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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에 경의를 표한다.” 2020년 10월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을 때 이 대표가 한 말이다. 4년여가 지난 이달 15일 다른 사건으로 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가 인정돼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받자 이 대표는 “국민 여러분도 상식과 정의에 입각해서 판단해 보면 충분히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판결이 상식과 정의에 어긋난다는 얘기다.“사법 살인” 법원에 독설 쏟아낸 野 민주당의 반응은 훨씬 원색적이다. 판결 이튿날인 16일 장외집회에선 “미친 판결” 같은 격한 반응이 나왔다. 이어 18일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사법 살인”, “(담당 판사가) 서울 법대 나온 게 맞냐” 등 수위가 한층 더 높아졌다. 판결 이전부터 민주당은 검찰독재대책위원회, 사법정의특별위원회 등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여론전에 나섰고, 이 대표 지지자들은 100만 장이 넘는 ‘무죄 탄원서’를 무더기로 법원에 냈다. 판결 당일에는 지도부와 지지자들이 법정 안팎에 대거 집결했다. 사법부에 대한 압박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민주당은 6월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사건 1심 재판에서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에도 “판사의 선입견, 독선과 오만” 등 비난을 쏟아냈다. 민주당이 여론전을 펼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 대표 판결이 부당하다는 주장에 더 많은 시민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법원도 이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법원을 향한 과도한 독설과 압력이 반복되면 오히려 반감이 커질 공산이 크다. 민주당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지지자들은 25일 열리는 이 대표 위증교사 1심 재판부에도 112만 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냈다. 국민의힘은 이런 민주당을 “판사 겁박”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실제론 민주당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판결이 나오기 전부터 한동훈 대표는 “판례를 따르더라도 유죄”라고 했고, 주진우 의원 등은 “징역 1년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며 구체적인 양형까지 언급했다. 유죄를 선고하라고 법원을 압박한 것으로 비치기에 충분하다. 여당 의원들이 이 대표 재판을 생중계하라며 법원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이번엔 실형” 압박 수위 높이는 與 이 대표가 선거법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여당은 더욱 기세가 오른 모양새다. 위증교사 재판에서는 실형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바로 법정 구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당내에는 어제 ‘재판 지연 방지 태스크포스’를 설치했다. 민주당처럼 별도 기구를 동원해 여론에 호소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이지만 이 역시 여당이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당의 모습을 보니 이 대표 선거법 판결 뒤 “사법부 판단에 경의를 표한다”고 한 것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헌법은 ‘법관은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야는 이 대표 재판을 놓고 경쟁하듯이 법관의 ‘양심’을 흔들고 ‘독립’을 훼손하려 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은 재판의 당사자가 되면 법정에서 증거와 법리를 놓고 다툰 뒤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항소와 상고를 통해 상급심의 판단을 받아볼 뿐, 법정 밖에서 법원을 어찌해 보겠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한다. 이게 건전한 상식이고 법치의 기본일 텐데, 두 정당은 국민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중국 외교부가 한국인의 무비자 입국을 내년 말까지 허용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주중 한국대사관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전격적이었다. 무비자 입국은 통상 별도의 협정을 맺거나 상호주의 조치로 이뤄진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한국과 별다른 협의 없이 ‘일방적 무비자 정책’을 당장 8일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더욱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이 간첩 혐의로 체포돼 양국 간에 냉기류가 흐르는 상황에 일어난 일이어서 해석이 분분하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의 인적 교류는 꾸준히 늘어나 2016년엔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의 절반 이상이 중국인이었고, 한국인이 방문한 해외 국가의 4분의 1가량이 중국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사드(THAAD) 배치를 빌미로 중국 정부가 한한령(限韓令)을 내린 데 이어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덮치면서 한중 간의 왕래는 끊기다시피 했다. 지난해 다소 회복됐지만 한국에 입국한 중국인, 중국을 찾은 한국인 모두 2019년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 ▷현 정부 들어 양국의 외교 관계도 순탄치 않다. 대미 외교에 중점을 두는 한국 정부에 대해 중국의 불만이 커지면서 주한 중국대사가 “중국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날로 치열해지는 양국 간의 기술 경쟁도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요소다.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에서 일했던 삼성전자 출신 한국 교민이 반(反)간첩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를 놓고 국내에서 “이래서 중국을 못 믿는 것”, “중국 스파이 색출하자” 등의 목소리가 분출하는 시점에 나온 중국의 무비자 입국 허용 조치를 관광사업 활성화 차원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반중 정서 확산을 바라지 않는 중국 정부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외교가에선 최근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을 우려하는 중국에 한국은 매력적인 견제 카드가 될 것으로 본다. 미 대선 이후 중국에 대한 견제가 강화될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한시라도 빨리 한국과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선 조변석개하는 중국의 태도가 미덥지 못한 게 사실이다. 국제정세가 바뀌면 중국이 언제 또 변덕을 부릴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다만 이번엔 중국이 한국을 향해 손을 내민 만큼, 우리로서도 한동안 등한시했던 중국과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는 있다. 한국 역시 북-러 밀착을 견제할 방안을 고민 중이고,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대중 수출을 활성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중국의 속내가 어떻든 이를 활용해 우리의 국익으로 연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특별감찰관 후보를 추천할 것인지를 놓고 국민의힘이 거센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지난달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 간의 면담이었다. 한 대표가 ‘김건희 여사 리스크’ 대응을 위해 특별감찰관을 임명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윤 대통령은 ‘야당의 북한인권재단 이사 추천이 먼저’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윤 대통령이 사실상 한 대표의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회동 이틀 뒤 한 대표는 조건 없이 특별감찰관 후보 추천을 진행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에 친윤(친윤석열)계로 분류되는 추경호 원내대표가 “원내 사안”이라고 맞서면서 친윤-친한(친한동훈)계 간에 본격적으로 전선이 형성됐다. 여당은 조만간 의원총회를 열어 논의할 방침인데 의견이 모이지 않으면 표결에 부칠지, 의총 내용을 공개할지 등을 놓고 양측이 연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미 ‘심리적 분당’ 상태라는 관측까지 나오는 상황이 됐다.후임자 임명은 법적 의무인데도 방치 사실 특별감찰관 임명은 늦어도 현 정부 초반에는 매듭지어 졌어야 할 문제다. 특별감찰관 결원 시 30일 안에 국회가 후보자 3명을 추천하고 대통령이 1명을 임명하는 것은 법에 명시된 의무다. 하지만 2016년 9월 이석수 초대 특별감찰관이 물러난 뒤 박근혜 정부는 후임을 정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5년을 흘려보냈다. 이를 비판했던 국민의힘으로 정권이 교체됐고 대통령직인수위는 특별감찰관을 곧 가동할 것처럼 얘기했다. 그러더니 윤 대통령 취임 20일 만에 특별감찰관 임명 방침을 놓고 대통령실에서 엇갈린 말이 나왔고 지금까지 흐지부지돼 왔다. 다만 특별감찰관을 임명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특별감찰관이 김 여사 리스크의 해법이 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 전 특별감찰관이 실세 중 실세로 꼽혔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감찰하면서 주목을 받았지만, 특별감찰관의 권한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다. 감찰 대상은 대통령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 대통령실 수석 이상으로 정해져 있고 통화 내역 조회 등 강제적 수단을 통한 수사는 할 수 없다. 감찰할 수 있는 비리 유형도 금품 수수 등 5가지로 한정돼 있다. 특별감찰관이 있어도 김 여사가 누구와 무슨 통화를 하는지 파악할 방법이 마땅치 않고, 김 여사 라인으로 꼽히는 비서관과 행정관들은 감찰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제 와 ‘김 여사 리스크’ 해법 될지 의문 이런 한계에도 윤 대통령 취임 직후 특별감찰관이 가동됐다면 김 여사 스스로 말과 행동을 경계하도록 하고, 문제의 소지를 조기에 발견하는 데 일정 역할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개입 의혹은 이미 수사가 일단락됐고 공천 개입 의혹 등은 고발된 상태여서 지금 특별감찰관이 임명된들 어찌해 볼 여지가 없다. 또 특별감찰관 추천에 합의한다 해도 후보자 물색 및 임명 과정, 새 특별감찰관이 인력을 선발하고 체계를 갖추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윤 대통령 재임 중에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대단한 해결책을 발견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친한계, 어떻게든 막아내려는 친윤계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특별감찰관에 대한 소신 때문이라기보다는 주도권 싸움을 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김 여사 문제가 커질 만큼 커졌는데도 진작 했어야 할 특별감찰관 임명조차 합의하지 못한 채 계파 간 다툼에 헛심을 쓰고 있는 현실이 현 여당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이들이 업무를 계속할 수 있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연임은 조직 운영에 매우 긴요합니다.” 2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국정감사에 출석한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은 읍소를 거듭했다. ‘이들’은 공수처의 이대환 수사4부장, 차정현 수사기획관, 송영선·최문정 검사를 가리킨다. 윤석열 대통령이 27일까지 연임안을 결재하지 않으면 3년의 임기가 끝나 공수처를 떠나야 할 처지였다. 윤 대통령은 이들의 임기 만료를 불과 53시간여 앞둔 이날 오후 6시 23분경에야 연임을 재가했다. ▷공수처 4부에는 세간의 관심이 큰 사건들이 여럿 몰려 있다.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외압 의혹, 김건희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 마약 사건 세관 직원 연루 의혹 사건 수사 등 대통령 부부나 대통령실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사건들에다 ‘고발 사주’ 손준성 검사장 공소 유지까지 맡고 있다. 그런데 4부에 검사는 이 부장검사와 평검사 1명뿐이어서 차 기획관이 수사를 돕고 있다. 이번에 연임이 무산됐다면 평검사 1명이 대형 사건들을 도맡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공수처 검사의 임기는 기본 3년에 세 차례 연임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 연임을 하려면 공수처 인사위원회가 적격 여부를 심의·의결한 뒤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들은 8월 13일 인사위 심의를 통과했다. 이후 두 달이 넘도록 대통령실에서 연임안을 붙들고 있었다는 얘기다. 재가가 미뤄지는 동안 업무에 집중력이 떨어져 수사에 차질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사실 이번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공수처 내부에서는 검사 임기가 너무 짧아 ‘임시직’이라는 말이 나왔다. ‘임기 3년에 연임 3회 가능’이라는 안은 2017년 10월 법무부가 내놓은 공수처 설치 방안에 등장한 뒤 법률에 반영됐다. 일반 검사는 정년까지 임기에 제한이 없고 7년마다 적격 심사만 받는 것과 대비된다. 당시에는 너무 권한이 큰 공수처가 탄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법무부가 공수처법의 신속한 통과를 위해 이런 안을 제시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수처의 인력 수급을 어렵게 만들고 독립성을 취약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됐다. ▷현재 공수처 검사는 처장, 차장을 포함해 16명이다. 이달 말 1명이 그만둘 예정이어서 실제론 정원 25명 가운데 사실상 10명이 결원 상태다. 그런데 공수처가 지난달 요청한 검사 3명 신규 채용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의 재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 공수처가 대통령 부부와 관련된 수사를 여러 건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검사 연임과 충원을 자꾸 미루면 인사권을 무기 삼아 공수처를 압박하려 한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헌법재판소가 헌법재판소법 조항에 대해 위헌 취지로 결정한 사례는 1988년 설립 이후 단 3건뿐이다. 2건은 한정위헌결정을 따르지 않은 법원 판결이 헌법소원 대상이 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세 번째가 이달 14일 나온 심리정족수에 관한 가처분 인용 결정이다. 헌법재판관 9명 중 7명 이상이 참석하지 않으면 심리를 못 열게 돼 있는 조항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킨 것이다. 17일 국회 몫 재판관 3명이 퇴임하는데도 후임자 임명이 이뤄지지 않자 자구책을 취한 셈이다. 헌재가 정족수 규정에 대해 ‘셀프 결정’을 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입법을 통해 정비하는 게 바람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재판관 공백을 불러온 국회의 책임부터 물어야 한다. 이는 ‘재판관의 임기 만료일까지 후임자를 임명해야 한다’는 헌재법을 엄연히 어긴 것이다. 그러고선 더불어민주당이 “헌재 스스로 입법 행위에 준하는 결정을 했다”고 지적한 것은 적반하장이다. 야당 탓만 하며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보여온 국민의힘도 도긴개긴이다.재판관 선출 기한 넘긴 與野의 위법 이번 결정으로 헌재가 심리는 이어갈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헌재의 기능은 마비된 것이나 다름없다. 헌재의 핵심적 역할인 법률 위헌 결정, 헌법소원 인용, 탄핵 결정 등을 하려면 재판관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지금처럼 재판관이 6명만 남아 있어도 결정을 내릴 수는 있지만, 실제론 한 명이라도 결원이 있는 상태에선 주요 사안에 대한 판단은 가급적 미룬다. 한 명의 의견에 따라 위헌과 합헌이 갈릴 수 있으므로 ‘완전체’가 아닌 상태에서 이뤄진 결정에 대해선 정당성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해서다. 결국 당장 이번 달부터 헌재의 주요 결정은 이뤄지지 않게 됐다. 그만큼 헌법에 어긋나는 법률이 유지되는 기간은 길어지고 기본권 침해를 구제받는 것은 늦어져 국민이 헌법재판을 받을 권리를 행사하는 데 차질이 빚어진다. 문제는 이번만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재판관 공백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재판관은 대통령, 대법원장, 국회가 각각 3명을 지명 또는 선출한 뒤 임명되는데 이번처럼 국회 몫이 제때 채워지지 않는 일이 잦다. 2018년에는 여야 간 이견으로 한 달가량 재판관 3명이 충원되지 않았고, 2011년 조대현 전 재판관 퇴임 후에는 1년 2개월간 공백이 빚어졌다.제도 개선해 공백 생길 여지 없애야 지금대로라면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이를 막을 제도적 개선책이 시급하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방안이 독일, 스페인처럼 후임 재판관이 임명되지 않았을 경우 임기가 만료된 재판관이 직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국회에서도 이런 취지의 헌재법 개정안이 수차례 발의됐지만 재판관 임기를 6년으로 규정한 헌법에 어긋나는지를 놓고 의견이 갈리면서 입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제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헌재가 멈추는 것을 막기 위해 법률에 의해 재판관 퇴임 시기를 임시적으로 미루는 것은 헌법의 취지나 목적의 정당성에 비춰 용인할 수 있다고 본다. 국회 몫 재판관 3명에 대한 추천권을 정당별로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등도 명문화된 규칙으로 정할 필요가 있다. 계속 관례에 맡겨두면 재판관 교체 때마다 여야 간에 갈등이 빚어질 소지가 있다. 각 당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탄핵 심판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의 헌재 결정을 미루기 위해 고의적으로 재판관 선출을 미룰 우려도 있다. 이런 꼼수를 시도할 여지조차 남겨둬서는 안 된다. 국회가 헌재를 멈춰 세울 권한은 헌법이나 법률 어디에도 없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라임자산운용의 ‘전주(錢主)’인 김봉현 씨가 일으킨 다양한 논란 중에는 룸살롱에서 3명의 검사에게 접대를 했다는 것도 있다. 이후 검사 2명은 불기소됐고 유일하게 법정에 선 나모 검사마저 1·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제 식구 봐주기’라는 비판이 무성했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끝나는 듯했던 이 사건은 대법원이 어제 원심을 파기하면서 상황이 다시 한번 뒤집혔다. ▷2019년 7월 벌어진 술자리에 등장하는 인물은 7명이다. 김 씨와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 현직 검사 3명이 먼저 모였고, 중간에 대통령실 행정관과 이종필 전 라임 부사장이 다녀갔다. 술값과 밴드 비용, 여성 접객원 비용 등을 합친 총비용은 536만 원이었다. 관건은 검사들에게 제공된 향응이 청탁금지법상 처벌 기준인 1인당 100만 원이 넘느냐였다. 통상 전체 비용의 ‘n분의 1’로 계산하는데, 기소와 판결에서 핵심은 모수인 ‘n’을 몇 명으로 볼 것이냐였다. ▷검찰은 기소 단계에서 시간대별로 참석자와 비용을 분류한 뒤 나 검사보다 먼저 자리를 뜬 검사 2명이 받은 접대 금액은 각각 96만여 원으로 산정했다. 두 검사가 귀가한 뒤 발생한 밴드비 등을 제외해 100만 원 아래로 맞춘 ‘기적의 계산법’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나 검사는 114만여 원의 접대를 받은 혐의로 기소는 됐지만, 1·2심은 대통령실 행정관도 일부 향응을 받았다고 판단했다. 나 검사의 향응액은 93만여 원으로 줄었다. 법원이 검찰의 계산법을 인정한 데다 참석자는 더 늘려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술값을 더 세분화하면서 뒤늦게 와 잠시 참석했던 행정관을 빼야 한다고 봤다. 이렇게 되면 나 검사의 몫은 100만 원이 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게 대법원의 결론이다. 법조계에선 대법원이 합리적인 논리로 나 검사, 공여자인 김 씨와 전관 변호사를 처벌할 길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검찰이 불과 4만 원 차이로 기소하지 않은 검사 2명도 법원의 판단을 받아봤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애초에 검찰이 청탁금지법을 최소한으로 적용해 면피성으로 일부만 기소한 것부터가 문제라는 얘기다. ▷사법적 판단에 앞서 이 사건의 본질은 검사가 접객원까지 부른 술자리에 머물고 돈은 업자가 냈다는 것이다. 검찰이 법리와 계산법만 따질 게 아니라 반성부터 하는 게 도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검찰은 김 씨가 옥중에서 낸 입장문을 통해 검사들의 향응이 알려진 이후 4년이 지나도록 공식적으로 사과조차 한 적이 없다.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점을 근거로 검사들에 대한 징계도 미뤄지고 있다. 검찰에서 무슨 이유를 대든 국민의 눈에는 힘센 권력기관의 오만과 제 식구 감싸기로 비칠 것 같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지난해 7월 19일 집중호우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해병대 채모 상병이 무사히 돌아왔다면 오늘이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는 날이다. 채 상병은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고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 안타까운 사고가 긴 정쟁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후 1년 넘게 채 상병의 순직이 누구의 책임인지, 이를 밝히는 과정에서 외압이 있었는지를 놓고 여야 정치권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다투고 있다. 올해 5월, 7월에 이어 이달 19일 야당 주도로 ‘채 상병 특검법’이 세 번째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앞선 두 번의 특검법과 같이 이번에도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고 국회 재표결에서 부결돼 폐기되는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야당은 특검을 포기하지 않을 기세이고 윤 대통령은 받아들일 기미가 없어 앞으로도 비슷한 과정이 쳇바퀴 돌 듯 반복될 수 있다. ‘野 특검법 강행 뒤 尹 거부권’ 반복 중 거듭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여당 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질 수 있는 명분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 중’이라는 점이다. 윤 대통령이 5월 기자회견에서 “(공수처 수사가 끝난 뒤) 국민이 봐주기 의혹이 있다고 하면 제가 특검을 하자고 먼저 주장하겠다”고 말한 뒤 친윤(친윤석열)계에선 ‘선(先)수사 후(後)특검’을 고수하고 있다. 당 대표 선거 과정에서 공수처 수사와 무관하게 제3자가 특검 후보를 추천하는 방식의 특검법을 발의하겠다고 했던 한동훈 대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에 지난달 말 한 대표와 가까운 의원들이 공수처를 항의 방문해 “수사에 속도를 내달라”고 촉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반면 야당은 내심 공수처가 여권에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것 아닌지 의심한다. 공수처만 동네북 신세가 된 모양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수처가 수사 결과를 내놓는 게 급선무다. 그래야 이를 수용할지, 아니면 특검이 다시 수사할지가 정해질 것이고 교착 국면에서 한 걸음 나아갈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수사의 엄밀성 못지않게 신속성이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 근래 들어 공수처 수사에 진척이 있다는 소식이 한동안 들리지 않고 있다.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공수처에 고발장을 낸 것이 지난해 8월 말이었다. 공수처는 올해 1월 국방부와 해병대를 압수수색한 것을 시작으로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등을 불러서 조사했고 윤 대통령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 ‘VIP 격노설’을 언급한 김 사령관의 녹취 파일 등 자료도 여럿 확보했다. ‘윗선’ 앞두고 멈춘 수사… 돌파력 절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의혹의 핵심인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을 혐의자에서 제외하는 과정에 윤 대통령이 관여했는지 여부를 밝혀내기 위한 과정이다. 이제 ‘윗선’에 대한 수사로 나아갈 때다.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 이첩 및 회수, 국방부 조사본부의 재검토 과정에 개입한 것으로 의심되는 대통령실 관계자들과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등이 그 대상일 것이다. 공수처가 이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는 형국이다. 공수처 관계자는 “수사가 답보 상태로 보일 수 있지만 정중동(靜中動) 상태”라고 했다. 무턱대고 소환해 조사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준비에 만전을 기하려고 마냥 시간을 끌 사안도 아니다. 논란이 길어질수록 국민의 관심은 낮아지고, 수사의 동력이 떨어져 흐지부지될 우려가 있다. 그러면 채 상병 논란은 끝없이 제자리를 맴돌게 된다.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 기대가 현실화되지 않도록 공수처의 돌파력이 절실한 시점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윤석열 정부에서 안보실장 4명이 등장하는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킨 참모다. 그래서 김 차장이 대외정책의 진짜 실력자가 아니냐는 질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매사에 주목받고 있다. 40대 초반에 이명박 청와대에 합류해 대외전략 담당 비서관과 기획관(수석급)으로 4년 반 동안 중책을 맡았다. 김 차장만큼 보수 정부의 대외정책에 깊게 또 오래 관여한 이는 없다. 그런 그가 3일 한 포럼에서 한 실언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김 차장은 11월 미국 대선에서 현직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 후보가 당선될 때 상상할 수 있는 정책 리스크가 무엇인지 질문받았다. 그는 “(대통령이 아닌) 부통령 해리스에게 조언하는 참모진이라 (내년 이후) 백악관에서 얼마나 카리스마를 발휘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밑에서 존재감이 약했던 해리스 부통령의 참모이니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김 차장은 또 “(민주당 참모들의) 이름이 생소하다” “베테랑을 수혈해야 한다” 등의 말도 했다. 그러다 문제가 된 “(내가) 상대하게 되면 해리스 외교안보 참모들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는 앞서 모두 발언에서 해리스 참모진을 설명하며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 필립 고든 부통령 안보보좌관 등의 이름을 열거했던 터라 참석자들은 당연히 이들을 연상했다. 이날 포럼은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은 안보전문가와 중견 언론인이 참석한 자리였다. 이런 자리에서 발언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해석될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가 앞으로 한반도 정책을 주무르게 될 수도 있는 동맹국 최고위 인사를 놓고 ‘가르쳐가며 일해야 할 만큼 경험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묘사한 셈이다. ▷김 차장이 거론한 인물 중의 하나인 고든 보좌관의 이력을 보면 김 차장이 못 만나봤거나 못 들어본 게 경량급의 근거가 될 순 없을 듯하다. 해리스 후보가 당선될 경우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거론되는 그는 이미 15년 전에 국무부 유럽·유라시아 담당 차관보를 지냈고,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외교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쿤스 의원은 14년 상원 생활 중 상당 기간을 외교위에서 활동했다. 미국과 북한을 중심으로 중국 일본 러시아 정책을 다뤄 온 김 차장으로선 한미동맹만 놓고 본다면 이들보다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있겠다. 미국에 저자세일 필요는 없지만,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인식은 오만하다는 말 외에는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김 차장의 발언은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해 바이든 정부에 보고됐다고 보는 게 상식에 가깝다. 그 외교적 손실과 신뢰 저하를 어떻게 만회하려는 걸까. 김 차장은 한일관계를 놓고도 구설을 일으킨 바 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란 표현을 쓰는 바람에 윤석열 정부의 외교가 일방적 일본 거들기로 해석되도록 했다. 그게 1개월도 안 된 일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계엄령’ 논란이 정치권에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1일 여야 대표 회담 모두발언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최근에 계엄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게 기폭제가 됐다. 대통령실에선 바로 “거짓 정치 공세”라고 반박했고,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도 2일 “사실이 아니라면 국기 문란”이라며 가세했다. 민주당은 “계속 제보를 듣고 있다”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이번 논란은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이 고교 선배인 김용현 대통령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게 발단이 됐다. 방첩사령관도 같은 고교 출신이라는 점이 맞물리면서 “윤 대통령 탄핵 상황이 오면 계엄을 선포할 우려가 있다”, “최근의 흐름은 국지전과 북풍 조성을 염두에 둔 계엄령 준비 작전”이라는 등 민주당 의원들의 의혹 제기가 잇따랐다. 2일 열린 인사청문회에서도 야당 의원들은 “(윤 대통령이) 계엄령 대비를 위한 친정 체제를 구축 중이고 후보자의 용도가 그것”이라고 주장했고, 김 후보자는 “청문회는 거짓 선동하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맞받으며 언쟁이 벌어졌다. ▷계엄은 군이 치안을 강화하는 ‘경비계엄’과 군이 사법과 행정을 포함해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비상계엄’으로 나뉜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군이 체포·구금, 언론·출판·집회·결사 등도 통제할 수 있다. 계엄사령관이 핵심적 역할을 하지만, 계엄사령관을 추천하고 지휘·감독할 권한은 국방부 장관에게 있다.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계엄 선포를 건의할 수도 있다. 이런 자리에 대통령의 최측근을 앉히는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게 야당의 주장이다. ▷정부 수립 이후 비상계엄은 1948년 여순사건을 시작으로 4·19혁명, 5·16군사정변 당시 등 총 9차례 선포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 10월 선포된 비상계엄이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확대돼 1981년 1월까지 지속된 게 마지막 계엄이었다. 제헌 헌법부터 계엄을 명시한 것은 비상사태에 최후의 수단으로 군이 개입해 국가와 국민을 지키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취지와 반대로 과거 군사정권이 유신 선포 등에 반대하는 국민을 탄압하는 데 계엄령을 악용했던 게 사실이다. ▷한동안 사라졌던 계엄 논란이 되살아난 것은 2018년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이후의 혼란에 대비해 기무사가 ‘계엄 문건’을 만든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계엄령 선포 직후 야당 의원들을 체포한다는 등의 내용도 들어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최종 보고서에서 빠진 것으로 알려졌고, 실질적인 실행 계획이었다는 점도 입증되지 않았다. 계엄령하에서 겪었던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사는 이들이 지금도 있다. 누구라도 계엄을 언급할 때는 신중했으면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근래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 사건 처분을 놓고 ‘대가성이 인정되지 않아 청탁금지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취지의 분석들이 종종 눈에 띈다. 다른 혐의 적용 가능성까지 포괄적으로 염두에 둔 표현이라면 몰라도 청탁금지법 자체는 대가성과 무관하다. 애초에 이 법이 만들어진 것은 대가성을 입증 못해 처벌 못했던 ‘스폰서 검사’ 사건 같은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청탁금지법에서는 대가성은 물론 직무 관련성이나 명목과 관계없이 공직자가 한 번에 100만 원, 1년에 300만 원 이상의 금품을 받으면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한다. 그런데 공직자의 배우자가 이에 해당하는 금품을 받았을 때는 기준이 달라진다. 직무 관련성이 있는 경우에만, 그것도 배우자 본인이 아니라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공직자를 처벌한다. 행위자와 처벌 대상이 다른 것은 ‘자기책임의 원리’가 적용되는 헌법 체계에서 이례적이다. 이에 관한 헌법소원에서 헌법재판소는 2016년 배우자 대신 공직자를 처벌하는 것은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공직자와 배우자는 “경제적 이익 및 일상을 공유하는 긴밀한 관계”여서 배우자가 받은 것은 공직자 본인이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다. 헌재 결정은 존중돼야 하지만 법조계 일각에선 여전히 “책임과 형벌의 비례원칙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배우자 처벌 빠진 청탁금지법… “개정 불가피” 이렇게 법이 만들어진 데는 공직자 직무와 관련 없는 금품까지 배우자가 못 받게 하면 배우자의 사적 활동을 지나치게 제약할 소지가 있다는 우려가 반영됐다고 한다. 청탁금지법 제정 당시 적용 범위가 너무 넓다는 지적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잉 입법을 걱정한 것에도 일리는 있다. 다만 영향력이 막강한 고위공직자의 배우자가 금품을 받는 상황까지 예상했다면 법 조항을 더 정교하게 다듬었을 것 같다. 배우자의 금품 수수에 관한 청탁금지법 규정은 국민의 법 감정과 맞지 않고 법리적으로도 논쟁의 소지가 있어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 법은 대통령부터 최말단 공무원과 일부 민간인까지 적용되는 만큼 그 배우자가 받는 금품의 성격도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다. 적어도 고위공직자의 배우자에 대해서는 직무 연관성을 배제하거나 훨씬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위반한 배우자에게도 책임을 묻는 게 합리적이라고 본다.‘명품백 사건’은 법의 잣대로만 따질 일 아냐 그보다 먼저 법이 정한 경계가 모호할지라도 공직자의 배우자가 고가의 선물을 받는 게 용인되는지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했다. ‘공짜 선물’은 없고 모든 돈에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는 게 세상의 이치다. 법에 적혀 있지 않아도 도덕과 상식에 따라 뭘 받으면 안 되는지 가늠할 수 있고 이를 지켜야 한다. 대통령 부인에게 화장품과 양주 등을 선물한 데 이어 디올백까지 들고 나타난 최재영 씨의 행동은 ‘몰카’ 목적이었다는 걸 몰랐다 해도 수상쩍었을 것이다. 만남을 피하기 곤란했다면 선물이라도 거절하는 게 당연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5월 “제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에 대해 사과했다. 설령 법적으론 처벌할 수 없다는 최종 결론이 나와도 달라질 건 없다. 오히려 김 여사 조사 과정에서의 논란 등이 더해지면서 여론의 시선은 더 따가워졌고, 윤 대통령과 김 여사가 재차 사과해도 부족할 판이다. 그런데 서울중앙지검이 무혐의 방침을 밝힌 직후 일부 대통령실 관계자는 “당연한 결과” “본질은 몰카 공작”이라고 했다. 마치 승자의 발언처럼 들린다. 윤 대통령 부부도 같은 생각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2년 3개월 동안 국회의 인사청문 대상이 된 공직 후보자는 모두 61명이다. 16일 임명된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현 정부에서 국회의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채택 없이 자리에 앉은 26번째 공직자가 됐다. 인사청문 대상 10명 중 4명 이상은 거대 야당의 반대에 개의치 않고 임명을 강행했다는 뜻이다. 고위공직자에 대한 국회의 검증 강화라는 인사청문회 도입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2000년 대법원장, 국무총리 등을 대상으로 시작된 인사청문회가 장관급으로 대폭 확대된 것은 2005년이었다. 당시 이기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아들 부정입학 의혹 등으로 전격 사퇴하자 노무현 대통령이 ‘모든 국무위원 후보자에 대해 청문회를 실시하자’고 공세적인 제안을 했고, 야당도 호응하면서 법제화됐다. 이후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국회의 반대에도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한 사례는 총 30건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이 국회의 의견을 어느 정도 존중한 결과였다. ▷문재인 정부 때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문 전 대통령 임기 중에 청문보고서가 아예 채택되지 않았거나 여당이 단독 채택했는데도 대통령이 임명한 공직자는 34명에 이른다. 야당이 임명에 반대하고 대통령은 무시하는 패턴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문 전 대통령은 “오로지 흠결만 놓고 따지는 무안 주기식 청문회”라고 야당 탓을 했지만, 인사 실패란 지적도 많았다. 정부 스스로 정한 위장전입 음주운전 등 ‘7대 인사검증 기준’조차 지키지 않은 후보가 한둘이 아니었다. ▷윤 대통령 역시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첫 조각에서부터 ‘만취 운전’ 전력이 있는 박순애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등을 청문보고서 없이 임명했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했다. 야당이 발목잡기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이후에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날 골프를 친 합참의장 후보자도 임명했고, 하마평이 나올 때부터 야당에서 강하게 반대한 인물도 지명과 임명을 밀어붙였다. ‘이럴 거면 인사청문회는 왜 하느냐’는 인사청문회 무용론이 커지는 지경이 됐다. ▷인사청문회는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공직자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 수준을 높이는 등 순기능이 더 큰 제도다. 청문회가 제 기능을 못 하게 된 일차적 책임은 야당도 수긍할 만한 후보자를 찾아내지 못한 대통령실에 있다. 여야 청문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청문보고서를 채택한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례에서 보듯 적합한 후보자를 내면 야당도 무조건 반대할 수 없다. 이런 후보자들을 계속 발굴하면 청문회가 정쟁의 장으로 변질되는 일도, 인사를 놓고 대통령과 국회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우린 깐부잖아!” 유명 드라마에 나오는 친근한 대사를 홍보물에 인용하면서 이름도 ‘깐부’(오랜 친구)라고 붙인 이 동아리는 ‘친목 동아리’를 표방하며 회원들을 모집했다. ‘자차 8대 이상 보유’ ‘고급 호텔·리조트 VIP 다수 보유’ 등 광고를 앞세워 고급 사교클럽인 것처럼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KAIST 대학원에 다니다가 제적된 이 동아리 회장 A 씨는 회원을 면접하면서 외모와 집안까지 깐깐하게 따졌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동아리는 마약의 소굴이었다. ▷2021년 말 동아리를 만든 A 씨는 규모를 키우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대학생들이 접하기 어려운 호화로운 술자리를 마련하고 호텔 풀파티에도 초대했다. SNS 등을 통해 소문이 나면서 가입자가 300명으로 늘어나 전국 2위 수준의 대학 연합동아리로 성장했다. 그런데 A 씨가 뿌린 돈의 출처는 마약 판매 자금이었다. 가상화폐로 마약 구매 대금을 딜러에게 보내고 ‘던지기’ 수법으로 받은 뒤 회원들에게 팔았다. 마약상들이 근래 자주 이용하는 방식이다. ▷A 씨는 처음에는 ‘입문 마약’이라고 불리는 대마를 회원들에게 권했다. 이후 엑스터시, LSD, 케타민, 필로폰 등 점차 강력한 마약으로 확대했다. 특히 이들이 애용한 것은 LSD였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LSD를 투약한 뒤 “갑자기 밀밭 전체가 바흐를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을 만큼 환각 효과가 세다. 몇몇 회원은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을 호텔로 불러 함께 투약한 뒤 집단 성관계까지 가졌다고 하니 이런 막장이 없다. ▷대학생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혹은 재미 삼아 ‘딱 한 번만’이라는 생각으로 마약에 손을 댔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약의 끝은 감옥이나 병원, 그것도 아니면 무덤”(양성관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이라고 했다. 검찰은 A 씨 등 6명을 기소하고, 단순 투약자 8명은 치료 조건으로 기소유예했다. A 씨를 제외하면 모두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 수도권 주요 대학 재학생이었다. 앞날이 창창했던 젊은이들이 마약의 덫에 걸려 미래를 알 수 없게 됐다. ▷지난해 적발된 마약사범은 2만7611명으로 전년 대비 50%, 10년 전에 비해선 3배가량 늘었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마약에 빠진 청년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5년 전만 해도 전체 마약사범 중 20대 이하가 차지하는 비율이 20% 미만이었지만 지난해에는 35%를 넘어섰다. 고교생이 마약 판매에 나서고, 캠퍼스에는 마약 홍보 전단이 뿌려지고 있다. 아직 판단력이 성숙하지 않은 청년들은 마약에 빠져들기 쉽고 그 폐해는 평생을 가는 만큼 교육과 치료를 강화해 단단히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마약의 유혹에 빠진 학생들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현실이 아찔하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던 2002년 6월, 검찰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삼남 홍걸 씨를 알선수재 등 혐의로 구속한 것이 블과 한 달 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발밑이 꺼지는 느낌이었다”고 썼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남 홍업 씨가 금품을 받은 혐의가 포착됐다. 검찰 내에서는 홍업 씨 구속영장 청구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대통령실이 법무부에 선처를 요구했다는 얘기도 돌았다. 하지만 결국 홍업 씨는 구속됐다. 이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법무부 장관이 물러났다.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싸워서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내줄 수는 없다)’이라는 퇴임사를 남긴 채. 이 사건뿐 아니라 그동안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에는 어김없이 검찰이 등장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을 구속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여야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해 대통령의 측근을 포함한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대거 기소했다. 어떤 배경에서 수사가 비롯됐든 검찰이 최전선에 서서 권력에 칼을 들이댔던 것은 사실이다. 검찰은 지금도 ‘거악 척결’을 자부심으로 삼고 있고, 검찰에 수사권이 필요하다는 핵심 근거로 제시한다. ‘성역’ 보여준 검찰의 김건희 여사 조사 그런데 요즘 검찰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검찰이 여권 주요 인사를 수사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출범과 ‘검수완박’법 시행 탓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여전히 검찰이 야당의 거물급 인사들에 대해선 활발하게 수사하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야당 인사들의 위법 행위가 드러난다면 몇 명이 됐든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외형상 공정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다. 이번에 김건희 여사를 조사하면서 ‘대통령 부인이라도 예외는 없다’라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검찰이 편파적이라는 비판은 한층 수그러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울중앙지검의 선택은 ‘검찰총장 몰래 출장 조사’였다.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대해 총장의 수사지휘권이 배제돼 있어서 조사한다는 사실조차 보고할 수 없었다는 것도, 경호와 안전 문제 때문에 검찰청사가 아닌 대통령 경호처 부속청사로 가서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조사 대상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검찰이 그렇게 했겠나. 서울중앙지검 지휘부 전면 교체에 이어 김 여사 조사를 지켜본 이들은 ‘성역’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검찰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든 국민의 신뢰를 받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지금의 검찰에는 뼈아픈 일이다. 거대 야당에서 검찰이 직접수사를 일절 못하도록 하는 ‘검수완박 시즌2’를 준비하고 있는 시점이다. 검찰이 믿을 것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여당 의원들이 재의결에서 부결시키는 것뿐인데, 민심의 동향이 중요하다. ‘검수완박 시즌2’ 앞두고 민심 잃어서야 재작년 검수완박법 진행 과정을 되돌아보자. 당초 민주당은 검찰의 직접수사권을 완전히 폐지하려고 했다가 여야 협상 과정에서 ‘부패, 경제범죄 등’에 대한 수사권은 남겨뒀다.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가졌음에도 한발 물러선 셈인데, 검찰 수사권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런데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 움츠러드는 모습이 반복된다면 검찰의 수사권을 옹호하는 여론은 힘을 잃게 된다. 야당은 부담 없이 법안을 밀어붙일 수 있고, 여당 내에선 ‘반란표’가 나올 여지가 커진다. 기존의 검찰은 사실상 문을 닫고 공소청으로 바뀌는, 검찰로서는 악몽 같은 일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검찰 스스로 그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自問)해보길 바란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내가 VIP한테 얘기할 테니까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사표 내지 마라(고 했다)”는 블랙펄인베스트먼트 전 대표 이모 씨의 녹음파일이 공개된 이후 세간의 관심은 ‘VIP의 정체’에 집중돼 있다. ‘구명 로비설’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누가 로비를 받았는지에 따라 사건의 파장과 성격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이를 의식해서였는지 이 씨는 당초 “VIP는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라고 했다가 “말이 되냐”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그는 “VIP는 김 여사를 뜻한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 씨와 김건희 여사의 관계를 알려면 먼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을 살펴봐야 한다. 약 3년간 진행된 주가조작은 1, 2차 시기로 나뉜다. 1심 법원은 2010년 10월 시작된 2차 시기에서 이 씨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고, 이 씨 또는 블랙펄인베스트의 이사가 김 여사의 계좌를 운용하면서 시세 조종에 이용했다고 판단했다. 이 씨는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에게서 김 여사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10여 년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얘기다. ▷이 씨는 VIP를 언급한 것은 “허풍 과시였을 뿐”이라고 했다. 변호사 A 씨가 이 씨와의 통화를 녹음한 것은 이미 이 씨가 김 여사의 계좌를 관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인 지난해 5월부터 올해 6월 사이였다. 김 여사와의 관계를 알 만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섞어 일종의 호가호위를 했다는 게 이 씨의 주장인 셈이다. 공개된 녹음 내용 중에는 모 경무관을 언급하며 “별 2개(치안감) 달아줄 것 같아”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건 허언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흘려듣기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다. ▷그는 지난해 7월 통화에서 “아마 내년쯤에 발표할 거거든. 해병대 별 4개 만들 거거든”이라고 했다. 해병대를 독립시켜 ‘4군 체제’를 만들고 해병대 사령관을 대장으로 격상한다는 취지다. 이 씨는 “신문 기사를 보고 한 얘기”라고 했지만 별도의 채널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법조계 일각에선 임 전 사단장이 지난해 8월 두 번째 사의를 표명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게 로비와 관련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이 씨가 국방부 장관 인사에 개입한 듯한 발언을 했다는 의혹 역시 확인이 필요하다. ▷이 씨와 임 전 사단장은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올해 3월 이 씨의 녹음파일에는 A 씨에게 “너는 성근이를, 임 사단장을 안 만났구나”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자신은 임 전 사단장을 만난 적이 있다는 전제가 깔린 발언으로 들린다. 김 여사가 결혼(2012년 3월)한 이후 연락한 적이 없다면서 지난해 김 여사를 갑자기 ‘VIP’라고 언급했다는 이 씨의 주장도 수상하다. 이런 의혹들 하나하나가 말끔하게 규명돼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사법부는 칼에도, 지갑에도 영향력이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법률가였던 알렉산더 해밀턴이 1788년에 쓴 글이다. 정책을 집행할 힘이 있는 행정부, 예산을 좌지우지하는 의회에 비해 사법부는 힘이 없다는 취지다. 그는 “(입법부, 행정부에 비해) 사법부는 본질적으로 취약해 그들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아직 삼권분립의 개념이 뿌리내리지 않았던 시절의 얘기다. 지금도 해밀턴을 인용해 ‘칼도 지갑도 없는 사법부’라고 말하는 판사들이 있지만, 이제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원의 위상은 탄탄하다. “어느 칼이며, 어느 지갑도 사법부에 복종하지 않는 데가 있나”라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말처럼 법치주의 사회에서 판결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정당이나 정부는 내심 못마땅한 판결이 나오더라도 겉으로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말하는 게 정석처럼 돼 있다. 판사 비판에 입법권까지 동원한 파상공세 하지만 요즘 더불어민주당의 분위기는 다르다. 지난달 7일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사건 1심 재판부가 이화영 전 경기도 부지사에게 유죄를 선고한 이후 법원을 향해 파상공세를 펴고 있다. 이재명 전 대표는 “북한에 가겠다고 돈을 수십억 원씩 대신 내달라고 하면 중대범죄인데 이 전 부지사가 그걸 요구했다는 것인가. 이 전 부지사가 바보냐”고 했다. 이 전 부지사가 쌍방울 측에 이 전 대표의 방북 비용을 대납하게 했다고 판시한 법원을 겨냥한 발언으로 들린다. 민주당 의원들은 더 노골적이다. 비판을 넘어 인신공격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정치검찰 사건조작 특별대책단’은 “편파적 판결” “자의적 증거 판단”이라며 재판부를 공격했고, 민형배 의원은 “정치 검찰과 정치적 판결이 악의 고리로 연결된 느낌”이라고 날을 세웠다. 김승원 의원은 소셜미디어에 “판결문은 판사의 선입견, 독선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적었다.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 전 부지사 담당 재판장에 대한 탄핵까지 요구하고 있다. 나아가 사법부 통제를 강화하는 법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다. 대표적인 게 ‘법 왜곡죄’다. 판사나 검사가 법을 왜곡해 적용하면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이 법이 도입되면 판결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고소·고발을 쏟아내 법관들을 위축시킬 것이다. 최근 민주당 의원들이 대법원을 대구로 이전하자는 법안을 낸 배경도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명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박찬대 원내대표가 이 전 부지사 판결을 비판하며 “심판도 선출돼야”라는 글을 올린 것도 심상치 않다. 법원의 시간… 현실로 다가오는 ‘사법 리스크’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단순히 하나의 판결에 대한 불만 표출 차원을 넘어 민주당이 검찰에 이어 법원으로 전선(戰線)을 확대했음을 보여준다. 검찰이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해 이 전 대표를 기소하면서 이 전 대표에 대한 주요 수사는 일단락됐고, 이제 법원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당장 이 전 대표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은 10월경 1심 선고가 이뤄질 전망이다. 위증교사 사건도 1심 공판 절차가 마무리 단계다. 정면승부는 지금부터다. 그동안 민주당은 이 전 대표에 대한 잇따른 기소를 ‘정치검찰의 조작’이라고 비난해왔다. 그 주장대로라면 법원의 판결은 이 전 대표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검찰에 일격을 가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는 조용히 판결을 기다리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민주당은 오히려 법원을 몰아붙이고 있다. 힘으로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권력분립 원칙에 어긋난다는 여론의 비판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이는 이 전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민주당에 얼마나 현실적이고 위협적인 문제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법률 용어였던 ‘친족상도례’가 널리 알려진 것은 방송인 박수홍 씨 사건 때문이었다. 박 씨의 형이 박 씨 돈을 횡령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을 때, 갑자기 박 씨의 아버지가 ‘박수홍의 돈은 형이 아니라 내가 썼다’며 주장하고 나서면서다. 부모는 자녀의 동의 없이 돈을 빼내도 처벌받지 않는 ‘친족상도례’ 조항을 이용해 큰아들의 처벌을 면해 주려 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무성했던 것. 헌법재판소가 어제 ‘친족상도례’ 조항의 적용을 중지하고 내년 말까지 법을 개정하라며 헌법불합치를 결정했다. ▷친족상도례의 대상은 두 부류다. 먼저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등은 절도 사기 횡령 등의 재산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형(刑)이 저절로 면제된다. 사이가 좋든 나쁘든, 범죄 액수가 많든 적든 예외가 없다. 다음으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친족은 피해자가 고소를 하는 경우 수사와 기소를 할 수 있다. 이른바 ‘친고죄’다. 이 중 헌재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한 부분은 ‘형 면제’ 부분이다. “일률적으로 형을 면제할 경우 피해자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희생시킬 우려가 있다”는 게 헌재의 판단이다. ▷친족상도례는 “법은 가정의 문턱을 넘지 않는다”는 로마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에서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이 조항이 있었다. 대가족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농경사회에선 친족상도례 조항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71년이 흐르는 동안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 호주제는 폐지된 지 오래고, 1인 가구의 비중이 전체의 3분의 1을 넘는다. ▷더구나 돈의 유혹이 커지면서 부모 자식과 형제자매의 재산을 노리는 ‘불량 가족’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번에 헌법소원 사건에도 지적장애인 조카의 돈을 빼돌린 삼촌, 노모의 예금을 횡령한 자녀와 그 배우자의 사례가 문제가 됐다. 이들은 피해자 측으로부터 고소를 당했지만 친족상도례가 적용돼 모두 불기소 처분됐다. 일반인들의 법 감정이나 상식으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악행이 법 조항 때문에 면죄부를 받았던 셈이다. 정부와 국회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법 개정은 번번이 무산됐다. ▷정부는 1992년 친족 사이의 범죄를 기본적으로 친고죄로 규정해 처벌 가능성을 열어두는 형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21대 국회에서도 친족상도례를 폐지하거나 축소하는 법안이 여러 건 발의됐지만 흐지부지됐다. 가족 문제에 국가의 과도한 개입을 막는다는 친족상도례의 취지는 살려야 한다는 의견까지 감안해서 정부와 국회가 부작용을 줄일 방법을 진작 찾았어야 했다. 이제라도 법 개정을 서둘러,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등으로 구속 기소하고…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을 직권남용죄 등으로 구속 기소하며 ….” 2017년 3월 6일 ‘국정농단’ 특검의 수사 결과 발표에서는 ‘직권남용’이라는 용어가 여러 차례 반복됐다. 이후 검찰이 박근혜 전 대통령,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 등을 기소할 때도 직권남용 혐의가 포함됐다. 이어진 ‘사법농단’ 수사에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고위 판사 14명이 직권남용 등 혐의로 줄줄이 기소됐다. 법조계에서는 사문화되다시피 했던 직권남용죄가 이를 계기로 공무원 범죄의 대표 격으로 떠올랐다고 평가한다.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접수된 인원이 2016년에는 4000명대였다가 2017년 9000명을 넘어섰고, 2000년대 초반까지 연 10명 안팎이던 기소 인원 역시 2018년 53명으로 늘었다. 직권남용죄가 종이호랑이가 아니라는 점이 널리 알려지면서 고소·고발이 폭증했고, 검찰도 적극 적용한 결과로 보인다. 우병우가 낸 헌법소원 기각한 헌재 이는 ‘직권남용죄의 남용’이라는 논란을 불러왔다. 직권남용죄를 구성하는 ‘직권’, ‘남용’, ‘의무 없는 일’ 같은 요소들의 의미가 추상적이어서 검찰이 직권남용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 있고 위헌 소지도 있다는 게 비판의 뼈대다. 실제로 직권남용 혐의가 대거 적용됐던 사건에서 무죄 판결이 쏟아진 경우가 종종 있다. 사법농단에서는 양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11명이 무죄가 확정됐거나 1·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국정농단에서도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된 사건 중 약 30%는 무죄 선고가 나왔다는 분석이 있다. 이를 놓고 ‘직권남용죄가 전 정부의 고위공직자나 정책적 판단을 처벌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고 우려했던 권성 전 헌법재판관의 의견이 회자되기도 했다. 하지만 우병우 전 수석이 ‘직권남용죄는 죄형법정주의상 명확성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 낸 헌법소원에서 헌재는 최근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법 조항의 의미가 다소 광범위하다는 이유만으로 명확성 원칙을 어겼다고 볼 수는 없고, 입법 취지와 판례 등을 통해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으면 된다는 취지다. 2006년에도 헌재는 비슷한 이유로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자의적 해석 최소화할 방안은 필요 우 전 수석은 ‘비선 실세’ 최순실 씨의 비위를 알고도 감찰을 소홀히 한 혐의, 공무원 인사에 부당 개입한 혐의,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 등을 사찰했다는 혐의 등 18개 혐의로 기소됐다. 우 전 수석은 재판 과정에서 다른 혐의들은 모두 피해 갔지만 직권을 남용해 이 전 특별감찰관을 사찰한 혐의만은 인정돼 징역형이 선고됐다. 직권남용죄가 필요한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법리 측면에서도 헌재가 거듭 합헌으로 결정한 만큼 직권남용죄 존치를 둘러싼 논란은 일단락됐다고 봐야 한다. 남은 과제는 자의적 해석의 여지를 최소화해 남발을 막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직권남용죄의 요건을 보다 세분화하고, 직권남용과 혼용되기 쉬운 ‘지위 남용’을 별도로 규정함으로써 혼선을 줄이는 방안 등을 제시한다. 이와 별개로 검찰은 필요 최소한의 범위에서만 직권남용 혐의로 적용하고, 법원은 보다 일관성 있는 판결을 통해 처벌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이는 직권남용 우려 때문에 ‘적극 행정’이 위축되는 것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국가의 형벌권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행사돼야 한다는 형사사법의 기본 원칙은 직권남용죄에도 엄격하게 적용돼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직무 태만, 소극 행정, 지시 사항 불이행, 친절·공정의 의무 위반…. 일반 공무원들은 정도가 심하고 고의성이 있다고 인정되면 이런 다양한 사유로 파면될 수 있다. 기소 여부나 재판 결과와 상관 없이 징계위원회에서 심의해서 결정하게 된다. 검사는 다르다. 징계위원회에서 정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징계는 해임이다. 파면은 “탄핵이나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경우”에만 할 수 있도록 검찰청법에 규정돼 있다. 파면과 해임 모두 공무원을 강제로 퇴직시킨다는 점에선 비슷하지만 퇴직급여 감액, 공무원 재임용 결격 기간 등 불이익의 정도에서 차이가 크다. 검사에게 더욱 민감한 부분은 변호사 활동 제한 기간인데 파면이 해임보다 2년 더 길다. 한 검사 출신 국회의원은 “검사장 출신 전관은 착수금을 5000만 원에서 1억 원 정도 받는다”고 했다. 재직 당시 직급이나 직무에 따라 금액에 차이는 있겠지만, 퇴직한 검사에게 변호사로서의 2년이 얼마나 천금 같은 시간인지 짐작할 수 있다.‘위법 기소’ 인정된 검사 파면 못 해 이런 ‘특별대우’를 받는 공무원은 판사와 검사뿐이다. 판사에 대해선 헌법에 관련 조항이 명시돼 있다. 반면 검사에 대해선 헌법이 아닌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다. 행정부 소속 공무원 중에선 유독 검사만 판사 수준으로 신분을 보장하도록 법을 만든 것이다. 그 이유는 “법원과 함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는 기본권 보장 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갖기”(이효원 서울대 교수) 때문일 것이다. 그러려면 적어도 검사가 국민을 무리하게 재판정에 세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보복 기소’를 했다는 이유로 검사로선 처음으로 탄핵소추된 안동완 검사의 경우 대법원이 자의적 기소라는 점을 인정했고, 헌법재판관 중 3분의 2가 위법한 기소라는 점을 인정했는데도 탄핵은 기각됐다. 파면을 정당화할 만큼 중대한 법률 위반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인데, 본분을 저버린 검사의 직을 유지하도록 한 것이 타당했는지 의문이다. 검사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 보장을 위해 파면 요건을 엄격하게 정했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정치권이 검찰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검사 탄핵을 남발하는 것은 지양돼야 한다. 그렇지만 안 검사의 사례처럼 애초에 탄핵의 명분이 될 만한 부당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정치적 중립 보장’ 취지에도 어긋나 오히려 까다로운 파면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은 검사를 보호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우려도 있다. 공무상 비밀 누설 등 혐의로 기소된 ‘고발 사주’ 의혹의 손준성 검사에 대해 1심 재판부는 “정치적 중립을 정면으로 위반해 사안이 엄중하고 죄책이 무겁다”며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손 검사 탄핵소추안도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탄핵심판은 멈춘 상태다. 탄핵이 청구된 것과 같은 사유로 형사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경우 탄핵 절차를 정지할 수 있도록 한 헌법재판소법 규정 때문이다. 결국 대법원 판결이 나와야 손 검사 파면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이미 기소된 지 2년 이상 지났고 언제 재판이 끝날지 모르는데 그동안 손 검사는 아무 제약 없이 재직할 수 있다. 다른 공무원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야당이 검사들에 대한 탄핵소추를 추진하자 검찰은 “권력을 남용한 보복”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후 손 검사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헌법재판관 다수가 안 검사의 위법 행위를 인정했다. 그럼에도 검찰에서는 자성의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여론은 싸늘해지고, 검사 파면 요건을 완화하도록 법을 고치자는 요구는 커지게 될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22대 총선이 끝난 바로 다음 날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를 비롯한 당선인들이 처음 찾은 곳은 대검찰청이었다. 이들은 “마지막 경고”라며 김건희 여사 소환을 촉구했다. 1주일 뒤 이번엔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과 당선인들이 대거 대검과 수원지검을 방문했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주장한 이른바 ‘검찰청 내 술판 회유’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서다. 향후 야당과 검찰의 공방이 더욱 거칠어질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야권이 다음으로 주목할 곳은 법원이 될 듯하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과 위증교사 사건에 대한 1심 선고, 조 대표의 입시 비리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이르면 올해 안에 나올 것으로 관측된다. 재판 결과에 따라서는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올 수 있는 사건들이다. 사법부에 대해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한 민주당 소속 당선인의 발언은 앞으로 법원에 유무형의 압력이 가해질 것임을 알리는 예고편으로 들렸다. 헌법재판소 역시 무풍지대는 아니다. 1988년 이후 헌재에 접수된 7건의 탄핵 심판 사건 가운데 5건이 여소야대인 21대 국회에서 통과됐다. 야당이 압도적 다수인 22대 국회에서도 탄핵소추가 잇따르고, 법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 간 이견으로 헌법소원이나 권한쟁의 심판이 쏟아질 수 있다. ‘정치의 사법화’로 법조인 수요 늘어이처럼 수사와 재판이 정치의 한복판에 서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근래에 점점 심화되고 있다. 검찰과 공수처 수사의 중립성, 특검 도입 여부, 주요 정치인 관련 재판의 공정성 등을 놓고 여야는 하루가 멀다하고 공방을 주고받고 있다. 이는 22대 국회에 법조계 출신이 대거 입성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 총선에서는 총 61명의 법조인이 당선돼 20대 49명, 21대 46명에 비해 대폭 늘었다. 전체 국민의 0.1%도 안 되는 법조인이 당선인의 20.3%를 차지한 것은 과대 대표가 아닐 수 없다. 법률 전문가인 법조인이 입법을 주 기능으로 하는 의원으로서 장점이 많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기존의 연구 결과들을 보면 법조인이 다른 직군보다 입법 활동에서 나은 성과를 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정당들은 다수의 율사들을 우세 지역에 공천하고 비례대표의 앞 순번에 배치해 국회로 불러들였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사법 전쟁’에서 핵심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법조계 출신 초선 당선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정당들의 의중을 엿볼 수 있다. 정치 극단화되고 사법기관 흔들릴 것 민주당에서는 고검장 출신인 박균택 양부남 당선인을 비롯해 대장동 의혹 관련 사건에서 이 대표와 측근들을 변호한 ‘대장동 5인방’이 눈에 띈다. 검찰 재직 당시 검찰총장이던 윤 대통령과 대척점에 섰던 이성윤 전 고검장도 국회에 입성하게 됐다. 이들은 당선 직후 민주당의 ‘술판 회유’ 관련 특별대책단에 이름을 올리며 활동을 시작했다. 조국혁신당에선 법무부 감찰담당관 재직 당시 ‘윤석열 찍어내기 감찰’ 의혹으로 해임 처분을 받은 박은정 당선인이 당의 검찰독재조기종식특별위원장을 맡았다. 반면 국민의힘에서는 대통령 법률비서관 출신인 주진우 당선인의 역할이 관심사다. 검사 시절부터 윤 대통령과 호흡을 맞추면서 최측근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여야가 사법을 정치에 끌어들이는 궁극적 이유는 수사와 재판을 통해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다. 이런 풍토에서는 정치의 본질인 타협과 양보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사법기관들의 독립성과 중립성은 흔들리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판사, 검사, 변호사 출신 의원들이 정치의 사법화에 선봉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위험한 교과서’ 검정 통과를 즉각 취소하라.” 일본 문부과학성이 19일 레이와서적의 중등 역사 교과서 2권을 통과시킨 것에 대해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발표한 성명이다. 일본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올 만큼 이 교과서에는 일본군 위안부, 한일합병 등 한일 간의 과거사를 왜곡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항의하는 등 후폭풍이 거세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서술이다. 이 교과서는 “일본군이 조선 여성을 강제 연행했다는 사실은 없으며 그들은 보수를 받고 일했다”고 적었다. 돈을 벌려고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는 취지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1993년 발표한 ‘고노 담화’에는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 모집은)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고 돼 있다. 일본 정부도 인정한 내용을 학생들은 반대로 배우게 됐다. ▷이 교과서는 일제의 식민 지배는 미화하고 정당화했다. “안전 보장을 위해 일본이 주도해 조선의 근대화를 진행”한 것이고, 을사늑약 당시 고종이 “만족”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늑약 체결 직전까지 이토 히로부미에게 사람을 보내 ‘대신들이 반대한다’며 유예를 요청했을 만큼 부정적이었고(최덕수 ‘근대 조선과 세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단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합병한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교과서 몇 줄로 뒤집을 수 없는 역사다. ▷더 큰 문제는 일본 우익 사관을 반영해 역사를 왜곡한 교과서들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3월 검정을 통과한 이쿠호샤 중등 역사 교과서는 강제징용과 관련한 서술을 “혹독한 노동을 강요받았다”에서 “혹독한 환경에서 일한 사람들도 있었다”로 바꿔 징용의 강제성을 흐리게 했고, 야마카와출판의 교과서는 ‘종군위안부’ 표현을 삭제했다. 지난해에는 조선인이 ‘징병됐다’는 표현을 뺀 초등학생용 사회 교과서들이 승인됐다. 프랑스와 공동으로 제작한 역사 교과서로 객관적 시각에서 나치의 책임과 과오를 가르치는 독일과 대비된다. ▷현 정부 들어 한일 관계는 개선되는 흐름이지만 과거사 문제는 제자리다. 한국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제 방안을 내놓는 등 노력을 기울인 반면 일본은 달라진 게 없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최근 야스쿠니신사에 공물을 봉납했고, 외교청서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거듭 적었다. 여기에 역사 교과서까지 퇴행하고 있다. 정확하고 균형 잡힌 역사를 배워야 미래 세대에서라도 과거사 문제 해결을 기대할 수 있을 텐데, 일본 정부가 그 기회마저 빼앗고 있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