’이라고 불렸던 차 씨는 황혼의 나이에 운전 미숙으로 9명을 숨지게 한 가해자가 됐다. 그가 왜 가속 페달을 밟았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지만, 이미 여론은 그의 ‘고령’을 원인으로 결론지었다. 이후 ‘고령’은 핫한 키워드가 됐다. 8월에는 60대 여성이 테슬라 전기차를 몰다 페달 조작 실수로 카페를 들이받았다. 이달 13일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70대 운전자가 돌진 사고를 냈고, 부산에선 행인 1명이 숨졌다. 이달 20일에도 서울 강북구 미아동, 경기 고양시, 경기 용인시에서 70대 운전자들이 몰던 차량이 돌진해 사상자가 나왔다. 사망자 2명을 포함해 사상자 8명이 나왔다. 그때마다 ‘나이’를 지목하며 ‘역시나’ 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다시 68세 시청역 차 씨, 그는 고령일까. 솔직히 어렵다. 동갑내기 인사들을 찾아봤다. 미국 배우 톰 행크스와 멜 깁슨, 탤런트 유동근, 임태희 경기도교육감, 현역 정치인 최춘식 김성기, 조배숙 국민의힘 의원. 모두 1956년생이다. 차 씨 사건 이후 65세 이상은 면허를 제한해야 한다, 회수해야 한다 등 의견도 있었는데 위 동갑내기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행크스는 요즘 신생 업체가 생산한 박스형 소형 전기차를 몬다고 한다. ‘고령’은 다른 한편에선 피해자의 이름이다. 앞에 언급한 고양시 사고의 사망자는 차로에서 폐지 손수레를 끌던 60대 노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폐지 손수레를 끄는 노인은 1만4800명이 넘는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손수레 노인과 동행했을 때 여러 번 눈앞에서 위험을 목격했다. 운전이 미숙한 고령의 가해자가 생계를 위해 수레를 끌던 고령의 피해자를 치어 숨지게 하는 기막힌 상황의 밑바닥에는 고령화사회의 그림자가 짙다. 이 같은 사건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가 낸 교통사고는 총 3만9641건으로 2005년 이후 가장 많았다. 고령 운전자가 낸 사고는 치사율(2.1%)도 전체 교통사고 평균(1.4%)보다 높다. 공유 자전거, 공유 킥보드, 차량공유 서비스에 익숙해진 젊은 층은 점점 운전면허와 ‘내 차’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사이 고령 인구는 꾸준히 늘 테고 노인이 서로 피해자와 가해자로 직면하는 사건 사고도 늘어날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노인 교통사고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 부착을 의무화할 예정이다. 우리도 늦기 전에 정부와 국회의 대책 논의가 필요하다.이은택 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시민단체 선플재단을 이끄는 민병철 이사장(중앙대 석좌교수)이 필리핀 하원 내 비례정당 ‘필리핀 해외노동자’(OFW) 정당이 수여하는 ‘글로벌 화합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마리사 막시노 하원의원이 대표로 있는 OFW 정당과 부하이 OFW 재단은 5일(현지 시간)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메리어트 호텔에서 제3회 임팩트 어워즈를 열었다.OFW 정당은 올해 한-필리핀 수교 75주년을 맞아 선플운동과 외국인 존중(K리스펙트) 캠페인 등을 꾸준히 진행해온 민 이사장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인정해 수상자로 선정했다.민 이사장은 2007년 대학생들과 함께 한국 최초로 시작한 선플 운동을 시작했다. 현재 7000여 학교 및 단체와 84만 명 이상의 누리꾼, 여야 국회의원들이 참여 중이다.OFW 정당은 특히 선플재단이 지난해 12월 필리핀에서 필리핀상공회의소(PCCI) 산하 한-필리핀 경제협의회(필코렉·PHILKOREC)와 공동으로 선플비즈니스클럽을 발족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민 이사장은 수상 소감에서 “모든 인간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며 “증오가 만연한 세상에서 긍정적인 언어의 힘을 활용해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할 것”이라고 말했다.이어 “한국에서 외국인에게 존중을 표시한다면 해외 여행을 하거나 타국에서 사는 한국인들도 그 나라에서 존중받을 거라고 믿는다”고 덧붙였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그의 아내는 늘 잠이 모자라서 꾸벅거리던 남편의 고달픔과 그리고 현장 2층의 암흑 속에서 숨이 끊어지기까지 남편이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뜨거움을 되뇌면서 쓰러져 울었다.’ ―김훈 ‘소방관의 죽음’ 중(라면을 끓이며·2015년) 6년 전 소설가 김훈의 이 문장으로 짧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1995년 5월 24일 전남 여수 교동 중앙시장에서 16명을 구한 뒤 화마(火魔)에 숨진 여수소방서 소속 고 서형진(당시 29세) 소방사의 사연이다. 장래 희망에 늘 ‘소방수’라고 적었다는 김훈의 소설에는 그래서인지 소방관이 자주 등장한다. 질주하는 소방차와 불길 속으로 달려가는 소방관들의 모습에서 김훈은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15년여 전 초년병 기자 시절 소방관을 만날 기회들이 있었다. 한 소방관은 산불을 진압하다 그을린 나뭇가지가 뒷목에 떨어져 화상을 입었다. 그는 공상 처리를 받지 못해 자비를 털어 병원에 다녔다. 다른 소방관은 밀린 수당을 달라는 소송에 동참했다가 구급대로 좌천됐다. 오십을 앞둔 소방관은 스물다섯 기자 앞에서 서럽게 울었다. 22일 부천 호텔 화재 현장에서의 소방 대응을 둘러싸고 질타가 이어지고 있다. 낡고 뒤집힌 에어매트, 119 신고 접수 과정에서의 대응 지체, ‘에어매트를 거꾸로 깔았다’는 거짓 소문까지. 에어매트는 공기 주입 호스가 아래쪽에 있어 거꾸로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잘못 찍힌 사진 한 장으로 소방관들이 조롱을 받았다. 부천 현장 소방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도착 당시 이미 호텔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검은 연기로 꽉 차 있었다. 골목은 폭이 좁고 주차된 차들 탓에 굴절사다리차를 고정할 공간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에어매트를 폈다. 사용 연한이 11년 지났지만 혹시 모를 추락자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나을 걸로 판단했을 것이다. 소방관이 수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뛰어내리고 매트가 뒤집히고 또 뛰어내리는 상황은 예측 불가능했다. 수사가 시작됐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가려질 것이다. 소방의 대응이 도마에 오를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 논쟁의 결과가 신상필벌과 망신 주기는 아니길 바란다. 다음 재난 현장에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여전히 소방관은 열악한 지경에서 근무한다. 초과근무 수당을 받으려면 15년 전처럼 지자체와 싸워야 한다. 소방관 치료비, 간병비는 2009년에 정해진 금액 그대로다. 국립경찰병원은 1949년(1991년 서울 송파로 이전), 국군수도병원은 1951년(1999년 경기 분당으로 이전)에 생겼는데 국립소방병원은 아직 없다. 역대 정부에서 번번이 무산됐다가 2017년 문재인 정부 때 건립이 확정돼 현재 공정 약 30%다. 인력 부족도 여전하다. 2022년 말 기준으로 현장 소방 인력 부족률은 전국 평균 10%, 전남 울산 등은 20%를 넘는다. 부천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소방의 열악한 현실이 개선되길 바란다. 소방관이 낡은 에어매트를 새것으로 교체할 순 없다. 소방관이 스스로 인력을 충원할 순 없다. 이는 소방의 능력과 권한 밖이다. 예산을 배정하고 통과시키는 정부와 국회의 책임이다. 소방관들에게 너무 많은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지 않길 바란다. 이은택 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지난주 강원 고성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멸치만큼 작은 물고기들을 제법 잡았다. “알록달록 노랗네. 라면에 넣어 끓여줄까?” 두 딸은 환호했다. 생긴 게 예뻐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검색했더니 복어 새끼였다. 요단강 건널 뻔했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중에 찾아보니 새끼 복어는 독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복어가 원래 동해에서 잡혔나. 찾아보니 본디 따뜻한 물을 좋아해 제주 근해에서 잡혔는데 언제부턴가 동해에서도 잡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난류가 북상하며 복어가 올라왔고, 그 자리에 있던 오징어는 밀려났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5, 6마리에 1만 원가량 하던 오징어회는 이제 몇 마리 얹어 한 판 정도 먹으려면 “지역 군수, 의원은 돼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홍어는 난류에 쫓겨 북상했다. 찬물을 좋아하는 홍어는 원래 흑산도에서 많이 잡혔으나 지금은 약 140km 북쪽인 군산 앞바다에서 가장 많이 잡힌다. 군산 홍어가 전국 홍어 판매량의 절반을 차지한다. 어디서든 많이 잡히기만 하면 소비자는 딱히 불만이 없다. 기자는 극도로 지친 날이면 밤늦게 귀가해 냉장고에 보관해 놓은 삭힌 홍어 몇 점을 접시에 던다. 불 꺼진 주방에서 숨죽여 막걸리랑 먹으면 다시 출근 의지가 생긴다. 군산산(産)이든 흑산도산이든 칠레산이든 상관 없다. 그런데 지역 어민은 생계가 달린 문제다. 어획량을 둘러싼 다툼이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온난화가 인간 사이 다툼으로 옮겨붙은 사례다. 어릴 때 물리게 먹었던 명태의 경우 이제 국산은 자취를 감췄다. 생물로 끓여 먹고 얼려 먹고 튀겨 먹고 말려 먹고 말린 뒤 때리고 찢어 먹던 국민 생선은 요즘 어딜 가나 ‘러시아산’이다. 1980년대만 해도 매년 20만∼30만 t이 잡혔고 고성 등 항구마다 명태잡이 배가 가득했지만 지금은 수온 변화를 견디다 못해 북상했다. 40여 년 사이 동해 주요 어종이 명태와 도루묵에서 오징어와 청어로, 다시 복어와 방어로 바뀌고 있다. 우리 바다와 식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 지구적 현상의 축소판이다. 2018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 논문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인 1880년대와 비교했을 때 지구 평균 온도가 2도 오르면 온난기(Warm Period)에 진입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 140여 년간의 온도 상승 폭이 약 1도였으니, 이제 앞으로 1도 남았다. 에어컨 리모컨으로 1, 2도쯤은 왔다 갔다 하니 별 감이 안 오겠지만 지구 기온이 평균 2도 이상 오르면 모든 생물 종(種)의 절반가량은 멸종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인간이 먹는 것들의 생존 문제이자 인간의 생존 문제다. 여전히 우리 정부도, 국민도 기후변화와 온난화 문제는 절실하지 않은 분위기다. 북극에서 빙하가 녹고 아프리카에서 강이 마르는 먼 문제로 여긴다. 어린이집이 무더기로 문 닫고 서울 초등학교가 폐교되는 걸 본 뒤에야 “출산율 저하가 문제”라고 호들갑 떠는 것처럼 온난화와 기후변화 역시 임박해서야 그럴 듯하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시점이지 않을까. 지금 무슨 대책을 내놔도 사람들이 애를 안 낳는 것처럼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서울은 최근 118년 중 가장 긴 열대야를 기록했다. 에어컨 없이는 밤에 아이들을 재울 수 없는 날이 길어지고 있다. 이은택 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1일 서울 중구 시청역 뒤편 사거리에서 9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총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역주행 참사 현장에는 본보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이 있었다. 당일 오후 9시 37분에 본보 사건팀 카카오톡 단체톡방에는 사건팀장의 톡이 올라왔다. ‘시청역 교차로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한 것 같다. 쓰러진 사람이 대략 10명 정도. 심폐소생 중이나 일어나는 사람이 없다.’ 사건팀 기자가 찍어 올린 사진 여러 장에는 핏자국, 부서진 가드레일, 생사를 짐작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참사가 일어나기 불과 몇 분 전 공교롭게도 본보 사건팀 기자들은 그 현장에 있었다. 일을 마치고 간단한 술자리를 위해 시청역 뒤편 한 식당에 모이기로 했었다. 서로 휴대전화를 들고 “지금 어디야?” 물으며 신호를 기다리던 순간 눈앞에서 ‘그 일’이 벌어졌다. 저녁 모임 장소는 갑자기 참사 현장으로 변했다. 기자들은 곧바로 취재해 보고를 올렸다. 몇몇은 현장에 남았고 몇몇은 회사로 복귀했다. 시신을 목격하고 온 한 젊은 기자는 “괜찮냐?”는 물음에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얼굴이 창백했다. 대형 참사 현장을 겪은 기자들은 종종 정신적 충격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곤 한다. 10년 전인 2014년 4월 16일 나는 세월호 침몰 취재를 위해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 내려가 두 달을 보냈다. 당시 시신이 너무 많아 팽목항 구석 자갈밭에 임시 시신안치소가 세워졌다. 바다에서 올라온 시신을 구조대원들이 시신 가방에 넣어 들고 올 때면 저벅저벅 소리가 자갈밭에 울렸고, 그 소리는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같이 취재했던 동기들은 한동안 참사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이 죽고 다치는 사건사고를 취재하는 것이 직업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겪는 고통과 여파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현장 기자들이 그렇게 일하고 있다. 2022년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여성기자협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설문 참여 기자 544명 중 428명(78.7%)이 ‘기자로 근무하는 동안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은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 그중에는 트라우마가 한 달 이상 갔다는 비율이 43.9%였다. 보통 트라우마가 한 달을 넘어가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분류된다. 역주행 참사가 발생한 날에도 사고를 낸 운전자의 나이가 70대냐, 60대냐, 1956년생 68세냐를 놓고 편집국에선 정보가 엇갈렸다. 기자들이 경찰에 거듭 확인한 뒤에야 ‘68세 남성’이라고 쓸 수 있었다. 현장에서 갓 돌아온 기자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참상의 여파가 아직 진행 중인 상황에서도 거듭 취재해 사실을 확인하고 기사를 수정, 또 수정하는 일을 계속 했다. 기사 송고, 강판 등 모든 작업을 마치고 밤 12시가 넘어서야 광화문역에서 막차를 타고 귀가할 수 있었다. 젊은 기자들은 시신이 옮겨진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이날 누군가는 돌연 생을 마감했고, 누군가는 노트북과 카메라를 들고 뛰었다. 누군가는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는 참혹한 광경에 잠들지 못했으며, 그 기억과 여파는 생각보다 오래갈 것이다. 이은택 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1일 늦은 오후 서울 시청역 인근 사거리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현장에서 검거된 70대 남성 운전자는 급발진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서울지방경찰청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9시 40분경 지하철 2호선 시청역 12번 출구 인근 교차로에서 제네시스 차량이 다수의 보행자를 치어 숨지게 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가해 차량을 운전한 70대 남성의 신병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해당 운전자는 급발진이 원인이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남성은 경기 안산의 한 여객운송업체 소속 운전사로 알려졌다. 사고 뒤 이 남성은 갈비뼈에 통증을 호소해서 병원으로 이송됐다.현장 목격자에 따르면 오후 9시 50분경 시청역 7번 출구 앞에서 119 구급대가 들것에 사상자들을 실어 이송했다. 경찰 등에 따르면 심정지 상태인 9명을 포함해 최소 14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사고 시간은 피크 퇴근 시간대에서 약 2, 3시간 정도 지난 무렵이었다. 이 시간대에는 야근을 마치고 늦은 저녁 약속을 위해 시청역 인근 번화가로 이동하거나, 지하철을 타러 시청역으로 걸어오는 보행자들이 많았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위스콘신 동문 재단(WFAA)은 미국 위스콘신대 매디슨캠퍼스 175주년을 기념해 20일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호텔에서 최초 한국인 학생 입학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제니퍼 L. 누킨 위스콘신대 매디슨캠퍼스 총장은 “글로벌 선진 경제대국이자 아시아의 핵심 국가로 자리매김한 대한민국의 리더 동문들과의 미래 파트너십과 협력을 더욱 확대 강화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 세계 졸업생, 교수진, 교육 기관 및 예비 학생들과의 지속적인 협력은 위스콘신대를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 기관으로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이날 행사에는 산업은행 회장이자 위스콘신 한국 동문회 회장인 강석훈, 허동수 GS칼텍스 명예회장, 권희백 한화자산운용 대표이사, 이현철 전 금융위원회 상임위원, 김예지 국민의힘 국회의원,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육동한 춘천시장, 김동원 고려대 총장, 장윤금 숙명여대 총장 등이 참석했다.WFAA는 “5000명 이상의 동문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비즈니스, 학계, 정부 및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지위스콘신대는 미국 위스콘신주에 있는 명문 주립대다. 2개의 연구대학, 11개의 종합대학, 13개의 2년제 대학 등이 모여 위스콘신대를 이루고 있다. 위스콘신대 매디슨캠퍼스는 그 중 핵심 본교 역할을 하고 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가끔 금요일에 쉴 때면 어린이집이 끝나는 오후 4시에 두 딸을 데리러 간다. 그때마다 아이들의 다음 목적지는 놀이터다. 40년 넘은 우리 아파트의 낡은 놀이터가 아니라 길 건너 신축 아파트의 새 놀이터다. 우레탄이 깔려 있고 큰 미끄럼틀이 있고 연못에 우렁이도 산다. 그 아파트는 단지 안팎으로 곳곳에 철제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밖에선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고 안에선 버튼만 누르면 나올 수 있다. 일부 출입구는 반대다. 울타리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아파트를 세우는 데 들었을 막대한 비용과 높은 분양가, 치안과 사생활 우려, 한 울타리 안에 산다는 동질감과 그 밖에 대한 이질감. 최근 서울의 한 아파트는 입주민끼리 사돈을 맺자며 혼사까지 주선하고 나섰다.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건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비슷하다는 것, 그래서 따져볼 것이 줄어든다는 계산일 것이다. 저출산 비혼 시대에 이런 시도라도 어디냐고 할 수 있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대단지 아파트 안에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물론이고 학교도 있다. 그래서 친구들 대부분이 같은 아파트에 산다. 평생의 반려자까지 아파트에서 찾는 세상이라면 나중에는 그 이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단지 인근 같은 병원에서 태어나 같은 초중고교를 다니고 잠시 나가 대학을 마치면 아파트로 돌아와 가정을 꾸리고 늙어 생을 마감하는 것 말이다. 입주민 전용 화장장, 봉안당까지 들어설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집 이상이다. 서울시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아파트에 사는 기혼 여성은 단독주택이나 연립, 다세대 주택에 살 때보다 아이를 낳겠다는 의사가 더 높았다. 통계청 3월 발표에 따르면 가계 평균 자산 중 78.6%는 부동산이다. 아파트는 출산 인프라이자 전 재산이고 자신의 위치와 공동체를 규정하는 존재다. 그 안에 삶의 반경이 묶인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 국민 중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51.9%로 절반뿐이다. 또 다른 절반은 단독주택, 빌라 등에 산다. 다양한 주거의 형태와 인간관계가 존재한다. 아파트에 대한 집착을 보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심각해지는 양극화, 삶을 위협하는 불확실성에 스스로를 좁은 단지 안에 가둔 건 아닐까 궁금해진다. 그러다 보니 밖은 낭떠러지라도 되는 것처럼 “그 친구는 어디에 산다니?” 걱정 가득하게 묻는 것이다. 어른들이 아파트 울타리를 세우고 이쪽저쪽 갈라도 아이들은 섞여 놀았다. 다른 아파트에 사는 아이, 빌라에 사는 아이, 옆 동네 아이도 약속한 듯 오후 4시 같은 놀이터에 모여들었다. 같이 뛰고 킥보드를 밀었다. 물끄러미 지켜보는 사이 어둑어둑 해가 졌다. 슬슬 집에 가야 하는데, 울타리에 갇힌 필자는 철문 비밀번호를 몰라 누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려야 했다. 그때 일곱 살 딸과 친구들이 우르르 철문 옆 덤불 뒤편으로 뛰어갔다. “얘들아 어디 가?” “아빠 일로 와!” 아이들을 따라갔더니 작은 개구멍이 있었다. 아이들은 잽싸게 그 틈으로 빠져나가 의기양양하게 철문을 열고 씨익 웃었다. 어른들의 울타리는 아이들에겐 무용지물이었다. 모여 놀던 아이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미국 의학 드라마 ‘하우스(House M.D.)’에서 괴팍한 그레고리 하우스 박사와 그의 진단의학팀은 별의별 희귀질환 환자들을 마주한다. 이들은 질환, 체질, 사연을 일부러 숨기는데 하우스팀은 자택 수색까지 하며 단서를 찾는다. 그렇게 진단을 내려도 처음에는 빗나간다. 다시 토론, 검사를 반복해 병명을 찾아낸다. 그래도 가끔은 환자가 사망한다. ‘사람 하나 살리기 이리 어렵구나’ 혀를 내두르게 된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3월 “행위별 수가제를 유지하면 의료비 지출을 감당하기 어렵다. 국민 건강 회복이라는 의료서비스 목적에 중점을 둔 가치기반 지불제로 혁신해 건강보험의 지속 가능성을 제고하겠다”고 했다. 가치기반 지불제도의 골자는 환자의 회복 정도, 생존 여부 등에 따라 의료비를 지급하는 것이다. 진료 등 ‘행위’가 아니라 ‘결과’에 따라 인센티브나 페널티를 주는 것. 박리다매식 진료와 낮은 급여 수가 탓에 필수의료가 붕괴에 이르자 대안을 내놓은 것이다. 미국 영국 등 의료비 지출은 큰데 의료 수준은 열악한 국가들이 주로 도입했다. 최우선 목적은 효율성 확보, 의료비 지출 감축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우려가 나온다. 한 필수의료과 전공의는 “이는 자칫하면 죽을 것 같은 환자는 치료하지 말라, 이국종 같은 의사들에게는 돈을 안 쓰겠다는 말이 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가치기반의 시점에서 이들은 의료비 낭비이기 때문이다. 전면적인 가치기반 지불제하에서는 매우 비효율적인 하우스 박사팀이 진료비를 받지 못해 해체될지 모른다. 미국에서는 일부 우려가 현실화했다. 폐렴 등 급성 질환은 사회경제적, 기존 건강 요인 때문에 같은 시술, 치료를 받더라도 흑인이 백인보다 예후가 더 안 좋은 경우가 많다. 때문에 흑인 환자 비율이 높은 공공병원이 백인 환자 비율이 높은 병원보다 적은 의료비를 지급받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불제도가 인종 간 의료 격차를 악화시키고 있다. 의료에서는 1+1이 2가 아닐 수 있다. 최선의 약과 수술이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개인의 특성과 변수들, 의료 지식의 한계 탓에 최선의 치료에도 환자가 사망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의료진이 기울인 노력에 ‘0원’ 가격표를 매겨야 할까. 치료 결과가 좋으면 진료비를 많이 주고 그렇지 않을 땐 페널티를 준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병원이 환자를 살리기 위해 더 노력할까. 현실은 다를 가능성이 크다. 병원은 애초 회복 가능성이 큰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를 분류하고 되도록 전자에게만 의료 자원을 투입할 것이다. 그래야 안정적인 수익이 난다. 이윤 추구가 본질인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이다. 다행히 지금의 병원에서는 가망 없는 환자여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의사들이 달려온다. 약물을 투여하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래도 숨을 거두면 사망 선고를 내린다. 이 모든 행위의 결과는 죽음, 0원이다. 하지만 인간과 의사만이 이런 비효율과 비생산에 기꺼이 비용과 노력을 지불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러지 않으면 노인, 빈곤층, 희귀질환자 등 의료 소외 계층은 앞으로 병원 입구를 넘지 못할 수 있다. 숨이 붙어 있어도 가망이 없다면 서둘러 영안실로 보내버리는 ‘효율적인 미래’가 올지 모른다. 정부의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2월 20일 본격화된 전공의 병원 이탈이 세 달째인데 정부 발표에 따르면 병원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입원 환자는 평시와 유사한 수준”(3월 20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며 “의료 현장에 혼란은 없었다”(4월 26일 전병왕 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는 것이다. “진료 중단 등은 없을 것”(5월 3일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이라고도 했다. 얼마 전 저녁 자리에서 만난 복지부 고위 관계자도 웃으며 “이 정도는 다 저희도 예상했다”고 말했다. 역시 정부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런데 환자들에게 물어보면 상황이 좀 다른 것 같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3월 초 뇌하수체 종양 수술을 받을 예정이었던 환자는 수술이 무기한 연기됐다. 울산대병원에서 4월 17일 신장암 수술을 받을 예정이었던 환자는 전날 입원을 준비하던 중 수술 취소 통보를 받았다. 4월 29일 서울대병원에서 비뇨기암 수술이 예정됐던 환자도 수술 사흘 전 취소를 통보받았다. “언제 수술받을 수 있냐”는 물음에 병원은 불확실하다고 답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자궁근종 수술을 3월 말에 받기로 했던 환자의 수술은 5월 초, 5월 말로 두 차례 연기됐다. 한림대병원에서 신장이식 수술 전 검사까지 마친 환자는 돌연 수술이 미뤄졌고 투석을 받으며 기약 없이 버티고 있다. 정부는 병원이 잘 돌아간다고 했는데 현장에선 수술이 미뤄지고 취소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 사례들은 의료 현장에서 벌어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사이 누군가 숨졌다. 3월 30일 충북 보은군에선 도랑에 빠진 33개월 여아가 병원 10곳에서 수용을 거부당하고 사망했다. 다음 날 경남 김해시에선 60대 대동맥박리 환자가 수술 병원을 못 찾아 숨졌다. 4월 10일 부산에선 14세, 10세 두 딸을 둔 엄마가 간 부전과 신장 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남편은 온라인에 “의료 파업으로 아내를 잃었다”는 글을 올렸다. 둘째 딸 생일날이었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전공의 파업과 관계가 없다”, “애초에 살릴 수 없는 환자였다”고 했다. 의사가 없고 병상이 없어 환자가 죽지만 절대 의료 공백 탓은 아니란 것이다. 정부가 만든 의사 집단행동 피해 신고 지원센터에 2400건 넘는 신고가 접수됐는데 의료 공백 연관성이 인정된 사건은 하나도 없다는 걸 보면 그 말이 맞는가 싶기도 하다. 의대 증원을 놓고 험악하게 충돌하는 정부와 의사들이 이 지점에선 묘하게 하는 말이 같다. ‘의료대란은 없다’, ‘의료대란으로 죽은 사람도 없다’. 그런데 아무 문제 없다는데 왜 자꾸 사람이 죽고 수술은 취소되나. 병원을 나간 전공의 1만3000명이 대부분 안 돌아왔는데 의료 체계는 잘 돌아가고 죽는 환자도 없다니 정말 의사가 부족하긴 한 건가. 그렇다면 1만3000명은 지금까지 유휴 인력이었단 뜻인가. 언제일지 모를 수술 날짜를 기다리는 보호자들, 병상을 찾아 헤매는 환자들은 오늘도 서로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쪽도 취소됐나요.” “병상이 있는 곳 아시나요.” “언제쯤 수술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어쨌든 대한민국 의료는 여전히 문제없다. 정부에 따르면 말이다. 전공의 이탈 탓에 숨진 환자도 없다. 의사들에 따르면 말이다. 내일도 모레도 그럴 것이다. 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우리나라 25∼39세 맞벌이 부부 10쌍 중 4쌍은 자녀가 없는 ‘딩크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서울에서 무자녀 부부 비중이 높았는데 연구기관은 높은 집값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12일 한국노동연구원이 낸 ‘지난 10년간 무자녀 부부의 특성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으로 가구주(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이)가 25∼39세인 젊은층 기혼 가구 중 27.1%는 자녀가 없었다. 2013년(22.2%)과 비교하면 무자녀 비중은 9년 사이에 4.9%포인트 늘었다. 부부가 맞벌이인 경우에는 무자녀 비율이 더 높았다. 젊은 맞벌이 부부 중 무자녀 비중은 2013년 21.0%에서 2022년 36.3%로 15.3%포인트 증가했다. 반면 외벌이의 경우 무자녀 비중이 같은 기간 12.3%에서 13.5%로 소폭 올랐을 뿐 큰 변화는 없었다. 자녀를 낳지 않는 맞벌이 부부가 크게 늘어난 것인데 연구원은 “직장 업무와 출산 및 양육을 병행하기 어려워 경제 활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연구원은 집값이 출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내놨다. ‘내 집’을 보유한 비율은 유자녀 부부의 경우 52%로 과반이었지만 무자녀 부부는 34.6%에 불과해 17.4%포인트 차이가 났다. 연구원은 “주거 불안정성이 무자녀 부부의 출산을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특히 전국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서울은 전체 부부 중 무자녀 부부 비중이 45.2%로 강원(21.5%), 경기(20.5%)의 2배 이상이었다. 연구원은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무자녀 부부 비중은 모두 20%대”라며 “무자녀 부부 비중이 서울의 높은 주택 가격 등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또 무자녀 부부의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주거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자녀 부부 중 아이를 한 명만 낳는 경우도 늘고 있다. 유자녀 부부 중 부부와 자녀 한 명으로 이뤄진 3인 가구 비중은 2013년 42.4%에서 2022년 56.3%로 늘었다. 반면 자녀 둘 이상으로 이뤄진 4인 이상 가구 비중은 같은 기간 57.6%에서 43.7%로 줄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우리나라 25~39세 맞벌이 부부 10쌍 중 4쌍은 자녀가 없는 ‘딩크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서울에서 무자녀 부부 비중이 높았는데 연구기관은 높은 집값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12일 한국노동연구원이 낸 ‘지난 10년간 무자녀 부부의 특성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으로 가구주(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이)가 25~39세인 젊은층 기혼 가구 중 27.1%는 자녀가 없었다. 2013년(22.2%)과 비교하면 무자녀 비중은 9년사이에 4.9%포인트 늘었다. 부부가 맞벌이인 경우에는 무자녀 비율이 더 높았다. 젊은 맞벌이 부부 중 무자녀 비중은 2013년 21.0%에서 2022년 36.3%로 15.3% 증가했다. 반면 외벌이의 경우 무자녀 비중이 같은 기간 12.3%에서 13.5%로 소폭 올랐을 뿐 큰 변화는 없었다. 자녀를 낳지 않는 맞벌이 부부가 크게 늘어난 것인데 연구원은 “직장 업무와 출산 및 양육을 병행하기 어려워 경제 활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연구원은 집값이 출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내놨다. ‘내 집’을 보유한 비율은 유자녀 부부의 경우 52%로 과반이었지만 무자녀 부부는 34.6%에 불과해 17.4%포인트 차이가 났다. 연구원은 “주거 불안정성이 무자녀 부부의 출산을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로 보인다”고 설명했다.특히 전국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서울은 전체 부부 중 무자녀 부부 비중이 45.2%로 강원(21.5%), 경기(20.5%)의 2배 이상이었다. 연구원은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무자녀 부부 비중은 모두 20%대”라며 “무자녀 부부 비중이 서울의 높은 주택가격 등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또 무자녀 부부의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주거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유자녀 부부 중 아이를 한 명만 낳는 경우도 늘고 있다. 유자녀 부부 중 부부와 자녀 한 명으로 이뤄진 3인 가구 비중은 2013년 42.4%에서 2022년 56.3%로 늘었다. 반면 자녀 둘 이상으로 이뤄진 4인 이상 가구 비중은 같은 기간 57.6%에서 43.7%로 줄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살던 동네를 떠나 이사 온 지 한 달이 더 지났는데 일곱 살 큰딸은 이전 동네에 살던 친구가 준 구멍 난 청바지와 분홍 니트만 찾는다. 옷장에 널린 옷을 마다하고 굳이 그걸 입겠다고 떼 쓴다. 그러곤 놀다가 아무렇지 않은듯 묻는다. “유주는 잘 지낼까?” 일곱 살이 헤어진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사 전 살던 동네는 집 뒤에 산이, 앞에는 작은 천이 흘렀다. 봄이면 천을 따라 벚꽃이 피었고, 산책 나온 어르신들은 어린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빙그레 웃으며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두 딸이 다니는 집 앞 어린이집에 원생이 계속 줄었다. 친구가 떠나며 돌렸다는 양말, 학용품 같은 작별 선물을 들고 오는 날이 늘었다. 그러다 두 반이 하나로 합쳐졌다. 아이가 줄어든 여파로 해고된 교사는 계약직 신분으로 바뀌어 계속 아이들을 돌봤다. 놀이터에서 매일 보던 친구들이 줄었다. 떠나는 아이들 대부분 초등학교 입학을 1, 2년 앞둔 연령대였다. 굳이 사정을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부모들은 비슷한 고민 끝에 비슷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이를 키우기 더 좋은 동네로 가야 한다. 저출산과 학령인구 감소는 국가적 문제지만 지역마다 사정은 다르다. 본보는 지난해 10년 치 서울 및 경기 지역 학생 인구 이동을 분석했다. 2013∼2017년과 2018∼2022년을 비교했을 때 초등생 순유입이 가장 많은 지역은 서울 강남구, 경기 김포시, 서울 양천구, 경기 화성시, 서울 서초구에서 화성, 강남, 김포, 경기 시흥시와 하남시 순으로 바뀌었다. 서울에서도 2013∼2022년 사이 강북, 관악, 광진, 노원, 도봉 등 13개 구는 새로 문 연 초중고교가 없었다. 반면 강동구는 초교 5곳과 중학교 2곳, 송파구는 초교 4곳과 중학교 3곳이 생겼다. 주로 아파트 새 단지나 기업이 들어선 곳과 교육 여건이 좋은 곳에 아이들이 쏠렸다. 그렇지 않은 곳에선 학교가 문을 닫았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바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니다. 교통사고 걱정 없이 안전하게 걸어다닐 통학로, 원하면 보낼 수 있는 동네 학원 한두 개, 휴일에 갈 동네 도서관과 공원, 퇴근 뒤 아이에게 돌아가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 교통편.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동네 상당수는 수억 원의 빚을 져야 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다. 앞으로 아이들은 더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교육부는 올해 248만1248명인 초등생이 2029년에는 172만9805명으로 30% 이상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동네에 아이들이 줄면 부모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다가오는 불안감에 아이를 데리고 피신하듯 다른 동네로 옮긴다. 그래서 소멸하는 곳, 몰려드는 곳 모두 가속도가 붙는다. 이를 지켜보는 젊은 세대는 ‘굳이 아이를 낳아 저 난장판에 빠지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정부와 교육당국이 낙후 지역을 되살리는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이 바뀌기 어렵다. 필자도 불안감을 안고 떠밀리듯 옮긴 부모들 중 하나다. 이왕이면 조금 나은 환경에서 키우려 대출을 내 이사했다. 그런데 일방적 결정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생애 첫 친구를, 첫 동네를, 첫 추억을 잃고 허전해하는 딸들을 볼 때마다 요즘 되묻는다. 이게 맞나. 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은 점차 진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임직원 위주의 자원봉사나 기부금 위주였다면 최근에는 기업 외부에 대한 공헌과 함께 기업 구성원의 복지를 챙기는 프로그램도 생겨나고 있다.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직원들의 공감과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한 조치다. 재단법인 행복날개수련원은 SK 임직원들의 복지를 지원하는 동시에 취약 계층을 돕기 위한 참여형 매칭 기부 캠페인인 ‘운동하고 기부하자’를 운영하고 있다. 임직원들이 매달 온라인에서 운동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일정 횟수 이상 참여하면 결식우려 아동에게 그만큼 도시락이 전달되는 방식이다. 운동 참여 임직원 수가 늘수록 수련원이 기부하는 도시락 지원 재원도 늘어난다. 지금까지 누적 기부 금액은 2600만 원이다. 지난 9개월간 SK 계열사 30곳 임직원 8877명이 참여했다. 직접 돈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만 해도 기부가 이뤄진다는 장점 덕택에 직원들의 참여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hy(옛 한국야쿠르트)는 1975년부터 사내봉사단 ‘사랑의 손길펴기회’를 통해 임직원 급여의 1%를 기부금으로 전달해 왔다. 이를 확대 개편해 2022년부터는 환경 보호를 위해 임직원들이 조깅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와 별개로 1000보, 2000보 등 걸음 목표를 설정한 뒤 달성하면 기부금을 조성하는 ‘건강 걷기 챌린지’를 통해서도 기부금 7700만 원을 적립했다. 워커힐 호텔앤리조트는 2021년 ‘친환경 호텔’ 선언 후 임직원들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행가래’를 통해 사회공헌 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이 앱은 일상에서 미션을 달성하는 식으로 포인트를 적립하는데 잔반 없애기, 헌혈, 텀블러 사용 등이 그 대상이다. 지금까지 누적 포인트 약 1억2000만 원은 취약계층 지원에 사용된다. 행복날개수련원 문성욱 총괄은 “기업과 임직원이 함께하는 사회공헌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임직원과 취약계층의 행복을 모두 지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행복날개수련원은 2007년 문을 연 비영리 재단으로, 전국 SK그룹 임직원들의 행복 및 건강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던 2020년경부터 각 학교들은 화상 플랫폼을 이용한 비대면 수업에 돌입했다. 대면 수업으로 인한 감염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기간 예상치 않게 드러난 문제가 학생들의 가정 환경 차이에 따른 교육 격차였다. 여건이 좋은 학생들은 비대면 수업 기간을 사교육과 외부 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한 집중 학습 기간으로 활용했다. 반면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교육 공백, 돌봄 공백에 방치됐고, 이는 코로나19 유행이 끝난 후 학생 간 성적 격차로 드러났다. 이처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교육 격차를 줄이기 위한 기업들의 활동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학생 개개인이 처한 경제적 상황이나 사용 가능한 교육 자원의 격차가 학력 격차, 나아가 진로와 사회 생활의 격차로 커지는 것을 막자는 취지다.● 학력 격차, 기업들이 나서 프로그램 지원 회계법인 삼정KPMG는 아동들을 대상으로 문해력 교육 및 청소년 경영경제 교육을 후원하고 있다. 또 우리금융저축은행도 취약계층 청소년을 위한 금융 교육을 진행해 왔다. 특히 문해력은 코로나19 이후 심각성이 더 크게 대두됐다. 어린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약 2년 동안 생활한 탓에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말하는 입 모양을 인지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는 말하기, 듣기 능력의 저하로 직결됐다. 오비맥주는 각 지방의 낡은 지역아동센터를 리모델링해 지역 차원의 교육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다. 바로 ‘행복도서관’ 사업이다. 2016년부터 해온 이 사업은 방과 후 돌봄이 필요한 지역 아동들의 학습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낙후된 아동센터를 ‘해피 라이브러리’(행복도서관)로 선정하고 리모델링해 준다. 교육 자재와 도서도 무상으로 제공한다. 지금까지 서울, 충북 청주시, 광주, 전남 해남군, 경기 부천시, 경북 울진군, 강원 강릉시 등 11곳에 해피 라이브러리가 개관했다.● 반도체-환경 등 전문성 살려 지원 기업과 정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해 아동의 교육 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은 시간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개중에는 각 기업이 전문성을 가진 분야를 아동 교육과 연계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다. 2022년 시작된 ‘행복얼라이언스 스쿨’은 사회공헌 네트워크 행복얼라이언스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각자의 역량과 전문성을 활용해 아동 학습 및 정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SK스페셜티는 학생들에게 반도체 분야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특수가스교실’ 콘텐츠를 제공했다.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특수가스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이 분야와 관련된 직업 정보를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SK실트론의 ‘미래를 그리는 도화지’ 역시 반도체의 핵심 재료인 웨이퍼가 무엇인지 등을 설명하는 콘텐츠였다. SKC는 최근 관심이 높아진 환경 문제와 연계해 ‘출동! 분리배출 히어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를 통해 플라스틱 쓰레기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해법을 학생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SK케미칼과 SK가스는 ‘행복한 그린스쿨’을 통해 대기 및 해양오염의 심각성을 알리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소개하고 있다. 행복얼라이언스 스쿨 프로그램은 지난해 경북 울진지역아동센터, 충북 충주시 주덕지역아동센터, 전북 익산시 희망나눔지역아동센터 등 전국 센터 6곳에서 열려 학생 360명이 참여했다. 송성호 재단법인 행복한학교재단 사무국장은 “지역아동센터에서는 자체 여건의 한계 탓에 다양한 프로그램 구성이 어렵다”며 “특히 도서산간 지역에서는 강사나 프로그램 지원이 더욱 절실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서울 노원구 등에서도 프로그램 요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 중 울진지역아동센터의 경우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져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어려웠는데, 행복얼라이언스 스쿨 프로그램 도입 후 상황이 달라졌다고 한다. SK스페셜티의 반도체 공정 교육, 공정무역 실천 기업 ‘아름다운커피’의 공정무역 및 초콜릿 관련 교육, hy(옛 한국야쿠르트)의 온라인 견학 프로그램, 본아이에프의 반달떡 만들기, SKC의 분리배출 방법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된 것이다. 송 사무국장은 “경험과 놀이 중심의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의 여건에 따른 교육 격차 해소를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참여 기업도 “기업 알리는 효과” 이런 프로그램은 기업 입장에서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행복얼라이언스 스쿨에 참여하는 SKC는 회사 구성원과 대학생들이 강사로 참여해 초등학생 교육을 진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교육 콘텐츠 전문 제작 업체 및 지역아동센터 등과 협력을 늘리고 있다. 또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들과도 소통하며 기업의 활동을 알리고 있다. SKC 관계자는 “이런 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을 알리는 효과가 있다”며 “더 많은 미래 세대에게 환경 교육을 전파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행복얼라이언스 사무국을 운영하는 행복나래 조민영 본부장은 “올해는 아이들이 더 다양한 교육을 경험할 수 있도록 더욱 많은 기업과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학교법인 광성학원(이사장 최준수)은 3일 오전 11시 서울 마포구 광성중, 광성고 대강당에서 개교 13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한국 교육의 빛이 된 광성 130년, 교육의 미래를 이야기하다’를 표어로 내건 이번 행사는 올해로 개교 130주년을 맞이하여 광성학원과 광성중고교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학교 발전에 힘이 된 인물들의 공로를 치하하며, 한국 교육과 사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기념예배와 기념식에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김승제 한국사립초중고등학교법인협의회장, 김두범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 김현기 서울시의회 의장, 박강수 마포구청장 등이 참석한다.기념식에서 학교 재건축과 장학기금 조성 등 학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고 김동선 명예이사장에게 대한 특별공로상을 비롯해, 오석준(광성고 64회) 대법관에게 광성인상을 수여한다. 또 법인과 학교 발전에 기여한 동문과 법인 이사 20여 명에게 공로상과 감사패를 전달한다. 최준수 광성학원 이사장은 “우리 학원의 130년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학교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물론, 존 무어 선교사의 선교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인공지능(AI)과 양자역학 등 미래 신기술이 대두되면서 최근 한국 대학들도 관련 연구와 인재 양성을 위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다양한 커리큘럼과 학생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K 인재’를 배출하기 위한 것이다. 더불어 글로벌 감각을 익히기 위한 유학생 교류 활동도 확대하고 있다. 건국대는 세계를 무대로 나아가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 차원에서 국내 학생과 외국인 유학생 간의 다양한 협업, 공동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건국대는 ‘KUmberlla 사랑의 김장봉사’를 실시하고, 김치를 만들어 지역 기관에 전달했다. 이날 봉사에는 건국대 교직원과 재학생, 외국인 학생 등 90여 명이 참석했다. 고려대는 개교 120주년인 2025년 5월 자연계 중앙광장을 착공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창업 클러스터를 만들고 새로운 지형의 입체적인 그린 캠퍼스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산책로는 학생들과 인근 주민들의 생활을 더 풍요롭게 할 예정이다. 고려사이버대는 지능정보사회 발전에 발맞춰 자율주행, 로봇 시스템 등의 신기술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올해 컴퓨터공학부를 신설하며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을 선도하는 글로벌 인재 양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광운대는 올해 AI로봇전공(정원 74명)과 반도체시스템공학부(정원 58명)가 신규로 신설됐다. 로봇학부 AI로봇전공은 AI와 로보틱스를 접목한 결과물을 창출해 내는 교육과정으로 AI융합시스템 기술인재와 기존 로봇혁신인재 양성을 결합해 정보통신기술(ICT) 융합 분야에 전문화된 AI로봇 엔지니어를 양성한다. 단국대는 지난해 교외 연구비 수주액이 1000억 원을 돌파했다. 산학협력 실적을 나타내는 또 다른 지표인 기술이전료는 27억8000만 원(대학정보공시, 2022년 기준)을 기록하며 전국 대학 12위에 올랐다. 최근 3년간 기술이전 수입은 67억 원이며 특히 1억 원 이상의 중대형 기술이전 사업을 10건 이상 추진해 질적 성장을 이뤘다. 삼육대 인공지능융합학부는 인문사회학적 소양과 경영학적 통찰력을 갖춘 전문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세부 전공은 인공지능공학, 경영정보시스템, 지능형반도체 등 세 과정이다. ‘인공지능공학’은 인공지능 기반의 빅데이터 및 정보기술(IT) 전문 인재를, ‘경영정보시스템’은 경영·IT 코디네이터 및 전공 지식과 기술을 갖춘 제너럴리스트를, ‘지능형반도체’는 차세대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갈 반도체 공정·설계·분석 분야 전문 인력을 양성한다. 서경대는 이공대학계열 내에서 기존의 물류시스템공학과, 소프트웨어학과, 전자컴퓨터공학과, 금융정보공학과, 도시공학과 등 전통의 특성화 학과에 나노화학생명공학과를 새로 개설했다. 나노화학생명공학과는 융·복합의 창의적 미래 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유능한 나노화학·생명공학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서울사이버대학교 인공지능학과는 AI 분야의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해 최근 개편됐다. 졸업 후 AI 분야 대학원 진학이나 AI 관련 국가기관 및 민간기업, 스타트업 등으로 진출할 수 있다. 세종대 인공지능데이터사이언스학과는 AI와 데이터사이언스를 함께 학습한다. 두 학문이 결합돼 판단과 인식에 중점을 둔 AI 모델링에 더해 데이터 관리 및 체계적 분석까지 함께 배우게 된다. AI와 데이터사이언스에 대한 이론과 실습 측면에서 교육을 제공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AI, 빅데이터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게 목표다. 중앙대는 미래 산업의 특성을 고려해 매년 연구비 규모를 늘려가고 있다. 융복합 연구의 기틀을 조성하고 연구지원의 폭을 확대하면서 BK21 등의 연구 과제 수주 범위를 늘리고 있는 것이다. 박상규 중앙대 총장은 “중앙대는 앞으로도 연구 지원책 강화와 인프라 개선 등 전폭적 지원을 바탕으로 혁신을 선도하며 융복합 연구중심대학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쏟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돌이켜보면 7년간 이 동네에서 우리 애들 키운 건 3할이 어린이집, 3할이 우리 부부, 또 3할은 ○○○소아청소년과 선생님이네.” 얼마 전 이사를 준비하다 아내에게 한 말이다. 아이 이마가 펄펄 끓을 때, 기침이 자지러질 때마다 단골 소아과에 달려가곤 했다. 원장은 다리에 깁스를 한 날도 출근해 진료를 했다. 이사 후 보름이 지난 20일 내년도 의대 대학별 정원이 발표됐다. 일각에선 “수능 2등급도 의대에 입학할 판”이라며 호들갑이다. 2등급이면 수능 상위 5∼11%다. 서울 주요 상위권 이공계에 갈 성적이다. 의대 교수와 의대생들은 “수업이나 잘 따라올지 모르겠다”며 혀를 찬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금 전국 의대 커트라인이 서울대 이공계보다 높은 게 의대 공부가 이공계보다 어려워서가 아니다. 수요와 공급 탓이 더 크다. 취업난과 경기 둔화로 ‘평생 고소득’ 면허에 수험생이 몰린 탓이다. 그러면 좋은 의사와 수능 1등급은 상관관계가 있을까. 의대 공부의 특징은 암기량이다. 뼈, 혈관은 물론이고 회충 학명까지 달달 외운다. 환자 앞에서 지식이 기계처럼 튀어나와야 한다. 반면 이공계는 암기할 정보는 의대보다 적지만 미지의 답을 머리로 찾아 나아가야 한다. 양자와 우주, 수(數)의 세계에서 수많은 가설을 세웠다 허무는 고도의 창의력과 사고력이 필요하다. 어느 공부가 더 어렵냐고 묻는 것은 우문(愚問)이다.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 알파고를 이긴 바둑기사 이세돌, 서울대 의대 수석 졸업생을 동일선상에 놓을 순 없다. 분야가 다르니 필요한 지적 능력도 다를 뿐이다. 그런데 현실은 사고력이 뛰어나든, 암기를 잘하든 모두 의대가 빨아들인다. 의대에 가려면 수능 미적분이나 기하 점수가 높아야 하는데 정작 의대 공부에는 이 과목들이 별 쓸모가 없다. 대학은 굳이 이런 모순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수능 만점자가 우리 의대에 왔다’ ‘우리 의대 커트라인이 높다’는 타이틀을 포기하기 싫어서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제주대가 내놓은 ‘무(無) 수능 선발’ 구상은 주목할 만하다. 수능 등급이 아니라 정말 의사의 인성과 자질을 갖춘, 지역 의료를 지탱할 학생을 뽑겠다는 결단이다. 서울의 유명 대학들도 못 한 결정이다. 2020년 의료 파업 당시 논란이 된 의사단체 홍보물이 하나 있었다. 당신의 생사를 판가름할 진단을 받을 때 ‘전교 1등 출신 의사’와 ‘성적 낮은 공공의대 의사’ 중 누구를 선택하겠냐는 내용이었다. 지금 되묻는다. 사직서를 던지고 병원을 뛰쳐나간 의사와 동료의 비난을 참으며 병동을 지키는 의사 중 국민들은 누구에게 몸을 맡기겠나.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합리적 판단,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 의사란 직업의 특별함을 아는 소명의식. 이런 자질을 갖췄다면 수능 2등급이건 3등급이건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딸들이 아플 때 돌봐줬던 그 의사가 어느 의대를 나왔는지, 수능 몇 등급이었는지는 모른다. 사실 관심도 없다. 그 대신 수많은 소아청소년과가 문을 닫는 와중에 변함없이 홍제동 상가 5층 진료실을 지키며 아이들을 돌봐줬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는다. 환자에겐 그런 의사가 최고의 의사다.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