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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이다. 설 연휴도 지났건만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이나 재판 절차가 제대로 진행될지, 조기 대선이 치러진들 지금과 같은 극단적 대립 속에 나라는 더욱 혼돈에 빠져드는 건 아닌지…. 이런 답답함은 필자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다. 정권교체 여론, 탄핵 여론, 대선후보 지지율 등이 복잡하게 뒤엉킨 설 기간 여러 조사에서도 드러나듯 많은 국민들도 헷갈리는 모양이다. 이를 놓고 이런저런 분석이 나오지만 본질적으론 ‘넥스트 비전’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한다.‘윤석열의 변란’을 거치며 많은 이들이 탄핵 이후 나라는 제대로 굴러갈지, 그 난세를 이끌 새로운 지도자는 어떤 덕목과 경륜을 갖춰야 할지 등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보편적 이익을 제대로 실현할 리더를 고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보수와 진보의 진영 문제도 아니고, 누가 정권을 잡느냐의 차원도 아니다. 그 점에서 유력한 대선주자이면서도 탄핵 찬성과 정권교체 여론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가능성과 한계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이 대표는 최근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 아니냐”며 ‘탈이념 실용주의’와 ‘성장론’을 내세우고 한미동맹 강화를 강조하고 나섰다. 트레이드마크인 기본사회도 내려놨다. 확실히 달라진 중도(中道) 행보다. 정치인, 특히 유력 대선주자가 중도층 공략을 위해 우클릭 행보를 보이는 걸 나무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탈(脫)이재명 전략을 바라보는 국민 시선이다.물론 입법 권력을 쥐고 있는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되면 적어도 다음 총선까지 3년간 민주당은 견제 불능의 ‘황금기’를 누릴 것이란 공포심이 보수 진영에 팽배한 게 사실이다. “한국이 중국에 먹힐 것”이란 반중(反中) 정서까지 엮은 극우 프로파간다가 2030 남성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스며들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긴 하다.문제는 이 대표가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자신이 대통령 되는 데 유리하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평상시 대선 국면 같으면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현직 대통령이 반헌법적 계엄과 내란 혐의로 감방에 갇혀 있는 ‘역사적 순간’이다. 대통령 파면을 주도하는 거대 야당 대표로서의 ‘책임 윤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인데도 오직 대권에만 관심이 가 있는 것처럼 비치면 뭘 해도 공감을 얻기 어렵다.더욱이 정권의 탄압을 받는 소수 야당이라면 단일대오가 중요하겠지만 민주당은 절대다수의 의석을 가진 거대 야당이자 잠재적 집권당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당이 다양성 확보는커녕 “이재명으로의 정권교체”만 부르짖고 대선에 걸림돌이 될 만한 변수는 모조리 제거하는 데 급급하다. 지지율 정체 혹은 하락은 이재명 악마화 탓, 거짓 선동의 탓, 검찰 정권의 범죄자 프레임 탓으로 돌린다. 무슨 민주파출소를 만들고 여론조사검증특위를 만들고 은행장들 집합까지 한다.필자는 이 대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누구랑 골프를 쳤네 안 쳤네, 국토부 협박이 있었네 없었네 등의 허위사실 유포 문제로 유력한 대선주자의 후보 자격을 박탈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법은 법이다. 요리조리 피할 방법만 궁리하지 말고 당당할 수는 없나.현재로선 차기 대선은 이재명이냐 아니냐의 싸움으로 치러질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현재의 이재명이 과거의 이재명과 싸워서 미래의 이재명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내놔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자신에겐 불리할 수 있지만 난국 수습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과감히 결단하는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 자신의 사법 문제를 속히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는 건 불확실성 해소를 위한 최소한의 도리다. 권력구조 개편 등 개헌에 대해서도 소극적으로만 대하면 선두 주자의 기득권 유지로 비칠 뿐이다. 대선 후보 졸속 경선 의구심도 떨쳐내야 한다. 여야정 협의체에 조건 없이 참여해 경제와 외교 등에 힘을 실어주는 조치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희생적 자세’ 없는 대선용 중도노선 외침이 얼마나 공허한가.온갖 곡절을 겪더라도 ‘탄핵의 겨울’이 지나면 ‘대선의 봄’이 올 가능성이 높다. 이 대표는 ‘리더의 무게’ 저울에 오른 셈이다. 평소 정치색을 잘 드러내지 않던 오랜 민주당 지지자의 일갈이 연휴 내내 귓전을 맴돌았다. “이 역사적 순간에 이재명은 뭘 걸 것인가. 그게 안 보이는 게 문제다.”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윤석열 대통령 구속이라는 중대한 변곡점을 맞아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이른바 ‘내란 특검’ 문제다. 필자는 한동안 12·3 불법 계엄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여야 합의 특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권위 있는 ‘진상 규명’ 체제” “계엄 수사의 일원화” 등의 이유였다. 무엇보다 국체 위기 상황에서 헌정 질서 위협의 실체를 밝히고 역사적 매듭을 짓는 막중한 책무를 현재의 검찰이나 경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짊어질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있었다. 우리 형사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던 건 물론이다. ‘검사 정권’의 검찰이 내란 행위 수사를 주도하는 게 맞나, 제대로 수사를 하긴 할까, 무슨 장난이라도 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자기 조직의 서열 1, 2위 수뇌부가 모두 계엄의 주요 임무 종사자로 연루된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내란죄 수사권 유무 논란을 떠나,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역량도 미흡해 보이는 공수처가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내란 혐의 수사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못 미더움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과 일단의 경호 세력이 관저를 요새화하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식으로 버티고 나온 건 상식 밖이었지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공수처와 경찰도 불안불안했다. 여야 합의 특검이 가동되면 대통령 측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내란죄 수사권 논란도, 대통령 신병을 둘러싼 물리력 대치와 불안도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했던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질적으로 국면이 달라지는 양상이다. 전 국방장관, 군과 경찰의 고위 관련자들이 모두 구속 기소돼 재판이 시작된 데 이어 불법 계엄 내란 행위의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 대통령까지 구속됐다. 온갖 혼란과 난맥 속에서도 계엄 수사는 9분 능선을 넘어 정점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대통령에 대한 기소 여부 결정 시한이 20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빨라야 한 달이나 걸리는 특검 도입을 놓고 정치 공방을 벌이는 게 무슨 실익이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혈세 낭비 얘기는 지엽적인 문제다. 여권 일각에서 주장하는 ‘특검 무용론’과는 맥락이 다르다. 특검 이슈가 오히려 신속한 사법 절차를 방해하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드는 것이다. 검찰이 대통령 기소 절차를 중단한다면 모를까. 그럴 리는 만무하다. 외국과의 ‘통모’를 전제로 한 외환 혐의도 합참의장의 일침 등 여러 논란을 의식한 듯 통째로 뺐다. 그러니 검찰이 대통령을 기소하고 나면 특검이 할 일은 직권남용 수사, 부화뇌동자 등 잔불 정리, 이미 검찰 등에 의해 기소된 피의자들 공소 유지밖엔 없게 될 수 있다. 과유불급 아닌가. 차라리 공수처 수사의 흠결을 주장해 온 국민의힘이 특검을 하자고 하면 논리적 타당성은 있겠지만 그럴 의지는 없고, 민주당은 신속한 수사와 기소를 주장하며 특검도 하자고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아닌가. 민주당이 상황이 변했어도 특검은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게 어떤 관성이나 도그마에 갇힌 탓인지, 검찰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트라우마 때문인지, 대선용 여론몰이이자 특검의 ‘인지 사건’ 수사를 통한 여당 궤멸 노림수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내란의 중요임무 종사자들이 이미 구속 기소된 데 이어 윤 대통령까지 구속된 만큼 공수처와 검찰의 내란죄 수사권 시비는 일단락됐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큰 줄기에 대한 수사 마무리와 기소, 공소 유지가 중요하고 차근차근 법원의 심판을 받는 시간으로 넘어가야 할 때다. 유무죄는 법원이 판단할 것이다. 이른바 부회뇌동자 등 잔가지 수사는 그리 급한 게 아니니 추후 보완해 가면 될 일이다. 이를 통해 계엄이란 예외적 상황을 통상의 시스템으로 해결하는 ‘사법 복원력’을 보여주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금의 특검 공방은 다시 법의 문제를 정치 문제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다. 특검을 하네 마네,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하네 마네 하는 동안 정점 직전의 수사 동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자칫 특검 활동과 재판이 마구 뒤섞이면서 지금까지 내달려온 수사가 뒤죽박죽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국가 안위의 문제인 만큼 정치 논리나 셈법은 제거돼야 한다. 무엇보다 ‘신속히’ 법적 판단의 궤도에 올리는 게 중요하다. 그래도 규명해야 할 의혹이 많다면 그때 다시 특검을 논의해도 된다. ‘대선 잔머리’를 굴리다 게도 구럭도 다 잃을 수 있다.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 계엄 사태에 대한 탄핵 심판과 수사는 국체의 문제이고 헌정(憲政)의 문제다. 민주공화정의 정체성 및 헌정 질서의 훼손과 관련된 국가적 사안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위반과 위증교사 등 사법리스크는 유력한 대선주자의 형사(刑事) 문제이자 출마 자격 문제다. 그런데 헌정 문제와 한 개인의 형사 문제가 한데 꼬였다. 급(級)이 다른 두 문제가 뒤엉킨 것은 물론이고 탄핵 선고로 조기 대선이 치러질 경우 그 실질적 수혜자가 이 대표가 될 공산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국헌 문란이란 본질은 사라지고 탄핵 심판 속도전이네, 재판 지연이네 하며 대선 유불리에 따른 아전인수 격 ‘시간표 싸움’이 벌어지는 게 한심한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윤 대통령 탄핵은 탄핵대로, 이 대표 재판은 재판대로 헌법재판소와 법원이 각각 신속하고 엄정하게 진행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미래 권력의 향배는 탄핵 심판 못지않게 그 자체로 중대한 일이다. 탄핵 심리는 속히 진행되는데 이 대표 재판은 한없이 늦어지면 정치적으로 형평성 논란이 벌어질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필자가 지난해 말 ‘대선 시간표에만 매달리다간 심판의 문에 들어설 것’이라는 칼럼을 쓴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권력은 진공(眞空)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 미래 권력이 누구의 몫인지는 중대한 문제다. 그러나 국가 혼란 해소와 뒤엉키면 나라 전체가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된다.” 불행히도 그 뒤 전개된 상황은 예견됐던 대로다. 미증유의 국가 혼란은 수습의 길을 걷기는커녕 2차 내전(內戰)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탄핵이든 재판이든 각각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사법 판단 절차를 존중할 생각은 않고 다들 권력 유지, 혹은 탈환에만 목을 매고 있는 것이다. 집권 세력의 책임이 훨씬 더 무겁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점에서 윤 대통령 측이 이 대표와 조국, 윤미향 등의 재판 지연 사례를 거론하며 “방어권 제약” 운운하는 것은 옹색한 논리다. “비상계엄은 헌법적 결단” 운운하더니 그런 형사사건들과 비교하며 탄핵 심판을 끌려 하나. 4월 헌법재판관 2명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심산인지는 모르겠으나 좀스럽게 비칠 뿐이다. 어느 보수 논객의 힐난대로 ‘군대 안 간 군 통수권자의 병정놀이’가 아닌 ‘헌법적 결단’이라면 자기 입장을 당당히 밝히고 속히 판단을 받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대표가 탄핵 뒤에 숨어 떨어지는 과일만 받아먹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 또한 그 자신의 권력 쟁취 성공 여부를 떠나 공동체를 생각한다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이 대표는 여러 신년 여론조사에서 보듯 현시점에서 미래 권력에 가장 근접해 있는 인물이다. 대선 출마 자격 문제를 온전히 정리하지 않은 채 대권을 거머쥐겠다는 것은 국민에게 또 다른 정치적 불확실성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숱한 사법의 위기를 겪으며 끈질긴 생존력, 생명력을 입증해 왔지만 비토론도 상당하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한 나라를 이끌 ‘지도자다움’을 보여준 적이 별로 없어서가 아닐까 한다. 국난의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사적 이익만 모색한다면 중간 지대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이참에 자신의 출마 자격 문제를 조속히 판단해 달라고 공개 요청하고 이를 위해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재판을 받겠다고 밝히는 건 어떤가. 2심에서 둘 다 무죄면 대선에 도전하고, 그게 아니라면 대선에 나서지 않을 각오가 돼 있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대권을 잡으려는 게 자신의 권력욕 실현 때문이 아니라 공적(公的) 사명감 때문이라면 말이다. 과연 그런 용기가 있을까. 조희대 대법원장의 신년사에서 두 대목이 눈길을 끈다. “국가 기관은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올바로 사용해야 한다.” “사법부의 본질적인 사명은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 재판관 임명 문제로 정치에 농락당한 8인의 헌법재판관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야만의 정치’에 그 어느 때보다 추상같은 사법의 시간이 오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 누구든 법의 판단을 정치적 꼼수로 요리조리 피하거나 멋대로 재단하려 했다간 진짜 ‘벼락 맞은 고목’ 신세가 될 수 있다.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고건 전 국무총리가 20년 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스스로 ‘고난(苦難) 대행’이라고 칭한 적이 있지만 요즘 한덕수 권한대행의 처지는 그때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고난(高難) 곡예’를 펼쳐야 하는 형국이다. 한 대행 체제는 극히 취약해 보인다. 무엇보다 국정 1인자의 반헌법적 계엄 망동을 몸으로라도 저지하지 못한 국정 2인자로서의 ‘정치적 원죄’가 있음을 부인할 순 없다. 이를 고리로 “내란 공범” “선제적 탄핵” 등 엄포를 쏟아내며 김건희-내란 특검 수용 등을 압박하는 민주당이 일견 칼자루를 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주요 10개국(G10) 국가에서 대통령에 이어 그 권한대행까지 탄핵하는 일이 벌어지면 아마 기네스북에 오를 신기록이 될 것이다. 미국은 한덕수 체제를 “지지하고 신뢰한다”고 공식화했다. 한 대행은 일본 총리와도 긴밀한 협력 유지를 확인했다. 수권 정당을 지향한다는 민주당으로선 국제 여론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권한대행 탄핵 정족수가 3분의 2가 맞느니 재적 과반이 맞느니 하며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지만, 계엄 해제 과정에서의 침착한 리더십이 돋보였던 우원식 국회의장이 탄핵의 총대를 메려 할까 싶기도 하다. 권한대행 탄핵은 정부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권한대행의 대행’ ‘그 대행의 대행’으로 이어지는 혼란은 상상하기 힘들다. 지정생존자는 드라마나 영화 속 설정일 뿐이다. 그렇다고 한 대행이 진퇴양난의 외줄타기 신세에 놓인 게 아니란 건 아니다. 어렵지만 헌법상 국정의 고삐는 여전히 한 대행이 쥐고 있다는 얘기다. 한 대행은 대통령의 지휘 감독을 받지 않는다. 특정 정당에 속한 정치인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전례 없는 과도기적 혼란기다. 역설적으로 한 대행은 한시적이나마 대통령 못지않은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여야정(與野政)을 두루 챙겨야 하는 독자적 지위를 갖고 있는 셈이다. 헌법엔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 범위에 대해선 아무런 규정이 없다. 선출 권력이 아닌 만큼 ‘현상 유지’만 가능하다는 게 헌법학자들의 다수 견해라고 한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창설적 권한까지 행사할 수는 없으며 소극적 권한 행사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도 그런 ‘법적 이론’에는 공감하지만 ‘정치적 실제’는 다르다고 본다. 더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헌법에 권한 범위를 명시하지 않은 것은 대통령 궐위 등이 어떤 경위로 발생할지, 그에 따른 안보상 위기 등 국가적 혼란이 어떤 양태를 띨지 예견할 수 없으니 그 시대의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권한을 행사하라는 뜻이 깔려 있는 것 아닐까. 김건희 특검과 내란 특검 문제도 그 연장선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극단적 ‘현상 유지’ 논리라면 모든 법이든 특검이든 다 거부해야 하고 헌재 재판관도 국회 몫이든 뭐든 무조건 임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그런 환원 논리로 작금의 혼란을 감당할 순 없다. 지금은 ‘국체(國體)’의 위기 상황이다. 그동안 어렵게 쌓은 민주공화정 시스템이 흔들리는 혼돈의 순간이란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는지를 놓고 여러 해석이 분분하지만 김 여사 문제가 5할 이상이라고 본다. 명태균 게이트의 문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할 즈음 계엄령이 선포된 걸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 대통령 배우자의 국정 개입, 이에 따른 국체 훼손이 급기야 45년 만의 계엄 사태로 이어졌다. 입법 권력 무력화를 위한 친위 쿠데타, ‘위헌적 변란(變亂) 시도’였다. 이 또한 국체와 직결된 사안이다. 김 여사 문제로 시작한 계엄 사태를 ‘현상 유지’ 논리로 덮을 수 있나. 검찰 경찰 공수처가 자신의 임명권자에 대한 수사 경쟁을 벌여 온 걸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대통령 내란 혐의 수사가 공수처 설립 취지에 맞는지, 그럴 역량은 되는지도 의문이다. 계엄 수사의 일원화를 위해선 특검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헌정 질서 위협의 실체를 밝히고 재발 방지를 위한 초석을 놓으려면 권위 있는 수사 주체가 필수적이다. 본래 현재 권력을 겨냥한 특검은 ‘야(野)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치 공세가 아니라 진상 규명이 목적이라면 야당도 특검 추천 방식 등에서 흠결이 없도록 대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한 대행은 더는 대통령의 명(命)을 받는 국무총리가 아니다. 자신을 임명해 준 ‘윤석열 대행’이 아니라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 대행’이다. 도의적 인간적 문제를 따질 때가 아니다. 차기 권력의 향배를 떠나 ‘국체’의 안정적 유지와 전환이 걸린 문제다. 여야정협의체에서 해법을 찾아내든 특검 수용의 길을 택하든 한 대행이 보일 ‘정치 곡예’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5석 부족한 정족수 미달로 폐기됐다. 한남동 관저의 대통령 부부는 가슴을 쓸어내렸을지 모르나 ‘지옥의 문’은 아직 열리지도 않았다.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자 궁극의 권한이지만 화석(化石)화된 유물인 줄 알았다. 40여 년 전 봉인된 칼을 꺼낸 대가는 엄청날 것이다. ‘장님 무사’라는 표현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탄핵이 되든 안 되든 이번 사태로 윤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을 잃었다. 권력의 레지티머시(Legitimacy·정당성)가 실질적으로 소멸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제2의 계엄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건 대통령 의지(意志)의 영역도 아니다. 국방부와 군 수뇌부가 “요구 있어도 절대 수용 안 한다”고 공개 경고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군통수권자의 영(令)은 바닥에 떨어졌다. 윤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깊은 성찰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계엄군을 국회에 투입하고 이동 상황을 직접 체크하고 선관위에 계엄군을 보냈으면서 “야당 경고용”이라고 한다. 그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을지, 향후 내란죄 혐의를 피해 가기 위한 변명은 아닌지 의문이다. 권력은 진공(眞空)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공백을 누가 어떻게 채울 것인지의 물밑 쟁투는 이미 시작됐다. 권좌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권력자는 없다. 윤 대통령은 짐짓 ‘2선 후퇴’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고도 ‘반국가 세력’이라고 규정한 야당은 정국 수습 과정에서도 배제하겠다는 생각은 분명해 보인다. 자신의 임기와 정국 안정 방안을 ‘국회’가 아닌 ‘우리 당’에 맡긴다고 밝힌 게 이를 방증한다. 이 대목에서 계엄 국면 초기 잠시 정치적 존재감을 보이는 듯하던 한동훈 대표의 행보가 흥미롭다. “조속한 직무정지”를 주장하더니 “조기 퇴진”으로 슬쩍 말을 바꿨다. 조속한 직무정지의 길은 탄핵밖엔 없는데, 한남동 관저를 다녀온 뒤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으로 전환한 것이다. “당에 일임”이란 대통령 말에 넘어간 건지, 이참에 자신이 정국을 리드할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국정 공동 책임자를 자처하고 나섰는데 어찌 될지 지켜볼 일이다. 탄핵안 1차 표결은 긴 권력 투쟁의 예고편이다. 향후 대권은 시간표와의 싸움이다. 윤 대통령의 처지는 큰 변수가 되진 못할 것이다. 탄핵이든 하야든 물러나되, 언제 어떻게 물러나느냐의 문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즉각 퇴진, 아니면 탄핵” 주장도, 한 대표의 “조기 퇴진” 주장도 결국 언제 대선을 치르는 게 유리한지의 수싸움 성격이 짙다. 국민의힘이 수모를 감수하고 탄핵 보이콧에 나선 것도, 민주당의 이 대표와 친명 지도부가 속전속결로 탄핵을 밀어붙이려 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민주당은 매주 탄핵안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젖은 연탄’이었던 탄핵 여론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필 태세다. 국민의힘을 ‘계엄 옹호’ 정당으로 몰아붙일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재명 대권 활주로는 안 된다”며 맞선다. 계엄의 불법성과 반민주성은 사라지고 정쟁으로 귀결되려 하고 있다. 우려되는 건 그런 대치가 박근혜 탄핵 때와는 달리 양측을 지지하는 시위대 간 ‘거리의 충돌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계엄 사태를 겪으며 공권력의 통제 기능도 약화됐다. 한국은 어쩌다 이런 나라가 됐나. 난데없이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해 전 세계 언론의 1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6시간 만에 이를 저지하는 복원력을 보여주는 듯하더니 사후 수습을 놓고 다시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주요 10개국(G10) 국가에 걸맞은 민주공화제 복원은 뒷전이고 차기 권력 향배를 둘러싼 노림수만 번득인다. 외신에 비친 2024년 한국 정치의 현주소가 부끄러울 따름이다. 미래 권력이 누구의 몫인지는 중대한 문제다. 그러나 국가 혼란 해소와 뒤엉키면 나라 전체가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된다. 어떤 방안이 국가적 혼란을 줄이는 길이고 차기 대선을 공정하게 치르는 길인지 최소한의 교집합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한 여야 대표 간 고도의 정치적 대화가 필요하다. 야당의 공명(共鳴) 없는 정부여당 주도의 ‘질서 있는 퇴진론’은 공허하다. 국정조사를 실시하든, 계엄 특검을 도입하든 국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진상 규명’ 체제부터 갖추는 게 우선돼야 한다. 이런 민주주의 복원 절차를 통해 누가 진정한 국가 지도자감인지 자연히 드러날 수도 있다. 대선 시간표에만 매달리다간 또 다른 ‘심판의 문’에 들어설지 모른다.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그나마 낮은 줄 알았던 첫 번째 허들에서의 예상 밖 중형에 휘청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장외 집회 메시지는 “펄펄하게 살아서 인사드린다. 이재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였다. 1월 초 흉기 습격을 당했을 때의 복귀 일성도 “결코 죽지 않는다”였다. 총선 전 ‘이재명의 존명(存命) 정치, 그 끝은’이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이 대표에게 늘 정치는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전장이고, 그 속에서 ‘나 이재명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문제인 것 같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런 끈질긴 생명력으로 대선에서 지고도 170석 원내 1당을 완벽한 자신의 아성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불의의 일격을 받았다. 이번 판결을 놓고 “이재명은 죽었네, 아니네” 등 갑론을박이 한창이지만 정파적 관점을 넘어 ‘사법의 탈(脫)정치화’ 시도라고 해석한다. 정치가 사법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고 판결에도 영향을 끼치려 한 것에 대해 사법부가 강한 경종을 울린 것이란 얘기다. 사법이 정치에 우롱당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이번 판결 직전에도 “법관 출신 주제” 운운하다 검찰 예산은 깎고 대법원 예산은 올려주는 식의 때리고 어르는 행태로 사법부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했다. 정치가 세지만 사법부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존재감은 확실히 보여준 것 같다. 이 대표의 “골프, 사진은 조작” “국토부 협박” 등의 발언에 대한 재판부의 유죄 판단에 대해 별 이의는 없다. 거짓인 듯 아닌 듯한 이 대표의 말재주가 자승자박이 된 꼴이다. 다만 필자 주변의 식자층 일각에선 “0.73%포인트 차 대선 패자에 대한 과한 처분 아니냐” “유권자를 우롱했지만 대선 출마까지 봉쇄하는 게 비례 원칙에 부합하는지 의문” 등의 반응도 꽤 들려 온다. 물론 ‘여의도 대통령’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해 온 이 대표가 과연 ‘패자’가 맞느냐는 반론도 있다. 결국 2심 재판부가 ‘법 논리’에 충실할지, ‘정치적 고려’도 할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진짜 분수령은 오늘 나올 위증교사 1심 재판 결과다. 보수 진영에선 더 센 징역형을 확신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첫 재판부가 징역형의 길을 열었으니 두 번째 재판부는 부담이 덜할 것이란 주장이다. 앞의 판결이 뒤의 판결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식의 논리는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유죄든 무죄든, 징역형이든 벌금형이든 위증교사 재판부는 그들대로 독립적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이 대표로선 내심 위증교사 1심에서라도 피선거권이 박탈되는 징역형을 면하고 선거법 2심에서의 반전을 꾀하는 것에 희망을 걸고 있겠지만 이 또한 두고 볼 일이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현실화하는 단계에 접어들면서 여러 정치공학적 시나리오가 난무한다. 이 대표는 지난 총선 때 8석만 더 얻었으면 하고 땅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임기 단축 개헌이든 뭐든 운신의 폭이 더 넓어졌을 것이다. ‘포스트 이재명’ 얘기도 많지만 아직은 섣부른 얘기다. 설사 이 대표가 낙마하더라도 친명들은 더욱 똘똘 뭉쳐 친명 내에서 대안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들 또한 대선보다 대선 1년 뒤 치러질 총선 공천에서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국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든 이 대표의 ‘존명 정치’는 시즌2를 맞고 있다. 이대로 종영의 길을 걸을지, 극적 회생의 길을 찾을지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절체절명의 위기임은 분명하다. 이는 그의 업보(業報)이기도 하다. 숨진 김문기 씨 모친의 오열, 총선 공천 때 속절없이 목이 잘린 비명계의 원한, 170석 의원들과 ‘개딸’ 강성 당원들을 자신의 사법 방패로 삼으려 했던 공적 의식의 결여…. 허나, 이 대표는 자신의 아성인 민주당에서 나와 홀로 광야에 설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70년 전통의 민주당도 한 개인의 ‘존명 정치’ 굴레에 얽매인 셈이다. 국가 위기의 경고음은 점점 커지는데 꽃피는 내년 봄까지도 자기 생존밖에 모르는 ‘이재명의 업보’와 자기 확신밖에 모르는 ‘윤석열의 업보’가 맞물려 나라는 점점 더 골병 들어 갈 것이란 암울한 예감이 든다. 누가 살고 죽는지는 그들의 문제지만 둘의 업보는 나라의 업보가 돼 가고 있다. 정치에서 절대적 배제, 절대적 옹호의 내전은 국가적 자해의 길인데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다. 그래도 판결은 판결이다. 어떤 경우든 최소한의 정치는 작동하길 바랄 뿐이다.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참 서글픈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기자회견에 대한 어느 원로 법조인의 한탄이 지금도 귓전을 맴돈다. 세계 10대 강국에 속한다는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자기 부인 문제를 놓고 TV 앞에 나와 2시간 넘게 “어찌됐든 사과”한다면서도 “아내 사랑 차원 아냐…” “순진한 면 있어” “앞으로 부부싸움 많이 해야” 등의 발언을 하는 걸 지켜보면서 그 ‘채신없음’에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부인을 대놓고 손가락질하고 낯 뜨거운 온갖 패설을 쏟아내는 것에 분개하고 어떻게든 보호하겠다는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건 인지상정일 수 있다. 하지만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젊은 기자들과 끝장토론을 하듯 언쟁하며 사사로운 심리를 드러내는 모습에서 발언 내용이 맞는지 틀리는지, 진솔했는지 어땠는지를 떠나 씁쓸했다는 반응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최고의 공적 기관인 대통령에 대해 우리 국민이 기대하는 ‘격(格)’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이번 회견은 나름대로 깊은 검토를 거쳐 전략적 계산에 따라 이뤄진 것 아닌가 싶다.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각종 의혹이나 논란은 두루뭉술하게 눙치고 넘어가면서 활동 중단이든 뭐든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여사 특검’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겠다는 배수진을 친 것이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과 여당이 반대하는 특검을 임명한다는 것 자체가 헌법에 반하는 발상”이라고 했다. ‘국정농단 특검’ 수사팀장을 맡았던 윤 대통령이다. 야당 단독 추천에 대해 헌재가 합헌 결정을 내린 사실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발언은 ‘여당’을 겨냥한 것이라고 본다. 한동훈 대표를 비롯한 여당 의원들을 향해 ‘특검 반대’의 메시지를 강하게 던졌다는 얘기다. 낭떠러지 끝의 위태로운 형국에 처한 상황에서 야권의 공세에 밀려 한 발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이판사판 저지의 길을 택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한 대표 측 대응이다. 한 대표 역시 특별감찰관만 내세울 뿐 여사 특검 얘기는 일절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특검 정국이 어떤 정치적 결말로 이어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칫 정권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을 경우 한 대표의 정치 생명은 그 길로 끝날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윤-한’ 두 사람은 특검 문제에선 같은 운명에 처한 셈이다. 반면 민주당의 특검 공세의 칼끝은 바로 이 지점을 노리고 있다. 야권 일각에서 탄핵, 임기 단축 개헌 등의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지만 이재명 대표의 ‘11월 위기’를 넘기기 위한 방탄 여론 조성용이라는 걸 상식적인 국민이 모르지 않는다. 아직은 불 붙지 않는 ‘젖은 연탄’에 매달리기보다는 특검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정국은 기약 없이 1년이고 2년이고 도돌이표처럼 특검 재발의, 거부권 등이 반복되는 양상이 지속될 공산이 크다. 이 대표의 신상에 결정적 변화가 오지 않는 한 이런 대치는 지속될 것이고, 나라는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그럼 언제까지 나라가 ‘특검의 늪’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나. 여권은 “특검은 곧 탄핵”이란 위기감이 크다고 한다. 태블릿PC 차원을 넘는 육성 녹취가 어디서 터져 나올지 모르고 결국 탄핵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의도 시각으론 맞는 말이지만 국민 눈높이와는 차이가 있다. 대외활동 중단, 제2부속실 설치, 특별감찰관 임명 등은 사후 조치다. 그거라도 잘하면 좋겠지만, 이미 불거진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지 않은 채 어떻게 ‘정치적 크레디트(신뢰)’를 확보할 수 있을까. 결국 핵심은 대통령 부부가 떳떳하냐는 것이다. 일반인들로선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의 ‘청와대 야당 노릇’까지 거론하며 당당함을 보여줬는데 왜 특검은 극구 피하는 건지 하는 의아함이 일 수도 있다. 특검 수용만이 정쟁의 악순환을 끊고 난국을 타개할 궁극의 해법인지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위헌 시비” “인권 유린” 운운하며 옹색한 법 논리로 방어벽을 치고 나선 건 공감을 얻기 어렵다. 명태균 사건서 보듯 여사와의 친분을 내세워 호가호위하는 인물들이 한둘이 아닐 거란 의혹이 상당히 퍼져 있다. 약한 리더는 여론에 떨고 어리석은 리더는 여론을 무시하지만 현명한 리더는 여론을 판단하고 대책을 세운다. 대통령은 작금의 여론을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가. 국민 불신을 해소하고 특검의 늪, 특검의 강을 어찌 건널 것인지 용기와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데…. 항우를 빗댄 고사성어 ‘필부지용(匹夫之勇)’이 자꾸 떠오르는 요즘이다.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세계적 전기(傳記)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통찰에 따르면 비극적 인물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나폴레옹 같은 비범한 운명을 좇는 비범한 인물이다. 이들은 타고난 영웅적 본성에 따라 불의 시련까지도 기꺼이 감당한다. 반면 평범하거나 나약한 천성의 인물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엄청난 운명의 수렁에 빠져들었을 때도 비극은 발생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경우다. 단적으로 김 여사는 비범한 인물도, 평범하거나 나약한 천성의 인물도 아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옥죄거나 간섭하는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독특한 제3의 유형인 듯하다. 봉건제도 아닌 민주공화정에서 아내 이상의 역할을 추구하는 대통령 부인은 필연적으로 비극적 요소를 안고 있다. 그 결과가 국정 에너지 고갈로 이어지고 있음은 잇단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20%로 6주 만에 다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보수의 심장’이라고 하는 대구·경북(TK)에서도 30% 선이 무너졌다. 보수층에서도 국정 수행 긍정 평가가 국민의힘 지지율을 밑돈 지 오래다. 부정 평가 이유로 ‘김 여사 문제’가 처음으로 가장 많이 꼽힌 것도 의미심장하다. 일주일 전 조사에선 김 여사 특검에 찬성하는 응답자가 63%, 김 여사가 공개 활동을 줄여야 한다는 응답은 67%에 달하기도 했다. 이쯤이면 여론의 판단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김 여사 문제에 대한 국민 여론은 좀 거창하게 말하면 장자크 루소의 ‘일반 의지(general will)’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용산에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대통령부터 “(특검은) 의원들이 야당 편에 서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할 테면 해보라는 건지 될 대로 되라는 건지 진의를 알 수 없을 정도다. 압권은 “업보로 생각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겠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는 발언이다. 뭐가 업보라는 건지, 누가 돌을 던진다는 건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좌고우면하며 여론을 살펴도 시원찮을 판에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니, 대체 무슨 소리인지…. 사실 독대 요구나 면담 의제를 미리 흘리며 여론 정치를 하는 듯한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의 정치 스타일이 마뜩하진 않다. 부적절한 활동 자제 요구도 아니고 아예 활동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게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한 대표의 요구가 국민 지지를 얻는 이유는 김 여사가 그간 쌓아 온 국정 개입 그림자가 그만큼 짙기 때문이다. 바로 그게 업보라면 업보일 것이다. 곧 윤 대통령의 임기 반환점이다. 지난 2년 반의 성적은 20% 지지율이 보여주듯 낙제점이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국민이 불러낸 대통령’이라면서 국민 목소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돌 던지면 맞고 간다”는 말 자체엔 자신에 대한 비판 여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김 여사 라인 정리하랬더니 구체적으로 잘못을 적어내라고 하고, 여러 시중 의혹에 대해선 혐의가 입증된 게 없다는 식이다. 법이 만능도 아니고 권력의 눈치를 본다는 건 일반 국민도 안다. 그런데도 형식적 법논리만 따질 뿐 겸허하게 머리를 숙이는 태도는 볼 수 없다. 아직 2년 반이나 남았는데, 뾰족한 국정 반전책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대통령이 바뀌어야 하는데 다들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해도 심기일전과 김 여사 라인 정리를 포함한 과감한 인적 쇄신을 거듭 주문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임기 후반부엔 무슨 엄청난 성과를 내려 일을 벌이기보다는 ‘기본 역할(minimum requirement)’에 보다 충실하길 바란다. 급변하는 경제 안보 위기를 제대로 관리하는 것 자체가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 대표의 정치 역량에 대해선 여전히 물음표가 따라다닌다. 새로운 보수의 가치, 보수의 플랫폼을 만들어 낼지에 그의 정치적 미래도 달려 있다. 위기에 놓일 때마다 외부에서 사람을 찾는 땜빵식 해법으론 보수의 미래가 없다. 이젠 당을 새롭게 정비하고 훼손된 보수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그 안에서 인물을 키우는 길을 가야 한다. 용산이든 여당이든 통절한 반성문이 절실한 때다. 그런데 윤-한은 서로 눈앞의 싸움에만 연연하니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는 ‘비극의 싹’은 점점 커져만 가는 듯하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얼마 전 한 기업인이 연락해 와 불쑥 한덕수 국무총리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질문 의도를 몰라 우물쭈물했더니 한 총리의 내공(內功)이 궁금하단 것이었다. 말인즉슨 혹시라도 탄핵 국면이 오더라도 큰 혼란 없도록 국정을 잘 관리할 수 있는 ‘권한대행’ 역량을 갖췄느냐는 질문이었다. 쪼그라든 경제를 걱정하면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국무조정실장이었다는 등 두서없이 답변을 하는 한편으로 “큰돈 들여 기업을 하는 분들은 이런 걱정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돈은 권력의 향배에 그토록 민감하다. 필자는 다만 대통령 탄핵은 말처럼 쉽지는 않다고 본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실망을 넘어 절망”이란 보수층이 늘고 있지만, 아직 박근혜 탄핵 때와 같은 국정농단 물증은 딱히 없다. ‘윤-한 갈등’이란 뇌관이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지만 이번에 당선된 108명은 비례 의원을 포함해 대부분 지역구가 안정적인 여당 텃밭 출신들이다. 정치생명을 걸고 그 위험한 ‘탄핵의 강’에 몸을 던질 이들은 현재로선 장담컨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최근 “징치(懲治·징계해 다스림)해도 안 되면 끌어내려야 한다”면서도 “탄핵 얘기를 한 적 없다”고 발을 빼는 것도 이를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섣불리 가속 페달을 밟다간 불확실한 게임에 휘말리다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물론 선거법 위반과 위증교사 1심 판결 등 ‘운명의 11월’이 다가오고 있어 내심 초조하고 갑갑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지층의 탄핵 분위기는 부추기면서도 직접 발은 담그지 않으려는 고도의 줄타기인 셈이다. 대통령 탄핵은 정치적으론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의 선택도 같이 탄핵되는 것이다. 그만큼 엄격한 근거에 따라야 한다. 특정인이나 특정 세력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 다수의 보편적 이익에 부합할 때라야 가능하단 얘기다. ‘방탄용’ 탄핵은 그래서 위험하고 야권 내 지지를 얻기도 힘들다. 한데 요즘 용산 돌아가는 걸 보면 윤 대통령과 측근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큰 착각에 빠져 있는 듯하다. 탄핵 공세의 칼끝은 주지하다시피 김건희 여사를 정조준하고 있다. 탄핵은 극도로 신중하게 접근할 사안이지만, 대통령도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불안 요소들을 해소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런데도 박근혜 때와는 다를 것이란 믿음 때문인지, 11월이 지나면 전세가 역전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건지, 극우 유튜버들의 정권 옹호 논리에 취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시중의 끌끌 차는 목소리엔 귀를 차단한 듯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용산은 김 여사 방어망이 뚫리면 마치 정권도 무너질 수 있다는 듯 전전긍긍하고 야당은 그런 여권의 난맥상을 즐기는 양상이 집권 전반기 내내 이어지고 있다. 김 여사는 그 숱한 논란에도 ‘언터처블’이다. 급기야 검찰이 명품백에 이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도 곧 무혐의 처분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특검에 대한 여권 균열은 물론 촛불 결집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땐 뭔 사과를 한들 일반 사람들은 코웃음 칠 것이다. 게다가 웬 음습한 정치 기술자인지 협잡꾼인지 하는 사람과 대선 이후까지 소통을 이어온 흔적까지 나왔다. 만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의 부인이 기소된다면 대통령 부부는 물론 국민도 참담하고 치욕스럽긴 마찬가지다. 간단치 않은 일이지만 최고 권력자에겐 남다른 사생관이 요구된다. 검찰 출신 대통령인 만큼 더 무거운 책임감과 엄정한 잣대 적용이 필요했다. 이제라도 여론재판이 아닌 사법재판을 받도록 하는 게 ‘대통령 부하’로 전락한 검찰 신뢰를 회복하고 당사자들도 후환을 더는 길이다. 시중에서 “간신” “여사라인” 등 권력의 무게추에 의문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김 여사의 활동을 제어하고 온전히 국정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 용산은 어떤 길을 갈까. 극적 반전이 이뤄질 수 있을까. 대부분 아닐 거라고 한다. 권력의 레지티머시(Legitimacy·정당성)는 선출 과정의 합법적 정당성뿐 아니라 권력 행사 과정의 실질적 정당성까지 포함한다. 어쩌면 실질적 정당성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 실질적 정당성이 임계점을 넘나들고 있다. 나라 경제는 점점 껍데기가 되고 있다는 우려와 한탄이 쏟아진다. 김 여사 장벽을 넘지 않고는 만사휴의(萬事休矣)다. 정치에선 할 말이 없으면 지는 법이다.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얼마 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심우정 검찰총장 임명장 수여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환담장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한마디도 공개되지 않았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괜히 허튼소리 나올까 무척 조심했다”고 한다. 지극히 사적인 얘기만 오갔다는 후문이다. 5년여 전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식이 문득 떠올랐다. 많은 참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윤 총장을 낙점한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똑같은 자세가 돼야 한다”며 ‘당부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사모님께 축하 말씀을 드린다”고 했던 말도 기억에 남는다. 두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한 번은 임명장을 받는 위치에서, 한 번은 임명장을 주는 위치에 선 윤 대통령의 심정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상상해 본다. 자신이 선택한 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그 흔한 ‘정치 중립’ ‘엄정 수사’ 얘기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말조심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으니…. 계량화해 설명하긴 어렵지만 우리 국민 의식 저변엔 ‘권력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강하게 깔려 있다고 본다. 권력을 쥔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힘을 동원해 방벽을 치고 서로 보호하려 한다는 선입견이다. 이는 ‘법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의 문제다. 최고 권력자는 옳든 그르든 그런 의심의 실체를 존중해야 한다. 자신이나 주변 문제에 대해선 내용이든 절차든 훨씬 더 엄중하게 접근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얘기다. 그게 정치의 영역이다. 이 지점에서 대통령은 실패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를 새삼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도 없겠지만, 심우정 검찰 체제가 막 출범한 시점이니 꼭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총장 수사지휘권 문제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실망, 민심 이반의 핵심 고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2020년 추미애 법무장관이 라임펀드 사기 사건과 함께 도이치 사건 등에 대한 검찰총장의 수사지휘권을 배제하는 지휘권을 발동하자 “검찰청법에 어긋나는 위법”이라고 반발했다. “총장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란 말도 그때 나왔다. 검찰청법 위반이든 아니든 적어도 도이치 사건의 경우엔 총장의 부인이나 장모가 연루된 사건인 만큼 이해충돌 여지가 있긴 했다. 당시 윤 총장이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수사지휘권 박탈을 어쩔 수 없이 수용했던 이유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위법이 확실하다”고 했던 수사지휘권 배제를 원상 회복시키지 않고 2년 이상 끌어 왔다. 만약 집권 후 바로 도이치 사건 등에 대한 검찰총장 수사지휘권이 원상 회복됐으면 어땠을까. 검찰총장 지휘하에 김건희 여사 수사에 속도를 내고 그에 합당한 처분을 내렸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명품백 같은 사건이 벌어졌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국민 앞에서 자신이 했던 말과 대통령이 된 뒤의 행동이 다르진 않았다는 당당함은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요리조리 뭉개 온 한동훈 전 법무장관이나 박성재 법무장관도 ‘방조’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원석 전 총장은 ‘법불아귀(法不阿貴)’ 운운하다 퇴임 직전인 7월에야 구두로 박 장관에게 수사지휘권 복원을 요청했다는 레코드만 남겼다. 권력과 여론 사이에서 눈치를 본 건지, 말 못 할 고뇌를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후임 총장에게 부담만 넘긴 꼴이 됐다. 이제 심 총장의 시간이다. 수사지휘권 박탈 무효를 선언하든, 지휘권 복원을 공개 요구하든 결국 애초에 꼬인 매듭을 상식에 맞게 풀지 않고는 백약이 무효다. 총장을 패싱한 채 휴대폰까지 맡기고 경호처 부속 건물에서 방문 조사를 했던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이미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최근 항소심에서 주가조작 방조 혐의로 유죄를 받은 또 다른 ‘쩐주’ 손모 씨와 김 여사는 구체적 실체가 다르다며 아무리 그럴듯한 법적 논리를 들이대며 방어벽을 쳐봐야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제라도 검찰이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는 얘기다. ‘권력은 해석의 힘’이다. 신권 국가에선 신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하는 이들이, 법치국가에선 법률적 해석의 권한을 쥔 이들이 권력을 쥔다. 그 ‘해석 잣대’가 정권마다 제각각이니 공화정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총장의 수사지휘권 박탈 파동 때 라임펀드 사건을 담당했던 한 검사장은 “정치가 검찰을 덮어 버렸다”는 말을 남기고 검찰 조직을 떠났다. 그때와 지금은 뭐가 다른가. 새 총장이 얼마나 뱃심 있는 인물인지 모르겠다. 특검 여론이 60%를 넘는 현실을 직시하길 바랄 뿐이다.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꽉 막힌, 답이 안 보이는 난국(亂局)이다. 의료개혁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가,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국민도 답답하다. “의대 증원 마무리됐다”고 쐐기를 박은 대통령은 “개혁의 본질인 지역·필수 의료 살리기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정작 지역·필수 의료의 현장 주체가 돼야 할 의료계 반응은 싸늘하다. 의료개혁은 사실 정부로선 불리한 게임은 아니었다. 채 상병 문제나 명품백 이슈를 덮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는지는 모르나, 국민 지지는 꽤 높은 개혁 과제였다. 그런데 이젠 정부의 정책 역량 한계만 드러내는 형국이다. 왜 이리 꼬인 걸까.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일말의 해법은 없는 걸까. 모든 정책엔 제약 요소(constraint)가 있다. 그 제약 요소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건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다. 그런데 의료개혁의 방향은 무엇이고 제약 요소는 무엇인데, 이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의 전략과 로드맵 없이 거칠게 내지른 측면이 있음을 정부 쪽도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마치 톱다운 방식으로 침대를 길게 짜놓고는 억지로 사람의 키를 늘여 맞추려 하는 식으로 비쳤다. 지금의 의료 상황에 대해 붕괴(崩壞), 대란(大亂) 등의 용어까지 쓰며 불안감을 조성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비상진료체계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며 “의료 현장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대통령의 말을 들었을 때는 뜨악했다. 대통령은 대체 누구에게 응급의료 현장 보고를 받는 건가. 우여곡절 끝에 응급실에 들어가도 수술할 의사가 있는지는 운에 맡겨야 하는 게 현실 아닌가. 아무리 준비를 많이 했더라도 정책의 일관성만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때도 있다. 흔들림 없이 밀고 가야 하는 것도 있고 현실을 직시해서 유연하게 방향을 조정하는 게 옳을 때도 있는 법이다. 어느 원로 법조인은 이를 참새에 비유했다. 어떤 참새는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방에 들어왔다가 투명한 유리창에 두어 차례 부딪힌 뒤 정신을 차리고 열린 문을 찾아 빠져나가지만, 어떤 참새는 계속 유리창에 부딪히다가 기진맥진해 죽기도 하는데, 지금 상황은 유리창만 향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물론 대통령은 “기득권 카르텔과 타협하고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자신의 소명으로 느끼는 듯하다. 역대 정부에서 아무것도 추진하지 않아 의료 현장이 왜곡되고 곪아 터진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전체를 싸잡아 카르텔로 규정하고 일거에 수술하겠다는 식의 접근은 아니었는지, 의료계를 이참에 손을 보겠다는 식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번 의료 파동은 어쩌면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간 의료계에 누적된 모순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많은 국민들도 알게 됐다. 이는 역설적으로 대통령의 ‘공(功)’이다. 모처럼의 기회를 살려 가려면 대통령이 ‘불굴의 원칙’만 강조할 게 아니라 의료계의 마음을 달래고 개혁의 동반자로 끌어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1년, 2년 못 버티고 의대생 전공의가 돌아온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전체적인 의료의 질이 떨어지면 이런 개혁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의료개혁 문제는 정치의 문제이고 리더십의 문제다. 이 대목에서 드라마 ‘더 크라운’의 처칠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처칠은 런던을 덮친 그레이트스모그에 대해 처음엔 “안개일 뿐”이라며 무시했다. 내각 회의에선 날씨 문제 갖고 왜 그러느냐며 책상을 내리치고 격노도 했다. 그러다 실각 위기까지 몰렸는데, 자신의 비서가 앞이 안 보이는 스모그 때문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조문한 병원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즉석 기자회견을 갖고 “영국 대공습 이후 최악의 장면”이라며 의료인 확보와 공기오염 원인 독립 조사위 구성 등 대책을 발표했다. 언론은 ‘위기 속 진정한 정치인’ ‘전쟁 때의 그를 보는 듯’ 등의 제목으로 보도했고, 일거에 상황은 반전됐다. 대통령이 한발 물러서거나 돌아가는 지혜를 보이면 어떨까. 국민을 위해 의료개혁을 추진했는데, 실제 해보니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오히려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상황이 벌어졌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카르텔 운운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것도 좋겠다. 의료 현장을 직접 찾아 “의대 증원은 각 의대 현실에 맞게 자율권을 주겠다” “의정이 함께 의료 발전 5개년 계획을 세워 보자” 등의 발표를 하는 건 어떨까. 그래도 의료계가 요지부동이면 그땐 여론이 등을 돌릴 것이다. 권력자의 물러섬은 때로 ‘굴복’이 아니라 궁극의 가치와 이익을 위한 ‘큰 용기’일 수 있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윤석열 정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초지종을 알 수 없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정책이든 인사든 일반인들 보기에 “갑자기 이건 뭐지?” 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충분한 설명이 없다. 뒤늦게 해명을 내놓기도 하지만 납득이 잘 가지 않을 때가 많다. 최근 국가안보실장과 국방장관 인사도 그랬다. 80일가량 남은 미국 대선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8·15 광복절 경축사의 ‘통일 독트린’ 발표에다 한미일 정상의 캠프 데이비드 회의 1주년 공동성명 발표 일정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장호진 전 국가안보실장은 12일 통보를 받기 전까지는 교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인사라는 게 전격적으로 이뤄지는 것이고, 일일이 공개할 수 없는 숨은 사정이 있을 수 있다. 개인 능력을 떠나 궁합의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상근 특보직을 주고 “헨리 키신저의 역할” 운운하는 걸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러니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통령의 여름휴가 때 경호처장이던 김용현 국방장관 후보자와 편안한 분위기에서 뭔가 대화가 오갔을 것이라는 얘기부터 4번째 안보실장을 모시게 된 김태효 1차장과 신원식 신임 안보실장이 MB정부 때부터 가까운 사이라느니 하는 등 갖가지 뒷담화도 나오는데, 이 글의 논지는 아니다. 진실도 알 수 없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번 인사가 대통령 혼자 내린 건지, 누구랑 협의했는지 하는 점이다. 이는 정책 결정, 인사 결정의 시스템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사 논란이 있을 때마다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다. 절차적 정당성뿐 아니라 실질적 정당성을 갖추려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최종 결심은 대통령이 하는 것이지만 총리든 참모든 전문가든 두루 의견을 들을 필요도 있다. 예컨대 “경호처장에서 국방장관으로 직행하는 건 모양이 좋지 않다” “야당 반대로 국론이 분열되면 국방력 결집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안보실장까지 교체하는 건데 인사 메시지가 모호하다” 등의 우려도 함께 검토됐어야 했다. 그런 다각도의 논의 끝에 결정을 내린 건지, 그냥 뚝딱 이뤄진 건지 궁금한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현 정부에서 중요한 결정이 충분한 사전 조율 없이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것 같다는 인상 때문이다. 의대 증원 2000명 결정 과정의 미스터리를 다시 꺼내지 않더라도 방향 설정과 장단점 등에 대한 충분한 검토, 반대 여론에 대한 대응 등 정교한 실행 방안 없이 논란이 큰 의제를 툭 던지고 사후에 수습하느라 한정된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이 한둘이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필자는 이런 문제가 보편적 절차나 관행보다는 대통령의 독특한 리더십이 부각되는 국정 운영 스타일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8·15 통일 독트린 TF’도 그런 점에서 현 정부의 국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번 인사를 통해 또 한번 실세임을 보여준 김태효 1차장이 TF를 주도한다는데, TF엔 통일부 장차관도 참여한다고 한다. 결국 신속하고 효율적인 이행을 위해선 내각이 아닌 용산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통령을 가까이 보좌하는 이들에게 힘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비단 이 정권의 문제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당연시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렇다면 내각의 존재 이유는 뭔가. 용산 참모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대통령 의중만 살피고, 그에 맞춰 일선 부처를 일일이 통제하는 일이 반복되면 관료들은 팔짱을 끼게 돼 있다. 굳이 제 역량을 한껏 발휘하려 노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러 정권을 거칠수록 대통령실이라는 머리는 큰데, 정작 손발은 잘 안 돌아가는 ‘가분수의 나라’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인사든 정책이든 관료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 뭔가 바삐 돌아가는 것 같은데 국정의 핵심 의제가 뭔지는 뚜렷하지 않다. 주요 의제와 곁가지 의제가 마구 뒤섞인 채 터져 나오기 일쑤고 그럴 때마다 공직사회든 여의도 정치권이든 일반 국민이든 모두 용산만 쳐다보고, 용산은 현안 대응하느라 허덕인다. 그러니 국정은 종잡을 수 없고 산만하다. 곧 임기 반환점이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용산의 힘을 빼고 내각에 힘을 실어 관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것 아닐까. 인사든 정책이든 ‘체계’부터 세워야 한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요즘 더불어민주당은 참 낯설다. 정치부 기자로 처음 출입했던 정당이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였다. 약 30년 전 일이다. 그 뒤로도 하도 이합집산을 많이 해서 역사를 읊기도 쉽진 않지만 민주당 계열 정당은 치열한 노선 싸움을 벌이며 그들 나름대로 ‘당내 민주화’의 길을 걸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친노 패권, 친문 패권 등 특정 계파의 당권 독점으로 분란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 또한 30% 안팎의 비주류는 늘 존재했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다. 그걸 알기에 아무리 비명들이 횡사했어도 이번 전당대회에서 2위 후보가 30%까진 아니라도 20% 안팎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예측도 했다. 순진한 착각이었다. 민주당은 ‘이재명 1인 옹위(擁衛) 정당’으로 완벽하게 변모하는 중이다. 올림픽 일정에 맞춰 전대 일정을 짰는지, 공교롭게 일정이 겹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소리 소문도 없다. 중간 결과는 85%를 넘는 득표율. ‘전체주의 정당’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재명 후보도 께름칙한 구석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권리당원 투표율이 30% 정도에 그치고 있다. ‘당원 중심 정당’ ‘당원 주권 확대’ 등을 내세우며 권리당원 투표 비중을 확대했는데, 오히려 투표율이 떨어지는 역진(逆進)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투표율은 낮고 특정 1인의 득표율만 높은 ‘외화내빈’은 ‘일극(一極) 체제’의 정당성도 위협한다. 이 후보는 “일극은 맞지만 체제는 틀린 말”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일극’은 “다양한 국민들, 민주당 당원들이 선택한 결과”일 뿐 자신이 인위적으로 만든 ‘체제’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권리당원 10명 중 7명은 팔장을 끼고 있다는 사실은 뭘 의미할까. ‘다양성’이 지금 민주당에 있기는 한가. 지금 민주당은 오로지 윤석열 정권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지의 권력 쟁취에만 혈안인 듯 보인다. 그런 광적인 분위기가 90% 득표율의 ‘이재명 옹위’로 발현되고 있다. “메뚜기떼” “전체주의 유령” “제왕적 1인 정당” 등의 비판은 내부 총질로 치부된다. 단일대오로 외부의 적에 맞서자는 논리다. 사실 전당대회는 당원들의 잔치, 집안 잔치다. ‘개딸 잔치’로 흐르건 말건 뭔 상관이냐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170석을 가진 거대 야당의 대표를 뽑는 선거가 그들만의 행사일 수는 없다. 매년 수백억 원의 국고보조금을 지원받고 1명당 10억 원의 세금이 지원되는 국회의원을 170명이나 거느린 정당이어서만은 아니다. 돈 문제를 떠나 국가 시스템의 핵심적인 한 축인 입법부가 어떻게 운영될 것인지와 직결된 사안이기에 그렇단 얘기다. 그 점에서 볼 때 민주당은 낯설기만 한 게 아니라 한심하다. 불과 몇 달 전 윤석열 정권 심판론을 바탕으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국민의힘보다 정당 지지율이 낮고, 이 후보의 대선후보 지지율도 20%대에서 맴돌고 있다. 이유가 뭘까. “3년도 길다”던 윤석열 정권을 왜 빨리 끝장내지 못하냐는 불만 여론 때문일까. 민주당 주류가 그런 판단을 하고 있다면 국민을 우중(愚衆)으로 여기는 집단 착각이다. 필자가 보기엔 지금 민주당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덩치만 큰 못된 아이’ 같다. 덩치 작은 아이의 발목을 잡고 오도 가도 못하게 해놓고는 뭘 어쩌자는 건지 시간만 질질 끌며 괴롭히고 있다는 얘기다. 고작 20%대 정당 지지율을 갖고 있으면서 대통령 탄핵 운운하며 군불을 땐다. 방통위원장이 얼마나 문제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과거 법카 내역을 싹 뒤진다며 부산을 떨더니 취임 이틀 만에 탄핵안을 통과시킨다. 듣기만 해도 진부한 ‘25만 원 지원’을 엄청난 민생 비책인 양 레코드처럼 틀어댄다. 이러니 국회가 지방의회 수준만도 못하다는 조롱까지 나오는 것이다. 민주당은 정국을 리드할 수도 있었다. 대통령 탄핵이니 25만 원이니 하며 귀한 시간을 허비할 게 아니라 국가경쟁력, 미래 등의 담론을 주도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연금, 저출산, 신성장 동력 등 굵직한 국가적 과제가 한둘인가. 그런데도 지엽적인 정파적 이슈에만 매몰돼 있다. 이는 무슨 거창한 국가 비전을 떠나 기본적인 공적 책무(責務)와 관련된 문제다. 더 선명해질 ‘단색(單色)’ 조직이 어떻게 다양한 가치와 인적 역량을 담아낼 수 있을까. 민주당이 이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하면 사법리스크 떼려다 더 큰 신뢰 위기, ‘무능(無能) 리스크’에 빠지게 될 것이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국민의힘 새 대표 선출이 1차 투표에서 끝날지 결선 투표까지 갈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한동훈이냐 아니냐의 판세임은 분명하다. 이 추세에 변화가 없다면 51세의 한동훈이 쟁쟁한 선배 정치인들을 제치고 정당 생활 7개월 만에 집권 여당의 선출직 대표 자리에 오르는 장면을 볼 수도 있겠다. 보수 정당의 뿌리가 단단하지 못하고 정체성도 허약하니 내부에서 사람을 키우지 못하고 위기에 몰릴 때마다 늘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게 체질화돼 있는 국민의힘 모습이 참 딱하지만 논외로 치자. 별의별 진흙탕 싸움이나 네거티브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108명의 의원들도 한동훈 저지 그룹, 한동훈 쪽으로 발 빠르게 변신한 그룹, 대세 눈치 보기 그룹, 팔짱 그룹 등으로 나뉘어 각자 보신(保身)과 득세(得勢)의 기회를 탐색하느라 분주했을 뿐이다. 흥미로운 건 ‘어대한’ 기류는 시종일관 유지됐다는 점이다. 다른 3명의 당권 주자들도 각자의 스토리가 있고 나름의 존재감을 갖고 있는 중진들이지만 흐름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던 이유는 뭘까. TV토론을 지켜본 몇몇 정치 전문가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한동훈은 초보 정치인임에도 1 대 3의 불리한 구도에서 결코 주눅 들지 않는 모습, 속도감 있는 언변 등으로 존재감을 보여줬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였다. 반면 국가 지도자감인가 하는 점에선 여전히 유보적 반응도 적지 않다.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듯한 ‘톤 앤드 매너’는 그렇다 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보수의 비전이 뭔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원 대상이든 일반인 대상이든 50% 안팎의 지지율을 보이는 건 한마디로 ‘한동훈 도구론’이 먹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성 정치인보다는 젊고 새로운 인물을 통해 당의 체질을 바꿔 보자는 변화에 대한 기대가 깔려 있는 것이다. 아직 자질과 덕목이 검증되진 않았지만 ‘한동훈의 시간’을 한번 만들어 주자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당 일각에서 ‘어차피’ 한동훈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한동훈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이젠 ‘전대 그 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권력의 시간을 모래시계에 비유하곤 하는데, 시간의 흐름을 꽁꽁 묶을 방법은 없다. 정권마다 위 그릇에서 아래 그릇으로 흘러내리는 속도가 다를 뿐이다. 이 정권의 모래시계는 훨씬 빨리 돌아간다. 전대를 통해 확인된 사실 하나는 윤심(尹心)은 도통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니, 윤심은 이제 관심의 대상도 아닌 듯하다. 전대가 이대로 끝난다고 해서 모래시계의 아래 그릇은 한동훈 차지라고 단언할 순 없다. 오히려 당권을 쥔다면 정치력을 적나라하게 검증받는 혹독한 시기를 맞을 수 있다. 여전히 모래를 꽉 움켜쥐려는 용산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가 관건이다. 현재 권력은 아직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아 있다. 극심한 내홍에 휘말리며 대통령 탈당, 분당, 탄핵 시나리오까지 나오지만 윤석열의 영역과 한동훈의 영역이 적당한 선에서 봉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월동주건 동상이몽이건 그게 양쪽이 다 사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의 세계는 때로 합리적 타산이나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의 격정적 ‘온난전선’과 한동훈의 차가운 ‘한랭전선’이 부딪치며 언제 어디서 폭우가 쏟아질지 모를 일이다. 특히 한 후보가 ‘여사 문자’ 공개 국면에서 국정농단, 당무개입 등의 용어까지 쓰며 저항한 건 윤-한 갈등의 본질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대통령 부인의 ‘농단’ ‘개입’ 논란은 치명적 이슈다. 김 여사 문제는 한동훈으로선 피할 수 없는 ‘숙명적’ 과제가 될 것이다. 여사 문제가 보수 위기의 핵심 고리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위기의 전부는 아니다. 그 점에서 국민의힘의 차기 지도부는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일반 국민들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고 보수 정당의 본질적 가치를 새로 정립할지에 대한 묵직한 비전을 내놔야 한다. 한쪽은 미래 권력만 꿈꾸고 다른 쪽은 현재 권력 유지에만 급급하며 권력 투쟁만 벌이다간 파국을 초래할 수 있다. 용산은 별로 바뀔 기미가 없다. 당이 바뀔 때다. 한동훈이든, 막판 뒤집기로 다른 당권 주자가 당선이 되든 대권 야심이 아닌 보수 재건의 도구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이 우선돼야 한다. 궁금하다. 정작 ‘원톱’ 주인공의 삶을 살아온 한동훈은 ‘도구’가 될 자세가 돼 있을까.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요즘 언론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를 꼽는다면 ‘탄핵’이다. 방송통신위원장 탄핵, 검사 탄핵, 인권위원 탄핵…. 하도 많이 듣다 보니 “탄핵이 뭐 별건가” 하는 내성(耐性)이 생길 정도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2년 동안 13번의 각종 탄핵 소추안을 발의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탄핵은 본래 ‘일반적’ 절차로는 중대한 위법 행위를 저지른 고위 공직자에 대한 처벌이 어려울 때 취하는 ‘특수한’ 조치다. 그러나 극히 예외적으로 이뤄져야 할 일이 일반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가 연루된 여러 의혹 사건을 수사한 현직 검사들에 대한 탄핵 발의는 실로 압권이었다. ‘만취 대변’ 등 탄핵 사유가 황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식의 ‘방탄 탄핵’으로 법치(法治) 자체를 희화화하고 국가 시스템을 흔드는 일까지 벌일 것이라곤 미처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친명 충성파들에겐 법치 파괴 우려와 같은 공적(公的) 인식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인다. 검사 탄핵 발의는 곧 이 전 대표에 대한 1심 판결을 내려야 하는 판사들에 대한 유무형의 겁박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사법리스크의 시간을 지체시키는 게 근본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올 초 이 전 대표에 대한 재판을 지연시키던 판사가 사표를 낸 적도 있다. 민주당의 다음 스텝은 뭘까. 탄핵의 궁극적 타깃은 윤석열 대통령일까. 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국회 국민 청원에 대한 동의가 100만 명을 넘어서자 민주당 내에서 “성난 민심의 들불” “지난 2년도 너무 길었다” “200만, 300만으로 이어질 기세” 등 으름장이 쏟아진다. 검사들에 대한 탄핵 시도는 결국 대통령 탄핵으로 넘어가기 위한 ‘여론 간보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흐름을 보면 “박근혜 같은 최후를 맞을 것”이란 경고와 엄포가 단순한 레토릭으로 들리지만은 않지만, 여기서 한번쯤 생각해 볼 대목은 있다. 채 해병 사건 외압 의혹, 명품백 의혹, 전쟁 위기 조장, 일제 강제징용 친일 해법 강행,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투기 방조 등을 쭉 열거한 해당 청원의 탄핵 요건이 허술하다거나 청원에 동의한 이들이 대부분 개딸 혹은 강성 당원일 것이라는 얘기는 논외로 치자. 이 전 대표는 왜 이 문제에 대해 입을 꽉 다물고 있을까. 탄핵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 것과 이를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2016년 박근혜 탄핵 때와 얼핏 비슷한 상황 같지만 질적으로 다르다. 여야가 손잡았던 그때와 달리 보수 진영엔 ‘박근혜 학습효과’가 남아 있다. 요즘 유행하는 ‘배신 프레임’이다. 더욱이 이 전 대표는 170석 야당의 실질적 수장이다. ‘변방의 장수’로 앞장서 “박근혜를 끌어내리자”고 외쳐 댔던 그때와 달리 잃을 게 많다. 탄핵 궤도에 올라탔다가 일을 그르칠 경우 그 후폭풍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런 무모한 도박에 섣불리 나서진 않을 거란 얘기다. 물론 이 전 대표는 갑갑한 상황이다. 내심 탄핵 시계를 앞당기고 싶겠지만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선거법 등 1심 판결 여부에 따라 내부 반란 세력이 준동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일단 제1당 대표라는 철갑을 다시 챙겨 입고 탄핵 여론 추이를 살피며 집권 세력의 균열 가능성을 엿보는 게 그로선 합리적 선택이다. 그런데 용산 핵심부에선 이 전 대표가 대통령 탄핵 수순을 밟을 것으로 단정하고, 오히려 정국 반전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정세 판단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른바 노무현 탄핵 역풍 모델이다. 어차피 손을 내밀어 봤자 결론은 탄핵 추진이니 해볼 테면 해보라는 것이다. 총선 참패 후 잠시 협치 탐색이 이뤄지는 듯하다가 다시 마이웨이의 강 대 강 기조로 돌아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한다. “이재명은 바보가 아니다.” 그를 직접 겪어 본 사람들의 얘기다. 상대를 얕잡아 보면 오판하게 된다. 대한민국엔 요즘 권력자들을 위한 두 개의 놀이공원이 있다. ‘용산랜드’와 ‘여의도랜드’다. 용산 권력은 그들만의 놀음이 한창이고 여의도 권력은 호시탐탐 진공 태세를 갖추고 있다. 태블릿PC 같은 휘발성 높은 사건이 터져 나오고 국정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지고 대통령과 여당은 자중지란의 내부 쌈질만 벌이면 어찌 될까. 여당 전대 과정에서 불거진 난데없는 ‘여사 문자 소동’은 불길한 징후다. 탄핵 게임은 시작된 것도 끝난 것도 아니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진짜 게임은 누가 더 민심의 성채를 튼튼하게 하느냐다. 그 점에서 제2부속실 설치 등 민심을 다독이는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용산이 참 이해하기 어렵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소여(小與) 신세의 국민의힘 당대표가 한 달 뒤 선출된다. 흔히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고 하는데 양쪽의 균형은 심하게 깨졌다. 왜소해진 오른쪽 날개는 거대한 왼쪽 날개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형국이다. 이번 전대는 국민의힘이 제 궤도를 찾을지, 좌우 균형의 토대를 만들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이벤트다. 그런데 지난 총선 때 민심의 호된 회초리, 아니 몽둥이를 맞은 국민의힘은 참패의 기억을 벌써 잊은 듯 그들만의 당권 쟁투에 돌입한 모습이다. 당대표 선거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한동훈(가나다순) 등 4파전 구도로 좁혀졌다. 이재명 대표를 다시 추대하는 식의 ‘체육관 선거’를 치르게 될지도 모를 민주당에 비해선 생동감이 돌게 됐다. ‘어대한’(어차피 대표는 한동훈) 기류도 있지만 1차에서 끝날지, 결선 투표까지 갈지, 1, 2위 표차가 어느 정도일지, 3위가 캐스팅보트를 쥘지, 그 표는 어디로 갈지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다. 일반 국민 여론조사 비율이 20% 반영되는 ‘8 대 2’ 경선룰이 어떤 마법을 부릴지 속단하긴 쉽지 않다. 친윤이냐 비윤이냐 반윤이냐, 당권에서 대권으로 직행할 것이냐, 그 경우 당권-대권 분리 규정에 따라 1년 2개월 뒤 사퇴하는 것이냐 등 여러 구도와 변수가 얽히면서 경선 자체는 일단 흥행 요소를 갖추긴 했지만 뭔가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 드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4명의 후보들이 저마다 내세우는 “보수 재집권의 성공” “당정 원팀” “대통령 견인” “이기는 여당” 등 외침의 공허함이다. 일반 국민이 보기엔 보수의 궤멸이란 말이 나올 정도의 위기 속에서 자신들이 왜 당대표가 돼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출사표인지 의문이란 얘기다. 이는 각 후보들의 학벌이나 판검사 출신 등 직업, 경제력 등이 갖는 계급성 때문만은 아니다. 망가진 보수의 가치, 보수의 앞날을 둘러싼 치열한 노선 투쟁을 예고하기보다는 당내 역학 구도에 따른 줄 세우기 양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4명의 후보 중에서도 가장 논쟁적인 인물은 한 전 위원장일 것이다. 어대한 얘기가 나올 만큼 현재로선 당원이든 일반 국민이든 지지율이 앞서고 있지만 정치에 입문한 지 반년밖에 안 된 정치 초보다. 그의 당대표 도전은 그만큼 본인으로선 미지의 정글 속으로 뛰어드는 모험일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황태자였으나 총선을 거치면서 반윤의 처지로 바뀐 한 전 위원장은 이번에 나서지 않으면 고사(枯死)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는지 모르겠다. 총선 실패의 아픈 기억을 대권 승리로 상쇄하고 싶다는 야심도 있을 것이다. 그의 도전을 지지하는 이들도 많지만 “글쎄” 하며 긴가민가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은 우선 원내 경험이 없는 원외 대표로서 어떻게 국회의원들을 지휘할지, 한솥밥을 먹었던 윤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더 본질적으론 그의 준비다. 국가 지도자는 거칠게 말하면 3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는 비전, 둘째는 이를 실행할 경륜, 셋째는 국민 지지다. 비전과 경륜은 이성의 문제이고 국민 지지는 감성의 문제다. 그는 팬덤은 있지만 아직 어떤 보수의 비전을 갖고 있는지 보여준 적이 없다. 법무장관을 지냈지만 독자적으로 차곡차곡 쌓은 경륜이라고 하긴 어렵다. 변방이나 비주류 생활을 해본 경험도 일천하다. 정치 리더가 되겠다는 야망을 갖는 건 자유지만 그에 걸맞은 내면적 성찰이 동반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대 도전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딱 한 번의 승부가 될 것이다. 이재명에 맞설 ‘꿩 잡는 매’ 여론에 기댈지, 그 이상의 잠재력을 보일지는 오로지 그의 몫이다. 윤 대통령은 이재명 조국 이준석에 한동훈까지 당대표를 하게 되면 사면초가에 놓이는 형국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국민의힘 경선에 개입하고 싶은 욕구도 클 것이다. 그러나 용산 입김은 없어야 하고 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젊은 보수를 지향하든, 천막 당사의 정신을 가져오든 보수 혁신, 보수의 질적 전환을 둘러싼 치열한 노선 투쟁, 비전 경쟁이 펼쳐지도록 경선에서 일절 손을 떼야 한다. 한 달의 경선, 윤심 타령도 어대한 타령도 다 걷어치우라. 또다시 친윤이니 비윤이니 반윤이니 하는 프레임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국민의힘은 차라리 문 닫는 게 나을 것이라는 냉소와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이번 전대가 허물어진 보수의 가치를 되살리는 ‘희망의 이벤트’가 될까, ‘절망의 이벤트’가 될까. 보수 혁신의 담론 없이는 국민의힘 미래가 밝을 수 없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은 818호다. ‘818’은 나름의 의미가 있는 숫자다. 민주당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일이 8월 18일이다. 올해 15주기가 되는 바로 그날, 당 대표를 뽑는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공교롭다. 이 대표가 추대든 경선이든 연임이 되면 민주당에선 DJ 이후 24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이 대표가 최근 ‘뉴DJ플랜’을 떠올리게 하는 정책 행보를 보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1995년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복귀한 DJ의 대권 플랜인 중도 실용 노선이다. 이 대표가 윤석열 정권을 향해 온갖 특검 공세를 펴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국민연금 개혁이나 한강벨트를 겨냥한 종합부동산세 완화 등 민생 이슈를 선점하려는 투 트랙 전략을 펼치고 있는 게 그렇단 얘기다. 이처럼 다채로운 전법을 구사하며 ‘여의도 대통령’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의 권력자가 됐지만, 요즘 그의 표정에선 웃음기가 사라진 듯 보인다. ‘사법리스크’란 다섯 글자의 족쇄 때문이다. 채 상병 사건과 명품백 문제 등으로 잠시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그의 사법리스크는 쌍방울 불법 대북송금 의혹 사건에 대한 1심 판결로 일거에 다시 떠올랐다. 이에 관여한 혐의 등으로 자신이 임명했던 이화영 전 평화부지사가 징역 9년 6개월 선고를 받자 이 대표의 표정도 입도 굳어졌다. 판결문은 “조선노동당에 보낸 200만 달러는 이 대표 방북 사례금으로 보기에 충분하다”고 적시했다. 지난해 10월 단식 와중에 민주당 내 일부 반란표로 체포동의안이 가결됐을 때 법원의 영장 기각 사유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었고, 이 전 부지사의 변호인이 “이 씨에 대한 유죄 판결은 이 대표에 대한 유죄를 추정하는 유력한 재판문서가 될 것”이라고 한 터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대표의 유무죄를 예단할 수는 없다. 대북송금 보고를 직접 받았는지 여부는 증거와 법리에 따라 가려질 사안이다. 분명한 건 이 대표로선 ‘사법의 시간’ ‘재판의 시간’이 궤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그는 쌍방울 문제 외에도 대장동·백현동 사건, 대선 공직선거법 위반, 2002년 검사 사칭 관련 위증 교사 혐의 등에 대한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중 공직선거법 위반이나 위증 교사 혐의는 사안이 단순해 올해 안에 1심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한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사법리스크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이 대표가 짐짓 보수의 어젠다를 파고들며 ‘프레지덴셜’한 행동을 보이고는 있지만 속마음은 타들어가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쌍방울 수사 자체가 조작이라며 특검법을 발의하고, 수사한 검사 탄핵까지 추진하겠다고 하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자신이나 측근들을 변호했던 이들에게 배지를 달아준 뒤 대거 법사위에 배치시키고 특검의 최종 관문인 법사위원장 자리를 꽉 움켜쥐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선 패자였던 이 대표는 2년 전 당 대표에 출마하며 “DJ를 닮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도 개딸 당원들에 발을 딛고 입으론 DJ 따라 하기를 내세우며 위기를 돌파하려는 심산인 듯 보인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무엇보다 DJ가 때론 길거리 투쟁에 나섰을지라도 국회에서의 협상과 타협을 중시한 ‘의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대표를 둘러싼 온갖 사법적 이슈들은 모두 개인의 문제이지 민주당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당을 국회 다수당으로 만든 게 똘똘 뭉쳐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방어하란 뜻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위험을 당의 위험으로 전가시키는 건 유력한 정치인의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국정시스템의 중요한 축인 제1야당을 형해화시키는 것이며, 이는 국회 마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이 대표의 방탄 행보는 ‘사법적 유무죄’와 별개로 ‘정치적 유죄’가 될 것이다. 퇴근하다 보니 “독재는 민주를 이길 수 없다”는 민주당 플래카드가 있었다. 이 구호가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우선 윤 대통령이 독재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고, 둘째는 요즘 이재명의 민주당이 ‘민주성’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당은 회사가 아니다. 여든 야든 막대한 혈세가 지급되는 중요한 국가 시스템이다. 개인의 사적 위험을 공적 위험인 양 ‘포장’하는 것은 국민을 호도하는 것이며, 나아가 의회주의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DJ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175석의 원내 1당을 대선 때까지 방탄 노릇만 하게 할까.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해병대원 채 상병 특검 재의결을 앞두고 야권에서 대통령 탄핵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탄핵 열차 시동” “탄핵 마일리지” “T익스프레스(탄핵 급행열차)” 등의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채 상병 사건 처리 문제가 탄핵 사유가 되는지, 또 현실성이 있는 얘기인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선 특검을 탄핵의 징검다리로 삼으려는 음험한 시도에 찜찜함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권의 4·10총선 참패 직후 칼럼에서 필자는 “하룻밤 사이에 이뤄진 국방장관의 결재 번복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장 잘 아는 당사자는 대통령 자신일 것”이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그날의 진실을 선제적으로 솔직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썼다. 지난해 7월 31일 용산 회의에서 대통령이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는 이른바 ‘VIP 격노설’의 진실이다. 대통령 기자회견까지 거쳤으나 지금까지도 어떤 내용의 격노, 혹은 질책이 있었는지 추측만 무성하다. 국민은 ‘사망 사고 처리’에 대한 질책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데, 대통령은 ‘사망 사고 자체’에 대한 질책만 언급했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도 “왜 저러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대응과는 별개로 분명히 따지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이종섭 전 국방장관의 처신이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이지만 재난 대응 같은 평시의 군 업무에 대한 ‘권한과 책임’은 장관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해병대 수사단의 경찰 이첩 보고서에 결재를 한 당사자도 국방장관이다. 애초 수사단의 보고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면 보완을 지시하고 결재를 미뤘으면 될 일이다. “해외 출국(우즈베키스탄 출장) 준비에 바빠서…”라는 게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진짜 그랬다면 무능함을 드러낸 것이다. 현재까지의 정황을 볼 때 갑작스러운 해병대 수사단의 브리핑 취소, 자료 이첩 보류 지시 등은 용산의 개입 없이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다 해도 이 전 장관의 책임이 면해지지는 않는다. 대통령이 회의에서 격노했는지, 언성을 높였는지, 장관과 직접 통화를 했는지, 어떤 구체적인 지시까지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설령 대통령의 질책이 있었다 해도 이를 어떻게 수용할지는 오롯이 ‘장관의 몫’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이런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즉자적 의견을 내놓는 게 적절하냐의 문제는 논외로 치자. 대통령이 야단을 쳤다 해도 “이미 결재까지 한 사안이니 이를 번복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끝까지 잘 관리하겠으니 맡겨 주십시오”라고 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흐르진 않았을 것이다. 번복 사유를 수사단장에게 납득시키지도 못하고, 항명 논란까지 벌어졌으니 이런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한 책임 역시 이 전 장관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당사자에겐 얼마나 서슬 퍼렇게 다가올지 짐작만 할 뿐이다. “이러면 누가 사단장 할 수 있겠느냐”는 말에 뒤늦게 “아차” 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위가 어찌 됐든 자기 판단으로 결재를 해놓고 하루 만에 뒤집은 장본인이 이 전 장관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가 원래 순응형 인물인지, 말 못할 고뇌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공수처가 해병대 사령관의 휴대전화에서 ‘VIP 격노설’이 언급된 녹취파일을 확보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이 전 장관 측은 “대통령의 격노를 접한 사실이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 또한 말장난 같다. 그럼 차분한 지시는 있었다는 건지, 용산의 누군가와 통화를 한 사실은 있는지 여전히 모호하다. 이러니 대통령을 보호하는 척하며 실은 그 뒤로 숨는다는 지적이 이어지는 것이다. 채 상병 사건이 이렇게 커진 건 대통령 질책 자체보다는 권력이 진실을 은폐하려는 것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가진 쪽에서 먼저 큰 틀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밝히는 게 채 상병 사건의 꼬인 매듭을 푸는 첫 단추다. 어느 선에서 이첩 자료 회수 등의 조치가 이뤄졌는지 등에 대한 세세한 사실관계, 그에 따른 책임 소재와 법리적 다툼은 그다음 일이다. 이번 사건의 권한과 책임은 애초 국방장관의 몫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국민이 정부에 기대하는 ‘책임의 수준’이란 게 있다. 그 점에서 이 전 장관의 그간 행보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 이제라도 한때 국방 수장으로서 온전히 책임질 건 책임지겠다는 용기를 보일 필요가 있다. 그게 여의도에서 슬슬 불거지기 시작한 탄핵의 위험한 정치 곡예를 막는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해병대 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특검법 중 꼭 하나는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어느 특검법을 받을까 하는 얘기를 사석에서 나눠봤다. “부인을 그렇게 끔찍이 여기는데…” 하는 즉자적 반응이 많았다. 법리를 떠나 ‘부인 특검법’은 절대 받지 않을 것이란 얘기였다. 순애보인지 자존심인지 알 수 없으나 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굳어져 있는 듯했다. 필자도 얼핏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본인 문제와 부인 문제 중 하나를 택하라면 차라리 본인 문제를 감당하는 게 맞는 것 아니냐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물론 이들 특검법의 타당성을 법리적으로 따지자면 논쟁은 끝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의 주제도 아니다. 다만 “국가 차원에서 볼 때 두 사안의 무게는 다르다”는 어느 원로 학자의 말을 되새겨 본다. 김 여사 리스크는 엄밀히 말하면 ‘사인(私人)’의 문제이지만 채 상병 사건은 군의 명령을 이행하던 한 젊은이의 죽음, 초기 조사 및 경찰 이첩 과정에서의 국가 권력 개입 의혹, 멀쩡하던 해병대 대령의 항명죄 기소 등이 얽힌 공적(公的)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 중대하다는 것이다. 용산 참모들은 “개정된 군사법원법에 따라 사망 사건에 대해선 해병대 수사단에 ‘수사’ 권한이 없는 만큼 ‘수사 외압’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공수처가 수사 중인 만큼 그 결과를 보고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형식 논리적으론 맞는 말 같지만 일반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공수처 수사 역량은 익히 알려져 있다. 더욱이 이른바 ‘VIP의 격노’로 인해 사건 기록 회수가 이뤄졌다는 의혹이 퍼져 있는 상태다. 그래서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그날의 진실에 대해 속 시원히 듣기를 기대했다. 대통령은 “순직한 사고 소식을 듣고 국방장관을 질책했다”고만 했다. 야당이 대통령의 직권남용 사법방해 운운하며 공세를 펼치고 있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 질문을 잘못 알아듣고 동문서답한 걸로 보긴 어렵다. 사고 질책은 있었을 테니 거짓은 아니겠지만 이첩 및 회수 과정에서의 격노설 의문은 그대로 남았다. 의도적인 답변 회피로 비쳤고 당당하지도 못했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웠다. 대통령이 틈을 보이고 수비에 급급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더 공세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대표는 이참에 ‘쌍특검’ 앞에서 머뭇대고 있는 용산을 탄핵 직전까지 몰아붙일 태세다. 마치 사법리스크의 공수(攻守)가 바뀐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나 한 꺼풀 벗기면 이 대표도 마음이 급하다. 사법 리스크의 현실화 시간이 하나하나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찐명’ 원내대표와 국회의장 교통 정리 등 일련의 흐름을 보면 이 대표는 정교한 로드맵을 갖고 움직이는 것 같다. 채 상병 특검에 이어 김건희 특검을 몰아칠 개연성이 농후하다. 탄핵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내심 개헌론으로 대통령 임기 단축을 꾀할 수도 있다. 그렇게 사법 리스크의 시간을 넘어서려 하고 있는데, 용산의 대응은 굼뜨기 짝이 없다. 위기감을 갖고는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대통령이 탄 배는 3년은 더 항해해야 하는데 물은 얕아졌고 암초는 널렸다. 국민의힘을 자신의 집으로 만들려 그토록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을 비롯해 사방이 적이라고 여길 공산이 크다. 혹시 그 연장선에서 이 대표와의 회담을 앞두고 ‘함성득-임혁백’ 비선 라인을 가동한 것일까. “이 대표와 경쟁할 인사는 대통령실 인선에서 배제하겠다” “부부 동반 모임도 갖고 골프도 하자” 등의 말을 전했다는데, 실체가 있는 얘기인지 꾸며낸 얘기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용산은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부인했지만 여태까지 법적 대응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아 갖가지 억측만 난무한다. 함 교수는 보도 확인 요청에 “윤 대통령의 큰 정치를 향한 진정성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큰 정치’를 위해 이 대표에게 무슨 거래(去來)를 타진한 것이라면 황당한 일이다. 윤 대통령의 불안감과 이 대표의 조급함이 부딪치는 지점이 쌍특검이다. 윤 대통령이 여기서 안일하게 대응하거나 오버하면 나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만에 하나 서로의 리스크를 덜기 위한 물밑 큰 거래를 도모할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말기 바란다. 진정한 큰 정치는 국민 앞에 솔직한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쌍특검은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채 상병 사건의 ‘질책의 진실’을 밝히는 것부터 하나하나 꼬인 매듭을 풀어가다 보면 길이 열릴 수도 있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관계는 두말할 것 없이 ‘상극(相剋)’이다. 한쪽은 그토록 만나자 만나자 했고 다른 쪽은 사실상 범죄자 취급하며 미루고 미뤘다. 그러다 집권 2년이 다 돼서야 마침내 오늘 만난다. 드라마틱한 반전이지만 단막극이 될지 연속극이 될지 예단은 쉽지 않다. 각각 행정 권력과 입법 권력을 쥔 둘은 삐끗하면 파멸에 직면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이 대표가 “다 접고 만나자”고 한 데는 ‘이러다 회동 자체가 무산되는 것 아닌가’ 하는 조바심도 깔렸을 것이다. 사실 총선 승리에도 이 대표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은 변함없는 사법 리스크 때문만은 아니다. 예상보단 크지 않았던 전국 지역구 득표율 차이, 호남과 세종에서 조국혁신당에 밀린 비례 득표율 등 찜찜함이 남아 있다. 그 점에서 이번 회동은 재판 중인 이 대표로선 남는 장사다. 무엇보다 야당 리더로 공식 대우를 받는 그림이 검찰과 법원에 주는 무언의 메시지를 기대할 것이다. 총선을 거치며 존재감을 키운 조국 대표와 차별화를 꾀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홈그라운드 이점은 있지만 윤 대통령의 심사도 복잡하다. 야권의 채 상병 특검, 김건희 특검 등 자신과 부인을 향한 공세는 껄끄러움 차원을 넘어서는 법적 이슈다. 실제 도입된다면 살아 있는 권력을 겨냥한 ‘제2의 윤석열’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특검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서로의 급소를 쥐고 비수를 품은 채 나누는 둘의 대화 장면은 어색하면서도 긴장감이 흐를 듯하다. 이번 만남에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이유는 또 있다. 둘 다 큰 포석을 두는 경세가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별로 없어서다. 둘은 중앙 정치 경험이 많지 않고 지지 기반도 그리 단단하지 않은 ‘취약한 오너형’이라는 공통점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각자 할 말만 쏟아내는, 개딸이 됐든 태극기가 됐든 서로의 극렬 지지층의 기류에만 응답하는 만남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가 되는 것이다. 총선 후 국민 불안의 요체는 “이러다 나라 망할라” 하는 것이다. “3년은 너무 길다”고 외쳐대는 상황, 공공연히 탄핵이나 하야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이제 나라는 어디로 가느냐는 걱정이다. 그러잖아도 허약해진 공직 시스템은 아예 작동하지 않는 지경이지만 용산은 벌써 이들을 닦달할 힘도 빠졌다. ‘용산 권부(權府)’는 거칠게 표현하면 5년간 활동하고 해체될 운명의 ‘유랑 극단’이다. 윤 정권뿐 아니라 문재인,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도 마찬가지였다. 정권마다 성격은 다르지만 어김없이 엉성함이 드러나는 이유는 캠프 관료 등 구성원 출신이 제각각인 한시적 권력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힘까지 빠졌으니 나라 꼴은 어찌 되나. 그 점에서 이번 회동의 핵심 의제는 협치의 틀을 어떻게 짤 것인지가 돼야 한다고 본다. 뭘 주고 뭘 받았네 하는 현재 ‘이슈’에만 매몰되기보다는 여소야대 3년의 국정을 어떻게 끌고 갈지에 대한 ‘체계’를 잡는 게 훨씬 본질적인 과제라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최근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진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정치=협치’를 의미한다면 협치의 구체적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실질적 협치를 이뤄내려면 네거티브 이슈를 놓고 티격태격할 게 아니라 시급한 경제 안보 복지 등의 공통분모를 찾고, 이를 실행할 주체로서 ‘협치 총리’를 세워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 정치사에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총리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그러나 여야가 함께 양해할 수 있는 인사를 총리로 지명하고, 용산은 실질적인 ‘책임 총리’의 권한을 부여하면 여소야대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점에서 최근 용산 비선 라인이 박영선 등 야권 인사들을 언론에 흘린 것도 어이없고, 친명계가 일제히 TK 주호영 의원을 띄운 것도 진정성을 의심받을 만하다. 협치의 핵심 고리로 총리 후보를 고심하는 게 아니라 정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생각이 앞선 것 아닌가. 이제라도 야권 추천을 받아 야당 인사를 총리로 세우는 방안을 상상해 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싶다. 야권 인사는 누가 되든 양측 지지층의 동의를 얻기도 어렵고, 국정 방향과 소속 정당의 이익이 충돌할 수도 있다. 이를 뛰어넘을 정치력을 가진 이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특정 정파에 속한 적이 없으면서 행정 장악 능력과 위기관리 능력을 갖춘 인물을 물색하는 방안은 어떤가. 분명한 건 상극의 시대, 협치 총리라는 완충지대가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점이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