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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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중요하지 않은, 하지만 누군가에겐 재미있을지도 모를 스포츠의 뒷담화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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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나가던 방송인에서 ‘운동쟁이’로 돌아온 장재근 “선수촌장 꿈 이뤄 행복”[이헌재의 인생홈런]

    장재근 진천선수촌장(62)은 1980년대 한국 최고의 스프린터였다. 1982년 뉴델리,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 육상 남자 200m에서 두 대회 연속 금메달을 땄다. 한국 신기록을 4번, 아시아 신기록을 2번이나 갈아 치우며 ’아시아 단거리 황제’로 군림했다. 원체 타고난 신체조건도 좋았지만 정신력도 강했다. 여기에 치열한 훈련까지 더해져 체력적으로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아시아의 육상 강국은 일본이었다. 장재근의 생각은 “무조건 일본 선수는 잡는다”는 것이었다. 육상 200m는 이틀에 걸쳐 예선과 준결선, 그리고 결선을 치렀다. 메달을 바라보는 선수들은 예선과 준결선에서는 대개 페이스를 조절한다. 하지만 장재근은 달랐다. 초반부터 앞만 보고 달렸다. 그는 “예선부터 일본 선수한테는 지기 싫더라. 그래서 출발 총성이 울리자마자 초반부터 치고 나갔다. 그런데 그게 먹혔다”며 “일본 선수가 나를 신경 쓰느라 예선부터 자기 페이스를 잃었다. 워낙 훈련량이 많다 보니 나도 그걸 버텼던 것”이라며 웃었다. 장재근은 또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한 ‘올림피언’이기도 하다. 장재근의 작전은 아시안게임 때와 같이 ‘초반부터 조지기’였다. 하지만 세계 무대에서 이 작전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상대 선수가 당대 최고의 스프린터이던 칼 루이스(미국)와 벤 존슨(캐나다) 등이었기 때문이다. 장재근이 초반부터 스퍼트를 하건 말건 이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장재근은 그래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준준결선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장재근은 “아시아 무대에선 날다 긴다 했을지 몰라도 세계적인 선수들은 말 그대로 ‘어나더 레벨’이었다. 칼 루이스 같은 선수는 경기 때뿐 아니라 평소에도 세계 일인자로서의 여유로움이 넘쳤다”며 “그 선수들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했다. 평소 안면이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고 말했다. 1990년 은퇴 후 그는 트랙을 벗어나 한동안 ‘외도’를 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에 물 흐르는 듯한 언변을 앞세워 방송계로 진출한 것이다. 에어로빅 강사로 인기를 모았고, 예능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홈쇼핑 호스트로도 얼굴을 내밀었다. 짧은 기간에 운동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속은 편하지 않았다. 장 촌장은 “가장이다 보니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송 쪽 일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트랙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졌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는 “아내는 막고 싶은데 ‘내가 육상을 얘기할 때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하지 말라고 못 하겠더라’고 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나갈 때는 쉬웠지만 들어오는 건 쉽지 않았다. “돈 보고 떠난 놈이 배고픈 동네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돌아오느냐”는 게 육상계의 분위기였다. 감독, 코치 등 지도자가 아닌 심판으로 다시 육상의 문을 두드렸다. 하루 육상 대회 심판을 보면 일당 5만 원을 받았다. 딱히 일이 없을 때면 육상장 주변 편의점에서 육상 지도자들과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2, 3년을 지낸 후에야 다시 육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마흔이 되기 전이었다.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도 부끄럽지 않을 때였기에 육상계 복귀가 가능했던 것 같다”고 했다.이후 국가대표 코치, 육상연맹 트랙기술위원장, 실업팀 감독 등을 거친 그는 2023년 3월 꿈에 그리던 진천선수촌장을 맡았다. 그의 롤모델은 ‘영원한 선수촌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김성집 전 촌장(1919~2016)이었다. 김성집 전 촌장은 1948년 런던 올림픽 역도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대한민국 수립 후 최초로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두 대회 연속 메달을 목에 걸었다. 선수에서 은퇴한 후로는 행정가로 변신했다. 특히 1976년부터 1994년까지 중간에 다른 직책 맡은 기간 빼고 13년 7개월 동안 태릉선수촌장으로 국가대표 선수들을 육성하는데 힘썼다. 태릉선수촌장 시절 선수들에게 공포이었던 불암산 크로스컨트리를 활성화시켰다.김 전 촌장은 ‘호랑이’, ‘염라대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한편으로는 선수들에게 자상하고 따뜻한 어른이기도 했다. 장재근은 “김 촌장님에 대한 기억 대부분은 욕먹은 것밖에 없다. 젊은 혈기에 태릉선수촌 담장을 뛰어 넘어 놀러 나가곤 했는데 촌장님한테 걸리면 엄청 혼났다. 반성문도 여러 번 썼다”며 웃었다. 그는 “하지만 김 촌장님은 선수촌을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기운에도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신 분이었다. 그분이 계실 땐 누구도 선수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지 않았다”며 “그렇게 온몸으로 선수와 지도자를 막아주신 덕분에 선수들은 마음 놓고 훈련만 할 수 있었다. 그분이 안 계셨다면 ‘스프린터 장재근’도 오늘날 한국 체육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촌장처럼 장재근도 진천선수촌장으로서 최대한 선수들과 함께 하려 노력했다. 논란 속에서도 오전 6시 새벽 산책을 부활시킨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힘든 오전 훈련을 소화하려면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시작해야 한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이다”라며 “자발적으로 잘하는 선수도 있지만 어떤 선수들은 끌고 가줘야 한다. 더구나 선수촌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 아닌가. 적어도 선수촌에 들어왔다면 누가 봐도 지켜야 할 것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새벽부터 선수들의 훈련이 끝나는 저녁까지 선수촌을 지켰다. 훈련이 끝난 뒤에는 각 종목 지도자들과 저녁 자리를 갖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오후 9시 이후엔 혼자 트랙을 뛰거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며 건강을 다졌다. 그렇게 그는 2년간 엘리트 스포츠 부흥을 위해 앞만 보고 뛰었다. 다행히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50명) 이후 가장 적은 144명의 선수가 출전했는데 역대 최다 타이인 13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은 9개, 동메달 10개 등 전체 메달은 32개를 기록했다. 그는 “선수촌은 한국 엘리트 체육의 마지막 보루이자 성지다. 최선을 다해 좋은 성적을 내준 우리 선수들에게 너무 고맙다”고 했다. 선수촌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일주일에 하루 서울에 있는 집에 갔다. “왜 출퇴근을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선수촌에 있는 게 너무 행복하다. 평생 운동을 해 온 나는 누가 뭐래도 ‘운동쟁이’다. 선수들, 지도자들과 같이 웃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라고 말했다. 2월 말로 2년간의 임기가 끝나는 그는 “내가 선수 생활을 할 때만 해도 주입식으로 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이제는 선수들 스스로가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갖고 운동해야 한다”며 “자신의 꿈을 위해 젊음을 투자하는 거다. 자신의 꿈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 언제든 집중력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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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재의 인생홈런]‘스프린터’ 장재근 “선수촌장 2년이 인생 최고 행복”

    장재근 진천선수촌장(62)은 1980년대 한국 최고의 스프린터였다. 1982년 뉴델리,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남자 200m에서 두 대회 연속 금메달을 땄다. 한국 신기록을 4번, 아시아 신기록을 2번이나 갈아 치우며 ‘아시아 단거리 황제’로 군림했다. 1990년 은퇴한 그는 트랙을 벗어나 한동안 ‘외도’를 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에 물 흐르는 듯한 언변을 앞세워 방송계로 진출한 것이다. 에어로빅 강사로 인기를 모았고, 예능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홈쇼핑 호스트로도 얼굴을 내밀었다. 짧은 기간에 운동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속은 편하지 않았다. 장 촌장은 “가장이다 보니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송 쪽 일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트랙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졌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는 “아내는 막고 싶은데 ‘내가 육상을 얘기할 때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하지 말라고 못 하겠더라’고 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나갈 때는 쉬웠지만 돌아오는 건 쉽지 않았다. “돈 보고 떠난 놈이 배고픈 동네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돌아오느냐”는 게 육상계의 분위기였다. 감독, 코치 등 지도자가 아닌 심판으로 다시 육상의 문을 두드렸다. 육상 대회 심판을 보고 일당 5만 원을 받았다. 주변 육상인들과 몸을 부대끼며 그렇게 2, 3년을 지낸 후에야 다시 육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마흔이 되기 전이었다.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도 부끄럽지 않을 때였기에 복귀가 가능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이후 국가대표 코치, 육상연맹 트랙기술위원장, 실업팀 감독 등을 거친 그는 2023년 3월 꿈에 그리던 진천선수촌장을 맡았다. 이달을 끝으로 2년 임기를 마감하는 그는 지난 2년간 엘리트 스포츠 부흥을 위해 앞만 보고 뛰었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50명) 이후 가장 적은 144명의 선수가 출전했는데 역대 최다 타이인 13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 등 전체 메달은 32개를 기록했다. 그는 “선수촌은 한국 엘리트 체육의 마지막 보루이자 성지다. 최선을 다해 좋은 성적을 내준 우리 선수들에게 너무 고맙다”고 했다. 선수촌장에 처음 임명됐을 때부터 그는 김성집 전 촌장(1919∼2016년)을 닮고자 했다. 1948년 런던,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역도 동메달리스트인 김 전 촌장은 ‘영원한 선수촌장’으로 기억된다. 1976년부터 9대, 11대와 12대 태릉선수촌장으로 모두 13년 7개월 동안 국가대표의 훈련을 총괄했다. 장 촌장은 “김 촌장님은 언제나 선수촌을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신 분이었다. 덕분에 나도 마음껏 운동하며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며 “미숙한 점도 있었겠지만 나도 선수들과 지도자들은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김 전 촌장처럼 장 촌장도 최대한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려 했다. 오전 6시 새벽 산책 때부터 선수들과 함께했다. 선수들의 훈련이 모든 끝난 오후 9시 이후엔 혼자 트랙을 뛰거나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며 건강을 다졌다. 장 촌장은 “밖에서 보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하겠지만 선수촌에서 지낸 지난 2년이 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했던 순간이었다”며 “‘운동쟁이’인 나는 평생 운동과 함께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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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수동적인 문화 바꿔야…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체육회 만들 것”

    《“선수 때부터 계란으로 바위를 여러 번 쳐 봤다. 두려움 없이, 열심히 치고 또 치다 보니 결국 바위가 깨지더라.” 14일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집고 새 체육회장에 당선된 유승민 당선인(43)의 지론이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계란으로 바위를 깨곤 했다. 많이 이들이 기억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탁구 단식 결승에서 중국의 왕하오를 이긴 것이다. 이전까지 왕하오와 여섯 번 붙어 여섯 번 모두 패했던 그는 올림픽 금메달을 놓고 벌인 경기에서 4-2로 승리했다. 21년이 지난 지금까지 올림픽 탁구 단식에서 중국 선수를 꺾고 금메달을 딴 사람은 유 당선인이 유일하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기간 중 치러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이름값이나 경력을 감안할 때 당선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혈혈단신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선수촌을 누볐다. 하루 3만5000보씩 걸어 다니느라 살이 5kg 넘게 빠졌다. 처음엔 눈길도 주지 않던 선수들이 하나둘씩 아는 척을 했다. 그는 결국 4명을 뽑는 선거에서 2위로 당선되며 IOC에 입성했다. 그리고 이번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대이변을 일으켰다. 8년간 회장직을 맡으며 ‘콘크리트 지지층’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던 이기흥 현 대한체육회장을 꺾고 한국 체육의 수장이 된 것이다. 다음 달 문화체육관광부의 승인을 앞두고 있는 유 당선인을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났다.》―이번 체육회장 선거 결과를 기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나. “많은 분들이 기적이라고 말씀해 주시지만 준비의 결과인 것 같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온다. 준비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번 선거 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했다. 최선을 다했기에 만약 졌다 하더라도 아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선택받지 못했다면 ‘내가 부족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를 믿고 뽑아 주신 만큼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 선거인단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하나. “선수 출신이자 젊은 후보로서 다른 후보들이 못 하는 나만의 선거운동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거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대한체육회 산하 68개 종목을 모두 체험한 뒤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것이었다. 해당 종목을 몸소 체험하는 게 그 종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하루에 스무 종목을 찍은 날도 있다. 강이 얼어 있어 카누, 조정 같은 수상 종목은 못 했다. 패러글라이딩도 예약을 해 놓고 날씨 사정이 좋지 않아 못 했다. 나중에라도 반드시 체험해 볼 생각이다.” ―반(反)이기흥 후보들 간의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아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유 당선인은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가 약점으로 꼽히기도 했는데…. “단일화를 추진하던 다른 후보님들께도 솔직히 얘기했다. 부족한 점, 단점은 고치고 보완하면 되는데 나이가 적은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체육회장으로 일하는데 나이보다는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대한체육회장이라는 자리는 혼자 일하는 게 아니다. 젊은 사람들의 패기와 나이 있으신 분들의 연륜이 조화되는 게 중요하다. 저보다 경험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동시에 젊은이답게 창조적인 일들을 많이 해 나가겠다.” ―선거 승리 후 이기흥 후보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고 들었다. “이 후보뿐만 아니라 함께 경쟁했던 모든 후보들 한 분 한 분께 전화를 드렸다. 이 후보께서도 투박한 충청도 사투리로 ‘잘 혀, 잘 혀’라고 말해 주셨다. 저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했던 스포츠인이다. 선거 과정에서는 마음 아픈 네거티브도 있었다. 하지만 선거 땐 적으로서 치열하게 다투었을지 몰라도 결과가 나온 순간부터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스포츠다.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는 공정한 룰로 경쟁하고, 승부가 결정된 후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이 유 당선인에게 ‘하드워커(hard worker·열심히 일하는 사람)’란 별명을 붙여줬다. 끊이지 않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나. “IOC 선수위원이 되면서 가장 먼저 결심했던 게 ‘누구보다 부지런한 일꾼이 되자’는 거였다. 저도 인간이니만큼 힘들고 피곤할 때가 있다. 하지만 체육인들과의 약속,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크다. 머리는 ‘오늘은 하루 쉴까’라고 속삭이는데 몸이 먼저 밖으로 나간다. 사실 몸이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다. 다양한 분을 상대하고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정신적인 부분이 힘들 때가 있다.” ―그래도 힐링이 필요하지 않나. 정신적인 리프레시는 어떤 식으로 하나. “두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유일한 힐링 포인트다. 지난 주말(18일)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축구를 하는 큰아들(성혁 군)이 전지훈련을 하고 있는 경남 함안을 찾았다. 함안에 간 김에 그곳에서 훈련 중인 여자축구 선수들도 만났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들(성공 군)도 축구를 한다. 두 아이가 모두 축구를 하는 학부모이다. 학부모로서 직접 보고 느낀 현장의 어려움을 정책적으로 잘 풀어가 보려 한다.” ―대한체육회장으로서 임기 내에 반드시 해내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학교 체육 활성화와 일반 학생들의 스포츠 활동을 조화롭게 해 모든 이들이 체육을 즐겁고 행복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먼저 엘리트 체육의 기반이 되는 학교 체육이 활성화돼야 한다. 현재 학생 선수들을 가로막고 있는 각종 규제가 적지 않다. 이런 부분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 엘리트 체육은 언제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 구조에서는 엘리트를 원하는 학생 선수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들을 시행하려 하나. “대표적으로 전국소년체육대회의 위상을 예전처럼 높이는 데 집중하려 한다. 스포츠는 목표와 동기가 있어야 발전한다. 그런데 요즘 소년체전은 명맥만 이어가고 있을 뿐 선수가 1등을 하고 메달을 따 와도 그리 환영받는 분위기가 아니다. 지도자 처우 개선 역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요즘 지도자분들은 코치 역할뿐만 아니라 테이핑, 심리 상담, 운전, 부모님 케어까지 온갖 업무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지도자는 거의 없다. 교육부와 교육청 등을 찾아다니며 학교 체육과 관련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생각이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 역대 최다 타이인 13개의 금메달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한국 체육의 위기를 말한다. “파리 올림픽에서 32개 종목이 열렸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딴 13개의 금메달은 양궁, 사격, 펜싱, 태권도, 배드민턴 등 다섯 종목에서 나왔다. 우리가 잘한 종목도 생각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종목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웃 나라 일본은 파리에서 20개의 금메달 등 45개의 메달을 땄다. 우리와의 차이는 육상과 수영 등 기초 종목을 비롯해 다양한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하며 세계 정상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8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때 전통의 메달밭인 양궁이나 펜싱이 컨디션 난조 등으로 무너지면 우리나라의 메달은 급격히 줄어들 우려가 있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기초 종목부터 차근차근 다시 키워야 한다.” ―대한체육회 내부에 대해 강도 높은 개혁을 예고했는데…. “체육회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능력 있는 직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수동적으로 일해 온 것 같다. 능력과 창의, 추진력이 같이 올라와야 한다. 젊은 회장답게 젊은 분위기, 적극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또 국제 업무와 같이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전문성을 키울 수 있도록 돕겠다. 대부분의 국가올림픽위원회(NOC)는 전문적으로 국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 체육회는 2년마다 한 번씩 사람을 바꿨다. 이런 부분들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체육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 기업의 후원도 중요한데…. “경기인 출신이지만 기업 후원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고,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 선수단이 ‘30대 기업 어디로부터도 후원을 못 받았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체육이 잘되려면 기업들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된다. 선수 시절 삼성 로고가 달린 유니폼을 입었다. 이를 통해 삼성이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잘 알고 있다. 스포츠에 관심 있는 기업들과 적극적으로 협의하겠다.” ―이기흥 회장 시절 체육회와 정부가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는데…. “사실 체육회와 정부가 왜 척을 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정부가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지시를 한다면 싸우는 게 당연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상호 협력해야 한다. 우리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만 있다면 자존심을 굽히고 머리를 숙일 수 있다.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주변 사람이 힘들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 정부뿐만 아니라 학교와 교육기관, 기업 등 체육에 도움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갈 생각이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건 열심히 하는 것뿐이다.”유승민 대한체육회장 당선인(43)△1982년 인천 강화 출생△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자 복식 4위△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단식 금메달△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단체전 동메달△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단체전 은메달△2016∼2024년 IOC 선수위원△2018 평창 겨울올림픽 선수촌장△2019∼2024년 대한탁구협회장△2025년 대한체육회장 당선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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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운 오리’였던 ‘바스켓퀸’ 정선민 “이충희 아저씨 덕에 ‘백조’ 됐죠” [이헌재의 인생홈런]

    현역 시절 ‘바스켓 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정선민(51)은 한국 여자 농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코트 위에 선 여왕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농구대잔치 시절부터 최고로 군림했던 그는 1998년 여자프로농구(WKBL) 출범 이후에도 2012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7차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고, 몸담았던 팀 대부분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프로농구에서 415경기를 뛰면서 8140점을 기록했다. 경기당 19.61점꼴이다. 3142리바운드(평균 7.57), 1777어시스트(4.28개), 771스틸(1.86개) 등 공격이면 공격, 수비면 수비 등 못 하는 게 없었다. 트리플 더블도 8차례나 기록했다.그가 한국 여자 농구 역사상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중학교 시절까지는 볼품없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또래 중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부로 뽑혔다. 그런데 막상 농구팀에 가보니 작은 축에 속했다. 그래서 그는 가드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중학생이 돼서 키가 좀 큰 뒤에는 포지션을 포워드로 바꿨다. 본격적으로 센터를 맡은 건 고교 입학 후였다. 포지션이 자주 바뀌었다는 건 주전이 아니었다는 것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누가 봐도 타고난 천재였을 것 같지만 중학생까지만 해도 그는 ‘미운 오리’ 같은 선수였다.정선민은 “많은 분들이 내가 처음부터 농구를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신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엔 내 역할은 ‘볼 보이’였다”면서 “얼마나 실력이 형편없었던지 중학교에 진학할 때 선생님으로부터 ‘농구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고집을 부려 중학교 농구부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중학교 3학년을 마칠 때까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내버려 졌다. 팀의 일원이라고 느낄 때는 단체로 체벌을 받을 때가 유일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팀 훈련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했던 그는 ‘독학’으로 농구를 익혔다. 그의 롤모델은 당시 남자 농구에서 맹활약 중이던 ‘슛도사’ 이충희였다. 그는 TV에서 본 이충희의 폼을 흉내 내면서 틈나는 대로 슛 연습을 했다. 두 손으로 슛을 하는 여느 여자 선수들과 달리 정선민이 남자 선수들처럼 한 손 슛도 종종 구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최동원 당시 마산여고 감독이었다. 최 감독은 중3이던 정선민에게 마산여고에 가서 언니들과 훈련을 하라고 지시했다. 얼떨결에 언니들과 훈련을 하게 된 그는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혼나기않기 위해, 또 언니들을 따라잡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연습했다. 쉬는 날도 아빠와 함께 체육관에 가서 혼자 슛을 던졌다. 그가 ‘백조’로 다시 태어난 것은 고교생이 되어서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출전한 정식 경기에서 혼자 32점을 넣은 것이다. 농구계에선 ‘어디서 이런 선수가 갑자기 튀어나왔느냐’며 난리가 났다. 이후 그의 농구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정선민은 “어릴 적 키가 작고 농구를 못했던 게 어찌 보면 축복이었다. 덕분에 다양한 포지션에서 기본기를 닦을 수 있었고, 공도 잘 다룰 수 있게 됐다”며 “고교 이후 센터를 맡으면서도 스틸을 잘했다. 어릴 적 가드를 하면서 공격의 흐름을 볼 줄 알게 된 덕분이었다. 중학생 때까지 아무것도 아닌 나를 알아봐 준 그 선생님 덕분에 농구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선민은 2003년 한국 여자 농구 선수로는 최초로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무대에도 진출했다. 1라운드 8순위로 시애틀 스톰의 지명을 받은 그는 현지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평균 6.9분 17경기 출전에 평균 1.8득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미국 생활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선민은 “나는 한국, 또는 아시아에서 좀 잘하는 선수였을 뿐 세계적인 선수는 아니었다. 포지션 변경도 어려웠고, 통역이 없어 말도 통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제 농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이 소중한 6개월이었다. 꿈을 그리던 미국 무대에 도전함으로써 세계적인 선수들의 마인드를 배울 수 있었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했다.선수 시절 여러 차례 과감한 도전을 했던 그는 지도자로서도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중이다. 선수에서 은퇴한 뒤 그가 지도자로서 가장 먼저 맡았던 팀은 남자 학교인 인헌고였다. 지금은 주말리그 왕중왕전에서 우승도 경험한 학교가 됐지만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인헌고는 선수층도 얇고, 실력이 좋은 선수가 거의 없던 학교였다. 선수 때는 승리가 훨씬 익숙했던 정선민이었지만 지도자 첫해엔 연전연패를 당했다. 정선민은 “농구를 좋아하지만 실력이 다소 떨어지는 아이들이 모인 팀이었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더라도 농구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를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며 “감사하게도 선수들이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잘 따라줬다. 당시 선수들 중 지금도 연락을 하는 아이가 있다. 1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지냈다”고 했다. 정선민은 이후 WKBL 하나은행과 신한은행 등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2021년에는 공모를 통해 한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최근 들어 전력이 크게 약해진 한국 여자 농구 대표팀은 2022년 월드컵에서 중국과 미국에 큰 점수 차로 패했고, 2023년엔 아시아컵 4강에 실패하며 파리 올림픽 출전권도 놓쳤다.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지만 많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선민은 이에 대해 “대표팀 감독을 처음 맡을 때부터 ‘독이 든 성배’라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독이건 약이건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기에 도전을 했다”며 “아름다운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한국 여자 농구가 가진 전력으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고 생각한다. 2년간 정말 많은 공부를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을 떠난 후 그는 요즘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으면서 간간이 농구 봉사에 나서기도 한다. 지난 연말에는 한국농구연맹(KBL)이 강원 양구에서 연 ‘유스 엘리트 캠프’에 코치로 참여했다. 한국중고농구연맹 소속 남자 중학교 3학년 엘리트 학생 선수 102명을 세 조로 나눠 2박 3일간 집중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양동근 등 은퇴 선수 출신 지도자들이 참석한 이 캠프에서 정선민은 유일한 여성 코치였다. 센터 유망주들의 멘토로 나선 그는 “대표팀 감독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었는데 자라나는 선수들을 가르치면서 에너지 레벨이 한껏 충전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선수 시절 과도한 운동을 한 탓에 그는 발목과 허리가 좋지 않다. 하지만 이를 이겨내는 것 역시 운동이다. 이틀에 한 번은 단지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두시간 가량 운동을 한다.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트레드밀 위에서 땀을 낸 후 하체와 허리 위주로 근력 운동을 한다. 윗몸 일으키기 100개는 거뜬하다. 그는 “근력이 떨어지면 바로 통증이 온다. 좋지 않은 관절은 근력으로 버텨야 한다”며 “인생 100세 시대라고 하지 않나. 남은 50년 동안 꾸준한 운동으로 아프지 않게 살고 싶다”며 웃었다. 농구 외엔 별다른 취미가 없는 그는 요즘도 온통 농구 뿐이다. 오전엔 미국프로농구(NBA)를 보고, 저녁 시간에는 남녀 프로농구를 시청하며 공부를 한다. 정선민은 “언젠가는 프로 팀을 맡아 선수들을 지도해 보고 싶다”며 “평생을 농구인으로 살아온 만큼 농구에서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선수들을 가르칠 곳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서 힘 닿는 데까지 가르쳐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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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재의 인생홈런]‘바스켓 퀸’ 정선민 “관절 지키려 주 3회 근력 운동”

    현역 시절 ‘바스켓 퀸’으로 불렸던 정선민(51)은 한국 여자 농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최고였던 그는 1998년 여자프로농구(WKBL) 출범 이후 2012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항상 최고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정선민은 415경기를 뛰면서 8140점(경기당 19.61점), 142리바운드(평균 7.57개), 1777어시스트(4.28개), 771스틸(1.86개)을 기록했고, 7차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다. 2003년에는 한국 선수 최초로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무대에도 진출했다. 누가 봐도 타고난 천재였을 것 같지만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그는 ‘미운 오리’였다. 정선민은 “초등학교 시절엔 ‘볼 보이’를 도맡아 했다. 얼마나 실력이 형편없었던지 중학교에 진학할 때 선생님으로부터 ‘농구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 농구부에 들어갔지만 존재감은 미미했다. 그래서 그는 독학으로 농구를 익혔다. 롤모델은 당시 남자 농구에서 맹활약 중이던 ‘슛 도사’ 이충희였다. 그는 TV에서 본 이충희의 자세를 따라 틈나는 대로 연습했다. 볼품없던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최동원 당시 마산여고 감독이었다. 최 감독은 중학교 3학년이던 정선민에게 마산여고에 와서 언니들과 함께 훈련하라고 지시했다. 얼떨결에 언니들 틈에 끼게 된 그는 혼나지 않기 위해, 또 언니들을 따라잡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쉬는 날도 혼자 체육관에 가서 슛을 던졌다. 그가 ‘백조’로 다시 태어난 것은 고교생이 돼서였다. 고교 입학 후 처음 출전한 경기에서 32점을 쏟아 넣었다. 농구계에선 ‘어디서 이런 선수가 나타났느냐’면서 난리가 났다. 이후 그의 농구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정선민은 “어릴 적 키가 작고 농구를 못 했던 게 어찌 보면 축복이었다. 덕분에 가드부터 포워드까지 다양한 포지션에서 기본기를 닦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지도자로서도 다양한 경험을 쌓는 중이다. 남자 학교인 인헌고를 시작으로 여자 프로팀 하나은행과 신한은행 등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2021년에 한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 사령탑이 돼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땄다. 그는 요즘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지친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으면서 간간이 농구 봉사를 하면서 지낸다. 선수 시절 과도한 운동을 한 탓에 그는 발목과 허리가 좋지 않다. 하지만 이를 이겨내는 것 역시 운동이다. 이틀에 한 번은 단지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2시간가량 운동을 한다. 자전거와 트레드밀에서 땀을 낸 후 하체와 허리 위주로 근력 운동을 한다. 윗몸 일으키기 100개는 거뜬하다. 그는 “근력이 떨어지면 바로 통증이 온다. 좋지 않은 관절은 근력으로 버텨야 한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평생 운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농구 외엔 별다른 취미가 없는 그는 요즘도 온통 농구 생각이다. 오전엔 미국프로농구(NBA)를 보고, 저녁 시간에는 남녀 프로농구를 시청하며 공부를 한다. 정선민은 “언젠가는 프로 팀을 맡아 선수들을 지도해 보고 싶다”며 “평생을 농구인으로 살아온 만큼 농구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전문기자 uni@donga.com}

    • 2025-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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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재의 인생홈런]장갑석 사격 총감독 “파리 호성적은 칭찬의 힘”

    애주가로 유명한 장갑석 한국 사격대표팀 총감독(64)은 지난해 12월 금주(禁酒)를 선언했다.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왔을 때도 금주를 실천했다. 가족 모임에서는 술 대신 물을 마셨다. 피할 수 없는 회식 자리에는 무알코올 맥주를 가져갔다. 그가 이끈 한국 사격대표팀은 올해 파리 올림픽에서 역대 최고 성적을 냈다. 반효진, 오예진, 양지인 등이 금메달을 따냈고 박하준-금지현, 조영재, 김예지 등은 은메달을 획득하며 금 3, 은메달 3개를 수확했다. 그는 자신이 술을 마시지 않는 대신 훈련장에 나온 선수들에겐 ‘3C 금지령’을 내렸다. 3C는 휴대전화(Cellular), 커피(Coffee), 담배(Cigarette)의 영어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그는 “너 나 할 것 없이 틈날 때마다 휴대전화를 보더라. 휴대전화를 오래 볼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시력이 나빠지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며 “연습을 실전처럼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누가 실전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나. 선수들이 내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 나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평소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리던 그는 이번 대표팀에서는 인자한 감독 선생님이 됐다. 지적보다 격려, 비난보다는 칭찬으로 선수들을 대했다. 그가 선수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네가 최고야”였고, 가장 많이 했던 동작은 ‘엄지 척’이었다. 여름 올림픽 100번째 금메달의 주인공 반효진이 노트북 상단에 붙여 화제가 됐던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다’라는 문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연말을 맞아 종종 술자리를 갖는다. 술을 자주 마시지만 확고한 원칙은 있다. 취해서 비틀거릴 정도로는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일 년에 두 차례 정도 ‘한 달 금주’를 실천한다. 그는 “전날 술을 마셨는데 아침에 숙취가 가시지 않을 때가 있다. 몸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날부터 몸이 회복할 때까지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골프를 좋아하는 그는 연습장에서 땀을 흘릴 정도로 스윙을 많이 한다. 그는 “일주일에 3번가량 연습장에 가서 1시간∼1시간 반가량 운동을 한다. 제대로 스윙을 한 덕분에 뱃살이 쏙 들어갔다”고 했다. 걷는 것도 좋아한다. 어지간한 거리는 차를 이용하기보다는 걸어서 간다. 필드에 나가서도 카트를 타지 않고 걷는 쪽을 선호한다. 핸디 5의 싱글 플레이어인 그는 “골프와 사격은 비슷한 점이 많다. 사격이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골프도 스윙에 조그마한 틈이 있으면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어드레스부터 팔로까지 매 순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 사격을 시작해 50년 넘게 사격과 인연을 맺어오고 있는 그는 내년 2월 65세가 된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인생은 보통 사람의 정년 나이에 다시 시작이다. 그는 향후 2년 더 한국 대표팀 총감독직을 수행한다. 2026년 나고야 아시안게임까지가 임기다. 장 감독은 “파리 올림픽을 통해 발굴한 유망주들이 잘 커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게 목표”라면서 “이후에도 사격과 관련된 봉사를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202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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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개월 금주(禁酒)의 힘, 65세에 맞은 전성기 장갑석 “얻으려면 포기해야” [이헌재의 인생홈런]

    “나 오늘부터 술 끊었다. 올림픽이 끝나는 날 멋진 성적 내고 다시 먹겠다.”1년 전 이맘때의 일이다. 장갑석 한국 사격대표팀 총감독(64)의 갑작스런 금주(禁酒) 선언에 많이 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장 감독은 사격계를 넘어 한국 스포츠계의 대표적인 ‘애주가’로 유명하다. “1년에 닷새 빼고 360일은 술을 마신다” “점심, 저녁 등 하루 두 번 술을 먹는 날도 적지 않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했으니 주변 사람들이 긴가민가했던 것도 당연하다. 장 감독은 자신이 뱉은 말을 지켰다. 진천선수촌에서는 물론이고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왔을 때도 금주를 실천했다. 가족 모임에서는 술 대신 물을 마셨다. 한국 국가대표 선수단 지도자들은 파리 올림픽으로 출발하기 전 선수촌장 주최 회식을 했는데 여기서도 그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회식 자리에는 무알콜 맥주를 가져갔다. 장 감독은 “작년 12월 금주 선언 후 파리 올림픽이 끝난 8월 중순까지 약 8개월 동안 금주했다”며 “예전 딸의 결혼을 앞두고 얼굴 관리를 위해 6개월간 술을 마시지 않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내 인생 최장기간 금주 기록인 것 같다”며 웃었다. 그가 이끈 한국 사격대표팀은 파리 올림픽에서 역대 최고 성적을 냈다. 반효진, 오예진, 양지인 등이 금메달을 따냈고, 박하준-금지현, 조영재, 김예지 등은 은메달을 획득하며 금 3, 은메달 3개를 획득했다. 반효진은 대한민국 여름 올림픽 최연소이자 100번째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고, ‘엄마 사수’ 김예지는 특유의 시크한 표정과 아우라를 드러내며 ‘월드 스타’에 등극했다. 장 감독은 자신이 술을 마시지 않는 대신 선수들에게는 훈련장에서 ‘3C 금지령’을 내렸다. 3C는 휴대전화(Cellular), 커피(Coffee), 담배(Cigarette)의 영어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장 감독은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는데 틈날 때마다 휴대전화를 보더라. 휴대전화를 오래 볼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시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지 않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며 “연습을 실전처럼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실전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는 선수는 없다. 선수들이 내 말을 따르게하기 위해서 나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말했다.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 사격 대표팀에 좋은 영향을 끼친 건 하나 더 있다. 장 감독의 ‘보물 1호’로 국제대회마다 가지고 다니는 황금색 넥타이다. 한국 사격 대표팀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역대 아시안게임 단일 종목 최다인 13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당시 대한사격연맹 경기력향상위원장을 맡고 있던 그는 모든 종목을 관전할 때 바로 그 넥타이를 했다. 그는 “당시 연맹 회장이던 김정 연맹 회장님이 어느 날 회색 넥타이를 하고 나온 날이 있다. ‘당장 넥타이 색깔을 바꾸고 나오시라’고 말씀드렸더니 정말로 노란색 넥타이로 바꿔 메고 오셨다. 그런 기운을 받아서인지 그 대회에서 정말 많은 금메달이 나왔다”고 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도 그는 행운의 넥타이를 가져갔다. 경기장을 갈 때 백 팩에 곱게 넣어가서, 경기를 볼 때마다 그 넥타이 위해 손을 얹은 채 우리 선수들을 응원했다. 그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도 그 넥타이를 가져가곤 했다. 4차례 출전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한국 팀 성적이 항상 좋았다”며 웃었다. 그렇다고 그가 전적으로 기도와 행운에만 의지한 것은 아니다. 평소 ‘호랑이 선생님’으로 통하는 그가 대표팀 총 사령탑에 임명됐을 때 어린 선수들과의 소통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지적보다 격려, 비난보다는 칭찬으로 선수들을 대했다. 그가 선수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네가 최고야”였고. 가장 많이 했던 동작은 ‘엄지 척’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사실을 절감한 선수들은 무럭무럭 성장했다. 반효진이 노트북 상단에 붙여 화제가 됐던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다’라는 문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장 감독은 “기술적인 부분은 모두 코치들이 알아서 했다. 내가 한 것이라곤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준 것밖에 없다”며 “그런데 바로 그 칭찬의 힘이 무섭더라. 자신감으로 무장한 반효진과 오예진은 누구랑 붙어도 질 것 같지 않았다. 평소 경기 전 손을 벌벌 떨곤 하던 양지인도 사선에 서더니 철벽같은 선수가 됐다”고 했다. 파리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뒤 그는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며 미뤘던 음주를 만끽하고 있다. 연말을 맞아 주5일은 자리를 갖는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술을 마셔도 건강은 괜찮은 걸까. 매일 술을 마시는 건 중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에게는 술에 대한 확고한 원칙이 있다. 취해서 비틀거릴 정도로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일 년에 두 차례 정도 한 달 금주를 실천한다. 그는 “전날 술을 마셨는데 아침에 숙취가 가시지 않을 때가 있다. 몸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날부터 몸이 회복할 때까지 한달 가량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또 “애주가와 중독자의 차이는 참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다. 개인적으로는 술을 안 마시겠다고 마음먹으면 안 먹는 게 어렵지 않다. 요즘도 1년에 두 번씩은 몸이 완전히 회복할 시간을 준다”고 했다. 예전에 비해 먹는 양도 줄였다. 섞어 마시지 않고 가능한 한 한 종류의 술만 마시는 편이다. 그는 “예전부터 간에 좋다고 하는 나무를 다려서 먹곤 했다. 요즘에는 각종 채소를 넣어서 만든 야채수프를 끓여 먹는다. 개인적으로는 꽤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그가 가장 많이 하는 운동은 골프다. 대개 사람들처럼 필드에 나가서 걷는 게 아니라 연습장에서 땀을 흘릴 정도로 스윙을 많이 한다. 장 감독은 “일주일에 3번가량 연습장에 가서 1시간~1시간 반가량 운동을 한다. 일요일처럼 시간이 넉넉할 때는 3, 4시간 연습장에 머물기도 한다”며 “골프 스윙이 운동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대로 하면 몸통과 팔 근육을 많이 쓴다. 골프 연습을 열심히 한 덕분에 뱃살이 쏙 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걷는 것도 좋아한다. 어지간히 가까운 거리는 차를 이용하기보다는 걸어서 간다. 필드를 나가서도 카트를 타지 않고 걷는 쪽을 선호한다. 그렇게 골프에 진심인 덕분에 그는 핸디가 5인 싱글 플레이어다. 라이프 베스트는 1오버파인 73타다. 그는 “골프와 사격은 비슷한 점이 많다. 사격이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골프도 스윙에 조그마한 틈이 있으면 공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어드레스부터 팔로우까지 매 순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군 대령 출신으로 충남사격연맹 창설을 이끌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중학교 때부터 사격 선수의 꿈을 키운 그는 50년 넘게 한국 사격 역사의 산증인으로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는 1979년 세계공기총대회 10m 공기권총 금메달리스트이자 1980년 제4회 아시아선수권 금메달리스트 출신이다. 선수 생활을 오래 이어가진 못한 채 1984년부터 모교인 한국체대에서 조교를 맡았고, 1990년에 교수로 임용됐다. 현장 경험에 이론을 겸비한 그는 이후 대한사격연맹에서 실무부회장과 경기력향상위원장, 기술위원장 등을 두루 맡았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 될지도 모를 올해 파리 올림픽에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다. 내년 2월 정년이 되는 그는 40년간 정들었던 학교를 떠난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인생은 65세부터 다시 시작이다. 파리 올림픽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둔 그는 향후 2년 더 한국 대표팀 총감독 직을 수행한다. 2026년 나고야 아시안게임까지가 임기다. 대표팀 사령탑으로서 임기가 끝나면 국제심판 자격으로 국내외 사격장을 다닐 수 있다. 장 감독은 “파리 올림픽을 통해 발굴한 유망주들이 잘 커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게 단기적인 목표”라면서 “이후에도 사격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면서 관련된 봉사를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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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프재단 설립해 꿈나무-프로골퍼 지원 사업 등 펼쳐

    올해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대상을 차지한 장유빈 선수는 3일 유원골프재단에 장학금 4000만 원을 전달했다. 며칠 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활약 중인 이제영 선수는 자신의 팬클럽 ‘러블리제영’과 함께 장학금 1000만 원을 보냈다. 내년 1월에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뛰고 있는 성유진 선수가 장학금 1000만 원을 전달할 예정이다. 이렇게 모인 장학금은 모두 골프 꿈나무 육성을 위해 사용된다. 유원골프재단은 김영찬 골프존뉴딘그룹 회장(사진)이 사재를 털어 엘리트 골퍼 양성과 골프 산업 발전을 위해 2015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유망주들이 골프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골프 꿈나무 장학금 후원 사업’과 유망주들의 국제 경험 확대를 위한 ‘국제대회 참가비 지원 사업’, ‘유소년 성적우수 장학생 선발’, ‘프로골프선수 지원 사업’ 등을 펼쳐왔다. 재단 출범 후 약 10년 동안 113억 원을 조성해 골프 꿈나무 육성과 골프 산업 발전을 위해 활용했으며 혜택을 받은 선수는 1000여 명에 이른다. 유소년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장유빈 선수는 2017년부터 2020년까지 골프 꿈나무 장학생에 선정돼 재단으로부터 후원을 받아왔다. 이제영 선수 또한 2022년부터 유원골프재단의 프로골프선수 지원 사업 대상자에 선발돼 훈련비를 지원받고 있다. 성유진 선수는 2017년 골프존레드베터아카데미(GLA) 장학생으로 선발돼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받았고 2020년부터는 프로골프선수 후원을 받으며 유원골프재단과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성장한 선수들이 이제는 거꾸로 후배 유망주들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7일 후원식에서 이제영 선수는 “유소년 시절 유원골프재단의 프로암 골프대회에 출전해 나눔의 기쁨을 배울 수 있었다”며 “이제는 골프 산업계를 함께 이끌어갈 후배들을 위해 진정성 있는 나눔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유원골프재단 이사장은 “우리 선수들의 기부는 후배들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성장하는 데 뜻깊은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며 “기부해 주신 따뜻한 마음에 동감해 유원골프재단 또한 골프 산업 발전과 골프 인재 양성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나갈 것”이라고 전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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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신수, SSG 구단주 보좌역으로 제2 야구인생

    올 시즌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친 ‘추추 트레인’ 추신수(42·사진)가 구단주 보좌역 겸 육성총괄로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다. 프로야구 SSG 구단은 27일 “솔선형 리더십을 가진 추신수는 선수단 내 신뢰가 두텁고 소통 능력이 우수하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구단에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도 갖추고 있다. 그동안 쌓아온 자산을 활용해 팀 전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그를 구단주 보좌역 겸 육성총괄로 선임한 배경을 설명했다. 구단주에게 직간접적인 조언을 하며 구단 운영에 관여하는 구단주 보좌역은 MLB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자리다. MLB에서 활약했던 일본인 선수 스즈키 이치로(51)도 은퇴 후 시애틀 구단의 특별 보좌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이 보직을 맡게 된 추신수는 “중책을 맡겨 주신 구단에 감사드린다. 다시 한번 한국프로야구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돼 많이 설렌다”며 “1군과 2군 선수단의 가교 역할뿐 아니라 선수단 운영에 대한 의견도 적극 개진하겠다”고 말했다. 추신수는 구단과의 협의를 통해 보직과 관련한 보수는 받지 않기로 했다. 추신수는 2005∼2020년 MLB 1652경기에 출전해 통산 타율 0.275(6087타수 1671안타), 218홈런, 782타점, 157도루를 기록했다. 2021년 SSG에 입단해 올해까지 4년간 통산 타율 0.263, 54홈런, 205타점, 51도루를 기록한 뒤 은퇴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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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혜성 MLB계약 해 넘길 듯… “해외체류 제한에 일시 귀국”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진출에 도전하고 있는 내야수 김혜성(25·키움)의 계약이 해를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달 말 미국으로 출국했던 김혜성은 계약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최근 귀국했다. 키움 관계자는 27일 “김혜성이 미국 도전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라며 “에이전시가 미국 현지에서 MLB 구단들을 상대로 여전히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키움 구단에 따르면 김혜성의 연내 귀국은 예정됐던 일이다.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병역 특례를 적용받은 김혜성은 이수해야 할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지 못해 현재 군인 신분이다. 해외 체류 기간도 제한돼 있어 일시적으로 귀국했다는 설명이다. 계약이 임박하면 김혜성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해 협상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미국 현지에서는 2루수가 필요한 시애틀이 김혜성을 영입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단으로 꼽힌다. 샌디에이고, LA 에인절스, 토론토 등도 잠재적인 수요 구단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고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은 아니다. 5일 오전 2시 MLB 30개 구단에 포스팅이 공시된 김혜성은 내년 1월 4일 오전 7시까지 계약을 마무리해야 한다. 기한을 넘기면 포스팅은 자동 무효가 된다. 이전에도 해를 넘겨 계약에 성공한 사례는 여러 번 있었다. 역시 키움 출신으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샌디에이고와 계약한 내야수 김하성(29)은 포스팅 공시 25일 만인 2021년 1월 1일에 계약서에 사인했다. 지난해 샌디에이고에 입단한 투수 고우석(26·마이애미)은 협상 마감일인 1월 4일에 계약을 마무리했다.샌디에이고에서 자유계약선수(FA)로 풀려 시장에 나온 김하성도 새해가 돼야 새 팀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2023시즌 유틸리티 부문 골드글러브 수상자인 김하성은 올 시즌을 마친 후 1억 달러(약 1475억 원) 이상의 대형 계약이 기대됐지만 시즌 중반에 당한 어깨 부상으로 계약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지 매체들은 김하성이 옵트아웃 조항이 포함된 1, 2년짜리 단기 계약을 한 뒤 다시 대형 계약을 노릴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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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원 새 얼굴, 2명을 타자로… 두산-키움 ‘외국인 실험’ 통할까

    한국프로야구에서 외국인 선수는 복권에 비유되곤 한다. 대박이 날 수도 있지만, 부상이나 적응 실패로 기대 이하에 그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많은 구단이 검증된 선수를 선호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프로야구 10개 구단이 팀당 3명씩 모두 30명의 외국인 선수와 계약을 사실상 마무리한 가운데 이 중 절반이 넘는 17명이 한국 무대에서 뛴 적이 있는 경력자들이다. 올 시즌 타점왕인 오스틴 딘(LG), 타격왕 기예르모 에레디아(SSG), 홈런왕 맷 데이비슨(NC) 등이 대표적이다. 투수 중에선 KIA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제임스 네일, 롯데의 왼손 선발투수 찰리 반즈 등이 재계약에 성공했다.KT는 2019년 입단한 오른손 투수 윌리엄 쿠에바스와 7년 연속 동행을 이어간다. 외야수인 멜 로하스 주니어와도 재계약한 KT는 키움에서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린 투수 엔마누엘 데 헤이수스를 데려오면서 3명의 외국인 선수를 모두 한국프로야구 경력자들로 채웠다. 올해 한국시리즈 준우승팀 삼성도 아리엘 후라도, 데니 레예스, 르윈 디아즈 등 3명 모두 한국야구 경력 선수들이다.두산은 다른 선택을 했다. 외국인 선수를 모두 새 얼굴로 교체했다. 세 명 모두에게 신입 외국인 선수 몸값 상한액인 100만 달러(약 14억6000만 원)씩 안기며 총 3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셋 중 가장 기대를 모으는 선수는 왼손 투수 콜 어빈이다. 2019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필라델피아에서 데뷔한 어빈은 오클랜드, 볼티모어, 미네소타를 거치며 6시즌 동안 134경기(93경기 선발)에 등판해 28승 40패, 평균자책점 4.54를 기록했다. 올 시즌엔 볼티모어와 미네소타에서 뛰면서 29경기에 나서 6승 6패, 평균자책점 5.11을 기록했다. 두산은 역시 왼손 투수인 잭 로그가 어빈과 함께 원투펀치로 나선다. 로그 역시 2022년부터 올해까지 세 시즌 동안 MLB에서 뛴 경험이 있다. 새 외국인 타자 제이크 케이브는 올해 콜로라도에서 123경기에 출전해 타율 0.251, 7홈런, 37타점을 기록한 현역 메이저리거 출신이다. 올해 두산은 외국인 투수들의 부진으로 속을 끓여야 했다. 브랜든과 알칸타라가 부상으로 제 몫을 해주지 못했고, 대체 외국인 선수로 데려온 시라카와, 발라조빅도 기대에 못 미쳤다. 외국인 투수 4명이 거둔 전체 승수가 15승에 불과했다. 외국인 투수들의 부진 속에 두산은 KT와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패하며 허무하게 가을야구를 마감했다. 허경민이 KT로 떠나고, 김재호도 은퇴한 두산으로선 새 얼굴들의 활약에 기대를 걸고 있다.키움은 10개 팀 중 유일하게 외국인 타자 2명과 투수 1명으로 내년 시즌을 시작한다. 한국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쿼터가 3명으로 정해진 2015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올해 팀 타율(0.264), 홈런(104개), 득점(672점) 등에서 모두 리그 최하위에 그친 팀 사정을 고려한 선택이다.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MLB 진출에 도전하고 있는 김혜성의 공백도 영향을 미쳤다. MLB 출신으로 2022년 키움에서 뛰었던 강타자 야시엘 푸이그와 지난해 삼성의 대체 외국인 타자로 한국 무대에 데뷔했다가 부상으로 7경기 만에 팀을 떠난 루벤 카디네스(삼성 시절 등록명은 카데나스)가 키움의 외야 두 자리를 채운다.KIA의 아담 올러, LG 요니 치리노스, SSG 미치 화이트 등은 올 시즌까지 MLB에서 뛰었던 투수들이다. 에릭 페디(세인트루이스), 메릴 켈리(애리조나)처럼 한국에서의 활약을 발판 삼아 MLB 복귀에 성공하는 선수들이 늘면서 한국행을 선택하는 빅리그 출신들이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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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산  外人 전원 빅리거 승부수, 키움은 타자 두 명 모험…삼성-KT는 경력직이 좋아

    한국프로야구에서 외국인 선수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투수 두 명이 ‘원투펀치’로 선발 마운드를 버텨주고, 외국인 타자가 홈런을 펑펑 쳐주는 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다. 어느 팀이건 외국인 선수 농사만 잘 지어도 5강권은 무난하다. 그런데 야구계에서 외국인 선수는 복권에 비유되곤 한다. 대박이 날 수도 있지만, 부상이나 적응 실패로 불발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구단들이 한국 무대에서 검증된 선수를 선호한다. 10개 팀이 팀당 3명씩 모두 30명의 외국인 선수 선발을 사실상 마무리 지은 가운데 절반이 넘는 17명이 KBO리그에서 뛴 적이 있는 경력자들이다. 올 시즌 타점왕을 차지한 LG 오스틴, 타격왕 SSG 에레리아, 홈런왕 NC 데이비슨 등이 대표적이다. 투수 중에는 KIA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네일, 롯데 왼손 선발 투수 반즈 등이 재계약에 성공했다. KT는 2019년 입단한 오른손 투수 쿠에바스와 7년 연속 동행을 이어간다. 외국인 타자 로하스와 재계약한 KT는 키움에서 자유계약선수로 풀린 투수 헤이수스를 데려오면서 3명의 외국인 선수를 모두 KBO리그 출신으로 채웠다. 올해 한국시리즈 준우승팀 삼성도 후라도, 레예스, 디아즈 등 3명이 모두 한국 야구 경력자들이다. 180도 다른 행보를 보인 팀은 두산이다. 두산은 세 명의 외국인 선수를 모두 새 얼굴로 교체하며 신입 외국인 선수 상한액인 100만 달러씩, 총액 3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가장 기대를 모으는 선수는 에이스로 데려온 왼손 투수 콜 어빈이다. 2019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필라델피아에서 데뷔한 어빈은 6시즌 동안 134경기(93경기 선발)에 등판해 28승 40패, 평균자책점 4.54를 기록했다. 올해도 볼티모어와 미네소나 등에서 6승(6패, 평균자책점 5.11)을 거뒀다. 내년 시즌 한국 무대를 누비게 될 외국인 선수 중 커리어가 가장 화려하다. 다른 한 명의 왼손 투수 잭 로그가 어빈과 함께 원투펀치로 나선다. 로그 역시 2022년부터 올해까지 세 시즌 동안 MLB에서 뛴 경험이 있는 빅리그 출신이다. 새 외국인 타자 제이크 케이브도 올해 콜로라도에서 123경기에 출전해 타율 0.251, 7홈런, 37타점을 기록한 현역 메이저리거다. 두산은 올해 외국인 투수들의 부진에 속을 끓여야 했다. 브랜든과 알칸타라가 부상으로 제 몫을 해주지 못했고, 대체 외국인 선수로 데려온 시라카와, 발라조빅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4명의 외국인 투수가 합작한 승수는 15승에 불과했다. 외국인 투수들의 부진 속에 두산은 KT와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도 패하며 허무하게 가을야구를 마감해야 했다. 허경민이 KT로 떠나고, 김재호마자 은퇴한 두산으로서는 새 얼굴들의 활약에 기대를 걸고 있다. 키움은 10개 팀 중 유일하게 외국인 타자 2명과 투수 1명으로 내년 시즌을 시작한다. 이는 KBO리그에 외국인 선수 쿼터가 3명으로 정해진 2015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메이저리그 출신으로 2022년 키움에서 뛰었던 강타자 야시엘 푸이스와 지난해 삼성의 대체 외국인 타자로 KBO리그에 데뷔했다가 7경기 만에 부상으로 팀을 떠난 카디네스(삼성 시절 등록명은 카데나스)가 라인업을 차지한다. 올해 팀 타율(0.264), 홈런(104개), 득점(672점) 등에서 모두 최하위에 그친 팀 사정을 고려한 조치다.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MLB 진출에 도전하고 있는 중심 타자 김혜성의 공백도 영향을 미쳤다. 새롭게 한국 땅을 밟는 선수 중에는 올해까지 MLB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적지 않다. KIA 아담 올러, LG 요니 치리노스, SSG 미치 화이트 등은 단번에 에이스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선수들이다. 에릭 페디(세인트루이스), 메릴 켈리(애리조나)처럼 KBO리그를 발판으로 MLB에 복귀한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예전에 비해 한국행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높아졌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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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타니, AP선정 ‘올해의 男선수’ 3번째 수상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LA 다저스의 일본인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사진)가 AP통신이 선정하는 ‘올해의 남자 선수’로 뽑혔다. AP통신은 자사 및 회원사 투표 결과 오타니가 전체 74표 중 48표를 얻어 1위에 올랐다고 24일 전했다. 오타니는 2024 파리 올림픽 수영 4관왕에 오른 레옹 마르샹(프랑스·10표), 올해 마스터스와 파리 올림픽 등에서 우승한 남자 골프 세계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미국·9표)를 여유 있게 앞섰다. 오타니와 함께 ‘올해의 남자 선수’ 후보에 올랐던 MLB 뉴욕 양키스의 거포 에런 저지(미국)는 1표를 얻는 데 그쳤다. 오타니가 AP통신 선정 ‘올해의 남자 선수’로 뽑힌 건 LA 에인절스에서 뛰던 2021년과 2023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오타니는 이 상을 세 차례 수상한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 상을 가장 많은 받은 남자 선수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미국프로농구(NBA)의 레전드 르브론 제임스,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이상 미국) 등으로 각각 4차례 선정됐다. 오타니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자랄 때부터 조던과 우즈를 동경해 왔다. 매우 영광스럽다. 내년에도 이 상을 다시 받고 싶다”고 말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10년간 7억 달러(약 1조195억 원)를 받는 계약을 하고 다저스로 이적한 ‘이도류’ 오타니는 어깨 수술 여파로 지명타자로만 경기에 출전했는데 빼어난 타격 실력을 보여 주며 정규시즌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특히 홈런 54개와 도루 59개를 기록하며 MLB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50홈런-50도루’를 달성했고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어깨 수술 후 회복 중인 오타니는 내년 시즌엔 다시 투수와 타자를 겸할 것으로 보인다. 오타니는 “개인적인 목표는 내년 개막 경기 전까지 몸 상태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막 경기부터 던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상황에 맞춰 투구 시작 시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AP통신이 선정하는 ‘올해의 여자 선수’는 25일 발표된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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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P ‘올해의 남자 선수’ 3회 수상 오타니, 마이클 조던과 동률…내년엔 우즈에 도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LA 다저스의 일본인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29)가 AP통신이 선정하는 ‘올해의 남자선수’로 뽑혔다.AP는 24일 회원사 투표 결과 총 74중 오타니가 48표를 획득해 압도적인 1위에 올랐다고 전했다. 2024 파리올림픽 수영 4관왕인 레옹 마르샹(프랑스)이 10표를 얻어 2위에 올랐고, 올해 마스터스와 올림픽 등에서 우승한 남자 골프 세계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미국)가 9표를 획득해 3위를 했다. 아메리칸리그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뉴욕 양키스의 거포 에런 저지는 1표를 얻는 데 그쳤다. 오타니가 올해의 남자선수로 뽑힌 것은 LA 에인절스 시절이던 2021년과 2023년에 이어 통산 세 번째다. 이번 수상으로 오타니는 역시 이 상을 세 차례 수상한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퇴)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남자 선수 중에서 이 상을 가장 많은 받은 선수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미국프로농구(NBA)의 살이있는 전설 르브론 제임스, 사이클의 랜스 암스트롱 등 3명으로 모두 4차례 올해의 남자 선수로 뽑혔다. 오타니는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자랄 때부터 조던과 우즈를 동경해왔다. 매우 영광스럽다. 내년에도 이 상을 다시 받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올 시즌에 앞서 10년 7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받고 다저스로 이적한 오타니는 1번 지명타자로 출전하며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54홈런-59도루로 MLB 역사상 최초로 50홈런-50도루를 달성했다. 작년 받은 어깨 수술에서 회복 중인 오타니는 내년 시즌에는 다시 투수와 타자를 겸업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오타니는 “개인적인 목표는 내년 개막전까지 완전한 몸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개막전부터 던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상황에 맞춰 피칭 시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AP통신의 ‘올해의 여자선수’는 25일 발표될 예정이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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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LPGA 10년 개근 최은우 “17시즌 연속 시드유지 기록 깨고싶어”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의 베테랑 최은우(29)는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최은우는 2015년 KLGPA투어에 데뷔해 올해까지 10년을 뛰었다. 대상을 타거나 다승을 거두는 화려한 선수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매년 새 얼굴이 쏟아져 들어오는 KLPGA투어에서 10년 연속 시드를 지켰다. 최은우는 지난달 KLPGA 대상 시상식에서 10년 연속 꾸준한 성적을 올린 선수에게 주는 ‘K-10 클럽상’을 받았다. 2017년 이 상이 만들어진 뒤 수상자는 올해까지 24명밖에 되지 않는다. 매년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하는 선수들 사이에선 ‘개근상’으로 불리며 높이 평가받는다. 최은우는 “KLPGA투어에 처음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1995년생 동기가 20명은 넘었다. 그런데 한 명씩 사라지더니 지금 남은 선수는 서연정과 나 둘뿐”이라며 “시드를 유지하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런 무대에서 10년 연속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하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K-10 클럽에 가입한 선수 중에는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선수가 적지 않다. 하지만 최은우는 늦게 꽃을 피웠다. 최은우는 데뷔 9년 차이던 지난해 4월 경남 김해 가야CC에서 열린 KLPGA투어 넥센·세인트나인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무려 211번째 출전한 대회에서 처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 최은우는 올해 4월 같은 대회에서 다시 한번 우승하며 ‘가야 여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올해 대회 최종 라운드 16번홀에선 밖으로 나갈 뻔한 세컨드 샷이 갤러리의 몸에 맞고 안으로 들어오는 행운도 따랐다. 통산 2승을 기록 중인 최은우는 “데뷔 초반 몇 년간은 우승하지 못해 초조해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투어에서 뛰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게 됐다”며 “그렇게 열심히,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내 길을 가다 보니 우승이라는 선물이 찾아와 줬다”고 했다. 데뷔 초반 250야드 이상 장타를 쳤던 그는 현재 드라이버 거리가 짧은 축에 속한다. 올 시즌 평균 거리는 228야드로 102위에 머문다. 하지만 그는 비거리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다. 세컨드샷을 실수해도 언제든 파 세이브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그는 리커버리율(66.5%)과 벙커 세이브율(56.4%)에서 각각 5위와 9위를 했다. 최은우는 “10년 구력이라는 게 정말 무시 못 한다. 다양한 코스에서 여러 상황을 반복해 맞이하다 보니 어린 선수들보다는 위기에서 잘 벗어나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장타를 칠 때는 아웃 오브 바운스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거리가 덜 나가도 훨씬 안정적이다. 거리와 정확도 중 하나를 택하라면 정확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최은우는 이달 1일 직장인 노현균 씨(36)와 결혼해 ‘12월의 신부’가 됐다. 내년 시즌 그는 안선주, 박주영과 함께 3명밖에 없는 결혼한 KLPGA투어 선수가 된다. 최은우는 “골프를 잘할 때나 못할 때나 항상 내 편이 있다는 게 좋은 것 같다”며 “결혼한 뒤 못 친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 결혼했으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했다. 그의 2025시즌 목표는 2승 이상을 거둬 다승을 해보는 것이다. 또 30위 안팎이었던 대상과 상금 순위도 톱10으로 당겨보겠다는 욕심도 갖고 있다. 최은우는 “예전에 비해 전체적으로 선수 생명이 길어진 건 맞다. 결혼해서도, 30대가 되어서도 잘하는 선수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며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라도 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다. 장기적으로는 몸 관리를 잘해 홍란 언니(은퇴)가 갖고 있는 17시즌 연속 시드 유지 기록도 깨보고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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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재의 인생홈런]‘에이지슛’ 400회 유백만 “91세에 한라산 등정이 꿈”

    모든 골퍼의 꿈은 ‘에이지슛(Age Shoot)’이다. 자기 나이보다 적거나 같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걸 의미하는 에이지슛을 위해선 나이가 들어도 건강해야 한다. 수준급 골프 실력도 필수다. 에이지슛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축복받은 인생이다. 그런데 제주에는 에이지슛을 밥 먹듯 하는 골퍼가 있다. 실업야구 상업은행과 한국화장품, 프로야구 MBC 청룡 등에서 사령탑을 지낸 유백만 전 감독이다. 올해 84세인 유 전 감독은 에이지슛의 달인이다. 유 전 감독이 에이지슛을 처음 기록한 건 67세이던 2007년이다. 야구 후배인 김재박 전 LG 감독 등과 호주에서 동반 라운드를 하면서 6언더파 66타를 친 게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생애 100호 에이지슛까지 정확히 10년이 걸렸다. 그런데 70대 이후로 나이가 많아지면서 에이지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2019년에 200호 에이지슛을 했고, 1년 뒤인 2020년엔 300호를 넘었다. 유 전 감독은 “2022년 8월 27일 75타로 373번째 에이지슛을 한 뒤 더 이상 횟수를 세지 않고 있다. 지금쯤 400회는 훨씬 넘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실업야구 상업은행 시절 그는 노히트 노런을 네 차례(1963, 1969, 1970, 1971년) 달성한 투수였다. 그는 선수로 한창 활동할 때부터 골프를 배웠다. “은행 일을 계속하려면 골프를 배워두는 게 좋겠다”는 박현식 당시 제일은행 감독의 권유가 계기였다. 이후 야구 지도자가 된 뒤에도 골프를 꾸준히 쳤다. 1990년엔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프로 자격증도 땄다. 야구인 골프대회 메달리스트(최고 스코어러에게 주는 상)는 대개 그의 차지였다. 자연스럽게 인생 후반전은 골프가 주무대가 됐다. 삼성 코치를 그만두고 대구에서 머물던 시절 그는 나중에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뛴 조윤희와 조윤지 자매를 가르쳤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활약했던 배상문도 제자였다. 시니어 프로 골퍼로 그는 KPGA 시니어 투어에서 두 번 우승했다. 2007년에는 프로 테스트를 거쳐 호주 시니어 프로골프 투어 정회원이 됐다. 유 전 감독은 2011년 공기 좋고 골프장도 많은 제주로 이사했다. 제주에서 그는 주 3회는 레슨을 하고 주 4회는 자기 몸에 투자한다. 골프에 필요한 근력을 유지하기 위해 피트니스센터에서 하체와 복근을 중심으로 꾸준히 운동한다. 유산소 운동은 집 근처 오름을 오르면서 한다. 그는 “아내와 함께 서귀포 이승악 오름을 자주 다닌다. 작년에만 집사람과 40번 이상 다녀왔다. 목적지까지 산길로 왕복 90분 정도 걸리는데 산길이지만 평지도 많아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고 했다. 야구 선수 시절부터 그는 성실의 아이콘이었다. 다른 선수들이 담배를 피우고 음주를 즐길 때도 그는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그리고 달리기 등 다른 선수들이 좋아하지 않는 훈련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그런 자기관리 덕에 지금도 드라이버로 240야드를 넘게 날린다. 83세이던 지난해 한라산 정상에 올랐던 그는 “몸 관리를 잘해 91세에 다시 한번 한라산 등정을 하고 싶다. 공식 기록은 없지만 90세가 최고령 등정이라고 한다. 91세에 꼭 한라산 정상을 밟아보고 싶다”고 했다.이헌재 스포츠전문기자 uni@donga.com}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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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LPGA 10년 개근 최은우 “홍란 언니 17시즌 연속 시드 기록도 깨볼래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의 베테랑 최은우(29)는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최은우는 2015년 KLGPA 투어에 데뷔해 올해까지 정확히 10년을 뛰었다. 대상을 타거나 다승을 거두는 화려한 선수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매년 새 얼굴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KLPGA 투어에서 10년 연속 시드를 지켰다. 최은우는 지난달 KLPGA 대상 시상식에서 10년 연속 꾸준한 성적을 올린 선수에게 주는 ‘K-10 클럽상’을 받았다. 2017년 신설된 뒤 이 상을 받은 선수는 올해까지 24명밖에 되지 않는다. 매년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하는 선수들 사이에서는 ‘개근상’으로 불리며 높이 평가받는다. 최은우는 “처음 KLPGA투어에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1995년생 동기들이 20여 명은 됐다. 그런데 한 명씩 사라지더니 지금까지 남은 선수는 서연정과 나 둘뿐”이라며 “시드를 유지하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런 무대에서 10년 연속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했고 뿌듯했다”고 말했다. K-10 클럽에 가입한 선수 중에는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선수가 적지 않다. 하지만 최은우는 늦게 꽃을 피웠다. 최은우는 데뷔 9년 차이던 지난해 4월 경남 김해 가야CC에서 KLPGA투어 넥센·세인트나인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무려 211번째 대회만에 처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 최은우는 올해 4월 같은 대회에서 다시 한번 우승하며 ‘가야 여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올해 최종 라운드 16번홀에서는 밖으로 나갈 뻔한 세컨드 샷이 갤러리의 몸에 맞고 안으로 들어오는 행운도 따랐다. 통산 2승을 거두고 있는 최은우는 “데뷔 초반 몇년 간은 우승이 나오지 않아 초조해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투어에 뛰고 있는 것 자체를 감사하게 여기게 됐다”며 “그렇게 열심히,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내 길을 가다 보니 우승이라는 선물이 찾아와 줬다”고 말했다. 데뷔 초반 250야드 이상 장타를 쳤던 그는 현재는 드라이버 거리가 짧은 축에 속한다. 올 시즌 평균 거리는 228야드로 102위에 머문다. 하지만 그는 거리에도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다. 세컨드샷을 미스해도 언제든 파 세이브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실제로 그의 리커버리율(66.5%)과 벙커세이브율(56.4%)에서 각각 5위와 9위를 했다. 최은우는 “10년 구력이라는 게 정말 무시 못한다. 다양한 코스에서 각종 상황을 반복해 맞이하다 보니 어린 선수들보다는 위기에서 잘 벗어나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장타를 칠 때는 아웃 오브 바운스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거리가 덜 나가도 훨씬 안정적이다. 거리와 정확도 중 하나를 택하라면 정확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최은우는 이달 1일 직장인 노모 씨와 결혼해 ‘12월의 신부’가 됐다. 내년 시즌 그는 안선주, 박주영과 함께 단 3명 밖에 없는 결혼한 KLPGA 투어 선수가 된다. 최은우는 “잘할 때나 못할 때나 항상 내 편이 있다는 게 좋은 것 같다”며 “결혼을 한 뒤 못 친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 오히려 결혼을 했으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라고 했다. 그의 2025시즌 목표는 2승 이상을 거둬 다승을 해보는 것이다. 또 30위 안팎이었던 대상과 상금 순위도 톱10안으로 당겨보겠다는 욕심도 갖고 있다. 최은우는 “예전에 비해 전체적으로 선수 생명이 길어진 건 맞다. 그렇지만 결혼을 해서도, 또 30대가 되어서도 잘하는 선수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며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라도 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다. 장기적으로는 몸관리를 잘해 홍란 언니(은퇴)가 갖고있는 17시즌 연속 시드 유지 기록도 깨보고 싶다”고 말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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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4세에 ‘에이지 슈트’ 400회 이상…야구도, 골프도, 인생도 유백만처럼 [이헌재의 인생홈런]

    골프를 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꿈은 ‘에이지 슈트(Age Shoot)’다. 자신의 나이보다 적거나 같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것을 의미하는 에이지 슈트를 하기 위해서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동시에 수준급 골프 실력은 꾸준히 갖춰야 한다. 80대 나이에 싱글을 쳐야 겨우 할 수 있는 게 에이지 슈트다. 에이지 슈트를 할 수 있다는 것, 해본 적 있다는 것 자체가 인생의 행운이자 축복이다. ‘시니어 골프의 제왕’ 베른하르트 랑거(67)가 존경받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랑거는 올해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챔피언스 최종전 찰스 슈와브컵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는데 대회 4라운드 중 세 라운드에서 에이지 슈트를 기록했다. 개인 통산 21, 22, 23번째 에이지 슈트였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변치 않는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에는 랑거도 한 수 접고 들어갈 만한 특별한 골퍼가 있다. 실업야구 상업은행과 한국화장품, 프로야구 MBC 청룡의 사령탑 등을 맡았던 유백만 전 감독이 주인공이다. 올해 84세인 유 감독은 에이지 슈트의 달인이다. 필드에 나갔다 하면 거의 대부분 에이지 슈트를 한다. 유 감독이 처음 에이지 슈트를 기록한 것은 66세이던 2007년이다. 호주에서 야구 후배인 김재박 전 LG 감독 등과 동반 라운드를 하면서 6언더파 66타를 친 게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생애 100호 에이지 슈트까지 정확히 10년이 걸렸다. 그런데 70대에 접어들어 나이가 많아질수록 에이지 슈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2017년 제100호 에이지 슈트를 한 뒤 200호 에이지 슈트는 불과 2년도 채 걸리지 않은 2019년에 달성했다. 그리고 1년 후인 2020년에는 제 300호 에이지 슈트 기록을 세웠다. 유 감독은 “2022년 8월 27일에 75타를 쳐 373번째 에이지 슈트를 했다. 그걸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에이지 슈트 횟수를 세지 않고 있다. 지금쯤은 400회는 훨씬 넘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유 감독은 인생의 전반기는 야구인, 후반기는 골프인으로 살고 있다. 야구 선수 시절 그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투수였다. 부산상고 시절 내야수였던 그는 실업팀에 입단한 후 투수로 전향했는데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실업 무대를 평정했다. 상업은행 시절이던 1963년 처음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고, 이후에도 세 차례(1969년, 1970년, 1971년)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한창 야구 선수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부터 그는 골프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은행 일을 계속 하려면 골프를 배워두는 게 좋겠다”는 박현식 당시 제일은행 감독의 권유가 계기였다. 그가 처음 골프를 시작한 1960~1970년대만 해도 한국에는 골프장이 몇 개 없을 때다. 골프를 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연덕춘, 박명출 등 추후 한국프로골프(KPGA) 창립을 이끈 쟁쟁한 프로들과 함께 라운드를 할 기회를 종종 얻곤 했다.온화하지만 강직한 성품의 그는 야구 지도자로서도 오래 활동했다. 20대 중반에 선수에서 은퇴한 후 실업팀인 상업은행과 한국화장품 감독을 역임했고,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후에는 MBC 청룡에서 수석코치와 투수 코치 등을 맡았다. 1988년에는 MBC 감독으로 한 시즌 팀을 지휘했다. 이후 1994년까지 삼성에서 투수 코치와 투수 인스트럭터 등으로 활동했다. 그 와중에도 골프와의 끈은 꾸준히 이어갔다. 한국프로야구는 매 시즌이 끝나면 야구인 골프대회를 여는데 1990년에 KPGA 티칭 프로에 합격한 그는 나갔다 하면 메달리스트(최고 스코어에게 주는 상)를 수상하곤 했다. 자연스럽게 인생 후반전은 골프가 주 무대가 됐다. 대구에서 머물던 시절 그는 알음알음 찾아온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여자 국가대표 배구 선수 출신 조혜정의 딸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활약했던 조윤희와 조윤지 자매도 있었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뛰었던 배상문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프로 골퍼로서도 많은 걸 이뤘다. KPGA 시니어 투어 대회에서 두 번 우승했고, KPGA 그랜드 시니어 부문에서는 7번 우승했다. 2007년에는 프로 테스트를 거쳐 호주 시니어 프로골프 투어 정회원이 됐다. 유 감독은 2011년 산 좋고, 바다 있고, 골프장도 많은 제주도로 이사를 왔다. 예전 야구인 시절 모은 돈으로 사놓은 제주 서귀포 돈내코에 집을 지었다. 제주에 와서도 그는 여전히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골프 레슨을 하고 있다. 예전처럼 전문 선수가 아니라 골프를 잘 치고 싶어하는 일반인 제자가 많다. 멀리 육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와 그에게 레슨을 받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회원은 올해 97세인 주말골퍼다. 유 감독은 “97세 회원이 계신데 여전히 18홀을 거뜬히 돈다. 드라이버도 140m 정도 보낸다. 최근 그분이 ‘왜 이렇게 3번 우드가 뜨지 않느냐’고 고민을 토로했다. ‘3번 우드 대신 다른 채로 치시라’고 답해 드렸다”며 웃었다.유 감독은 주 3회 정도 레슨을 하고, 주 4일은 자신의 몸에 투자한다. 그는 골프에 필요한 근력을 유지하기 위해 피트니스센터에서 하체와 복근을 중심으로 꾸준히 운동을 한다. 또 유연성 운동과 함께 스트레칭도 틈틈이 해준다. 한 번 운동을 할 때마다 1시간 반 정도를 한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쉬엄쉬엄하는 편이다. 유산소 운동을 위한 공간은 집 근처 곳곳에 있다. 차로 10분만 타고 나가면 곳곳에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우거진 오름이 곳곳에 있다. 역시 무리하지 않고 1시간에서 한 시간 가량 천천히 언덕길을 오르내린다. 아내 이정자 씨(77)와 함께 갈 때도 많다. 그는 “아내와 함께 서귀포 이승악 오름을 자주 다닌다. 작년에만 집사람과 40번 이상 다녀 왔다. 목적지까지 산길로 왕복 90분 정도 소요되는데 산길임에도 평지도 많아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고 했다.에이지 슈트를 유지하기 위해 골프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회원들의 레슨에 앞서 일찍 연습장에 가 샷을 가다듬곤 한다. 그가 주말골퍼들에게 추천하는 연습은 이른바 ‘삼각형 방식’이다. 드라이버 등 긴 채를 적게 치고, 웨지 등 짧은 클럽으로 많은 연습을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몸에 큰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유 감독은 “내 경우를 얘기하자면 1시간 연습을 하면 30분 이상을 10~20m 짧은 거리를 연습하는 데 할애한다. 드라이브는 채 20개도 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또 “골프를 잘 치려면 연습밖에 없다. 좋은 코치를 만나 올바른 자세로 꾸준히 치다 보면 누구나 잘 칠 수 있다. 평범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야구 선수 시절부터 그는 성실의 아이콘이었다. 다른 선수들이 술을 마시고 음주를 즐길 때도 그는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그리고 달리기 등 다른 선수들이 좋아하지 않는 훈련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그는 “아마 당시 김성근 감독(현 최강야구 감독)과 내가 가장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싶다”며 “어쩌면 그때 운동을 조금 덜 했더라면 지금 몸이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부터 단련해온 몸에 현재까지 철저한 자기관리가 이어지고 있으니 그는 80대 중반에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파워 넘치는 스윙을 한다. 지금도 드라이버 거리가 240야드 이상 나간다. 완벽한 회전에 정확한 임팩트를 보고 있자면 프로의 향기가 절로 느껴진다. 오랫동안 골프를 치면서 그는 골퍼로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다 이뤘다. 그 어렵다는 홀인원도 11차례나 기록했다. 2002년 말레이시아 방이CC에서는 파5홀에서 두 번째 샷만에 홀에 공을 집어넣어 알바트로스까지 해 봤다. 지금도 주 3회는 필드에 나가고 나갈 때마다 에이지 슈트를 하니 이보다 축복받은 인생은 없을 듯하다. 유 감독은 “골프를 오래 치면서 느낀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을 당하지 않고, 아프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사실 사람 일이라는 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매사에 겸손하고 조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83세이던 지난해 그는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 그가 희망하는 마지막 목표는 91세에 다시 한 번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그는 “몸 관리를 잘해 91세에 다시 한번 한라산 등정을 하고 싶다. 공식 기록은 없지만 90세가 최고령 등정이라고 한다. 하루종일 걸리더라도 91세에 꼭 한라산 정상을 밟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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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의 제국’ 부활?… 소토 놓친 양키스, MVP 출신 ‘폭풍영입’

    ‘악의 제국’의 부활인가.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역대 최다인 27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뉴욕 양키스가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MLB.com은 22일 소식통을 인용해 “양키스가 세인트루이스에서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린 1루수 폴 골드슈밋과 1년 1250만 달러(약 181억 원)에 계약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막강한 공격력을 바탕으로 올해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양키스이지만 1루수 포지션은 약점으로 꼽혔다. 앤서니 리조 등 1루수로 출전한 선수들은 평균 타율 0.216에 16홈런을 합작하는 데 그쳤다. 양키스는 당초 영입하려던 크리스천 워커가 휴스턴행을 택하자 방향을 틀어 또 다른 수준급 1루수 골드슈밋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올스타에 7번 선정된 골드슈밋은 골드글러브 4차례, 실버슬러거를 5차례 수상하는 등 공격과 수비를 겸비한 타자로 평가받는다. 2022년에는 타율 0.317, 35홈런, 115타점을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올해는 154경기에 출전해 타율 0.245, 22홈런, 65타점을 기록했다.골드슈밋의 합류로 양키스는 9명의 선발 라인업 중 네 자리를 MVP 출신 선수로 채울 수 있게 됐다. 미국 통계 전문 회사 엘리아스 스포츠 뷰로에 따르면 양키스는 한 시즌에 MVP 4명을 보유한 역대 7번째 팀이다. 가장 중심에 있는 선수는 올해 58홈런을 때리며 만장일치로 아메리칸리그 MVP에 선정된 에런 저지다. 저지는 62홈런을 기록한 2022년에도 MVP로 뽑힌 바 있다. 마이애미 시절이던 2017년 59홈런으로 내셔널리그 MVP에 오른 장칼로 스탠턴도 올해 홈런 27개를 날렸다. 올해 FA 최대어로 꼽히던 후안 소토를 지역 라이벌 뉴욕 메츠에 빼앗긴 양키스는 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시카고 컵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왼손 거포 코디 벨린저를 데려왔는데, 그 역시 2019년 내셔널리그 MVP 출신이다. 골드슈밋(통산 362홈런)과 저지(315홈런) 스탠턴(429홈런) 벨린저(196홈런) 등 양키스의 MVP 4인방이 기록한 홈런은 모두 1302개에 이른다.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몸값 비싼 선수들을 사들인다고 해서 ‘악의 제국’으로 불리는 양키스는 투수진도 대대적으로 보강하고 있다. 애틀랜타의 왼손 에이스 맥스 프리드를 데려오면서 8년 계약에 2억1800만 달러(약 3160억 원)를 썼다. 왼손 투수 역대 최고액이다. 양키스는 또 불펜 강화를 위해 밀워키의 주전 마무리 투수 데빈 윌리엄스도 영입했다. 양키스는 미국 진출을 선언한 일본 프로야구 출신 강속구 투수 사사키 로키 영입전에도 뛰어들었다. 양키스의 이런 행보는 통산 28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다.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마지막 우승은 2009년이었다. 양키스가 우승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은 올해 월드시리즈에서 맞붙었던 LA 다저스다.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만난 다저스에 1승 4패로 패했다. 오타니 쇼헤이(2021, 2023, 2024년)와 무키 베츠(2018년), 프레드 프리먼(2020년) 등 MVP 삼총사가 활약한 다저스는 올해 정규시즌에서 MLB 최고 승률(0.605)을 기록한 뒤 월드시리즈 정상에도 올랐다. 다저스 역시 양키스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사사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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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원한 도루왕’… 헨더슨 잠들다

    야구 역사상 최고의 1번 타자로 평가받는 ‘도루왕’ 리키 헨더슨이 22일 별세했다. AP통신 등 미국 언론은 이날 “헨더슨이 폐렴 증세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인근 병원에 입원했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향년 66세. 1958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난 헨더슨은 1979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오클랜드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에 데뷔했다. 이후 2003년 LA 다저스를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25시즌 동안 9개 팀을 거치며 통산 타율 0.279(1만961타수 3055안타), 297홈런, 1115타점을 남겼다. 그를 상징하는 단어는 도루다. ‘도루왕(Man of steal)’으로 불린 그는 통산 1406도루로 이 부문에서 MLB 역대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통산 도루 2위인 루 브록(1939∼2020년)의 938개와 468개 차이가 난다. 현역 선수 최다 도루는 스타를링 마르테(뉴욕 메츠)가 기록 중인 354개다. 헨더슨은 1982년엔 20세기 이후 한 시즌 역대 최다인 130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 헨더슨은 1980년과 1983년에도 각각 100도루, 108도루를 성공시키는 등 세 차례나 한 시즌 100도루 이상을 기록했다. 헨더슨은 선수 생활의 절반에 가까운 12시즌이나 도루왕을 차지했다. 40세이던 1998년에도 66도루로 이 부문 1위에 올랐다. 헨더슨은 뛰기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장타력도 갖춰 통산 300개에 가까운 홈런을 날렸다. 1회 선두 타자로 나서 친 홈런만 81개다. 이 역시 MLB 최다 기록이다. 통산 득점도 2295개로 MLB 1위다. 장타력과 정교함, 도루 능력과 주루 센스를 모두 갖춘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1번 타자로 칭송받았다. 헨더슨은 2009년 94.8%의 높은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명예의 전당 입성 첫 번째 도전에서 성공했다. 전설적인 선수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야구계는 슬픔에 빠졌다. 롭 만프레드 MLB 커미셔너는 추도 성명에서 “야구팬들에게 헨더슨은 도루와 리드오프 타격의 위대한 표본이었다”며 “최근 MLB가 추진한 베이스 크기 확대 등의 규칙 변경은 헨더슨의 시대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했다. ‘철인’ 칼 립켄 주니어는 “오늘은 야구에 있어 슬픈 날”이라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MLB.com은 다음과 같은 말로 헨더슨의 일생을 정리했다. “리키 헨더슨 같은 선수는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최고 중의 최고(One of one)였다.”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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