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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넘버3’에 나오는 명장면 하나. 송강호가 부하 조폭들에게 ‘헝그리 정신’에 대해 가르치다 이렇게 얘기한다. “거 누구야, 현정화! 걔도 라면만 먹고 육상해서 금메달 3개씩이나 따버렸어.” 눈치 없는 부하는 ‘진실’을 말한다. “임춘애입니다. 형님.” 일순간 흐르는 정적. 무식이 탄로 난 송강호은 말한다. “나가 있어.” 그리고 ‘퍽, 퍽’ 소리와 함께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된다. 임춘애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금메달 3개를 딴 지 벌써 40년 가까이 지났다. 무명 선수에서 육상 3관왕(800m, 1500m, 3000m)에 오른 임춘애는 일약 ‘신데렐라’가 됐다. 하지만 송강호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여전히 ‘라면 소녀’다. 당시 그를 가르친 코치가 열악한 운동부 환경을 얘기하며 “간식으로 라면을 먹는다”고 얘기한 게 그가 라면만 먹고 금메달을 3개나 딴 것으로 곡해됐다. 이후 그는 인터뷰 때마다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했고, 코치 역시 과장됐다고 설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임춘애는 “50대 중반인데도 사람들에게 나는 여전히 ‘라면 소녀’”라며 웃었다. 임춘애는 “저는 밀가루가 입에 맞지 않아 라면을 먹지 않았다. 동료 선수들도 가끔 간식으로 라면을 먹었을 뿐”이라며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서 먹은 적은 있다”고 했다. “우유를 마시며 운동하던 친구들이 부러웠다”는 발언 역시 오해다. 사실 그는 한 번도 우유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야깃거리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우유 이야기도 진짜인 양 포장하면서 그는 ‘라면만 먹었고, 우유는 마시지 못하면서 운동했지만 성공했던’ 스토리의 주인공이 됐다. 임춘애는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우유만 마시면 바로 화장실에 가야 하는 체질이라 우유도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한 우유업체는 선수단 앞으로 5년간 무료로 우유를 보내기도 했다. 정작 선수들이 가장 많이 먹었던 건 삼계탕 같은 보양식이었다. 다만 당시 선수들의 운동 환경이 지극히 열악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에서 처음 열린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선수들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견뎌야 했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명목하에 욕설과 체벌이 용인되던 시대였다.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중학교 3학년 때 반에서 키가 가장 작았을 정도로 왜소했던 임춘애는 경기 성남 지역에서 좀 뛴다 하는 정도의 선수였다. 좋아서 운동을 했다기 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맛에 육상을 계속했다. 중간에 고무줄놀이도 하면서 즐기듯 운동을 했다. 그런데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모든 게 달라졌다. 한국에서 열리는 첫 대형 국제대회를 앞두고 “몸이 망가져도 좋으니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선수들은 말 그대로 뼈를 갈아야 했다. 그는 사실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열린 전국체전에서 3관왕을 하면서 뒤늦게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후 17세 소녀는 새벽, 오전, 오후, 야간까지 쉴 새 없이 달려야 했다. 기록이 좋아지는 만큼 몸은 망가졌다. 임춘애는 “얼마나 훈련을 많이 했던지 훈련을 끝내면 유니폼이 소금에 절인 것처럼 됐다”며 “훈련이 너무 힘들다 보니 대회에 나가는 게 너무 좋았다. 대회 때는 예선과 결선 등 딱 두 번 만 뛰면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모진 훈련을 견딘 끝에 그는 아시안게임 3관왕에 올랐다. 하지만 그때 이미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2년 뒤인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때 성화 봉송 마지막 주자로 나선 게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출전한 서울올림픽에서도 그는 아시안게임 때와 비슷한 기록을 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아시아 무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다. 예선 탈락을 하자 이번엔 “배에 기름이 껴서 제대로 못 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이화여대에 재학 중이던 그는 은퇴를 하려 했다. 운동은 너무 힘들었고,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몸 상태도 아니었다. 하지만 육상계는 그에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까지 뛸 것을 제안했다. 그는 골반뼈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운동을 계속하는 게 무리라는 진단서를 제출하고서야 겨우 은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는 “정신상태가 틀려 먹었다”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임춘애는 “제대로 된 재활도, 심리상담 같은 것도 없었을 때”라며 “진단서를 제출해 은퇴하게 된 것은 내가 포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은퇴 후 그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렇다고 운동장 밖의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었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그는 남편과 함께 생계를 꾸려야 했다. 보험회사 직원으로도 일했고, 수입차 영업사원으로도 뛰었다. 차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가 유명세 덕에 차를 몇 대 팔자 “고객을 빼앗아간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동료들 사이에서 나왔다. 이후 칼국수 가게를 차리기도 했고, 도시락 사업도 해 봤다. 하지만 사회생활 역시 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거나 방해를 받곤 했다.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 그는 고향과도 같은 육상과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한 주류 도매업 사장들이 만든 마라톤 팀을 지도했다. 임춘애는 “예전 선수 생활을 할 때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달리기를 했다”며 “동호인 팀을 가르치면서 ‘아, 재미있게 뛰는 달리기라는 것도 있구나’라는 걸 새삼 느꼈다”고 했다. 이후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육상 지도자로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과도한 운동 후유증으로 그는 지금도 몸이 좋은 편이 아니다. 조기 치료로 완치되긴 했지만 몇해 전 유방암 수술 후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 그는 “방사선 치료 막판에 세 번 정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며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정신을 차렸다. 잘 자라준 세 아이에게 부끄러우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일어섰다”고 했다. 작년에는 오른쪽 무릎 수술도 받았고, 앞서는 양쪽 눈 백내장 수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유튜브나 책을 통해 좋은 말씀들을 많이 들으면서 마음공부를 많이 했다.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작은 일에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고 했다. 마음을 편하게 먹자 거짓말처럼 그에게 다시 길이 열렸다. 몇 해 전 안산청소년재단 정책기획실장으로 임명돼 달리기 교실 등을 열었고, 작년부터는 경기도 경기도청 직장운동경기부 지원협력관을 맡고 있다. 도청 산하 10개 실업팀의 지원 및 현안 조정, 선수들과의 소통 등이 주 업무다. 그는 지난달 강원 평창에서 열린 겨울체전 현장도 찾아 선수들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최근 들어서는 다시 운동도 시작했다.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천천히 뛰거나 빨리 걷는다.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도 한다. 무릎 수술 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생애 최고 몸무게는 경신한 그는 요즘은 “천천히라도 달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를 깨닫고 있다”고 했다. “한 때 추리닝은 꼴도 보기 싫었다”는 그는 “최근 들어 운동은 정말 해야 하는 거였구나 라는 걸 새삼 느낀다. 운동을 하니 몸이 좋아지고 시간이 훌쩍 간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그는 이기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다. 최근 들어서는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요리를 배우고, 입지 않는 옷을 고쳐 입는 등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는 “결혼 후 경력이 단절돼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며 “선배 체육인으로서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잘 살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임춘애(56)는 한국 육상의 ‘신데렐라’였다. 고교생이던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육상 3관왕(800m, 1500m, 3000m)에 올랐다. 그로부터 벌써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에겐 지워지지 않는 오해가 있다. 바로 ‘라면 소녀’다. 당시 그의 코치가 열악한 운동부 환경을 얘기하며 “간식으로 라면을 먹는다”고 얘기한 게 라면만 먹고 금메달을 딴 것으로 곡해됐다. 이후 그는 인터뷰 때마다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했고, 코치 역시 과장됐다고 설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임춘애는 “50대 중반인데도 사람들에게 나는 여전히 ‘라면 소녀’”라며 “저는 밀가루가 입에 맞지 않아 라면을 먹지 않았다. 그 대신 삼계탕 같은 걸 엄청 먹었다”며 웃었다. 다만 운동 환경이 지극히 열악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에서 처음 열린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선수들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견뎌야 했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명목하에 욕설과 체벌이 용인되던 시대였다. 17세 소녀는 새벽, 오전, 오후, 야간까지 쉴 새 없이 달려야 했다. 기록이 좋아지는 만큼 몸은 망가졌다. 임춘애는 “얼마나 훈련을 많이 했던지 훈련을 끝내면 유니폼이 소금에 저린 것처럼 됐다”고 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도 아시안게임 때와 비슷한 기록을 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예선 탈락을 하자 “배에 기름이 껴서 제대로 못 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지만 육상계는 그에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까지 뛸 것을 제안했다. 그는 골반뼈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는 진단서를 제출하고서야 겨우 은퇴할 수 있었다. 운동화를 벗었지만 이후 삶도 순탄하진 않았다. 결혼 후 세 아이의 엄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보험회사 직원, 수입차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칼국수 가게를 차리기도 했고, 도시락 사업도 해 봤다. 하지만 사회생활 역시 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거나 방해를 받곤 했다.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과도한 운동 후유증은 이후에 나타났다. 완치되긴 했지만 몇 해 전 유방암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았고, 작년에 오른쪽 무릎 수술도 받았다. 그가 다시 돌아온 곳은 체육계였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육상 지도자로 일하던 그는 작년부터는 경기도청 직장운동경기부 지원협력관을 맡고 있다. 도청 산하 10개 실업팀의 지원 및 현안 조정, 선수들과의 소통 등이 주 업무다. 그는 지난달 강원 평창에서 열린 겨울체전 현장도 찾아 선수들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최근 그는 쳐다보기도 싫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천천히 뛰거나 빨리 걷는다.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도 한다. “한때 추리닝은 꼴도 보기 싫었다”는 그는 “요즘 들어 ‘운동은 정말 해야 하는 거였구나’라는 걸 새삼 느낀다. 운동을 하니 몸이 좋아지고 시간이 훌쩍 간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그는 앞만 보며 달려왔다. 최근 들어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그는 요리를 배우고, 옷을 고쳐 입는 등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일을 시작했다. 그는 “결혼 후 경력이 단절돼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며 “선배 체육인으로서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잘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오혜리 한국체육대 교수(37)는 늦게 핀 꽃이었다.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20대 초중반까지 좀처럼 빛을 발하지 못했다. 모든 아마추어 선수들의 꿈이라는 올림픽 무대도 20대 후반이 돼서야 처음 밟았다. 스무 살이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는 황경선이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었다. 2년 선배인 황경선은 2004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을 시작으로 2008년 베이징과 2012년 런던에서는 2회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건 당대의 최강자였다. 오혜리는 2012년 런던 대회 때는 국가대표 선발전 직전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바람에 시작도 하기 전에 꿈을 접어야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은 그에게는 삼세 번째 도전이었다. 그리고 여자 67kg급으로 출전한 그 대회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28세로 역대 한국 태권도 선수 최고령 금메달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금메달을 따고도 그는 울지 않았다. 오혜리는 “준비했던 걸 다 쏟아부은 대회였다. 결승까지 4경기를 했는데 준비한 대로 잘 뛰었다. 세리머니도 마음먹은 대로 했다”며 “워낙 준비한 게 많다 보니 이전에 각종 국제대회를 뛸 때보다 훨씬 편안했다. 결승을 마치고 나서도 ‘한 판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며 웃었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파리올림픽에 코치로 나가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는 지난해 파리올림픽 태권도 남자 80kg에 출전한 서건우(22)의 전담 코치였다. 대회 내내 그는 태권도 경기장의 ‘신스틸러’였다. 16강전에서 심판의 오심으로 서건우가 패배 위기에 몰리자 그는 경기장 위로 뛰어 올라가 판정 번복을 이끌어냈다. 서건우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을 때는 머리를 쓰다듬었고, 4강에서 패해 메달 획득에 실패했을 때는 눈물을 흘렸다. 때론 호랑이 같고, 때론 엄마 같은 모습에 많은 이들을 그를 ‘걸크러시’라고 불렀다. 서건우가 3, 4위전에 패했을 때 그는 “함께 운동했던 게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울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함과 후회가 가득했다”라고 했다. 오혜리는 자신을 ‘독사 코치’라고 했다. 한국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단은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새벽, 오전, 오후에 이어 야간 등 하루 네 차례 훈련을 했다. 오혜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선수들을 다그쳤다. 다른 중량급 선수들에 비해 체격 조건이 떨어지는 서건우는 더 강하게 몰아쳤다. 서건우는 모든 훈련을 묵묵히 버텨낸 몇 안 되는 선수였다. 그는 “정말 강하고 모질게 대했다. 그런데 건우는 그 힘든 훈련이 끝난 후에도 30분 더 봐달라고 하더라”며 “파리올림픽에 ‘올인’이라는 걸 했다. 힘들게 준비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허탈함과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컸다”고 말했다. 태권도 대표팀 훈련의 하이라이트는 매주 월요일 오전 실시하는 ‘서킷 훈련’이다. 수십 kg짜리 원반을 이용한 근력 운동을 1분간 한 후 전속력으로 2분을 달리는 게 한 세트다. 이걸 3세트 하면 시간은 9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효과는 엄청나다. 오혜리는 “처음엔 땀이 엄청나게 흐르다가 어느 순간 땀이 멈춘다. 어지럽고 머리엔 쥐가 난다”고 했다. 이후 곧바로 사이클로 이동해 15초간 전력 질주-45초 휴식을 10회 반복한다. 모두 합해 30분도 채 되지 않지만 근력과 심폐 지구력을 키우는 데는 그만이다. 그가 제자들에게 ‘독사 코치’를 자임하는 건 이유가 있다. 오혜리 자신이 이 같은 지옥 훈련을 이겨낸 효과를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키가 180cm인 오혜리는 큰 키와 유연성 등 신체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운동 신경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태권도를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 시절과 중학교 시절 그가 발차기나 동작 등 시범을 보이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하곤 했다. 선수다운 좋은 자세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엉성한 발차기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당시 재능이 그리 좋지 않으니 노력을 많이 해야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처음 동작을 배워도 그대로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남들이 한두 번에 할 걸 나는 세네 번 해야 했다. 노력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기본 체력도 약했다. 달리기를 하면 거의 꼴찌였다. 그런 그를 지금의 오혜리로 만든 건 한국체육대에 입학해서 만난 ‘독사 같은’ 정광채 교수였다. 오혜리는 “정광채 교수님에게서 진짜 독하게 배웠다. 선수 때는 어떻게 저렇게 독하게 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과정을 이겨내니 정말 ‘저질 체력’이었던 나도 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정 교수는 2016년 리우 올림픽 때는 대표팀 코치로 역시 한국체대 출신으로 여자 49kg급에서 금메달을 딴 김소희를 지도했다. 태릉선수촌에서 같은 방을 썼던 오혜리와 김소희는 리우 올림픽에서도 룸메이트였다. 둘은 나란히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했다. 오혜리는 “지옥 훈련을 통해 체력이 좋아지니 기술도 따라서 좋아졌다. 내가 해봐서 안다.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뒤늦게 성공했지만 제자들은 하루빨리 성공을 맛봤으면 하면 마음에 더 독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의 지도 방식은 ‘워라밸’이나 ‘효율적인 훈련’ 등을 추구하는 ‘MZ세대’와의 맞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그는 단호했다. 오혜리는 “주변에서는 소통을 잘하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한국체대에 입학하고, 올림픽 금메달을 바라는 선수가 있다면 그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는 게 좋은 선생님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옥 훈련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올림픽 메달을 따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했던 경험은 향후 인생을 사는데도 어떻게든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혜리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뭔가를 하면서 살았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듬해 그는 차의과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선수 시절 발목 부상에 시달리곤 했던 그는 트레이닝 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평소 마음먹고 있던 바를 바로 실행에 옮겼다. 당시 춘천시청 선수였던 그는 주중에는 훈련을 하고, 주말엔 경기도 분당에 있는 학교에 와서 공부를 했다. 그렇게 불과 2년 반만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2021년 모교 한국체대 교수로 부임했다. 여기에는 같은 태권도 선수 출신으로 단국대 국제스포츠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는 남편 전민수 교수의 도움도 컸다. 한국체대 1년 선후배 사이인 둘은 13년 연애 끝에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는 “태권도 후배들을 생각하면 내가 길을 잘 닦아놔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며 “정말 고생하면서 운동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파리올림픽 후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내달 열리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선수 지도에 열심이다. 오전, 오후, 야간 운동을 하고 주말에도 한 타임씩 훈련을 한다. 주5일 시대에 그는 주7일 훈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혜리는 “선수촌에 비해 그마나 새벽 훈련은 없다. 야간 훈련도 일주일에 두 번밖에 하지 않는다”며 “올림픽을 위해서 4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데 4년이 한 번에 내 눈앞에 오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1년씩 쌓여서 오는 것이다. 그렇게 꾸준히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지방 도시 연대를 통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권장하는 지속 가능한 올림픽을 구현하겠다.”2036 여름 올림픽 유치에 도전하는 김관영 전북도지사는 20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사에서 가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전북의 경쟁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북은 2036 올림픽 유치를 두고 서울시와 경쟁하고 있다. 이 중 한 곳이 28일 대한체육회 대의원총회를 통해 국내 후보 도시로 결정된다.대의원들을 상대로 직접 프레젠테이션에 나서는 김 지사는 “2036 전북 올림픽은 전북이 주도하는 비(非)수도권 연대가 주 콘셉트다. 전북은 K컬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풍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어 문화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다”며 “전북은 또 17개 광역시도 중 재생에너지 생산이 가장 많은 지방자치단체다. 환경올림픽을 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다.IOC는 ‘어젠다 2020’을 통해 단일 도시의 단독 개최가 아닌 여러 도시가 협력하는 방식의 올림픽 개최에도 문호를 개방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가장 적합한 곳이 바로 전북이라는 게 김 지사의 생각이다.김 지사는 “과거 올림픽은 단일 도시에서 모든 경기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올림픽을 위해서는 여러 도시의 협력과 상생이 필요하다는 게 IOC의 생각”이라며 “전북 도내 14개 시군을 넘어 전주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다른 도시들과 연대해 저비용, 고효율의 올림픽을 치러 내겠다”라고 말했다.전남과 충남, 충북, 대구, 광주 등이 전북과 함께한다. 충북은 2027년 세계유니버시아드(세계대학경기대회) 개최를 앞두고 경기장과 선수촌 등 조성에 한창이다. 광주는 2019년 세계수영선수권 대회를 치렀고, 올해 9월에는 세계양궁선수권 대회를 개최한다. 대구는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 대회를 성공적으로 열었다. 김 지사는 “이 도시들은 모두 전주에서 고속철도(KTX)나 고속도로로 1시간∼1시간 반 남짓한 거리에 있다. 이전에 세계적인 수준의 국제대회를 열었거나 개최할 예정인 만큼 그 시설들을 고스란히 활용할 수 있다”며 “또한 지방 도시들 간의 교류 활성화를 통해 대한민국 균형 발전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 광주와 대구를 연결하는 ‘달빛철도’가 건설 중이다. 전주∼대구 간 고속도로 공사도 진행 중이다”라며 “예정대로 공사가 끝나면 이동 시간이 1시간 안팎으로 크게 단축된다. 올림픽 유치가 이뤄진다면 수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행이 더뎠던 사회간접자본(SOC) 사업도 정상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전북은 국제 행사와 관련해 뼈아픈 경험이 있다. 2023년 8월 전북 새만금에서 진행된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다. 전 세계 4만3000여 명의 스카우트 대원이 참가한 대규모 대회였지만 최고기온이 35도에 이르는 찜통더위에 야영장에서는 배수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온열질환 환자가 속출했다. 여러 나라 스카우트 대원들이 중도 이탈하면서 적지 않은 파행을 겪었다. 이에 대해 김 지사는 “야외 행사인 잼버리와 올림픽은 전혀 다른 행사이긴 하다. 하지만 잼버리를 통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며 “사실 잼버리는 조직위가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전북도는 조직위로부터 위임받은 몇 가지 일만 했다.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2036 올림픽처럼 전북이 처음부터 준비해서 치르는 행사라면 전혀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실제로 전북도는 지난해 세계한인비즈니스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김 지사는 “참석자들에게 고즈넉한 한옥 숙박을 제공하고, 캠퍼스에서 청년들을 만나는 역동적인 행사를 통해 5800만 달러 수출 계약 성사와 2만여 건의 상담 실적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잼버리 파행으로 상처 입었던 도민들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강력한 경쟁자이자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했던 서울시와의 공동 개최가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이 아니겠느냐는 의견도 나온다. 17일 대한체육회 이사회에서도 몇몇 이사들이 공동 개최안을 제안했다. 김 지사는 “사실 대한체육회에 유치신청서를 내기 전에 서울시에 공동 개최를 먼저 제안했다. 하지만 ‘공동 개최는 어렵고, 분산 개최는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마도 서울시의 입장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28일 대의원총회에서 둘 중 하나가 선택받는 상황이 되지 않겠나 싶다. 다만 28일 이전에 서울시에서 공동 개최를 제안해 온다면 깊이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김 지사는 인도(도시는 미정)나 튀르키예(이스탄불) 등 해외 후보 도시들과의 경쟁에서는 승리를 장담했다. 그는 “두 도시가 현재로서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다. 하지만 인프라와 치안 등 모든 면에서 우리의 상대가 되긴 어렵다”고 단언했다. 그는 “전북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K컬처의 뿌리다. 태권도의 성지인 태권도원도 전북 무주에 있다. 전북에서는 K콘텐츠를 넘어 심화 과정까지 맛볼 수 있다”며 “전 세계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올림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서울은 이미 절반 이상 준비된 도시다. K콘텐츠의 수도로서 서울의 매력을 전 세계인에게 보여 주겠다.” 2036 여름올림픽 유치에 나선 오세훈 서울시장은 18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의 강점을 이렇게 강조했다. 2036 올림픽 유치에 도전하는 국내 지방자치단체는 서울시와 전북도다. 대한체육회는 28일 대의원 총회를 열고 이 중 한 곳을 국내 최종 후보로 결정한다. 한국 후보가 되면 이미 유치전에 뛰어든 인도(미정), 인도네시아(누산타라), 카타르(도하), 튀르키예(이스탄불), 헝가리(부다페스트) 등 해외 도시들과 경쟁을 벌이게 된다. 28일 대의원들을 상대로 직접 프레젠테이션에 나서는 오 시장은 “국내 경쟁 도시나 해외 경쟁 도시들은 유치가 확정된 후 (경기장 건설 등)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서울은 대부분의 시설이 3분의 2 이상 준비돼 있다. 수확할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198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서울은 당시 사용했던 경기장들을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다.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은 6만 석 이상의 최신 시설로 리모델링되고 있고, 돔구장 등이 포함된 잠실 스포츠·마이스(MICE·국제회의 포상관광 컨벤션 전시회) 복합단지도 조성 작업에 들어갔다. 오 시장은 “민간투자를 유치해 이미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2031년경이면 모든 작업이 끝난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장(IOC)도 만날 때마다 ‘공사는 언제 끝나느냐’며 관심을 표한다”면서 “서울은 최소 비용으로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어 무조건 ‘흑자 올림픽’이 가능하다. 주변에 호텔과 컨벤션 시설도 풍부해 다른 어떤 도시보다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현장을 직접 찾았던 오 시장은 “센강 주변에서 펼쳐진 파리 올림픽을 보면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우리는 한강을 활용해 훨씬 다양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다. 파리 올림픽은 파리의 랜드마크인 에펠탑 주변에 경기장 등을 배치해 큰 화제를 모았다. 서울은 동쪽은 잠실 스포츠·마이스 복합단지, 서쪽은 상암동 평화의공원에 들어서는 대관람차 ‘서울링’ 등 두 개의 랜드마크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게 오 시장의 설명이다. 오 시장은 “한강 변을 따라 철인 3종(수영, 마라톤, 사이클), 비치발리볼, BMX 레이싱 등이 열린다”며 “한강은 오픈워터 수영과 철인 3종 수영 장소로 활용된다”고 소개했다. 파리 올림픽 철인 3종 등이 열린 센강은 세계수영연맹의 대장균 기준치를 초과해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한강은 100mL당 대장균이 31마리로 센강보다 100배 깨끗한 수질을 자랑한다. 실제로 오 시장은 지난해 서울 광진구 뚝섬한강공원에서 열린 ‘한강 쉬엄쉬엄 3종 축제’ 때 시민들과 함께 한강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기도 했다. 오 시장은 “꾸준한 수질 개선으로 지금 한강 물은 음용수 수준까지 올라왔다”고 했다.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전북과의 공동 개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오 시장은 “공동 개최를 하면 5조 원 정도의 돈이 더 들어간다. 경기장과 별개로 선수촌과 미디어촌 등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분산 개최는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경기도, 인천시, 부산시, 강원 양양군 등과는 경기장 공동 활용에 대한 협의를 끝냈다. 전북도와도 얼마든지 협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은 2032년 올림픽 유치 때 남북 공동 개최를 추진했다가 실패했다. 이번에는 서울만의 단독 개최로 방향을 바꿨지만 북한과의 동행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오 시장은 “2036년쯤 되면 국제 정세와 남북 관계가 지금과는 많이 바뀌어 있을 수 있다. 올림픽 정신 자체가 평화 추구 아닌가. 여건이 허락한다면 북한과의 분산 개최도 고려해 볼 수 있다. IOC 역시 이 같은 아이디어를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엘리트 스포츠 발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서울 올림픽 이후 만들어진 국민체육진흥공단 등을 통해 한국은 여름·겨울올림픽에서 10위권 안팎을 유지하는 ‘스포츠 강국’이 됐다. 2036 서울 올림픽은 엘리트 스포츠를 넘어 생활 스포츠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게 오 시장의 생각이다. 그는 “이미 한국엔 전국 각지에 스포츠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그중에서도 서울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걷는 도시다. ‘손목닥터 9988 프로젝트’ 등의 영향으로 생활체육이 급신장했다”며 “2036 올림픽은 국민들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제고해 건강 및 장수와 직결되는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운동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2036년은 손기정 선생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지 100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오 시장은 “올림픽을 개최하면 도시 전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녹지가 늘어나고 주거환경이 개선되면 시민들의 삶이 질이 올라가고 도시의 브랜드 가치도 높아진다. 이는 경제발전과도 직결된다”며 “서울은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인기 도시다. 전 세계인이 인정하는 대중교통 시스템을 갖춘 서울은 ‘트립어드바이저’가 뽑은 혼자서 여행하기 좋은 도시에서 1위를 했고, 세계도시경쟁력 평가에서도 6위에 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2036 서울 올림픽은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국민소득 10만 달러 시대를 향해 퀀텀 점프를 할 수 있는 모멘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올림픽 같은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못 딴 선수가 칭찬받는 일은 드물다. 노메달 선수의 지도자가 주목받는 일은 더더욱 없다. 오혜리 한국체육대 교수(37)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오 교수는 지난해 파리 올림픽 태권도 남자 80kg에 출전한 서건우(22)의 전담 코치였다. 16강전에서 심판의 오심으로 서건우가 패배 위기에 몰리자 오 교수는 경기장 위로 뛰어 올라가 판정 번복을 끌어냈다. 서건우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을 때는 머리를 쓰다듬었고, 4강에서 패해 메달 획득에 실패했을 때는 눈물을 흘렸다. 때론 호랑이 같고, 때론 엄마 같은 모습에 많은 이들은 그를 ‘걸크러시’라고 불렀다. 올림픽 후 학교로 돌아온 오 교수는 “선수로 출전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왔을 땐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작년 파리 올림픽 후엔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며 웃었다. 리우 올림픽에서 그는 삼수 만에 금메달을 땄다. 당시 28세로 역대 한국 태권도 최고령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금메달을 따고도 그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파리 올림픽에선 제자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는 “함께 운동했던 게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울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함과 후회가 가득했다”고 했다. 오 교수는 ‘독사’였다. 새벽, 오전, 오후에 이어 야간에도 훈련을 시켰다. 다른 선수들은 일찌감치 나가떨어졌지만 서건우는 달랐다. 그는 “정말 강하고 모질게 대했다. 그런데 건우는 그 힘든 훈련이 끝난 후에도 30분 더 봐달라고 하던 선수다”라고 했다. 훈련의 하이라이트는 매주 월요일 오전 실시하는 ‘서킷 훈련’. 수십 kg짜리 원반을 이용한 근력 운동을 1분간 한 후 전속력으로 2분을 달리는 게 한 세트다. 이걸 3세트 하면 시간은 9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효과는 엄청나다. 오 교수는 “처음엔 땀이 엄청나게 흐르다가 어느 순간 땀이 멈춘다. 어지럽고 머리엔 쥐가 난다”고 했다. 이후 곧바로 사이클로 이동해 15초간 전력 질주, 45초 휴식을 10회 반복한다. 모두 합해 30분도 채 되지 않지만 근력과 심폐 지구력을 키우는 데는 그만이다. 오 교수 본인이 이 훈련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선수 시절 그는 기본 체력이 약했다. 운동 신경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광채 한국체육대 교수의 지도 아래 ‘지옥 훈련’을 이겨냈고, 결국 세계 정상에 설 수 있었다. 그는 “대학 입학 때만 해도 달리기를 하면 항상 꼴찌였다. 그런데 혹독하게 뛰다 보니 어느 순간 극복이 되더라”며 “체력이 좋아지니 기술도 따라서 좋아졌다. 나는 늦게 성공했지만 제자들은 하루빨리 성공을 맛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달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그는 열심히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오전, 오후, 야간 운동을 하고 주말에도 한 타임씩 훈련을 한다. 주 7일 훈련을 이어가는 오 교수는 “사람 좋은 선생님보다는 제자가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다 보면 금메달이 아니더라도 향후 인생을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장재근 진천선수촌장(62)은 1980년대 한국 최고의 스프린터였다. 1982년 뉴델리,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 육상 남자 200m에서 두 대회 연속 금메달을 땄다. 한국 신기록을 4번, 아시아 신기록을 2번이나 갈아 치우며 ’아시아 단거리 황제’로 군림했다. 원체 타고난 신체조건도 좋았지만 정신력도 강했다. 여기에 치열한 훈련까지 더해져 체력적으로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아시아의 육상 강국은 일본이었다. 장재근의 생각은 “무조건 일본 선수는 잡는다”는 것이었다. 육상 200m는 이틀에 걸쳐 예선과 준결선, 그리고 결선을 치렀다. 메달을 바라보는 선수들은 예선과 준결선에서는 대개 페이스를 조절한다. 하지만 장재근은 달랐다. 초반부터 앞만 보고 달렸다. 그는 “예선부터 일본 선수한테는 지기 싫더라. 그래서 출발 총성이 울리자마자 초반부터 치고 나갔다. 그런데 그게 먹혔다”며 “일본 선수가 나를 신경 쓰느라 예선부터 자기 페이스를 잃었다. 워낙 훈련량이 많다 보니 나도 그걸 버텼던 것”이라며 웃었다. 장재근은 또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한 ‘올림피언’이기도 하다. 장재근의 작전은 아시안게임 때와 같이 ‘초반부터 조지기’였다. 하지만 세계 무대에서 이 작전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상대 선수가 당대 최고의 스프린터이던 칼 루이스(미국)와 벤 존슨(캐나다) 등이었기 때문이다. 장재근이 초반부터 스퍼트를 하건 말건 이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장재근은 그래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준준결선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장재근은 “아시아 무대에선 날다 긴다 했을지 몰라도 세계적인 선수들은 말 그대로 ‘어나더 레벨’이었다. 칼 루이스 같은 선수는 경기 때뿐 아니라 평소에도 세계 일인자로서의 여유로움이 넘쳤다”며 “그 선수들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했다. 평소 안면이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고 말했다. 1990년 은퇴 후 그는 트랙을 벗어나 한동안 ‘외도’를 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에 물 흐르는 듯한 언변을 앞세워 방송계로 진출한 것이다. 에어로빅 강사로 인기를 모았고, 예능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홈쇼핑 호스트로도 얼굴을 내밀었다. 짧은 기간에 운동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속은 편하지 않았다. 장 촌장은 “가장이다 보니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송 쪽 일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트랙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졌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는 “아내는 막고 싶은데 ‘내가 육상을 얘기할 때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하지 말라고 못 하겠더라’고 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나갈 때는 쉬웠지만 들어오는 건 쉽지 않았다. “돈 보고 떠난 놈이 배고픈 동네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돌아오느냐”는 게 육상계의 분위기였다. 감독, 코치 등 지도자가 아닌 심판으로 다시 육상의 문을 두드렸다. 하루 육상 대회 심판을 보면 일당 5만 원을 받았다. 딱히 일이 없을 때면 육상장 주변 편의점에서 육상 지도자들과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2, 3년을 지낸 후에야 다시 육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마흔이 되기 전이었다.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도 부끄럽지 않을 때였기에 육상계 복귀가 가능했던 것 같다”고 했다.이후 국가대표 코치, 육상연맹 트랙기술위원장, 실업팀 감독 등을 거친 그는 2023년 3월 꿈에 그리던 진천선수촌장을 맡았다. 그의 롤모델은 ‘영원한 선수촌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김성집 전 촌장(1919~2016)이었다. 김성집 전 촌장은 1948년 런던 올림픽 역도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대한민국 수립 후 최초로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두 대회 연속 메달을 목에 걸었다. 선수에서 은퇴한 후로는 행정가로 변신했다. 특히 1976년부터 1994년까지 중간에 다른 직책 맡은 기간 빼고 13년 7개월 동안 태릉선수촌장으로 국가대표 선수들을 육성하는데 힘썼다. 태릉선수촌장 시절 선수들에게 공포이었던 불암산 크로스컨트리를 활성화시켰다.김 전 촌장은 ‘호랑이’, ‘염라대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한편으로는 선수들에게 자상하고 따뜻한 어른이기도 했다. 장재근은 “김 촌장님에 대한 기억 대부분은 욕먹은 것밖에 없다. 젊은 혈기에 태릉선수촌 담장을 뛰어 넘어 놀러 나가곤 했는데 촌장님한테 걸리면 엄청 혼났다. 반성문도 여러 번 썼다”며 웃었다. 그는 “하지만 김 촌장님은 선수촌을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기운에도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신 분이었다. 그분이 계실 땐 누구도 선수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지 않았다”며 “그렇게 온몸으로 선수와 지도자를 막아주신 덕분에 선수들은 마음 놓고 훈련만 할 수 있었다. 그분이 안 계셨다면 ‘스프린터 장재근’도 오늘날 한국 체육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촌장처럼 장재근도 진천선수촌장으로서 최대한 선수들과 함께 하려 노력했다. 논란 속에서도 오전 6시 새벽 산책을 부활시킨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힘든 오전 훈련을 소화하려면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시작해야 한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이다”라며 “자발적으로 잘하는 선수도 있지만 어떤 선수들은 끌고 가줘야 한다. 더구나 선수촌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 아닌가. 적어도 선수촌에 들어왔다면 누가 봐도 지켜야 할 것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새벽부터 선수들의 훈련이 끝나는 저녁까지 선수촌을 지켰다. 훈련이 끝난 뒤에는 각 종목 지도자들과 저녁 자리를 갖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오후 9시 이후엔 혼자 트랙을 뛰거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며 건강을 다졌다. 그렇게 그는 2년간 엘리트 스포츠 부흥을 위해 앞만 보고 뛰었다. 다행히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50명) 이후 가장 적은 144명의 선수가 출전했는데 역대 최다 타이인 13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은 9개, 동메달 10개 등 전체 메달은 32개를 기록했다. 그는 “선수촌은 한국 엘리트 체육의 마지막 보루이자 성지다. 최선을 다해 좋은 성적을 내준 우리 선수들에게 너무 고맙다”고 했다. 선수촌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일주일에 하루 서울에 있는 집에 갔다. “왜 출퇴근을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선수촌에 있는 게 너무 행복하다. 평생 운동을 해 온 나는 누가 뭐래도 ‘운동쟁이’다. 선수들, 지도자들과 같이 웃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라고 말했다. 2월 말로 2년간의 임기가 끝나는 그는 “내가 선수 생활을 할 때만 해도 주입식으로 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이제는 선수들 스스로가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갖고 운동해야 한다”며 “자신의 꿈을 위해 젊음을 투자하는 거다. 자신의 꿈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 언제든 집중력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장재근 진천선수촌장(62)은 1980년대 한국 최고의 스프린터였다. 1982년 뉴델리,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남자 200m에서 두 대회 연속 금메달을 땄다. 한국 신기록을 4번, 아시아 신기록을 2번이나 갈아 치우며 ‘아시아 단거리 황제’로 군림했다. 1990년 은퇴한 그는 트랙을 벗어나 한동안 ‘외도’를 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에 물 흐르는 듯한 언변을 앞세워 방송계로 진출한 것이다. 에어로빅 강사로 인기를 모았고, 예능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홈쇼핑 호스트로도 얼굴을 내밀었다. 짧은 기간에 운동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속은 편하지 않았다. 장 촌장은 “가장이다 보니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송 쪽 일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트랙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졌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는 “아내는 막고 싶은데 ‘내가 육상을 얘기할 때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하지 말라고 못 하겠더라’고 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나갈 때는 쉬웠지만 돌아오는 건 쉽지 않았다. “돈 보고 떠난 놈이 배고픈 동네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돌아오느냐”는 게 육상계의 분위기였다. 감독, 코치 등 지도자가 아닌 심판으로 다시 육상의 문을 두드렸다. 육상 대회 심판을 보고 일당 5만 원을 받았다. 주변 육상인들과 몸을 부대끼며 그렇게 2, 3년을 지낸 후에야 다시 육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마흔이 되기 전이었다.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도 부끄럽지 않을 때였기에 복귀가 가능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이후 국가대표 코치, 육상연맹 트랙기술위원장, 실업팀 감독 등을 거친 그는 2023년 3월 꿈에 그리던 진천선수촌장을 맡았다. 이달을 끝으로 2년 임기를 마감하는 그는 지난 2년간 엘리트 스포츠 부흥을 위해 앞만 보고 뛰었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50명) 이후 가장 적은 144명의 선수가 출전했는데 역대 최다 타이인 13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 등 전체 메달은 32개를 기록했다. 그는 “선수촌은 한국 엘리트 체육의 마지막 보루이자 성지다. 최선을 다해 좋은 성적을 내준 우리 선수들에게 너무 고맙다”고 했다. 선수촌장에 처음 임명됐을 때부터 그는 김성집 전 촌장(1919∼2016년)을 닮고자 했다. 1948년 런던,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역도 동메달리스트인 김 전 촌장은 ‘영원한 선수촌장’으로 기억된다. 1976년부터 9대, 11대와 12대 태릉선수촌장으로 모두 13년 7개월 동안 국가대표의 훈련을 총괄했다. 장 촌장은 “김 촌장님은 언제나 선수촌을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신 분이었다. 덕분에 나도 마음껏 운동하며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며 “미숙한 점도 있었겠지만 나도 선수들과 지도자들은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김 전 촌장처럼 장 촌장도 최대한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려 했다. 오전 6시 새벽 산책 때부터 선수들과 함께했다. 선수들의 훈련이 모든 끝난 오후 9시 이후엔 혼자 트랙을 뛰거나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며 건강을 다졌다. 장 촌장은 “밖에서 보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하겠지만 선수촌에서 지낸 지난 2년이 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했던 순간이었다”며 “‘운동쟁이’인 나는 평생 운동과 함께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선수 때부터 계란으로 바위를 여러 번 쳐 봤다. 두려움 없이, 열심히 치고 또 치다 보니 결국 바위가 깨지더라.” 14일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집고 새 체육회장에 당선된 유승민 당선인(43)의 지론이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계란으로 바위를 깨곤 했다. 많이 이들이 기억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탁구 단식 결승에서 중국의 왕하오를 이긴 것이다. 이전까지 왕하오와 여섯 번 붙어 여섯 번 모두 패했던 그는 올림픽 금메달을 놓고 벌인 경기에서 4-2로 승리했다. 21년이 지난 지금까지 올림픽 탁구 단식에서 중국 선수를 꺾고 금메달을 딴 사람은 유 당선인이 유일하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기간 중 치러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이름값이나 경력을 감안할 때 당선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혈혈단신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선수촌을 누볐다. 하루 3만5000보씩 걸어 다니느라 살이 5kg 넘게 빠졌다. 처음엔 눈길도 주지 않던 선수들이 하나둘씩 아는 척을 했다. 그는 결국 4명을 뽑는 선거에서 2위로 당선되며 IOC에 입성했다. 그리고 이번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대이변을 일으켰다. 8년간 회장직을 맡으며 ‘콘크리트 지지층’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던 이기흥 현 대한체육회장을 꺾고 한국 체육의 수장이 된 것이다. 다음 달 문화체육관광부의 승인을 앞두고 있는 유 당선인을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났다.》―이번 체육회장 선거 결과를 기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나. “많은 분들이 기적이라고 말씀해 주시지만 준비의 결과인 것 같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온다. 준비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번 선거 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했다. 최선을 다했기에 만약 졌다 하더라도 아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선택받지 못했다면 ‘내가 부족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를 믿고 뽑아 주신 만큼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 선거인단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하나. “선수 출신이자 젊은 후보로서 다른 후보들이 못 하는 나만의 선거운동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거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대한체육회 산하 68개 종목을 모두 체험한 뒤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것이었다. 해당 종목을 몸소 체험하는 게 그 종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하루에 스무 종목을 찍은 날도 있다. 강이 얼어 있어 카누, 조정 같은 수상 종목은 못 했다. 패러글라이딩도 예약을 해 놓고 날씨 사정이 좋지 않아 못 했다. 나중에라도 반드시 체험해 볼 생각이다.” ―반(反)이기흥 후보들 간의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아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유 당선인은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가 약점으로 꼽히기도 했는데…. “단일화를 추진하던 다른 후보님들께도 솔직히 얘기했다. 부족한 점, 단점은 고치고 보완하면 되는데 나이가 적은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체육회장으로 일하는데 나이보다는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대한체육회장이라는 자리는 혼자 일하는 게 아니다. 젊은 사람들의 패기와 나이 있으신 분들의 연륜이 조화되는 게 중요하다. 저보다 경험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동시에 젊은이답게 창조적인 일들을 많이 해 나가겠다.” ―선거 승리 후 이기흥 후보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고 들었다. “이 후보뿐만 아니라 함께 경쟁했던 모든 후보들 한 분 한 분께 전화를 드렸다. 이 후보께서도 투박한 충청도 사투리로 ‘잘 혀, 잘 혀’라고 말해 주셨다. 저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했던 스포츠인이다. 선거 과정에서는 마음 아픈 네거티브도 있었다. 하지만 선거 땐 적으로서 치열하게 다투었을지 몰라도 결과가 나온 순간부터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스포츠다.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는 공정한 룰로 경쟁하고, 승부가 결정된 후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이 유 당선인에게 ‘하드워커(hard worker·열심히 일하는 사람)’란 별명을 붙여줬다. 끊이지 않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나. “IOC 선수위원이 되면서 가장 먼저 결심했던 게 ‘누구보다 부지런한 일꾼이 되자’는 거였다. 저도 인간이니만큼 힘들고 피곤할 때가 있다. 하지만 체육인들과의 약속,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크다. 머리는 ‘오늘은 하루 쉴까’라고 속삭이는데 몸이 먼저 밖으로 나간다. 사실 몸이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다. 다양한 분을 상대하고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정신적인 부분이 힘들 때가 있다.” ―그래도 힐링이 필요하지 않나. 정신적인 리프레시는 어떤 식으로 하나. “두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유일한 힐링 포인트다. 지난 주말(18일)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축구를 하는 큰아들(성혁 군)이 전지훈련을 하고 있는 경남 함안을 찾았다. 함안에 간 김에 그곳에서 훈련 중인 여자축구 선수들도 만났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들(성공 군)도 축구를 한다. 두 아이가 모두 축구를 하는 학부모이다. 학부모로서 직접 보고 느낀 현장의 어려움을 정책적으로 잘 풀어가 보려 한다.” ―대한체육회장으로서 임기 내에 반드시 해내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학교 체육 활성화와 일반 학생들의 스포츠 활동을 조화롭게 해 모든 이들이 체육을 즐겁고 행복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먼저 엘리트 체육의 기반이 되는 학교 체육이 활성화돼야 한다. 현재 학생 선수들을 가로막고 있는 각종 규제가 적지 않다. 이런 부분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 엘리트 체육은 언제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 구조에서는 엘리트를 원하는 학생 선수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들을 시행하려 하나. “대표적으로 전국소년체육대회의 위상을 예전처럼 높이는 데 집중하려 한다. 스포츠는 목표와 동기가 있어야 발전한다. 그런데 요즘 소년체전은 명맥만 이어가고 있을 뿐 선수가 1등을 하고 메달을 따 와도 그리 환영받는 분위기가 아니다. 지도자 처우 개선 역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요즘 지도자분들은 코치 역할뿐만 아니라 테이핑, 심리 상담, 운전, 부모님 케어까지 온갖 업무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지도자는 거의 없다. 교육부와 교육청 등을 찾아다니며 학교 체육과 관련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생각이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 역대 최다 타이인 13개의 금메달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한국 체육의 위기를 말한다. “파리 올림픽에서 32개 종목이 열렸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딴 13개의 금메달은 양궁, 사격, 펜싱, 태권도, 배드민턴 등 다섯 종목에서 나왔다. 우리가 잘한 종목도 생각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종목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웃 나라 일본은 파리에서 20개의 금메달 등 45개의 메달을 땄다. 우리와의 차이는 육상과 수영 등 기초 종목을 비롯해 다양한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하며 세계 정상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8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때 전통의 메달밭인 양궁이나 펜싱이 컨디션 난조 등으로 무너지면 우리나라의 메달은 급격히 줄어들 우려가 있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기초 종목부터 차근차근 다시 키워야 한다.” ―대한체육회 내부에 대해 강도 높은 개혁을 예고했는데…. “체육회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능력 있는 직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수동적으로 일해 온 것 같다. 능력과 창의, 추진력이 같이 올라와야 한다. 젊은 회장답게 젊은 분위기, 적극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또 국제 업무와 같이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전문성을 키울 수 있도록 돕겠다. 대부분의 국가올림픽위원회(NOC)는 전문적으로 국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 체육회는 2년마다 한 번씩 사람을 바꿨다. 이런 부분들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체육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 기업의 후원도 중요한데…. “경기인 출신이지만 기업 후원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고,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 선수단이 ‘30대 기업 어디로부터도 후원을 못 받았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체육이 잘되려면 기업들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된다. 선수 시절 삼성 로고가 달린 유니폼을 입었다. 이를 통해 삼성이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잘 알고 있다. 스포츠에 관심 있는 기업들과 적극적으로 협의하겠다.” ―이기흥 회장 시절 체육회와 정부가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는데…. “사실 체육회와 정부가 왜 척을 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정부가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지시를 한다면 싸우는 게 당연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상호 협력해야 한다. 우리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만 있다면 자존심을 굽히고 머리를 숙일 수 있다.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주변 사람이 힘들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 정부뿐만 아니라 학교와 교육기관, 기업 등 체육에 도움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갈 생각이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건 열심히 하는 것뿐이다.”유승민 대한체육회장 당선인(43)△1982년 인천 강화 출생△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자 복식 4위△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단식 금메달△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단체전 동메달△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단체전 은메달△2016∼2024년 IOC 선수위원△2018 평창 겨울올림픽 선수촌장△2019∼2024년 대한탁구협회장△2025년 대한체육회장 당선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현역 시절 ‘바스켓 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정선민(51)은 한국 여자 농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코트 위에 선 여왕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농구대잔치 시절부터 최고로 군림했던 그는 1998년 여자프로농구(WKBL) 출범 이후에도 2012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7차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고, 몸담았던 팀 대부분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프로농구에서 415경기를 뛰면서 8140점을 기록했다. 경기당 19.61점꼴이다. 3142리바운드(평균 7.57), 1777어시스트(4.28개), 771스틸(1.86개) 등 공격이면 공격, 수비면 수비 등 못 하는 게 없었다. 트리플 더블도 8차례나 기록했다.그가 한국 여자 농구 역사상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중학교 시절까지는 볼품없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또래 중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부로 뽑혔다. 그런데 막상 농구팀에 가보니 작은 축에 속했다. 그래서 그는 가드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중학생이 돼서 키가 좀 큰 뒤에는 포지션을 포워드로 바꿨다. 본격적으로 센터를 맡은 건 고교 입학 후였다. 포지션이 자주 바뀌었다는 건 주전이 아니었다는 것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누가 봐도 타고난 천재였을 것 같지만 중학생까지만 해도 그는 ‘미운 오리’ 같은 선수였다.정선민은 “많은 분들이 내가 처음부터 농구를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신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엔 내 역할은 ‘볼 보이’였다”면서 “얼마나 실력이 형편없었던지 중학교에 진학할 때 선생님으로부터 ‘농구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고집을 부려 중학교 농구부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중학교 3학년을 마칠 때까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내버려 졌다. 팀의 일원이라고 느낄 때는 단체로 체벌을 받을 때가 유일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팀 훈련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했던 그는 ‘독학’으로 농구를 익혔다. 그의 롤모델은 당시 남자 농구에서 맹활약 중이던 ‘슛도사’ 이충희였다. 그는 TV에서 본 이충희의 폼을 흉내 내면서 틈나는 대로 슛 연습을 했다. 두 손으로 슛을 하는 여느 여자 선수들과 달리 정선민이 남자 선수들처럼 한 손 슛도 종종 구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최동원 당시 마산여고 감독이었다. 최 감독은 중3이던 정선민에게 마산여고에 가서 언니들과 훈련을 하라고 지시했다. 얼떨결에 언니들과 훈련을 하게 된 그는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혼나기않기 위해, 또 언니들을 따라잡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연습했다. 쉬는 날도 아빠와 함께 체육관에 가서 혼자 슛을 던졌다. 그가 ‘백조’로 다시 태어난 것은 고교생이 되어서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출전한 정식 경기에서 혼자 32점을 넣은 것이다. 농구계에선 ‘어디서 이런 선수가 갑자기 튀어나왔느냐’며 난리가 났다. 이후 그의 농구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정선민은 “어릴 적 키가 작고 농구를 못했던 게 어찌 보면 축복이었다. 덕분에 다양한 포지션에서 기본기를 닦을 수 있었고, 공도 잘 다룰 수 있게 됐다”며 “고교 이후 센터를 맡으면서도 스틸을 잘했다. 어릴 적 가드를 하면서 공격의 흐름을 볼 줄 알게 된 덕분이었다. 중학생 때까지 아무것도 아닌 나를 알아봐 준 그 선생님 덕분에 농구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선민은 2003년 한국 여자 농구 선수로는 최초로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무대에도 진출했다. 1라운드 8순위로 시애틀 스톰의 지명을 받은 그는 현지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평균 6.9분 17경기 출전에 평균 1.8득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미국 생활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선민은 “나는 한국, 또는 아시아에서 좀 잘하는 선수였을 뿐 세계적인 선수는 아니었다. 포지션 변경도 어려웠고, 통역이 없어 말도 통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제 농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이 소중한 6개월이었다. 꿈을 그리던 미국 무대에 도전함으로써 세계적인 선수들의 마인드를 배울 수 있었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했다.선수 시절 여러 차례 과감한 도전을 했던 그는 지도자로서도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중이다. 선수에서 은퇴한 뒤 그가 지도자로서 가장 먼저 맡았던 팀은 남자 학교인 인헌고였다. 지금은 주말리그 왕중왕전에서 우승도 경험한 학교가 됐지만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인헌고는 선수층도 얇고, 실력이 좋은 선수가 거의 없던 학교였다. 선수 때는 승리가 훨씬 익숙했던 정선민이었지만 지도자 첫해엔 연전연패를 당했다. 정선민은 “농구를 좋아하지만 실력이 다소 떨어지는 아이들이 모인 팀이었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더라도 농구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를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며 “감사하게도 선수들이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잘 따라줬다. 당시 선수들 중 지금도 연락을 하는 아이가 있다. 1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지냈다”고 했다. 정선민은 이후 WKBL 하나은행과 신한은행 등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2021년에는 공모를 통해 한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최근 들어 전력이 크게 약해진 한국 여자 농구 대표팀은 2022년 월드컵에서 중국과 미국에 큰 점수 차로 패했고, 2023년엔 아시아컵 4강에 실패하며 파리 올림픽 출전권도 놓쳤다.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지만 많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선민은 이에 대해 “대표팀 감독을 처음 맡을 때부터 ‘독이 든 성배’라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독이건 약이건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기에 도전을 했다”며 “아름다운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한국 여자 농구가 가진 전력으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고 생각한다. 2년간 정말 많은 공부를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을 떠난 후 그는 요즘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으면서 간간이 농구 봉사에 나서기도 한다. 지난 연말에는 한국농구연맹(KBL)이 강원 양구에서 연 ‘유스 엘리트 캠프’에 코치로 참여했다. 한국중고농구연맹 소속 남자 중학교 3학년 엘리트 학생 선수 102명을 세 조로 나눠 2박 3일간 집중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양동근 등 은퇴 선수 출신 지도자들이 참석한 이 캠프에서 정선민은 유일한 여성 코치였다. 센터 유망주들의 멘토로 나선 그는 “대표팀 감독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었는데 자라나는 선수들을 가르치면서 에너지 레벨이 한껏 충전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선수 시절 과도한 운동을 한 탓에 그는 발목과 허리가 좋지 않다. 하지만 이를 이겨내는 것 역시 운동이다. 이틀에 한 번은 단지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두시간 가량 운동을 한다.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트레드밀 위에서 땀을 낸 후 하체와 허리 위주로 근력 운동을 한다. 윗몸 일으키기 100개는 거뜬하다. 그는 “근력이 떨어지면 바로 통증이 온다. 좋지 않은 관절은 근력으로 버텨야 한다”며 “인생 100세 시대라고 하지 않나. 남은 50년 동안 꾸준한 운동으로 아프지 않게 살고 싶다”며 웃었다. 농구 외엔 별다른 취미가 없는 그는 요즘도 온통 농구 뿐이다. 오전엔 미국프로농구(NBA)를 보고, 저녁 시간에는 남녀 프로농구를 시청하며 공부를 한다. 정선민은 “언젠가는 프로 팀을 맡아 선수들을 지도해 보고 싶다”며 “평생을 농구인으로 살아온 만큼 농구에서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선수들을 가르칠 곳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서 힘 닿는 데까지 가르쳐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현역 시절 ‘바스켓 퀸’으로 불렸던 정선민(51)은 한국 여자 농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최고였던 그는 1998년 여자프로농구(WKBL) 출범 이후 2012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항상 최고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정선민은 415경기를 뛰면서 8140점(경기당 19.61점), 142리바운드(평균 7.57개), 1777어시스트(4.28개), 771스틸(1.86개)을 기록했고, 7차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다. 2003년에는 한국 선수 최초로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무대에도 진출했다. 누가 봐도 타고난 천재였을 것 같지만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그는 ‘미운 오리’였다. 정선민은 “초등학교 시절엔 ‘볼 보이’를 도맡아 했다. 얼마나 실력이 형편없었던지 중학교에 진학할 때 선생님으로부터 ‘농구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 농구부에 들어갔지만 존재감은 미미했다. 그래서 그는 독학으로 농구를 익혔다. 롤모델은 당시 남자 농구에서 맹활약 중이던 ‘슛 도사’ 이충희였다. 그는 TV에서 본 이충희의 자세를 따라 틈나는 대로 연습했다. 볼품없던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최동원 당시 마산여고 감독이었다. 최 감독은 중학교 3학년이던 정선민에게 마산여고에 와서 언니들과 함께 훈련하라고 지시했다. 얼떨결에 언니들 틈에 끼게 된 그는 혼나지 않기 위해, 또 언니들을 따라잡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쉬는 날도 혼자 체육관에 가서 슛을 던졌다. 그가 ‘백조’로 다시 태어난 것은 고교생이 돼서였다. 고교 입학 후 처음 출전한 경기에서 32점을 쏟아 넣었다. 농구계에선 ‘어디서 이런 선수가 나타났느냐’면서 난리가 났다. 이후 그의 농구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정선민은 “어릴 적 키가 작고 농구를 못 했던 게 어찌 보면 축복이었다. 덕분에 가드부터 포워드까지 다양한 포지션에서 기본기를 닦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지도자로서도 다양한 경험을 쌓는 중이다. 남자 학교인 인헌고를 시작으로 여자 프로팀 하나은행과 신한은행 등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2021년에 한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 사령탑이 돼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땄다. 그는 요즘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지친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으면서 간간이 농구 봉사를 하면서 지낸다. 선수 시절 과도한 운동을 한 탓에 그는 발목과 허리가 좋지 않다. 하지만 이를 이겨내는 것 역시 운동이다. 이틀에 한 번은 단지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2시간가량 운동을 한다. 자전거와 트레드밀에서 땀을 낸 후 하체와 허리 위주로 근력 운동을 한다. 윗몸 일으키기 100개는 거뜬하다. 그는 “근력이 떨어지면 바로 통증이 온다. 좋지 않은 관절은 근력으로 버텨야 한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평생 운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농구 외엔 별다른 취미가 없는 그는 요즘도 온통 농구 생각이다. 오전엔 미국프로농구(NBA)를 보고, 저녁 시간에는 남녀 프로농구를 시청하며 공부를 한다. 정선민은 “언젠가는 프로 팀을 맡아 선수들을 지도해 보고 싶다”며 “평생을 농구인으로 살아온 만큼 농구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전문기자 uni@donga.com}
애주가로 유명한 장갑석 한국 사격대표팀 총감독(64)은 지난해 12월 금주(禁酒)를 선언했다.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왔을 때도 금주를 실천했다. 가족 모임에서는 술 대신 물을 마셨다. 피할 수 없는 회식 자리에는 무알코올 맥주를 가져갔다. 그가 이끈 한국 사격대표팀은 올해 파리 올림픽에서 역대 최고 성적을 냈다. 반효진, 오예진, 양지인 등이 금메달을 따냈고 박하준-금지현, 조영재, 김예지 등은 은메달을 획득하며 금 3, 은메달 3개를 수확했다. 그는 자신이 술을 마시지 않는 대신 훈련장에 나온 선수들에겐 ‘3C 금지령’을 내렸다. 3C는 휴대전화(Cellular), 커피(Coffee), 담배(Cigarette)의 영어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그는 “너 나 할 것 없이 틈날 때마다 휴대전화를 보더라. 휴대전화를 오래 볼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시력이 나빠지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며 “연습을 실전처럼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누가 실전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나. 선수들이 내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 나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평소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리던 그는 이번 대표팀에서는 인자한 감독 선생님이 됐다. 지적보다 격려, 비난보다는 칭찬으로 선수들을 대했다. 그가 선수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네가 최고야”였고, 가장 많이 했던 동작은 ‘엄지 척’이었다. 여름 올림픽 100번째 금메달의 주인공 반효진이 노트북 상단에 붙여 화제가 됐던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다’라는 문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연말을 맞아 종종 술자리를 갖는다. 술을 자주 마시지만 확고한 원칙은 있다. 취해서 비틀거릴 정도로는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일 년에 두 차례 정도 ‘한 달 금주’를 실천한다. 그는 “전날 술을 마셨는데 아침에 숙취가 가시지 않을 때가 있다. 몸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날부터 몸이 회복할 때까지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골프를 좋아하는 그는 연습장에서 땀을 흘릴 정도로 스윙을 많이 한다. 그는 “일주일에 3번가량 연습장에 가서 1시간∼1시간 반가량 운동을 한다. 제대로 스윙을 한 덕분에 뱃살이 쏙 들어갔다”고 했다. 걷는 것도 좋아한다. 어지간한 거리는 차를 이용하기보다는 걸어서 간다. 필드에 나가서도 카트를 타지 않고 걷는 쪽을 선호한다. 핸디 5의 싱글 플레이어인 그는 “골프와 사격은 비슷한 점이 많다. 사격이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골프도 스윙에 조그마한 틈이 있으면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어드레스부터 팔로까지 매 순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 사격을 시작해 50년 넘게 사격과 인연을 맺어오고 있는 그는 내년 2월 65세가 된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인생은 보통 사람의 정년 나이에 다시 시작이다. 그는 향후 2년 더 한국 대표팀 총감독직을 수행한다. 2026년 나고야 아시안게임까지가 임기다. 장 감독은 “파리 올림픽을 통해 발굴한 유망주들이 잘 커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게 목표”라면서 “이후에도 사격과 관련된 봉사를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나 오늘부터 술 끊었다. 올림픽이 끝나는 날 멋진 성적 내고 다시 먹겠다.”1년 전 이맘때의 일이다. 장갑석 한국 사격대표팀 총감독(64)의 갑작스런 금주(禁酒) 선언에 많이 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장 감독은 사격계를 넘어 한국 스포츠계의 대표적인 ‘애주가’로 유명하다. “1년에 닷새 빼고 360일은 술을 마신다” “점심, 저녁 등 하루 두 번 술을 먹는 날도 적지 않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했으니 주변 사람들이 긴가민가했던 것도 당연하다. 장 감독은 자신이 뱉은 말을 지켰다. 진천선수촌에서는 물론이고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왔을 때도 금주를 실천했다. 가족 모임에서는 술 대신 물을 마셨다. 한국 국가대표 선수단 지도자들은 파리 올림픽으로 출발하기 전 선수촌장 주최 회식을 했는데 여기서도 그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회식 자리에는 무알콜 맥주를 가져갔다. 장 감독은 “작년 12월 금주 선언 후 파리 올림픽이 끝난 8월 중순까지 약 8개월 동안 금주했다”며 “예전 딸의 결혼을 앞두고 얼굴 관리를 위해 6개월간 술을 마시지 않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내 인생 최장기간 금주 기록인 것 같다”며 웃었다. 그가 이끈 한국 사격대표팀은 파리 올림픽에서 역대 최고 성적을 냈다. 반효진, 오예진, 양지인 등이 금메달을 따냈고, 박하준-금지현, 조영재, 김예지 등은 은메달을 획득하며 금 3, 은메달 3개를 획득했다. 반효진은 대한민국 여름 올림픽 최연소이자 100번째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고, ‘엄마 사수’ 김예지는 특유의 시크한 표정과 아우라를 드러내며 ‘월드 스타’에 등극했다. 장 감독은 자신이 술을 마시지 않는 대신 선수들에게는 훈련장에서 ‘3C 금지령’을 내렸다. 3C는 휴대전화(Cellular), 커피(Coffee), 담배(Cigarette)의 영어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장 감독은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는데 틈날 때마다 휴대전화를 보더라. 휴대전화를 오래 볼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시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지 않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며 “연습을 실전처럼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실전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는 선수는 없다. 선수들이 내 말을 따르게하기 위해서 나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말했다.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 사격 대표팀에 좋은 영향을 끼친 건 하나 더 있다. 장 감독의 ‘보물 1호’로 국제대회마다 가지고 다니는 황금색 넥타이다. 한국 사격 대표팀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역대 아시안게임 단일 종목 최다인 13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당시 대한사격연맹 경기력향상위원장을 맡고 있던 그는 모든 종목을 관전할 때 바로 그 넥타이를 했다. 그는 “당시 연맹 회장이던 김정 연맹 회장님이 어느 날 회색 넥타이를 하고 나온 날이 있다. ‘당장 넥타이 색깔을 바꾸고 나오시라’고 말씀드렸더니 정말로 노란색 넥타이로 바꿔 메고 오셨다. 그런 기운을 받아서인지 그 대회에서 정말 많은 금메달이 나왔다”고 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도 그는 행운의 넥타이를 가져갔다. 경기장을 갈 때 백 팩에 곱게 넣어가서, 경기를 볼 때마다 그 넥타이 위해 손을 얹은 채 우리 선수들을 응원했다. 그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도 그 넥타이를 가져가곤 했다. 4차례 출전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한국 팀 성적이 항상 좋았다”며 웃었다. 그렇다고 그가 전적으로 기도와 행운에만 의지한 것은 아니다. 평소 ‘호랑이 선생님’으로 통하는 그가 대표팀 총 사령탑에 임명됐을 때 어린 선수들과의 소통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지적보다 격려, 비난보다는 칭찬으로 선수들을 대했다. 그가 선수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네가 최고야”였고. 가장 많이 했던 동작은 ‘엄지 척’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사실을 절감한 선수들은 무럭무럭 성장했다. 반효진이 노트북 상단에 붙여 화제가 됐던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다’라는 문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장 감독은 “기술적인 부분은 모두 코치들이 알아서 했다. 내가 한 것이라곤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준 것밖에 없다”며 “그런데 바로 그 칭찬의 힘이 무섭더라. 자신감으로 무장한 반효진과 오예진은 누구랑 붙어도 질 것 같지 않았다. 평소 경기 전 손을 벌벌 떨곤 하던 양지인도 사선에 서더니 철벽같은 선수가 됐다”고 했다. 파리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뒤 그는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며 미뤘던 음주를 만끽하고 있다. 연말을 맞아 주5일은 자리를 갖는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술을 마셔도 건강은 괜찮은 걸까. 매일 술을 마시는 건 중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에게는 술에 대한 확고한 원칙이 있다. 취해서 비틀거릴 정도로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일 년에 두 차례 정도 한 달 금주를 실천한다. 그는 “전날 술을 마셨는데 아침에 숙취가 가시지 않을 때가 있다. 몸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날부터 몸이 회복할 때까지 한달 가량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또 “애주가와 중독자의 차이는 참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다. 개인적으로는 술을 안 마시겠다고 마음먹으면 안 먹는 게 어렵지 않다. 요즘도 1년에 두 번씩은 몸이 완전히 회복할 시간을 준다”고 했다. 예전에 비해 먹는 양도 줄였다. 섞어 마시지 않고 가능한 한 한 종류의 술만 마시는 편이다. 그는 “예전부터 간에 좋다고 하는 나무를 다려서 먹곤 했다. 요즘에는 각종 채소를 넣어서 만든 야채수프를 끓여 먹는다. 개인적으로는 꽤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그가 가장 많이 하는 운동은 골프다. 대개 사람들처럼 필드에 나가서 걷는 게 아니라 연습장에서 땀을 흘릴 정도로 스윙을 많이 한다. 장 감독은 “일주일에 3번가량 연습장에 가서 1시간~1시간 반가량 운동을 한다. 일요일처럼 시간이 넉넉할 때는 3, 4시간 연습장에 머물기도 한다”며 “골프 스윙이 운동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대로 하면 몸통과 팔 근육을 많이 쓴다. 골프 연습을 열심히 한 덕분에 뱃살이 쏙 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걷는 것도 좋아한다. 어지간히 가까운 거리는 차를 이용하기보다는 걸어서 간다. 필드를 나가서도 카트를 타지 않고 걷는 쪽을 선호한다. 그렇게 골프에 진심인 덕분에 그는 핸디가 5인 싱글 플레이어다. 라이프 베스트는 1오버파인 73타다. 그는 “골프와 사격은 비슷한 점이 많다. 사격이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골프도 스윙에 조그마한 틈이 있으면 공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어드레스부터 팔로우까지 매 순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군 대령 출신으로 충남사격연맹 창설을 이끌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중학교 때부터 사격 선수의 꿈을 키운 그는 50년 넘게 한국 사격 역사의 산증인으로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는 1979년 세계공기총대회 10m 공기권총 금메달리스트이자 1980년 제4회 아시아선수권 금메달리스트 출신이다. 선수 생활을 오래 이어가진 못한 채 1984년부터 모교인 한국체대에서 조교를 맡았고, 1990년에 교수로 임용됐다. 현장 경험에 이론을 겸비한 그는 이후 대한사격연맹에서 실무부회장과 경기력향상위원장, 기술위원장 등을 두루 맡았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 될지도 모를 올해 파리 올림픽에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다. 내년 2월 정년이 되는 그는 40년간 정들었던 학교를 떠난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인생은 65세부터 다시 시작이다. 파리 올림픽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둔 그는 향후 2년 더 한국 대표팀 총감독 직을 수행한다. 2026년 나고야 아시안게임까지가 임기다. 대표팀 사령탑으로서 임기가 끝나면 국제심판 자격으로 국내외 사격장을 다닐 수 있다. 장 감독은 “파리 올림픽을 통해 발굴한 유망주들이 잘 커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게 단기적인 목표”라면서 “이후에도 사격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면서 관련된 봉사를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올해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대상을 차지한 장유빈 선수는 3일 유원골프재단에 장학금 4000만 원을 전달했다. 며칠 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활약 중인 이제영 선수는 자신의 팬클럽 ‘러블리제영’과 함께 장학금 1000만 원을 보냈다. 내년 1월에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뛰고 있는 성유진 선수가 장학금 1000만 원을 전달할 예정이다. 이렇게 모인 장학금은 모두 골프 꿈나무 육성을 위해 사용된다. 유원골프재단은 김영찬 골프존뉴딘그룹 회장(사진)이 사재를 털어 엘리트 골퍼 양성과 골프 산업 발전을 위해 2015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유망주들이 골프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골프 꿈나무 장학금 후원 사업’과 유망주들의 국제 경험 확대를 위한 ‘국제대회 참가비 지원 사업’, ‘유소년 성적우수 장학생 선발’, ‘프로골프선수 지원 사업’ 등을 펼쳐왔다. 재단 출범 후 약 10년 동안 113억 원을 조성해 골프 꿈나무 육성과 골프 산업 발전을 위해 활용했으며 혜택을 받은 선수는 1000여 명에 이른다. 유소년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장유빈 선수는 2017년부터 2020년까지 골프 꿈나무 장학생에 선정돼 재단으로부터 후원을 받아왔다. 이제영 선수 또한 2022년부터 유원골프재단의 프로골프선수 지원 사업 대상자에 선발돼 훈련비를 지원받고 있다. 성유진 선수는 2017년 골프존레드베터아카데미(GLA) 장학생으로 선발돼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받았고 2020년부터는 프로골프선수 후원을 받으며 유원골프재단과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성장한 선수들이 이제는 거꾸로 후배 유망주들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7일 후원식에서 이제영 선수는 “유소년 시절 유원골프재단의 프로암 골프대회에 출전해 나눔의 기쁨을 배울 수 있었다”며 “이제는 골프 산업계를 함께 이끌어갈 후배들을 위해 진정성 있는 나눔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유원골프재단 이사장은 “우리 선수들의 기부는 후배들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성장하는 데 뜻깊은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며 “기부해 주신 따뜻한 마음에 동감해 유원골프재단 또한 골프 산업 발전과 골프 인재 양성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나갈 것”이라고 전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올 시즌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친 ‘추추 트레인’ 추신수(42·사진)가 구단주 보좌역 겸 육성총괄로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다. 프로야구 SSG 구단은 27일 “솔선형 리더십을 가진 추신수는 선수단 내 신뢰가 두텁고 소통 능력이 우수하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구단에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도 갖추고 있다. 그동안 쌓아온 자산을 활용해 팀 전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그를 구단주 보좌역 겸 육성총괄로 선임한 배경을 설명했다. 구단주에게 직간접적인 조언을 하며 구단 운영에 관여하는 구단주 보좌역은 MLB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자리다. MLB에서 활약했던 일본인 선수 스즈키 이치로(51)도 은퇴 후 시애틀 구단의 특별 보좌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이 보직을 맡게 된 추신수는 “중책을 맡겨 주신 구단에 감사드린다. 다시 한번 한국프로야구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돼 많이 설렌다”며 “1군과 2군 선수단의 가교 역할뿐 아니라 선수단 운영에 대한 의견도 적극 개진하겠다”고 말했다. 추신수는 구단과의 협의를 통해 보직과 관련한 보수는 받지 않기로 했다. 추신수는 2005∼2020년 MLB 1652경기에 출전해 통산 타율 0.275(6087타수 1671안타), 218홈런, 782타점, 157도루를 기록했다. 2021년 SSG에 입단해 올해까지 4년간 통산 타율 0.263, 54홈런, 205타점, 51도루를 기록한 뒤 은퇴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진출에 도전하고 있는 내야수 김혜성(25·키움)의 계약이 해를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달 말 미국으로 출국했던 김혜성은 계약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최근 귀국했다. 키움 관계자는 27일 “김혜성이 미국 도전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라며 “에이전시가 미국 현지에서 MLB 구단들을 상대로 여전히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키움 구단에 따르면 김혜성의 연내 귀국은 예정됐던 일이다.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병역 특례를 적용받은 김혜성은 이수해야 할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지 못해 현재 군인 신분이다. 해외 체류 기간도 제한돼 있어 일시적으로 귀국했다는 설명이다. 계약이 임박하면 김혜성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해 협상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미국 현지에서는 2루수가 필요한 시애틀이 김혜성을 영입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단으로 꼽힌다. 샌디에이고, LA 에인절스, 토론토 등도 잠재적인 수요 구단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고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은 아니다. 5일 오전 2시 MLB 30개 구단에 포스팅이 공시된 김혜성은 내년 1월 4일 오전 7시까지 계약을 마무리해야 한다. 기한을 넘기면 포스팅은 자동 무효가 된다. 이전에도 해를 넘겨 계약에 성공한 사례는 여러 번 있었다. 역시 키움 출신으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샌디에이고와 계약한 내야수 김하성(29)은 포스팅 공시 25일 만인 2021년 1월 1일에 계약서에 사인했다. 지난해 샌디에이고에 입단한 투수 고우석(26·마이애미)은 협상 마감일인 1월 4일에 계약을 마무리했다.샌디에이고에서 자유계약선수(FA)로 풀려 시장에 나온 김하성도 새해가 돼야 새 팀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2023시즌 유틸리티 부문 골드글러브 수상자인 김하성은 올 시즌을 마친 후 1억 달러(약 1475억 원) 이상의 대형 계약이 기대됐지만 시즌 중반에 당한 어깨 부상으로 계약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지 매체들은 김하성이 옵트아웃 조항이 포함된 1, 2년짜리 단기 계약을 한 뒤 다시 대형 계약을 노릴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한국프로야구에서 외국인 선수는 복권에 비유되곤 한다. 대박이 날 수도 있지만, 부상이나 적응 실패로 기대 이하에 그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많은 구단이 검증된 선수를 선호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프로야구 10개 구단이 팀당 3명씩 모두 30명의 외국인 선수와 계약을 사실상 마무리한 가운데 이 중 절반이 넘는 17명이 한국 무대에서 뛴 적이 있는 경력자들이다. 올 시즌 타점왕인 오스틴 딘(LG), 타격왕 기예르모 에레디아(SSG), 홈런왕 맷 데이비슨(NC) 등이 대표적이다. 투수 중에선 KIA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제임스 네일, 롯데의 왼손 선발투수 찰리 반즈 등이 재계약에 성공했다.KT는 2019년 입단한 오른손 투수 윌리엄 쿠에바스와 7년 연속 동행을 이어간다. 외야수인 멜 로하스 주니어와도 재계약한 KT는 키움에서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린 투수 엔마누엘 데 헤이수스를 데려오면서 3명의 외국인 선수를 모두 한국프로야구 경력자들로 채웠다. 올해 한국시리즈 준우승팀 삼성도 아리엘 후라도, 데니 레예스, 르윈 디아즈 등 3명 모두 한국야구 경력 선수들이다.두산은 다른 선택을 했다. 외국인 선수를 모두 새 얼굴로 교체했다. 세 명 모두에게 신입 외국인 선수 몸값 상한액인 100만 달러(약 14억6000만 원)씩 안기며 총 3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셋 중 가장 기대를 모으는 선수는 왼손 투수 콜 어빈이다. 2019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필라델피아에서 데뷔한 어빈은 오클랜드, 볼티모어, 미네소타를 거치며 6시즌 동안 134경기(93경기 선발)에 등판해 28승 40패, 평균자책점 4.54를 기록했다. 올 시즌엔 볼티모어와 미네소타에서 뛰면서 29경기에 나서 6승 6패, 평균자책점 5.11을 기록했다. 두산은 역시 왼손 투수인 잭 로그가 어빈과 함께 원투펀치로 나선다. 로그 역시 2022년부터 올해까지 세 시즌 동안 MLB에서 뛴 경험이 있다. 새 외국인 타자 제이크 케이브는 올해 콜로라도에서 123경기에 출전해 타율 0.251, 7홈런, 37타점을 기록한 현역 메이저리거 출신이다. 올해 두산은 외국인 투수들의 부진으로 속을 끓여야 했다. 브랜든과 알칸타라가 부상으로 제 몫을 해주지 못했고, 대체 외국인 선수로 데려온 시라카와, 발라조빅도 기대에 못 미쳤다. 외국인 투수 4명이 거둔 전체 승수가 15승에 불과했다. 외국인 투수들의 부진 속에 두산은 KT와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패하며 허무하게 가을야구를 마감했다. 허경민이 KT로 떠나고, 김재호도 은퇴한 두산으로선 새 얼굴들의 활약에 기대를 걸고 있다.키움은 10개 팀 중 유일하게 외국인 타자 2명과 투수 1명으로 내년 시즌을 시작한다. 한국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쿼터가 3명으로 정해진 2015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올해 팀 타율(0.264), 홈런(104개), 득점(672점) 등에서 모두 리그 최하위에 그친 팀 사정을 고려한 선택이다.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MLB 진출에 도전하고 있는 김혜성의 공백도 영향을 미쳤다. MLB 출신으로 2022년 키움에서 뛰었던 강타자 야시엘 푸이그와 지난해 삼성의 대체 외국인 타자로 한국 무대에 데뷔했다가 부상으로 7경기 만에 팀을 떠난 루벤 카디네스(삼성 시절 등록명은 카데나스)가 키움의 외야 두 자리를 채운다.KIA의 아담 올러, LG 요니 치리노스, SSG 미치 화이트 등은 올 시즌까지 MLB에서 뛰었던 투수들이다. 에릭 페디(세인트루이스), 메릴 켈리(애리조나)처럼 한국에서의 활약을 발판 삼아 MLB 복귀에 성공하는 선수들이 늘면서 한국행을 선택하는 빅리그 출신들이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한국프로야구에서 외국인 선수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투수 두 명이 ‘원투펀치’로 선발 마운드를 버텨주고, 외국인 타자가 홈런을 펑펑 쳐주는 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다. 어느 팀이건 외국인 선수 농사만 잘 지어도 5강권은 무난하다. 그런데 야구계에서 외국인 선수는 복권에 비유되곤 한다. 대박이 날 수도 있지만, 부상이나 적응 실패로 불발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구단들이 한국 무대에서 검증된 선수를 선호한다. 10개 팀이 팀당 3명씩 모두 30명의 외국인 선수 선발을 사실상 마무리 지은 가운데 절반이 넘는 17명이 KBO리그에서 뛴 적이 있는 경력자들이다. 올 시즌 타점왕을 차지한 LG 오스틴, 타격왕 SSG 에레리아, 홈런왕 NC 데이비슨 등이 대표적이다. 투수 중에는 KIA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네일, 롯데 왼손 선발 투수 반즈 등이 재계약에 성공했다. KT는 2019년 입단한 오른손 투수 쿠에바스와 7년 연속 동행을 이어간다. 외국인 타자 로하스와 재계약한 KT는 키움에서 자유계약선수로 풀린 투수 헤이수스를 데려오면서 3명의 외국인 선수를 모두 KBO리그 출신으로 채웠다. 올해 한국시리즈 준우승팀 삼성도 후라도, 레예스, 디아즈 등 3명이 모두 한국 야구 경력자들이다. 180도 다른 행보를 보인 팀은 두산이다. 두산은 세 명의 외국인 선수를 모두 새 얼굴로 교체하며 신입 외국인 선수 상한액인 100만 달러씩, 총액 3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가장 기대를 모으는 선수는 에이스로 데려온 왼손 투수 콜 어빈이다. 2019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필라델피아에서 데뷔한 어빈은 6시즌 동안 134경기(93경기 선발)에 등판해 28승 40패, 평균자책점 4.54를 기록했다. 올해도 볼티모어와 미네소나 등에서 6승(6패, 평균자책점 5.11)을 거뒀다. 내년 시즌 한국 무대를 누비게 될 외국인 선수 중 커리어가 가장 화려하다. 다른 한 명의 왼손 투수 잭 로그가 어빈과 함께 원투펀치로 나선다. 로그 역시 2022년부터 올해까지 세 시즌 동안 MLB에서 뛴 경험이 있는 빅리그 출신이다. 새 외국인 타자 제이크 케이브도 올해 콜로라도에서 123경기에 출전해 타율 0.251, 7홈런, 37타점을 기록한 현역 메이저리거다. 두산은 올해 외국인 투수들의 부진에 속을 끓여야 했다. 브랜든과 알칸타라가 부상으로 제 몫을 해주지 못했고, 대체 외국인 선수로 데려온 시라카와, 발라조빅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4명의 외국인 투수가 합작한 승수는 15승에 불과했다. 외국인 투수들의 부진 속에 두산은 KT와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도 패하며 허무하게 가을야구를 마감해야 했다. 허경민이 KT로 떠나고, 김재호마자 은퇴한 두산으로서는 새 얼굴들의 활약에 기대를 걸고 있다. 키움은 10개 팀 중 유일하게 외국인 타자 2명과 투수 1명으로 내년 시즌을 시작한다. 이는 KBO리그에 외국인 선수 쿼터가 3명으로 정해진 2015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메이저리그 출신으로 2022년 키움에서 뛰었던 강타자 야시엘 푸이스와 지난해 삼성의 대체 외국인 타자로 KBO리그에 데뷔했다가 7경기 만에 부상으로 팀을 떠난 카디네스(삼성 시절 등록명은 카데나스)가 라인업을 차지한다. 올해 팀 타율(0.264), 홈런(104개), 득점(672점) 등에서 모두 최하위에 그친 팀 사정을 고려한 조치다.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MLB 진출에 도전하고 있는 중심 타자 김혜성의 공백도 영향을 미쳤다. 새롭게 한국 땅을 밟는 선수 중에는 올해까지 MLB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적지 않다. KIA 아담 올러, LG 요니 치리노스, SSG 미치 화이트 등은 단번에 에이스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선수들이다. 에릭 페디(세인트루이스), 메릴 켈리(애리조나)처럼 KBO리그를 발판으로 MLB에 복귀한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예전에 비해 한국행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높아졌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LA 다저스의 일본인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사진)가 AP통신이 선정하는 ‘올해의 남자 선수’로 뽑혔다. AP통신은 자사 및 회원사 투표 결과 오타니가 전체 74표 중 48표를 얻어 1위에 올랐다고 24일 전했다. 오타니는 2024 파리 올림픽 수영 4관왕에 오른 레옹 마르샹(프랑스·10표), 올해 마스터스와 파리 올림픽 등에서 우승한 남자 골프 세계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미국·9표)를 여유 있게 앞섰다. 오타니와 함께 ‘올해의 남자 선수’ 후보에 올랐던 MLB 뉴욕 양키스의 거포 에런 저지(미국)는 1표를 얻는 데 그쳤다. 오타니가 AP통신 선정 ‘올해의 남자 선수’로 뽑힌 건 LA 에인절스에서 뛰던 2021년과 2023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오타니는 이 상을 세 차례 수상한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 상을 가장 많은 받은 남자 선수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미국프로농구(NBA)의 레전드 르브론 제임스,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이상 미국) 등으로 각각 4차례 선정됐다. 오타니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자랄 때부터 조던과 우즈를 동경해 왔다. 매우 영광스럽다. 내년에도 이 상을 다시 받고 싶다”고 말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10년간 7억 달러(약 1조195억 원)를 받는 계약을 하고 다저스로 이적한 ‘이도류’ 오타니는 어깨 수술 여파로 지명타자로만 경기에 출전했는데 빼어난 타격 실력을 보여 주며 정규시즌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특히 홈런 54개와 도루 59개를 기록하며 MLB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50홈런-50도루’를 달성했고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어깨 수술 후 회복 중인 오타니는 내년 시즌엔 다시 투수와 타자를 겸할 것으로 보인다. 오타니는 “개인적인 목표는 내년 개막 경기 전까지 몸 상태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막 경기부터 던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상황에 맞춰 투구 시작 시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AP통신이 선정하는 ‘올해의 여자 선수’는 25일 발표된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LA 다저스의 일본인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29)가 AP통신이 선정하는 ‘올해의 남자선수’로 뽑혔다.AP는 24일 회원사 투표 결과 총 74중 오타니가 48표를 획득해 압도적인 1위에 올랐다고 전했다. 2024 파리올림픽 수영 4관왕인 레옹 마르샹(프랑스)이 10표를 얻어 2위에 올랐고, 올해 마스터스와 올림픽 등에서 우승한 남자 골프 세계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미국)가 9표를 획득해 3위를 했다. 아메리칸리그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뉴욕 양키스의 거포 에런 저지는 1표를 얻는 데 그쳤다. 오타니가 올해의 남자선수로 뽑힌 것은 LA 에인절스 시절이던 2021년과 2023년에 이어 통산 세 번째다. 이번 수상으로 오타니는 역시 이 상을 세 차례 수상한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퇴)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남자 선수 중에서 이 상을 가장 많은 받은 선수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미국프로농구(NBA)의 살이있는 전설 르브론 제임스, 사이클의 랜스 암스트롱 등 3명으로 모두 4차례 올해의 남자 선수로 뽑혔다. 오타니는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자랄 때부터 조던과 우즈를 동경해왔다. 매우 영광스럽다. 내년에도 이 상을 다시 받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올 시즌에 앞서 10년 7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받고 다저스로 이적한 오타니는 1번 지명타자로 출전하며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54홈런-59도루로 MLB 역사상 최초로 50홈런-50도루를 달성했다. 작년 받은 어깨 수술에서 회복 중인 오타니는 내년 시즌에는 다시 투수와 타자를 겸업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오타니는 “개인적인 목표는 내년 개막전까지 완전한 몸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개막전부터 던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상황에 맞춰 피칭 시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AP통신의 ‘올해의 여자선수’는 25일 발표될 예정이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