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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중에서도 가장 진한 대홍(大紅)색 비단 위에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과 다산을 상징하는 각종 씨앗들을 빼곡하게 수놓았다. 조선 왕실의 공주와 옹주, 군부인(郡夫人) 등 왕실 혼례 때 제작된 ‘활옷’은 침선장과 금박장 등 상의원(尙衣院·궁중 의복을 만들고 왕실 보물을 관리하던 관청) 소속 장인 16명이 투입돼 만든 ‘궁중 예술의 정수’로 꼽힌다. 궁중 자수 기법으로 제작된 조선 왕실의 활옷은 국내 30여 점, 국외 20여 점 등 총 50여 점이 현존한다. 왕실에선 활옷을 ‘홍장삼(紅長衫)’이라 불렀다.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은 특별전 ‘활옷 만개―조선왕실 여성 혼례복’을 15일 개막한다. 이번 전시에선 순조의 둘째 딸 복온공주(1818∼1832)가 혼례 때 입었던 홍장삼을 비롯해 국내에 있는 활옷 3점과 미국 필드 박물관, 브루클린 박물관, 클리블랜드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등 해외 소장 6점 등 활옷 9점을 한자리에 선보인다. 이 밖에도 왕실 혼례와 관련된 기록물 ‘국혼정례(國婚定例)’ 등 유물 110여 점을 소개한다. LACMA 소장 활옷은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본명 김남준·29)이 2021년 10월 기부한 1억 원으로 보존 처리를 마치고 처음 공개된다. 지난해 9월 말 미국에서 들여온 이 활옷은 1년 가까이 오염되거나 손상된 부분을 세척하고 곳곳에 발려 있던 접착제를 제거해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20세기 초 제작된 이 활옷은 홍색 민무늬 비단 겉감에 연꽃, 모란, 봉황, 백로, 나비 등 길상 문양을 화려하게 수놓은 것이 특징이다. RM은 “활옷 연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세계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한국의 전통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해당 유물은 전시를 마친 뒤 다시 LACMA로 돌아간다. 12월 13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지난달 창간한 계간지 ‘타우마제인’(캐럿하우스) 창간호가 던지는 질문이다. 밑도 끝도 없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물리학 생명과학 수학 경제학 정치학 철학 등 분야의 학자 24명이 글을 실었다. 우주의 탄생부터 숫자 ‘0’의 발명, 정치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 존재를 이루는 근간을 탐구하기 위해서다. 타우마제인은 고대 그리스어로 ‘경이로움’을 뜻한다. 타우마제인 발행인인 이한구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석좌교수(78)는 11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How(어떻게)’의 세계에서 ‘Why(왜)’라는 질문을 던지려 한다”며 “나를 일깨우는 경이로움은 바로 이러한 근원적인 의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부를 축적하고 사회를 발전시킬 것인지 방법을 궁리하는 응용학문의 문법에서 벗어나 우리는 ‘왜’ 존재하는지 근원적인 이유를 들여다보자는 취지다. 이 교수가 창간을 결심한 건 올해 3월. 청년들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성장하길 바라서다. 이 교수는 “요즘 대학생들은 ‘팀플레이’를 원하지 않는다”며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선 타인이라는 변수를 완전히 제거하고 나 혼자 달달 외워 시험을 치르는 강의가 더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A+를 받고, 어떻게 하면 취업이 될까…. ‘어떻게’에만 매몰된 청년들은 타인이라는 세계를 만나는 대신에 자발적인 고립을 선택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왜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지, 이런 질문은 ‘왜’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지요.” 이 같은 이 교수의 뜻에 공감해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를 비롯한 학자 8인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타우마제인은 20, 30대 독자를 대상으로 쉽게 쓴 글을 실을 계획이다. 이 교수는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든 청년들에게 우리 존재의 근원을 들여다보자는 타우마제인은 당장엔 와 닿지 않을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지금 왜 이렇게 달려왔나, 나는 왜 사나’ 하는 의문이 떠오를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창간호 표지엔 “세상에 경이롭지 않은 존재란 없다”는 문장이 실렸다. 이 교수는 “세상을 다르게 보려는 탐구자의 눈엔 정원의 크고 작은 나무들, 풀들, 벌레들, 심지어 돌멩이 하나까지 평범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앞으론 ‘인공지능(AI)’과 ‘기후위기’를 비롯해 다채로운 주제를 다룰 계획이다. 이 교수는 “경제성장과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도 중요한 과제이지만 타우마제인은 잠시 멈춰 서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겠다”고 강조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한국 독자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독자입니다. 한국에서 등단 40주년 행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제 책을 사랑해준 한국 독자들 덕입니다.”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소설가 위화(余華·63·사진)는 8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날 개막한 ‘2023 서울국제작가축제’ 참석차 방한했다. 1983년 단편 ‘첫 번째 기숙사’로 등단한 위화는 한국에서도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대표작 ‘인생’(푸른숲·1997년)과 ‘허삼관 매혈기’(푸른숲·1999년)는 국내에서도 각각 10만 부와 25만 부가 넘게 팔렸다. 위화는 특히 ‘허삼관 매혈기’가 사랑받은 이유에 대해 “해학을 이해하는 한국 독자의 소양이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개정판 ‘허삼관 매혈기’ 서문에서 “내가 묘사한 것은 물질적으로 빈궁한 시대였으나 어떤 독자는 그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느꼈다”며 “삶 속의 아름다움이란 때로 빈궁과 부귀만으로는 절대 가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쓴 바 있다. 간담회에선 위트 있는 답변이 이어졌다. 위화는 “등단 40주년인 걸 모르고 있다가 푸른숲(출판사)에서 알려줘서 알게 됐다. 중국에선 이런 기념회를 한다고 하면 작가들이 곧 돌아가시는 줄 알기 때문에 안 하는 것 같다”며 “등단 80주년을 하게 되면 그때도 한국에 와서 하려고 한다”고 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7세기 영국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섬나라 바베이도스의 설탕 농장에서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던 흑인 노예들은 무덤조차 갖지 못했다. 그들과 관련해 이 섬에 남아 있는 흔적은 한 설탕 농장에 ‘노예의 길’이라 적힌 빛바랜 표지뿐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인 저자는 아프리카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이 섬을 거닐며 이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책은 15∼20세기 유럽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지워지거나 주변으로 밀려났던 ‘아프리카의, 아프리카에 의한, 아프리카를 위한’ 역사를 복원했다. 저자는 유럽 각국이 아프리카에서 이권을 장악하려 각축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근대가 수립됐다고 본다. 15세기 유럽이 아시아에 진출하기 위해 대항해 시대를 연 것이 근대의 시작이라고 보는 관점과는 다른 해석이다. 유럽이 수 세기 동안 상업적 유대를 구축하고자 갈망했던 대상은 아시아라기보다 서아프리카 중심부에 있다고 알려진 부유한 흑인 사회였다는 것. 일례로 16세기 초 포르투갈 국왕의 자문관 주앙 드 바후스는 아시아와 향신료 무역을 시작한 뒤에도 “기니와의 교역만큼 안정된 수익을 보장해 주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후 3세기 동안 유럽 각국은 오늘날 가나 해안에 기지를 60개 넘게 세웠다. 이때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강제 이송된 아프리카인 수는 약 1200만 명에 이른다. 아프리카와의 무역에서 나온 부와 인력이 근대 산업혁명의 근간이었다는 분석이다. 아프리카인의 주체적 역사도 조명했다. 1791년부터 1801년까지 생도맹그(현재 아이티)에선 노예 출신 자유인들과 흑인 노예 등이 힘을 합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노예제를 폐지했다. ‘블루스’와 ‘재즈’는 19세기 말 미국 루이지애나로 강제 이주된 흑인들이 만들어낸 문화다. 저자는 “가장 악질적인 역사적 망각이 대서양 연안 전역에 흩어져 있는 노예시장들이나 플랜테이션 사회들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라며 “망각이 일어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자리는, 단연코 부유한 나라 국민의 마음속”이라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무지갯빛이 감도는 2.5mm 크기 자개엔 국화 꽃잎의 주름이 하나하나 새겨졌고, 이 같은 조각 10점이 만발한 국화 한 송이를 이뤘다. 국화 넝쿨무늬 770개와 모란 넝쿨무늬 30개, 그 주변을 두른 연주 무늬(구슬을 꿴 듯한 문양) 1670개가 가로 33cm, 세로 18.5cm, 높이 19.4cm 크기의 직사각형 상자를 감쌌다. 약 800년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영롱한 빛이 또렷했다. 무늬를 만드는 데 쓴 자개는 모두 4만5000여 개에 이른다. 13세기 고려 나전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나전 국화 넝쿨무늬 상자’가 일본에서 국내로 환수돼 6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올해 7월 일본인 소장자로부터 매입한 것으로 정교한 문양이 고려 나전공예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화 넝쿨무늬를 감싼 황동 선의 굵기는 0.3mm에 불과하다. 이용희 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장은 “당시 이 정도 굵기로 금속선을 가공할 수 있는 나라는 별로 없었다”며 “당대 최고의 공예술이 집약된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나전 솜씨가 세밀하여 가히 귀하다”며 고려나전을 예찬했다. 상자 뚜껑의 국화 넝쿨무늬와 모란 넝쿨무늬는 각각 13, 14세기 유행한 것이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13, 14세기 문양의 변천 과정이 반영돼 나전공예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유물은 전형적인 고려 나전칠기 제작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X선 분석 결과 목재 틀 위에 직물을 입힌 뒤 골분(骨粉·동물 뼈를 분쇄한 가루)을 섞어 옻칠한 것으로 파악됐다. 자개 무늬는 최고급 전복 껍데기에 칼로 섬세한 문양을 새겨 잘라낸 뒤 가장자리를 매끄럽게 갈아내는 ‘따내기’ 기법으로 제작됐다. 상자에선 장석(裝錫·목가구에 장식이나 개폐용으로 부착하는 금속)을 붙였다 뗀 흔적도 나왔다. 처음엔 잠금장치가 있는 함(函)으로 제작됐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까지 현존 고려 나전칠기는 총 15점(국내 3점, 일본 영국 미국 등 국외 12점)이 파악됐으나, 이 상자가 새로 확인되면서 1점이 추가됐다. 유물이 일본으로 반출된 경위는 파악되지 않았다. 일본의 한 가문에서 100년 넘게 소장하던 것을 2020년 일본인 소장자가 사들였고, 그가 지난해 7월 재단에 연락해 소장 사실을 알렸다. 상자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며 문화재청이 추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추진할 방침이다. 보물로 지정된 ‘나전 모란 넝쿨무늬 경전함’(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보다 정교함과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는 평가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더 많은 이들이 전통 매듭을 예뻐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 매듭공예가 이부자 씨(79·사진)는 5일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막한 특별전 ‘매듭’ 전시장에서 자신이 1995년 만든 ‘비취발향노리개’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화려한 오색 봉술(봉처럼 기다랗게 늘어뜨린 여러 가닥의 실)에 더해 붉은 끈목(여러 올의 실을 꼬거나 짜서 만든 끈)으로 활짝 핀 꽃송이를 형상화한 매듭이 장식된 이 작품으로 이 씨는 1996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올봄 이 씨는 이 작품을 비롯해 40년간 만든 작품 144점을 모두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전시는 이 씨의 기증작과 작업도구 등 162점을 선보인다. 이 씨는 늦깎이 매듭공예가다. 37세 때인 1981년 신문기사에서 국가무형문화재 매듭장 고 김희진(1934∼2021)의 매듭 강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통 매듭에 매료됐다. 한국매듭연구회 일원으로 매듭에 입문한 그는 “식비를 아껴가면서 작품 재료에 쏟아부었다”며 “취미로 시작한 매듭공예가 내 인생을 바꿨다”고 했다. 그는 전승공예대전에서 총 7번 수상했다. ‘모시발 발걸이’는 그가 2012년 연 개인전의 대표작으로 꼽았을 정도로 아끼는 작품이다. 작품에 쓰인 모시는 이 씨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입었던 모시 치마저고리를 재사용했다. 그는 “내겐 일상의 모든 것이 작품의 재료”라고 했다. 전시에선 옥나비 장식에 국화매듭, 가락지매듭 등을 더한 ‘옥나비 노리개’와 묵주 염주 목걸이 안경집 등 일상용품에 매듭공예를 더한 작품 등이 눈길을 끈다. 매듭으로 장식한 핸드백 등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 작품들도 소개된다. 앞서 2013년 자신의 작품을 민속박물관에 기증한 염색연구가 이병찬 씨의 권유로 기증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부자 씨는 “(작품을 기증하며)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듯 허전함을 느꼈다”면서도 “귀중한 보물들이 전시장을 채운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다만 작업도구는 전시를 마친 뒤 꼭 돌려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아직 하고 싶은 작품이 남아 있어서”다. 11월 6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더 많은 이들이 전통 매듭을 예뻐 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매듭공예가 이부자 씨(79)는 5일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막한 특별전 ‘매듭’ 전시장에서 자신이 1995년 만든 ‘비취발향노리개’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화려한 오색 봉술(봉처럼 기다랗게 늘어뜨린 여러 가닥의 실)에 더해 붉은 끈목(여러 올의 실을 꼬거나 짜서 만든 끈)으로 활짝 핀 꽃송이를 형상화한 매듭이 장식된 이 작품으로 이 씨는 1996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올 봄 이 씨는 이 작품을 비롯해 40년간 만든 작품 144점을 모두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전시는 이 씨의 기증작과 작업도구 등 162점을 선보인다.이 씨는 늦깎이 매듭공예가다. 37세 때인 1981년 신문기사에서 국가무형문화재 매듭장 고(故) 김희진(1934~2021)의 매듭 강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통 매듭에 매료됐다. 한국매듭연구회 일원으로 매듭에 입문한 그는 “식비를 아껴가면서 작품 재료에 쏟아 부었다”며 “취미로 시작한 매듭공예가 내 인생을 바꿨다”고 했다. 그는 전승공예대전에서 총 7번 수상했다.‘모시발 발걸이’는 그가 2012년 연 개인전의 대표작으로 꼽았을 정도로 아끼는 작품이다. 작품에 쓰인 모시는 이 씨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입었던 모시치마저고리를 재사용했다. 그는 “내겐 일상의 모든 것들이 작품의 재료”라고 했다. 전시에선 옥나비 장식에 국화매듭·가락지매듭 등을 더한 ‘옥나비 노리개’와 묵주 염주 목걸이 안경집 등 일상용품에 매듭공예를 더한 작품 등이 눈길을 끈다. 매듭으로 장식한 핸드백 등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 작품들도 소개된다.앞서 2013년 자신의 작품을 민속박물관에 기증한 염색연구가 이병찬 씨의 권유로 기증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부자 씨는 “(작품을 기증하며)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듯 허전함을 느꼈다”면서도 “귀중한 보물들이 전시장을 채운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다만 작업도구는 전시를 마친 뒤 꼭 돌려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아직 하고 싶은 작품이 남아 있어서”다. 11월 6일까지. 무료.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1979년 10·26사태 한 달 전,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1926∼1980)를 만나 ‘정권 교체’를 논했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대사가 유신 정권 교체를 구두로 명백하게 내비쳐 시그널을 보낸 겁니다.”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10·26사태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설에 관해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62·사진)는 이렇게 단언했다. 이 교수는 “10·26사태는 김재규와 미국의 합작품이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관련 기밀문서가 비밀에서 해제된 200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10·26사태 미국 배후설의 실체를 추적해 왔다. 최근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 1∼3권(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을 출간한 이 교수를 2일 화상으로 만났다. 총 6권으로 기획된 이 책은 1945∼1987년 한국 최고 지도자를 교체하거나 제거하려 했던 미국의 시도를 다룬다. 그중에서도 1∼3권의 부제는 ‘박정희 제거공작편’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글라이스틴 대사는 10·26사태 한 달 전인 9월 26일 김재규와 만나 한국 정치에 관해 우려를 표하며 “한국 국민과 직접 관련되는 문제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언급했다. 이어 글라이스틴은 “현 헌법이나 정치제도가 평화적 정권 교체에 충분히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한국 국민 모두가 우려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 대화는 10·26사태 뒤인 그해 11월 19일 글라이스틴이 미국에 보고한 전문에 남아 있다. 이 교수는 “비록 미국 정부와 김재규 사이에 계획적인 사전 공모는 없었으나, 박정희 정권 교체에 대한 이심전심 격인 묵시적 사전 동조가 있었던 것”이라고 봤다. 당시 전문에는 “나(글라이스틴)는 김재규나 누구에게 박정희의 제거를 용인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 적이 없다”고 한 내용도 나온다. 이 교수는 “외교 분쟁이 일어날 수 있었기에 글라이스틴은 발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전문 자체가 김재규와 만난 사실을 숨기다가 뒤늦게 발각되면서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글라이스틴 대사는 1999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입장을 바꾼다. 그는 회고록에서 10·26사태를 언급하며 “(미국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공헌했다”며 “미국은 자신들의 행동과 말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박 전 대통령의 몰락에 일조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10·26사태에 미국의 힘이 작용했음을 우회적으로 기술한 회고”라며 “외교 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만큼 이 정도가 미국 측 핵심 인사가 남길 수 있는 최대한의 고백”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박정희 정권 교체를 원한 까닭은 뭘까. 이 교수는 “표면적으론 독재로 인한 인권 침해였으나 본질적인 이유는 한국 정부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 시도”라며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되면 한국 최고 지도자를 교체하거나 제거하려 했다”고 했다. 책 4∼6권 ‘전두환 제거공작편’은 올해 말 출간될 예정이다. 이 교수는 다음 편에 관해 “미국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전두환을 끌어안고 있다가 5·18민주화운동 같은 일이 재발하고 한반도에 소요 사태가 지속되면 북한이 쳐들어와 남한이 공산화될 수 있다고 봤다”며 “전두환 제거 작전을 구상한 이유”라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한 선비가 툇마루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마당 한가운데 놓인 화분을 바라보고 있다.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독서여가(讀書餘暇)’ 속 장면이다. 겸재가 52세 무렵 서울 북악산 아래 유란동에서 생활하던 때 그린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꽃과 나무 사랑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서울 강남구)은 특별전 ‘조선양화(朝鮮養花)―꽃과 나무에 빠지다’를 2일 개막했다. 3부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국보 ‘백자청화매죽문호’를 비롯해 꽃과 나무를 담은 조선시대 서화와 도자, 기록물 등 110점을 한자리에 선보인다. 전시물 중 조선 초기 문신 강희안(1417∼1465)이 쓴 ‘양화소록(養花小錄)’은 조선 사대부의 원예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한국 최초의 전문 원예서인 이 책에서 강희안은 화분에서 재배하는 법부터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법, 꽃이 싫어하는 것 등을 담았다. 특히 강희안이 강조한 것은 ‘양생법(養生法)’이었다. 미물인 풀 한 포기일지라도 그 본성대로 잘 살펴 기르면 자연스레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희안은 “식물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 마음과 몸을 피곤하게 하여 천성을 해쳐서야 되겠느냐”고 적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화원은 꽃과 나무를 키우며 자신을 성찰하는 철학적 사유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19세기 ‘백자청화장생문화분’을 비롯해 전시에 소개된 다채로운 분재(盆栽) 문양 장식 백자는 조선 후기 원예문화의 유행을 보여준다. 원예 취미가 유행하면서 분재에 필요한 기물들도 함께 발달했는데, 이 과정에서 분재 문양이 장식된 백자와 도자 화분이 유통되고 소비됐다. 꽃과 나무를 담은 백자와 도자는 그 자체로 감상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11월 30일까지. 5000∼8000원.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직장인 윤모 씨(43)는 정부가 다음 달 2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자 급하게 제주와 일본행 항공권을 알아보고 있다. 당초 2일 출근 탓에 여행은 고려하지 않았으나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여력이 생긴 것이다. 정부의 임시 공휴일 지정으로 여행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추석 연휴 첫날인 9월 28일부터 개천절인 10월 3일까지 6일을 쉴 수 있고, 추가로 휴가를 내면 최장 12일까지 쉴 수 있어서다. 정부는 추석 연휴 때 사용할 수 있는 숙박 쿠폰 30만 장을 뿌리며 국내 여행 독려에 나섰다. 1일 여행업계에 따르면 정부의 임시 공휴일 지정 소식이 전해지면서 예약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여행사 참좋은여행이 임시 공휴일 지정 소식이 처음 전해진 지난달 28∼31일 예약된 해외여행을 분석한 결과 9월 29, 30일 출발 인원은 1071명으로 나타났다. 일주일 전(8월 21∼24일) 예약자 462명에 비해 131% 늘었다. 참좋은여행 관계자는 “당초 29, 30일은 선호하는 출발일이 아니었는데, 임시 공휴일이 지정되자 문의는 물론 실제 예약도 늘었다”고 전했다. 항공사들도 여행객 증가에 대비해 추석 연휴 운항 편수를 대폭 늘렸다. 대한항공이 추석 연휴 기간 국내선에 임시 항공편 26편, 국제선에 부정기편과 전세기 등을 약 50회 투입하기로 했다. 아시아나항공도 국내선과 국제선에 약 25편, 티웨이항공은 118편, 진에어는 84편을 추가 편성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날 온라인 여행사를 통해 5만 원이 넘는 국내 숙박 상품을 구매하면 3만 원 할인 쿠폰을 주는 ‘K컬처 활용 내수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당초 여행 비수기인 11월 60만 장을 배포할 예정이었지만 임시 공휴일이 지정되면서 절반을 앞당겨 배포한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유커)이 추석 연휴를 전후해 몰려들 것이란 기대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제주도에는 6년 5개월 만에 처음으로 중국발 크루즈선 단체 관광객이 입도했다. 크루즈선 ‘상하이 블루드림스타호’에 탑승한 유커 680여 명은 성산일출봉 등 유명 관광지를 둘러본 뒤 롯데면세점, 신라면세점 등을 찾아 국내외 브랜드 화장품과 식품 등을 구입했다.이건혁 기자 gun@donga.com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기댈 친구가 많은 사람의 노화 시계는 더디게 흐를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 교류는 우리 뇌의 ‘인지 예비력’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인지 예비력이란 스트레스 등 특정 상황에 놓였을 때 끌어와 저항할 수 있는 뇌의 힘이다. 치매를 비롯한 뇌의 병리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긍정적인 대인관계에서 나온다는 분석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 노인학 교수가 35년간 접한 노화 관련 연구 결과와 사례를 집약했다. 저자는 “우리의 인체 시계를 변화시키는 요인들 중 80% 정도를 조정하고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수면 시간이 대표적이다. 아일랜드 노화종단연구에서는 50세 이후 하루 수면 시간이 7시간 미만이거나 9시간 이상인 경우 모두 기억력, 집중력, 학습능력 면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연구 결과를 2020년 발표했다. 깊은 잠을 자는 ‘서파수면’ 동안 뇌 세포 사이의 공간이 뇌척수액으로 채워진다. 이 액체는 낮 동안 축적된 독소들을 씻어주는데, 치매를 유발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베타아밀로이드와 타우 단백질도 해당된다. 7∼9시간 정도 최적의 수면시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뇌가 독소와 폐기물을 정기적으로 씻어내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스트레스는 노화를 촉진시킨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이 스트레스와 백발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는데, 스트레스 반응 강도가 높을수록 각각의 모낭에 분포한 교감신경이 더 많은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노르아드레날린은 탈모를 가속화할 뿐 아니라 머리카락의 색소도 격감시켰다. 스트레스로 인해 색소를 생성하는 줄기세포가 소실되고, 영구적으로 재생하지 못하게 된다. 저자는 가장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타인과 고민 나누기를 꼽았다. 스트레스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인 코르티솔 수치는 타인과 감정을 공유할 때 현저하게 낮아진다. 이 수치가 만성적으로 상승하면 세포 노화를 가속한다. 저자는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원제 ‘Age Proof’.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모 은행 로고가 그려진 푸른색 볼펜 한 자루는 은희경 작가(64)에게는 ‘못 버릴 물건’이다. 5년 전 문학 행사가 끝난 뒤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10년 만에 만난 한 선배 시인이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볼펜 한 자루를 꺼내 건넸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그에게 시인이 말했다. “너무 반가워서.” 그 볼펜과 함께, 그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잠들곤 했던 청춘의 나날들이 그에게 다시 왔다. 은 작가는 “나를 소설가로 이끌어준 시심(詩心)이 깃든 볼펜”이라며 “손에 꼭 쥐었던 그 볼펜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12년 만에 산문집 ‘또 못 버린 물건들’(난다)을 출간한 은 작가를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산문집엔 그가 일상 속 사물에 관해 쓴 글 22편이 담겼다. 모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3년간 썼다. 그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기능적으로만 느꼈던 물건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며 “지금의 나를 말해주는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물건 속엔 매일 조금씩 변화해온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는 2002년 미국 워싱턴주립대 객원연구원으로 시애틀에 머물 때 구매한 3달러짜리 구둣주걱을 애용했다. “코끼리 상아로 만든 구둣주걱이 미적으로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시애틀의 한 동물원에서 아기 코끼리를 마주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내가 그동안 코끼리 몸의 일부를 구둣주걱으로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순간”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날 이후 상아로 만든 구둣주걱을 볼 때마다 되묻는다. ‘상아로 만든 구둣주걱, 이대로 좋은가.’ 그는 “오래된 물건들과 함께 조금씩 변해가면서 지금의 내가 됐다”고 했다. ‘타인에게 말 걸기’(문학동네·1996년) 속 단편 ‘먼지 속의 나비’의 주인공은 아끼던 몽블랑 만년필을 화장실에 빠뜨린 뒤 어렵사리 꺼내지만, 무언가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만년필을 버린다. 반면 ‘중국식룰렛’(창비·2016년)에 실은 단편 ‘장미의 왕자’는 손님이 카페에 놓고 간 몽블랑 수첩을 보관하는 점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여기엔 수첩을 수차례 잃어버리고, 잃어버렸던 볼펜을 가까스로 되찾았던 그의 경험이 반영됐다. “이제는 물건 하나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조금 더 기다리고 여지를 주는 사람이 됐어요. 이야기도 마찬가지예요. 단언하기보다 여지를 주는 이야기가 쓰고 싶어요.” 이처럼 그가 물건을 못 버리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소설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에 기억을 다 간직하려 한다”고 했다. “소설로 쓰지 왜 아깝게 산문으로 냈느냐”는 후배 작가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런 거 또 많아.” 은 작가는 내년 봄부턴 계간 문학동네에 장편소설을 연재할 계획이다. 어떤 이야기일까. “왔다 갔다 해요. 연애 소설을 쓸지, 몸에 관한 이야기를 쓸지.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늘 그렇듯 내 길을 찾는 중입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국가 주도로 자경단이 조직돼 무기를 공급하고, 추후 살인자를 처벌하지 않는 등 일본 군경과 자경단이 연계해 활동했습니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간토대지진 조선인·중국인 학살 100년’을 주제로 30일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센터에서 열린 국제 학술 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분석했다. 그는 1923년 9월 일본에서 간토대지진 직후 벌어진 학살 사건에 대해 “제노사이드(대량 학살)에 관여한 일본 정부의 국가 책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간토학살은 국제법상 ‘제노사이드’”독립기념관과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이날 심포지엄의 부제는 ‘진실, 책임, 기억’이었다. 1923년 9월 일본 군경과 자경단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진실을 역사적으로 기억하고, 나아가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학자 20명이 발표자 및 토론자로 참여했다. 이 교수는 이날 발표한 ‘제노사이드로서의 학살과 국제법’에서 국제법의 ‘제노사이드 금지 원칙’을 위반한 책임을 일본 정부에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1948년 유엔총회가 채택한 ‘집단살해죄의 방치와 처벌에 관한 협약’의 제노사이드 요건을 갖췄다고 봤다. 일본인과 구별되는 특정 집단을 표적으로 삼아 고의로 살해한 것 등이 요건에 부합한다는 분석이다. 이 교수는 학살 사건을 ‘식민지 제노사이드’로 명명했다.● “중국인 학살, 日정부 배척 정책 탓”정러징(鄭樂靜) 중국 원저우대 교수는 발표문 ‘학살·수용·송환: 간토대지진 중국인 학살 사건을 돌이켜보며’에서 당시 자행된 재일 중국인 학살 사건을 조명했다. 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이 소장한 ‘외무성 기록’과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문서관이 소장한 ‘일본진재참살화교안’ 등을 분석해 도쿄와 가나가와현 중국인 거주지 등에서 중국인 800여 명이 학살당했음을 밝힌 것. 정 교수는 학살 배경에 일본 정부의 중국인 노동자 배척 정책이 있었다고 밝혔다. 일본은 1918년 중국인 노동자의 입국을 막기 위해 ‘외국인 입국에 관한 사항’ 등 법령을 공표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 내 노동력이 극도로 부족해지자 중국인 노동자가 유입됐으나 1922년 군축 이후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면서 재일 중국인에 대한 혐오가 팽배했다는 분석이다. 대지진 직전 일본 각지에서 일본인과 중국인 노동자 간 충돌 사건이 다수 벌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 교수는 “재일 중국인 학살 사건은 근대 일본 정부가 시행한 중국인 노동자 배척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우리 안의 혐오 들여다봐야”‘우리 안의 혐오’를 성찰한 발표도 눈길을 끈다. 이소훈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발표문 ‘제노포비아와 간토대지진 때의 학살’에서 인종주의에 기반한 혐오가 학살의 뿌리임을 밝혔다. 이어 2018년 예멘 난민 500여 명이 제주에 입국했을 때 대규모 반대 집회가 열렸던 한국의 현실을 조명했다.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란 점에서 한국 사회에도 인종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교수는 “식민 지배와 인종주의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또 다른 대상을 인종주의로 대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수규, 정황봉, 이만수, 이재호, 김성동….’ 일본 군마(群馬)현 후지오카시 조도지(成道寺)에 있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뒷면에 한문으로 새겨진 17명의 이름 중 일부다. 이들은 1923년 9월 당시 위협을 느끼고 경찰서로 피신했다가 자경단에 살해당했다. 위령비는 1957년 지역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며 자발적으로 세웠다. 일본 각지에 흩어진 위령비와 각종 문헌 등 사료 조사를 통해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 296명의 명단이 새로 파악됐다. 국내 사학자 10여 명이 소속된 ‘1923제노사이드연구소’(연구소)는 최근 작성한 보고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명부에 관한 실태조사’를 동아일보에 공개하고 지난해 조사를 통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29일 밝혔다. 실태조사는 시민단체 ‘1923한일재일시민연대’가 함께 했다. 그간 국내에서 만들어진 간토대지진 피살자 명부는 1952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내무부가 290명(중복 등 제외 시 205명)의 이름 및 본적, 피살 경위 등을 파악한 ‘일본 진재시 피살자 명부’가 유일했다. 기존 명부와 새로운 연구 결과를 종합해도 현재까지 이름이 파악된 조선인 희생자 수는 501명에 불과하다. 간토대지진 당시 조사가 제한된 상황에서 피살 장소와 숫자만 기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사(6661명)를 기준으로 해도 나머지 6160명의 희생자는 이름조차 모르는 셈이다. 충남 천안시 연구소에서 26일 만난 성주현 연구소 부소장(63)은 “정부 주도로 일본 관공서 소장 희생자 명부를 추가로 파악해 희생자 이름을 역사에 뚜렷이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간토학살 희생 6661명중 501명 파악… 中은 800명중 750명 확인 中, 학살 직후 희생자 명부 파악… 韓, 100년 되도록 명부조차 못갖춰1923제노사이드硏-한일시민연대 “역사 기억하려면 이름 더 찾아야사료 대부분 日에… 학계 연대 필요”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 발생 직후 최소 6000여 명의 조선인이 일본의 군경과 자경단에 의해 살해됐지만 일본뿐 아니라 우리 정부 측에서도 제대로 된 실태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피해 조사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희생자 명부조차 미비한 실정이다.● 희생자 명부조차 없는 한국 1950년대 초 내무부가 조사해 마련한 ‘일본 진재시 피살자 명부’는 주일 한국대사관 창고에 묻혀 존재마저 잊혀졌다. 그러다 학살 90년이 된 2013년 7월 주일 한국대사관을 신청사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피해 당시엔 한반도가 일제에 강점된 상황이었고, 광복 뒤에도 6·25전쟁 등으로 혼란을 겪었다고는 해도 피해 규모에 비해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한국과 달리 대지진 당시 800여 명의 자국민이 학살당한 중국은 당시 북양정부가 학살 직후 희생자 750여 명의 명부를 파악했다. 1923제노사이드연구소의 성주현 부소장은 “한국은 이제 희생자 이름을 추적해야 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시민단체, 희생자 이름 추적 연구소와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시민연대)는 관공서 문헌과 위령비 등 사료 속에 흩어진 희생자의 이름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동아일보 등 관련 신문기사 △목격자 최승만 씨의 회고록 ‘극웅필경’ △일본 도쿄 조선대가 1963년 발행한 ‘관동대진재 조선인학살의 진상과 실태’ △도쿄 현지 희생자 추도비 4건 △재일조선인 사학자 강덕상이 조선인 학살 희생자 관련 문헌을 종합해 1963년 발간한 ‘현대사자료’ 등 조선인 희생자 이름이 담긴 사료 16건을 조사해 피살자들의 이름 317명을 찾아냈다. 이들 가운데 중복된 이들을 제외하면 모두 296명이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드러나지 않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사료들이 더 있다. 일례로 일본 사법성(현 법무성)이 1924년 조선인 희생자 230명을 발표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 사법성이 희생자 수를 종합하며 명부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재까진 발표된 희생자 수의 바탕이 된 명부 자료는 공개된 적이 없다. 성 부소장은 “명부 자료는 앞으로 연구소가 추적해야 할 핵심 사료 가운데 하나”라고 꼽았다. 또 일본 요코하마엔 간토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 유골 수십 기를 봉안한 납골당이 있다. 여기에도 희생자 이름이 기록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소와 시민연대는 앞으로도 계속 일본의 학자, 시민들과 힘을 모아 조선인 희생자 명부를 찾아낼 계획이다.● “한일 양국 연대 필요” 김종수 시민연대 공동대표(60)는 26일 충남 천안시 연구소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밝혀질 때 ‘조선인 학살’이라는 한 덩어리의 사건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닥친 비극이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2007년 조직된 시민연대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한일재일시민연대’에 참여한 단체 가운데 하나다. 김 대표는 2020년 설립된 연구소의 운영위원장도 맡고 있다. 김 대표는 “간토대학살 희생자와 목격자가 거의 대부분 세상을 떠난 지금 기억의 몫은 미래세대에게 남겨졌다”며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한 사람의 이름이라도 더 찾아야 하는 까닭”이라고 말했다. 시민연대는 희생자 추도 및 출간 사업은 물론 한일 학계와 시민단체의 연대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달 25∼27일엔 ‘간토학살 100주기 문화제’를 열었다. 문화제에 참석한 니시무라 나오토 일본 도시샤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은 “기억도 중요하지만 기록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며 “간토학살을 직접 경험하고 체험한 이들이 살아 있지 않은 지금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아카이브를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 대표는 “간토학살과 관련한 사료는 거의 대부분이 일본에 있기 때문에 일본 학계의 협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한일 양국 시민과 학계의 평화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천안=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극한 호우, 극한 폭염, 극한 대결, 극한 살인…. 올해 여름 우리는 극한이라는 말에 짓눌려 살았습니다. 불안의 불안을 먹고 살고 있었지요. 바로 ‘유심’을 만드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유심은 앞으로 상생이란 말에 의해서 남을 우리로 받들어 가는 잡지가 될 것입니다.” 재단법인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선양회)가 다음 달 1일 시 전문 계간지로 재창간하는 문예지 ‘유심(惟心)’의 신달자 편집주간(80)은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심은 만해 한용운(1879∼1944·사진)이 1918년 9월 1일 창간해 월간지 형태로 3호까지 발간한 문예지다. 2001년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1932∼2018)이 복간했으나 2015년 통권 92권을 끝으로 종간됐다. 8년 만에 다시 펴내는 유심은 만해의 자유·평등사상과 무산 스님이 강조했던 조화의 상생을 지향한다. 발행인을 맡은 권영민 선양회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은 이날 서울 종로구 선양회 서울사무소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각박하고 피폐한 세상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려면 깊은 문학 정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유심의 재창간을 계획했다”고 밝혔다. 재창간호 초대 시인은 2019년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 문태준 시인(53)이다. 신작 시 7편과 에세이 1편이 재창간호에 실렸다. 신 주간은 문 시인에 대해 “유심이 나아갈 상생의 방향과 맞아떨어지는 시인”이라고 했다. 문 시인은 신작 시 ‘가을에게’에서 “저물녘에는 낙엽들을 쓸면서 알게 되었다오/내가 얼마나 많은 나무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지를/그러니 가을이여, 내게 더 많은 당신의 낙엽들을 주오”라고 썼다. 황동규(85) 정호승(73) 등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15인의 신작 시 45편도 재창간호에 함께 담겼다. 황 시인은 넝쿨에서 피어난 호야꽃을 두고 “이런 꽃이라도 피워놓아야/이 억지와 폭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노래할 수 있지/…/세상 사람들 뭐라 뭐라 해도/꽃이 노래하고 죽어야 열매가 열지”라고 쓴 시 ‘호야꽃’을 실었다. 시조시인이었던 무산 스님을 기리는 뜻에서 시인 5인의 신작 시조 15편도 담았다. 권 이사장은 “앞으로도 유심에 신작 시조를 실어 한국 시조문학이 활성화되고 세계에 알려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다시 읽는 만해 한용운’에선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을 새로 번역해 실었다. 재창간호는 3000부를 전국 공공도서관 1700여 곳에 무료로 배포한다. 권 이사장은 “시 정신과 인간 정신이 회복되고 삶의 가치가 중시되는 기운이 조금이라도 자리 잡을 수 있다면 ‘유심’ 재창간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선양회는 내년부터 ‘무산상’을 제정해 문학·예술·문화일반 등 세 분야에서 한국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예술인을 표창할 방침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시를 짓는 원경 스님은 진흙 속에 핀 연꽃 같지요. 제 수도복은 백합의 순결함을 상징합니다. 연꽃과 백합은 본래 같은 하늘 아래 피어 같은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김인중 신부) “(김인중 신부의 한) 작품에서 불교의 무용 승무처럼 긴 옷깃을 펼쳐 너울대는 움직임이 여지없이 제게 와 닿았습니다.”(원경 스님) ‘빛의 화가’ 김인중 신부(83)와 ‘꽃의 대부’ 심곡암(서울 성북구) 주지 원경 스님(61)이 28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서로의 작품에 대해 말했다. ‘세계 10대 스테인드글라스 예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김 신부와 서울 종로구 원각사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시인 원경 스님이 최근 시화집 ‘빛섬에 꽃비 내리거든’(파람북·사진)을 함께 펴냈다. 지난해 봄, 출판사 의뢰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졌다. 책에는 김 신부의 화집을 보며 원경 스님이 쓴 시 54편과 함께 김 신부의 작품 사진 60여 점이 담겼다. 예술은 종교를 뛰어넘어 이들을 한데 엮었다. 김 신부와 원경 스님은 시화집을 함께 펴내며 “예술과 수행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김 신부는 원경 스님에게 묵주를, 원경 스님은 김 신부에게 염주를 선물했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1974년 도미니크수도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 신부는 “예술가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열어 내는 데 그 뜻이 있다. 원경 스님과 나는 서로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어선지 오래전부터 만나 온 사이 같다”며 웃었다. 1984년 송광사에서 현호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원경 스님은 “출가와 더불어 시인의 꿈도 함께 움텄다”며 “말씀 언(言)자와 절 사(寺)가 합쳐져 시(詩)가 됐듯 수행과 예술의 길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참된 진리는 이름을 떠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선미라는 가치 아래 종교의 이름마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불이(不二)적 가르침에 공감했습니다.” (원경 스님) 원경 스님은 김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보며 ‘창(窓)’이라는 시를 지었다. “계절이 흐르는 창에는/이웃의 일상이 흐르고/생각이 많을 땐/사유가 흐르고/휴식이 필요할 땐 차향이 피어나고…이 고운 창을 내신 그대/그 손결 빛나셔라”(‘창(窓)’ 중에서) ‘님을 위한 기도’는 김 신부에게 바치는 시다. 원경 스님은 이 시에서 “소박과 순수의 가없는 사랑 속/그 눈빛에/뭇 군생을 비추시기를”이라고 썼다. 화집과 시집으로 교류했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올 4월 어느 날에는 비가 내렸다고 한다. 빛을 나눠 주는 섬이란 뜻의 ‘빛섬’을 한글 호로 쓰는 김 신부와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 원경 스님이 비오는 날 만나 책제목(‘빛섬에 꽃비 내리거든’)이 정해졌다. 원경 스님은 “우리의 만남이 사회를 화합하고 사랑을 구현하는 자그마한 꽃씨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김 신부는 “사람이 방 안에 갇혀 있으면 다른 데 빛이 있음을 모른다”며 “꽃이 자신을 피워 하늘을 바라보듯 이 책을 읽은 이들이 열린 하늘을 바라봤으면 한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경남 ‘합천 해인사 홍하문’(사진) 등 사찰 일주문(一柱門) 6건이 보물로 지정된다. 일주문은 절에 갈 때 맨 먼저 마주하게 되는 건축물로 조선시대 사찰의 삼문(三門) 체계가 성립되면서 만들어진 문이다. 문화재청은 홍하문과 경남 ‘함양 용추사 일주문’, ‘하동 쌍계사 일주문’, 전남 ‘곡성 태안사 일주문’, ‘순천 송광사 일주문’, 대구 ‘달성 용연사 자운문’ 등을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25일 밝혔다. 해인사 홍하문은 총 14개 공포(栱包)를 올린 다포(多包·기둥머리 위뿐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 공간에도 공포를 짜 올리는 방식) 구조로 화려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주문은 30일간의 의견 수렴 및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최종 지정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 국왕에게 이야기해서 예쁜 여자를 몇 명 골라서 데리고 오라.” 1406년 4월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1360∼1424)가 조선 태종(1367∼1422)에게 보낸 사신은 이 같은 황제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영락제가 ‘조선으로부터 말 3000필을 받은 대가로 은 1000냥을 지불한다’는 칙서를 함께 보내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황제의 본의는 차마 글에 담지 못한 말 속에 숨어 있었다. 명나라 황제의 ‘언서(言書) 불일치’를 폭로한 책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연구해온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 국내 사료와 ‘명실록(明實錄)’을 비교, 분석했다. 명은 황제가 한 말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기록한 ‘선유성지(宣諭聖旨)’를 대부분 파기했고, 명실록엔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윤색한 결과만 담았다. 반면 성지를 받은 고려·조선의 사료에선 황제가 전한 날것의 말이 그대로 확인된다. 황제는 점잖은 글엔 담지 못하는 속내나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욕망을 전하기 위해 선유성지를 고려와 조선의 왕에게 내렸다. 황제의 말과 조선의 대응에선 당시의 비대칭적 외교관계가 그대로 엿보인다. 태종은 영락제가 공녀를 요구한 1408년 4월 이후 7개월간 심사를 거쳐 공녀 5명을 뽑아 보냈는데, 당시는 아버지 태조(1335∼1408)의 상중이었다. 영락제는 공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409년 5월 또다시 사신을 보내 앞선 공녀들의 외모에 대해 하나하나 흠을 잡으며 “왕은 지금 찾아놓은 여자가 있거든 많으면 두 명, 적으면 한 명이라도 다시 보내라”고 했다. 저자는 두 차례 정변을 거쳐 즉위한 태종이 집권의 정당성을 명 황제가 보낸 고명(誥命·외국 국왕을 책봉할 때 작성한 황제의 명령문서)에 크게 의지했기에 이 같은 무리한 요구를 받들 수밖에 없었다고 봤다. 영락제는 사망하기 두 달 전에도 조선 사신에게 “짐이 늙어 입맛이 없으니 밴댕이젓이나 곤쟁이젓, 문어 같은 것을 좀 가지고 오라. … 아울러 스무 살 이상 서른 살 이하로 음식 잘하고 술 잘 빚는 시비(侍婢) 대여섯도 뽑아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온다. 세종(1397∼1450)은 환관들이 전하는 명 선덕제(1399∼1435)의 요구가 정말 황제의 명이 맞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에는 1429년 사신으로 온 조선 출신 환관 김만이 석등잔을 요구하자 “사신이 황제의 명이라 하여 석등잔을 요구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한 기록이 있다. 등불을 켜는 돌로 만든 그릇인 석등잔까지 요구한 건 사적이고 자질구레하다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이에 조선은 명 조정에 보낼 문서에 이 같은 요구를 기록하는 방안도 궁리했다. 세종의 의구심을 선덕제도 눈치챘던 것 같다. 그해 말 선덕제는 “조정에서 요구하는 모든 물건은 반드시 어보를 찍은 칙서에 근거해 지급하라”는 칙서를 조선에 전했다. 저자는 명 황제 가운데 성군으로 꼽히는 선덕제의 이미지는 왜곡된 것임을 우리 측 사료를 통해 밝힌다. 명실록엔 선덕제가 1429년 9월 “왕국(조선)에 진기한 짐승이 많다고는 하나 짐이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니 앞으로는 바치지 말라”고 했다고 나온다. 이는 선덕제의 인자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로 꼽혀 왔다. 그러나 세종실록엔 그해 11월 선덕제가 “좋은 매와 사냥개가 있거든 이를 찾아 바쳐 왕의 아름다운 뜻을 더욱 보이도록 하라”는 칙서가 도착했다고 나온다. 조선 조정은 실제 매와 사냥개를 명에 바쳤다. 명나라뿐일까. 저자는 “역사 기록에 남은 황제의 글은 대부분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고 지적했다. “기록에 묘사된 황제는 언제나 성인과 고전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유교적 덕목에 기초하여 선정과 덕정을 펼치는 절대자였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 있을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간토대지진에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지우려는 ‘삭제의 죄악’에 맞서 당시의 기억을 복원해온 이들이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책 ‘백년 동안의 증언’(책읽는고양이·사진)을 펴낸 김응교 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61)는 23일 서울 노원구의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김 교수는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다룬 한국과 일본의 문학 작품을 연구해왔다. 책에는 그간의 연구와 함께 학살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 자료를 수집해 온 일본 시민의 목소리를 담았다. 김 교수가 이 사건에 주목한 건 일본 와세다대 객원교수로 있던 2001년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문학을 연구하고 있나’ 고민하던 때였다. 윤동주 시인을 연구한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1933∼2023)가 그를 학살이 자행됐던 지바 지역과, 도쿄에 조성된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 추모비’ 앞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자료집을 말없이 그에게 건넸다. 그중 일본 시인 쓰보이 시게지(壺井繁治·1898∼1975)가 1948년 쓴 시 ‘15엔 50전’이 있었다. “자기가 흘린 핏물 웅덩이에 쓰러져 있는 조선인 노동자 같은 사내를 이 눈으로 보았다/그것은 거기뿐만 아니라/가는 곳마다 행해진 테러였던 것이다”(‘15엔 50전’ 중에서) 시의 제목은 학살을 자행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겐 어려운 발음이 있는 ‘15엔 50전’을 일본어로 말하도록 강요한 뒤, 제대로 못하면 살해했던 데서 비롯됐다. 김 교수는 “학살을 목격한 시인은 어둠에 압도되지 않고 현실을 고발했다”며 “이 시를 만난 뒤 폭력을 증언하고 희생자를 애도하는 것이 내가 문학을 연구하는 이유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해 김 교수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다룬 문학작품을 연구해 논문 ‘1923년 9월 1일, 도쿄’를 발표했다. 자비를 들여 희생자 추모비를 세우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집해 온 일본 시민들의 이야기도 책에 담았다. 1982년부터 학살 사건 진상 규명 운동을 펼쳐온 시민 니시자키 마사오 씨는 김 교수에게 “난 그저 100년 전 이곳에서 조선인 학살 사건이 있었음을 증언할 뿐”이라고 했다. 1973년부터 해마다 9월 1일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을 열고 있는 미야카와 야스히코 씨(일조협회 도쿄도 연합회장)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은 폭력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주춧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기억의 힘이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를 끊어낼 거라고 믿습니다. (이 책이) 이들의 뒤를 이어 미래의 100년을 제대로 걸어가기 위한 첫 발자국이 되길 바랍니다.”(김 교수)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카라바조에게 그림은 장식이 아닌 진실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정물화를 그리며 과일의 썩어가는 단면과 시든 이파리까지 담아냈습니다. 싱그럽고 아름다운 순간뿐 아니라 썩어가며 누추해지는 과정까지 세상의 일부라는 진실을 밝힌 것이죠.” ‘바로크 미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1571∼1610)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담은 책 ‘불멸의 화가 카라바조’(한길사)를 출간한 고종희 한양여대 산업디자인과 명예교수(62)는 22일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40년 전 이탈리아 피사대 미술사학과에 입학한 후 카라바조에게 매료된 고 교수는 이후 밀라노와 로마, 나폴리 등을 다니며 카라바조의 발자취를 좇았다. 그는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이 지나간 곳에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라며 “그 흔적을 따라가며 카라바조와 영향을 주고받은 사람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고 했다. 고 교수는 카라바조가 추구했던 진실성이 당대 세상과 조응했다고 봤다. 당시는 마르틴 루터(1483∼1546) 등이 종교 개혁을 한 직후였다. 화려하면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선호했던 로마 교황청과 달리 개신교는 청빈함을 추구했다. 고 교수는 “카라바조가 그린 종교 인물들은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라며 “꾸밈없는 진실한 인간 세상을 그린 카라바조의 작품이 개신교가 추구하는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졌기에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설명했다. 책은 카라바조와 영향을 주고받은 예술가의 관계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1577∼1640)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고 교수는 이들의 접점을 삶에서도 찾아냈다. 1605년 루벤스의 친형이 당대 카라바조의 후원자였던 보르메오 가문의 대주교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루벤스와 카라바조가 같은 이에게 후원을 받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 이 기간 루벤스가 카라바조의 작품 ‘그리스도의 매장’(1602∼1604년)을 접하고 구도 등이 비슷한 동명의 작품(1612년)을 그렸다고 분석했다. 고 교수는 카라바조의 대표작 중 하나로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을 꼽았다. 그는 “당대엔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화가 주종이었는데, 얼굴을 찡그리는 찰나의 순간도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으며 화들짝 놀라는 손짓으로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 그림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0월 9일까지 열리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에서 만날 수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