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영

김유영 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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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유영 부본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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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10-22~2024-11-21
칼럼100%
  • [데스크 진단]도둑맞은 휴가를 찾아서

    최근 강원 양양은 ‘서퍼들의 성지(聖地)’로 통한다. 겨울인데도 서핑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바다 온도는 10도 안팎으로 육지만큼 춥지 않다. 이들은 “파도를 탈 때 하늘을 날아오르는 짜릿한 기분으로 서핑한다”고 말한다. 양양의 해변은 횟집과 모텔 일색인 여느 해변과 다르다. 크래프트 맥줏집과 커피 전문점, 특색 있는 게스트하우스들이 있다. 날씨가 좋으면 버스킹(야외공연)이나 클럽 디제잉 파티가 열린다. 굳이 서핑을 안 해도 이국적인 풍광을 즐기려는 젊은이들까지 몰려든다. 국내 여행지의 잠재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근 중국인 단체 관광객(유커)이 급감하고 내수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국내 여행을 활성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해외여행 등으로 출국하는 사람들이 매년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국내 여행지가 찬밥 신세가 되고 있지만, 눈을 돌려 보면 국내에도 여행지로 재발견할 만한 곳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국내 여행지로 내국인을 유도해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내수도 활성화하자는 취지다. 문제는 휴식과 휴가에 유독 인색한 우리 문화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국내 직장인은 연간 14.2일의 유급휴가가 있지만 이 중 8.6일만 사용할 뿐이다. 글로벌 여행업체인 익스피디아가 총 28개국을 대상으로 휴가 사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 한국의 휴가일수는 세계 직장인 연평균(20일)의 절반에도 못 미쳐 꼴찌를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휴가를 마음껏 사용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국내 여행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우리 국민이 국내 여행을 안 가는 이유를 지난해 설문한 결과 전체의 48.5%는 ‘시간과 여유가 부족해서’라고 답했다. 쉬는 날에는 피로를 풀기에 바쁘지 여행까지 떠날 엄두를 못 낸다. 연차를 틈틈이 쓸 수 있는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행을 가는 건 무리다. 최근 국내 기업에서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한 친구 A가 떠오른다. 그는 주말마다 ‘소도시 여행’을 떠난다. 이전 회사에서 야근은 일상이었고 주말 출근도 허다했다. 반면 새 회사에선 연차를 모두 쓰는 것은 물론이고 당해연도에 쓰지 못한 연차는 이듬해 5월까지 쓸 수 있어서 ‘휴식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는 주말 앞뒤로 월·금요일에 연차를 써서 사나흘짜리 휴가를 만들어 소도시 곳곳을 다니게 됐다. 일제강점기 개항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북 군산에서는 군산세관, 일본식 적산가옥 등 근대식 가옥과 영화 촬영지 등을 두루 살펴봤다. 다도해로 유명한 경남 통영에서는 비진도와 욕지도 등 섬 여행을 즐겼고 멍게와 굴 등 미식 여행을 했다. 이처럼 매월 한두 차례씩 휴일과 연계해서 연차를 사용하게 하거나 연차를 모두 소진할 수 있는 문화가 확산되지 않으면 국내 여행 활성화는 자리 잡기 힘들 것이다. 설과 어린이날, 추석만 지정되어 있는 대체 휴일제를 다른 공휴일로 확산시키는 것도 생각해 봄직하다. 물론 국내 여행지도 각각의 특성을 살려 매력적으로 바뀌고 가격 경쟁력이 갖춰야 한다. ‘과로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쉴 권리가 절실하다. 성실과 근면만 강조하던 시기는 지났다. 잘 쉬어야 일도 잘하고 구성원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등 삶이 풍성해진다. 빼앗긴 휴가를 돌려받기만 해도 국내 여행 활성화는 부차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김유영 경제부 차장 abc@donga.com}

    • 201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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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흉물로 방치된 도심 빈집, 공부방·주말농장·주차장으로 바뀐다

    도심의 흉물로 방치된 빈집이 주차장이나 공부방 등이 주민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시설로 바뀐다. 서울 강남3구(강남 서초 송파구) 등 입지가 우수한 지역과 대학 내에도 행복주택이 공급된다. 국토교통부는 8일 청년, 신혼부부, 노년층 등 생애주기별 맞춤형 주택 공급을 강화하는 내용의 ‘2017 주거종합계획’을 발표했다. 국토부는 올해 공공임대주택 12만 채를 공급하고, 행복주택 4만8000채를 짓는 사업을 승인할 계획이다. 행복주택의 경우 서울 강남3구 등 입지가 우수한 지역과 대학 안에도 공급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대학은 국립대 1, 2곳이 시범 사업지로 검토되고 있다. 뉴스테이는 올해 6만1000채의 사업 부지를 확보한다. 이렇게 되면 행복주택과 뉴스테이를 각각 15만 채씩 총 30만 채 공급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도심 빈집 문제 해결을 위해 상반기 중 빈집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통계 시스템을 구축한다. 지난달 공포된 ‘빈집 및 소규모주택 정비에 관한 특례법’이 내년 2월 시행되면 하위 법령을 제정해 빈집에 대한 정비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빈집은 공부방이나 주말농장, 저렴한 임대주택 등으로 공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공공임대주택은 올해 건설임대 7만 채, 매입·전세임대 5만 채 등 총 12만 채가 공급된다. 올해 공공임대를 비롯해 주거급여, 전월세 자금 지원 등 주거지원을 받는 가구는 총 111만 채에 이른다고 국토부는 설명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 201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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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진단]‘칼퇴’가 로망이 아니려면

    정부가 23일 내수 활성화 방안을 발표한 뒤 냉소 섞인 반응이 쏟아졌다.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 4시 조기 퇴근을 유도해 소비를 늘리겠다는 대목에서였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0분씩 더 근무하고 금요일에 2시간 일찍 퇴근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다. 당장 현장에서는 ‘칼퇴(정시 퇴근)도 힘든데 조기 퇴근이라니’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왔다. 직장인이라면 누군들 칼퇴 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국에는 여전히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인의 근로 시간은 거의 선두(2위)를 달리면서도 생산성은 하위권(22위)에 그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 드물게 칼퇴가 잘 지켜지는 IBK기업은행도 칼퇴를 정착시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이곳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인력이 줄어들어 매월 마감 때면 야근이 잦아지자 2000년대 초반부터 정시 퇴근 캠페인을 벌였다. 본점에선 퇴근 시간이 되면 노조가 확성기를 들고 ‘퇴근하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결국 2009년에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오후 7시가 되면 업무용 PC를 강제적으로 꺼버리는 것이었다. 야근하려면 부서장(또는 지점장)의 사전 결재를 받게 했다. 지점의 평균 퇴근 시간은 부서장의 성과 평가에 반영했다. 퇴근 시간은 데드라인(deadline)이 됐다. 그야말로 넘기면 죽는다는 시간이 생기니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부서장부터 나서서 칼퇴를 독려했다. 아침마다 한 시간 넘게 늘어지던 회의는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끝냈다. 야전사령부처럼 헤쳐 모이는 식의 ‘스탠딩 회의’도 생겨났다. 상부에 보여주기 위한 보고나 불필요한 보고서 작성이 사라졌다. 어차피 다들 늦게 퇴근하니 낮에 빈둥거리다가 밤에 일하거나 상사 눈치를 보며 자리를 지키는 야근이 없어졌다. PC를 꺼버리기 전 오후 9시를 넘겼던 평균 퇴근 시간은 지난해 오후 6시 42분으로 당겨졌다. 이렇듯 퇴근 시간을 당기는 건 정부가 급조한 대책으로 기업을 계도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당위를 주장하는 건 쉽지만 실행은 또 다른 문제다. 직원들을 제때 퇴근시키겠다는 강한 의지와 평가 등 이를 현실로 만들 체계적인 제도가 없다면 이뤄지기 어렵다. 구성원 간에 ‘결과 지향적인(result-oriented) 문화’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더욱이 이번 대책이 내수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면 정부의 문제 진단이 잘못됐다. 어렵사리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킨다 한들 그 대상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직원처럼 일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고용이 안정됐고 급여 수준도 높은 편이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정작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쓸 돈이 없는 게 현실이다. 1월 실업자가 100만9000명이나 되고, 일자리를 구해도 비정규직이라면 이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53.5%·2016년)에 그친다. 또 설령 직업이 있어도 가계 빚더미에 시달려 돈 쓸 여유가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난해 가계부채는 1344조 원에 이른다. 이번 대책을 두고 ‘공무원들이 회사 생활을 알기나 하는 것이냐’부터 ‘쓸 돈도 없는데 놀면서 돈 쓰라는 말이냐’는 비난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진짜 문제를 간파하지 못한 칼퇴 정책은 ‘로망’으로 남고, 정부의 내수 활성화 대책은 또다시 헛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김유영 경제부 차장 abc@donga.com}

    • 2017-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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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폐가의 아름다운 환생’ 꽃피는 헌 집 재건축

    #.1'폐가의 아름다운 환생'꽃피는 헌 집 재건축#.2인천 중구 신포동과 차이나타운 사이에는흉물스러운 건물들이 꽤 있습니다.아예 비어 있는 건물도 많죠.페인트칠이 벗겨진 큰 간판들만이한때 잘나갔던 이 지역의 영광을 보여줄 뿐입니다. #.3그런데 최근 이 동네 후미진 골목에'핫 플레이스'가 생겼습니다.#.42층짜리 아담한 석조 건물로 안에 들어서면 돌 벽과 서까래, 지붕 등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죠.바로 카페 '아카이브 빙고'입니다.#.51920~50년대 얼음창고로 쓰였던 이곳을건축가 이의중 씨(39)가 개조해 운영하고 있죠.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한 그는국토연구원에서 오래된 건축물 관련 업무를 하다이곳을 만들었습니다.#.6크기는 50m²도 안 되지만스탠딩 클럽파티나 작은 음악회주민들의 소모임, 문화계 인사가 모이는공간으로 자리 잡았죠. #.7이처럼 요즘 버려진 건물에 시간의 흔적을 담아내멋지게 부활하는 건축물이 잇따라 생겨납니다.서울의 선유도공원처럼 낡은 정수장을 공원으로 만드는 등 과거에는 공공부문이 주도해 이뤄졌던 일들이 민간으로 확산되고 있는 거죠.#.8특히 빈집이 많은 지방에서'폐가의 환생' 작업이 활발한데요.경남 통영 미륵산 자락의 북스테이인 '봄날의 집'이 대표적입니다.주민의 고령화 등으로 빈집이 많아지자지역의 건축가 강용상 씨가 폐가 개조작업에 나섰죠.#.9그는 방 하나는 골목으로 문을 터서 작은 서점으로 꾸몄고통영 문화를 주제로 각 방을 꾸몄습니다.#.10통영 바다 색깔로 꾸민 '화가의 방',통영 나전 장인이 만든 장식물로 꾸민 '장인의 방',박경리 김춘수 유치환 등 통영 문인들을 소개하는 '작가의 방' 등이 대표적이죠.이색 체험을 하려는 여행객을 발길도 잦다고 하네요.#.11버려진 시설물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곳도 많답니다.서울 청량리 청과물시장에 들어서면 시장 건물 2층에 뜬금없는 장소가 나옵니다.바로 수제맥주와 푸드코트, 루프트톱 캠핑장 등을 갖춘 '상생장'입니다.#.12상인들이 20년간 창고로 쓰던 곳을 개조한 공간입니다중장년층으로 붐볐던 시장에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늘었고, 외국인 교환학생들도 방문하는 명소가 됐습니다.#.13인구 구조나 건축물 공급 등의 측면에서 볼 때정말 반길만한 현상입니다.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빈집 수만 해도 약 107만 채에 이르죠.#.14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 짓고 높이 올리는개발 시대의 건축 논리가 무조건 통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오히려 오래된 것의 멋과 가치를 담은 공간이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죠.#.15유럽은 백년 넘은 건축물이 건재하고개별 건물마다 특유의 개성을 뽐냅니다.한국에서도 역사성과 지역성이 담긴 건축물이각광받는 시기가 오기를 꿈꿔 봅니다.원본: 김유영 기자 기획·제작: 김재형 기자·김유정 인턴}

    •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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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진단]폐가의 환생

     인천 중구 신포동과 차이나타운 사이에는 흉물스러운 건물들이 꽤 있다. 아예 비어 있는 건물도 적지 않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큰 간판들만이 한때 잘나갔던 지역이란 걸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이 동네 후미진 골목에 지난해 ‘핫 플레이스’가 탄생했다. 2층짜리 아담한 석조 건물로 안에 들어서면 돌 벽과 서까래, 지붕 등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은 1920∼1950년대 얼음 창고로 쓰였던 곳으로 건축가 이의중 씨(39)가 운영하는 ‘아카이브 빙고(氷庫)’라는 카페다. 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한 그는 귀국 후 고급주택을 수리하는 일을 했지만 마뜩하지 않았다. 그러다 국토연구원에서 오래된 건축물 관련 업무를 하며 이곳을 만들었다. 50m²도 안 되지만 스탠딩 클럽파티나 작은 음악회, 주민들의 소모임, 문화계 인사들의 회의가 열린다. 인천 청년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테이블엔 인천 주제의 책들을 쌓아뒀다.  요즘 버려진 건물에 시간의 흔적을 담아내 부활하는 건축물들이 잇따라 생겨나고 있다. 그동안은 서울의 선유도공원처럼 낡은 정수장을 공원으로 만드는 등 공공부문이 주도해 이뤄졌던 일들이 최근에는 민간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특히 빈집이 많은 지방에선 꽤나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경남 통영 미륵산 자락의 북스테이인 ‘봄날의 집’이 대표적이다. 주민의 고령화 등으로 빈집이 많아지자 지역의 건축가 강용상 씨가 폐가 개조작업에 나섰다. 방 하나는 골목으로 문을 터서 작은 서점으로 꾸몄고, 통영 문화를 주제로 각 방을 꾸몄다. 통영 바다 색깔로 꾸민 ‘화가의 방’, 통영 나전 장인이 만든 장식물로 꾸민 ‘장인의 방’,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 등 통영 문인들을 소개하는 ‘작가의 방’ 등이다. 관광지만 둘러보기보다 지역을 체험하려는 여행객들에게 인기를 끌며 동네가 활기를 찾고 있다.  버려진 시설물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곳도 많다. 서울 청량리 청과물시장에 들어서면 시장 건물 2층에 뜬금없는 장소가 나온다. 수제맥주와 푸드코트, 루프트톱 캠핑장 등을 갖춘 ‘상생장’이다. 상인들이 20년간 창고로 쓰던 곳을 개조한 공간이다. 중장년층으로 붐볐던 시장에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늘었고, 영국 일렉트릭 듀오인 ‘혼네’나 외국인 교환학생 등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고 있다. 인구 구조나 건축물 공급 등의 측면에서 볼 때 이런 움직임은 반갑다.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빈집 수만 해도 106만9000채(2015년 말 기준)에 이른다. 기존 건물의 노후화와 인구 고령화 등으로 이런 추세가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도 예외가 아니어서 구도심과 뉴타운 해제 지역 등을 중심으로 빈집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수익성이 좋은 극히 일부 지역에선 재건축·재개발이 가능하겠지만 전국 단위로 버려지는 건축물이 많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일본의 예를 봐도 그렇다. 낡은 것은 밀어버리고 새로 짓고 높이 올리는 개발 시대의 논리가 무조건 통하던 시대는 지났다. 오래된 것의 멋과 가치를 담은 공간에 대한 호응도 높다. 이런 건축물이 사람들에게는 뜻밖의 재미(serendipity)를 안겨 줄 수 있다. 백년 넘은 건축물이 건재를 과시하는 유럽이 꽤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국내에서도 버려진 건축물이 때에 따라서는 귀중한 자원이 될 수 있다. 현재 ‘빈집 및 소규모 주택 정비에 관한 특례법’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기왕이면 지역성과 역사성을 담아 새로운 가치를 담아내는 건축물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김유영 경제부 차장 abc@donga.com}

    •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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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리바바 유일 한국인 디자이너 “중국어 잘 못해요”

     하루 3억 명 이상의 고객이 몰리는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에 유일한 한국인 디자이너가 있다. 알리바바 계열의 알리페이에서 수석 사용자경험(UX) 디자이너로 활약하는 김상훈 씨(35)다. 그는 중국에서 일하지만 중국어에 능통하지도 않고, 디자이너이지만 디자인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다. 최근 방한한 김 씨를 인터뷰했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취미 삼아 컴퓨터 디자인을 했다. 대학에선 다른 전공을 택했지만 졸업 후엔 쇼핑몰 업체에서 웹사이트 디자이너로 지냈다. 그러다가 사업을 해보고 싶어 인터넷 쇼핑몰 운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한 탓에 매출 부진으로 2년여 만에 사업을 접었다. 다시 중소기업에 취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2010년 중국 광저우(廣州)에 장기 출장 형태로 파견근무를 하면서 중국에 상주하다시피 했어요. 온라인 사이트를 총괄하는 일을 맡았죠. 중국어를 못 했지만 중국동포의 도움을 받아 일했죠. 그러다 헤드헌터를 통해 알리바바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죠.” 당시 중국에서 온라인 쇼핑 붐이 일면서 한국의 인터넷 쇼핑몰의 디자인이 세련됐다는 평가를 받아 알리바바에서도 한국 쇼핑몰의 디자인을 따라잡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반년이 걸린 면접 끝에 2011년 알리바바에 입사했다. 알리바바 최초의 외국인 디자이너였다. 중국어를 못했지만 회사 측은 통역사를 붙여줬다.  김 씨는 “기왕이면 중국어를 잘하면 좋겠지만 컴퓨터 등으로 디자인을 구현하면서 독창적인 작업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검은색은 중국에서 죽음을 뜻해 금기시되지만 그는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쇼핑몰을 검은 톤으로 탈바꿈시켰다. 알록달록한 색조로 디자인된 쇼핑몰이 바뀌자 호평이 쏟아졌다.  그는 최근 핀테크 경쟁이 치열해지자 올해 7월부터 알리페이로 옮겼다. 알리페이에서 유통되는 돈은 연간 525조 원에 이른다. 고객이 한 번 결제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오래 머물거나 자주 방문하도록 디자인을 개선하는 게 그의 임무다. 김 씨는 “민첩한 변화가 중국 기업의 최대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알리바바의 덩치는 커졌지만 최고경영자(CEO)와 말단 디자이너가 같은 층에 일하면서 빠르게 의견을 주고받는 스타트업 정신이 이어지고 있죠. 저녁에 문제가 발생하면 다음 날 아침에 결과물을 내놓는 방식이에요.” 여기에는 수평적인 사내 문화도 한몫한다. 알리바바에선 서로 무협지의 이름을 별명으로 붙여 일하는 전통이 있다. 알리바바의 창업자인 마윈(馬雲)은 ‘풍청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직원 평균 연령이 30대 초반일 정도로 젊은 인력도 많다. 그는 “국내 기업의 젊은이들이 곧잘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문화에 좌절하지만 알리바바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며 “이미 5억 명이 알리페이를 사용하지만 아직 사용하지 않는 중국 고객 8억 명을 공략하며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서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다”고 말했다.김유영기자 abc@donga.com}

    • 201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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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원일기 ‘영남이’, 식당 망하지 않는 법 알려드려요

     “사장님, 영남이였어요?” 푸드 스타트업인 김기웅 심플프로젝트컴퍼니 대표(36)는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는 장수 드라마인 ‘전원일기’에 15년간 출연한 아역 배우 출신. 극중 양촌리 김 회장(최불암)의 큰아들네(김용건 고두심 부부) 맏이로 나왔다. ‘증권맨’을 거쳐 직원 20여 명을 이끄는 스타트업 대표가 된 그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그가 전원일기에 출연한 건 말문이 트이기도 전인 세 살 때. 엄마와 방송국에 갔다가 원래 출연하기로 한 아기 배우가 울어대는 바람에 즉석에서 출연한 걸 시작으로 고등학생 때까지 영남이로 살았다. 세상이 방송국 중심으로 돌아갔지만 방송국을 벗어난 세상은 순탄치 않았다.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고교 졸업 후 잠시 방황을 했다.  “주변에 닮고 싶은 친구들을 보니 자신의 목표를 갖고 소위 ‘좋은 학교’에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단 걸 깨달았죠. ‘그래, 나도 대학에 가보자. 기왕이면 좋은 학교에 가자’고 다짐했죠. 학원엔 안 갔어요. 대신 절에 틀어박혀 하루 12시간 넘게 입시 준비를 했어요.” 다행히 좋은 점수가 나와 가고 싶던 대학에 갔다. 언젠가는 ‘나만의 사업’을 해보고 싶어 경영학과를 택했고 졸업 후 대우증권 등 증권사에서 파생상품 트레이더로 활약했다.  “당시 일본에 1인 가구가 많아지고 장기 불황기에 접어들면서 도시락이나 가정간편식(HMR)이 뜬다는 증권사 애널리스트 보고서들이 많이 나왔어요. 곧 한국에 다가올 미래라 생각했죠.” 그는 2014년 퇴사해 도시락집을 차렸다. 하지만 속된 말로 ‘개고생’을 했다고 했다. 임차료와 인건비 등 고정비가 많아 영업이익을 갉아먹는 구조였던 것. 신규 식당의 절반 이상이 1년을 못 버티고 폐업하는 것을 현장에서 봤다.  “같은 골목에도 다양한 음식점이 있지만 각각의 피크 시간이 다르죠. 도시락집은 식사 시간 전후에, 분식집은 오후 서너 시에, 치킨집은 밤에 바쁘잖아요. 이때를 빼면 시설과 인력을 놀려야 해서 비효율적이었죠.” 그는 주방시설 등을 여러 식당이 함께 사용해 비용을 낮추는 서비스인 ‘위쿡’을 고안했다. 그는 현재 도시락집과 기업체 직원용 아침식사 배달 서비스, 케이터링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는 위쿡에 가입한 회원식당이 제공하는 개성 있는 음식으로 종합 메뉴를 만들어 이를 판매할 계획도 있다. 브랜드, 디자인, 마케팅, 판매까지도 지원해 ‘외식업의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시장조사를 하러 미국에 갔는데 주방 공유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키친 인큐베이터’가 2만여 개나 되더군요. 이곳을 거쳐간 식당의 생존율은 90%나 됩니다. 창업자들이 메뉴 개발과 음식 제조라는 본연의 기능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김 대표는 색다른 시도도 하고 있다. 올해 9월 부산 비엔날레에서 일본 미국 프랑스 등의 미술 작가들이 좋아하는 음식의 레시피(요리법)를 주면 이를 음식으로 만들어 팔고, 동영상으로 음식 조리법을 올린 뒤 요리 재료를 함께 판매하기도 했다. 롯데액셀러레이터와 서울산업진흥원의 투자도 받았다.  그의 회사 운영 철칙은 ‘혼자 먹지 말자’는 것. 그는 “성과의 과실을 외식업 창업자들과 함께 나누며 성장하고 싶다”며 “진입장벽이 낮아 쉽게 뛰어들어 쉽게 망하는 외식업 창업 시장에서 혁신을 일궈내고 싶다”고 말했다. 김유영기자 abc@donga.com}

    • 20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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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두영 “특색있는 동네서점은 문화의 버팀목”

     “한국의 근대 서점이 올해로 120년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서점은 출판과 인쇄도 함께하면서 지식 유통 창구의 역할을 했죠. 서점이 줄고 있지만 본연의 역할에 주목한다면 제2의 중흥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최근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서울 서점 120년사: 서울의 미래, 서점에서 발견하다’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서울 지역 서점의 역사와 주요 사건, 시대별 베스트셀러, 서울의 서점 지도를 선보인 자리였다. 이 전시를 기획한 이두영 메타북스 대표(71·사진)는 서점의 미래를 낙관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었듯이 한국 근대 서점의 이정표가 되는 시점은 1906년. 서울 중구 청계천 광교 앞에 ‘회동서관’이 생긴 때다. 현재 신한은행 광교 건물(옛 조흥은행 본점) 자리다. 이곳은 중국과 출판 교역을 하며 신소설 시장을 주도했다. “당시 애국 계몽가들은 저술 활동을 통해 자주독립의 근간을 쌓고 폭발적으로 유입되는 신문물과 지식을 보급하려고 했습니다. 출판도 겸했던 경성의 서점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대였지만 경성은 출판문화가 활발한 도시였어요.” 이 대표가 일본에서 입수한 ‘경성서점명부’에 따르면 1942년 서울 시내 서점은 91곳으로 인구 1만115명당 서점 1곳이 있었다. 현재 인구 2만7830명(2015년 기준)당 책방 1곳인 점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는 “당시 문맹률이나 소득 수준을 감안하면 매우 놀라운 규모”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한글 출판이 금지됐고 일부 서적은 폐간되는 등 출판 탄압이 이어졌다. 6·25전쟁 이후 출판 유통시장은 살아나지 못했고 출판 도매상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 서점도 오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다 산업화 시대인 1970년대 교육열을 바탕으로 전집류가 유행하고 주요 출판사의 단행본도 인기를 얻으며 종로서적(1977년) 등 대형 서점이 등장했다. 이 대표는 “1980년대 들어 밀리언셀러의 출현과 함께 문화 수요가 커지며 교보문고(1981년), 서울문고(1988년), 영풍문고(1992년)가 들어섰다”며 “이 시대는 서울 지역 서점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예스24(1998년), 알라딘(1998년) 등 인터넷서점의 등장으로 할인 판매와 과당경쟁이 심화되면서 서점은 다시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동네서점, 지역서점 등 특색 있는 작은 서점이 생겨나면서 독자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서점은 국민의 의식을 담고 있는 창고이자 문화가 교류되는 공간이죠. 국가의 자산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낯선 곳에 가도 서점을 마주친다는 사실만으로 외롭지 않을 때가 있어요. 북카페와 인디서점 등 새로운 시도도 해보되 서점의 전통적인 역할을 지켜나가 서점을 문화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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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영만 교수 “공부는 육체노동… 멈추면 늙어 생각 깨는 망치질 평생 지속하길”

     “시험 끝났다고 공부 끝난 거 아니에요. 공부는 습관으로 굳어진 생각의 고치를 깨부수는 망치질이죠. 낯선 마주침으로 색다른 깨우침을 얻기 위한 거죠. 나다움을 찾으려면 이 망치질, 평생 계속해야 합니다.” ‘지식생태학자’로 통하는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53)는 거침없이 ‘공부론’을 폈다. 공고 출신으로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던 그. 하지만 무엇이 되기 위한 공부나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공부에 한계를 느꼈다. 고시를 접고 ‘스스로를 위한 진짜 공부’에 빠져들어 결국 교수가 됐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공부는 망치다’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그의 생애 77번째 책(번역서 포함). 고(故) 신영복 선생이 “공부는 틀에 갇힌 생각을 깨부수는 것”이라고 말한 데에서 책 제목을 착안했다. 서울 성동구 한양대 연구실에서 유 교수를 만났다.  그는 과거의 공부 경험부터 꺼냈다. 수도전기공고를 다니던 시절 그는 공부보다는 용접에 매달렸다. 경기 평택시의 화력발전소에 취직해 3교대로 일했지만 뭔가 허전한 마음을 지우진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접한 사시 합격 수기집이 그의 생각을 바꿨다.  “바로 이거다 싶었죠. 당시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인생 한 방’요. 인간관계를 끊고 책을 달달 외우다시피 해서 처절하게 공부했어요. 하지만 방송통신고 교재와 라디오 방송으로 공부했지만 공고에서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기에 힘들었습니다.” 대학에 가야겠단 생각이 들어 학력고사를 쳤다. 하지만 법대 가기엔 부족한 점수. 사시 대신 교육 행정고시를 보기 위해 교육공학과에 들어가 다시 고시를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불온한 꿈을 꾼 거죠. 뭔가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부를 했는데, 이런 생각의 틀로는 무언가가 되면 또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하고….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삶을 살게 되잖아요. 한마디로 피곤한 삶이죠.” 그는 달밤에 수험서를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놀이로서의 공부를 시작했다. 읽고 싶은 책을 무작정 읽으면서 재미에 빠져들었다. 도서관에서 전공과 관계없는 잡지들을 섭렵했다. 또 전공인 교육학 이외에도 사회학, 인문학, 공학 등의 책을 접하면서 시야를 넓혔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고 박사가 됐다. “‘나다움’을 찾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공부였죠. 논어에는 ‘옛날의 학자들은 자기 내면을 채우려 공부했는데 요즘 학자들은 남이 알아주는 공부만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지금도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 아닌가요. 성취를 위한 공부는 영혼 없는 인재(人才)를 낳는 인재(人災)일 수밖에요.” 유 교수는 “단편적인 지식을 익히는 것을 넘어선 진짜 공부는 현장에서 몸으로 익히는 육체노동에 가깝다”라고 강조했다. 그도 공부를 마친 뒤엔 기업 연구소에 취직해 교육공학 이론이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체험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인간의 공감 능력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잖아요. 타인의 입장이 되어서 무언가 체험해 익히는 거죠.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고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죠.” 정신적 여유가 없는 사람 등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부가 사치가 아닐지 물었다.  “대개 일이 끝난 뒤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하겠다고 하지만, 일하며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일하는 거죠. 시험공부 말고 인생 공부요. 매일 아침 ‘어떤 질문’을 갖고 출근하고 일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질문에 해답의 실마리를 얻으면서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면 그게 바로 공부죠. 세상은 여전히 공부할 게 가득하답니다. 공부를 멈추는 순간 늙어요.”김유영기자 abc@donga.com}

    • 2016-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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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茶가 주는 건강과 여유, 커피는 절대 못따라오죠”

     한국은 커피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한국인이 소비한 커피는 1인당 341잔. 거의 매일 커피를 한 잔씩 마시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전통 녹차 전도사로 나선 이가 있다. 주인공은 남은주 티인스트럭터협회 사무처장(57). 그는 녹차로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꾸자며 ‘차 마시는 사회’ 만들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식품산업전’에서 그를 만났다. 남 처장이 차에 관심을 가진 건 회사원 생활을 하던 2004년. 저혈압과 만성피로증후군 등으로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부터다.  “차가 몸에 좋다는 말을 듣고 습관적으로 마셨는데 의외로 몸이 가벼워지고 혈압 수치도 좋아졌어요. 피부가 깨끗해지고 마음도 평안해졌음은 물론이고요.” 그는 차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관련 협회에서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문턱이 높게 느껴졌다. 한복을 입고 다기 세트를 갖춰 다도(茶道)를 배워야 했다. 잎차 우리기를 배우기까지는 총 2년 과정을 들어야 하는 등 이전의 단계를 모두 밟아야 했다.  “당시 중국의 푸얼(普이)차가 유행했는데 얼마나 더 비싼 차를 마시는지가 관심이었죠. 차 관련 행사를 할 때면 한복을 입고 고급 다기를 들고 와야 ‘차를 좀 아는 사람’ 대우를 받았죠. 동시에 커피전문점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차 자체가 외면을 받아 안타깝기도 했고요.” 그는 차의 효능을 알리고, 누구나 간소하게 차를 배웠으면 하는 바람에서 2011년 티인스트럭터협회를 만들었다. 차 전반을 쉽게 알려주는 차 지도자 양성에 나서는 한편 사라질 위기에 처한 우리 차도 발굴했다. 국제슬로푸드협회 한국지부와 손잡고 하동 작설차와 보림백모차, 김해 장군차 등을 ‘맛의 방주’(사라질 위기에 처한 음식의 목록)에 등재시켰다.  남 처장은 “반드시 비싼 차가 몸에 좋은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녹차는 따는 시기에 따라 네 종류로 나뉜다. 곡우(穀雨·음력 3월 중순)를 전후로 가장 먼저 따는 찻잎을 ‘우전’이라 한다. 이후 열흘 간격으로 ‘세작’, ‘중작’, ‘대작’ 순으로 딴다.  “어린잎인 우전엔 아미노산이 있어서 감칠맛이 나죠. 80g당 10만∼100만 원일 정도로 사람들이 선호합니다. 반면 늦게 딸수록 감칠맛은 적고 떫은맛이 나요. 대작은 1만 원대(80g)지만 저급차로 보면 곤란해요. 떫은맛을 내는 카테킨엔 항산·항염 성분이 들어가 노폐물을 없애고 피를 깨끗하게 하거든요.” 그는 차 자체의 맛과 향을 즐기기엔 우전이 좋지만 생선구이나 고기처럼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면 대작이 좋다며 대작도 제대로 평가받아 녹차 확산의 계기가 마련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차 마시는 사회는 흥(興)한다고 하잖아요. 이 각박한 세상에 좀 더 여유를 갖고 심신을 건강하게 지켰으면 좋겠어요. 우리 전통 녹차를 즐기는 것, 어렵지 않아요. 다기를 갖춰 마셔도 좋지만 보온병을 갖고 다니며 찻잎 1∼2g을 넣어 먹는 등 간소하게도 즐길 수 있으니까요.”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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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한복판 ‘지식의 방주’… 뜻밖 재미 숨어있죠

     서울도서관은 서울 한복판에 있다. 서울광장 바로 앞에 있어 누구나 들어가 책을 읽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부청사였다가 광복 이후 서울시청사였던 건물을 개조해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등록문화재 제52호). 내부로 들어서면 1, 2층을 터놓은 서고에 장서 30만여 권이 꽂혀 있다. 가수 싸이의 뮤직비디오에도 나와 서울의 대표 명소가 됐다.  최근 4주년을 맞이한 서울도서관이 자리 잡기까지 이용훈 서울도서관장(57)의 역할이 컸다. 대학과 국책·민간 연구기관 등에서 30여 년간 사서를 지낸 그는 2012년 초대 서울도서관장으로 취임했다. 이달 21일 퇴임을 앞둔 그는 책과 도서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종횡무진 다녔다. 최근 한국도서관협회로부터 ‘제1회 이병목 참사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울도서관에서 이 관장을 만났다.  그에게 서울도서관장으로서 잊지 못할 날은 단연 2012년 10월 26일. 도서관계의 숙원이었던 서울도서관이 개관한 날이다. 도서관법상 각 시도가 ‘지역대표도서관’을 운영해야 하지만 서울의 경우 부지 문제 등이 풀리지 않다가 마침내 이날 문을 열었다.  서울도서관은 시민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기존 도서관은 산 위에 있는 등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 서울도서관은 일부러 시간 내지 않더라도 지나가다가 들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서울도서관엔 아이와 어른의 서가가 함께 있어서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함께 책을 읽고,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남녀 커플이 시간을 보내기도 해요. 지방에서 올라온 어르신이나 도심에 볼일을 보러 온 시민들도 있고요.” 그는 이런 도서관의 역할을 ‘도심 방주’라고 정의했다. 도서관에선 누워서 잠자는 것만 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서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기고 무언가 메모하고 엎드려 잘 수도 있죠. 책과의 ‘우연한 만남’ 혹은 ‘뜻밖의 재미’를 즐길 수 있는 거죠. 이렇게 도서관이란 공간과 친숙해지면 동네 도서관도 가보는 등 책과 친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책으로 ‘시민의 힘’을 키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서울 전역에 도서관은 국립·시립·구립도서관과 작은 도서관 등 1081개에 이른다. “최근 동네서점이 붐을 이루고 있잖아요.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젊은 세대들이 많아지면서 동네서점이 많아졌어요. 동네서점은 공공도서관으로 채워지지 않는 문화 갈증을 풀어내는 공간이 되고 있죠.” 이런 추세를 감안해 서울시는 ‘서점 조례’를 만들어 지역 도서관이 동네서점에서 도서관 장서를 사들이는 것을 권고했다. 지역서점의 생존을 위한 것으로, 도서관이 도서를 구입할 때 최저가 입찰제(가격을 가장 낮게 제시한 곳에서 구입)가 폐지되고 도서정가제(서적 할인율을 10%로 제한)가 실시되면서 지역 서점도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지 않게 된 점을 감안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책 읽는 환경’이 제대로 조성됐으면 해요. 책은 민주주의의 기틀입니다. 좋은 도서관이 있다고 반드시 좋은 나라가 되는 건 아니지만, 좋은 나라들을 보면 좋은 도서관이 있더라고요.”김유영기자 abc@donga.com}

    • 201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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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보자 배려하는 해녀 문화, 세계유산 될 만하죠

     이달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식품산업전’. 무명 저고리에 물적삼 등 전통 해녀복을 입은 여성이 연사로 나섰다. 주인공은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앞바다에서 해녀 일을 하는 채지애 씨(34). 그는 고무 잠수복이 나오기 전인 1970년대 해녀들이 입던 물옷을 입고 해녀문화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직접 만든 파일로 다부지게 발표하는 모습은 여느 직장인 못지않았다.  제주 해녀문화는 이달 말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확실시된다. 이를 앞두고 그를 만났다.  채 씨는 해녀 3년 차. 제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을 마치자마자 서울에서 미용실 헤어디자이너로 일했다. 하지만 10년이 되어 갈 무렵, 쳇바퀴 같은 생활에 지치기 시작했다. 미용실 퇴근 시간도 일정하지 않았다. 일찍 결혼해 두 아이를 둔 그는 아이들이 잠든 후 귀가하는 날도 허다했다.  결국 2012년 결단을 내렸다. 아이 키우기에 제주만 한 곳이 없다는 생각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민 끝에 엄마가 하던 해녀 일을 하기로 했다.  “바닷가에서 자라온 터라 잠수만큼은 자신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고 싶어서였죠. 하지만 엄마는 딸만큼은 고된 해녀 일을 시키지 않겠다며 반대했어요. 주변에서도 ‘귀하게 키운 딸을 왜 바다로 내보내느냐’고 했고요.” 그는 “할머니 해녀들도 하는 물질을 젊은 사람이 못할 이유가 없다”며 가족을 설득해 해녀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거친 바위에 다리를 긁히기 일쑤였고, 물질은 만만치 않았다.  “해산물을 채취하려면 해저 지형과 해산물 위치 등을 체득해야 하는데, 제가 오만했어요. 해녀 세계에선 체력과 젊음보다는 경험과 지혜가 우선이란 걸 깨달았죠. 해녀 일을 하면서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됐어요.” 그는 물질 첫날 태왁(해녀의 바구니)에 해산물을 하나도 담지 못했다. 선배 해녀들은 “우리 막둥이가 바다에서 빈손으로 나가게 할 수 없다”며 자신들이 딴 소라와 미역 등을 한가득 채워줬다.  “구성원들끼리 서로 짓밟기도 하는 도시의 회사 생활과 확연히 달랐죠. 이게 바로 해녀문화구나 싶었죠.” 그가 경험한 해녀 일엔 약자에 대한 배려도 있었다. 해녀는 숙련도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상군은 수심 8m 이상에서, 중군은 3∼8m에서, 하군은 3m 이하에서 작업해야 한다. 잘하는 사람이 초보자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과욕을 부리지 않는 법도 배웠다. 큰 해산물이 보여도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바로 따지 않는다. 나올 때 물숨(물속에서 쉬는 숨)을 마셔 사고 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숨을 아껴야 한다. 자그마한 전복이나 소라를 따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10cm보다 작은 전복이나 7cm보다 작은 소라는 바다에 놓아준다. 해녀들 나름대로 ‘바다를 지키는 법’이다.  “어머니 세대에선 생계를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녀 일을 시작한 경우가 많죠.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등 자격지심을 갖는 분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전 제주 해녀만의 독특한 문화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유네스코도 이를 높이 평가해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게 아닐까요.” 그는 해녀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 귤 농사를 병행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해녀문화를 알리는 일이라면 전통 해녀복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해녀로 남고 싶다”는 그는 ‘해녀 채지애’라는 명함을 남기고 제주로 돌아갔다. 김유영기자 abc@donga.com}

    • 2016-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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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관실 진주 금곡정미소 대표 “토종 ‘앉은뱅이 밀’ 지키는 게 내 운명”

     통상 밀가루라고 하면 수입 밀을 떠올린다. 그나마 국산 밀도 대부분 수입 밀을 개량한 종자. 하지만 우리 땅에서 자란 토종 밀이 엄연히 존재한다. 기원전 300년부터 심어 온 ‘앉은뱅이 밀’이다. 1970년대까진 인기였지만 수입 밀이 밀려오며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이 앉은뱅이 밀을 3대째 우직하게 지켜 온 이가 있다. 주인공은 경남 진주시 금곡정미소 대표인 백관실 씨(66). 최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백 씨는 기계 일을 하던 할아버지의 금곡정미소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정미소가 1916년경 세워졌으니 올해로 100년을 맞이했다. 할아버지는 가업을 이으라는 뜻에서 그가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농사를 짓게 했다. 백 씨는 당시 진주를 포함해 남부 지방에서 활발했던 앉은뱅이 밀 농사를 그렇게 시작했다.  “밀이 작아서(50∼80cm) 앉은뱅이 밀이라 불렀지예. 수입 밀하고 달리 차지고 부드럽고 고소해서 국수나 수제비 재료로 인기였지예. 글루텐 함량도 낮아서 더부룩한 느낌도 없고 속이 편하다 아닙니까.” 하지만 그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84년 정부가 국산 밀 수매를 중단했고 농부들은 팔 곳이 마땅치 않아 대부분 농사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는 확신이 있었다.  “앉은뱅이 밀은 우리 땅 풍토에 적합해 병충해에 강하지예. 늦가을에 파종해 추운 날씨에 자라 따로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잘 자란다 아닙니꺼. 농사짓기 쉽고 표백제·방부제 처리 안 하니 사람 몸에 더없이 좋지예.” 그는 농부들에게서 앉은뱅이 밀을 사들여 계약 재배하기 시작했다. 수입 밀보다 비싸 본전조차 건지지 못하는 해가 허다했다. 백 씨는 양봉과 축산, 과수 농사 등을 가리지 않고 병행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 밀 살리기 운동’으로도 역풍을 맞았다. 개량종인 금강밀과 조경밀이 확산됐는데, 경질 밀인 이 밀들은 맛없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연질 밀인 앉은뱅이 밀도 비슷한 취급을 당했다. 백 씨는 ‘이 맛있는 밀을 왜 몰라줄까’ 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토종 씨앗의 대부’인 안완식 전 농촌진흥청 연구관이 2012년 백 씨를 방문해 앉은뱅이 밀을 발굴하면서 대중화 계기가 마련됐다.  “앉은뱅이 밀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흘러갔지예. 미국 농학자(노먼 볼로그)가 이 밀을 개량한 ‘소노라 64호’를 개발했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밀 품종이 됐다 하데예.” 앉은뱅이 밀은 2013년 ‘국제슬로푸드본부’가 이끄는 ‘맛의 방주(Ark of Taste·사라질 위기에 처한 음식을 지키기 위해 지정)’에도 등재됐다.  국산 밀 자급률은 1.2%(2015년 기준). 백 씨는 승산이 있다고 본다. 쌀 소비는 줄어도 밀 소비는 늘고 있고 음식에 신경 쓰는 사람도 늘고 있어서다. 앉은뱅이 밀은 호텔이나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에 납품되고 있고 100kg씩 사 가는 고객도 있다. 재배 물량(연 300t)은 직거래로 ‘완판’된다. 종자를 달라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는 널리 퍼져야 한다는 뜻에서 기꺼이 씨앗을 내준다.  백 씨는 최근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홍문표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로 있는 국회의원 연구모임인 ‘국회 농업과 행복한 미래’의 토론회에 연사로 나서 앉은뱅이 밀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학 가서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원 된 고향 친구들 보면 부러웠어예. 그런데예. 나이 들어 보니 친구들은 제가 더 유명해졌다고 부러워하데예. 제가 유식하고 배운 게 많으면 앉은뱅이 밀을 진작에 버렸겠지예. 작은 씨앗 하나라도 물려주는 일, 돈이 안 돼도 잘하렵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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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대째 지켜온 정미소 대표 “배운 게 많으면 앉은뱅이 밀 진즉에 버렸겠지예”

    통상 밀가루라 하면 수입 밀을 떠올린다. 그나마 국산 밀도 대부분 수입 밀을 개량한 종자. 하지만 우리 땅에서 자란 토종밀이 엄연히 존재한다. 기원전 300년부터 심어온 '앉은뱅이 밀'이다. 1970년까진 인기였지만 수입밀이 밀려오며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이 앉은뱅이 밀을 3대째 우직하게 지켜온 이가 있다. 주인공은 경남 진주에 위치한 금곡정미소의 대표인 백관실 씨(66). 최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백 씨는 기계 일을 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금곡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다. 정미소가 1916년경 세워졌으니 올해로 꼬박 100년을 맞이했다. 할아버지는 가업을 이으라는 뜻에서 그가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농사를 짓게 했다. 당시 진주를 포함해 남부 지방에서 활발했던 앉은뱅이 밀농사를 백 씨는 그렇게 시작했다. "밀이 작아서(50~80cm) 앉은뱅이 밀이라 불렀지예. 수입 밀하고 달리 찰지고 부드럽고 고소해서 국수나 수제비 재료로 인기였지예. 글루텐 함량도 낮아서 더부룩한 느낌도 없고 속이 편하다 아닙니까." 하지만 그 인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1984년 정부가 국산 밀 수매를 중단했고 농부들은 팔 곳이 마땅치 않아 대부분 농사를 포기했다. 그는 확신이 있었다. "앉은뱅이 밀은 우리 땅 풍토에 적합해 병충해에 강하지예. 늦가을에 파종해 추운 날씨에 자라 따로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잘 자란다 아닙니꺼. 농사짓기 쉽고 표백제·방부제 처리 안하니 사람 몸에 더없이 좋지예." 그는 농부들로부터 앉은뱅이 밀을 사들여 계약재배하기 시작했다. 수입 밀보다 비싸 본전조차 건지지 못하는 해가 허다했다. 백 씨는 양봉과 축산, 과수농사 등을 가리지 않고 병행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 밀 살리기 운동'으로도 역풍을 맞았다. 개량종인 금강밀과 조경밀이 확산됐는데, 경질밀인 이 밀들은 맛없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연질밀인 앉은뱅이 밀도 비슷한 취급을 당했다. 백 씨는 '이 맛있는 밀을 왜 몰라줄까'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토종 씨앗의 대부'인 안완식 전 농촌진흥청 연구관이 2012년 백 씨를 방문해 앉은뱅이 밀을 발굴하면서 대중화 계기가 마련됐다. "앉은뱅이 밀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거쳐 미국에 흘러갔지예. 미국 농학자(노먼 볼로그)가 이 밀을 개량한 '소노라 64호'를 개발했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밀 품종이 됐다 하데예." 앉은뱅이 밀이 소노라 64호의 조상 격인 셈이다. 이 밀은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2013년 '국제슬로푸드본부'가 이끄는 '맛의 방주'(Arck of Taste·사라질 위기에 처한 음식을 지키기 위해 지정)에도 등재됐다. 국산 밀 자급률은 1.2%(2015년 기준). 백 씨는 승산이 있다고 본다. 쌀 소비는 줄어도 밀 소비는 늘고 있고 음식에 신경 쓰는 사람도 늘고 있어서다. 앉은뱅이 밀은 호텔이나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 등에 납품되고 있고 100kg씩 사가는 '큰 손 고객'도 있다. 재배물량(연 250~300t)은 직거래로 '완판'된다. 종자를 달라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는 널리 퍼져야 한다는 뜻에서 기꺼이 씨앗을 내어준다. 백 씨는 최근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홍문표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로 있는 국회의원 연구모임인 '국회 농업과 행복한 미래'의 토론회에 연사로 나서 앉은뱅이 밀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학 가서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원 된 고향 친구들 보면 부러웠어예. 그런데예…. 나이 들어 보니 친구들은 제가 더 유명해졌다고 부러워하데예. 제가 유식하고 배운 게 많으면 앉은뱅이 밀을 진즉에 버렸겠지예. 작은 씨앗 하나라도 물려주는 일, 돈이 안 되도 잘 하렵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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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옷은 자신과 상대에 대한 관심… 대충 입는 사람, 성공한 경우 드물어

    대한민국 정치인과 기업인이 대거 양복을 맞추던 맞춰 입던 곳이 있었다. 국회 인근 식당서 "국회 부근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면 양복 재킷이 뒤바뀌어 있다는 있다"는 농담 섞인 말도 이 양복점 때문에 나왔다. 같은 양복점에서 곳에서 옷을 맞춘 이들이 식당에 재킷을 걸어뒀다가 다른 사람 남의 옷을 입고 나온다는 것. 1956년 삼성 제일모직 사업부에서 시작해 올해 60주년을 맞이한 장미라사의 '장미라사'의 이야기다. 그 사이 장미라사는 삼성에서 분사했고 당시 지배인이 지분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서울 중구 세종대로 장미라사에서 이영원 장미라사 대표(58)를 만났다. 이 대표는 어릴 때부터 양복에 매료됐다. 부산 보수동 책골목에서 일본 패션잡지를 뒤적이고 국제시장에서 원단을 끊어 옷을 만들어 입던 그는 고교 졸업 직후 직후인 1977년 삼성에 입사해 30년 가까이 장미라사에 매달려왔다. 패스트패션의 시대에 '맞춤 양복'이 유효한지부터 궁금했다. "컴퓨터로 스캔을 떠서 입체 제작하면 몸에 가장 정확하게 맞는 양복이 나오겠죠. 하지만 양복은 몸에 단순히 걸치는 옷이 아니에요. 사람의 골격과 움직임을 제대로 이해해 기계로 구현할 수 없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담아내죠." 삼성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은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 영국의 찰스 왕세자 등 국내외 인사들이 장미라사에서 옷을 맞췄다. 특히 이 회장의 옷 심부름을 도맡았던 이 대표는 그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했다. "이 회장님은 탐미주의자였어요. 하루에도 양복을 두어 차례 갈아입고, 바지를 맞출 때에도 길이를 5㎜ 단위로 수정해가며 자신에게 완벽한 양복을 만들려하셨죠. 또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선언(1983년)한 뒤엔 머리를 메탈 그레이로 염색하고 양복도 실버 그레이색을 입을 정도로 패션을 통해 경영철학을 표현할 줄 아는 분이었어요." 그는 옷을 '은쟁반'에, 사람을 '금사과'에 비유하며 설명했다. 옷 자체로 완성품이 아니라 옷은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 이런 철학이 하루아침에 생긴 건 아니었다. 1980년대 해외 디자이너들의 옷을 대거 접한 게 계기가 됐다. "어깨를 타고 흐르는 실루엣과 오묘한 색조는 기존 옷과 차원이 달랐죠. 기성복도 고급화되고 있었어요. 당시 장미라사에 손님이 차고 넘쳤지만 이대로 가다간 맞춤 양복이 곧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꼈죠. 한국에서 양복을 만든다는 게 구시대 유물처럼 느껴졌죠." 마침 삼성은 1988년 장미라사를 분사했다. 맞춤 양복이 대기업식 경영과는 부적합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양복의 존재 이유에 고심했던 그는 빚까지 내서 양복의 본고장 유럽에 갔다. "프랑스 센강이나 몽마르트언덕 몽마르트 언덕 노천엔 그림이 많았죠. 왜 어떤 그림은 길바닥에서 싸게 팔려 금세 사라지고, 어떤 그림은 미술관에 걸려 오래 남는 명품이 될까를 생각했죠. 그러다가 수준이 다르면 살아남겠다는 답을 얻었죠." 맞춤 양복에 확신을 가진 그는 1998년 장미라사 지분을 인수해 대표가 됐다. 하지만 당시는 외환위기 직후. 불황에 가격경쟁으로 생존의 기로에 섰다. 다시 유럽에 갔다. "이탈리아 재단사들은 오히려 더 미련하게 양복을 만들고 있었죠. 패턴도 손으로 그리고 바느질도 한국과 달리 했어요.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였죠. 현지에 집을 구하고 재단사를 보내 바느질부터 다시 배우게 했죠." 기존엔 바느질 한 번에 여러 땀을 꿰어 원단이 밀려 라인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다. 이를 한 땀 한 땀 꿰매 홑겹들이 압착되게 했다. 간단히 보여도 이 방식을 바꾸기까지 8년이 걸렸다. "오래 했다고 장인이 되는 건 아니죠. 살아남으려면 기존의 자신을 철저하게 깨부술 수 있어야 하니까요." 한때 서울 명동·소공동 일대 500여 곳에 이르던 양복점이 지금은 10곳 정도로 줄었지만 장미라사는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양복 한 벌에 바느질 2만5000여 땀. 치수를 재고 원단을 고르고 가봉하고…. 최소 2,3주가 2, 3주가 걸린다. 패션에 관심 많은 20~40대들은 이런 '느린 패션'에 열광한다. 취직하면 장미라사 양복 한 벌 장만하는 게 꿈이었다며 옷을 맞춰가는 지방의 젊은이도 있다. 갤러리아 명품관에도 해외 명품 브랜드들과 나란히 입점해 진열돼 있다. 최근 이 대표는 해외로도 눈을 돌리고 있다. 중동에선 테러에 대비해 방탄차를 타고 방탄조끼를 입고 사고에 대비한 수혈용 피까지 싣고 왕실양복을 주문받아오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중국 싱가포르 등 고급호텔에 VIP를 초대해 옷을 주문받는 '트렁크 쇼'도 선보인다. 이젠 장미라사만의 전통을 쌓는 게 목표다. 그는 "남자도 우아할 수 있단 걸 보여주고 싶다"며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에서 풍기는 절제미를 옷에 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옷은 자신과 상대에 대한 관심입니다. 대충 옷 입는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은 드물걸요. 자신과 주변에 소홀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또 좋은 옷을 입어도 개인의 품격이 배어나오지 않으면 옷은 번지르르한 포장에 불과해요. 이게 한번에 되지는 않습니다. 꾸준히 자신을 파악하고 연습해야 합니다."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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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파 뛰어넘어 통일-선진화 비전 제시… ‘한국판 브루킹스’ 꿈꿔

     “통일에 대한 결기를 다지고 낙후된 분야의 선진화 토대를 쌓는 게 목표예요. 국가 전략 수립과 정책 제안을 통해 정파를 뛰어넘는 ‘한국판 브루킹스연구소’를 만들 겁니다.” 최근 설립 10주년을 맞은 한반도선진화재단의 박재완 이사장(61)은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기획재정부 장관과 고용노동부 장관 등을 지낸 그는 현재 성균관대 행정학과 교수를 겸하고 있다. 재단은 2006년 9월 비(非)정파적인 민간 싱크탱크를 기치로 내걸고 출범했다. 지금도 서울 국회 의원회관 등에서 매주 목요일 정책세미나와 행사를 연다. 재단이 천착하는 분야는 정치 경제 산업 복지 노동 문화 등을 망라한다. 이 중에서도 통일을 위한 비전과 정책 제시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2006년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하자 일각에서는 북한이 이를 미국과의 협상카드로 쓰고 실제 핵개발은 안 할 거라고 했죠. 하지만 재단은 핵무기가 실전 배치되면 남북한 간 평화 통일의 선택지가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죠.” 이런 맥락에서 재단은 이미 지난해부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북한에 대응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사드 배치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정치권을 보면 강대국은 한국을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 통할 수 있는 나라’ ‘중국이나 미국이 밀어붙이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나라’ 등으로 오판할 수 있죠. 이럴 때일수록 결기를 갖고 단결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재단의 또 다른 관심사는 선진화다. 산업화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후손들에게 선진국 문턱에서 미끄러진 중진국을 물려줄 수 없다는 의지에서다.  “국민소득 3만 달러에 근접했으나 앞으로 6만∼7만 달러를 이루려면 현 시스템으론 힘들어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주의, 법치주의가 충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고, 세계 시민으로서의 열린 마음과 성숙된 모습도 부족하죠.”  그는 선진화가 미진한 대표적 분야로 소모적인 정쟁(政爭)을 벌이는 정치권을 들었다.  그는 “이번 국감은 ‘혹시나’ 다를까 했지만 ‘역시나’였다”며 “논의가 진행될수록 의견 수렴보다는 갈등으로 치달아 대의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치권에 의원내각제(내각책임제)로 집권 가능성을 열어 둬야 정치인들이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을까요. 초·재선 의원은 차관·차관보를, 3, 4선 의원은 장관을 맡긴다면 정치인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육성할 수 있죠. 정쟁보다 정책에 초점을 둘 수 있겠죠.” 그는 “개헌(改憲)은 언젠가 해야 할 숙제”라며 “정권 임기에 구애받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개헌 로드맵을 만들고 헌법 가치에 대한 토론을 해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재단은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현 재단 명예이사장)가 설립했다. 박재완 이사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 재무부 공무원(행시 23회)을 하다 청와대에서 당시 박세일 정책기획·사회복지수석비서관과 함께 근무했다. 그 인연으로 선진화재단에 참여했고 2014년 이사장직을 넘겨받았다. 이주호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윤건영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등과 ‘박세일 사단’으로 꼽힌다.  재단은 19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연다. 김유영기자 abc@donga.com}

    • 201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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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인용 “아날로그 음악 들려주려 물리학 공부”

     “저, 아직도 현역이에요.” 진청바지에 황갈색 면 티셔츠를 입은 남자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올해 일흔여섯. 1960년대 말부터 라디오와 TV를 넘나들며 방송 활동을 한 황인용 씨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황인용의 영 팝스’ 등을 진행했던 ‘그 라디오 스타’는 현재 경기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고전음악감상실 카메라타를 운영하는 ‘명(名)DJ’로 활약하고 있다. 한 방송사 프로그램의 내레이션도 병행한다. 공연기획사인 더하우스콘서트가 최근 서울 종로구 동숭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카페에서 마련한 행사에서 그를 만났다.  황 씨가 음악감상실을 시작한 건 2004년 9월. 지난달로 꼬박 12년이 됐다. 평일은 물론이고 공휴일에도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DJ실에서 직접 음반을 튼다. 산책할 땐 한 시간짜리 음악을 틀고 나가는 ‘요령’도 생겼다. 하지만 이도 잠시. 금세 불안해져 다시 돌아온다. “사실요, 때려치우고 싶습니다. 농담 아니에요. 그런데도 직접 음악을 트는 건 순전히 경영적인 이유거든요. 주방 아주머니와 아르바이트 직원, 매니저에게 월급 주고 가까스로 운영되는 정도예요.” 그렇다면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일까.  “방송할 때 아무리 바빠도 하루 30분은 동료나 가족, 시청자가 아닌 ‘나만의 즐거움’을 위해 살았죠. 그중 하나가 음악이었죠. 하지만 음악만 생각했다면 진즉 그만뒀을 수 있어요. 오디오에 대한 관심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었죠.” 그가 오디오를 본격 공부한 건 일흔이 넘어서다. 기계에 푹 빠지니 자연스레 물리학을 공부하게 됐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파 간 저항을 최소화해야 원음에 가깝게 재현되죠. 기술이 발전해도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를 바꿀 때 소리는 왜곡됩니다. 입체적인 아날로그 소리와 분명 달라요.” 황 씨는 전기 원리를 발견한 패러데이, 패러데이의 연구를 이론화하고 응용한 맥스웰, 전자기학 발전에 초석을 쌓은 앙페르 등을 줄줄이 대면서 스피커에서 아날로그 음질이 나오는 원리를 설명했다. “한나절 음반을 틀고도 귀가 직전 혼자 DJ실에 남아서 음악 한두 곡을 더 듣는 게 ‘또 다른 재미’가 됐죠. 감상실에 있는 1930년대 극장용 스피커로 듣는데, 크고 자극적인 소리를 재현하도록 개발된 요새 스피커와는 많이 다릅니다.” 음악감상실 손님들에게 신청곡을 받으면 모든 악장을 틀어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엘비라 마디간(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2악장)처럼 유명한 음악이더라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1, 2, 3악장을 모두 틀어요. 요새는 음악을 짧게 듣는 추세지만 모든 음악을 연속적으로 들어야 감동을 느낄 수 있죠.” 그는 음악엔 우리를 유쾌하고 편안하게 하고 좋은 감정을 유발하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으로 숫자를 연구했고, 숫자를 연구하다 보니 자연의 진리를 알게 됐다죠. 철학과 수학, 물리학, 기하학이 얽혀 있는 음악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집약체인 것 같아요. 스스로도 예술, 문학, 과학의 세계를 늦게 접한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황 씨는 “앞으로 미학(美學)과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머릿속에 빈 공간이 많아 더 배우고 싶은 거죠. 지구상에 태어나 많은 것을 모르고 사는 것과 조금이라도 알고 사는 건 차이가 있잖아요. 뭔가 상상하고 그 속에서 재미를 찾고 싶습니다.” 김유영기자 abc@donga.com}

    • 201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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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다가 서고 언덕 못오른다? 전기차 타본 사람이 편견 깨야죠”

     전기차를 모는 개인들이 뭉쳐 전기차 이용 활성화에 나섰다. ‘한글과컴퓨터’ 창업자인 이찬진 씨(51)를 주축으로 전기차 이용자의 커뮤니티 운영자들이 제주와 서울에서 잇달아 전기차 포럼을 연 것.  특히 제주 행사에는 전기차 운행자와 정부 및 기업 관계자 등 700여 명이 몰려 전기차 운행 경험을 공유하고 전기차 확산 방안을 논의했다. 이들은 ‘탄소 없는 섬’으로 만들겠다는 제주에서 전기차 논의를 활성화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이달 초 원희룡 제주도지사로부터 표창을 받는다. 최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이들을 만나봤다. 전기차 포럼은 이 씨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씨가 올해 7월 전기차를 직접 운행하면서 전기차의 장점을 직접 체험했다. e커머스 기업 포티스를 운영하고 있는 이 씨는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다 올해 3월 주소지를 아예 제주로 옮겼고, 제주도민의 혜택(보조금)을 받아 현대자동차의 아이코닉 일렉트릭을 구매한 것.  “전기차를 실제로 타보니까 ‘가다가 서버린다’ ‘언덕을 오를 때 뒤로 밀린다’는 말이 사실이 아닌 걸 깨달았죠. 기업이나 정부가 아닌 전기차를 모는 이용자 입장에서 주행 경험이 어떤지, 전기차 활성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등을 널리 알려 전기차 확산의 토대를 쌓고 싶었죠.” 그는 ‘제주전기차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 기존의 전기차 커뮤니티인 EVwhere의 김재진 대표(40)와 김성태 전기차시민연대 대표(40) 등과 의기투합해 ‘판’을 키워 보기로 했다. 첫 장소로는 ‘탄소 없는 섬 2030’을 추진 중인 제주를 택했다. 행사명은 전기차(EV·Electric Vehicle)와 사용자(User), 포럼(Forum), 페스티벌(Festival)을 합한 ‘이버프(EVuff)’로 지었다. 버프가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증가시킨다는 뜻을 염두에 두고 전기차 확산을 북돋겠다는 의지도 담았다.  “일반 차량의 경우 월 운행비가 30만 원(200km를 달릴 경우) 들지만 전기차는 3만 원이 들어 10%로 대폭 낮출 수 있죠. 자동차 엔진이 없는 특성상 차량 운행에 따른 소음이 전무하고 승차감도 안락해요.”(김재진 씨) “무엇보다도 매연을 내뿜지 않는 친환경 차량이라는 점이 장점이죠. 전기차를 모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도 느껴 봤으면 좋겠어요.”(김성태 씨) 커뮤니티 회원 등 200여 명은 수시로 단체 메시지 등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며 한 달간 행사를 준비해 지난달 3일 ‘이버프@제주’를 성황리에 치렀다. 지난달 23일 서울에서 열린 ‘이버프@서울’에서는 서울시의 허가를 받아 각자의 전기차를 끌고 한시적으로 남산에 오르기도 했다. 남산에는 일반 차량 출입이 금지됐지만 최근 관광버스 출입은 예외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매연이 없는 전기차는 정작 남산에 못 올라가지만 매연을 내뿜는 관광버스가 남산을 다니면서 공기의 질이 나빠진 걸 꼬집기 위한 것이었다.  이 씨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는 못해도, 가능한데도 각 그룹 간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게 전기차 충전 인프라를 확충하는 것. 관행적으로 아파트에 전기차 충전소를 설치하려면 이웃들의 동의를 받아야 해서 승낙을 얻기 쉽지 않은 상황. 이들은 관련법에 대한 법률 검토를 하고 있다.  “좋은 경험을 하는 사람은 계속 성장하고 잘해 나가잖아요. 전기차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도 긍정적으로 바꿔서 전기차 인프라도 성장했으면 합니다.”(이찬진 씨)김유영기자 abc@donga.com}

    • 201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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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서재는 글로벌 인생학교… 80개국 여행객 매일밤 고민 털어놔”

    자연광이 들어오는 큰 창이 유난히 많아 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집. 장서 1만2000여 권이 빼곡한 서재에서는 매일 밤마다 ‘글로벌 인생학교’가 펼쳐진다. 이곳에 하룻밤을 묵으러 오는 여행객들은 주인장과 마주 앉아 대화한다. 경청과 환대가 가득한 정담(情談) 속에서 누군가는 삶의 용기를, 누군가는 영감(靈感)을 얻는 등 저마다 품은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최근 10년간 배낭여행객은 물론이고 영화감독과 건축가, 셰프, 화가, 음악인, 기업인 등 2만4000여 명이 다녀갔다. 방문객의 출신 국적도 80개 국가를 넘겼다. 경기 파주시 헤이리예술마을에 위치한 ‘모티프원’의 이야기다. 이곳 주인장은 헤이리예술마을 촌장인 이안수 씨(61). 최근 여행객들과의 대화를 담은 ‘여행자의 하룻밤’이라는 책을 펴낸 그를 만났다. 잡지 기자 출신인 그는 미국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교육을 공부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죽음은 하나의 삶을 숭고하게 완결 짓는 과정이란 걸 깨달았죠. 당시 남은 삶도 그대로 산다면, 유한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순간에 ‘해보지 않은 것’, ‘도전하지 않은 것’, ‘베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엄청난 후회가 밀려 올 것 같았어요.” 귀국 직후 이른 은퇴를 결심했다. 평소 탐독(耽讀)과 여행을 즐긴 그는 각국 여행자와 예술가가 모이는 ‘아지트’를 만들고 싶었다. 가장으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아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동기(motif)와 숫자 1(one)의 합성어로 ‘살아가게 하는 최고의 동기’를 찾자는 뜻에서 이곳 이름을 모티프원이라 짓고 2006년 첫 여행객을 받았다. “독서가 저자의 올곧은 정신세계를 탐험하면서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면, 여행은 서재 바깥에서 하는 독서죠. 하지만 제가 물리적인 장소를 옮기지 않아도 다양한 사람을 만나 사람들의 생각을 탐험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여행이 될 것으로 봤어요. 저와 여행객이 만나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처음 본 여행객들은 이 씨와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은 만큼 마음의 빗장도 쉽게 푼다. 결혼이나 진로에 대한 고민부터 삶과 죽음 등 철학적인 문제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대화를 청해 자신의 방에 가기까지 4시간에 이른 여행객도 있었다. 일본 현대 회화를 대표하는 나카무라 가즈미, 중국 예술계의 거두인 판디안, 포슬린 페인팅의 권위자인 독일의 한스 바워, 홍콩 건축가 게리 창,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 박찬욱 김기덕 영화감독, 최일도 목사 등도 이곳에 다녀가면서 사업이나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주인도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만났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한 권의 책이죠. 여기 오는 분들을 ‘휴먼 북’으로 칭하고 싶어요. 종이책이 정제된 이야기를 담았다면 휴먼북은 원전(原典)과 같죠. 2만4000여 권의 휴먼북을 읽은 저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서가에는 휴먼북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이곳을 찾은 부모가 아이와 조립한 장난감부터 각국 기념품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곳이 론리플래닛 등 외국 책자에 소개된 뒤부터 해외 여행객들은 작은 선물을 사갖고 온다고 한다. 예약은 물론이고 청소, 시설 유지·보수, 회계 등을 도맡는 그는 반농담으로 스스로를 ‘무수리’라 칭하며 “이른 은퇴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나무를 사다가 서가를 직접 제작하고 때에 따라 사진 촬영 등의 작업도 병행한다. 이 씨는 “근육을 움직이며 일할 수 있다는 건 새로운 삶을 깨달아가는 과정이고 우주 질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그의 꿈은 더 많은 휴먼북 읽기. “모든 사람들은 행복의 씨앗을 품고 있어요. 이들에게 행복의 길을 인도하고 저 또한 행복을 배우고 싶어요.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생각을 양조(brewing)해서 행복의 향기를 퍼뜨리는 것이죠.”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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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호섭 이사장 “中동북공정-日독도도발 맞서 역사 방위군 역할”

    대한민국에서 동북아시아 역사는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등이 불거질 때마다 국민의 관심사가 된다. 동북아 역사 왜곡 등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동북아역사재단이 이달 22일로 창립 10주년을 맞이한다. 이를 앞두고 19일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62)을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재단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출신이다. 김 이사장은 동북아역사재단의 역할을 일본과 중국 등의 역사 왜곡에 맞선 ‘역사의 방위군’으로 비유했다. “일본과 중국은 자국의 역사관을 국제적으로 반영하려고 전천후로 뛰고 있어요. 일본은 미국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에 연간 300만 달러(약 30억 원)씩 5년간 파격 지원하고 있고요. 한국은 한발 늦었지만 역사 왜곡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그는 고구려와 발해 등의 연구 성과를 국내외에 알려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소개했다. 재단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대)와 하와이대 등과 학술 교류를 하고 영문판 동북아역사저널(Journal of Northeast Asian History) 등을 발간하며 재단 연구 총서를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 출판한다. 동시에 국내에선 강단 사학자와 재야 사학자의 소통을 위해 분기별로 학술회의를 열고, 고교 선택과목으로 ‘동아시아사’를 신설했다. “재단은 동북아 영토와 역사를 연구하고 국내외 동향을 모니터링하고 필요 시 정부에 정책을 건의한다는 점에서 일반 연구기관과 다른 점이죠. 일본 역사교과서가 개편될 때마다 미리 입수해서 문제점을 분석해 관계 기관에 보고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식이에요.” 특히 김 이사장은 “독도 영토 주권을 지키는 게 중요한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독도 연구를 수행하면서 해외 역사 교사들을 독도로 초청하고 서울 서대문구에 독도박물관을 지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산 낭비 논란도 적지 않다. 최근 8년간 45억 원이 투입된 동북아 역사지도가 대표적이다. 이 사업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한민족의 역사 강역을 시대별로 표기한 지도를 만들 목적이었지만 ‘함량 미달’ 문제가 불거져 결국 폐기됐다. “연세대·서강대 사업단이 사업을 맡았는데 역사학자들이 주로 사업에 참여해 지도로서의 함량이 떨어졌죠. 사업의 자문위원이 사업의 평가위원으로 참여하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도 있었습니다.” 그는 “재단이 사업 관리·감독을 잘못한 책임이 크다”면서도 “동북아 역사지도를 다시 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교과서에 쓰이는 역사부도는 중국과 일본이 제작한 지도를 차용해 쓰고 있는 실정이죠. 올바른 역사 교육을 위해 우리가 만든 동북아 역사지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는 “새로 제작하는 역사지도에는 역사학자, 지도학자, 역사지리학자를 골고루 참여시키고, 인터넷 포털 등을 이용해 디지털화도 함께 하겠다”며 “교육부의 의견을 반영해 외부 기관에 용역을 주지 않고 재단이 주도적으로 사업을 벌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재단은 내년도 예산(3억 원)으로 지도 제작에 착수할 계획이다. 그는 “앞으로 15년간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도를 제작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9월 ‘4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그의 임기는 2018년까지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 201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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