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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서정보 논설위원입니다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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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3~2024-11-22
칼럼97%
사설/칼럼3%
  • [횡설수설/서정보]‘나의 아저씨’의 죽음

    어제 영면에 든 배우 이선균 씨는 영화 ‘기생충’으로 연기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지만 그의 인생작으로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가수 아이유와 함께 호흡을 맞춘 이 작품에서 그는 세상을 향해 가시를 세운 상처투성이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참된 어른’의 역할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샀다. 평소 드라마와 거리가 먼 중년 남성 중에도 이 작품을 보고 오랜만에 눈물샘이 터졌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 ‘국민 아저씨’가 마약 혐의로 조사를 받는다는 소식에 크게 놀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에 더 크게 놀랐다. 그는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와룡공원 인근 공터의 차량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죽기 전날 변호인을 통해 거짓말탐지기 조사까지 요구하며 억울해했던 그의 죽음에 동료 연예인들과 팬들은 아연실색했다. 부인 앞으로 ‘어쩔 수 없다’ ‘이 길밖에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는 보도도 나왔다. 마약 의혹이 제기되기 전인 10월 초 미국 한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기는 내 일기, 앞으로 또 다른 일기를 쓰고 싶다”고 한 것이 대중을 향한 마지막 인사가 됐다. ▷고인은 수사 과정에서 3차례나 포토라인에 섰다. 흉악범도 포토라인에 한 번 설까 말까 한데 유명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모두 공개리에 소환됐다. 특히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검사에서도 마약 음성으로 나온 뒤 이달 23일 세 번째 소환 때는 고인 측이 비공개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를 협박한 A 씨의 진술밖에 없는 상황에서 경찰은 그를 거듭 포토라인에 세웠다. ▷미리 약속된 시각에 맞춰 포토라인에 세우는 것은 경찰 수사공보 규칙에서도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법무부 훈령에도 사건 관계인이 원하지 않을 경우 언론 등과 접촉하게 해선 안 된다고 돼 있다. 특히 결정적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경우엔 더욱 그렇다. 최근 마약 무혐의를 받은 지드래곤 역시 포토라인에 설 수밖에 없었다. 마약 혐의로 기소된 유아인도 두 번째 소환부터는 비공개를 요구했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의 아저씨’의 명대사 중에는 이선균이 연기한 박동훈이 곤욕을 치르는 상황에서 “아무도 모르면 돼. 그럼 아무 일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 절절한 자기 위안으로 어떻게든 힘든 상황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공감을 산 대사였다. 하지만 현실 속의 그는 포토라인에 서고, A 씨와의 녹취록까지 공개되면서 ‘모두가 아는 일’의 주인공이 됐다. 심리학자들은 그렇게 누적된 수치심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라고 한다. 포털의 악성 댓글로 유명 배우들이 자살한 뒤 댓글이 금지된 것처럼 연예인을 무작정 포토라인에 세우는 관행도 이번에 바로잡아야 한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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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대 증원 효과는 10년 뒤, 입시 부작용은 당장 눈앞에 [수요논점/서정보]

    《영하 10도 이하의 강추위가 몰아닥친 17일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대한의사협회 주최로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방침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대한민국 의료붕괴 저지를 위한 제1차 전국의사총궐기대회’라는 긴 이름의 집회였다. 의협 측은 “8000명이 참가했다”고 했지만 실제론 10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날 집회에선 일부 간부의 삭발식까지 이어지면서 강경한 투쟁 의지를 보였다. 그런데 과연 의대 증원으로 대한민국 의료가 붕괴에 이르는 심각한 위기를 맞는 것일까.》● OECD 평균과의 비교2000년 의약분업 추진 이후 정부는 의사들과의 협의를 통해 2004년부터 의대 입학정원을 3409명에서 3058명으로 줄였다. 이후 지금까지 동결된 상태다. 의대 증원 논의의 출발점은 ‘소아과 오픈런’과 ‘응급실 뺑뺑이’라는 두 키워드가 설명해준다. 국민들이 의사 부족을 체감하는 현실에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최근 내놓은 의사 인력 추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1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58% 수준이다. 2025학년도부터 전국 의대 정원을 3058명에서 1500명 늘려 매년 4558명을 뽑는다면 2035년 진료 의사는 2.99명이 된다. 그런데 OECD 31개 회원국의 경우 연평균 의사 증가율을 유지한다면 평균 4.45명이 된다. 1500명씩 늘려도 OECD 평균의 67.2%에 그친다는 것이다. 매년 배출되는 의사 수 역시 마찬가지다. 2021년 기준 10만 명당 7.26명으로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평균은 13.5명. 독일은 12.4명인데 의대 정원을 지금보다 5000명 늘릴 계획이다. OECD 평균과의 비교법은 외국과 비교해 우리나라 의사 수의 절대적 부족 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맹점도 있다. 각국의 의료 환경이 달라 의사 수를 일률적으로 비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OECD 내 동유럽 국가의 경우 국가 공무원인 의사가 대부분이어서 숫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과 미국은 인구 1000명당 의사가 2.6명 수준이어서 우리와 차이가 크지는 않다. 매년 배출되는 의사 수도 미국(10만 명당 8.54명), 일본(7.32명)과 비슷하다. 의협의 의료정책연구소는 인구 감소 등으로 2047년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5.87명으로 OECD 평균 5.82명을 넘어선다는 자료를 내기도 했다. OECD 평균과의 단순한 숫자 비교는 의사 수가 절대 부족하다는 근거로 삼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의대 정원의 경우 미국 일본 유럽 등은 지난 20년간 꾸준히 늘려 왔고 우리처럼 완전 동결한 것과는 다르다. 또 미국 등은 합법화된 PA간호사 등이 의사 일을 일부 대신하고 있어 한국의 의사 수가 충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 의사 수입으로 본 공급 부족건강보험 진료비나 이용률, 인구 추계 등을 통해 적절한 의사 규모와 비교하는 연구도 많다. 대부분의 결론은 의사 부족이다. 현재 의대 정원을 유지하면 2050년에 2만2000∼2만8000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박은철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2050년 이전까지 의사 부족이 이어지지만 급격한 인구 감소 탓에 이후에는 의사 수가 남아돈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박 교수는 5년간 한시적으로 정원 500명을 늘린 뒤 선진국처럼 의료 수요와 의사 수를 비교 검토하는 위원단 등을 만들자는 의견을 냈다. 의사 소득 수준으로 의사 부족을 가늠하기도 한다. OECD ‘2023 보건통계’에 따르면 한국 봉직의(페이 닥터) 수입은 2020년 19만여 달러로 10년 새 42% 증가했다. 구매력과 환율까지 감안해도 OECD 최고 수준이다. 국가 내부에서 비교해도 우리나라 의사 소득은 전체 근로자 평균 소득의 4.6배로 OECD 평균(2.9배)을 훌쩍 뛰어넘는다. 의사 소득이 수요와 공급에 의해 좌우된다고 한다면 분명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공계 이탈과 N수생 양산의대 증원을 한다면 의료계에만 파장을 미치는 게 아니다. 대학 입시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입시 업계에선 최상위권 인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이 심화되면서 이공계 이탈이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입시학원에는 의대 진학을 위해 재학생과 N수생, 직장인들이 몰려 성황을 이루고 있다. 입시업계에서는 정원 1000명이 늘면 의대 준비생은 최소 6000명 이상 늘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가뜩이나 심각한 의대 블랙홀이 더 심화되면 이공계 인재 부족과 대학 교육의 위기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의대 증원을 통한 의사 증가 효과는 10년 뒤에 보는데 입시 부작용은 지금 바로 나타난다는 얘기가 나온다. 급격한 증원에 따른 충격을 줄이기 위해 권정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매년 정원의 5%씩 늘려 2030년에 1000명이 증원되도록 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필수·지역의료 과연 나아질까가장 큰 논란거리는 의사 수가 많아지면 과연 시급한 필수 및 지방의료 공백 사태가 해소될 수 있는지 여부다. 의대생을 늘리면 심각한 전공의 미달 사태를 빚고 있는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등에도 지원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낙수효과’를 거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의대 졸업생들이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원하는 전공 분야를 가려 하고 있고, 졸업 후 일반의로 개업하는 추세가 확대되면서 낙수효과가 별로 없을 것으로 본다. 최근 5년 내 개업한 일반의의 80% 이상이 피부과 진료를 내걸었다. 더 심각한 것은 필수의료 분야의 기존 의사까지 대학병원을 떠나 개원하면서 전공과 무관하게 편하게 돈을 버는 분야로 바꾼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심장혈관 흉부외과 의사가 하지정맥류나 신장 투석 등을 하는 병원을 차리는 것이다. 마취과 의사의 경우 서울 강남 성형외과를 돌면서 마취를 하는 것이 고난도 중증환자들의 마취를 시도 때도 없이 하는 대학교수보다 월 기준 3, 4배를 더 벌 수 있다. 이로 인해 서울 대형병원은 물론이고 경기 부산 충청권 대학병원 등에서 의사들의 줄사표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실손보험으로 비급여 진료가 급성장하면서 빚어진 보상 체계의 왜곡 탓이라고 지적한다. 건강보험 위주의 필수의료는 수가가 오르지 않으면서 수입이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고된 야근과 비상 상황 등 힘든 여건이 계속되니까 이탈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일본처럼 건강보험 환자 진료 시 비급여 진료를 금지하거나 독일처럼 진료 과목당 동네병원 수를 제한하는 등의 조치와 필수의료 수가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의대 증원을 해도 필수의료 분야로 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불가피한 의료 사고로 인한 법적 보호도 아직 미흡하다. 의사 1000명당 연간 기소 건수는 우리나라가 2.58명으로 일본의 0.01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지역 의료도 마찬가지다. 지역 의대의 전공의들은 절반가량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간다. 대학병원 응급실이나 상급병원도 진료 과목을 매일 운영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의사난이 심각하다. 고통 받는 것은 중증 응급 상황에서 의사를 찾아 수백 km를 달려가야 하는 지역 주민들이다. 열악한 지역의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선 증원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의대 증원분의 3분의 2를 지역 국립대 의대에 주고, 지역 인재 선발 위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을 일정 기간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도록 해야 지역 의료의 숨통이 그나마 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의협은 대화 테이블에 앉아야문재인 정부는 2020년 의대 증원을 추진하다가 철회한 뒤 의협과 이른바 ‘9·4합의’를 맺었다. 의대 증원 문제는 정부와 의협이 참가한 ‘의료현안협의체’에서 논의하기로 한 것이 골자다. 이를 근거로 의협은 현재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이 9·4합의 위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의협은 협의체 논의를 별로 하지 않고 거리로 나섰다. 의대 증원 문제는 단순한 숫자 맞추기가 아니라 건강보험 수가, 의료보상 체계, 지역의료 균형은 물론이고 입시 영향까지 함께 풀어야 하는 고차방정식이다. 의대 증원 문제는 그간 국내 의료 시스템의 고질적 병폐를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의협은 이를 위해서라도 논의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정부도 의대 증원 목표에만 매달려 다른 문제들을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또 의사 외에 간호사 등 보건의료인과 소비자인 환자들의 목소리도 함께 들을 필요가 있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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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90대 유모 쫓아내려던 전문직 아들과 소송으로 막은 아버지

    70대 A 씨는 2014년 서울 성동구에 23.1㎡(약 7평)의 소형 오피스텔을 구입했다. 어릴 적 자신을 돌봐준 유모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어머니가 투병 생활을 하느라 돌보지 못한 A 씨 등 5남매를 이 유모는 정성스레 키웠다. 그 고마움을 간직했던 A 씨는 뒤늦게 유모가 기초생활수급자로 폐지를 주우며 어렵게 산다는 걸 알게 됐고, 형제자매들과 상의해 거처를 마련해준 것이다. 다만 A 씨는 오피스텔 명의를 아들 B 씨의 이름으로 했다. 유모가 숨지면 자연스레 아들의 소유가 되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 됐다. ▷7년이 지난 2021년 40대 아들 B 씨는 돌연 유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오피스텔을 비워주고 그동안 안 낸 임차료 1300만 원까지 내라는 것이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아들은 그동안 모은 돈과 증여를 통해 오피스텔을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90대에 치매를 앓아 거동조차 불편한 유모는 전혀 대응할 능력이 없었다. 아들이 자신의 명의로 해준 것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친어머니처럼 여기던 유모를 내쫓으려 했다는 것이 아버지로선 얼마나 야속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아버지는 아들 편이 아닌 유모 편에 섰다. 혈연관계가 아니어서 유모의 소송을 대리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자 대한법률구조공단 등을 찾아다니며 방법을 찾았다고 한다. 까다롭다며 난색을 표하던 공단 측도 그의 거듭된 호소에 소송에 나섰다. 유모의 성년후견인이 되는 복잡한 절차를 밟았고, 유모의 인적사항 등 기본 서류부터 다양한 재판 서류를 일일이 준비해 제출했다. 또 공인중개사를 설득해 매매 당시 아들에게 명의를 신탁한 것이라는 증언을 하게 했다고 한다. 오피스텔은 실제로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라며 소유권을 돌려달라는 소송도 별도로 냈다. ▷법원의 판단은 기른 정을 소중히 여긴 아버지의 편이었다. 오피스텔의 실질 소유주가 아버지라는 점, 아들의 주장은 무효라는 점, 그러니 소유권도 아버지에게 넘기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오피스텔 매매대금 등을 모두 아버지가 냈고, 이후 관리비와 재산세 등도 아들이 전혀 부담하지 않았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어릴 적 자신을 돌봐준 유모를 지키려는 70대 아버지, 한 푼도 손해 보지 않으려 그런 아버지와 소송을 벌인 40대 전문직 아들의 사연에 감동과 씁쓸함이 교차한다. 아들은 머지않아 자신의 몫이 될 재산에 욕심을 부리다 오피스텔도 잃고 아버지도 잃고 말았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무섭다고들 하지만 길러준 유모에게 끝까지 보은한 아버지 A 씨의 마음 씀씀이에 고개가 숙여진다. 비록 재판까지 갔지만 아들도 깨닫는 바가 있었으면 좋겠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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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횡설수설/서정보]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조계종은 지난달 29일 입적한 자승 스님이 생전에 일찌감치 남겼다는 열반송(임종게)을 공개했다. 원래 열반송은 고승들이 숨을 거두기 전 평생의 깨달음을 압축해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뜻한다. 생사에 연연하지 않는 초월의 경지와 폐부를 찌르는 성찰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열반송 중에선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이 남긴 것이 가장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넘는다/산 채로 지옥에 떨어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둥근 수레바퀴가 붉음을 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마치 자기 죄를 고백하는 듯한 이 열반송은 구구한 해석을 낳았다. 성철 스님의 상좌(제자)였던 원택 스님은 “생전 신도들에게 ‘내 말에 속지 마라’고 자주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라는 스님 특유의 반어법이 담긴 것”이라고 풀이했다. ▷예전엔 보통 5언, 7언 절구의 한시(漢詩) 형태로 남겼지만 한자를 모르는 세대가 많아지면서 간결하게 한글로 남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내 대표적 비구니인 광우 스님은 2019년 ‘떠나는 바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왔다가 갈 뿐이다’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의 열반송은 2010년 임종한 지 8년 만에 미발표 원고 등을 책으로 낼 때 함께 공개됐다. 그는 “분별하지 말라. 내가 살아온 것이 그것이다. 간다. 봐라”라고 했다. ▷열반송조차 불필요한 겉치레라고 본 스님들도 있었다. 8대 종정을 지낸 서암 스님은 제자가 열반송을 남겨 달라고 하자 “나에겐 그런 거 없다. 정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라고 했다. 2021년 입적한 월주 스님(전 총무원장) 역시 “내가 살아왔던 모든 생애가 바로 임종게가 아닌가”라고 했다. 그는 열반송이 마치 고승의 징표처럼 여겨지는 세태에 대해 “임종게 없이 돌아가신 분의 상좌들이 임종게를 (만들어) 발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자승 스님은 2009년부터 8년간 제33, 34대 총무원장을 지낸 뒤에도 조계종의 막후 실세로 활동해 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주변 스님들과의 다툼과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최근 대학생 전법을 위해 10년간 힘쓰겠다고 했던 그가 갑자기 분신과 흡사한 ‘소신공양’ 형태로 세상을 떠나자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분위기도 있다. 불교계에서 십수년 동안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그는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었던 것일까. 사라지는 인연…. 그가 미리 남긴 열반송이 그의 마지막을 암시한 듯하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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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기시다 최악 지지율과 ‘아오키 법칙’

    일본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지지율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의 11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내각 지지율은 21%, 지지하지 않는다는 74%였다. 자민당 지지율도 24%에 그쳤다. 아사히와 요미우리신문 조사에서도 내각 지지율이 25% 이하로 나왔다. 모두 2012년 자민당이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이후 최악의 수치라고 한다. 그러자 여론조사 결과로 일본 정권의 붕괴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는 ‘아오키 법칙’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아오키 법칙은 자민당 간사장과 관방장관을 지낸 아오키 미키오 전 의원이 제시한 것으로 3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내각 지지율과 정당 지지율의 합계가 50을 밑돌 때이다. 두 번째는 30 대 50 대 20 법칙으로 자민당 지지율 30%, 무당파 50%, 야당 지지율 20%의 비율이 무너질 때이다. 세 번째는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 비율이 내각 지지율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을 때이다. 마이니치 조사를 보면 내각과 정당 지지율 합계가 50을 밑돌고, 자민당 지지율은 30% 미만이며, 정권 지지율과 비지지율 차이가 50%포인트를 웃돈다. 아오키 법칙이 모두 들어맞는 상황이다. ▷올 5월만 해도 50% 안팎의 지지율로 “선진국 중 가장 안정적 기반을 갖고 있다”고 자랑했던 기시다 정권의 인기가 급락한 이유는 뭘까. 우선 일종의 디지털 주민증인 ‘마이 넘버 카드’를 서둘러 도입했다가 수많은 행정오류가 발생한 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국민 생활과 밀접한 사안에서 불편을 초래한 것이다. 장남 비리 등 가족 문제와 자민당 소속 차관급 인사 3명이 스캔들로 낙마하는 인사 실패도 있었다. 집권 이후 증세를 부르짖다가 지지율이 떨어지자 1인당 4만 엔(약 35만 원)의 감세안을 내놓은 것도 역풍을 맞았다.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불만은 엔저 등으로 물가가 크게 오르고 있는 것이다. 수출 위주의 대기업 실적은 좋아지고, 증시도 활황이지만 국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지고 있다. 일본 물가상승률은 거의 매달 전년 대비 3%에 달하고, 실질임금은 18개월 연속 마이너스 행진이다. 30년 넘는 장기 저성장으로 물가 상승을 체감하지 못했던 일본인에겐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요즘 여론은 ‘감기가 걸려도 기시다 총리 탓’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고물가를 비롯해 잇단 정책 실패, 가족 비리, 인사 실패 등이 ‘종합세트’처럼 동시에 벌어졌으니 지지율이 바닥을 길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신뢰의 위기다. 여론조사에서 정부 경제정책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60∼70%대를 오간다. 정책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비전 없고, 권력 연장만 노리는’ 기시다 총리가 싫다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정권이 몰락하는 과정은 어느 나라든 비슷한 것 같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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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논점/서정보]김포시 서울 편입… ‘지역 민원’ 아닌 ‘국가 전략’의 문제

    《경기 김포시의 서울 편입은 지난달 30일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정하고 특별법까지 만들기로 하면서 정치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6일 만난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병수 김포시장은 ‘공동 연구반’을 만들어 연말 전후로 편입 분석 결과를 내놓기로 했다. 국민의힘은 ‘총선용’이란 점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도 공식적으로 ‘반대’를 내놓지 않고 있다. 자칫 서울 편입을 바라는 김포 유권자들의 반발을 살까 두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천의 유정복 시장이 6일 ‘정치쇼’라고 하는 등 국민의힘 내부에서 명확한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경기 하남시 구리시 등 서울 인접 지자체들은 ‘김포가 되면 우리도 해달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야와 지자체가 정치적 계산과 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만 사실 서울과 그 주변 도시의 관계는 서울이라는 메가시티의 경쟁력과 효율성을 얼마나 끌어올릴지를 놓고 판단해야 하는 국가 전략 차원의 문제다.》● 느닷없는 서울 편입론의 배경김포시는 경기도에 속해 있지만 실질적으로 경기도와 맞닿은 곳은 없다. 남쪽과 동쪽은 인천 서울에 막혀 있고, 북쪽의 경기 고양시는 한강을 끼고 떨어져 있다. 지리적 애매함은 최근 김동연 경기지사가 서둘러 추진 중인 경기도의 분도(分道)로 더욱 부각됐다. 분도는 한강 이북의 경기도 시군을 경기북부특별자치도라는 이름으로 분리하는 것. 실현되면 인구 400만 명의 새 광역지자체가 탄생한다. 김포는 한강이라는 분도의 기준을 적용하면 경기남도에 속해야 하지만 인접하지도 않고 생활권도 다르다. 경기도는 북도로 갈 수 있다고 했지만 상당수 시군의 재정자립도가 김포보다 낮아 손해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9월부터 김포시 국민의힘 당협을 중심으로 서울 편입론이 나왔고,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달 30일 공식화했다.● 김포엔 이득?2010년대 들어선 김포한강신도시는 김포시의 성격을 바꿔 놓았다. 서울의 높은 집값에 밀린 3040대가 옮겨오면서 신도시는 서울 생활권으로 탈바꿈했다. 지난해 기준 신도시 주민 평균 연령은 40.3세. 숫자도 원주민보다 더 많아졌다. 대부분 서울 직장인인 이들은 당연히 ‘서울’이라는 브랜드를 선호한다. 경기 김포시보다 서울 김포구가 더 낫다는 것이다. 브랜드 프리미엄으로 현재 평균 5억 원대 초반인 아파트 가격도 오를 것으로 기대한다. 서울 송파, 경기 성남과 하남에 걸쳐 있는 위례신도시의 경우 송파 쪽 아파트 가격이 타 지역보다 1억 원가량 높은 것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인천과 노선 갈등으로 지지부진한 서울 지하철 5호선의 연장을 인천과 협의할 필요가 없어져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또 광역버스 규제나 택시 할증 같은 제한도 없어져 교통 여건이 전반적으로 좋아진다는 것이다. 교육 여건은 장단점이 있다. 우선 서울 자사고 특목고 지원이 가능하고, 목동 등 유명 학군의 일반고도 갈 수 있다. 대신 읍면 지역에서 받던 농어촌 특례입학전형은 사라지게 된다. 김포시가 서울의 자치구가 되면 지방세 중 상당수가 서울시 몫이 되는 등 2500억 원이 넘는 세수 감소가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김포시는 서울시가 조정교부금을 주고 보조금 비율도 경기도보다 높기 때문에 세수에 큰 변화가 없다는 입장이다. 부산의 기장군 경우처럼 편입되는 곳이 손해 보는 일이 지금까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재정 문제는 편입에 큰 변수가 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서울은 무슨 수혜?김포시 면적은 276km²로 서울 면적(605km²)의 45%나 된다. 김포의 가용 토지는 전체의 60%로 추산된다. 현재 한강2신도시에 4만6000여 채가 2029년 이후 들어설 예정인데, 기존 한강신도시를 합치면 10만 가구로 성남시 분당(약 9만7000채)에 버금가는 규모다. 서울이 되면 더 많은 택지 공급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경우 교통 문제 해결이 우선인데 지하철 5호선이나 GTX-D 등은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는 사업이어서 빨리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또 쓰레기 매립지 같은 시설을 김포시로 옮길 수 있다. 현재 쓰레기 소각장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세우려고 하지만 주민들의 반대가 적지 않다. 이를 인구밀도가 낮은 김포의 농촌 지역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김포가 일부 소유한 쓰레기 매립지 4구역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으나 인천의 합의가 필요해 현실화되기는 어렵다. 김포 편입이 다른 지역 편입과 차별화될 수 있는 이점은 서울이 바다를 얻는다는 것이다. 오세훈 시장이 여의도에 서울항을 만드는 프로젝트와도 맞닿을 수 있는 지점이다. 경인아라뱃길을 통해 서해를 오가는 항만도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인아라뱃길이 협소하고 수심도 얕아 물류 운송 측면에선 거의 쓰임새가 없었다는 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가 과제다. 또 서울에서 재정자립도가 낮은 구를 중심으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온다. 서울시가 재산세 등 지방세 수입의 일부를 구별로 고르게 나누는데 김포가 들어오면 분배받는 몫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해당 지역 국민의힘 당협마저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이유다.● 김포 편입이 메가시티의 길?경기남·북도 중 양자택일을 해야 했던 김포시는 서울 편입이 최선의 대안일 수 있다. 일부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해도 서울의 브랜드와 고도화된 행정 서비스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구리 하남 같은 곳이 즉각 서울 편입에 끼어달라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개별 시의 선택으로선 최선이지만 수도권, 나아가 지방 균형발전 차원에서 볼 땐 부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생활권과 행정구역을 맞춘다는 이유로 김포가 편입되면 서울 출퇴근자가 많은 다른 시군의 요구도 빗발치게 된다. 김포는 서울 출퇴근자 비율이 12.7%로 10위 정도 된다. 광명 하남 과천 구리 고양 남양주 의정부 성남 부천시가 모두 김포를 앞선다. 같은 이유로 이들을 서울로 편입시킨다면 서울의 인구는 당장 300만 명 이상 늘어난다. 한 번 안 된다고 해도 편입 요구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는 서울은 더 살찌고 경기도는 왜소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미 서울은 메가시티다. 경기 인천까지 아우른 수도권은 인구 2600만 명으로 교통, 일자리, 사회 인프라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 이들을 합친 초광역단체 신설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적어도 세 광역단체가 긴밀히 협력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메가 리전(region)’이 될 수 있다.● 메가시티의 큰 그림을 그려야포화 상태인 수도권에는 여전히 지방 인구, 특히 젊은층의 유입이 이어지고 있다. 2013∼2022년 10년간 20대 60만 명이 수도권으로 이동했다. 국토 면적의 11%에 인구의 절반이 사는 수도권의 인구 집중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도쿄도는 1400만 명이 살지만 전체 인구 대비로는 11% 남짓이다. 그랑파리(프랑스) 그레이트런던(영국) 등 메가시티와 광역화가 추세이긴 하지만 우리는 수도권 과밀과 그에 따른 지방소멸의 폐해가 더 심각하다. 그 대표적인 결과가 0.59명이라는 서울의 합계출산율이고, 과도한 집값 상승이다. 메가시티 같은 국가 전략은 먼저 전국적 균형과 발전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광역 단위 문제의 해결 방안을 세운 뒤 그에 맞는 행정구역 개편을 하는 ‘톱-다운’ 방식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번 김포의 서울 편입은 거꾸로 가는 역주행이어서 ‘서울 메가시티’의 의미를 잘 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서울에 몇 개 지자체를 넣느냐 마느냐 하는 미시적 논의보다 수도권 과밀과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 지방의 메가시티를 조성하는 균형발전 전략과 낡은 행정구역 개편 논의 등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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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AI 재앙 막게 세계가 협력하자”

    영국 런던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블레츨리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독일의 최첨단 암호체계인 ‘에니그마’를 풀었던 장소로 유명하다. 현대 컴퓨터와 인공지능(AI)의 시조인 앨런 튜링과 전문가들이 최초의 컴퓨팅기계를 개발해 독일 암호를 90%가량 풀어냈고, 이는 연합군 승리의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AI의 고향이라 할 만한 블레츨리에서 한국 미국 중국 영국 등 28개국이 모여 제1회 AI 안전 정상회의를 열고 1일 ‘블레츨리 선언’을 발표했다. ▷블레츨리 선언은 AI가 재앙적 피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한 국제적 협력을 다짐하는 내용을 담았다. 세계 각국이 모여 AI 관련 공동 협력을 다짐한 건 처음이다. AI로 인한 피해는 전 지구적 성격을 띠고 있어 국제적 협력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 선언은 규범일 뿐 강제성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다만 ‘인간 중심적, 신뢰 높은, 책임감 있는’ AI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는 공통 인식만큼은 명확히 했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의 말처럼 AI의 위협은 눈앞에 보일 만큼 ‘실존적’이다. 딥페이크를 통한 허위 정보로 선거판이나 전쟁터의 상황을 오도하는 일이 점차 빈번해지고 있다. 전례 없는 규모의 사이버 공격, 테러리스트들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위험 등도 점쳐지고 있다. 인류가 AI로 인해 절멸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 유럽연합(EU) 영국 등은 AI 규제에 서둘러 나서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를 이틀 앞두고 행정명령을 통해 AI 규제에 나섰다. AI 기업은 제품 출시 전 안전 평가 결과를 정부와 공유하게 하고, AI가 생성한 정보는 식별표시를 붙이도록 했다. 2021년 세계 최초로 AI 법의 초안을 내놓았던 EU도 6월 최종안을 마련했고, 올해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엔 안면 인식 시스템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각국의 경쟁은 자국의 AI 상황에 맞게 AI 규범을 선도하겠다는 속내가 담겨 있다. 미국이 6·25전쟁 때 만든 국방물자생산법을 AI 규제 명령의 근거로 삼고, 영국 리시 수낵 총리가 이번 회의를 주도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은 이번 회의 기간 중 AI 규제 연구소 설립 계획도 경쟁적으로 발표했을 정도다. 이번 회의에서 우리나라는 지난달 정부가 발표한 ‘디지털 권리장전’을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장전의 AI 관련 내용은 초보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도 100쪽이 넘는 미국 행정명령처럼 자세하고 특화된 AI 규범을 만들 필요가 있다. 후속 정상회의는 6개월 뒤 우리나라에서 열린다. 이때는 장소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한국의 무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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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애물단지 된 교육청의 무상 보급 태블릿PC

    서울 마포구 중학교 2학년 딸을 둔 A 씨는 지난해 학교에서 무상으로 나눠 준 태블릿PC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집에서 태블릿을 끼고 사는 딸이 못마땅하지만 학습용이라고 하니 휴대전화나 컴퓨터처럼 쓰지 못하게 하는 게 쉽지 않아서다. 유해 앱, 유해 동영상 등은 차단된다고 하지만 유튜브나 웹툰을 보는 것만 해도 신경 쓰인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552억 원의 예산을 들여 중학교 1학년생 7만여 명에게 태블릿PC ‘디벗’을 나눠줄 예정이다. 디벗은 ‘디지털’과 ‘벗(친구)’의 합성어다. 하지만 A 씨와 같은 걱정을 하는 학부모들의 반발이 적지 않아 배포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달 말까지 ‘학생 개인정보 활용 동의서’를 받고 이달 안에 모두 배포할 계획이었으나 90% 이상의 동의서를 받아 배포가 이뤄지고 있는 곳은 지난주 기준으로 전체의 3%에 불과한 실정이다. ▷총 3000억 원 넘는 예산이 책정된 디벗 배포는 ‘1인 1스마트기기’의 교육 환경을 조성하겠다며 실시하는 정책이다. 내년 2학기에는 고교 1, 2학년생, 2025년 1학기에는 초교 3, 4학년생에게 디벗을 지급할 계획이다. 교육청은 원래 디벗을 집에 가져가 ‘하교 후 교육’에도 쓰도록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학부모들의 불만이 커지자 시교육청은 24일 방침을 바꿨다. 초등생의 경우 학교에 놔두도록 하고, 중고생은 학교와 학부모 등의 협의를 통해 집에 가져갈지 정하도록 한 것. 하지만 하교 후 학습이 어려워진다면 원래 정책이 반쪽짜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서울뿐 아니라 인천 광주 등에서도 수백억 원을 들여 태블릿PC나 노트북을 무상으로 나눠줬다. 남아도는 예산을 주체할 수 없는 시도교육청의 선심 쓰기라는 지적이 많았다. 내국세의 20.79%를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자동 배정받는 시도교육청은 예산이 늘 풍족하다 못해 남아돈다. 초중고 학생 수는 2010년에 비해 200만 명이 줄었는데 교부금은 2배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태블릿PC를 공짜로 나눠주는 것 외에도 건물 도색비, 입학 준비금, 교육 회복 지원금 등의 명목으로 예산을 물 쓰듯 썼다. ▷10대 자녀를 둔 부모치고 휴대전화 등 디지털기기 사용 문제로 갈등을 겪지 않은 경우를 찾기 어렵다. 교육청은 디지털기기를 무료로 나눠주면 당연히 받겠지 하는 안일한 인식을 가졌겠지만 자녀와 ‘디지털 불화’를 겪는 학부모로선 달가울 리가 없다. 외국도 집중력과 문해력 저하를 이유로 학교에서 디지털기기 사용을 금지하는 나라가 느는 추세다. 우리도 과연 디지털기기를 나눠주는 것이 디지털 교육의 첫걸음인지, 디벗 같은 정책이 예산 낭비의 소지는 없는지 근본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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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장례비 800만 원 남기고 떠난 모녀… 상속포기제도 알았더라면

    빚에 시달린 모녀가 목숨을 끊는 비극이 16일 광주 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났다. 80대 노모 A 씨와 50대 딸 B 씨는 17층 집에서 투신했다. 이들은 “빚이 많아 너무 힘들다”는 유서를 남겼다. B 씨는 공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A 씨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으로 월 110만 원을 받고 있었다. 아파트도 B 씨 명의였다. 겉으로 보기엔 생활이 어려운 정도로 수입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2019년 사망한 A 씨 남편이 남긴 3억 원가량의 빚이었다. 그로 인해 모녀는 빚 독촉을 심하게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법상 상속받을 재산보다 빚이 많을 경우 상속의 포기나 한정승인을 택하면 빚을 더 갚지 않아도 된다. 한정승인은 물려받은 재산 내에서만 빚을 갚는 것이다. 상속 포기 등은 상속 개시를 알게 된 날로부터 3개월 내에 가정법원에 신고해야 한다. 기간 내 하지 않으면 ‘단순 승인’으로 자동 간주돼 재산과 채무를 모두 상속하게 된다. A, B 씨는 나중에야 상속 포기를 알게 됐으나 이미 신고 기한이 지난 후여서 계속 빚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빚 상속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별거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겐 큰 재앙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지난해 8월 어머니와 두 딸이 가난과 지병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은 ‘수원 세 모녀 사건’도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빚 상속 때문이었다. 그들은 2020년 숨진 남편이 오래전 사업 부도로 남긴 빚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 왔다. 그래서 동사무소에 신고한 주소와 다른 곳에 살면서 기초생활수급이나 긴급복지 혜택 등을 전혀 받지 않는 등 세상과 단절돼 살았다. 적어도 남편 사망 후 상속 포기를 했으면 빚 문제만큼은 해결할 수 있었는데 이를 모르고 사망신고도 하지 않았다. ▷미성년자들도 상속 빚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해 11월 민법 개정 이전만 해도 미성년자들도 성인과 마찬가지로 ‘3개월 내 신고’라는 상속 절차를 거쳐야 했다. 법적 대리인을 통해 절차를 밟지 못한 미성년자들은 사망한 부모나 조부모의 빚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졸지에 빚쟁이가 된 미성년자들은 사회생활을 하기도 전에 신용불량자가 됐다. 언론의 문제제기 이후 정부와 국회는 성인이 되고 난 뒤 한정승인 등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키긴 했다. ▷광주 모녀는 유서와 함께 마지막 관리비 40만 원과 장례비 800만 원이 든 봉투를 남겼다. 끝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이 상속 포기라는 법 절차를 몰라 비극을 맞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부가 미성년자 상속제를 개선한 것처럼 취약계층의 빚 상속을 해결할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사망신고 시 동사무소에서 빚 상속에 대한 안내라도 충실히 해주면 비극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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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퇴직 공무원 수명, 소방관 가장 짧고 판검사 가장 길다

    정상적으로 은퇴한 공무원 가운데 평균 사망 연령이 가장 낮은 직군은 소방직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평균 74.7세다. 가장 높은 판검사 직종의 82.4세보다 8년 가까이 먼저 세상을 떴다. 매년 연말이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화상 환자를 지원하기 위해 발매되는 ‘몸짱 소방관’ 달력에서 소방관은 젊음과 활력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흘러 은퇴한 소방관들은 다른 공무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셈이다. ▷공무원연금공단 자료를 보면 주요 9개 직군 가운데서도 소방직이 유독 사망 연령이 낮다. 판검사에 이어 지도직(81.7세) 교육직(81.6세) 기능직(79.3세) 연구직(79.1세) 경찰(78.8세) 일반직(78.3세) 공안직(78.1세)은 모두 78세 이상이다. 평균치인 79.7세와는 5년의 격차가 난다. 이 수치는 공무원연금 수급자 중 사망자의 평균 연령이어서 전체 평균 수명과 꼭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방관이 더 빨리 세상을 떠난다는 경향성은 분명히 보여준다. ▷소방관의 수명이 짧은 건 수백 도의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가 난무하는 극한의 화재 현장과 무관치 않다. 인명 구조를 위해 건물에 들어갔다가 추락하거나 구조물이 붕괴될 위험도 크다. 소방관들은 “화재 현장에서 불에 데고 부상을 입는 건 다반사”라고 덤덤히 얘기한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유독가스와 유해 화학물질도 소방관을 괴롭힌다. 이 같은 유독물질로 호흡기나 피부 질환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론 암 같은 중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그 인과관계를 입증해 공상 처리를 받는 것은 쉽지 않다. ▷더 심각한 건 정신적 충격이다. 화마 속에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긴장감은 무엇과도 비할 바가 아니다. 여기에 자신의 삶도 온전할 수 없다는 두려움, 인명을 구하지 못한 자책감, 동료들의 사고 등으로 인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노출될 확률이 크다. 24시간 주야 교대근무로 인한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 최근 10년간 자살한 소방관 수는 순직자의 3배에 달할 정도다. 전문 심리 상담이 필수지만 해당 인력은 소방관 600여 명당 1명꼴로 사실상 방치되는 수준이다. ▷밤새 화재 진압을 한 뒤 검게 그을린 얼굴을 닦지도 못하고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우는 소방관의 모습이 인상적인 건 그 안에 그들의 애환이 모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인력 부족과 열악한 처우 속에서도 하루 평균 100여 건에 달하는 크고 작은 화재 대응은 물론이고 응급환자 이송, 위험에 빠진 시민 구출, 벌집 제거 등 생활 속의 온갖 긴급 민원을 묵묵히 처리한다. 그래서 공무원 가운데 국민들로부터 가장 욕먹지 않는 직군으로 꼽힌다. 은퇴 후라도 더 오래 안락하게 살았으면 좋겠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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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서정보]6년 전 그때 방송법을 바꿨더라면…

    “감사원과 방송통신위원회는 임기가 보장된 (KBS) 사장과 이사들의 임기 전 퇴출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범법자로 규정하는 법치의 농단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중략) 해임 사유에 대해 소명할 시간을 충분히 달라는 ○○○ 사장의 요구와 소수 이사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장 해임 제청안을 전격 의결했습니다.” 요즘 KBS MBC 사장 교체 상황을 보여주는 내용 같지만 실제는 2018년 1월 이인호 KBS 이사장이 사퇴하면서 발표한 성명서의 일부다. ○○○ 사장은 고대영 사장. 당시 해임 제청 의결에 나섰던 더불어민주당 추천 이사 중 하나는 권태선 현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이다. 권 이사장은 5년 후 부메랑처럼 방통위로부터 해임 처분 사전 통지서를 받았다. 당시의 사장 교체는 먼저 방통위원 교체→감사 등을 통한 KBS와 MBC 방문진 야권 이사 해임→여권 추천 이사로 교체→사장 해임 제청→대통령 재가→새 사장 임명 제청→대통령 재가 순으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정권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이사들은 스스로 물러났다. 끝까지 버틴 강규형 당시 KBS 이사의 경우엔 해임 단골 사유인 법인카드 문제로 해임됐다가 3년 8개월간의 소송 끝에 승소했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이사 교체와 사장 해임을 진행했다. 다만 KBS는 김의철 전 사장 해임까진 나아갔으나 여권 이사들의 자중지란으로 새 사장 임명이 무기한 연기되고, MBC는 권 이사장의 해임 무효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져 당분간 손을 쓸 수 없는 처지인 것만이 다를 뿐이다. 공영방송의 거버넌스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언론노조의 존재도 한몫한다. KBS 보도를 책임지는 통합뉴스룸국장은 최근 4명 중 3명이 언론노조 위원장 출신이다. MBC는 언론노조 MBC위원장들이 번갈아 사장을 맡았다. 언론노조는 최근의 이사, 사장 해임과 관련해 ‘방송의 독립 침해’라고 주장하지만 5년 전에 그들이 이사, 사장 해임에 적극 나섰다. 그들은 적폐 청산을 명목으로 이사들의 사무실, 강의실을 찾아가 압박했다. 그들이 지금에서야 방송 독립을 얘기하는 것은 5년 전의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다. 방송의 독립은 노조가 중간에 끼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에선 허구와도 같다. 그래서 공영방송의 이사와 사장 임명 체계에 개혁이 필요하단 얘기는 오래전부터 나왔다. 하지만 야당일 때는 주장하다가 여당이 되면 나 몰라라 했다. 여야가 유일하게 동의했던 방송법, 방송문화진흥법 개정안 등은 2016년 민주당이 마련한 것이었다. 여야 추천 공영방송 이사의 비율을 현재 7 대 4(KBS), 6 대 3(MBC)에서 7 대 6으로 바꾸고, 사장 임명 제청 시 재적이사 3분의 2가 찬성하도록 한 것이다. 야당의 동의를 얻은 사장을 임명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2017년 8월 업무보고를 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최선은 물론 차선도 아닌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사람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뽑는 것이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후 법안들은 논의 없이 흐지부지됐고 20대 국회가 끝나면서 함께 폐기됐다. 당시 법안들이 통과됐다면 지금과 같은 교체 파동은 없었을 것이다. 공영방송은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완화하는 공론장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더욱 증폭시키고 스스로 갈등의 생산자가 되고 있다. 정권은 공영방송을 자기편으로 만들려 하고, 이미 특정 정치세력에 기울어진 노조가 있기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홍역을 치를 수밖에 없다. 공영방송의 필수 요소인 불편부당함을 ‘기계적 중립’이란 이상한 용어로 바꿔 배척하는 한, 방송의 독립에 정권과 노조로부터의 독립을 아우르지 않는 한 현재의 공영방송은 ‘갈등 조장자’일 뿐이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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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일상화한 매크로 조작, 안 막나 못 막나

    온라인에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유명 공연의 티켓을 유료로 대리 구매해준다는 글을 흔히 볼 수 있다. 올 6월 미국 팝스타 브루노 마스의 방한 공연 때가 대표적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구매 홈페이지에 접속하기도 어려울 정도인데 이들은 어떻게 표를 구한다는 것일까. 대개 겉으로 내세우진 않지만 매크로(자동 반복) 프로그램을 돌렸을 것으로 본다. 실제 한 30대 남성은 매크로로 7개월간 공연 티켓 1200여 장을 구매한 혐의로 지난달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단순·반복의 입력 작업을 대신하기 위해 만든 매크로는 본래 목적과 달리 엉뚱한 곳에 사용돼 피해를 주는 일이 적지 않다. 각종 예매는 물론 수강 신청, 쇼핑몰 마케팅 등 단순·반복 입력을 남들보다 빨리, 많이 해야 하는 곳이면 두루 쓰인다. 매크로가 범람하는 것은 구해서 쓰기가 쉽기 때문이다. 관련 프로그램을 구해 실행시키는 데 5분 정도면 충분하다. ▷1일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의 한국과 중국 축구 8강전 당시 포털 ‘다음’이 진행한 ‘클릭 응원’ 역시 매크로를 통해 3분의 2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 응원 클릭이 전체의 93%인 약 3000만 건에 달했는데 그중 네덜란드와 일본 IP를 통해 2000만 건의 응원 클릭이 있었던 것이다. 로그인도 필요 없고 응원 횟수에도 제한이 없어 매크로를 통해 쉽게 클릭 수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예매나 응원 클릭 등을 위한 매크로는 프로그램 면에선 비교적 단순한 축에 속한다. 위험한 건 전문적이고 고도화된 매크로를 이용해 순위나 댓글 조작을 시도하는 것이다. 특정 키워드가 자동 반복되도록 해 네이버의 검색 순위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광고주들로부터 200여억 원을 받은 일당이 최근 적발된 적이 있다. 또 매크로와 인공지능(AI)을 결합해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기사에 수백 건의 댓글을 달아주겠다는 불법 업체들도 등장했다. 내년 총선에서 상대 후보를 깎아내리거나 자신을 부각시키는 댓글 조작이 가능할 수 있단 얘기다. ▷업계 전문가들은 매크로의 경우 컴퓨터 바이러스나 해킹처럼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방어하기 힘들다고 한다. 로그인 요청, 복수 응답 제한, 복수 IP 차단 등 조치를 취해도 이를 무력화하는 매크로가 나온다는 것이다. 처벌도 미흡하다. 매크로 불법 사용은 큰 틀에서 업무방해로 처벌할 수 있지만 사례는 극소수다. 공연계에선 법 개정으로 매크로를 통한 암표 처벌이 가능해졌는데 내년 3월에나 시행된다. 여야가 ‘클릭 응원’ 사태를 놓고 국기문란이니 침소봉대니 하는 정치적 공방을 벌일 일이 아니다. 여야가 번갈아 피해자가 된 드루킹 사태에서 보듯 누구나 매크로의 덫에 걸릴 수 있다. 이참에 매크로를 차단할 사회적 보안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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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약 중독은 다리 부러진 것과 같아” [수요논점]

    《최근 경찰관 추락사를 불러온 ‘용산 집단 마약 파티’에 모인 사람이 25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의사, 대기업 직원, 헬스 트레이너 등 다양한 직업군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밤새 마약 파티를 연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 마약이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알 수 있다.인구 10만 명당 마약류 사범의 수가 ‘마약지수’다. 이 지수가 20이 넘으면 마약 통제가 어려운 사회로 꼽는다. 우리 인구 대비 마약지수 20은 1만 명이다. 이 수치는 2015년 넘었다. 지난해엔 1만8000여 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 올해는 상반기에만 1만 명을 웃돌아 2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통 상습 투약자를 검거된 사범의 20∼30배로 추정하는 공식에 따르면 이미 경북 포항시 인구 규모인 50만 명 안팎이 상습 투약자인 셈이다.》● 마약, 의지만으론 극복 안 돼마약은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온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히로뽕의 경우 뇌에서 엔도르핀, 도파민을 다량 분출시켜 절정의 쾌락을 맛보게 한다. 성관계 시 나오는 양보다 최소 10배 이상 많이 나온다고 한다. 이를 뇌가 기억한다. 그러면 평범한 일상의 즐거움은 더 이상 즐겁지 않다. 그 맛을 다시 보기 위해선 히로뽕에 손대야 한다. 하지만 엔도르핀 등의 생산량은 한계가 있어 갈수록 쾌락의 지속 시간이 짧아지고 투약량은 늘어난다. 본인의 의지를 넘어서 몸의 반응을 억제할 수 없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이 중독 과정에서 뇌는 큰 손상을 입는다. 다리가 부러진 것과 같아서 단순 의지만으로 약을 끊을 수 없다.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마약 청정국의 지위를 다시 찾자며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마약의 경우 검거와 처벌만으론 확산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과거 사례에서도 입증된다. 1990년 범죄와의 전쟁, 2002년 월드컵을 앞둔 특별단속 등으로 마약 사범을 소탕했으나 2∼3년 뒤 원상 복귀됐다. 최근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라는 책을 쓴 양성관 의정부백병원 가정의학과장은 “마약 사범 중 판매 유통범은 강력하게 처벌하되 투약범은 치료를 위주로 하는 것이 마약 방지에 더 효과적”이라고 했다. 보통 초범은 집행유예가 나오는데 이때 방치되면 재범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약 재범률은 보통 40% 정도로 범죄 중에서 가장 높다. 올 상반기에는 51%까지 치솟았다. 특히 마약 사범끼리 수감된 감방에서 새로운 마약 제조법과 유통법 등을 배워 출소한 뒤 더 중한 마약 사범이 되는 경우도 있는 만큼 치료 위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뇌 손상 심해 마약 치료 특히 어려워처벌보단 치료가 더 필요하지만 마약 치료는 중독이나 정신질환 치료 중 가장 어렵다. 의학계에선 조현병, 알코올의존증, 성격장애, 마약 중독 순으로 치료가 어렵다고 한다. 뇌의 손상이 여타 중독이나 질환보다 심해 공격성과 폭력성이 매우 강해지기 때문이다. 마약 중독자의 치료는 해독과 재활의 두 단계로 나눈다. 우선 병원에서 혈중 마약 농도를 줄이기 위해 다량의 수액을 놓고 피해망상, 환각 등의 흥분 상태를 가라앉힐 신경제를 처방한다. 이런 입원 치료를 1∼3주 받으면 중독에서 비롯된 증상이 드라마틱하게 사라진다. 다음으론 가정이나 지역사회로 돌아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정기적 약물 검사와 상담을 통해 약을 끊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해독부터 어렵다. 전국 21개 병원이 ‘마약류 중독자 치료병원’으로 지정돼 있고, 치료비 역시 국가와 지자체가 최대 1년간 내준다. 시스템은 잘 갖춰진 셈이다. 하지만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는다. 치료 지원 예산은 올해 정부와 지자체 합쳐 8억2000만 원에 불과하다. 정부 예산 4억1000만 원은 상반기에 90% 이상 집행됐다. 지자체는 예산 부족으로 아예 병원에 돈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 보니 병원은 계속 적자가 나는 치료를 할 수 없게 된다. 현재 21곳 중 인천참사랑병원과 국립부곡병원을 빼고는 사실상 치료를 하지 않는다. 법원의 치료감호 역시 지난해 18명밖에 안 될 정도로 유명무실하다. 지난해 마약류 사범 수와 비교하면 대부분 방치된 것이다. 두 번째 재활 단계는 더 어렵다. 중독자의 상당수는 가정과 직장에서 외면당해 함께할 사람도 없고 돈도 없다. 이런 상황에 방치되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마약에 다시 손을 대거나 돈을 벌기 위해 마약 판매상으로 나서거나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공동체 생활을 통해 단약 의지 및 일상 회복을 돕는 ‘다르크’가 80여 곳 운영돼 연 2000여 명이 거쳐 간다. 하지만 국내에선 혐오 시설로 꼽혀 마약퇴치운동본부조차 제대로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성교육 하듯 마약 교육 중요“마약 중독 환자인 40대 남성이 제 앞에서 펑펑 울면서 ‘마약이 나쁘다고만 들었지, 지옥 같은 고통이 뒤따른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약을 안 했을 겁니다’라고 말하더라고요.” 마약 치료 전문 병원인 인천참사랑병원 천영훈 원장이 치료만큼 사전 예방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언급할 때 드는 사례다. 일각에선 마약 교육을 하면 오히려 마약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하지만 마약 교육은 과거 터부시됐다가 이젠 당연해진 성교육과 같이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릴수록 재범 위험이 높고 뇌 손상도 심한 만큼 10, 20대에 대한 예방 교육은 더 절실하다. 촉법소년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마약을 구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현재 학생들의 5%만이 마약 교육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가 학생을 비롯해 연간 205만 명에게 교육을 할 계획이지만 교재나 가르칠 인력 등이 확보되지 않아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의료용 마약 과다 처방 규제 시급최근 문제가 되는 의료용 마약의 과다·중복 처방에 대한 감시와 규제도 시급하다. 의료용 마약은 진통제, 수면제, 신경안정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용 약, 다이어트 약 등으로 의사 처방 아래서만 쓸 수 있다. 하지만 이 약들을 오·남용할 경우 쉽게 중독에 빠진다. 최근 운전하다 인도로 돌진해 20대 여성을 뇌사 상태로 빠뜨린 이른바 ‘롤스로이스 남’ 역시 여러 종류의 의료용 마약 성분이 몸에서 검출됐다. 대구의 한 다이어트 전문 병원은 지난해 환자 3만1000명에게 2216만 개 마약류를 처방했다. 1인당 평균 700개가량의 수치다. 또 30대 남성은 한 병원에서 245차례에 걸쳐 18만2000개의 마약류를 처방받았다. 한 차례당 700개의 약을 받은 셈이다. 의사의 셀프 마약류 처방 역시 심각하다. 지난해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인 옥시코돈을 16만 개나 본인에게 처방한 의사가 적발됐으나 팔거나 양도하지 않고 직접 복용했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에 그쳤다. 의료용 마약의 과다 처방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마약류통합관리시스템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탤런트 유아인도 프로포폴을 과다 처방받은 이력 때문에 적발됐다. 이 시스템을 통해 정기적으로 의료용 마약 처방 실태를 확인해 과다·중복 처방을 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통합 컨트롤타워도 필요정부는 최근 마약 관련 내년 범정부 예산을 올해 대비 2.5배 올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시급한 중독자 치료비 지원은 동결돼 엇박자가 났다. 마약과의 전쟁은 공급을 줄이는 강력한 단속과 처벌, 수요를 줄이는 치료와 재활, 마약을 손대지 않게 하는 예방 등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 국무총리실이 관련 부처를 모아 마약대책협의회를 운영하지만 부처 간의 미시적 조정에 그칠 뿐이다.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치르겠다면 마약류 관리를 통합할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또 처벌 중심의 현행법에 마약 중독의 치료 재활 예산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마약과의 전쟁은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인데 지금 같은 일회성 예산 증액으론 부족하다. 이를 바탕으로 장기 로드맵을 설정해 전담 병원 인프라 구축, 마약 중독 전담 의사와 상담사 등 재활 관련 인력의 양성을 긴 호흡을 갖고 추진해야 한다. 마약 사범에 대한 국민 여론은 엄벌주의가 대다수다. 치료에 대해서도 왜 세금을 ‘약쟁이’들에게 쓰느냐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마약 중독자를 범죄자보다는 환자로 여겨 치료 대상으로 포용해야 더 큰 범죄를 막을 수 있게 된다. 정부가 당장 성과를 내려는 조급증을 버리고 이들이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차근차근 마련해야 한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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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빌보드 1위 美 가수 “내 노래 정치에 이용하지 마라”

    ‘나는 온종일 일하며 영혼을 팔아요, 형편없는 돈을 벌려고 잔업을 하죠.’ 일용직 노동자 출신의 백인 컨트리가수 올리버 앤서니가 부른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Rich Men North Of Richmond)’은 이렇게 시작한다. 노동 계급의 애환을 담은 이 노래 영상은 유튜브 공개 2주 만에 조회수 4400만 건이 넘었다. 최신 빌보드 차트에선 테일러 스위프트 등 슈퍼스타를 제치고 핫100 1위에 올랐다. ▷이 노래의 인기가 급상승한 건 미국 공화당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사 덕분이다. ‘네 돈은 끝없이 세금으로 부과돼’, ‘뚱뚱한 사람들이 착취하는 복지’ 등은 복지를 핑계 삼아 세금을 너무 많이 떼어가는 민주당 비판이라는 것이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잊힌 미국인들의 찬가’ 등의 칭송을 쏟아냈다. 노래가 거론한 이슈들은 모두 공화당이 더 잘할 수 있다는 자화자찬까지 나왔다. 최근 공화당의 대선 경선 토론회는 이 노래 영상을 먼저 본 뒤 진행될 정도였다. ▷공화당을 위한 노래라는 해석에다 영웅화 움직임까지 보이자 앤서니가 직접 반박하는 영상을 26일 올렸다. 그는 “내 노래가 정치적 무기화(weaponized)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는 “이 노래는 조 바이든과 관련 없고, 오히려 기업들에 종속된 시스템 전체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파는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하고, 좌파는 자신을 불신하게 만들려는 움직임을 그만두라고 경고했다. 각 진영이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 쓴소리를 던진 것이다. ▷정치가 엔터테인먼트계의 인기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번처럼 노래를 정치적 정체성을 알리는 도구로 쓰거나 인기 연예인들의 지지 선언을 통해 이미지 개선을 꾀한다. 하지만 이미지만 빼먹으려는 얄팍한 계산이 오히려 역풍을 맞는 경우도 많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닐 영의 노래 ‘로킹 인 더 프리월드’를 유세송으로 썼다가 동의가 없었다며 고소당했다.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는 2018년 미 테네시주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공개 지지했으나 투표 결과 상대 후보에게 예상보다 더 많은 표 차로 패배했다. ▷미국 매체 더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연예인들의 정치적 지지 선언이 내 투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응답이 65%나 됐다. 더욱이 4명 중 1명은 연예인 지지 후보를 더 꺼리게 됐다고 한다. 구체적 어젠다를 제대로 모르는 연예인들의 지지는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19대, 20대 대선 모두 연예인 지지 숫자가 줄었다. 지지자도 ‘그 나물에 그 밥’ 수준이어서 주목도도 많이 떨어졌다. 일시적 이미지 조작이나 아전인수격 해석으로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려워졌다. 정치가 승부를 봐야 할 지점은 결국 스스로의 역량과 매력이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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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블루스폿’의 기사… 신진서, 14년 만에 응씨배 우승

    프로바둑 해설자들이 자주 쓰는 표현 중 하나가 ‘블루스폿(blue spot)’이다. 보통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아 해설하는데 인공지능이 다음 ‘최선의 수’를 파란 점으로 표시하기 때문이다. 블루스폿에는 이길 확률도 %로 표기되기 때문에 바둑의 유불리를 금방 알 수 있다. 블루스폿과 일치율이 가장 높은 기사로는 신진서 9단이 꼽힌다. 그의 별명이 ‘신공지능’인 이유다. ▷신 9단이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9회 응씨배 결승 2국에서 중국의 셰커 9단에게 승리하며 종합전적 2-0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한국 기사의 우승은 14년 만이다. 원래 2021년 결승전이 열렸어야 했지만 결승만큼은 대면 대국으로 하고 싶다는 주최 측의 바람 때문에 2년여 늦어졌다. 신 9단의 응씨배 우승은 개인적으론 명실상부 세계 1인자의 위치를 굳혔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 바둑계로서도 의미가 깊다. 4년마다 열려 ‘바둑 올림픽’으로 불리는 응씨배는 한국 바둑계의 발전에 ‘특이점’이 된 사건이었다. ▷응씨배는 대만 기업가 잉창치(應昌期) 씨가 1988년 40만 달러의 파격적 우승 상금을 걸고 출범시킨 세계대회. 당시 전통의 강호 일본과 신흥 강자 중국 사이에서 한국은 들러리 신세였다. 초청기사 16명 중 한국 기사는 조훈현 9단 달랑 1명이었다. 하지만 조 9단은 예상을 뒤엎고 결승에 올라 중국의 녜웨이핑 9단에 3-2로 대역전승을 거뒀다. 조 9단이 귀국할 땐 김포공항에서 서울 종로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4회 대회까지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9단이 잇따라 우승했다. ▷한국은 응씨배 7, 8회 대회에선 우승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 바둑계는 중국에 밀려 침체에 빠져 있었다. 이번 우승은 한국 바둑이 신 9단을 필두로 다시 세계 바둑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게 됐다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미를 잘 아는 신 9단은 7월 이후 모든 일정과 생체리듬을 응씨배에 맞췄다. 인터뷰도 사양했다. 9월 열릴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종목의 국가대표인 그는 진천선수촌 합숙 기간 동안 다른 대표 선수들과 심도 깊게 공동연구를 했다. 체력 보강을 위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각각 3시간인 대국 시간에 맞춰 기상과 식사 시간도 조절했다. ‘이 악물고 준비한’ 결과는 완승이었다. ▷인공지능 바둑이 등장한 뒤 인간 바둑의 인기가 시들해진 측면이 있다. 최고수가 AI인데 인간 바둑을 굳이 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100m 달리기도 자동차가 더 빠른데 인간이 0.1초를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바둑도 마찬가지다. 신 9단은 “기사가 정상권에 오르면 뚜렷한 목표가 사라질 수 있는데, 인공지능으로 연구하면서 끝없이 발전하려고 한다”고 했다. 신 9단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것이 인간 바둑을 보게 하는 묘미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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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잇단 처벌 강화, ‘포퓰리즘’ 아닌 법의 공백 없애는 수단 돼야 [수요논점]

    《최근 범죄가 흉포화하고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사례가 많아지면서 형벌의 강도도 함께 높이는 ‘엄벌주의’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법무부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 촉법소년 연령 하향, 살인 예고 온라인 글 등을 처벌하는 ‘공중 위협죄’ 신설 등을 추진하고 있다. 또 음주운전, 보복범죄 등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나 첨단기술 유출, 주가 조작 등 국가와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범죄에 대해서도 형량을 높여 가는 추세다. 여기에 최고 형량이 징역 10년이었던 영아살해죄처럼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진 법 규정들 역시 바꿀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최근 신림동, 서현역의 ‘묻지 마 칼부림’의 영향으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 추진이 탄력을 받고 있다. 흉악범을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자는 발상이다. 현행 우리 형법에서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형벌은 사형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다. 사형 선고는 2016년 GOP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이 마지막이었다. 헌법재판소의 사형제 위헌법률 심사는 1996년, 2010년 합헌으로 나왔다. 2019년 또다시 위헌심판이 제기됐지만 지난해 7월 공개 변론을 연 뒤 여전히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사형 다음으로 중한 형벌인 무기징역의 경우에도 수감 20년이 지나면 가석방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 매년 10명 이상, 많게는 40명까지 무기수가 가석방된다. 최고 50년까지 늘어난 유기징역형보다 더 가벼운 형량이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사형과 무기징역 모두 영원한 사회와의 격리라는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 셈이다. 이 때문에 유명무실한 사형과 무기징역 대신 미국 등 일부 국가가 운영 중인 ‘가석방 없는 종신형’의 도입이 제기된 것이다. 특히 지난달 대법원은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건에 대해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택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의 효과를 보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이 문제는 입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을 14일 입법 예고했고, 국회에서도 조정훈 의원 등이 관련 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다. 국민 여론도 찬성이 많다. 한국갤럽이 8∼10일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1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87%가 도입에 찬성했다. 미국은 알래스카를 제외한 모든 주가 이 제도를 두고 있고, 2021년 기준 5만5900여 명이 수감 중이다. 미국의 한 주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의 대상을 늘린 뒤 폭력 범죄가 30%까지 줄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많은 세금이 든다는 것이 단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감자 1인에게 드는 평균 비용은 연 2500만 원 정도. 가석방 없이 50년간 수형 생활을 한다고 하면 12억 원이 넘는 돈이 든다. 고령이 될수록 치매 관절염 같은 의료비가 추가된다. 또 사형과 마찬가지로 범죄 예방 효과는 실증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다. 인권 침해의 논란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종신형은 응보적 관점에서 사회 복귀를 절대 못 하게 하는 것인데 교화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비록 범죄자라도 인간성을 파괴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촉법소년 연령의 하향지난해 강원 원주시의 한 편의점에서 한 중학생이 술을 팔지 않는다는 이유로 점주를 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리면서 ‘나는 촉법소년이야’라고 큰소리쳤다.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임을 방패 삼아 무법자 행세를 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촉법소년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됐다. 법무부는 지난해 연령을 현행 14세 미만에서 13세 미만으로 낮추는 법안을 발의했다. 최근 살인 예고 글을 온라인에 올렸다가 검거된 사람 중 절반 이상이 미성년자이고 그중에 촉법소년도 끼여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연령 하향 논의가 다시 불붙는 양상이다. 흔히 촉법소년으로 불리는 10∼13세는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 대신 소년법에 따른 보호처분을 받는다. 살인 같은 강력 범죄를 저질러도 보호처분에서 가장 강력한 처벌은 소년원에서 2년을 지내는 것이다. 촉법소년의 범죄 현황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최근 5년 동안 강력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이 3만5000여 명에 달한다. 재범률도 성인 보호관찰자의 3배가 된다. 어리다고 봐주기에는 성인 뺨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촉법소년들은 형법이 제정된 1950년대 초와 비교할 때 신체나 정신적 발달 면에서 판이하게 다르다. 현재 13세 남자아이의 평균 키는 165cm로 1960년대 성인과 비슷하다. 여기에 13세와 14세의 범죄 발생 건수에 차이가 없고 특징도 다르지 않다. 2019년 여론조사에서도 촉법소년에 대해 ‘현재보다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와 ‘성인과 같이 처벌해야 한다’는 응답을 합치면 83.6%나 됐다. 외국의 경우 미국은 주마다 다르지만 플로리다주의 경우 7세부터 형사처벌한다. 영국은 10세, 독일 일본 오스트리아 등은 14세다. 하지만 연령을 한 살 낮춘다고 해서 범죄가 줄어들거나 현재 추세가 꺾인다는 보장이 없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청소년 범죄는 가정환경 등에 많이 좌우되고 반성할 여지도 큰데 너무 이른 나이에 범죄자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대법원도 올 4월 법무부 법안에 대해 “사회적 지원 없이 연령 하향으론 근본적 해결이 이뤄질 수 없다”며 반대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연령 하향은 현실을 감안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심각한 수준의 강력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에 대해선 형사처벌의 길을 열어둘 필요가 있지만 그 숫자는 얼마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엄벌주의 효과 논란형량 강화는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미국 유럽에서도 엄벌 경향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미국의 주들에서 도입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특히 9·11테러 같이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를 겪고 난 뒤 범죄자 인권보다 다중의 안전과 범죄 억제가 보다 중시되는 경향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엄벌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미국의 경우 전 세계 인구의 4%를 차지하는데 전 세계 수감자의 24%를 보유하고 있다. 사형제가 있는 주의 평균 살인율은 사형제가 없는 주보다 높다. 엄벌만으로는 강력범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교화나 개선 등의 가능성을 없앤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는 셈이다. 특히 예상을 뛰어넘는 범죄가 대중적 공분을 일으킬 때마다 신속하게 법률이 제정되거나 양형기준이 상향된다. 정치인에게도 손쉽게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수단이어서 ‘형벌 포퓰리즘’이 발생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근대 사법의 역사는 국가의 자의적 형벌권 남용을 막기 위해 피의자의 권리 보호와 부당한 대우 방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 같은 사법제도가 틀이 잡힌 상황에선 잔혹한 범죄로 인한 피해자의 고통과 처지를 이해하는 관점 역시 중요해지고 있다. 범죄로 인해 소중한 존재를 잃거나 일상생활이 파괴된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겐 그들의 고통보다 지나치게 낮은 형량은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다. 영국에선 2019년 17세 소녀 엘리가 동급생에게 13차례나 칼로 찔려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소년법에 따라 가해자는 1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는 데 그쳤다. 이에 분노한 부모는 미성년자 살인범의 형량을 높이자는 캠페인에 나섰다. 2년 후 희생자의 이름을 딴 ‘엘리의 법’이 제정돼 17∼18세의 살인범에게 최고 27년형이 가능하도록 바뀌었다. 국내에서도 ‘민식이법’ ‘윤창호법’ 등 피해자 이름을 딴 법이 늘어나는 것은 피해에 상응하는 처벌이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는 수단의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량을 높이면 범죄가 줄어든다’는 단순한 엄벌 논리보단 복잡하고 예기치 못한 현대사회의 범죄에 대한 법의 공백이 없도록 막는 것이 중요하다. 피의자의 권리를 예전처럼 보장하면서도 피해자의 고통을 적극 대변하는 양형기준과 형사·사법 정책의 개발이 시급한 상황이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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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영상회의 앱으로 대박 난 ‘줌’도 “재택 대신 사무실 출근”

    코로나19 재택근무로 가장 득을 본 회사는 영상회의 앱을 만든 줌이다. 1900만 명이던 하루 사용자는 코로나가 터진 뒤 3억 명으로 늘었다. 영상회의를 많이 해 생긴 스트레스를 ‘줌 피로(Zoom fatigue)’라고 부를 정도였다. 줌은 당연히 폭발적 성장의 기반이 된 재택근무를 옹호했다. 창업자인 에릭 위안 최고경영자(CEO)는 2021년 1월 사내 온라인 회의에서 “오늘날 근무는 더 이상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며 “직원들에게 근무지에 대한 유연성과 선택권을 부여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선언했다. ▷그랬던 줌이 최근 ‘사무실에서 50마일(약 80km) 이내의 직원들은 최소 주 2회 출근하라’고 지시했다. “동료들과 만나 소통하는 근무가 효율성을 위해 좋다”는 이유를 댔다. 빅테크인 구글 아마존 메타도 최소 주 3회 출근을 강제하고 있다. 골드만삭스 JP모건체이스 같은 은행권이나 백악관 등 정부기관도 마찬가지다. 줌마저 돌아서면서 코로나19로 만개했던 재택근무의 퇴조가 뚜렷해졌다. ▷경영진이 재택근무에 부정적인 것은 생산성과 효율성이 낮아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동료와 소통이 부족해진다, 업무나 회사 문화를 배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동기 부여가 어렵다 등 다양한 이유가 거론된다. 숫자로도 입증된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연구에 따르면 재택근무자의 생산성이 출근자보다 18% 낮았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5월 CNBC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서비스를 받을 때 담당 직원이 직접 나오길 원하면서 정작 자신은 재택을 원한다는 건 위선”이라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회사의 출근 지시에 대해 직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JP모건 운영위원회는 4월 ‘함께하는 것의 중요성’이란 글을 사내통신망에 올렸다. 임원은 주 5회, 직원은 주 3회 출근 안 하면 평가 시 불이익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직원들은 ‘(회사가) 귀가 먹었나’ 등의 반발 댓글을 달며 제이미 다이먼 CEO를 비판했다. 댓글 창은 하루 만에 폐쇄됐다. 회사의 출근 방침에 맞서 아마존 직원 수백 명은 한 시간여 근무를 중단하는 시위를 벌였고, 애플과 디즈니 직원 수천 명은 재검토를 요청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재택근무를 둘러싼 노사 갈등은 ‘권력 투쟁’에 가까울 정도다. 2년여간 시간과 신체에 대해 전례 없는 자유를 누린 직원들은 그 달콤함을 포기하기 어렵다. 반면 성과 저하를 체감한 회사 측은 재택, 출근을 섞은 근무라도 시키려고 한다. 코로나 시절 ‘대퇴사(Great Resignation)’ 현상을 막기 위해서 재택근무의 당근을 내밀었던 기업들이 이젠 ‘출근에 반발해 퇴사해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재택근무 논쟁은 우리에게 직장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근로계약으로 업무만 수행하는 곳인지, 업무와 함께 사람들끼리 상호작용까지 하는 곳인지 말이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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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서정보]“옳음과 친절함 중 골라야 한다면 친절함”

    지난해 여름 방영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에 대한 시각을 바꿔 놓았다. 천재적 발상으로 사건을 통쾌하게 해결하는 우영우를 보며 ‘자폐 장애인은 이상하다’는 편견을 버리게 됐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드라마다 보니 실제 그런 변호사가 나오기 힘든, 녹록지 않은 현실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불과 1년 뒤 웹툰 작가 주호민 씨 고소 사건으로 분위기가 반전되는 형국이다. 지난해 9월 주 씨의 아들이 여학생 앞에서 바지를 내린 사건이 고소까지 이어진 것에 대해 여론은 주 씨가 과했다는 분위기다. 특수아동을 둔 부모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이들의 자녀들이 ‘어쩔 수 없는 미운 오리 새끼’로 낙인찍힐까 봐 두렵다. 주 씨가 2일 낸 입장문에서 교사에 대한 선처 탄원서를 내겠다면서 ‘열 살짜리 자폐 아이를 성에 매몰된 본능에 따른 행위를 하는 동물처럼 묘사’하는 것은 삼가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이사건은 서이초 교사 사건과 겹치면서 학부모들의 ‘내 새끼 우선주의’ 및 교권의 추락과 연결시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유명인에 대한 가십성 흥미까지 곁들여 있다. 물론 일반교사에 비해 반복적인 도전행동(문제행동)에 시달리는 특수교사들에 대한 보호 장치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전국특수교사노조가 최근 전국 특수교사 2975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학생들의 도전행동으로 다친 적이 있는 교사가 무려 90%에 육박한다. 문제가 터져도 4명 중 3명은 학교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 역시 시급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볼 수 있는 특수교육계의 버거운 현실은 조명되지 않고 있다. 자폐스펙트럼 학생을 비롯해 시각, 청각, 지적, 정서적 장애 등 특수교육 대상자는 11만 명. 5년 새 1만 명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특수교사 인력과 시설은 태부족이다. 특수학급당 학생 정원은 4명이다. 현장에선 2명을 보살피기도 빠듯한데 정원을 초과하는 게 예사다. 대상자 70%가 다니는 일반학교 내 도움반(특수반)과 통합반의 존재도 지방자치단체마다 들쑥날쑥하다. 원하는 곳에 가려면 이사를 가거나 장거리 통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2023학년도 신규교사 선발 과정에서 유·초등 특수교사를 500여 명 줄이고, 중고교 특수교사도 전년 대비 3분의 1로 줄인다고 해 논란이 됐다. 주씨 아들이 다닌 학급도 정원 초과였다. 법대로라면 추가 학급을 만들어야 하지만 보통은 그냥 교사에게 맡겨버린다. 해당 교사가 주위의 평가대로 보기 드물게 훌륭한 교사였다면 무거운 짐을 지고 헌신했을 것이다. 대신 그 과정에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수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교사가 장애 학생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쏟기 어렵다면 안 그래도 근심이 많은 부모들은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수교육의 현실을 잘 아는 사람들은 “둘의 상황이 이해는 간다”며 “누구나 악성 부모, 학대 교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열악함과 편견에 맞서기 위해선 교사와 부모가 같은 배를 탄 입장이다. 장애 학생을 상대하는 건 상당한 인내를 요구한다.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갈등을 이겨내려면 둘 간의 신뢰가 절대적이다. 주 씨가 발표한 입장문들에서 평소 담당 교사와의 유대 관계가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영화 ‘원더’(2017년)는 선천성 얼굴 기형으로 27번 수술받은 어기(어거스트)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헬멧을 벗고 생활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어기의 담임교사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옳음과 친절함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택하라.” 교사와 부모, 장애와 비장애 누구든 함께하는 공동체를 위해 꼭 가져야 하는 무기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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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한여름에 다시 유행하는 코로나… “아직 끝이 아닙니다”

    확진자 수를 몰라도 코로나19의 유행 정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생활하수 속 코로나바이러스 농도를 조사하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권장해 우리 정부도 올해 도입한 감염병 감시법이다. 7월 둘째 주(9∼15일) 검사에서 하수 속 바이러스 농도는 전주 대비 45% 늘었다. 실제 확진자 수도 19%가 늘며 하루 3만 명을 오갔다. 7월 18∼23일엔 6일 연속 4만 명이 넘었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코로나가 한여름에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원래 여름엔 바이러스의 활동성이 낮아진다. 그럼에도 코로나 확진자 수가 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우선 무더위와 장마가 반복되면서 에어컨을 켠 실내에서 환기를 하지 않고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점이 꼽힌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좋은 환경인 것이다. 여기에 국내 및 해외 여행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코로나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고 접촉 빈도도 늘었다. 우리나라만 유독 확진자 수가 급증한 게 아니고 집계 시스템이 느슨한 외국도 비슷한 추세일 것이라고 한다. ▷백신 효과도 떨어졌다. 지난해 하반기 맞은 백신은 6개월이 지나 효과가 대부분 사라졌다. 또 요즘 코로나 확진자의 90%는 오미크론의 하위 변이인 XBB 계열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올 1월 인도에서 시작된 XBB 계열은 전염력이 강한 편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보유 중인 개량백신(BA1, BA4/5)은 XBB 예방 효과가 많이 떨어진다. 3차 이상 접종했다면 10월부터 예정된 XBB 대응 백신을 맞는 게 낫다. ▷무엇보다 코로나19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사라진 이유가 크다. 병원 등을 제외하고 마스크 착용 의무가 사라지자 사람이 밀집한 곳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감기 기운만 있어도 코로나 검사를 받던 사람들이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의원을 찾지 않는다. 직장인들은 회사에서 병가 처리를 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아픈 티를 내지 않고 회사에 나온다. 이렇게 ‘숨겨진 환자’는 새로운 전파원이 된다. 전문가들은 감염자가 현재 발표되는 숫자보다 최소 2배 이상 많을 것으로 본다. ▷정부는 26일 코로나19 주간 위험도 평가를 27주 연속 ‘낮음’이라고 발표했다. 치명률, 중증화율 등이 평소처럼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환자 증가 추세나 숨은 환자 등을 고려할 때 방역 조치를 일부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확진자 격리를 권고에서 의무로 바꾸고, 동네 의원에서도 마스크를 쓰게 하는 것 등이다. 특히 고령자와 만성 질환자가 많은 요양시설의 관리를 강화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이번 여름 ‘코로나 고개’를 어떻게 넘을지는 국민 각자의 몫도 크다. 당장은 사람 많은 곳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길이다. 노약자는 ‘반드시’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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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시니어 직원 모시는 日 “월급, 더 오래 더 많이 드립니다”

    일본의 법정 정년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60세다. 하지만 고령화를 일찍 맞은 일본은 정년 은퇴자에게 최대 70세까지 일할 기회를 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기업들이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정년퇴직 후 재고용 등 3가지 방식으로 시니어 고용을 하도록 한 것이다. 보통 기존 임금의 절반 정도를 주는 재고용의 경우 비용도 아끼면서 경험 많은 인력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 기업의 76%가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재고용 정도로는 기업이 원하는 시니어 인력을 붙잡아두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일본 기업들이 최근 재고용 대신 정년 연장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 스미토모화학은 내년 4월부터 60세인 정년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65세까지 늘리기로 했다. 임금은 59세 말 수준으로 유지한다. 스미토모화학은 재고용을 통해 기존 임금의 40∼50%를 줘왔는데 새 방식으로는 2배 이상 높아지는 셈이다. 전기전자기업인 무라타제작소도 직원이 60∼64세 사이에서 정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임금도 59세 수준으로 유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굵직한 일본 기업들이 스스로 시니어 직원들을 ‘더 길게, 더 많이 주고’ 모시는 것은 숙련된 인력의 부족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일본 버블기인 1990년 전후로 대거 채용됐던 인력들이 60세 정년을 맞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데, 50대 이하 세대의 인력 규모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임금의 절반만 주는 재고용은 시니어 직원들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좀 더 열심히 일할 환경을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일부 일본 기업들은 은퇴를 앞둔 직원들에게 주요 직책을 맡기지 않던 ‘직책 정년제’ 등 과거의 경직된 인사 제도에서 탈피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아식스는 직원이 59세가 되면 특정 보직을 주지 않는 규정의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또 유명 우동 체인 ‘마루가메 제면’도 현장 책임자의 연령 상한을 최근 65세에서 70세까지 끌어올렸다. ▷우리나라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에다 생산가능인구가 2018년부터 줄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정년 이후 시니어 직원을 기존 일터에 붙잡아 두는 문제가 곧 사회적 이슈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그 방식이 정년 연장이 될지, 일본 기업들이 주로 채택했던 재고용이 될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생산가능인구 현황, 노동 시장과 임금 구조의 유연성 정도, 청년 일자리와의 연관성, 개별 기업들의 사정, 근로자들의 요구 등 변수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사례를 미리미리 검토할 필요가 있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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