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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란 무엇일까. 아니, 스포츠는 언제부터 스포츠였을까.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한 인류의 조상들에게 오래 달리기, 도약, 던지기 능력은 필수로 갖춰야 할 조건이었다. 이 실력을 서로 겨루기 시작하면서 스포츠가 탄생했다. 신간 ‘스포츠의 탄생’에 따르면 미국 스포츠 사회학자 앨런 거트만은 스포츠를 일반적인 놀이와 구분했다. 스포츠는 보다 체계적이고 경쟁적이며 신체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자를란트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스포츠의 탄생 배경과 개념을 비롯해 고대 올림피아가 현대 올림픽으로 발전한 과정을 낱낱이 파헤친다. 근대 올림픽의 전신인 고대 올림피아 제전과 범그리스 제전에는 ‘휴전(休戰)’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당시 페르시아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전쟁을 피하고 동맹을 유지해야 했는데, 스포츠가 그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것. 사람들이 여유시간을 누리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은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도 스포츠는 기사(騎士)를 앞세운 종목들을 통해 명맥을 유지했다.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부터는 부상이 난무했던 거친 경기들에 규칙이 세워지고 신체 단련을 위한 이론서가 발간되는 등 스포츠가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근대 초기부터 현대까지는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전문화, 상업화된 시기다. 저자는 서문에서 “스포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깊이 고민할수록 답을 찾기 어려워지는 질문”이라고 썼다. 도핑은 상업화, 세속화된 스포츠의 한 단면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도핑의 과학’ 저자는 신성한 경기장을 얼룩지게 한 도핑 사태의 역사를 다뤘다. 왜 선수들이 약물의 유혹에 빠지는지, 억울하게 도핑 판정을 받는 경우는 없는지도 살핀다. 우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8개의 금메달을 딴 미국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를 기억한다. 당시 은메달 3개를 획득한 헝가리 수영선수 라슬로 체흐를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저자는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기에 정상급 선수들은 도핑의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사실 일부 도핑 판정 약물들은 일반병원이나 약국에서 일상적으로 처방되는 품목이다. 경기력 향상을 위한 의도로 약을 섭취하지 않더라도 도핑 판정이 내려질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감기약과 알레르기 및 천식 치료제에 많이 사용되는 에페드린 성분은 의도치 않은 피해자들을 낳았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수영선수 릭 데몬트는 천식 약을 복용했다가 도핑 검사에서 에페드린이 검출됐다. 2000년 루마니아의 체조 선수 안드레아 라두칸은 37kg의 작은 체구로 인해 감기약 한 알을 먹고도 혈중 에페드린 기준을 넘겨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도쿄 올림픽이 막 시작된 지금, 스포츠의 세계에 푹 빠져보고 싶다면 이 책들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대중들에게 속사포처럼 쏘아붙이는 랩으로 이름이 알려진 래퍼 아웃사이더(본명 신옥철·38)가 도마뱀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위협을 느끼면 꼬리를 끊어버리기 일쑤인 도마뱀들이지만 그가 키우는 것들은 주인의 손길이 익숙한 듯 손바닥과 어깨를 마음껏 돌아다녔다. 그는 도마뱀, 거북이를 키우는 파충류 마니아다. ‘집콕’으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가 늘고 있는 코로나 시대, 그가 초대하는 이색 반려동물의 세계를 알아봤다. “솔직히 처음에는 관상용이라고만 생각했어요. 마음이 지친 날에도 큰 수고 없이 돌볼 수 있는 친구로 여겼죠. 하지만 동물들이 성장하면서 서로 교감하는 즐거움이 커졌습니다.” 10년 전 알다브라코끼리 거북이를 시작으로 파충류를 키우기 시작한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경기 고양시 키즈카페에서 도마뱀, 이구아나 등 약 20마리를 기르고 있다. 한때 300마리 넘게 키웠지만, 한 마리 한 마리 충분히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잘 키울 수 있을 만큼만 남기고 지인들에게 분양했다. 그는 “강아지, 고양이와 달리 파충류는 지능이 거의 없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분리불안도 없다. 파충류로선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주인에게 분양되는 게 이롭다”고 말했다. 그가 파충류를 키우게 된 건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이었다. 가장 가깝게 지낸 이들과 갈등하며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됐단다. 심리적 소통이나 교감이 중요한 개나 고양이와는 다른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파충류는 훨씬 예민했고, 그래서 키우는 재미가 컸다. 처음에는 그가 지나가는 모습만 봐도 숨던 도마뱀들은 점점 그를 ‘몸집은 크지만 해치지 않는 동물’로 인식한 듯 조금씩 다가왔다. 시간이 지나자 핀셋이나 손으로 먹이를 건네면 다가와 먹었다. 그는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에 걸쳐 소통한 끝에 파충류들과 스킨십할 수 있게 됐다.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 기르기 시작한 반려동물들이지만 관계를 구축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초짜’ 파충류 집사였던 그가 길러 온 개체들은 마니아들 사이에 소문이 날 정도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널찍한 키즈카페 마당에서 산책을 시키며 기른 알다브라코끼리 거북이는 좁은 공간에서 사육된 것들에 비해 다리가 튼튼하다고 한다. 계단도 잘 오르고 아웃사이더의 랩 속도만큼이나 이동 속도도 빠르다고. 하나를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 때문에 그는 파충류 사육에 필요한 도구들을 직접 개발했다. 그는 오래 기른 파충류들이 푹신한 흙 위에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다리가 약해지는 게 늘 안타까웠다. 흙에 떨어진 분뇨와 함께 먹이를 섭취해 병에 걸리는 일도 잦았다. 이에 그가 2년간 개발해 2019년 내놓은 사육장 바닥재는 파충류 애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매진을 거듭했다. 그는 “지금은 파충류 사료를 개발하고 있다. 최적의 영양배합을 만들기 위해 1년 6개월째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파충류 기르기가 안겨 준 의외의 선물은 또 있다. 그의 딸 신이로운 양(5)의 정서에 끼친 영향이다. 어릴 때부터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야채를 씻어 사육장에 넣어준 딸은 자신의 것을 주변과 나눌 줄 아는 아이로 자랐다. 그는 “자기 것만 챙기기보다 남을 돌볼 줄 아는 아이로 큰 건 반려동물 덕분”이라며 웃었다. 수많은 반려동물 중 파충류를 기르는 게 어울릴 만한 유형의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집요한 사람’을 꼽았다. “강아지나 고양이는 잠깐 아프다가도 잘 돌보면 낫는 경우가 많지만 파충류는 순식간에 죽을 수 있어요. 파충류의 미묘한 변화를 잘 관찰하는 동시에 파충류 관련 지식을 꾸준히 학습할 수 있는 분들이 훌륭한 파충류 집사가 될 수 있습니다.”고양=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인공지능(AI)이 지금보다 널리 상용화될 2030, 2040년 이후 모습이 궁금할 때 오히려 인간다움에 대해 쓴 인문서를 꺼내 읽습니다.” 네이버에서 9년째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는 김도영 씨(36·사진)는 “책을 청개구리처럼 읽는다. 그럴 때 정보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통찰을 얻을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회사 안팎에 이를 공유하는 업무를 맡은 그가 기획 아이디어를 얻는 창구는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아닌 ‘책’. 그는 최근 내놓은 에세이 ‘기획자의 독서’(위즈덤하우스)에서 책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기른 경험을 소개했다. 19일 전화로 그를 인터뷰했다. “양극단은 서로 통한다고 하잖아요. 10, 15분짜리 콘텐츠가 유행하는 스낵 컬처 시대에 오히려 느리지만 밀도 있는 콘텐츠들이 동시에 주목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책만이 업무나 삶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도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SNS를 살펴보거나 이른바 ‘핫 플레이스’를 찾아다닌다. 온라인 중심의 흐름 속에서도 책처럼 디테일이 살아 있는 콘텐츠에 대한 수요도 적잖이 존재한다는 것. 그는 “브랜드를 만든다는 건 사람 하나를 탄생시키는 것과 같다. 이 정밀한 작업을 위해서는 빠르고 가벼운 것뿐 아니라 느리되 농밀한 콘텐츠도 눈여겨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책에서 아이디어를 찾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5년 전 그는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고심했다. 모두가 홈런 한 방을 날리기 위한 방안을 찾을 때 그의 머릿속에 얼마 전 읽은 야구 책이 스쳤다. ‘초반부터 홈런을 치려고 하면 필패, 1루로 나가는 데 사활을 걸라’는 게 책의 교훈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예산을 다섯 부분으로 나눠 프로젝트를 차근차근 진행했고, 프로젝트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가 한 달간 읽는 책은 평균 6권. 2주 단위로 독서 계획을 짜는데, 마치 식단을 짜듯 한 권의 메인 메뉴와 더불어 사이드 메뉴처럼 곁들여 읽을 책 2권을 정한다. 메인 메뉴는 김 씨가 평소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로 소설, 에세이, 인문서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다. 최근 일을 한다는 게 무엇인지 고민에 빠졌다는 그는 메인으로 ‘일하는 마음’(어크로스)을 읽으면서 ‘일하는 사람의 생각’(세미콜론) ‘혼자 일하는 즐거움’(알프레드)을 동시에 보고 있다. 인상적인 구절을 옮겨 적는 데서 더 나아가 해당 구절의 문체를 좇아 새로운 문장을 써보는 것도 그만의 적극적인 독서 방식이다. 기획자가 아닌 이들도 그처럼 열심히 책을 읽어야 할까? 그는 기획자가 아닌 사람은 거의 없다고 답했다. “백반집 사장님의 ‘오늘 밑반찬은 뭘로 할까’라는 고민, 옷가게 점원의 ‘오늘 쇼윈도에는 어떤 옷을 내걸을까’ 하는 고민도 모두 기획이라고 생각해요. 제 책을 읽은 독자들이 ‘아, 나도 기획자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시기를 바랍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장편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1926년)는 외설적인 대화가 적지 않아 하마터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다.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부상으로 성불구가 된 미국 신문기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의 출간을 주장한 외로운 편집자가 있었으니, 미국 스크리브너스 출판사의 맥스웰 퍼킨스였다. 그는 당시 출간을 망설이던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품 배경이 된 곳에서 이런 표현이 실제 사용된다면 외설적인 말이라도 써야 한다. 이를 회피하는 건 오히려 작가의 잘못일 것이다.” 전설이 된 명작들을 탄생시킨 편집자의 삶을 조명한 책 두 권이 출간됐다. 정보기술(IT)의 발달로 1인 출판 시대가 열렸지만 좋은 책을 만들어낸 편집자들의 신념이나 철학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교훈이다. 신간 ‘편집자의 세계’(페이퍼로드)는 미국을 대표하는 편집자 15명을 소개하고 있다. 퍼킨스뿐 아니라 랜덤하우스 설립자 베넷 서프와 뉴요커 창간자이자 편집자였던 해럴드 로스 등이 주인공이다. 소설 ‘대부’를 발굴해 무명 작가였던 마리오 푸조(1920∼1999)를 일약 스타로 만든 퍼트넘 출판사의 편집국장 윌리엄 타그의 철학은 ‘저자 중심주의’였다. 그는 편집자가 지켜야 할 12가지 에티켓을 철저히 지켰다. 이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저자가 보낸 원고에 대한 회답을 불필요하게 늦춰선 안 된다. 편집자는 해당 작품의 최초 독자이므로 편집자의 의견은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마거릿 애트우드(82),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등을 발굴한 영국 편집자 다이애나 애실도 저자 중심의 편집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최근 출간된 에세이 ‘되살리기의 예술’(아를)에서 원고 교정 시 작가가 의도한 본래의 표현을 살리는 데 중점을 뒀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설령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독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라 작가의 목소리”라며 “원고에 손을 대더라도 출간 즈음에 이르러서는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것처럼 읽혀야 하는데, 이것은 작가와 긴밀한 공조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썼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서양미술에서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신화 속 열두 신과 님프들이,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시대에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작품의 단골소재였다. 그런데 모든 미술작품이 이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신들의 전쟁이 아닌 인간사회의 미시생활사를 담은 고대의 작품이나 영적 가치 대신 세속적 욕망에 초점을 맞춘 중세 그림은 없을까. 이에 대해 ‘다시 쓰는 착한 미술사’의 저자는 아니라고 말하며 “방향을 1도 틀었을 때 보이는 서양미술사는 훨씬 다채롭다”고 강조한다. 홍익대에서 미술학 박사를 취득한 저자는 신간에서 공식 바깥에 존재하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 못지않게 실제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묘비를 수없이 만들었다. 1870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고대인들의 무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이 중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기원전 410년경 제작된 ‘헤게소의 묘비’에는 주인 헤게소와 하녀가 실내에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조각돼 있다. 어머니가 아테네 시민이어야만 자식도 시민권을 인정받은 당시 상황을 반영하듯 헤게소는 자신의 가문을 드러내는 보석을 손에 들고 있다. 세속적 가치를 경시했을 것 같은 중세 때도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린 작품들은 그려졌다. 기사이자 기독교 성인(聖人)인 성 조지(?∼303)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전설에서 그는 북아프리카 리비아 왕국의 공주를 납치한 용을 무찌른 대가로 왕에게 기독교로 개종을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성인의 면모만큼이나 용맹한 기사로서의 모습이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화가인 파울로 우첼로(1397∼1475)는 1456년작 ‘성 조지와 용’에서 성 조지가 공주 앞에서 용을 무찌르는 장면을 로맨틱하게 그렸다. 미술 작품을 비틀어 보는 방법에는 또 어떤 게 있을까. 신간 ‘미술관에 간 해부학자’ 저자는 의사만큼이나 해부학 공부에 몰두한 서양미술 대가들이 작품 속에 숨겨 놓은 인체해부도에 주목한다. 저자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30구가 넘는 시체를 직접 해부하며 인체를 탐구했다. 그가 남긴 1800여 점의 해부도는 현대 해부학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역시 조각을 시작하기 전 시체를 해부하거나 나무로 모델을 만드는 등 철저한 사전연구를 진행했다. 미켈란젤로는 죽기 직전 완성된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스케치를 태워버렸다. 이에 따라 그가 해부학에 정통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그의 해박한 해부학 지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24세에 조각한 ‘피에타’에서 죽은 예수의 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몸 곳곳의 근육뿐 아니라 실핏줄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휴가철 시원한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며 피서하고 싶은 독자라면 두 책이 제안하는 ‘비틀어 보기’를 시도해보면 어떨까.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우연히 살집이 있는 여성 누드모델이 포즈를 취한 모습을 봤어요. 모델인 저조차 그가 뿜어내는 포용력과 우아함에 순간 아기가 돼 안기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누드모델 하영은 씨(53)가 사람의 몸을 읽어내는 시선은 남달랐다. 1988년 누드모델 일을 시작한 그는 1996년 한국누드모델협회를 설립하면서부터 이름을 밝히고 활동하는 국내 1호 공개 누드모델이다. 그는 최근 에세이 ‘나는 누드모델입니다’(라곰)에서 33년간의 경험을 풀어 놨다. 그를 13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누드모델은 직업에 대한 오해가 매우 큰 일 중 하나예요. 순수예술에 가까운 작업이 포르노 취급을 받아 왔기 때문이죠.” 그는 누드모델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협회를 설립했다. 무역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던 그는 한 사진작가의 제안으로 누드모델 일을 하게 됐다. 하지만 누드모델을 향한 시선이 워낙 나빠 협회를 세울 때까지 가족에게조차 이를 밝히지 않았다. 그는 “사실을 털어놓은 뒤 부모님은 물론 오빠들도 어떻게 집안에 그런 일을 숨길 수 있냐며 걱정을 많이 했다. 협회를 만든 후 몇 년간 광주의 본가로 내려가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음에도 협회를 세운 건 누드모델들이 음지에서 활동하며 성폭력에 노출되고 모델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협회를 만들어 소속 모델들의 피해에 공동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히자 동료들은 환호했다. 현재 협회의 소속 모델은 500여 명. 하 씨는 “과거에 비해 나아진 면이 있지만 요즘 누드모델은 불법 촬영 및 유포라는 새로운 위험에 놓여 있다”고 했다. 그가 열악한 환경에서도 누드모델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자신에게 영감을 얻은 사진가나 화가가 수작을 탄생시키는 순간에 중독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완성된 작품을 봤을 때 ‘건졌다’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누드모델의 또 다른 매력은 성별, 나이 등에 따른 제약이 거의 없다는 것. 호리호리하고 근육이 잘 붙은 체형이 누드모델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술 분야부터 인체 모형 같은 의료 보건 분야까지 수요가 광범위해 누드모델 몸의 형태와 정체성은 다양할수록 좋다. “살집이 있든, 나이가 많든 사람의 몸은 다 아름답고 우아합니다. 같은 포즈도 누가 취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죠. 이 매력적인 작업을 저는 늙어 죽을 때까지 할 겁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달러구트 꿈 백화점’(팩토리나인),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인플루엔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최근 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작품들은 모두 공상과학(SF) 혹은 판타지 소설이다. 이제 장르문학은 독자들 사이에서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순수문학 중심의 문단에서 장르문학은 평론가들로부터도 한동안 외면당했다. 장르문학계에 새로운 비평의 무대가 열리고 있다. 요다 출판사는 이달 장르문학 비평선 ‘해시태그 장르 비평선’ 시리즈 2권(사진)을 선보였다. 총 30권으로 예정된 이 시리즈는 SF, 로맨스, 게임, 슈퍼히어로 등 장르문학 소재들을 심도 있게 들여다볼 예정이다. 장르문학 비평팀 텍스트릿(Textreet) 소속 연구자들이 필진으로 나선다. 이 중 이달 출간된 2권을 각각 집필한 이융희, 김효진 씨는 판타지 소설과 SF 콘텐츠를 오랜 기간 연구해 왔다. 1권 ‘#판타지 #게임 #역사’에서는 판타지 소설의 하위 범주로도 잘 다뤄지지 않은 게임 판타지 장르의 미시사를 살핀다. 게임 판타지 소설 분야의 대표작 ‘달빛조각사’, 인기 웹소설 ‘칼의 목소리가 보여’와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1990년대 게임산업의 성장과 함께 시작된 이 분야의 계보와 흐름을 분석한다. 2권 ‘#SF #페미니즘 #그녀들의이야기’에서는 현재 한국 SF 콘텐츠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페미니즘을 다룬다. 상상의 폭이 넓어 가부장제 해체와 모계사회, 평등사회 건설 등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SF와 페미니즘의 만남은 필연이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대표적인 SF 페미니즘 소설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 조애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 등의 작품을 다룬다. 장르문학 작품을 활발히 펴내고 있는 요다는 이번 비평지가 순문학에 비해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극복하고 장르문학의 위상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요다를 운영하는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순문학의 성장 동력은 작품이 비평을 낳고 이 비평이 다시 창작가들을 키워내는 선순환 구조였다. 장르문학계에서도 이런 순환 구조를 만들어 볼 것”이라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지난 40년간 신자유주의가 국제사회를 어지럽혔습니다. 시장만 강조하고 정부와 시민사회의 역할을 경시했죠. 정부의 역할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닥쳤을 때 우리는 준비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불평등 연구의 대가이자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78·사진)의 지적이다.》 최근 신간 ‘불만 시대의 자본주의’(열린책들)를 펴낸 스티글리츠 교수는 책에서 불평등을 심화시킨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그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그는 “이번 팬데믹 사태는 시장과 정부 사이의 균형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며 “코로나19 사태의 배경에도 신자유주의가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자유주의가 경제 선진국의 정부로 하여금 시장의 자율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게 만들어 감염병이 퍼졌을 때를 대비한 사회 안전망을 약화시켰다는 것. 가령 정부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강조했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행정부는 팬데믹의 가능성을 우려해 국가안보회의(NSC) 내에 이에 대비하는 조직을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후 들어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행정부는 이 조직을 없애고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지원되고 있던 감염병 관련 재정도 중단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트럼프 정부 때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유달리 유행했던 신자유주의, 반지성주의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각 나라가 보건 부문에서 먼저 회복돼야 코로나19로 충격을 받은 경제가 살아나길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코로나19 백신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가들에 백신이 공급될 수 있도록 국제기구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백신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한시적으로 유예해 하루빨리 백신을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후 경제 회복 단계에서도 국제적 공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25%에 해당하는 자본을 경기 회복에 활용할 수 있고 이런 방식은 충분한 경기 활성화 효과를 낸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은 그만한 자본이 없으므로 국제 프로그램을 통해 빈곤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이 마련한 특별 지원금 6500억 달러(약 746조6550억 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코로나19 이후 경기회복을 위해 시장에 막대한 돈이 풀리면서 한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부동산 시장이 과열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해법으로 지방 인프라 구축을 통한 인구 분산을 들었다. 수도권 인구 집중이 부동산 값 상승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 전역에 대학, 병원 등 사회기반시설을 확대해 개인이 살고 싶은 도시를 많이 만들 필요가 있다”며 “프랑스는 중소도시(second-tier city)로 이주를 유도했다. 이는 한국처럼 인구 밀도가 높은 국가에서 특히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한국의 주식 열풍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그는 “개인이 충분한 지식과 이해 없이 주식 투자에 뛰어들면 주식시장은 도박장이 돼 버린다”며 “한 회사의 주식을 5년간 보유했다면 그 회사에 대해 잘 알아보고 투자한 것이겠지만 주식을 산 뒤 일주일 혹은 하루, 1시간 뒤 팔아버린다면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얻는 가치는 없다”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영국 팝스타 엘턴 존(74·사진)이 가사에 자신이 언급된 방탄소년단(BTS)의 곡에 대해 직접 화답했다. 11일(현지 시간) 엘턴 존은 자신의 트위터에 “모든 것이 다 맞는 것 같을 때면 나는 BTS의 곡 ‘Permission to Dance’를 따라 부른다”는 글을 올렸다. BTS가 9일 발매한 신곡 ‘Permission to Dance’를 그가 언급한 건 가사에 자신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곡의 초반부에는 “모든 게 다 잘못된 것처럼 보일 때, 엘턴 존을 따라 불러요”라는 가사가 나온다.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엘턴 존의 노래를 들으면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노랫말이다. 엘턴 존은 이 가사를 살짝 개사해 BTS에게 화답한 것이다. BTS 역시 공식 트위터 계정에 엘턴 존의 이 게시물을 리트윗했다.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에드 시런, 프로듀서 스티브 맥 등이 참여해 만든 이 곡은 국내 음원 차트 1위, 92개 지역 애플 아이튠스 톱 송 1위에 올랐다. 뮤직비디오 조회 수는 12일 오후 5시 기준 1억1000만 뷰를 넘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엽기적인 연쇄 살인 행각으로 충격을 줬던 1993년 ‘지존파 사건’, 디자이너 앙드레 김(1935∼2010)에게 권총과 협박 편지가 배달됐던 2000년 ‘앙드레 김 권총 협박 사건’, 1990년대 중반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진 ‘어린이 유괴 사건’…. 1990∼2000년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굵직한 국내 강력 사건들의 수사 과정을 웹소설 플랫폼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게 됐다. 이달 초 카카오페이지에 공개된 논픽션 ‘지존파 강력반장 고병천’에서다. 고병천 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72)이 직접 수사한 강력 사건 9건을 토대로 한 이 작품은 그가 과거 수사자료를 토대로 서술하고, 공동 저자인 이수경 작가가 이를 글로 옮기는 방식으로 집필됐다. 고 전 반장은 12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작품은 웹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시점과 배경, 등장인물 등 모든 디테일이 철저히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서 “경찰 생활 90%를 강력계 형사로 지내다 보니 후배들에게조차도 무섭고 딱딱한 선배로 남았다.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수사 기법이 많아서 이걸 코믹하게 풀어볼 궁리를 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1976년 순경으로 임관해 2009년 은퇴한 고 전 반장은 이 중 30년을 강력계 형사로 지냈다. 퇴직 직전부터 최근까지 10여 년간 허리 수술을 4차례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자신의 수사 테크닉을 후배들에게 하루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고 한다. 고 전 반장은 사건을 조금만 달리 바라보면 범인을 쉽고 빠르게 잡을 수 있는데 현장을 뛰다 보면 경찰들이 이를 종종 놓치는 게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는 이 같은 지혜를 과거 어린이 유괴 사건 해결 노하우를 통해 전한다. 돈을 노리는 유괴범은 뒤를 쫓기보다는 앞에서 덫을 놓는 게 효과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가족을 설득해 유괴범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가족이 너무 애태우는 모습을 보이면 불리해질 것 같아 유괴범에게 새아빠라고 거짓말을 하며 애써 여유 있는 척 유괴범을 유인한 끝에 검거에 성공했던 것. 작품 출간 이후 구독자 수는 단기간에 9만 명을 넘겼다. 주변의 반응이 좋아 만족스러우면서도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새삼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며 웃었다. “경찰 생활 30여 년을 돌아보면 20년은 집에 안 들어가고 10년만 간신히 집에서 잘 수 있었던 세월이었어요. 고충이 많았을 가족들과 고생시킨 후배들에게 많이 미안합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새로 장만한 스마트폰을 땅에 떨어뜨려 액정을 산산조각 낸 당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하겠는가? 1. 술 약속을 잡고 일명 ‘홧김비용’을 지출한다. 2. 결점 속에서 위대한 아름다움을 찾아냈던 미국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떠올리며 재미난 해프닝 정도로 여겨보려 노력한다. 2번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당신은 철학의 세계로 떠나는 급행열차인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어크로스)에 탑승할 자격이 충분하다. 미국 저널리스트가 쓴 철학 에세이가 국내에서 화제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철학서라면 철학자가 남긴 말들을 잘 선별했거나 쉬운 말로 풀이한 개론서를 떠올리겠지만 오산이다. 미국공영라디오방송 NPR의 해외통신원을 지낸 저자 에릭 와이너(58)는 오래 빚은 지혜와 특유의 유머로 독자들을 단숨에 매료시켰다. 위의 ‘스마트폰 사고’는 그가 얼마 전 직접 겪어야 했던 고뇌다. 그의 책은 출간 두 달째 교보문고 기준 인문 분야 1위, 종합 베스트셀러 5위를 지키고 있다. 매력적인 글솜씨로 “빌 브라이슨의 유머와 알랭 드 보통의 통찰력이 만났다”는 평가를 받는 그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제 마음을 사로잡은 첫 번째 철학자는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흔히 인도의 정치적, 정신적 지도자로 여겨지지만 저에게는 철학이 추상적이고 쓸모없는 과목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실용적인 과목이라는 점을 가르친 사람이죠.” 실용성이야말로 철학의 최고 미덕이라고 여기는 와이너는 자신의 여행길에 철학자들을 자유롭게 소환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기차 침대칸에서 간신히 깨어난 그는 문득 ‘사람들은 왜 매일 아침 침대에서 빠져나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서는 삶의 원동력은 의무가 아닌 사명에 있다는 통찰을 남긴 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떠올린다. 잠시 들른 호프집에서는 쾌락을 분석해서 욕망의 분류 체계를 세운 에피쿠로스를 불러낸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욕망에는 자연스럽고 반드시 필요한 욕망과 자연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욕망, 자연스럽지도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이 있다. 와이너 식으로 설명하자면 사막 한가운데에서 마시는 물 한 잔과 여행길에 마시는 맥주 한 잔, 만취 상태에서 더 들이붓는 값비싼 샴페인 한 병이 각각의 욕망에 해당한다. 전 세계가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해줄 말이 있는 철학자가 있을까? 저자는 고대 그리스 스토아학파 철학자 에픽테토스를 꼽는다. 에픽테토스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라고 생각한 철학자. 와이너는 “팬데믹은 우리가 통제하기 어려운 면이 많다. 할 수 있는 것은 과감히 바꾸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전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철학을 정보가 아닌 지식으로, 더 나아가서는 지혜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그는 “철학을 시작하기 위해 밟아야 할 첫 번째 단계는 ‘멈춤’”이라고 말한다. 철학서를 펼쳐 들고 철학자들의 문장을 달달 외워 나갈 게 아니라 어떤 삶을 살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려는 건지 먼저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일스 킹턴이라는 영국의 음악가가 남긴 이 말이 저의 의견을 잘 함축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이 아니라 채소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토마토를 과일 샐러드에 넣지 않는 것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저조차도 은연중에 ‘의사 전달이 서툴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했어요. 자기 존재에 대해 너무 오래 고민해 온 아이들이라 또래보다도 성숙한 표현을 할 줄 아는 친구들이었는데도요.” 지난해 7월부터 약 10개월간 미등록 이주 아동 5명의 이야기를 심층 취재해 신간 ‘있지만 없는 아이들’(창비)로 펴낸 작가 은유(필명·50)가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이 책에는 국내에 2만 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산되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이 일상에서 어떤 배제와 좌절을 겪는지 생생하게 담겼다. 은유 작가는 산업재해로 인한 죽음을 기록한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돌베개),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인터뷰집 ‘폭력과 존엄 사이’(오월의봄)를 출간하는 등 예리한 시선으로 사회의 아픔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내 왔다.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한국에서 15년을 살았어도 아무 삶의 기반이 없는 아이들이 있어요. 어릴 때 한국으로 이주해 국어나 한국사를 가장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고요.” 책의 6, 7번째 장(章)에서 다루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남매 카림(22)과 달리아(20)는 각각 네 살, 두 살 때 이주 노동자인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와서 쭉 살았지만 현재 고등학교 2학년, 1학년인 두 동생과 생이별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4월 법무부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발표한 ‘국내 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한국에서 출생해 15년 이상 체류하고, 국내 중·고교에 재학 중이거나 고교를 졸업한 이들에 대해서만 국내 체류 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고 밝혔다. 카림과 달리아는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아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은유 작가는 “당장 제가 인터뷰한 아이들끼리도 운명이 갈린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며 “카림 남매처럼 백석(본명 백기행·1912∼1996)의 시를 사랑하고 한국어 글쓰기에 재능이 뛰어난 이들에게 꽃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책에는 2017년 동아일보의 미등록 이주 아동 기획 시리즈 ‘그림자 아이들’에 보도됐던 페버(22)의 이야기도 소개됐다. 당시 페버는 불법 체류 사실이 발각돼 추방 명령을 받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이 보도를 계기로 국민적 관심이 생기면서 페버 씨에 대한 추방 명령이 취소됐고, 그는 현재 취업비자를 받아 합법적으로 일하고 있다. 은유 작가는 “아직도 미등록 이주자에 대한 기사에 부정적인 댓글이 달리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상을 자꾸 시끄럽게 하는 게 궁극적으로는 미등록 이주자의 인권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한국에 필요하기 때문에 살게 해 줘야 한다”고 말한다. 일견 타당한 논리이지만 은유 작가는 그 너머의 세상을 꿈꾼다. “사람이 다 필요해서 존재하나요? 그냥 살아 있으니까 살아가는 거지요. 언젠가는 한국 사회가 미등록 이주자를 포함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서로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문화로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기린의 기다란 목이 적자생존의 결과라는 설명을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진화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은 기린의 긴 목이 높이 달린 잎을 뜯어먹는 데 도움이 됐다고 설명하며 모든 기린의 목이 길어진 배경에는 경쟁 메커니즘이 있다고 주장했다. 목이 짧은 기린과 긴 기린 사이의 경쟁에서 후자만이 살아남은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 타당하려면 기린은 나무에 높이 매달린 잎과 열매를 주식으로 하는 동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한 연구팀이 기린을 관찰한 결과, 기린은 주로 고개를 숙여 덤불이나 어깨 높이보다 낮은 곳에 있는 잎을 즐겨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기린은 뇌까지 피를 순환시키려면 긴 목을 통과해야 하는 탓에 심장이 기형적으로 크고 뇌를 비롯한 다른 주요 기관들이 불균형적으로 작아졌다. 긴 목은 기린을 살리는 게 아니라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다윈의 진화생물학, 리처드 도킨스가 주장한 유전자의 이기성(利己性) 등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과학적 통념에 반박하는 책들이 잇따라 나왔다. ‘굿 이너프’의 저자는 적자생존이라는 대원칙에 가려진 수많은 ‘최적화되지 않은 개체들의 세상’을 조명했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인 저자는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진화생물학자다. 저자가 다윈의 진화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 이론이 현대사회에서 무척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자연의 섭리’라는 인식은 도태된 사람들을 방치하고, 강함과 선함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저자가 수집한 관찰 결과에 따르면 자연에는 최적화되지 않은 종이 대다수를 이룬다. 모든 생물은 최적의 형질이어서 자연에 선택된 것이 아니며, 그저 극심하게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우정의 과학’의 저자는 생물의 유전자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기성이라는 통념에 반박한다. 미국 과학 저널리스트인 그는 “오히려 이타성과 공존을 전제로 하는 우정(friendship)이야말로 생물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성”이라고 말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우정은 인간사회에서만 공유되는 문화적인 산물로 여겨져 왔다. 이런 통념과 달리 문화가 아닌 본성과 습성에 따라 행동하는 수많은 동물군에서 우정이 발견된다고 한다. 개코원숭이들은 가족이 아닌 개체와 서로 털을 골라주고 심지어 서로 새끼들을 돌봐준다. 히말라야원숭이 중 무리와 관계가 원만한, 즉 친구 관계가 좋은 개체들은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고 이 성질은 유전된다. 중요한 지점은 개코원숭이와 히말라야원숭이 모두 모계 중심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저자는 우정의 필수성이 간과돼 왔던 이유가 수컷 위주의 연구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동물 연구자들은 수컷 쥐를 기준으로 연구했고 이 때문에 보살핌이나 어울림보다 투쟁, 도피의 양태가 훨씬 자주 관찰됐다. 기존 연구에 가려져 있던 나머지 반쪽 퍼즐을 맞춘 저자는 “보살피는 본능은 생물의 공격적이고 이기적인 측면만큼이나 끈질기다”고 설명한다. 수컷과 암컷을 모두 아우르고, 모계 중심의 동물들을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세상을 다시 조명하면 인간은 타인을 보살피는 일을 음식이나 잠자리를 찾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경쟁-승리-성장으로 이어지는 성장제일주의 한국사회가 숨 가쁘게 느껴지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한국 정부가 유엔 가입을 위해 회원국을 상대로 외교 활동을 펼치던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내전이 발발한다.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의 한복판에는 통신마저 끊긴 채 고립된 한국과 북한대사관의 직원들이 있었다. 28일 개봉하는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는 낯선 소말리아 땅에 갇힌 우리 대사관 직원들의 목숨을 건 탈출기를 그렸다. 당초 지난해 여름 개봉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올여름 극장가를 찾게 됐다. 류 감독과 주(駐)소말리아 한국대사 역을 맡은 김윤석, 참사관 역의 조인성, 주소말리아 북한대사 역의 허준호 등 배우 8명은 1일 온라인 제작보고회에서 촬영 뒷이야기를 풀어 놨다. 류 감독은 제작사 덱스터스튜디오의 제안으로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게 됐다. 어렴풋이 알고만 있던 사건이었지만 당시 기록물들을 받아 보고는 극적인 상황에 단숨에 매료됐다고 한다. “탈출 과정에서 한국대사관이 보관하고 있던 기록물들은 많이 분실됐다. 천만다행으로 당시 소말리아 국영방송 간부가 직원들의 탈출기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내전 상황을 구현할 수 있었다.”(류 감독) 영화는 모두 모로코 에사우이라에서 촬영됐다. 소말리아는 우리 정부가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해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모가디슈를 가장 닮은 지역을 찾았더니 바로 이곳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도 차로 3시간 더 가야 나오는 현장이었다. 촬영장까지 갈 때는 힘들었지만 천국처럼 아름다운 공간이어서 촬영 중의 고통스러운 순간도 잊어버리곤 했다.”(조인성) 3개월간의 촬영 기간 내내 낯선 땅에서 낯선 음식을 먹으며 지내기가 녹록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지친 후배들을 북돋는 역할을 한 건 현지 촬영 경험이 풍부한 허준호였다. “보통 현지 촬영 3주 차에 접어들면 촬영 이외의 생활들이 슬슬 고생스럽게 느껴진다. 최고참 선배로서 해 줄 수 있는 걸 생각해 보니 따뜻한 차 한잔과 얘기 나눌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었다.”(허준호) 모가디슈는 이국적인 화면뿐 아니라 호화로운 캐스팅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배우들의 개성이 너무 강한 나머지 서로 연기가 충돌하는 일은 없었을까. “겹치는 캐릭터 없이 모두 개성이 강한 배우들이어서 영화가 굉장히 다양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조인성, 북한대사관 참사관 역의 구교환 모두 처음 호흡을 맞추는데도 모두의 모습이 영화에 잘 녹아들었다.”(김윤석) “연기는 액션에 리액션이 더해지며 풍부해진다. 선배님들과 연기하니 그들의 액션에 리액션만 얹어도 신(scene)이 술술 풀렸다. 너무 편한 현장이었다.”(조인성)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출판계 대표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인세 누락 문제와 관련해 일부 대형 서점의 판매 정보를 저자도 볼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윤철호 출협 회장은 30일 서울 종로구 출협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7월 1일부터 저자가 출판사에서 계정을 받아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영풍문고, 인터파크까지 5개 대형 서점에서 매일 제공하는 책 판매 부수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출판사가 사용하는 서점별 판매 확인 시스템을 저자도 부분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저자는 출협이 자체적으로 만든 ‘저자 출판사 도서 판매 정보 공유 시스템’을 통해 대형 서점의 판매 정보를 볼 수 있다. 저자, 출판사로 나뉘어 있으며 저자 카테고리를 클릭하면 된다. 윤 회장은 “일단 주요 서점의 판매 정보만 알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중소 서점의 판매 부수, 물류 창고의 재고 정보까지 저자와 공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출판사와 저자 간 신뢰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저자가 출판사로부터 계정을 전달받아야 하는 점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도서 생산 및 유통 정보를 통합해 관리하는 출판유통 통합전산망을 올해 9월 출범시킬 계획인 문화체육관광부와 엇박자를 내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윤 회장은 “통합전산망이 자리를 잡으면 출판사가 사용하는 서점별 판매량 확인 시스템과 합칠 수 있겠지만 당장 저자와 출판사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인세와 판매 부수 정보를 투명하게 관리해온 출판사들이 판매 정보를 작가와 공유하는 데 적극 참여하면 이를 이용하는 작가들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저는 모든 생명체에게 액체 상태의 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가정이 늘 의심스러웠어요. 누가 그런 규칙을 만든 거죠? 다른 행성의 생명체는 완전히 다른 화학적 반응에 기초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2014년 ‘마션’(알에이치코리아)에서 ‘화성에서 농사짓는 남자’를 상상했던 공상과학(SF) 소설가 앤디 위어(49)의 착점은 남달랐다. 그는 어느 날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물을 필요로 하지만 다른 행성의 생명체라면 얘기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물 없이도 살 수 있는 생명체가 태양에 살기 시작한다면? 이 생명체들이 무수히 많아진 나머지 태양의 표면을 뒤덮어 버리기 시작했다면? 그래서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광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만큼 급격히 줄어든다면? 위어 작가의 신작 ‘프로젝트 헤일메리’(알에이치코리아) 속 주인공은 꼬리에 꼬리를 문 그의 상상력 끝자락에서 탄생했다. 지난달 출간된 그의 신작은 평범한 과학 교사이던 주인공이 태양을 점령한 외계 생명체 ‘아스트로파지’를 물리치기 위해 우주선 ‘헤일메리호’에 올라타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헤일메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적진 깊숙이 내지르는 롱패스를 뜻하는 미식축구 용어에서 따왔다.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 ‘아르테미스’ 이후 4년 만의 신작으로 돌아온 그를 21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일반 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한 상대론적 우주론, 천체물리학, 시간 팽창, 우주선 연료 소비에 깔려 있는 계산 같은 것들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제게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경험이었죠.” 미국 캘리포니아주 교외의 평범한 공대생 출신인 그는 소설 집필에 앞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첫 작품인 ‘마션’도 참신한 상상력과 정교한 과학적 사실들이 한데 어우러져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후 내놓은 두 번째 소설에서도 과학적 정밀함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운행하는 우주선은 심우주에 존재하는 소수의 수소 원자로부터도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이런 것들을 고려해 헤일메리호를 설계하는 것은 복잡하고 흥미로운 고찰을 요했다”고 했다. 이번 신작에서 그는 인간과 외계 지적 생명체와 만남을 그리며 자신의 세계관을 한층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션’은 주인공이 화성에서 홀로 분투하는 모습을, ‘아르테미스’는 달에 건설된 인구 2000여 명의 도시를 그리고 있지만 인간과 외계 생명체와 만남은 발생하지 않는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작가는 인간과 외계 생명체가 같은 우주시민으로서 동질감을 느끼고 교감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는 “우주인으로서의 인류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관심을 갖고 있다”며 “화성과 목성 사이 소행성이 몰려 있는 소행성 벨트 혹은 금성에 만들어진 도시 등이 차기작들의 배경이 될 것 같다”고 밝혔다.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소설 속 이야기가 이제는 먼 훗날에나 벌어질 일이 아닌 가까운 미래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중국 등 일부 우주과학 선진국들은 이미 화성 탐사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누구보다 우주라는 공간을 깊이 사랑하는 작가가 이런 상황에 던지는 통찰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이미 우주 탐사가 어떤 모습일지 그 모델을 보았습니다. 바로 바다입니다. 모든 사람이 바다는 인류 전체의 소유라는 것을 알고 있고, 우주 역시 다르지 않을 겁니다. 우주 탐사가 한 국가나 개인이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이뤄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쿠팡이 온라인 서점 시장에서도 조용히 세력을 확장하면서 출판 시장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송인서적에 이어 최근 서울문고까지 서점이 잇따라 부도 처리되며 쿠팡이 출판 시장을 점유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질 거란 전망이 나온다. 쿠팡은 지난해 주요 출판사들에 직거래 사업 제안서를 보내고 도서 로켓배송을 위한 직매입을 확대했다. 도서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배송할 수 있도록 대형 출판사들의 인기 서적들을 미리 쿠팡의 물류창고에 쌓아 두겠다는 것이다. 현재 쿠팡은 일부 베스트셀러는 직매입해 판매하고, 나머지 도서들은 교보문고나 예스24 등 인터넷 서점과의 연계를 통해 배송하고 있다. 지난해 도서 부문에서 약 2500억 원의 매출을 올린 쿠팡은 올해는 매출을 6000억 원까지 끌어올릴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쿠팡은 출판사에도, 독자들에게도 양날의 검이 될 것이라는 게 출판계의 전망이다. 단기적으로는 이점이 많아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이 왜곡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책을 노출시키는 게 중요한 출판사에 또 하나의 새로운 판매처가 생겼다는 사실은 반길 일이다. 자본력을 갖춘 쿠팡은 출판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어음 결제가 아닌 현금 결제를 택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출판사가 서점에 공급하는 책값을 정가 대비로 표시한 비율인 공급률도 약 60%로, 교보문고나 예스24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쿠팡이 중소 출판사에는 그리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쿠팡의 서적 판매 웹페이지 첫 화면은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장식하고 있다. 당일이나 다음 날 새벽에 받아 볼 수 있는 배송 서비스도 이들 책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다. 5인 규모의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최모 대표는 “서점이 늘어난다고 했을 때 출판사들에 중요한 것은 신규 독자가 늘어나는지 여부”라며 “쿠팡의 서적 판매 규모가 커지고 있지만 중소 출판사 입장에서는 별로 신규 독자가 늘어난 것 같지 않다”고 설명했다.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쿠팡의 경쟁력은 책과 함께 다른 상품들을 살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쿠팡 도서 주문량 중 약 60%가 어린이책, 유아·초등 참고서, 수험서다. 30, 40대 소비자들이 생필품이 담긴 장바구니에 아이들의 책을 함께 담는 것이다. 쿠팡의 장악력이 커지면서 장기적으로 대형 출판사, 베스트셀러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면 독자 역시 다양한 책을 받아 볼 기회가 줄어든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게 기존의 서점 문화인 반면 책이 주력이 아닌 쿠팡은 팔릴 만한 상품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경향이 생긴다”며 “쿠팡의 등장이 단기적으로는 인터넷 서점 서비스를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겠지만 시장 점유율이 확대되면 콘텐츠가 아닌 마케팅 중심의 경쟁을 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의료 종교’ ‘기술·보건적 독재주의’ ‘상시화한 긴급 상황’ ‘생명 정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팬데믹 사태에 대한 저자의 진단은 이들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이해하기에 팬데믹 상황에서 의료는 종교화됐다. 현대 기술과 보건이 사회를 장악하는 힘은 독재 수준이다. 정부의 행정권은 긴급 상황이라는 명분하에 입법권을 넘어선 지 오래. 정치는 인류의 생존 외에 다른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뤄진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인 저자의 주장은 일견 이상하고 위험하다. 그는 팬데믹 사태가 시작된 직후인 지난해 2월부터 현재까지 이탈리아 정치·문화 비평 웹사이트 ‘쿠오드리베트’에 팬데믹 상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유럽에서 날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방역이라는 명분하에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무시와 조롱을 당하기 일쑤였다. 저자는 근대 국가의 정치가 생물학적인 생명만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질적으로 나은 생명, 삶에 대한 고찰 같은 부분은 사소하게 취급해왔다고 주장한다. 죽은 사람의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하는 삶, 사랑하는 사람과도 4.5m의 거리를 둬야 하는 삶, 가차 없이 학교의 문을 닫는 삶, 이웃이 지워진 삶…. 그가 보기에 코로나 시대의 인간은 스스로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생물학적 존재라고만 여기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저자는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표정으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하고, 얼굴로 진실을 드러낸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얼굴은 정치적 공간이다. 팬데믹이 몰고 온 마스크와 함께 사람들은 얼굴을 잃었다. “시민의 얼굴을 가리기로 결정한 국가는 정치를 스스로 없애 버린 셈”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그의 주장은 지금보다도 더 촘촘하고 정교한 방역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가 보기에 다소 이상한 시각이다. 그가 강조하는 인간성이나 삶에 대한 고찰이 정말 생명보다 더 중요한지도 생각해볼 문제다. 다만 접촉을 멈추고 얼굴을 가리는 삶을 이어가더라도 우리가 그 대가로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지 알아두는 것은 무척 중요해 보인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최근 출판계에서는 기후 위기 원인과 해법을 다룬 다양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환경 관련 책이라고 해서 다 같은 논지를 펼치지는 않는다는 것. 같은 목표를 두고도 다른 방식을 제시하기도 하고, 기후 위기 자체를 부정하는 시각도 있다. 기후 위기 문제에서 자주 나오는 개념 중 하나가 ‘탄소중립’이다. 이산화탄소를 아예 배출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대신 배출한 만큼 흡수하는 대책을 세워 실질적인 배출량을 ‘0’으로 만들자는 개념이다. 이를테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적절한 용매를 이용해 포집하는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에 투자해 기술 상용화를 앞당기는 식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등 기업인들은 이 개념을 앞장서서 지지하고 있다. 그는 올해 초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에 1억 달러(약 1118억 원)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 논리에 따르면 탄소 상쇄를 통해 순제로를 달성하자는 주장은 합리적인 것 같다. 하지만 반대 주장도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얘기”라는 주장이다. 10여 년간 직접 지속가능한 여행을 하며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고 여행하는 법을 탐구 중인 미국 여행 칼럼니스트 홀리 터펜은 “‘탄소 상쇄론’은 당장 직접 행동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배출된 탄소를 처리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여겨질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저서 ‘지속가능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한스미디어)에서 탄소 상쇄 산업의 맹점을 짚었다. 그에 따르면 탄소 상쇄 산업이 거두는 수입은 1년에 5억 달러(약 5592억 원)에 이르지만 제대로 된 규제가 없다. 2017년 유럽연합(EU) 집행기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탄소 상쇄 사업을 맡은 업체의 85%가 제대로 계획을 진행하지 않는다. 탄소 배출량 계산법부터가 가지각색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지점은 ‘탄소 상쇄’라는 개념이 사람들로 하여금 당장 습관을 바꾸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않고 죄책감만 덜어주는 식이다.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은 비행기 26만5000대를 수용할 수 있는 세 번째 활주로를 건설하면서 대외적으로는 2030년까지 탄소 중립을 실현할 계획이라고 광고하고 있다. 탄소 상쇄라는 이론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는 기업들이 실질적으로 탄소 순제로화에 나서고 있는지 면밀한 감시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환경을 위해 당장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는 행동 수칙을 알려주는 책도 있다. 독일 물리학자 볼프강 헤클은 저서 ‘리페어 컬처’(양철북)에서 물건을 고쳐 쓰는 습관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건이 고장 나면 새 것을 사 버리는 요즈음의 게으른 소비자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현명한 사용자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장 난 변기를 살펴보며 물이 내려가는 원리를 알아내고, 벼룩시장에서 만난 한 장인에게 자전거 엔진 수리법을 배운다. 이미 단종돼 제조업체에도 부품이 남아 있지 않은 물건도 물어물어 부품을 구해 갈아 끼운다. 이 같은 행위는 단순히 폐기물 쓰레기산을 줄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수리하고 수선하는 행위가 개개인에게 주는 정서적인 풍만함이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던 수많은 가치들을 회복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기후 위기 문제 자체가 허상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국 환경 연구소인 브레이크스루의 설립자 마이클 셸런버거는 저서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부키)에서 기술발전과 플라스틱, 석유가 오히려 환경을 지키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바다거북과 코끼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최악의 쓰레기로 지탄받는 플라스틱이다. 예전엔 공산품들의 원료로 거북 껍데기나 상아가 많이 쓰였지만 플라스틱이 발명된 이후 이를 대체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친환경적 발전 방식이라는 풍력 발전은 도리어 박쥐와 대형 조류, 곤충 등의 생태계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천연 소재를 사용하자는 환경주의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자연을 지키려면 인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기후 위기설을 뒷받침하는 각종 수치들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지난 30여 년간 선진국의 온실가스 배출은 계속 줄어왔다. 유럽의 2018년 온실가스 배출량은 1990년보다 23% 낮고 미국은 2005년부터 2016년까지 15% 감소했다. 이에 따라 지구 평균 온도의 상승분도 임계점인 4도가 아닌 2∼3도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연옥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이 책을 조선 천주교도 유익하다고 판단해 번역 필사본을 만든 것 같다.”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과거 가톨릭에서는 연옥을 지하세계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공간으로 가르쳤다”며 최근 출간한 ‘연옥약설(煉獄(략,약)說)’ 현대 한글 번역본의 의미를 이렇게 밝혔다. 구한말 전래된 가톨릭 서적 필사본이 현대 한국어로 번역된 건 처음이다. 한국문학 연구자인 임 교수가 전반적인 번역을, 한중연에서 종교학을 연구하는 조현범 교수가 천주교리 관련 개념 정리를 맡았다. 연옥은 천주교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살아 있는 동안 지은 죄를 씻고 천국으로 가기 위해 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다. 연옥약설은 19세기 중국 천주교 책으로, 가톨릭의 연옥 교리를 집대성했다. 중국인 예수회 신부 이문어(李問漁·1840∼1911)가 1871년 상하이에서 썼고 구한말 한반도로 유입돼 한글 필사본이 만들어졌다. 책에는 연옥 교리의 핵심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함께 서술돼 있다. 가령 연옥에 머무는 영혼들이 천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세상에 남아 있는 신자들의 기도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생전에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아 연옥을 떠나지 못하는 수도사 이야기가 담겼다.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승천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선행을 채우기 위해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세상으로 보내진 80세 노인 안매빈의 이야기에서는 심판을 맡은 미카엘 천사가 그날의 ‘당직 천사’를 불러내는 대목이 나온다. 임 교수는 “당시 신자들에게 교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구한말 필사본은 당시 조선인들의 어문 생활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국어학적 가치도 있다. 저자들은 책 후반부에 구한말 조선인들이 사용한 문장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임 교수는 “가톨릭 교리서는 서양을 무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연옥약설은 동양인 신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몇 안 되는 사료”라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