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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20주년을 맞은 ‘제20회 서울변방연극제’가 30일부터 다음 달 10일까지 서울 서대문구 신촌문화발전소 등 4곳에서 펼쳐진다. 이 연극제는 변방의 관점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올해 주제는 ‘리컬렉션(RECOLLECTION·기억)’. 총 9개 팀이 참여해 기억에 대한 다채로운 연극 실험을 선보일 예정이다. 개막작은 ‘재주는 곰이 부리고’(30일∼다음 달 3일)로 선정됐다. 서커스에 출연하는 동물의 파업과 안식을 다룬 작품이다. 현대미술작가 장지아의 ‘커넥션스’(30일∼다음 달 10일)는 연극제 참여 극단 구성원들이 모여 함께 만들어가는 프로젝트다. 서로 인사하는 행위를 통해 신체적 거리감을 표현한다. ‘혐오연극’(다음 달 9∼10일)은 다양한 양태의 사회적 혐오를 다뤘다. 이 밖에 퀴어 연극이 대중 장르로 자리매김한 2030년대 국내 연극계를 가상의 배경으로 하는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다음 달 1∼2일), 2016년 일본에서 발생한 사가미하라 장애인 시설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요정의 문제’(다음 달 3, 4일)도 공연된다. ‘재난일기_어느 연극제작자의 죽음’(다음 달 6, 7일)은 배우 홍사빈이 직접 겪은 비극의 기록을 인공지능(AI) 스피커를 활용해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퍼포먼스다. 이경성 서울변방연극제 예술감독은 “팬데믹은 멈춤을 통해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며 “이번 연극제를 통해 관객들이 주관적으로 현재를 돌아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드라마 ‘미생’이 순한 맛 판타지라면 ‘좋좋소’는 매운맛 백신이다.” 철저한 현실 고증을 토대로 중소기업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주는 웹드라마 ‘좋좋소(좋소 좋소 좋소기업)’에 대한 시청자 반응이다. 이 콘텐츠를 다큐멘터리라 부르는 이도 있다. “보고 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올지 모른다. 중소기업에 들어갈 생각이 있다면 백신을 맞듯 꼭 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OTT 플랫폼 왓챠와 유튜브 채널 ‘이과장’을 통해 공개된 웹드라마 ‘좋좋소’ 시즌 3의 인기가 뜨겁다. ‘이과장’에서 1월 실험적으로 선보인 작품은 시즌 1, 2의 인기에 힘입어 왓챠가 시즌 3부터 공동 제작자로 나섰다. 5일부터 공개된 시즌 3의 5개 에피소드는 22일 기준 유튜브 평균 조회 수 100만 회를 넘겼다. 23일에는 시즌 1, 2의 대본집도 출간된다. 이 드라마가 가진 힘은 뭘까.○철저한 현실 고증, 고발 ‘좋좋소’의 저력은 현실 고증에서 나온다. ‘좋소기업’은 중소기업을 비꼬는 단어 ‘×소기업’에서 비롯된 말. 중소기업 ‘정승 네트워크’에 취업한 29세 사회초년생 주인공 조충범을 통해 청년 취업난부터 취업 후 펼쳐지는 난관을 주로 다룬다. 일부 열악한 중소기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니 자연스레 문제적 노동 환경에 대한 고발도 따라온다. 면접마다 고배를 마시던 주인공은 “당장 면접 보러 올 수 있냐”는 전화를 받는다. 사장은 면접에서 자기 자랑만 늘어놓더니 대뜸 “노래 한번 해보라”고 주문한다. 노래로 그 사람의 추진력을 볼 수 있다는 게 사장의 주장이다. 마지못해 노래를 부른 조충범은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얼떨결에 일을 시작하지만 잡일과 갑질을 버티지 못해 도망친다. 하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어 돌아온다. 인성 나쁜 차장, 무능력한 과장, 회사에 관심 없는 대리, 회사에서 게임만 하는 사장 조카이자 이사가 동료들이다. 이야기마다 ‘중소기업 그 자체’라는 게 시청자의 증언이다. 유튜버 ‘이과장’과 ‘곽튜브’ 등이 겪은 일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짠 게 주효했다. 댓글에는 “첫 출근 날, 귀가 후 보다 울었다”거나 “금요일 퇴근 10분 전 두 시간 회의는 똑같다” “과장은 있어도 거짓은 없다” “진짜 나쁜 놈은 무능력한 사장” 등 자기 일처럼 여기는 이들이 넘쳐난다.○뉴페이스들의 등장 “실제 회사원인가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출연진은 현실감과 몰입도를 극대화했다. 주인공 조충범 역은 부산 출신 연극배우 남현우가 맡았다. 강성훈 김경민 김태영 진아진 등도 공연·방송·영화에서 조연, 단역으로 활약한 배우들이다. 이문식은 중소기업 전문 유튜브 크리에이터, 조정우는 싱어송라이터 출신이다. 낯선 인물의 실감 나는 연기에 “누가 진짜 배우고, 진짜 직원이냐”고 묻는 댓글도 있다. 총감독도 새롭다. 여행 유튜브 채널 ‘빠니보틀’ 운영자 박재한의 첫 드라마 도전이다. 재미 삼아 직접 대본을 썼고 제작비도 모았다. 그도 중소기업 재직 경험이 있다. 업무 시작 전 단체 체조 장면은 박 감독이 직접 겪은 일화다.○기승전결 No, 시간 구애 No 극은 철저히 유튜브 문법을 따랐다. 쉽게 말해 기승전결이 없다. 이전 화 줄거리를 몰라도 다음 화 감상에 무리가 없다. 에피소드마다 개별적인 사건이나 중소기업 특징을 다루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조회 수(202만 회)를 기록한 ‘좋소기업 엘리트’ 편에선 중소기업 회식 문화가 나온다. 다음 화에서는 야근 문화나 업무 인수인계 과정이 그려지는 식이다. 시즌 1∼3에서 공개한 20개 에피소드의 길이는 전부 10분 내외다. 4화의 경우 7분 40초다.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은 OTT를 통해 확장판을 별도 감상하도록 유도했다. 직장인 강현구 씨(34)는 “에피소드 순서 상관없이 출퇴근 중에 짧게 시청할 수 있어 좋다. 중소기업 직원뿐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모두 공감할 얘기”라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드라마 ‘미생’이 순한 맛 판타지라면 ‘좋좋소’는 매운 맛 백신이다.” 철저한 현실고증을 바탕으로 중소기업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주는 웹드라마 ‘좋좋소(좋소 좋소 좋소기업)’에 대한 시청자 반응이다. 중소기업 근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콘텐츠를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정도다. “좋좋소를 보고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올지 모른다. 중소기업 근무 계획이 있다면 백신을 맞듯 꼭 봐야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OTT 플랫폼 왓챠와 유튜브 채널 ‘이과장’을 통해 공개된 웹드라마 ‘좋좋소’ 시즌3의 인기가 뜨겁다. 2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5일 첫 공개된 드라마는 22일 현재 5개 에피소드마다 평균 조회수가 100만 회를 넘겼다. ‘좋소기업’은 중소기업을 비꼬는 단어 ‘X소기업’에서 비롯된 말. 구독자 약 43만 명을 보유한 유튜브 채널 ‘이과장’에서 1월부터 실험적으로 선보인 이 드라마는 시즌1·2의 인기에 힘입어 왓챠가 시즌3부터 공동 제작자로 나섰다. 23일에는 주요서점에서 시즌1·2의 대본집도 출간된다. 이 드라마가 가진 힘은 뭘까. ○철저한 현실 고증과 고발‘좋좋소’가 가진 저력은 현실 고증에서 나온다. 무역업 중소기업인 ‘정승 네트워크’에 취업한 29세 사회초년생 조충범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가 첫 사회생활에서 겪는 모습을 담았다. 청년들의 애잔한 취업난부터 취업 후에도 펼쳐지는 난관이 주요 소재다. 일부 열악한 중소기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니 자연스레 문제적 노동환경에 대한 고발도 따라온다. 대기업 면접에서 고배를 마신 주인공은 대뜸 “당장 면접 보러올 수 있냐”는 전화 한 통을 받고 달려간다. 면접 자리서 사장은 자기 자랑 일색의 ‘돈 주고도 못 듣는 성공신화’를 늘어놓더니 대뜸 “노래 한 번 해보라”고 주문한다. 거래처 접대 시 노래 부를 일도 잦은 데다, 노래는 곧 사람의 추진력을 볼 수 있는 덕목이라는 게 사장의 주장이다. 마지못해 노래를 기가 막히게 뽑은 조충범은 그 자리서 합격.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얼떨결에 일을 시작한 조충범은 잡일과 갑질에 시달리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친다. 하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어 결국 돌아온다. 일은 잘하지만 인성이 나쁜 차장, 무능력한 과장, 회사에 관심없는 대리, 사장의 조카이자 회사에서 게임만 하는 이사가 그의 동료들이다. 회사 복지는 냉장고, 전자레인지, 컵라면, 믹스커피가 전부. 신입 직원이 쓸 컴퓨터도 따로 없다. 시즌3에서는 정승 네트워크가 신사업을 구상하는 내용과 회사를 박차고 나간 차장이 경쟁 업체를 차려 회사와 갈등하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 사무실을 빼다 박은 듯한 세트에서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는 ‘중소기업 그 자체’라는 게 시청자들의 증언이다. 유튜버 ‘이과장’과 ‘곽튜브’ 등이 중소기업에서 겪은 일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구성한 게 주효했다. 때문에 댓글창에는 PTSD를 호소하는 이들로 넘쳐난다. “디자인 회사 첫 출근날, 귀가 후 좋좋소 보고 울었다”거나 “4대 보험 가입은 먼 나라 얘기다” “퇴근 10분 전 회의 두 시간은 정말 똑같다”는 반응이 이어진다. “약간의 과장은 있어도 거짓은 없다”거나 드라마에 이입해 “진짜 나쁜 놈은 인성 나쁜 차장보다 무능력한 사장이다”는 비판도 볼 수 있다.○뉴페이스들의 등장 “실제 회사원인가요?”대중에게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배우들의 등장은 현실감과 몰입도를 극대화했다. 주인공 조충범 역은 부산에서 주로 활동하던 연극배우 남현우가 맡았다. 강성훈(정필돈 사장) 김경민(백진상 차장) 김태영(이미나 대리) 진아진(이예영 사원) 등도 공연·방송·영화 등에서 조연, 단역으로 활약한 배우들이다. 다들 연기 내공이 만만치 않다. 이문식(이 과장)은 중소기업 근무 경험을 살려 현재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이며, 조정우(정 이사)는 싱어송라이터 출신이다. 낯선 인물의 실감 나는 연기에 “누가 진짜 배우고, 진짜 직원인지 알려달라”고 묻거나 “실제 회사에서 직원들이 재미로 찍은 콘텐츠냐”고 묻는 댓글도 있었다. 드라마의 총감독도 새롭다. 여행 유튜브 채널 ‘빠니보틀’을 운영하는 박재한이 연출을 맡았다. 여행 콘텐츠로 구독자 65만 명을 보유한 그에게 드라마 첫 도전이었다. 팬데믹으로 주력 콘텐츠인 여행 콘텐츠 제작에 차질이 생기자 재미삼아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직접 대본을 쓰고 동료들과 제작비도 모았다. 그도 중소기업 재직 경험이 있다. 업무 시작 전 음악에 맞춰 단체로 체조를 하는 장면은 박 감독이 직접 겪은 일화다.○기승전결 No, 시간 구애 No 극은 철저히 유튜브 문법을 따랐다. 쉽게 말해 기승전결이 없다. 이전 화에서 펼쳐진 줄거리를 잘 모르더라도 다음 화 감상에 큰 무리가 없다. 각 에피소드마다 개별적인 사건 혹은 중소기업의 특징적 문화를 다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리즈 중 가장 많은 조회수(202만 회)를 기록한 ‘좋소기업 엘리트’ 편에선 중소기업의 회식문화가 나온다. 다음 화에서는 야근문화나 업무 인수인계 과정이 그려지는 식이다. 시즌 1~3에서 공개된 에피소드 20개의 길이는 전부 10분 내외다. 숏폼 트렌드를 따랐다. 가장 짧은 4화의 경우 고작 7분 40초다.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은 OTT 등에서 확장판을 별도 감상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출퇴근길에 좋좋소를 시청한다는 직장인 강현구 씨(34)는 “에피소드 순서를 굳이 따지지 않고 출퇴근 시간에 짧고 편하게 시청할 수 있다”며 “기존 오피스물에 임시완이나 수지 등이 등장하는 것부터 비현실적이다. 좋좋소는 중소기업뿐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모두 공감할 작품”이라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아니, 한국 사람인데 왜 일본 춤을 춰요?” 2009년 일본으로 건너가 부토(舞踏)를 배우기 시작한 양종예(46)가 무대에 설 때마다 마주하는 질문이다. 예술에 국경은 없다지만, 일본 색이 짙은 춤을 추는 그는 주변의 비아냥거리는 시선과 싸워야 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인 부토 무용수를 마냥 신기해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런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떻게 객석에 감동을 전할지 오로지 집중할 뿐. 그의 춤을 보는 관객도 시각을 조금 달리해보면 어떨까. 한국인 양종예가 아닌 춤의 여정을 떠난 ‘지구인’ 양종예로. 양종예는 11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팬데믹으로 집에 갇혀 있는 상황이 길어져 답답했다. 오랜만에 무대에 서니 슬슬 몸하고의 대화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했다. 5월 말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자가격리를 마치고 최근 작품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의 유명 부토 무용단 다이라쿠다칸에서 10년 넘게 활동하며 부토 무용수로 이름을 알린 양종예는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봄의 제전’을 24, 25일 공연한다. 국내 초연작이다. 제11회 대한민국발레축제 기간 중 열리는 ‘한국을 빛내는 해외 무용스타 초청공연’의 일환으로 이번 무대가 마련됐다. 부토는 일본 전통예술인 ‘가부키’, ‘노’와 서양 현대무용이 만나며 탄생한 무용 장르다. 현재 원산지인 일본보다는 유럽, 미국, 남미 등에서 더 주목받고 있다. 1960년대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어지러운 정세 속 급격한 서양문화 수입에 저항하여 정체성을 찾으려는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일종의 예술운동이자 철학이다. 그가 선보일 공연은 러시아의 전설적 발레리노인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약 100년 전 선보였던 발레 ‘봄의 제전’을 부토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온몸에 금칠을 한 채 홀로 무대에 올라 특수 제작한 금빛 천, 소품을 활용해 전위적이고 정제된 몸짓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공연을 위해 일본 무용단에서 특수 제작한 소품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며 기뻐했다. 그는 이번 공연의 특징을 “에로티시즘, 그로테스크, 난센스”라는 세 단어로 정의했다. “봄을 앞두고 연 제사에서 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제물로 선택된 소녀가 신들린 듯 춤추다 쓰러지는 모습을 마치 샤먼처럼 표현하려고요. 소녀가 정말 죽었는지 아니면 신과 영접한 건지는 여러분이 판단해 주세요.” 그는 부토를 공부한 지 12년이 됐는데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했다. 이해하려면 끝이 없다고 한다. 무용수 한 명이 각자 하나의 계파를 구성한다는 ‘일인일파(一人一派)’와 ‘나를 지우고 나를 드러낸다’는 구절이 부토를 설명하는 대표적 문구다. 정형화된 스타일보다는 무용수 개인이 자신의 육체를 마주하고 재인식하는 과정을 목표로 삼는다. 그는 “약 50년 동안 다양하게 확산한 부토는 지금도 변화 중이다. 엄밀히 말해 저는 부토가 아니라 ‘양종예 부토’를 추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94년 경성대 무용학과에 수석 입학한 그는 한국무용을 전공하다 우연히 접한 부토 공연에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2014년 부토를 배운 뒤 처음 한국 무대에 섰던 때를 잊지 못한다. “부토에 대해 전혀 모르던 한 소년이 공연 후 저를 찾아와 사진 촬영을 원했어요. 일본의 낯선 춤을 추고 있다는 제 마음속의 불안, 편견은 그때부터 사라졌습니다. 현대무용은 그저 감동을 전하면 되는 거니까요.”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제가 말했죠? 한국 배우들은 무대에서 세계 최고의 가수들이라고.”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곡가’로 불리는 프랭크 와일드혼(63·미국)이 말했다. ‘지킬앤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을 비롯해 ‘몬테크리스토’ ‘웃는 남자’ ‘데스노트’ ‘엑스칼리버’ 속 멜로디가 그에게서 탄생했다.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드라큘라’는 그에게 특히 의미 있다. 하와이에 머물고 있는 그는 10일 본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팬데믹 중 각별한 친구도 잃고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창작에 몰입하고 있다. 제 작품 중 팬데믹으로 공연이 취소될 때 가장 마지막까지 공연했고, 1년 뒤 가장 빨리 공연을 재개한 것도 드라큘라다.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2001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처음 공연한 드라큘라는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아일랜드 소설가 브램 스토커가 1987년 내놓은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2014년 국내에서 첫선을 보였다. 400년간 한 여자를 사랑하는 드라큘라의 이야기가 와일드혼의 선율에 어우러졌다. 한국에서는 네 번째 공연할 만큼 사랑받고 있다. 그의 곡은 서정적이고 서글프다. 한(恨)의 정서가 묻어 있다. 음역대가 넓어 배우가 소화하기에 만만찮다. 드라큘라 역은 절규하고 그로테스크한 몸짓과 발걸음 연기도 곁들여야 해 난도가 높다. 그는 “세계적으로 이 역을 할 배우를 찾는 게 쉽지 않지만 김준수 전동석 신성록 등 실력파 배우들에겐 큰 문제가 없었다”며 “저는 그저 ‘열정을 쏟아내라’는 주문만 했을 뿐”이라며 웃었다. 서정적 선율의 비결에 대해 묻자 그는 가족사를 꺼냈다. “루마니아계 아버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도망쳐야 했고 러시아계 어머니 가족 역시 핍박을 받아 슬픔을 안고 살아요. 하지만 비극 속에서도 낙관주의, 유머를 보이는 게 바로 동유럽의 정서고, 그게 내 피 안에 있어요.”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미군 참전용사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는 그는 직접 만난 한국 배우, 제작진들이 솔직하고 영혼이 깨어있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그는 “한국 역사를 잘 모르지만 제 가족사와 어딘가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한편 ‘드라큘라 장인’으로 통하는 김준수 배우는 14일 화상 인터뷰에서 “와일드혼이 쓴 ‘Loving you keeps me alive’라는 곡을 듣자마자 이 작품을 꼭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와일드혼은 “2014년 당시 20대로는 세계에서 처음 드라큘라를 맡았던 김준수는 제 동생이나 마찬가지다. 그의 군 시절에도, 지금도 안부를 주고받는 12년 지기”라고 했다. 이어 “저는 여전히 배울 게 많은 학생이다. 클래식, 컨트리, 록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제 멜로디를 쓰고 싶다”고 했다. 8월 1일까지,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7만∼15만 원. 14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최고의 음악가이자 이야기꾼이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려고 저승까지 간 사랑꾼이기도 하다. 음악으로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의 마음마저 움직인 그는 아내를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다. 하지만 지상 문턱에서 아내를 보고 싶은 마음에 뒤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을 어겨 아내를 영영 잃고 만다. 매력적 서사를 담은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극작가이자 싱어송라이터 아나이스 미첼(40·여·미국)도 오르페우스를 닮았다. 흥과 서정성이 넘치는 독특한 음색으로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는 2010년 발표한 포크송 앨범 ‘하데스타운’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평론가들은 새롭게 떠오른 음유시인에 환호하며 그를 밥 딜런, 레너드 코언과 견주었다. 앨범에 담긴 이야기와 음악은 뮤지컬로 각색하기도 제격이었다. 미첼은 줄거리를 따라 미로로 들어가듯 대본을 썼고 곡은 뮤지컬에 맞게 편곡됐다. 극을 현대화해 주인공 오르페우스는 클럽에서 일하는 가난한 웨이터로 그렸다. 2019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 뮤지컬은 토니상 최우수작품상과 연출상, 음악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었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이 올 8월 한국 무대에 오른다. 세계 첫 라이선스 공연(원작자로부터 판권을 사들여 우리말로 공연하는 것)이다.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아나이스 미첼은 “하데스타운은 먼 옛날의 신화라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한다. 팬데믹으로 힘든 시기,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돌아보고 사랑과 연대를 생각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하데스타운의 대표곡 ‘Wait for Me’의 악상이 떠오른 건 우연이었다. 어린 시절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좋아한 그는 이 곡의 멜로디와 가사가 운전 중 불현듯 떠올랐다고 했다. 그는 “지하세계의 규칙에 맞서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돌처럼 딱딱한 심장마저 아름다운 노래로 감동시키는 모습이 좋았다. 모든 예술가들은 이런 감성에 공감할 것”이라고 했다. 뮤지컬 작업은 스타 연출가 레이철 차브킨(미국)과 만난 후 본격화됐다. 차브킨은 최근 국내에서도 호평을 받은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을 연출했다. 브로드웨이에서 흔치 않은 여성 작곡가, 여성 연출가의 ‘케미’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는 “열정과 패기로 가득 찬 차브킨 덕에 작품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뿐 아니라 프로듀서를 비롯해 제작진에 여성이 많았다. 미첼은 “여성만으로 팀을 꾸리려고 한 건 아니다. 역할에 맞는 최고의 인물을 찾았는데 대부분 여성이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이 때문인지 페르세포네, 에우리디케 등 여성 캐릭터들은 주체적 인물로 재창조됐다. 미첼은 “신화 속 여성들은 피해자로만 그려진다”며 “페르세포네는 단점이 있지만 즐거움을 추구하는 여왕으로, 에우리디케는 강한 생존자로 표현했다. 신화 속 인물을 다른 색으로 묘사하는 재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나와 레이철이 브로드웨이에서 활약하는 상징적 여성이 됐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작품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포크와 재즈 선율로 빚은 그리스 신화’다. 그는 “뮤지컬은 결국 음악으로 각색된 이야기다. 하데스타운에서도 음악의 마법이 깨지지 않는 마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르페우스 역은 조형균 박강현 시우민이 맡고 오르페우스의 아내 에우리디케엔 김환희 김수하가 낙점됐다. 하데스는 지현준 양준모 김우형이,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는 김선영 박혜나가 연기한다. 최재림 강홍석은 헤르메스를 맡았다. 8월 24일부터 내년 2월 27일까지.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7만∼15만 원. 8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최고의 음악가이자 이야기꾼이다. 아폴론 신으로부터 선물 받은 리라를 그가 연주하고 노래하면 초목과 짐승들도 감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최고의 사랑꾼이기도 하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저승에 제 발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마저 음악으로 감동시킨 그는 아내를 데려오는데 성공하지만, 지상 문턱 바로 앞에서 아내를 보고픈 맘을 참지 못한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깬 그는 결국 홀로 돌아와야 했다. 이 매력적인 서사로 만든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극작가이자 싱어송라이터 아나이스 미첼(40·미국)도 오르페우스를 닮았다. 흥이 넘치는 독특한 음색으로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는 2010년 내놓은 동명의 포크송 앨범 ‘하데스타운’으로 먼저 대성공을 거뒀다. 평론가들은 새롭게 떠오른 이 음유시인에 환호하며 밥 딜런, 레너드 코헨과 견주었다. 앨범이 담은 이야기와 음악은 뮤지컬로 각색하기에도 제격이었다. 미첼은 직접 대본을 썼고 뮤지컬에 맞게 편곡한 그의 앨범 속 트랙은 무대서 되살아났다. 주인공 오르페우스는 클럽에서 일하는 가난한 웨이터로 현대적으로 각색됐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2019년 브로드웨이서 정식 개막한지 3개월 만에 토니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연출상, 음악상 등 총 8개 부문을 수상했다. 이 대작이 올해 8월 한국에 찾아온다. 세계 최초 라이센스 공연이다. 공연을 앞두고 ‘인간계 오르페우스’인 아나이스 미첼을 서면을 통해 만났다. 그는 “하데스타운은 먼 옛날 신화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한다”며 “팬데믹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돌아보고, 작품을 통해 사랑과 연대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처음 신화 속 이야기에 맞는 음악을 떠올린 건 우연한 계기였다. 어린 시절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좋아했던 그는 대표곡 ‘Wait for Me’의 멜로디와 가사가 운전 중 머릿속에 불현듯 떠올랐다. “‘정해진 규칙은 바꿀 수 없다’며 지하 세계 규칙에 맞서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는 그는 “같은 음악가로서 아름다운 곡으로 돌처럼 딱딱한 심장마저 감동시키는 오르페우스가 매력적이다. 아마 모든 예술가들은 이 감성에 공감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 작업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고 2010년 명반 ‘하데스타운’이 탄생했다. 본격적으로 무대화를 추진한 건 스타 연출가 레이첼 차브킨과 만나고 나서부터다. 차브킨은 최근 한국서 호평 받은 ‘그레이트 코맷’의 연출가이기도 하다. 브로드웨이에서 흔치 않은 여성 연출가와 여성 극작·작곡가의 만남은 그야말로 합이 좋았다. 그는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차브킨 덕분에 작품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브로드웨이 작품과 달리 제작진에는 프로듀서를 비롯해 여성이 많은 편다. 미첼은 이에 대해서도 “여성으로만 팀을 꾸리려고 했던 건 아니다. 제작진을 꾸릴 때 각자 역할에 맞는 최고의 사람을 찾았는데 대부분 여성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이는 극의 내용에도 반영됐다. 페르세포네, 에우리디케 같은 여성 캐릭터가 주체성을 갖는다. 미첼은 “신화 속 많은 여성들은 주체성이 없이 기본적으로 피해자로 그려진다”며 “페르세포네는 단점이 있지만 즐거움을 추구하는 여왕으로, 에우리디케는 강한 생존자로 표현했다. 신화 속 인물을 다른 색으로 표현하는 재미가 었었다”고 했다. 이어 “저와 레이첼이 브로드웨이서 활약하는 상징적 여성상이 됐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작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포크와 재즈 선율로 빚은 그리스 신화’다.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로 ‘레미제라블’을 꼽은 그는 “뮤지컬은 결국 음악으로 각색된 이야기다. 하데스타운에서도 음악의 마법이 깨지지 않는 마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국 무대서 이 마법을 부릴 배우들은 ‘역대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오르페우스 역은 조형균 박강현 시우민이 맡으며, 오르페우스의 아내 에우리디케엔 김환희 김수하가 낙점됐다. 하데스는 지현준 양준모 김우형이,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는 김선영 박혜나가 맡는다. 최재림 강홍석은 헤르메스를 연기한다. 8월 24일부터 내년 2월 27일까지.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7만~15만 원, 8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메리테(Meritez·자격 있어)!” “메리테!” 발레리나 박세은(32)이 10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BOP)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마치고 난 뒤 최고 등급 무용수인 ‘에투알’로 지명되자 동료들이 외쳤다. BOP는 영국 로열발레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와 함께 세계 3대 발레단 중 하나로 꼽힌다. 352년 발레단 역사에서 아시아인이 수석무용수가 된 건 처음이다. 이름이 호명된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박세은은 알렉산더 니프 파리오페라 총감독과 오렐리 뒤퐁 BOP 예술감독에게 차례로 달려갔다. 박세은을 끌어안은 뒤퐁 예술감독은 그의 귀에 대고 “당신은 자격이 있어요(부 메리테·Vous meritez)”라고 했다. 감정을 꾹꾹 눌러왔던 박세은의 눈물샘이 그제야 터졌다. 뒤퐁 예술감독은 “1년 반 전부터 널 승급시키고 싶었는데 파업, 팬데믹으로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이날 박세은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메리테’였다. 줄리엣을 연기한 그와 좋은 호흡을 선보였던 로미오 역의 폴 마크를 비롯한 동료들은 “메리테(자격이 있다)”라고 외치며 축하했다. “다른 표현보다 ‘넌 자격이 있다’는 말이 어찌나 가슴에 와 닿던지….” 박세은은 12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오디션을 보러 프랑스에 온 순간부터 모든 무대, 그간의 마음고생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털어놨다. 프랑스인도 자국 ‘발레의 심장’에서 떠오른 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르피가로, 프랑스국제라디오방송(RFI) 등은 박세은을 “준비된, 항상 준비된 무용수”라고 평했다. 라틴아메리카 출신으로는 처음 2012년 BOP의 에투알이 된 무용수 루드밀라 파글리에로(아르헨티나)와 비교하며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기사를 보니 이제 좀 실감난다. 승급 날엔 오랜만에 선 무대를 잘 마쳤다는 뿌듯함이 훨씬 컸다”고 했다. “에투알이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고 했지만 새롭게 주어진 ‘특권’을 듣고는 기뻐했다. “무용수는 평생 마음 졸이며 선택만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면담에서 앞으로 1년간 공연 계획, 출연할 작품에 대해 다 설명해줬어요. 심지어 제가 어떤 역할을 원하고, 잘할 자신이 있는지까지 묻더라고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대우가 낯설었어요.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랄까요.” 박세은은 16일(현지 시간)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에 다시 선다. 에투알이 된 후 첫 공연이다. 그는 두 달 동안 코가 헐 정도로 매주 코로나19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으며 연습했다. 박세은은 “절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리베라시옹’이 강한 작품”이라며 “심장을 뛰게 할 정도로 감정을 쏟아붓고 있다. 무용수가 아니라 배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박세은은 에투알로 지명된 순간 처음을 떠올렸다. 10년 전 몸을 쭉 펴고 스트레칭도 할 수 없던 작은 호텔방에서 오디션을 준비했다. 1, 2등만 합격하는 오디션에서 3등을 했다. ‘내년에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발레 DVD를 잔뜩 가방에 챙겨 넣었다. 프랑스를 떠나려던 날, “1년 계약을 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에투알 박세은’의 시작이었다. 2005년 동아무용콩쿠르 금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박세은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2006년 미국 IBC(잭슨 콩쿠르) 금상 없는 은상, 2007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 1위, 2010년 불가리아 바르나 콩쿠르 금상까지 세계 4대 발레 콩쿠르 가운데 세 곳을 휩쓸었다. 2018년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 무용수상을 받았다. 이번 작품이 끝나면 그는 9월 시즌 개막작 준비에 돌입한다. “새 에투알을 관객에게 먼저 선보이고 싶다”는 BOP의 배려로 그는 클래식 발레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에튀드’의 첫 무대에 오른다. 매년 발레단 무용수 전원이 행진하는 퍼포먼스 공연에서는 왕관을 쓰고 걸을 예정이다. 10일 박세은의 연기를 본 한 러시아 소녀는 페이스북에 커튼콜 영상을 올리며 “제 인생 최고의 줄리엣”이라고 썼다. “제 진짜 목표는 소녀에게 그랬듯이 예술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겁니다. 저는 감동을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박세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메리테(Meritez)!” “메리테(Meritez)!” 발레리나 박세은(32·사진)이 1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BOP)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마치고 난 직후. 그는 무대 위에서 최고 등급 무용수인 ‘에투알’로 지명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름이 호명된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박세은은 알렉산더 니프 파리 오페라 총감독과 오렐리 뒤퐁 BOP 예술감독에게 차례로 달려가 고마움을 표했다. 특히 박세은을 따뜻하게 끌어안은 뒤퐁 예술감독은 그의 귀에 대고 “당신은 자격이 있어요(부 메리테·Vous meritez)”라고 말했다. 꾹꾹 감정을 눌러왔던 박세은의 눈물샘도 그제야 터져버렸다. 뒤퐁 예술감독은 “1년 반 전부터 너를 정말 승급시키고 싶었는데 파업, 팬데믹 으로 기다렸어야만 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이날 박세은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메리테’였다. 공연에서 ‘로미오’ 역할을 맡아 그녀와 좋은 호흡을 선보였던 동료 무용수 폴 마크를 비롯한 발레단 동료들은 하나 같이 박세은에게 “메리테”를 외치며 격하게 축하했다. 무대에서 펄쩍펄쩍 점프하며 박세은의 승급을 축하하는 이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별 얘기가 아닌데 ‘넌 자격이 있다’는 말이 어찌나 가슴에 와 닿던지….” 에투알 승급 발표 이후 박세은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10년 전 처음 오디션을 보기 위해 프랑스에 왔던 순간부터 제 모든 무대, 그간의 마음고생이 다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털어놨다. BOP는 영국 로열 발레단, 미국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와 함께 세계 3대 발레단 중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승급과 서열 관리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났다. 352년 발레단 역사에서 아시아인이 수석무용수가 된 건 최초다. 발레에 관심 많은 프랑스인들도 자국 ‘발레의 심장’에서 새로 떠오른 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르 피가로,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RFI 등 주요 프랑스 언론도 박세은을 “준비된, 항상 준비된 무용수”라고 평하며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 최초로 2012년 BOP의 에투알이 된 무용수 루드밀라 파글리에로와 비견하며 의의를 설명했다. “여러 언론에서 기사 나는 걸 보니 사실 이제야 좀 실감나요. 승급 당일에는 무대를 잘 마치고 관객 앞에 섰다는 뿌듯함이 훨씬 컸거든요. 팬데믹으로 워낙 오랜만에 선 무대잖아요. 그래도 귀가 후엔 남편과 친구들과 함께 샴페인 한 병을 나눠 같이 마셨어요.” 그는 “돌이켜 보니 저만 눈치가 진짜 없었던 것 같다”며 “공연 전부터 동료들이 제가 에투알이 확정된 것처럼 꽃다발도 준비하고 축하해줬는데 정작 저는 ‘이러다 승급 안 되면 어떡하려고 저러나’ ‘김칫국 마시지 말자’고 속으로 생각했다”며 웃었다. “에투알이 됐다고 해서 제 춤이든, 뭐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그녀도 새롭게 주어진 특권에 대해선 진심으로 기뻐했다. “무용수는 평생 마음 졸이며 예술감독, 안무가의 선택을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승급 후 면담에서 앞으로 1년 간 시즌 계획, 제가 출연할 작품에 대해 다 설명해줬어요. 심지어 제가 어떤 역할을 더 좋아하는지, 잘 해낼 자신이 있는지도 조심스레 묻더라고요. 맨날 주어진 것만 하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대우에 진짜 낯설었어요. 수평적으로 저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박세은은 16일(현지시간) 에투알이 된 후 처음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에 다시 선다. 그간 발레 ‘오네긴’을 ‘최애작’으로 꼽아왔던 그는 두 달 동안 코가 헐어버릴 정도로 매주 코로나19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으며 ‘로미오와 줄리엣’ 연습에 임했다. 박세은은 “표현, 연기를 절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리베라시옹’이 강해 저를 많이 열리게 만든 작품”이라며 “매번 심장을 뛰게 할 정도로 감정을 쏟아 붓는다. 무용수가 아니라 배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정상에 선 순간에 처음을 떠올렸다. 10년 전 프랑스 파리의 한 주택가 인근 작은 호텔을 잡고 오디션을 준비했다. 웬만한 화장실보다도 작은 방이라 몸을 쭉 펴고 스트레칭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과정이 너무 행복했단다. “이곳에서 춤추고 싶다는 확신이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1, 2등만 합격하는 오디션에서 그는 3등을 했다. ‘내년에 꼭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발레단의 공연 DVD만 잔뜩 가방에 챙겨 넣었다. 프랑스를 떠나려던 날. 갑자기 그에게 “1년 계약을 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이 ‘에투알 박세은’의 시작이었다. 박세은은 “사실 저를 좋게 본 네덜란드의 한 발레단에서 이미 제의를 받은 상태였어요. 상황이 바뀌어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가게 돼 미안하다. 네덜란드에 못 갈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직접 안무가가 있는 곳으로 기차를 타고 찾아갔다”고 했다. e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전해도 될 법했지만 박세은은 죄송스런 마음에 직접 찾아가 인사를 전했다. 그 안무가는 당시 박세은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다. 박세은은 “사람 인연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같다”며 “2년 뒤 파리 오페라 승진시험 심사위원으로 그 분이 오셨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며 웃었다. 2005년 박세은은 동아일보가 주최한 동아무용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던 그는 “제가 살면서 처음 섰던 큰 무대이자 가장 기억에 남는 콩쿠르다. 너무너무 떨렸던 기억이 가득한데 상까지 타서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회”라고 했다. 이때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세은은 2007년 로잔 콩쿠르 1위 등 주요 발레 콩쿠르를 휩쓸기 시작했다. 박세은이라는 새 별이 파리에 뜬 날은 그간 하늘을 지키던 다른 별이 내려오는 날이기도 했다. BOP는 그간 에투알로 활약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엘레오노라 아바냐또의 영예로운 은퇴식을 열었다. 박세은은 “엘레오노라는 제가 무용계 최고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할 수 있게 심사해준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이어 “5년은 더 활약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지금도 정말 아름다운 에투알이다. 예술을 뿜어내는 능력이 워낙 탁월해 은퇴하기엔 아깝다”고 했다. 이어 “에투알이 되어 홀로 무대 중앙에서 인사를 하는 건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그녀만큼 관객에 감동을 주는 에투알이 되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다”고 덧붙였다.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끝나면 그는 9월 2021-2022 시즌 개막작 준비에 돌입할 예정이다. “새 에투알을 관객들에게 가장 먼저 선보이고 싶다”는 BOP의 배려로 그는 ‘Etudes’의 개막작 오프닝 무대에 오른다. 엄청난 영예다. 또 시즌 오프닝 첫 무대에서 발레단 무용수 전원이 함께 행진하는 퍼포먼스도 선보일 예정이다. 그녀는 이 행사서 왕관을 쓰고 걷는다. “저도 이 행사는 정말 기대된다”며 기뻐했다. 에투알 지명 후 그녀는 귀가 길에 부모님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소식을 접한 부모님이 통화 중 바로 눈물을 쏟자 “지금 친구들이랑 같이 있는데 스피커폰이야”라고 말하자 부모님도 “아 그래?”라며 눈물을 뚝 그쳤다고. “지금 제가 있는 것도 평생 저를 위해 헌신하신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10일 박세은의 무대를 지켜본 한 러시아 소녀는 박세은이 눈물 흘리며 기뻐하는 장면을 촬영해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 소녀는 “제 인생 최고의 줄리엣”이라는 글을 덧붙였다. 이 얘기를 들은 박세은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제 목표는 사실 에투알이 아니었어요. 타이틀에 욕심을 갖지 않고 춤만 출 수 있으면 됐거든요. 진짜 목표는 그 소녀에게 전한 감동처럼 예술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겁니다. 저는 감동을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요.”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발레리나 박세은(32·사진)이 세계 정상급 발레단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BOP)에서 최고 등급 무용수인 ‘에투알’에 지명됐다. 아시아 출신 무용수로는 처음이다. 35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파리오페라발레는 세계 3대 발레단으로 꼽힌다. 이 발레단의 무용수들은 카드리유(군무), 코리페(군무 리더), 쉬제(솔리스트), 프르미에 당쇠르(제1무용수), 에투알(최고 무용수)의 5개 등급으로 나뉜다. 2005년 동아무용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세은은 2007년 로잔 콩쿠르 1위 등 주요 발레 콩쿠르를 휩쓸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무대 위에 홀로 선 배우를 본 적이 있는가. 허공에 대사를 뱉고 혼자 넓은 무대를 오가며 몸짓한다. 온전히 한 명의 힘으로 공연장 공기를 움직이느라 어깨가 무거울 법도 하다. 관객에게도 1인극은 신선한 경험이다. 여러 배우가 함께할 때의 강한 에너지와는 달리 한 명이 뿜어내는 농밀한 힘을 체험할 수 있다. 1인극에서 관객과 배우는 극을 같이 만들어가는 동반자이면서도 러닝타임 내내 묘한 기 싸움을 벌이는 관계가 된다. 공연계에 1인극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정동환의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박상원의 ‘콘트라바쓰’, 차지연의 ‘그라운디드’에 이어 최근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발이 되기’ ‘일리아드’ 등이 관객과 만난다. 얼마 전 막을 내린 4시간이 넘는 1인극 ‘데미안’을 비롯해 성수연 배우가 맡은 국립극단의 SF 연극 ‘액트리스’ 시리즈도 화제였다. 팬데믹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제작 환경과 프로덕션 규모가 점차 축소하는 추세다. 규모가 작아지며 상대적으로 대작보다는 실험적인 극을 펼칠 기회가 늘어났고, 1인극도 그중 하나로 떠올랐다. 1인극에 도전한 배우들의 마음가짐은 어떨까. “텍스트가 1인 연기에 최적화되어 있을 뿐 다른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도 “혼자 더 깊게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1인극에 출연한 배우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27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 손상규, 윤나무 배우가 선보이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교통사고로 뇌사 판정을 받은 열아홉 살 청년의 심장이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는 24시간의 기록을 그렸다. 배우는 의사, 유족, 장기이식 수혜자 등 총 16명의 인물을 연기한다. 손상규는 “혼자 관객과 만나는 묘한 기대감과 흥분이 있다”며 “책임과 부담감은 다른 작품과 비슷한데 컨디션 조절에는 훨씬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숱한 1인극을 탄생시킨 서울 중구 삼일로 창고극장에선 13일까지 ‘발이 되기’를 공연한다. 바리데기 설화를 소재로 아동학대, 청년실업 등 사회 문제와 인간 존엄성을 말하는 창작극이다. 극작, 연출, 배우까지 모두 이승우가 맡았다. 그는 “작품 준비 과정부터 무대에 서기까지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공연계가 힘든 요즘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도 반영돼 1인극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작품을 “한바탕의 굿”으로 정의한 그는 “한 굿판에 여러 무당이 참여하지 않듯이 홀로 한풀이를 해보려 한다”고 했다. 황석정 최재웅 김종구가 내레이터이자 배우로 출연하는 1인극 ‘일리아드’는 29일 개막해 9월 5일까지 서울 종로구 CJ아지트 대학로에서 공연한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 ‘일리아드’를 각색했다. 트로이전쟁의 마지막 해를 배경으로 아킬레스, 헥토르 등 신화 속 인물들과 전쟁으로 터전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가 단 한 명의 배우에 의해 펼쳐진다. 황석정은 “16개 역할을 하는 게 가능할지 걱정했는데 실제 연습해보니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더 도전하고 싶다. 배우로서 큰 실험이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막을 내린 ‘데미안’은 4시간이 넘게 양종욱이 무대에서 원작 소설 ‘데미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양손프로젝트 대표로 꾸준히 1인극에 참여한 그는 “연극 작가가 된 기분이었다”며 “작품을 온전히 혼자 맡다 보니 개인적인 성향, 연기가 크게 반영되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관객들이 걱정하는 만큼 지치거나 힘들진 않았다”며 “긴 시간 작품을 봐야 하는 관객들에게 더 큰 도전이었다. 배우와 관객이 4시간 공연을 마친 성취감을 함께 느낀다”며 웃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1963년 9월 25일 서울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제1회 현대무용 육완순 발표회’. 서른 살의 앳된 육완순과 무용수들은 맨발에 쫙 달라붙는 타이츠를 입고 무대 위를 구르고 뛰었다. 무용이라면 으레 전통무용을 떠올리던 당시 그는 미국 유학 시절 배운 현대무용을 열정적으로 선보였다. 그야말로 낯선 광경. 평은 둘로 나뉘었다. 누군가는 이 무대를 ‘미친 짓’으로, 다른 이들은 ‘혁신’으로 평가했다. 육완순은 “신세대가 출연했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세계 무용계의 신화 마사 그레이엄과 호세 리몽을 사사한 육완순은 올해 88세. 지금도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무용계는 그를 한국의 1세대 현대무용가이자 현대무용의 대모라고 부른다. 12일 열리는 ‘제3회 육완순 무용콩쿠르’를 앞두고 여전히 현역 안무가로 활동 중인 그를 서울 마포구 육완순무용원에서 만났다. 그는 “상금을 많이 주거나 큰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콩쿠르는 아니다. 하지만 무대에서 춤을 선보일 기회가 많지 않은 무용수들의 능력을 뽐낼 장을 마련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콩쿠르를 프랑스 바뇰레 콩쿠르처럼 세계적인 대회로 키우는 게 그의 꿈이다. 육완순에게 올해는 각별하다. 그가 만든 국제현대무용제(MODAFE·모다페)는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그는 자신의 대표작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를 지난달 28일 ‘모다페 뮤지엄-레전드 스테이지’ 무대에 올렸다. 이날 최청자 이숙재 박명숙 등의 공연까지 모두 끝나자 객석에서는 존경을 담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는 “프로그램 구성상 90분짜리 무대를 12분으로 압축하느라 아쉬웠다”면서도 “다섯 살 때 처음 춤을 추던 때나 지금 내 무대를 만들 때나 똑같이 설렌다”고 했다. 무대에 대한 열망을 말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다. 올 초 그는 스승과 제자, 동료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을 묶은 ‘내가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디자인필)를 펴냈다. 책에는 제자들로부터 받은 편지에 그가 보낸 답신이 나온다. “매 페이지마다 눈물을 흘리며 썼다”는 신간에는 문훈숙 안애순 최태지 국수호 등 춤꾼 117명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고백이 담겼다. 육완순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 중 한 명은 미국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1894∼1991)이다. 마사 그레이엄의 무용은 지금도 ‘신화의 창조’라고 불릴 만큼 전설이다. 육완순은 미국에서 2년간 그를 스승으로 모신 데 이어 1990년 내한공연을 성사시켰다. 육완순은 “무용에서 좋은 신체 못지않게 좋은 영혼과 정신을 강조하셨던 분”이라며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 시절 고수했던 엄격한 교습 방식은 그레이엄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 자신의 사위이자 가수인 이문세와 만든 합동공연은 무용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애정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육완순은 사위에게 “무용수는 백댄서처럼 왜 가수 뒤에만 서야 하느냐”고 물었고, 결국 무용수들이 무대의 전면에 섰다. 이문세는 무대 뒤편으로 물러나는 대신 단을 높인 곳에서 노래했다. 마음속에 춤을 품기 시작한 다섯 살 때부터 그가 춤과 함께한 세월은 80년이 넘는다. 그가 걸어온 길이 곧 한국 현대무용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를 표현하는 수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육완순은 딱 다섯 글자면 충분하다고 했다. “‘현대무용가’ 육완순. 그거면 족해요.”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남한 한복판에 북한이 쏜 핵미사일이 떨어지기 5분 전. 카운트다운과 함께 영상에는 경극 배우처럼 얼굴을 하얗게 칠한 정체불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BJ ‘체리장(Cherry Jang)’. 스스로 ‘한민족 평화통일 홍보대사’ ‘FBI 국가비상사태 자문위원’이라고 칭하던 그는 “오빠들도 얼른 대피하셔야 한다. 천국 시민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며 운을 띄운다. 얼마 뒤 은행 계좌번호를 슬며시 자막으로 띄운 그는 “계좌로 돈을 저축하셔야만 천국에서 쓸 금은보화를 저축할 수 있다”며 천연덕스럽게 입금을 요구한다. 카운트다운 시계가 0초가 된 순간, 조잡한 그래픽으로 꾸며져 있던 화면은 온통 검게 변하며 영상은 끝난다. 영상을 보고 나면 그야말로 뇌가 찌릿해진다. 시청자들은 “내 정신도 이상해진다. 아무 것도 못 하겠다”며 댓글로 본인의 감상평을 털어놨다. 2018년 말 홀연히 영상으로 나타난 체리장은 천국에서 ‘일등시민’이 된 본인 소식을 2020년 12월 영상을 통해 전하며 현재 자취를 감췄다. 이 영상은 도대체 뭐고, 체리장은 누구일까. 정체부터 먼저 밝히자면 이 영상을 직접 기획하고 체리장을 연기한 건 미술작가 류성실(29·사진)이다. 올해 3월 에르메스재단은 19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자로 역대 최연소인 류 작가를 선정했다. 유튜브에서 그가 펼친 ‘1인 미디어 쇼’를 높이 사 신선한 예술로 인정한 것. 온라인에선 류 작가의 예술 세계에 환호하는 이가 늘면서 이미 체리장을 ‘숭배’하는 팬덤까지 생겼다. 그를 사칭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까지 나타날 정도다. 그를 실존 인물로 착각해 “저를 구원해 달라”는 장문의 편지를 보낸 이도 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체리장의 본체’인 류 작가는 “실험적으로 도전한 영상에 많은 분이 반응하고 좋아해주실 줄 정말 몰랐다”며 “많은 이가 제 작품을 볼 수 있는 유튜브에서 예술 실험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K키치’라고 불릴 만큼 토속적 가치나 가부장적 권위를 비틀어 해석한다. 1인 미디어 세태, 음모론, 구시대적 전통 등이 모두 풍자 대상이다. “실체 없이 뜬구름 잡는 예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가 일민미술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등에서 선보였던 전시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그가 유튜브에 발을 들인 건 나름의 승부수였다. 젊은 미술가로서 상대적으로 설 곳이 좁은 미술 판에서 이름을 빠르게 알리고, 작품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딱 3년만 해 보겠다”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지난해 팬데믹으로 전시가 어려워지면서 영상 작업에 더 집중하는 시간이 됐다. 그는 이색적이고 차별적인 영상을 만들기 위해 구글에서 ‘exotic(이국적)’이라는 키워드로 이미지를 검색했다. 이를 통해 확보한 이미지에 그래픽, 사진을 덕지덕지 넣은 영상은 촌스럽고 조악해 불편함마저 느끼게 한다. 전부 류 작가가 의도한 감성이다. “기성 사회의 노골적이고 천박한 마케팅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어요.” 향후 전시 작업과 유튜브에서도 그는 이 주제를 계속 다룰 예정이다. 영상 속 체리장의 스토리 설정상 그는 현재 ‘하늘나라’에 있다. 팬들은 지금도 “언제 돌아오시는 거냐”며 그의 부활과 다음 영상을 원하고 있다. 류 작가가 답했다. “여러분! 체리장은 절대로 공짜로 돌아오지 않습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남한 한복판에 북한이 쏜 핵미사일이 떨어지기 5분 전. 카운트다운 시작과 함께 영상에는 경극배우처럼 얼굴을 하얗게 칠한 정체불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BJ ‘체리장(Cherry Jang)’. 스스로 ‘한민족 평화통일 홍보대사’ ‘일등시민’ ‘FBI 국가비상사태 자문위원’이라고 칭하는 그는 “오빠들도 얼른 대피하셔야 한다”며 “이제 천국 시민이 될 준비를 하셔야 한다”고 말한다. 얼마 뒤 은행 계좌번호를 슬며시 자막으로 띄운 그는 “오빠들이 아래 계좌로 돈을 저축하셔야만 천국에서 쓸 금은보화를 저축할 수 있다”며 천연덕스럽게 입금을 요구한다. 카운트다운 시계가 0초가 된 순간, 조잡한 그래픽으로 꾸며져 있던 화면은 온통 검게 변하며 영상은 끝난다. 영상을 보고 나면 그야말로 뇌가 찌릿찌릿해진다. 시청자들도 “내 정신도 이상해진다. 아무 것도 못하겠다”며 댓글로 감상평을 적었다. 2018년 말 홀연히 영상으로 나타난 체리장은 천국에서 먼저 일등시민이 된 본인의 소식을 2020년 12월 마지막 영상을 통해 전하며 현재 자취를 감췄다. 이 영상은 도대체 뭐고, 체리장은 누굴까. 먼저 정체부터 밝히자면 시리즈 영상을 기획하고 직접 체리장을 연기한 건 미술작가 류성실(29·여)이다. 올해 3월 에르메스 재단은 19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자로 역대 최연소인 류 작가를 선정했다. 유튜브에서 그가 펼친 ‘1인 미디어 쇼’를 높이 사 신선한 예술로 인정한 것. 온라인에서는 체리장을 ‘숭배’하는 열성 팬덤까지 생기고 사칭 SNS 계정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류 작가의 예술 세계에 환호하는 이가 늘고 있다. 체리장을 실존 인물로 착각해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는 저를 구원해달라”는 장문의 편지를 보낸 이도 있다고.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체리장의 본체’ 류 작가는 “실험적으로 도전한 영상에 이렇게 많은 분이 반응하고 좋아해주실 줄 몰랐다”며 “젊은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 최대한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는 플랫폼인 유튜브에서 예술실험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K-키치’라고 불릴 만큼 토속적 가치나 가부장적 권위를 비틀어 해석한다. 1인 미디어 세태, 음모론, 구시대적 가치 등이 모두 그의 풍자 대상이다. 평소 “이 사람은 왜 이러지?”라고 류 작가가 느끼게 만든 여러 경험들이 예술적 소재가 되기도 한다. “실체 없이 뜬구름 잡는 예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는 여러 영상, 전시에서 체리장을 비롯한 흥미로운 캐릭터와 구체적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그간 일민미술관, 북서울미술관, 백남준 아트센터서 선보였던 전시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그가 유튜브 작업에 발을 들인 건 승부수이기도 했다. 젊은 미술가, 조각가, 아티스트로서 상대적으로 설 곳이 좁은 미술 판에서 이름을 알리고, 작품성을 증명하고 싶었다. “딱 3년만 해보겠다”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예술을 수치로 증명하긴 어렵잖아요. 어려서부터 원했던 상을 받으면서 제 가능성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뻐요.” 지난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오프라인 전시가 어려워지면서 영상 작업에 더 집중하는 시간이 됐다. 유튜브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그는 이색적이고 차별적 영상을 만들기 위해 구글에서 무작정 ‘이국적(exotic)’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며 이미지를 찾았다. 그의 영상에서처럼 촌스럽고 조악한 그래픽이 덕지덕지 붙은 영상은 불편함마저 느끼게 한다. 전부 류 작가가 의도한 감성이다. “기성사회의 노골적이고 천박한 마케팅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거든요.” 여기에 그가 읽고 연기할 대략적 스크립트를 만들고 조명 설치와 분장까지 마치고 나면, 그의 쇼를 시작할 준비는 끝난 셈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제 안에서 체리장의 모습이 나온다. 내가 흑화 했을 때 나오는 모습을 과장해서 연기했다”고 털어놨다. 영상 속 체리장 캐릭터 설정 상 그는 현재 ‘하늘나라’에 있다. “하늘나라에서 먼저 일등시민이 됐으니 여러분도 나를 믿고 따라오라”는 메시지가 마지막이다. 팬들은 지금도 “언제 돌아오시는 거냐”며 다음 영상을 갈구하고 있다. 류 작가가 답했다. “여러분들, 체리장은 절대로 공짜로 돌아오지 않습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극작가이자 1세대 공연기획자인 김지일 씨(사진)가 7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80세. 194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고와 한양대를 졸업했다. 마당놀이 명가로 꼽히는 극단 미추에서 ‘심청전’ ‘춘향전’ ‘흥보전’ ‘이춘풍전’ 등 대본 20여 편을 집필했다. 뮤지컬 ‘영웅만들기’, 총체극 ‘하늘여자, 땅남자’, 신창극 ‘천명’ 등 여러 장르 공연 분야의 극작을 맡기도 했다. 예그린악단 홍보부장, 국립가무단 총무, 국립극장 선전기획실장, 마당세실극장 극장장, 서울시립극단 기획실장, 공연문화산업연구소 소장 등을 지내며 예술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극단 미추의 손진책 대표와는 50년 연극 인생 대부분을 함께 했다. 유족은 부인 김상희 씨가 있다. 빈소는 경기 구리시 원진녹색병원, 발인은 9일 오전 6시. 031-552-5119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국내 최대 발레 축제 ‘제11회 대한민국발레축제’가 15∼3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국내 정상급 무용수들과 해외 유명 무용단에서 활동 중인 국내 무용수들이 대거 무대에 오른다. 대한민국오페라·발레축제추진단과 대한민국발레축제조직위원회가 주최하는 이 행사는 올해 ‘혼합된 경험과 감정’을 주제로 현 시대의 고민을 담은 작품들을 소개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과 환경 문제, 세월호 등 다양한 이슈를 다룬 12개 작품을 선보인다. 개막작인 국립발레단의 코믹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더불어 유니버설발레단의 신작 ‘트리플 빌’을 볼 수 있다. 특히 ‘한국을 빛내는 해외 무용스타 스페셜 갈라’ 공연에서는 미국 뉴욕 할렘 댄스시어터의 이충훈을 비롯해 보스턴발레단의 김석주, 독일 헤센 위즈바덴 국립발레단의 이지영, 일본 다이라쿠다칸컴퍼니의 양종예, 에스토니아 바네뮤스 오페라 발레 시어터의 이주호 등이 무대에 오른다. 이 밖에도 와이즈발레단의 ‘유토피아’, 조주현댄스컴퍼니의 ‘디-홀릭’, 김용걸댄스씨어터의 ‘하늘, 바람, 별 그리고 시’, 다크서클즈 컨템포러리 댄스의 ‘In your Sleep(너의 꿈에서)’ 등 국내 작품들도 선보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가수 김민기(사진)의 대표곡 ‘아침이슬’의 앨범 발표 50주년을 기념한 헌정 앨범 일부 곡들이 6일 공개됐다. ‘아침이슬 50년 김민기에게 헌정하다’ 제목의 앨범 중 5곡이 이날 오후 음원사이트에 올라갔다. 이날 발표된 곡은 한영애의 ‘봉우리’를 비롯해 유리상자의 ‘늙은 군인의 노래’, 아카펠라 그룹 메이트리의 ‘철망 앞에서’, 밴드 이날치의 ‘교대’ 등이다. 아이돌 그룹 NCT의 태일이 부른 ‘아름다운 사람’도 포함됐다. 모두 김민기가 발표했던 곡들로, 다양한 세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뮤지션들이 참여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한영애가 부른 봉우리는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당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주제곡으로 만들어졌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김민기가 군 복무 시절 퇴직하는 선임하사의 푸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작곡해 선물한 곡. 철망 앞에서는 노태우 정부의 남북 예술단 교류사업 때 쓰였다. 밴드 이날치가 재해석한 교대는 1978년 김민기가 공연한 음악극 ‘공장의 불빛’의 도입부에 사용된 곡이다. 이번 앨범 음원은 매주 4, 5곡씩 묶여 순차적으로 발표된다. 추후 공개될 곡 작업에는 권진원, 박학기, 윤도현, 윤종신, 이은미, 장필순, 크라잉넛, 웬디(레드벨벳) 등이 참여했다. 마지막 4주 차에는 참여 가수들이 함께 부르는 ‘아침이슬’이 공개될 예정이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경남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19일부터 주말마다 일정 인원이 관람할 수 있다. 그간 대장경판은 불교 행사나 법회에 한해 불자들을 대상으로만 공개됐었다. 해인사 총무국장 진각 스님은 3일 기자간담회에서 “팔만대장경 사전예약 탐방제를 19일부터 실시한다”며 “장경판전 내부를 순례할 수 있는 탐방 프로그램을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하루 두 번 운영한다”고 밝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년)에 만들어졌다. 고려 현종 때 몽골군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해 새긴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지자 다시 만든 것이다. 현존 대장경판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탐방은 해인사 일주문 맞은편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기념표지석에서 시작한다. 이어 봉황문, 국사단, 해탈문, 법계탑, 대적광전, 대비로전, 수다라장, 법보전 순으로 진행된다. 관람객들은 법보전 안에서 팔만대장경판을 볼 수 있다. 탐방 소요 시간은 약 40∼50분이다. 탐방 신청은 해인사 홈페이지를 통해 선착순으로 할 수 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 회당 참가 인원이 10∼20명으로 제한되며, 본인만 신청할 수 있다. 초등학교 취학 전 유아는 관람할 수 없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취업 서류전형 탈락, 공모전 낙방, 고된 아르바이트….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펭귄의 본체로 알려진 배우가 첫 뮤지컬 무대에 도전해 청년의 애환과 꿈을 노래한다. 사회로 막 발돋움하려는 청년들은 과연 무인도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까. 지난달 개막한 뮤지컬 ‘무인도 탈출기’는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지하창고 단칸방에 사는 청년들의 삶을 그렸다. 이들은 취업난과 무한경쟁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자책감에 방황한다. 2016년 연극으로 처음 선보인 작품은 지난해 뮤지컬 버전으로 탈바꿈했다. 올해가 뮤지컬로는 두 번째 시즌. 전체 줄거리는 유지하되 넘버와 연기를 가다듬으며 수작으로 거듭났다. 등장인물 3인은 실제 청년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막 서른 살을 넘긴 ‘동현’은 대학 문예창작과 출신으로 방에 누워 자신이 쓰고픈 이야기를 상상한다. 하지만 글은 잘 써지지 않고 취업시장에 뛰어들기도 망설여진다. 단칸방에 같이 사는 친구 ‘봉수’는 시간을 1초도 낭비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히 살지만 매번 취업 문턱에서 좌절해 삶의 목표를 잃었다. 인근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수아’는 공모전 상금 500만 원을 타기 위해 두 사람과 함께 연극을 만들기로 한다. 작품이 ‘극 중 극’의 형태로 나아가면서 허름했던 단칸방은 인물들의 상상 속에서 북태평양의 무인도로 바뀐다. 이번 공연에는 특히 배우 김동준이 봉수 역할로 참여해 화제다. 연극배우 출신인 그의 첫 뮤지컬 도전이다. 유쾌하면서도 진심 어린 그의 연기에 객석에서는 쉴 새 없이 잔잔한 웃음과 눈물이 터져 나온다. 물론 작품을 감상할 때 남극 출신 펭귄과 대학로에서 열연 중인 그를 굳이 연관지을 필요는 없겠다. 극단 섬으로 간 나비 관계자도 “우리 작품에 펭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펭귄은 펭귄일 뿐. 작품의 극 중 극에서 공간적 배경이 되는 무인도는 의미심장하다. 무인도에 표류한 이들은 처음에 고독감에 몸부림치며 탈출을 꿈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쟁과 주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인도에 애착을 느낀다. 구조선이 다가와도 ‘꼭 여기를 탈출해야 할까’라며 고민한다. 공간적 차원에서 무인도는 현실에서 고립된 단칸방을 의미하고, 험난한 사회로부터의 안식처로 읽히기도 한다. 혹은 누구든 마음 깊은 곳에 품어둔 자신의 진짜 모습이나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을 뜻할 수도 있다. 극은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청년들의 삶을 노래한다. 동현 역에 박영수 안재영 박건, 수아 역에 박란주 손지애 이휴, 봉수 역에 김동준 박정원 강찬이 각각 연기한다. 배우들의 노래 이상으로 연기력이 돋보이는데 객석에 위로를 건네기에 충분하다. 8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드림아트센터 2관, 6만 원, 13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주로 보고서에 사용하는 바탕체와 굴림체, 궁서체만 쓴다면. 글자가 뜻만 전하면 충분하지 글씨체(폰트)가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면. 당신은 아마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개성 넘치는 글씨체에 환호하고 인기 폰트의 정보를 활발하게 공유하는 건 이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풍경. MZ세대에게 폰트는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명함이자 디지털 상품이 됐다. 최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제공하는 기본 폰트를 바꾸거나, 유료로 폰트를 구입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특수문자와 폰트를 활용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에서 제공하는 기본 글씨체를 변경하고, 기분에 따라 여러 폰트를 사용한다. 디자인 업계도 MZ세대의 늘어난 폰트 수요에 맞춰 이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색다른 글꼴을 고민하고 있다. 넷플릭스 애청자인 대학생 김대영 씨(27)는 그날 기분이나 콘텐츠 분위기에 따라 자막 글씨체를 수시로 바꾼다. 최근에는 극장에 간 듯한 기분을 내고 싶어 영화관 자막과 유사한 무료 폰트 ‘a시네마L’을 내려받았다. 그는 “콘텐츠 성격에 맞는 폰트를 찾아 사용하는 건 소소한 재미다. 작은 변화지만 몰입에 큰 도움이 된다. 맛있는 음식을 더 멋지게 플레이팅해 즐기는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고윤성 씨(25)도 “좋아하는 글씨체로 유튜브, 넷플릭스 자막을 바꿨더니 눈이 편해진 기분”이라고 했다. 이들은 주로 인터넷 사이트 ‘눈누’나 ‘네이버 소프트웨어 폰트’ ‘산돌구름’ 등에서 폰트를 내려받는다. 별도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할 때도 있다. 자신의 SNS 프로필을 독특한 폰트로 꾸미고, 휴대전화의 기본 글씨체를 바꾸는 것도 유행이다. 예쁜 폰트를 발견하면 커뮤니티에 캡처 화면을 올리고 “이 폰트 정보 좀요”라고 문의하는 이도 적지 않다. 회사원 박재웅 씨(30)는 “최근 입사지원서 작성 시 SNS 주소를 요구하는 회사들이 많다. 개성 있는 폰트로 공을 들인 SNS는 일종의 명함”이라고 설명했다. 브이로그, 유튜브 등의 콘텐츠나 아이돌 팬덤 굿즈를 만드는 MZ세대에게 폰트는 차별성을 꾀할 수 있는 핵심 요소다. 무료 폰트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은 유료 폰트를 찾아 나선다. 폰트 플랫폼 업체 산돌의 황남위 마케팅팀 PD는 “싸이월드 도토리로 글씨체를 구매하던 당시 폰트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후 모바일로 매체 환경이 변한 후 매년 20∼30%씩 폰트 매출이 늘고 있다”며 “기업 외에 개별적으로 폰트를 구입하는 고객은 누적 기준 75만 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월 4900원을 내고 12가지 스타일, 29종의 폰트를 사용하는 유료 서비스도 내놓았는데 이용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1인 폰트 제작 스튜디오 ‘한글씨’의 김동관 디자이너가 내놓은 폰트 ‘꼬딕씨’도 MZ세대에게 인기가 높다. 폰트를 연구하는 심우진 서울출판예비학교 출판디자인 책임교수는 “온라인 공간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MZ세대의 욕구와 글씨 자체를 즐기는 놀이문화가 결합한 현상”이라며 “중소기업들도 브랜딩을 위해 전용 서체를 만드는 등 향후 폰트 시장은 급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