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오세윤 사진작가(50). 일반인에겐 생소할 수도 있지만, 문화재계에서 오 작가는 ‘모르면 간첩’이다. 문화재청이나 국립박물관이 내놓는 도록이나 연구서적에 실린 사진 아래엔 ‘촬영 오세윤’이라고 숱하게 붙어 있다. 특히 문화재의 보고인 경주지역 유물사진 가운데 시중에 공개된 사진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거의 대부분 그가 찍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렇게 30년 가까이 한 우물만 파온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의 첫 개인전이 17일부터 서울 종로구 통의동 사진갤러리 류가헌에서 열렸다. 대학 시절(동국대 경주캠퍼스)부터 경주에 정착한 이력답게 전시회는 ‘신라를 찾아서’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오 작가는 “당시 경주 문화재를 기록한 사진 다수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찍은 것이었다는 사실에 충격받아 이 일에 뛰어들었다”며 “그간의 작업을 한 번 정리하자는 뜻으로, 거창한 것은 아니다”라며 쑥스러워했다. 전시작들은 오 작가가 얼마나 경주 곳곳을 누비며 애정을 갖고 셔터를 눌렀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다. 2008∼2009년 경주 쪽샘지구 유물 출토 과정을 담은 사진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서 이제 막 형태를 드러내는 현장을 포착한 장면은 정적이지만 생동감이 넘친다. 당시 1500여 년 만에 발굴돼 화제를 모았던 말 갑옷 출토 사진도 눈길을 끈다. 그가 가장 어려운 작업으로 꼽았던 석굴암이나 토우 사진은 마치 직접 미술품을 손으로 만지는 듯한 촉감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문화재와 풍경이 어우러진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지난해 경주 보문동 진평왕릉 인근에서 찍었다는 폐사지의 연꽃무늬 당간지주(절에 세우는 깃대를 지지하는 받침돌)는 해질녘 노을에 묻힌 천년고도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어스름하게 등선만 보이는 황남대총이나 하얗게 눈 덮인 계림 사진도 놓치기 아깝다. 오 작가는 “오랜 시간 정성 들여 찾다 보면 유물이 ‘지금 찍어 달라’며 말을 걸어오는 때가 있다”며 “그 찰나의 희열을 허락해준 문화재에게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21일까지. 무료. 02-720-201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반도 미라는 이집트 미라와 어떻게 다를까.’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중앙과학관이 16일 대전 유성구 국립중앙과학관 상설전시관에서 특별전 ‘과학, 미라를 만나다’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는 문화재연구소와 중앙과학관이 문화재를 고고학과 과학의 영역에서 함께 연구한 성과를 관람객들에게 소개한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한반도 미라는 대부분 조선시대 회곽묘(灰槨墓·내부가 회벽인 묘)에서 발견되는 미라가 주를 이룬다. 묘 안팎으로 공기가 통하지 않아 시신이 썩지 않는 ‘공기 차단 미라’로 한반도와 유럽 늪지대에서 종종 발견되는 형식이다. 이집트는 절대적 권력을 가졌던 지도자의 형체를 보존하기 위해 방부액체로 시신을 썩지 않게 만든 ‘인공 미라’다. ‘건조 미라’와 ‘냉동 미라’도 있다. 남미 안데스 산맥 서쪽 아타카마 사막이나 몽골 남부 고비 사막에서 발견되는 건조 미라는 수분이 급속도로 말라 시신을 썩게 하는 미생물조차 살 수 없어 미라가 된다. 냉동 미라는 알프스 산맥이나 페루 등 추운 지역에서 발견된다. 특별전에는 2001년 경기 양주에서 출토된 소년 미라 ‘단웅이’와 2002년 경기 파주 파평 윤씨 묘역에서 세계 최초로 발견된 모자(母子) 미라 등에 대한 과학적 연구 성과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코너도 있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과 충북대 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무덤 출토 복식(服飾)과 한반도 미라에서 주로 발견되는 기생충 알도 볼 수 있다. 문화재연구소는 “미라는 옛 조상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연구 자료이자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전시품”이라고 설명했다. 12월 31일까지. 무료. 042-601-7894∼6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미국 컬럼비아대 신경정신과 교수인 저자는 환자 돌보고 책 쓰는 일 말곤 하는 게 없나 싶게 많은 책을 생산한다. ‘화성의 인류학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등 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책만 헤아려도 12권이나 된다. 아직도 더 들려줄 얘기가 남았을까. ‘환각’은 이 질문에 “물론!”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책이다. 저자가 줄기차게 써온 책들이 전하려는 바는 의외로 간명하다. 이해하기 힘든 여러 정신적 증상들을 쉽게 ‘미쳤다’ ‘정신병자다’ 같은 말로 재단하지 말라는 거다. 일반인은 받아들이기 힘들지 몰라도 의학적으로 따져보면 다 이유가 있다. 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저자는 그 오해와 무지로 인한 간극을 해소함으로써 독자들이 좀더 신경학적인 고통(혹은 체험)을 당하는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길 부탁한다. 환각 역시 마찬가지다. 눈앞에 헛것을 본다고 일단 비정상으로 보는 선입견부터 없애야 한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보자. 수도승이 홀로 면벽수도(面壁修道)를 하거나 수감자가 독방에 오래 갇혀 있으면 기묘한 무늬나 사람 비슷한 형체를 보는 경우가 잦다. 종교나 문화계에선 달리 해석하겠지만, 의학적으로는 이를 ‘죄수의 시네마’라고 한다. 왜 이런 환각이 보이는 걸까. 이는 인간이 동일한 외부환경에 장기간 노출되면 ‘감각 박탈’이 이뤄져 뇌의 인지능력에 혼선이 오는 것이다. 실제로 엇비슷한 풍경을 지속적으로 보는 철인3종경기 선수들도 레이스를 벌어다 종종 겪는 일이다. 그들이 다 비정상일까. 오히려 뇌를 비롯한 신체가 평정을 되찾기 위해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봐야 한다. 확실히 올리버 색스는 ‘기본’은 하는 저자다. 풍부한 사례와 유려한 문장력으로 책에 감칠맛을 낼 줄 안다. 과학책 저자들이 다들 이렇게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만 국내에 소개된 시기를 기준으로, 2010년 이전에 나온 ‘색맹의 섬’ 같은 전작들에 비해 최근 책들은 살짝 ‘꼰대’ 냄새가 난다. 적절한 균형감이 돋보이던 관찰자적 시선이 매력이었는데, 요즘은 살짝 가르치려 든다고나 할까. 세월 탓이겠으나 ‘앉아서’ 쓴 느낌도 지울 수 없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워커는 저자의 아들이다. 여느 부자관계가 그렇듯 태어날 때부터 워커는 저자에게 ‘특별한’ 자식이다. 하지만 그 특별함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워커는 중증장애아였다. 의학적 진단명은 ‘심장·얼굴·피부증후군(CFC)’. 유전자 돌연변이로 생기는 이 병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수백 명만 확인됐을 정도로 희귀하다고 한다. 환자마다 증상이 다양하나 심장과 얼굴 기형, 피부 질환, 지적장애, 그리고 시시각각 온몸을 덮치는 통증에 시달린다. ‘달나라 소년’은 그런 워커를 13년 동안 가족과 함께 키우고 돌본 아비의 체험과 심정을 담은 책이다. 캐나다 일간지 글로브앤드메일 기자인 저자는 2007년부터 이 신문에 동명의 칼럼(The Boy in the Moon)을 연재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의 서평 쓰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다. 단순히 ‘감동적’이란 말로는 표현이 잘 안 된다. 이런 분야의 식견이 부족하다 보니 자칫 저자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누를 끼칠까 두려움마저 앞선다. 이 부자의 고통을 어찌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저자는 때론 심하다 싶을 만치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로 글을 써내려간다. 물론 그래서 더 울컥하는 대목도 많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독자를 한바탕 울음바다로 몰아넣는 데 있지 않다. “워커를 키우는 건 물음표를 키우는 일과 같았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성찰함으로써, 저기 멀리 달나라에 사는 아들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함께 세상을 헤쳐 나가려는 진정성이 가득하다. 왜 이런 과정이 지난하지 않았을까. 특히나 워커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때리는 자기학대 증세마저 지녔다. 잠들기 직전까지 잠깐만 방심해도 온몸에 멍을 만든다. 저자와 아내는 물론이고 워커의 누나 헤일리마저 워커가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허덕인다. 하지만 때로 찾아오는 보석 같은 경이로움이 그들을 어루만지기에 삶은 계속된다. “어느 날 저녁, 너무 지쳤던 나는 워커를 팔에 안은 채로 계단에서 굴렀다. 그때 온몸을 관통한 생각은 워커였다. 순간적으로 팔을 둘러 내 몸을 썰매로 만든 상태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워커는 깔깔대며 웃었다. 재미있었나 보다. 워커가 즐겁다면 그걸로 나도 좋았다. 아들은 나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때로는 거기서 나오는 길이 되어 주기도 했다.” 저자는 아들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처음엔 내 자식이니 사랑하고 보호하는 데만 치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와 교감을 통해 ‘경탄과 감사’를 경험하고 나면, 그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깨닫는다. 워커를 꼭 껴안은 저자는 이렇게 되뇐다. ‘나는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한 워커와 가장 가까이에 있다. 그 사이에 공간은, 간극이나 공백은, 기대나 실망은, 실패나 성공은 이제 없다.’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안아주길.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떤 운명이 이다지도 기구할까. 세자를 모시던 빛나던 시절은 나라를 뺏기며 사라졌다. 설움도 멈추기 전에 온몸이 해체돼 대한해협 건너 타향으로 끌려갔다. 그것도 모자라 지진과 화재를 겪으며 몸뚱이는 와르르 무너지고…. 80년 만에 어렵사리 고국 땅을 밟았지만 뒷방 객식구 대접. 그렇게 또 약 20년, 드디어 제자리를 찾을 서광이 비치고 있다. 경복궁의 동궁 ‘자선당(資善堂)’ 얘기다. 일제강점기 경복궁 수난사의 상징이던 자선당 유구(遺構·옛 건축물 흔적)를 원위치로 옮기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근 100년 만이다. 환수 문화재의 걸맞은 지위를 되찾아 줘야 한다는 뜻에서 문화재청은 물론 문화재위원회와 학계도 긍정적이어서 자선당 유구의 제자리 찾기 사업에 순풍이 불 것으로 보인다. ‘어진 성품을 기른다’는 뜻을 지닌 자선당은 원래 세종 9년(1427년) 당시 세자이던 문종과 세자빈의 침전으로 건립됐다. 근정전 동쪽에 있어 동궁(東宮)이란 별칭을 흔히 썼고, 세자도 동궁마마로 불렸다.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한 차례 불타는 고초를 겪었다가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으나 1915년 일제가 일본으로 반출했다. 당시 조선 통치 5주년을 맞아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는데, 경복궁 곳곳을 헐어 자재를 민간에 팔아넘기는 만행을 저지른 것. 이때 일본 사업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가 동궁 부재를 사들여 도쿄로 가져가 재조립한 뒤 사설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0년도 안 돼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이 발생하며 기단(基壇·건축 터에 쌓은 단)과 주춧돌만 남고 모두 타 버렸다. 그렇게 자선당은 잊혀질 뻔했지만 김정동 목원대 건축과 교수(65)가 1993년 도쿄 오쿠라 호텔 정원에서 그 유구를 찾아냈다. 오랜 협상 끝에 오쿠라 호텔은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1995년 유구석 288개를 반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9년 자선당을 복원할 당시 환수된 유구는 건축 자재로 쓰이지 못했다. 화재와 방치로 손상이 너무 컸던 탓이다. 결국 경복궁 북쪽 구석 건청궁 옆에 쓸쓸히 놓여졌다. 최근 이를 원위치로 돌리는 것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환수를 이끌었던 김 교수는 “동궁처럼 건축물 유구를 환수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라며 “복원된 자선당 인근으로 옮겨 경복궁을 찾는 국내외 관람객이 잊혀진 역사를 배우는 교육 현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재청도 적극 찬성한다. 박영근 문화재활용국장은 “자선당이 상징성이 큰 만큼 기본 복원 방향에 동의한다”며 “절차적인 문제가 남아 있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남은 과제는 비용 문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유구 이전은 1억 원 안팎이 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화재청으로선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한 문화재계 인사는 “자선당 유구 환수 때 상당 비용을 댔던 삼성문화재단이 다시 나서면 모양새가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놓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솔직히 우리네 부모님들은 핏줄이 당겨서 손자를 원하려니 했다. 제 앞가림하기도 벅찬데…. 그런데 아이가 생기니 알겠다.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달라진 건 분명한데 지금도 헷갈린다. 잘하고 있는 건가. 좋은 엄마, 근사한 아빠이고 싶은데, 불끈불끈 짜증이 치솟는다. 아, 아직 부모 될 자격이 없었나 보다. ‘왜 엄마는…’은 그럴 때 펴보라고 나온 책이다.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고, 다들 그러고 산다고 토닥거린다. 저자는 미국에선 꽤 유명 인사다. 블로그 ‘불량한 엄마’를 운영하는 전업주부인데, 속만 끓이던 육아의 고충을 진솔하게 담아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은 세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느꼈던 ‘불량한 속내’가 여과 없이 실려 있다. 아이를 키워본 이라면 이 책은 무조건 재밌다. 남성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많다. 도대체 세상엔 ‘육아 전문가’가 왜 이리도 넘쳐나는지. 막상 조언이 소용없어도 책임도 안지면서. ‘천사 같은 아이’도 틀린 말이다. 천사에 근접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아이다. 그것도 대부분 잘 때. 더 솔직해지자. 신생아는 결코 예쁘지 않다. 생김새는 쭈글쭈글한 고구마에 가깝다. 그럼에도 저자가 아이를 셋이나 키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그 ‘가끔’ 찾아오는 행복이 너무나 소중하다. 잠든 아이의 발가락을 만지작거리거나 환하게 웃으며 달려와 품에 안기는 순간을 세상 무엇과 바꾼단 말인가. 왜 엄마는 내게 아이를 낳으라고 했냐고? 낳아 보면 금방 안다. 로또도 이런 로또가 없으니까. 공감은 여성이 더하겠지만, 오히려 책은 남성이 읽으면 얻는 게 크다. 아이 낳고 아내가 왜 그리도 남편에게 실망하는 순간이 잦은지 이해할 수 있다. 미혼이거나 아직 아이가 없어도 권하고 싶다. 숨겨둔 부모의 일기장을 펴보는 기분이랄까. 민망하긴 해도 코끝이 찡해진다. 우린 모두 누군가의 아기였으니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3일 오전 10시 반경 일본 도쿄 빅사이트 전시관. 제20회 도쿄국제도서전이 열리던 박람회장 한쪽이 일순간 술렁거렸다. 올해 주제국(주빈국)인 한국관 부스에 아키히토(明仁·79) 일왕의 둘째 아들인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48) 왕자와 기코(紀子·47) 왕자비가 등장한 것. 왕자 부부는 조선통신사 행렬도 영인본과 박경리 소설 ‘토지’의 일본어판에 관심을 보이며 20여 분간 둘러보다 자리를 떴다. 일본 측 도서전 관계자는 “왕자 부부가 도서전을 자주 방문했지만 주빈국 부스를 따로 찾은 것은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도쿄도서전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된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1994년 시작한 도쿄도서전은 ‘제2의 출판대국’이란 위상답게 해마다 세계 40여 개국에서 출판사 1100여 곳이 참여하는 일본 최대 책 박람회다. 지금까지 프랑스 스페인 등 서구 국가들만 주빈국으로 선정해 왔다. 아시아 국가가 주빈국으로 초청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이 때문에 출판 수출입에서 8 대 2 정도로 약세를 면치 못하는 한국에 이번 초청은 ‘쾌거’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이어 지난해 중국 베이징과 올해 도쿄, 내년 영국 런던 국제도서전 주빈국으로 연달아 초청되며 한류의 또 다른 표출이라는 반응까지 나왔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너무 들뜰 필요는 없지만 이번 도서전이 양국의 출판 불균형이 줄어드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순백의 이미지를 살려 현장에 차려진 한국관은 상당히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윤형두) 주관으로 국내 출판사와 관련 업체 27개 사가 참여해 다양한 전시를 선보였다. ‘책으로 잇는 한일의 마음과 미래’라는 주제 아래 조선통신사부터 시작된 양국의 문화 교류를 조명한 ‘필담창화 일만리(筆談唱和一萬里)’와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안내하는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등 특별전시를 마련했다. 특히 소설 ‘엄마를 부탁해’, 인문서적 ‘아프니까 청춘이다’같이 일본어로 번역된 한국 출판물을 소개한 ‘한일 출판교류전’은 일본 관람객들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신기하긴 해도 생소하다는 반응이 컸다. 직장인 우에하라 요시코 씨(27)는 “한국 드라마나 가요는 인기가 높은데 책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일본 출판평론가 다테노 아키라(館野晳·78) 씨도 “황석영 신경숙 작가는 많이 알려진 편이나 여전히 빈약한 상황”이라며 “김애란 한강 등 실력 있는 신진 작가들을 더 활발하게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전시장 옆 세미나실에서 열린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76)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72) 미국 컬럼비아대 객원교수의 대담도 방청객 100여 명이 몰리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동아시아의 보편성’이란 주제로 의견을 교환한 두 지성은 “유교문화 바탕에 깔린 평화를 추구하는 정신, 민심을 천심으로 여기고 국가의 근간으로 삼았던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최근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영유권 분쟁으로 경색된 한중일 관계에 대해 “서구 열강과 정치적 논리에 휩쓸리지 말고 문화사상적 교류를 통해 국면을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가라타니 교수는 “최근 일본을 이해하려면 서구나 중국이 아니라 한국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며 “한국을 배우기 위해 한국 드라마도 열심히 보고 있다”고 말했다.도쿄=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른들 들으면 실소할 말 좀 하련다. 아이 키우기, 참 힘들다. 겨우 17개월 키워놓고 이러긴 부끄럽지만, 애는 정말 지가 알아서 크는 게 아니었다! 애가 수은전지 삼킨 줄 알고 응급실로 들고 뛰었을 땐 정신이 혼미했다. 이번 주말, 생후 처음으로 이틀 연속 오전 8시 넘어 일어나니 얼마나 고마운지. 평소 6시면 꼬집고 치대고 난리다. 요즘 꼬마를 재우곤 MBC 드라마 ‘여왕의 교실’을 본다. 고현정은 물론이고 아역배우 연기가 장난 아니다. 근데 가끔은 살짝 무섭다. 애들이 정말 저럴까. 반 친구를 괴롭히며 저렇게 즐거워하다니. 드라마대로라면 열세 살짜리 세상은 이미 어른과 똑같은, 아니 더한 약육강식 전쟁터였다. 주인공은 초등학생이지만, 왠지 눈길은 학부모에게 더 갔다. 아이들이 저리 행동하는 건 어른 책임이 상당할 터. 실제로 드라마 속 부모는 자녀와 제대로 소통하는 이가 드물었다. 먹고살기 바쁘거나 자기 생각에 갇혀 있을 뿐. 무신경과 집착만이 넘쳐난다. TV 앞에서야 비난하기는 쉽다. 하지만 누가 저런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자신할까. 솔직히 예전엔 길에서 생떼 쓰는 애를 보면 혀를 찼다. 지금은? 지난달 비행기에서 울고불고하는 아기를 보며 마음이 짠했다. 부모가 뭔 죄가 있나. 이 모순은 참 극복하기 어렵다. 하지만 따져보면 결국 책임은 부모가 져야 한다. 아이 버릇은 가정에서 든 거니까. 최근 연달아 출간된 책 ‘프랑스 아이처럼’(북하이브)과 ‘프랑스 아이들은 왜 말대꾸를 하지 않을까’(아름다운사람들)는 이런 고민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프랑스는 ‘우리처럼’ 애를 키우지 않는단다. 꽤 알토란같은 정보가 담긴 이 책들이 전하려는 충고는 간명하다. 명확한 룰과 규칙을 갖고 아이를 키우라는 거다. 애는 태어나자마자 하루 4∼5회 정해진 시간에만 분유를 먹이고, 한두 달만 지나면 혼자 알아서 자는 습관을 들인다. 어릴 때부터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걸 깨우쳐야 예절은 물론 독립심이 생긴다는 설명이다. 진짜 가능할까 싶지만, 프랑스인들은 실제로 이런다. 사실 프랑스 육아법은 미국에서 먼저 화제가 됐다. 아이 주위를 맴돌며 모든 걸 다 해주는 ‘헬리콥터 맘’은 원래 그네들 신조어 아닌가. 그들도 최근 그게 결코 아이의 창의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걸 깨닫고 있단다. 얼핏 들으면 이 육아법, 한국에선 신기할 게 없다. 오냐오냐 키우다 버릇 나빠진다고 숱하게 들어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가 더 미국식 교육논리에 젖어 있다. 자기 집에서 예의 없는 아이가 밖에선들 잘 할까. 무조건적 강요가 아닌, 합리적 권위는 자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거실의 왕 혹은 여왕은 부모여야 한다. 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이슬람 왕실 보물의 유혹에 취해보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이 쿠웨이트 왕실 보물들을 소개하는 ‘이슬람의 보물-알사바 왕실 컬렉션’ 특별전이 2일 시작됐다. 알사바 컬렉션이란 쿠웨이트 왕족인 셰이카 후사 사바 알살렘 알사바 공주 부부가 1970년대부터 수집한 진귀한 보물 3만여 점을 일컫는다. 이 컬렉션은 1983년부터 국가에 영구 대여돼 쿠웨이트국립박물관의 ‘다르 알아타르 알이슬라미야(이슬람미술관)’에서 관리한다. 한국 특별전에서는 이 가운데서 엄선한 367점을 소개한다.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 모두 9부로 꾸민 이번 전시에서는 8∼18세기 1000년 세월을 아우르는 다양한 유물을 감상할 수 있다. 전반부는 역사적 흐름에 따라 △이슬람 미술의 기원(8∼10세기) △다양한 전통(11∼13세기) △성숙기(14∼15세기) △전성기(16∼18세기) 4부로 구성했다. 8세기 중반 요르단 건축 장식물부터 13세기 이란의 도기 주전자, 14세기 이집트산으로 추정되는 은입사 황동 대야가 전시된다. 전성기 유품에서는 ‘신드바드’라도 타고 다녔을 법한 이슬람 양탄자가 인상적이다. 페르시아 전통이 살아있는 이란 사파비 왕조의 18세기 정원 카펫은 세련된 문양을 자랑해 당시 장인들의 놀라운 기술 수준을 가늠케 한다. 후반부는 주제나 소재에 따라 5가지로 엮었다. ‘예술로 승화한 문자, 서예’는 나무로 만든 꾸란 보관함 같은 이슬람 미술품에 표현된 글씨에 주목했고, ‘식물무늬의 장식화, 아라베스크’는 서예와 함께 이슬람의 대표적 장식 소재인 아라베스크(아라비아 무늬)에 초점을 맞췄다. 마찬가지로 ‘무한한 반복의 표현, 기하학 무늬’와 ‘이슬람 미술의 형상 표현’도 아름다운 무늬를 담은 미술작품과 생활용품을 모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화려한 궁전문화, 보석공예’다. 이번에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대부분 16∼18세기 무굴제국(인도의 이슬람 왕조) 때 만들어진 작품들로, 당시 화려한 귀족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장신구와 보석이 많다. 특히 18세기 후반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금으로 만든 길이 39cm의 목걸이는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넘친다. 박물관은 “국내 처음으로 이슬람 미술 전반을 소개하는 전시로 이슬람 문명의 총체적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10월 20일까지. 4000∼1만2000원. 02-2077-90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발간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한자리에서 보게 됐다. 국립중앙도서관(관장 임원선)이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맞아 1일부터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도서관 고전운영실에서 특별전 ‘전통의약을 생활 속으로’를 개최한다. 구암 허준(龜巖 許浚·1539∼1615)이 지은 동의보감 25권 25책은 1613년 발간된 뒤 중국과 일본에서도 지속적으로 주목받았다. 일본의 경우 1724년 당시 일본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의학의 표준을 얻기 위해’ 막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동의보감을 펴냈다. 중국은 이보다 다소 늦은 1766년 처음으로 발간했다. 중국판본 서문에는 “천하의 보물을 마땅히 천하와 더불어 나누고자” 책을 출간한다고 적혀 있다. 중국에서는 이후 30종이 넘는 다양한 판본의 동의보감이 간행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1724년 일본판, 1766년 중국판을 모두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전시의 백미는 보물 제1085-1호로 지정된 동의보감 초판본. 허준이 1610년 편찬한 뒤 1613년 내의원에서 목활자로 간행한 것으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에서 제공한 동의보감 영문판(2008년)과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서(2009년) 등 관련 자료도 선보인다. 10월 31일까지. 02-590-0678, www.nl.go.kr/nl/antique/list.jsp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누구나 마감일이 코앞에 닥쳤거나 중대한 위기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평상시와는 달리,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해 재빠르고 탁월하게 문제를 해결했던 경험을 한번쯤은 하게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마감일이 지나가거나 위기가 해결되고 나면 이러한 힘과 높은 창의성은 대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전작 ‘권력의 법칙’ ‘전쟁의 기술’을 통해 권력의 본질과 경쟁의 전략을 탐구해 현대적으로 적용하는 데 주력해 왔던 저자는 바로 그 사라져 버리는 힘에 주목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특정 순간에 잠시 경험하는 그 힘을, 역사적으로 ‘천재’에 해당하는 거장들은 자유자재로 끌어내 탁월함을 발휘한다는 점에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마스터리(mastery·마스터+미스터리)’라고 명명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찰스 다윈, 토머스 에디슨 같은 역사적 위인들뿐만 아니다.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와 건축가, 로봇공학자, 예술가도 상황은 엇비슷했다. ‘마스터리의 법칙’은 바로 그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거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책이다. 사람들은 흔히 다빈치 같은 이들의 업적을 설명할 때 “타고난 천재니까”라고 결론짓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천재는 결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만 천재로 간주되는 사람은 자신의 기질에 맞는 ‘인생의 과업’을 찾아낸다. 또 이상적인 수련 방식에 따라 고마운 ‘스승’ 밑에서 오랜 시간 엄청난 집중력으로 과업을 수행한 결과 ‘귀신같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성과를 내게 됐을 뿐이다. 음악의 천재로 알려진 모차르트도 마찬가지다. 그가 진정으로 독창적인 중요한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작곡을 시작한 지 10년이 훨씬 넘어서였다는 것이 고전음악 비평가의 의견이다. 책에서는 그런 과정들을 평이한 문체로 쉽게 설명하면서도, 거장으로 가는 각각의 단계를 여러 가지 사례와 예증을 통해 성실하게 뒷받침해 놓았다. 작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구성원에게는 어떤 의미에서건 ‘거장’ 혹은 ‘마스터’가 되는 것이 중요해졌다. 평범한 빵이 아니라 ‘거장의 숨결이 스며든 빵’이어야 비싸더라도 팔리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남과 다른 창조적 발상으로 대량생산 시대의 상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야만 소비자와 고객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기에 ‘마스터리의 법칙’에 더 주목해야 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도, 모든 평범한 사람 역시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선결되어야 할 키포인트는 바로 ‘인생의 과업을 찾는 것’이다. 축구선수에 맞는 활동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책상 앞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는 일을 택한다면 잘될 턱이 없다. 음악보다는 회화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엄마의 좌절된 꿈 때문에 죽어라 피아노를 치게 한다면 그 아이가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될 리 만무하다. 저자는 인생의 과업을 찾기 위해 ‘근원적 기질로 돌아가라’고 조언한다. 어린 시절부터 말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것에 곤란을 겪었던 마사 그레이엄은 몸을 통해 표현하는 춤을 만난 뒤 ‘물 만난 물고기’가 됐다. 마스터리의 길은 바로 그때부터 펼쳐지기 시작한다. 희망적인 것은, 과업을 찾는 일은 현재의 나이와 무관하다는 점이다. 언제든 내 안에 늘 잠복해 있는 기질과 제대로 만나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았던 고 박완서 선생의 등단 시기도 40대였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흙 속, 저 땅 밑에서는 분명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인생의 과업과 연결된 끈을 놓지 마라. 그 끈을 놓지 않는다면 무의식적으로라도 삶에서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마스터리가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오랜 시간 당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일해 왔는가. 그렇다면 이제 활짝 만개할 일만 남았다. 우리 모두는 마스터리의 법칙 속에서 살고 있다.유영만 한양대 교수·지식생태학자}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오랜 명성을 쌓아왔고 지금은 문화재청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저자가 우리나라 고분벽화에 대한 그간의 연구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옛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를 뜻하는 고분벽화는 회화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장례문화 같은 당대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연구 가치가 크다는 게 저자의 설명.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대 벽화부터 일반인에겐 낯선 고려와 조선시대 고분벽화까지 두루 살폈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을 꼼꼼히 짚은 대목이 눈길을 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람은 참 각양각색이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어찌나 서로들 제각각인지. 분명 이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명제다 싶은데도 누군가는 고개를 젓는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없다. 이는 ‘가족이나 친구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이 마지막 문장엔 분명한 메시지가 하나 숨겨져 있다. 가족 친구 지인…. 이들마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은 최소한 타인보다는 비슷하거나 공유하는 게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인간은 ‘관계의 정도’에 따라 관심도와 신뢰도가 차이날 수밖에 없다. 왜 아니겠나. 친구 셋이 길을 가도 편이 갈리는 게 인간사의 현실인데. ‘편애하는 인간’은 이 대목에 주목한 책이다. 한마디로 인간에게 편애란 본성 혹은 본능이니 이를 억누르려고 하지 말자는 얘기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그거야 똑같은 손이니까 그런 거지. 자식도 덜 예쁜 놈, 더 미운 놈이 있다. 차별대우야 안 되겠지만 마음이 그리 가는 걸 어쩌나. 실은 사랑이란 감정도 일종의 차별이다. 한 상대를 다른 이보다 편애하는 거니까. 다행스러운 점은 보통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저자에 따르면 불편부당을 실천한 성자나 위인조차도 편애로부터 자유롭진 않았다. 예수도 열두 제자 가운데 유독 요한에게 애정을 쏟았고, 석가모니도 제자 아난다 존자를 특별히 아꼈다. 간디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면 특별히 더 사랑하는 사람은 단념해야 한다”고 설파했건만, 유대인 건축가 헤르만 칼렌바흐와의 우정은 솔직히 ‘단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러니 우리네 평범한 인간들은 맘 놓고 편애 좀 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거대한 장벽이 등장한다. 바로 공정(fairness)이다. 사실 공정이란 개념은 입장에 따라 그 의미가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공평(equality)’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지만, 어떤 이들은 ‘능력에 따른 보상’을 공정이라 부른다. 공리주의자들은 절대 다수의 행복을 공정하다고 주장하며, 경쟁사회를 선호한다면 동등한 룰을 적용해 성과에 따른 차별이 주어지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데 그 뜻이 무엇이건 간에 공정은 편애와는 대치할 수밖에 없다. 출발선에서건 도착점에서건 편애가 개입하면, 그 게임은 편애의 혜택을 보지 못한 이들에겐 어쨌든 불공정할 테니까. 이런 위험 소지가 있음에도 저자가 편애를 편드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대사회가 공정에 집착하다가 중요한 것을 잃고 있다고 본다. 저자의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일 때 경주대회에 나가서 우승 리본을 받아왔다. 흐뭇해진 그는 아이의 1등을 마구 치켜세웠는데 아이는 오히려 짜증을 내더란다. 왜냐면 반 전체가 모두 ‘우승’했기 때문이다. 학교는 등수를 매기지 않고 참가자 전원에게 리본을 줬다. 하지만 그게 과연 공정한 걸까. 뭔가를 잘한 아이를 더 칭찬해주는 게 정녕 편애일까. 저자는 오히려 현대 서구사회는 고대 동양이 지닌 ‘편애의 미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타인보다 가족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다. 신뢰를 쌓은 벗에게 더 베풀려는 마음도 나쁘게 볼 게 아니다. 편애가 넘치면 문제가 발생하지만, 경직된 공정 역시 과부하가 걸린다.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는 게 저자의 조언이다. 꽤 재밌다. 다양한 역사와 철학, 과학을 넘나드는데도 문장이 편안하고 간명해 읽을 맛이 난다. 편애나 공정을 새롭게 접근하는 시각도 참신하다. 다만 저자도 우려했듯 이런 주장은 ‘꼬인 인간들’ 손에 들어가면 오용될 여지가 많다. 저자는 족벌사회의 장점도 배워야 한다지만, 그 시스템 아래 오랫동안 신음했던 이들이라면 펄쩍 뛸 소리다. 평등 강박에 빠져서도 안 되겠지만, ‘편애의 부조리’가 만드는 피해도 경계해야 한다.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고, 자연스럽다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기에.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난봄 8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가까이 보이는 나무에 까치가 터를 잡았습니다. 베란다 창을 통해 까치가 집 짓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게 되었죠. 잠시 안 보인다 싶으면 여지없이 나뭇가지를 물고 나타납니다. 그러기를 하루에도 수십 차례, 여러 날을 반복합니다. 지켜보기에도 지칠 만한 시간을 까치는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절로 격려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이고 까치야, 힘들겠다. 애쓴다, 애쓴다.” 이 책을 읽으니 그때 그 마음이 기억납니다. 작가는 그런 마음이 더 클 것입니다. 오래도록 새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어 왔으니 말이죠. 이 책은 그 관찰 기록과 사진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한 것입니다. 작가는 새 사진을 찍기 위해 위장막을 쳐 놓고 하루 일고여덟 시간을 꼼짝없이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시간 동안 새들은 쉼 없이 날아다니며 둥지를 만들고 새끼를 키워내는 일을 해냅니다. 지켜보는 사람에게 그건 경이입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저렇게 열심히 할 수 있을까요. 저절로 새들에게 말을 걸게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새들과 나누던 말이 동화가 되어 우리 앞에 나왔습니다. 동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이야기 흐름에 딱 맞게 배치된 사진과 그림입니다. 새끼를 지키느라 잔뜩 긴장한 어미 호랑지빠귀의 눈동자에 힘이 실려 있습니다. 새끼 똥을 받아내려 준비하는 어미의 눈동자는 우리네 엄마의 눈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리를 다쳐 나머지 식구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눈밭에 남겨진 아비 호랑지빠귀의 쓸쓸함도 보입니다. 사진은 섬세하고 그림은 꼼꼼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새들도 고민이 많습니다. 새 둥지 위치도 고민입니다. 높은 가지에 지으면 까치가 무섭고, 낮은 가지에 지으면 고양이나 뱀이 무섭습니다. 위협이 감지되었을 때 공격을 할 것인가, 눈에 띄지 않게 할 것인가도 선택을 해야 합니다. 새들 전체의 비상식량이 될 만한 나무열매를 겨울이 끝날 때까지 남겨 놓는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읽고 나면 무심히 듣던 새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책입니다. 그들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 보아야 아름답습니다. 새들도 그러합니다.김혜원 어린이도서평론가}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 이런 명칭이 어떤 이는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단원 김홍도(1745∼?)의 ‘서당’ ‘씨름’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조선 풍속화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이 그림들을 포함해 모두 25점이 담긴 화첩이 단원풍속도첩이다. 보물 제527호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화첩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풍속화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진본이다, 위작이다, 모사본이다 오랫동안 학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특히 지난해 강관식 한성대 교수(56)가 “25점 모두 단원이 그린 게 아니다”는 논문을 발표하며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런데 최근 이에 대한 반론이 다시 나오면서 또 한번 단원풍속도첩이 주목받고 있다. 이중희 계명대 교수(58)는 한국동양예술학회에 ‘단원풍속화첩 진위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고 “화첩은 모두 단원이 그렸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을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했다.○ 주제의식 담은 단원의 만년 걸작 이중희 교수의 논문은 학계의 전반적 의견과 맥을 같이한다. 보물로 지정된 화첩은 당연히 진품이라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의 천주현 학예연구사(43)도 지난해 화첩의 재질과 필치를 분석해 단원 한 사람이 그렸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교수는 “이 화첩은 단원이 만년에 풍속 표현을 집대성하려는 의도 아래 실내에서 주도면밀하게 구성하고 배치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현장성이 떨어져 손의 방향을 틀리게 그리는 사소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생동감 넘치던 젊은 날보다 묘사에 힘이 떨어지는 것도 시기적 요인으로 분석했다.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단원의 말년 작으로 한정짓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본질을 적확하게 짚어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런 약점에 사로잡혀 이 화첩의 ‘시대적 예술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이 교수는 주장한다. 18세기 유행한 새로운 형태의 씨름문화를 담은 ‘씨름’, 일하는 평민들 옆에 버젓이 드러누운 양반을 통해 계급사회를 보여준 ‘타작’, 서민 아이들도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 당대 시대상을 담은 ‘서당’에는 대가가 아니면 힘든 성취가 담겼다는 설명이다. 또 이 교수는 “몇몇 작품이 여러 다른 화가가 섞여 그린 것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모필(毛筆·짐승털 붓)과 죽필(竹筆·대나무를 쪼개서 쓰는 붓)의 병용을 오해한 탓”이라고 말했다.○ 단원은 실수를 허용치 않는 천재 화가 강 교수는 “이 교수의 논문을 봤다. 건강한 토론을 기대한다”면서도 “이 교수의 주장엔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진작을 보면 단원은 매우 세밀한 묘사조차 정확하게 그려내는 능소능대(能小能大)한 천재인데, 유독 화첩에서만 실수가 잦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란 설명이다. 실제로 단원풍속도첩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이들이 가장 문제 삼는 대목이다. 화첩 안에서도 대표작으로 꼽히는 ‘서당’ ‘씨름’ ‘무동’조차 어깨가 어색하게 과장됐거나 손 방향이 틀린 부분이 나온다. 오른손으로 땅을 짚고 있는 씨름 구경꾼은 엄지손가락이 밖으로 향해야 하는데 안으로 향해 있다. 강 교수는 “심지어 나룻배는 화풍도 균일하지 않고 필치도 매우 떨어져 진짜 단원이 그렸다면 스스로 찢어버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작품은 오히려 긍재 김득신(1754∼1822)의 영향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봤다. 이 때문에 강 교수는 “화첩은 단원의 후학인 도화서 화원들이 선배들의 훌륭한 작품을 교본으로 삼기 위해 만든 모사본”이라고 평가했다. 단원풍속도첩도 ‘단원류(流) 풍속도첩’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부는 진품이고 나머지는 위작 대척점에 선 두 입장과 달리 화첩은 진품도 있으나 상당수 위조품이 섞여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동천 전 명지대 교수(48)는 2008년부터 “서당과 무동, 씨름, 활쏘기, 대장간, 서화감상 6점은 진짜고 나머지 19점은 두 명 이상의 위조자가 그린 가짜”라고 주장해왔다. 이 전 교수는 서당에서 학동의 어깨가 과장된 것은 단원 그림의 특징이라고 판단했다. 다른 작품에도 이런 과장된 어깨는 여러 차례 등장한다는 주장이다. 손 방향이 잘못된 것은 거침없이 빠르게 그려나가는 스타일인 단원의 실수로 시대적 한계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머지 작품은 도장을 위조했거나 테두리 필선이 짜깁기된 위작이라고 봤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8세기 예원(藝苑·예술계)의 총수’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1713∼1791) 특별전이 25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에서 문을 열었다. 올해 탄생 300주년을 맞는 표암은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유명한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빼어난 실력)’. 여덟 살에 시를 지을 만큼 재기가 출중했고, 글씨는 청나라 건륭제가 탄복할 정도였다. 그림은 한 화풍에 집착하지 않았고, 서양화법을 수용해 원근법과 채색이 뛰어난 ‘송도기행첩’은 당대에도 큰 화제였다. 이번 특별전 ‘표암 강세황-시대를 앞서간 예술혼’에는 그의 대표작들이 거의 망라돼 볼거리가 넘친다. 전북 부안 우금암을 그린 ‘우금암도’와 심사정 허필 최북 김홍도 김덕형 등 당대 거물 화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장면을 담은 ‘균와아집도’는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보물 제590-1호인 강세황의 ‘자화상’ 등 보물 6점을 포함해 총 103점의 유물이 전시됐다. 다음 달 5일 박물관 대강당에선 기념 학술심포지엄도 개최된다. 전시는 8월 25일까지. 무료. 02-2077-90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로봇, 하면 뭐가 떠오를까. 물론 사람마다 세대마다 답이 다르겠지만 누군가의 머릿속엔 옛일이 떠오르지 않을까. 로보트 태권V부터 찌빠 짱가 터미네이터 메칸더V, 요즘엔 로보트 폴리까지…. 재밌는 것은 로봇이 ‘과거의 흔적’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는 점이다. 이런 수준의 로봇은 분명 아직 도달한 적도 없는 미래 산물인데도. ‘보일러플레이트’와 ‘어덜트 파크’는 그런 면에서 닮은 대목이 많다. 단지 로봇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로봇이 추억을 잇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물론 그 추억이란 것은 개인이나 집단의 역사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와 연결된 인간 본성을 일깨우는(혹은 마주하게 만드는) 게 로봇이라는 점에서 두 책은 묘한 연결고리를 지녔다. 먼저 ‘어덜트 파크’. 굳이 번역하면 ‘성인 놀이터’쯤 되는 이 흑백 만화는 한마디로 외롭고 쓸쓸한 어른들이 ‘대화 로봇’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는 설정이다. 현대사회에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음 터놓을 상대가 얼마나 부족한지 다 아는 터에 ‘로봇이 인간보다 낫다’는 뻔한 결론이라면 그다지 울림도 없을 것이다. 동물이 사람보다 낫다는 말, 지겹게 들어 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책은 왜 인간이 로봇보다 못나져 가는지 그 ‘과정’에 주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삶이란 경험이 만드는 족쇄 탓이다. 그저 물질이나 명예의 달콤함에 젖어버린 게 아니다. 켜켜이 쌓아온 인생이 실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타인의 얘기를 듣지 않는 데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떠나보낸 아내에게 사랑을 증명하고파 장기를 파는 사내, 5년 동안 돌보던 식물인간 부인을 끝내 안락사시킨(정확하게는 팔아버린) 남편….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질곡에 허우적대는 피해자지만, 또한 자기 틀에 갇혀 상처 주고 상처 받기를 반복하는 존재다. 그러니 감정에 기대지 않기에 편견이 없는 로봇이 인간보다 나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뜻에서 만화 끝자락에 ‘인간의 기억이 이식된’ 로봇의 마지막 대사는 여운이 짙다. “하여간 인간들은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어. 모든 걸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린다니깐….” 정통만화인 ‘어덜트 파크’와 달리 ‘보일러플레이트’는 장르 구분이 쉽지 않다. 일종의 팩션(실화에 바탕을 둔 소설)인데, 19세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한 과학자가 발명한 로봇이 미국의 역사 현장에서 활동했다는 줄거리다. 숱한 당시 사진과 그림에 로봇을 합성해 마치 진짜 존재한 증거인 것처럼 실어 놓았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이 책을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기계 인간 버전”이라고 부른 게 수긍이 간다. 하지만 ‘보일러플레이트’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영화가 미국의 ‘찬란한’ 역사를 조명하며 그들의 질리지도 않는 자기애 표출에 힘썼다면, 이 책은 그 대단한 발걸음 아래 무너지고 쓰러진 이들을 주목한다. ‘미군의 가혹한 공격’이었던 신미양요로 쓰러져간 조선인들부터 역시 미국과 서구열강의 무력에 희생된 하와이와 중국, 아프리카 백성들. 또한 자기네가 자랑하는 전쟁 승리는 실은 백인이 경멸했던 흑인으로 구성된 ‘버펄로 부대’(피부색이 닮았다고 붙인 별명)의 공이 지대했다. 경제발전이라는 축복의 뒤안길에는 채 피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아동들의 노동착취가 피처럼 배어 있었다. 보일러플레이트가 지켜본 현장은 누구의 시선처럼 결코 아름다운 아메리카의 번영이 아니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가진 자들은 제 욕심 채우기에 급급했고, 무명씨(無名氏)의 죽음과 희생은 역사에 기록조차 되지 않았다. 저자들은 역사가 그 많은 공적을 세운 로봇을 기억하지 않는 근거도 여기에서 찾는다. 그는 가혹한 쟁취자도 추악한 승리자도 아니었기에, 그저 사라져갔다. 어쩌면 ‘보일러플레이트’건 ‘어덜트 파크’건 로봇들은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조물주인데 왜 이리도 결함투성이일까. 해답은 분명한데 왜 허구한 날 오답만 붙들고 머리를 쥐어짤까. 로봇에게 당부한다. 그 대답 찾으려 하지 마라. 그런 거 고민하면 너희도 인간처럼 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연작 그림책 ‘일과 사람’ 가운데 열세 번째 책입니다. 동이 할머니가 바로 ‘순분 씨’입니다. 할머니 혼자 채소가게를 꾸리기엔 힘들어 보인다고요? 물론 동이네 부모님도 함께하십니다. 새벽같이 도매시장에서 채소를 사와 수십 년 알고 지낸 동네 사람들에게 매일 신선한 채소들을 선보입니다. 순분 씨네 채소가게에는 단골이 많습니다. 몸에 좋고 싱싱한 채소를 사가는 손님들은 이런 가게가 있어 행복합니다. 그런 손님들과 정담을 나누며 환하게 웃는 순분 씨도 행복합니다. 성실하고 순하게 채소가게를 운영하는 할머니와 아빠, 엄마를 보며 자라는 동이가 행복한 건 말할 것도 없겠지요. 오랫동안 도매시장에서 장사를 한 부모님을 보고 자란 작가에게 시장은 집보다 더 편안했던 모양입니다. 아기자기하게 그려낸 시장 구석구석이 생생하고 평화롭습니다. 시장이 열리는 페이지를 읽다 보면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또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시장을 돌아다닌 기억을, 그 안에서 일하고 먹고 자고 놀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따뜻하고 유쾌한 풍경으로 살려냈습니다. 중국집 주방장과 소방관 우체부 한의사 농부 교사 어부 뮤지컬배우…. 2010년 ‘짜장면 더 주세요’로 첫발을 내디딘 연작 ‘일과 사람’은 늘 우리 곁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들려줍니다. 작가들은 저마다 직접 겪었거나 오랫동안 주변을 맴돌며 취재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그런 만큼 책 한권 한권이 담고 있는 정보가 탄탄합니다. 풍성한 정보를 푸근한 이야기에 실어 세심하고 영리하게 편집된 ‘일과 사람’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깊은 고민과 정성에 감탄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짜장면을 먹을 때면 강희 아버지의 손을 기억하고, 편지를 받을 때면 오토바이 소리를 듣고, 한약이 음식이라는 걸 알게 되며, 순분 씨네 채소가게와 똑 닮은 우리 마을 채소가게를 웃으며 기웃거릴 수 있게 해줍니다. 애초에 20권으로 기획한 이 시리즈가 세상 모든 일하는 사람의 모습을 다 알려줄 때까지 계속 나왔으면 좋겠습니다.김혜진 어린이도서평론가}
“백성을 두루 살핀 어진 공직자이니 1년을 더 유임시켜 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참으로 떠나보내기 싫었나 보다. 한 땀 한 땀 자수 놓은 이름이 모두 2091명. 어른이 양팔을 벌려도 넘치는 양산에 빼곡하니 이름들이 새겨졌다. 행여 가시더라도 마음 담은 일산(日傘) 아래 땡볕이라도 피하라는 뜻이었을까. 흔한 문양 하나 없지만 ‘만인산(萬人傘)’의 자태는 참으로 고왔다. 26일부터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에서 열리는 ‘이동영 기증 만인산 특별전’은 이처럼 1878∼1879년 평안도 압록강 인근 초산도호부사로 재직하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만기(李晩耆) 선생의 유품 60여 점을 전시한다.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한 선정을 펼친 그를 위해 지역민들은 생사당(生祠堂)까지 세웠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본인은 이를 겸양해 이후 철거했다는 미담도 전해진다. 다양한 유품을 선보이지만 역시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만인산이다. 정부관리가 행렬에 나설 때 의장으로 쓰는 일산에 촘촘히 이름들을 수놓은 만인산은 그 뜻도 귀하지만 온전한 형태로 남은 게 몇 없다. 2009년 KBS ‘진품명품 쇼’에서 이 만인산이 1억2500만 원이라는 고가의 감정평가를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만인산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초산실기’와 이만기 선생이 초산부사로 임명될 때 받은 임금의 교지, 1852년 과거 급제 뒤 받은 홍패(紅牌) 등도 함께 전시된다. 이번 특별전은 이만기 선생의 고손자인 이동영 동아프린테크 고문(77)의 기증 덕분에 성사됐다. 그간 고려대 안동대 박물관 등에도 여러 차례 조상 유품을 내놓은 이 고문은 민속박물관에 유품 946점을 기증했다. 속되게 값어치를 따져도 수억 원 이상이다. 이 고문은 “조상 유품을 장롱에 넣어두고 혼자 볼 게 아니라 함께 공유해 문화재 사료 연구에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9월 23일까지. 02-3704-3114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19일 난중일기와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새로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에는 인류 역사를 아우르는 다양한 기록물이 포함돼 있다. 제11차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는 54개국에서 신청한 유산 84건을 심사해 54건의 등재를 결정했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카를 마르크스의 메모가 달린 ‘자본론’ 초판(사진),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친필 초안을 함께 신청해 등재 목록에 올렸다. 유네스코는 홈페이지에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9세기 저작물로 19, 20세기 전 지구적 사회변혁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볼리비아와 쿠바가 공동 신청한 ‘체 게바라의 삶과 작품들’도 등재됐다. 록 스타에 버금가는 신드롬을 일으켰던 혁명의 아이콘이 직접 쓴 글과 그의 일생과 관련된 기록물 1000여 점이 포함됐다.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코 다가마가 1497∼99년 처음으로 인도를 항해하며 남긴 기록물,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유명한 아르메니아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의 작곡 노트, 1967년 시작돼 세계 최대의 음악 축제로 자리 잡은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관련 자료도 기록유산으로 결정됐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2개씩 신청했던 중국과 일본도 모두 등재에 성공했다. 중국은 원(元) 왕조의 티베트 기록물과 중국 이민자 서신 및 송금 기록물을, 일본은 미치나가 일가의 일기 원본과 게이조 시대 유럽 사절단 기록물(스페인과 공동 신청)을 목록에 올렸다. 세계기록유산은 아시아에선 한국이 11건으로 가장 많이 등재됐고, 중국 일본은 각각 9건, 3건으로 늘었다. 세계적으론 독일이 모두 17건으로 가장 많이 등재하고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