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이승헌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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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승헌 부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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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02-12~2025-03-14
칼럼100%
  • [오늘과 내일/이승헌]VOA의 공짜 힌트

    미국 워싱턴 백악관 길 건너에 초특급 호텔이 하나 있다.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워싱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소유라는 건 이 호텔 1층 로비 바에 있는 TV 화면을 봐도 안다. 몇 차례 들른 적이 있는데 갈 때마다 수십 개의 TV가 일제히 폭스뉴스를 틀고 있었다. 한번은 호텔 종업원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Welcome to Trump world(트럼프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며 웃었다. 트럼프에게 우호적인 폭스뉴스 대신 CNN, MSNBC처럼 트럼프가 하루빨리 탄핵되길 바라는 방송을 왜 틀겠느냐는 표정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워싱턴 사람들은 ‘먹고살려면’ 뉴욕타임스(NYT)를 정독해야 했다. 특히 외교안보 뉴스는 NYT 1면에 나면 하루 이틀 후 백악관 대변인이 해당 내용을 발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바마와 이념 궁합이 맞았던 NYT가 백악관 소식을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독립성 논의와는 별도로 미 언론은 특정 정권과 정부의 거울 노릇을 할 때가 많다. 그런데 미 언론 중에서도 백악관 주인에 상관없이 워싱턴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꾸준히 보여주는 매체가 있다. 미국의소리(VOA·Voice of America) 방송이다. 미 행정부가 자기 생각을 외부에 알리려 돈을 대고 관리하는 국영방송이기 때문이다. VOA가 요즘 우리 공직자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된다. 북-미 간 비핵화 프로세스가 시원치 않자 북한, 더 나아가 한국에 부정적이거나 불리한 기사가 미 행정부발로 보도된 데 따른 것이다. 특히 VOA가 최근 보도한 북한산 석탄의 한국 반입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VOA가 뭘 알고 이런 보도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무부 관계자가 정부의 남북협력기금 800만 달러 대북 집행 가능성에 대해 “비핵화를 어렵게 한다”고 했다는 VOA 보도에 대해선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까지 나섰다. 김 대변인은 12일 브리핑에서 “실무자 수준에서 나온 답변”이라고 일축했다. 외국 매체 보도를 정부 관계자들이 다 수용하거나 확인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VOA의 경우는 좀 다르다. 미 행정부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힌트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북-미 간 비핵화 신경전이 하루하루 펼쳐지는 요즘엔 더 그렇다. 사실 800만 달러 남북협력기금은 국내 문제라 미국에 대놓고 물어보기도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하기도 어렵다. VOA는 국무부 관계자가 옆에서 읽어주듯 속내를 전하고 있다. “대북 압박을 성급히 덜어주는 건 (비핵화라는) 그 목표 달성 가능성을 줄어들게 할 수 있다(Any premature relief in economic or diplomatic pressure would diminish the chances that we’ll achieve that goal).” 매일 정부 차원에서 현안별 언론 대응(PG·Press Guidance)을 조율하는 미국 특성상 어디에 물어봐도 이 이상의 공식 답변은 듣기 어렵다. 테드 포 공화당 하원의원이 미 의회의 추가 대북제재 움직임을 가장 먼저 밝힌 것도 VOA 인터뷰에서였다. 일개 외국 매체가 우리 정부에 이래라저래라 하면 기분 나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정부 말대로 워싱턴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100% 다 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나라도 비핵화 논의에 참고할 힌트가 있다면 그게 언론 매체든 사람이든 마다할 이유가 없는 시점이다. 정부에서 김정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려고 매일같이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TV를 분석하다 대놓고 화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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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김병준과 델라웨어

    후기 인상파 비슷한 화풍(畵風)이었던 것 같다. 2003년 1월 어느 일요일 밤. 서울 종로구에 있는 김병준 당시 노무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정무분과 간사 자택을 찾았더니 한가운데 그림이 있었다. 밝은 집안 분위기랑 닮은 풍경화였다. “제가 그림을 좀 좋아합니다. 풍경화든 인물화든…. 훌륭한 그림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거든요.” 진보라고 집에 민중예술가 작품이 있으라는 법은 없지만 지역주의 타파와 지방분권 정치개혁을 내건 노 전 대통령 ‘정책 멘토’의 집에서 느껴지는 다른 친노들과의 이질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는 노 전 대통령에게 줄곧 정책을 조언했지만 친노 핵심과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노무현 정부 후 교수(국민대 행정대학원)로 돌아온 김병준은 공·사석에서 종종 델라웨어 이야기를 했다. 미국 50개 주 중 하나이자 자신이 박사학위를 받은 대학이 있는 주다. 주로 지방분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델라웨어에 있는 세계적 화학기업인 듀폰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야기했다. 기자에겐 김병준과 델라웨어는 좀 다른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다. 오히려 오래전 그의 집에서 봤던 그림과 오버랩된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종종 지나치거나 들렀던 델라웨어는 ‘미국 사람들도 어디 붙어 있는지 잘 모르는’ 곳이었다. 실제로 50개 주 중 면적이 두 번째로 작은 데다, 뉴저지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등 대형 주에 둘러싸여 있다. 부가세 등이 없어 기업의 천국이고, 해외 직구족을 위한 배달대행지라는 차별화되는 콘텐츠와 경쟁력이 있는데도 정작 존재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질적이고, 존재감도 별로라는 것이다. 김병준이 지난달 난파 직전의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을 맡자 당 안팎에선 “노무현 신봉자가 무슨 한국당을 맡느냐” “얼마나 버티나 보자”는 식의 비아냥이 많았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대놓고 “김병준의 노무현식 개혁은 안 된다”고 비판했다. 취임하자마자 접대 골프 논란에 휩싸이면서 이런 말들은 더 퍼졌다. 기자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김병준이 진짜로 델라웨어 짝이 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김병준이 한국당을 맡은 지 보름 정도 지나면서 ‘국가주의’ 이슈를 점화시키고 전임 홍준표 전 대표와는 차별화되는 언어를 구사하면서 이런 말들은 차츰 잦아들고 있는 듯하다. 중견 행정학자의 인사이트와 집권 세력 핵심에 있었던 경험이 무시하기 어려운 시너지를 내고 있다는 평가도 들린다. 물론 김병준호의 성공은 단정하긴 이르다. 정기국회는 시작도 안 했고 이념 논쟁 말고 구체적인 정책 대결은 판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전히 야당 사정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김병준이 지금보다 좀 더 치열하게 투쟁하고 주인의식을 가지면서 존재감을 드러냈으면 좋겠다고들 한다. 잠시 머물다 떠날 ‘이방인’일지라도 있는 동안만큼은 교수 출신 멘토나 조언자에서 벗어나 당의 주인이라 여기면서 휘젓고 다니라는 얘기다. 한 보수 원로 인사는 “한국당이 그 전신인 한나라당 시절부터 외부 출신 비대위원장이 성공한 적이 없다. 주인의식 없이 떠돌다가 하나 마나 한 말만 하고 떠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협치를 위해서는 좋든 싫든 김병준이 실패하지 않는 게 한국당은 물론 문재인 정부를 위해서도 좋다. 나중에 부딪치다 사라지더라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게 김병준이 말하는 또 다른 ‘노무현 정신’이기도 할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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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문희상은 다를까

    #1. 부친의 선영 앞에 섰다. 울면서도 분한 기분이 뒤섞여 있었다. “아버지 제가 될 거라고 했잖아요. 제가 맞았잖아요.” 이날은 199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승리한 직후. 아버지는 서울대 법대를 나온 아들이 김 전 대통령의 휘하에 들어간 것을 생전 내내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들은 웃다가 울면서 소주를 따랐다. #2. 여야가 격돌할 예산 관련 이슈가 터졌다. 몇몇 기자들이 국회 의원회관으로 향했다. 기자도 덩달아 따라갔다. 누군가의 사무실 앞에 섰다. “바쁜데 왜들 왔느냐”는 말도 잠시, 터져 나오는 논리 정연한 청산유수와 여야 가리지 않는 돌직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봉숭아학당’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사라진, 정치권 중진들의 대언론 정치 특강이었다. 여러 중진이 학당을 열었으나 배울 게 많아 이 학당이 최고 인기였다. 두 사례의 주인공은 문희상 신임 국회의장이다. 문 의장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대개 “생긴 건 삼국지의 장비인데 머리는 조조다” “게을러 보이는데 머리 회전은 좋다”고 평한다. 그런데 기자의 인상과 기억은 좀 다르다. 자기 생각을 당당히 표현하거나 심지어 마이웨이를 가면서도, 논리와 배짱으로 상대방이 어찌할 수 없을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장비, 조조보다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으되 뛰어났던 조자룡과 더 비슷한 측면이 있다. 문 의장은 자신의 뜻이 맞다면 종종 최고 의사 결정권자의 말을 거스르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대 비서실장이던 2004년 1월 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비서실장 공관에 수십 명의 기자가 새해 인사차 점심을 먹으러 찾아갔다. 노 전 대통령이 언론과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강조하던 터라, 청와대 안팎에서 행사 자체에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문 의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자들에게 소주 한 잔씩 돌린 후 간이 노래방을 켜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보좌진이 말렸지만 문 의장은 “야, 집에 찾아온 손님과 술 한잔 못 하면서 무슨 정치를 하냐”며 호기롭게 노래를 이어 갔다. 이 장면을 본 한 기자가 장난삼아 수고비 조로 1만 원 한 장을 건네자 이를 이마에 붙이는 시늉을 해 박장대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문 의장의 이런 성격과 특징은 집권 2년 차 들어서도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가 정국 운영을 독주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더욱 주목될 수밖에 없다. 특히 문 대통령을 ‘부하 수석비서관’으로 두고 비서실장을 해본 터라, 청와대와 여당이 어떻게 견제와 균형을 잡아가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문 의장이다. 취임 후 “이젠 국회의 계절이다”라고 한 건 이런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어떻게’다. 문 대통령은 이전의 ‘부하 수석’이 아니라 지지율 70% 안팎을 유지하는 현직 대통령이다.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더 나빠질 수 없는 수준이다. 결국 문 의장이 특유의 논리와 설득으로 여야 정치권을 움직여 최소한 할 일을 하도록 해야 청와대에 뺏긴 주도권을 조금이나마 가져와 ‘국회의 계절’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정치 인생 마지막이란 각오로 정치 살리기에 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다. 전직 국회의장들이 대부분 협치와 정치 복원을 내세웠지만 물거품이 된 것도 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문 의장이 이전에 들려줬던 ‘봉숭아학당’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미국에선 하원의장이 국회의장인데 공식 명칭이 ‘미스터 스피커(Mr. Speaker)’다. 왜 그런 줄 아느냐. 의회를 대표해서 목청껏 웅변하고 설득하라는 거다. 그래야 의회가 행정부의 하수인이나 통법부가 안 된다.” 문 의장 본인은 물론 70주년 제헌절을 맞아 국회 스스로에게 던지는 ‘봉숭아학당’ 화두로 이보다 더 안성맞춤은 없겠다 싶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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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뼈문, 친노나 진박처럼 안 되려면

    뼈를 발라버리겠다고 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민감해하나 싶었다. 8월 말로 예정된 더불어민주당 당권 경쟁을 앞두고 ‘뼈문(뼛속까지 친문재인)’이라는 표현까지 나온다고 보도(본보 6월 27일자 A10면)했더니 이런 인터넷 댓글이 달렸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이 기사를 쓴 기자) 네 뼈를 발라버리고 싶다”였다. 실제로 여권은 벌집 쑤신 듯했다. 청와대와 민주당 주변에선 “누가 뼈문이라는 말을 하고 다니느냐”고 서로 물어봤단다. 이런 예민한 반응은 ‘뼈문’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이 말이 갖는 특유의 폐쇄적인 이미지 때문인 듯하다. 내용은 다르지만 친노, 진박을 연상시키거나 오버랩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친문은 친노, 진박이 어떻게 몰락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친문 스스로 일부는 친노였다. 진박은 촛불로 몰아냈다. 물론 친문은 친노, 진박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친노는 집권 1년 1개월 만에 탄핵으로 바닥을 쳤다가 탄핵풍으로 드라마틱하게 의회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4대 입법’으로 오버하더니 ‘폐족’으로 몰렸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부활했다. 진박은 2016년 총선을 앞두고 “200석도 가능하다”며 집안싸움을 벌이다 좀처럼 내줄 것 같지 않던 원내 과반을 잃었다. 그 뒤 전개된 촛불 이후 상황은 따로 말할 것도 없다. 친문은 집권 1년 1개월이 지난 건 친노와 같은데 기반이 더 탄탄해지고 있다. 지방선거 독식 후에도 대통령 지지율은 여전히 70%대다. 심지어 내부 견제 장치도 작동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지방선거 후 지난달 18일 청와대 회의에서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지지에 답하지 못하면 기대는 금세 실망으로 바뀔 수 있다”는 노련함까지 보여줬다. 자유한국당으로선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으니 미칠 노릇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 전대 시즌이 본격화되면서 들리는 시그널은 문 대통령의 조심스러움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다. 친문의 간판이 당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주술처럼 퍼지고 있다. 친문 그룹은 달(moon·문 대통령)을 지키겠다며 ‘부엉이 모임’을 만들어 밤낮으로 만나고 있다. 한때 친문 사이에서 들리던 “청와대에 이어 당권까지 가져도 될까?”라는 조심스러움은 종적을 감췄다. ‘책임 당 대표론’이라는 명분도 만들어 냈지만 속내는 당 대표와 그 주변이 쥐게 될 2020년 총선 공천권이다. 요새 여의도에선 어딜 가나 지금 총선을 하면 민주당이 개헌선을 넘기고 한국당은 군소 TK당으로 추락할 것이라고들 한다. 당권만 쥐면 정부와 지방권력에 이어 의회까지 대한민국을 ‘친문 천하’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문’ 당권 주자에 대한 뼈문들의 견제는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한 비문 주자 측은 “조금이라도 당권에 관심을 보이니까 각종 휴대전화 문자에, 사무실 전화에 견딜 수가 없다”며 “당분간이라도 당권에 관심 없는 척해야겠다”고 했다. 이 칼럼이 나가면 또 많은 친문 누리꾼들이 막말 댓글을 달 것이다. 기자가 문 대통령에 대해 쓰기만 하면 내용도 안 보고 조건반사적으로 악플을 달고 막말 e메일을 보내는 ‘단골’도 여럿 있다. 그럼에도 뼈문들의 각성과 경계를 당부하는 건 좋든 싫든 이들이 2018년 한국 정치의 주축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오만과 독선으로 친노와 진박의 전철을 밟는 것은, 그들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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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자유한국당의 CVID, 오히려 기회다

    “트럼프가 싱가포르에서 못 해낸 CVID를 홍준표와 자유한국당이 해냈다.” 한국당이 6·13지방선거에서 궤멸되자 정치권에선 이런 말까지 돌고 있다. 한국당이 비핵화를 이룬 것도 아니고, 처음엔 기자도 무슨 소린가 했다. 알고 보니 이 CVID는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 중 마지막을 Defeat로 바꾼 말의 약자란다. 검증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정치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완전한 패배라는 거다. 한국당은 모욕감을 느끼겠지만 CVID가 맞다. 시도지사는 14 대 2(무소속 1)로 더불어민주당에 완패해 ‘자유TK당’으로 전락했다. 국회의원 재·보선에선 11 대 1로 무너졌다. 서울 구청장은 25개 중 강남구를 포함해 24개를 민주당에 내줬다. 민주당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 측은 선거 전 기자에게 “다 이기면 역풍 분다. 강남, 서초구청장은 한국당이 가져가도 좋다”고 했을 정도였다. CVID 된 한국당은 ‘멘붕’을 넘어 초유의 상황을 맞고 있다. 누구도 해법은 모른다. 서울의 한 중진 의원은 “선거 다음 날 집 근처 지하철역으로 가서 사람들 붙잡고 ‘죄송하다’고 인사만 하고 왔다. 그거라도 안 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보수 세력이 오랜만에 흰 도화지 위에 놓였다는 것이다. 제대로 민심의 폭격을 받아 흙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은 ‘그라운드 제로’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한국당과 그 전신인 새누리당, 한나라당은 최근 십수 년 동안 궤멸적 패배를 당했어야 할 시점에 이를 용케 피해 갔다. 당시엔 좋았겠지만 결과적으로 환부만 더 키운 셈이 됐다.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후폭풍으로 떠내려갈 듯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단독 드리블로 살아남았다. 2012년 총선에서도 당시 민주당이 종북 세력과 손을 잡는 자살골 덕에 예상 밖으로 과반 의석을 넘겼다. 지난해 탄핵 후 대선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41.1%를 얻었지만 홍준표 한국당 후보가 24%,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21.4%를 얻어 완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미리 한 번쯤 무너져 새살이 돋아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당으로선 어찌 보면 더 늦기 전에 갱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었다. 살아남으려 뭐든 할 것이다. 하지만 웬만한 충격적 변화가 아니면 사람들은 지금처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당 안팎에선 ‘제2의 천막당사’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지난달 ‘드루킹 특검’을 관철하겠다며 한국당이 국회 앞에 차린 천막 농성장을 보면 솔직히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 투쟁하겠다며 차린 천막은 야외 글램핑장에서 볼 법한 바비큐 파티용 텐트였다. 여권 관계자는 당시 “무슨 체육대회 본부석 같았다”며 비웃었다. 일각에선 “홍준표가 대표에서 물러났으니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홍준표의 막말 하나도 못 말린 사람들이 선거를 지휘했다고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으로 보는 사람 역시 별로 없다. 한국당으로선 처음 겪는 ‘고난의 행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 지방선거보다 더 중요한 2020년 총선에서 대패해 그야말로 보수의 씨가 마르는 것보단 낫다. 이번 패배는 국민들이 미리 준 예방주사 같은 거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CVID를 넘어 영원히 집권당 근처에도 못 가는 ‘P(Permanent)VID’가 될 수도 있다. 한쪽으로만 기운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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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일주일만 꾹 참으면 안 될까

    조금이라도 빨리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이크 앞에 서기도 전에, 지정된 자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입을 열었다. 보무도 당당했다. 두 팔을 위아래로 휘휘 젓기도 했다. 1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으로 찾아온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을 만난 뒤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공식 확인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들떠 보였다. 종전선언, 주한미군 등 트럼프에게서 최근 듣기 어려운 분야의 말들이 쏟아졌다. 김영철이 전한 김정은의 친서와 메시지에 만족하는 듯했다. 오죽하면 기자들과 이런 대화도 오갔다. ―12일 싱가포르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나. “(중략) 김정은의 편지는 아주 좋은 편지였다. 보고 싶나?” ―편지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얼마나 알고 싶은데, 얼마나, 얼마나(how much)?” 이 판은 온전히 트럼프 자신의 판이라는 자부심이 뚝뚝 묻어난다. 그동안 외교 전문가들이 ‘장사꾼’이라며 얼마나 비하했던가. 하지만 전직 미 대통령 누구도 해내지 못한 북-미 정상회담 개최 목전까지 갔다. 트럼프가 “역대 정권에서 이미 했었어야 하는 일인데, 이걸 내가 (수습)하고 있다”는 대목에선 역사적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트럼프가 어느 때보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북-미 정상회담, 특히 종전선언을 거론하자 청와대는 화색이 돌았다. 그러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8일 미리 지방선거 사전투표에 나선다고 밝혔다. 투표 독려 차원이라지만 누구나 싱가포르행을 대비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한미 관계, 북-미 협상 과정을 지켜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청와대의 이런 행보에 불안해하고 있다. 어찌 됐든 트럼프가 판을 깐 싱가포르 회담을 앞두고 문 대통령이 ‘숟가락’을 얹으려다가 자칫 판 자체가 엎어질까 봐서다. 물론 취소됐다 어렵사리 부활한 북-미 회담인 만큼 어떤 식으로든 종전선언의 틀이라도 잡으려는 문 대통령의 ‘진심’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북-미 정상은 지금 목을 내걸고 게임을 벌이고 있다. 우리 사정이나 문 대통령의 선의(善意)는 부차적인 문제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북-미 비핵화 논의는 아직도 판문점에서 진행 중이다. 12일 직전까지 진행될 듯하다. 개성공단 재개든, 이산가족 상봉이든, 심지어 경평 축구든 북-미 비핵화 논의가 어그러지면 모두 없던 일이 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종전선언은 말할 것도 없다. 종전선언을 위해 청와대 안팎에서 문 대통령의 싱가포르행 가능성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고, 올해 초 넘실댔다가 허망하게 사라진 ‘고르디우스의 매듭론’이 떠오른다. 한반도에 대화 기운이 완연하자 청와대 관계자가 “복잡하게 얽힌 북핵 실타래를 정상들이 만나 한꺼번에 풀자”며 꺼낸 개념이었다. 하지만 ‘단계적 비핵화’라는 김정은의 한마디에 물거품이 됐다. 싱가포르 회담까지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지만 북-미 두 정상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트럼프는 회담을 취소했다가 하루 만에 뒤집었고, 김정은은 외교 관례를 무시하고 하루 전날 문 대통령에게 ‘정상회담 번개’를 쳐서 성사시켰다. 북-미 비핵화 논의가 성공해야 종전선언도 있다. 트럼프의 오케이 사인이 있어야 싱가포르에 갈 수 있다는 건 청와대도 잘 안다. 하지만 의욕과 기대가 넘쳐 자제가 잘 안 된다. 첫 만남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울 트럼프와 김정은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시그널은 감추는 프로페셔널한 외교력이 아쉽다. 문 대통령이 연초 말했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은 이럴 때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훈수를 두고 싶어도 이럴 땐 꾹 참는 게 서로에게 모두 좋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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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헌 정치부장의 뉴스 인사이트]‘국무부의 조지 클루니’ 한반도 컴백… 워싱턴 “이제 좀 안심되네”

    《“공교롭게도 두 명의 성 김이 역사적인 비핵화의 길을 열고 있다.”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불씨가 극적으로 되살아난 직후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성 김 주필리핀 미대사가 이끄는 협상팀이 27일부터 북측과 실무 협상을 벌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미 워싱턴 조야에선 이런 말이 들렸다. 여기서 두 명의 성 김은 김 대사와 북-미 비핵화 논의를 주도했던 앤드루 김 미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이다. 김 센터장의 본명이 김성현이어서 이전에는 미국인 지인들은 그를 또 다른 ‘성 김’으로 불렀다고 한다. 한반도의 명운을 가를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 공교롭게 50대 후반의 한국계 미국인 두 명이 주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앤드루 김이 비핵화 논의의 판을 깔았다면 성 김이 이제 그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김 대사가 최선희와 실무 회담 테이블에 앉았다는 소식에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할 수 있는 ‘중요한 발걸음’을 뗐다”고까지 했다. 그동안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 북핵 이슈에 별 경험이 없는 정치인들이 북-미 정상회담을 주무르고 있는 데 대한 불안감이 반영되어 있다. 실제로 미 국무부에 김 대사 외엔 북핵 문제를 책임 있게 다룰 만한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김 대사는 북핵 2차 위기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6자회담 특사, 주한 미대사, 6자회담 수석대표 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역임하면서 한반도 문제를 다뤄 왔다. 후임 특별대표인 조셉 윤이 있었지만 올해 3월 은퇴해 북핵 라인의 씨가 말랐다. 그런데 김 대사와 가까운 지인들은 김 대사가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가짜뉴스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한 관계자는 “초임 대사도 아니고 현직 필리핀 대사를 협상장에 불러내는 게 납득이 안 된다”고 했다. 김 대사는 2016년 9월 대북정책특별대표를 그만두기 전 기자에게 “이젠 한반도 문제 말고 다른 일을 다뤄보고 싶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필리핀행을 택한 것이다. 북핵 경력 대부분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보낸 만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고 한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김 대사를 백악관으로 불러 “헤이, 성(Hey, Sung)” 하면서 북핵 이슈를 자주 문의하곤 했다. 하지만 김 대사는 이번엔 트럼프의 부름에 응하면서 다시 한번 미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결정할 운전대를 잡게 됐다. 김 대사는 가장 성공한 한국계 미국인 공직자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이중적인 정체성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할 때는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면서도 워싱턴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스타였다. 2016년 11월 3일, 워싱턴 국무부 청사에서 열린 김 대사의 필리핀대사 임명장 수여식에는 인근 수백 km 밖에서 온 종교인,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종의 한인이 대거 참석하는 이례적인 풍경이 연출됐다. 존 케리 당시 국무장관은 “김 대사가 (수려한 외모로) 외교가의 ‘(할리우드 배우) 조지 클루니’라고 불리는 점을 참작하면 그의 겸손함은 매우 인상적”이라고 말해 장내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김 대사의 한국어는 유창하다. 어려운 한자성어가 나오면 “왓(What)”할 뿐 대부분 안다. 그러나 한국 기자들을 만나 일 이야기를 하면 한국어를 한마디도 쓰지 않는다. 몸에 밴 미국식 공직 기강은 서늘하기까지 하다. 그는 얼마 전 주한 미대사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골프 치자는 요청이 참 많았다. 언제는 재벌 총수가 제안했다. 한번 쳐볼까 했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다른 재벌 총수들도 잇따라 치자고 할 테고 처신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골프를 못 친다고 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런 그도 퇴근 후 한국 지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일 때는 한국어를 쓰곤 한다. 홍어나 뼈째 붙은 족발 등 ‘난도 높은’ 한식 빼곤 우리 음식을 즐긴다. 그를 오래 지켜본 한 외교 소식통은 “김 대사가 미국의 관점에서, 동시에 한국에도 애정을 갖고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북핵 무대로 불려온 그가 한미를 모두 만족시킬 만한 비핵화 로드맵을 만들어 싱가포르행을 결정지을 수 있을까. 성 김 인생 최대의 협상이 시작됐다.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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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트럼프 취임사에 담긴 힌트

    동영상 출처 : ABC 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 편지 한 장으로 김정은과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하자 “도대체 트럼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사람이 많다. 누구도 정답은 알지 못한다. 트럼프는 편지에서 “김정은이 공공연히 적개심을 표시했다”고 했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인지도 분명치 않다. 답답해서 25일 아침 워싱턴에 있는 미국인 지인 P에게 연락했다. ―트럼프가 저렇게 나오는 배경이 뭘까? “사람은 잘 안 변해.” ―그게 무슨 소리야? “트럼프가 이전에 작정하고 쓴 글을 찾아보라고. 1980년대 쓴 ‘거래의 기술’을 보거나 지난해 취임사를 읽든가.” 국제정치학 박사인 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거래의 기술’은 하도 자주 인용되고 오래된 책이어서 지난해 1월 20일 발표했던 취임사를 찾아봤다. 기자에게 트럼프 취임사는 격식을 파괴한 전대미문의 충격적 메시지였다는 이미지로 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천천히 뜯어보니 이전과 느낌이 전혀 달랐다. 시작부터 ‘대학살(carnage)’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미국이 파괴되고 있다는 거다. “미국에 대한 대학살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 끝날 것이다. …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군대를 고갈시켜 가며 다른 나라 군대를 지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이전보다 허약한 나라라고 했다. “우리가 다른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사이에 미국의 부와 힘, 자신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김정은을 포함해 전 세계를 향해 선언했다. “이곳에서 세계 모든 수도, 모든 권력자가 듣게 될 새로운 신조를 발표한다. 오늘부터 새로운 비전이 미국을 다스릴 것이다. 무역 세금 이민 외교에 관한 모든 결정은 미국 노동자와 미국 가족의 이익을 위해 내려질 것이다. 미국은 다시 승리할 것이다.” 지금 보니 트럼프가 한반도에서 벌이고 있는 롤러코스터 쇼를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꽤 담겨 있다. 핵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미국을 괴롭히려는 외세는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같은 동맹국에 대한 고려나 외교적 제스처는 사치다. 미국이 승리하는 데 필요하면 약속은 뒤집거나 취소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트럼프의 변덕스러운 한반도 전략을 지켜보며 ‘트럼프 시대인 만큼 일시적인 상황 아니냐’고들 한다. 그러면서 트럼프를 욕한다. 이런 인식은 우리 정부 안팎에도 있다. 하지만 이는 트럼프가 물러나기 전까지는 미국의 작동 방식이라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표현만 달랐을 뿐 역대 미 대통령은 자기 나름의 ‘미국 우선주의’를 해왔다.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도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의 시장을 확장시키려는 오바마판 ‘아메리카 퍼스트’였을 뿐이다. 북-미 정상회담은 완전히 취소되지는 않았다. 트럼프는 회담 취소 하루 만인 25일 북한의 대화 제안에 “아주 좋은 뉴스”라며 다시 대화에 나설 수 있음을 내비쳤다. 최근의 혼돈을 통해 트럼프, 더 나아가 미국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쓴 약이 될 수 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이게 바로 원주민인 인디언을 몰아내고, 영국과 피비린내 나는 독립전쟁과 1, 2차대전을 거쳐 세계 최강대국으로 올라선 미국의 본질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Chief Justice Roberts, President Carter, President Clinton, President Bush, President Obama, fellow Americans, and people of the world: Thank you.David Crystal, the British linguist and academic, has calculated that there are three times more people learning English than there are native speakers of the language. Why?We, the citizens of America, are now joined in a great national effort to rebuild our country and to restore its promise for all of our people. Together, we will determine the course of America and the world for years to come.We will face challenges. We will confront hardships. But we will get the job done.Every four years, we gather on these steps to carry out the orderly and peaceful transfer of power, and we are grateful to President Obama and First Lady Michelle Obama for their gracious aid throughout this transition. They have been magnificent.Today's ceremony, however, has very special meaning. Because today we are not merely transferring power from one administration to another, or from one party to another -- but we are transferring power from Washington, D.C. and giving it back to you, the American People.For too long, a small group in our nation's Capital has reaped the rewards of government while the people have borne the cost. Washington flourished -- but the people did not share in its wealth. Politicians prospered -- but the jobs left, and the factories closed. The establishment protected itself, but not the citizens of our country. Their victories have not been your victories; their triumphs have not been your triumphs; and while they celebrated in our nation's capital, there was little to celebrate for struggling families all across our land.That all changes -- starting right here, and right now, because this moment is your moment: it belongs to you.It belongs to everyone gathered here today and everyone watching all across America. This is your day. This is your celebration. And thi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s your country.What truly matters is not which party controls our government, but whether our government is controlled by the people. January 20th 2017, will be remembered as the day the people became the rulers of this nation again. The forgotten men and women of our country will be forgotten no longer.Everyone is listening to you now.You came by the tens of millions to become part of a historic movement the likes of which the world has never seen before. At the center of this movement is a crucial conviction: that a nation exists to serve its citizens.Americans want great schools for their children, safe neighborhoods for their families, and good jobs for themselves. These are the just and reasonable demands of a righteous public. But for too many of our citizens, a different reality exists: Mothers and children trapped in poverty in our inner cities; rusted-out factories scattered like tombstones across the landscape of our nation; an education system flush with cash, but which leaves our young and beautiful students deprived of knowledge; and the crime and gangs and drugs that have stolen too many lives and robbed our country of so much unrealized potential.This American carnage stops right here and stops right now.We are one nation -- and their pain is our pain. Their dreams are our dreams; and their success will be our success. We share one heart, one home, and one glorious destiny. The oath of office I take today is an oath of allegiance to all Americans.For many decades, we've enriched foreign industry at the expense of American industry; subsidized the armies of other countries while allowing for the very sad depletion of our military; we've defended other nation's borders while refusing to defend our own; and spent trillions of dollars overseas while America's infrastructure has fallen into disrepair and decay.We've made other countries rich while the wealth, strength, and confidence of our country has disappeared over the horizon.One by one, the factories shuttered and left our shores, with not even a thought about the millions upon millions of American workers left behind.The wealth of our middle class has been ripped from their homes and then redistributed across the entire world.But that is the past. And now we are looking only to the future. We assembled here today are issuing a new decree to be heard in every city, in every foreign capital, and in every hall of power.From this day forward, a new vision will govern our land. From this moment on, it's going to be America First.Every decision on trade, on taxes, on immigration, on foreign affairs, will be made to benefit American workers and American families. We must protect our borders from the ravages of other countries making our products, stealing our companies, and destroying our jobs. Protection will lead to great prosperity and strength.I will fight for you with every breath in my body -- and I will never, ever let you down.America will start winning again, winning like never before.We will bring back our jobs. We will bring back our borders. We will bring back our wealth. And we will bring back our dreams.We will build new roads, and highways, and bridges, and airports, and tunnels, and railways all across our wonderful nation.We will get our people off of welfare and back to work -- rebuilding our country with American hands and American labor.We will follow two simple rules: Buy American and hire American. We will seek friendship and goodwill with the nations of the world -- but we do so with the understanding that it is the right of all nations to put their own interests first.We do not seek to impose our way of life on anyone, but rather to let it shine as an example for everyone to follow.We will reinforce old alliances and form new ones -- and unite the civilized world against radical Islamic terrorism, which we will eradicate completely from the face of the Earth.At the bedrock of our politics will be a total allegiance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rough our loyalty to our country, we will rediscover our loyalty to each other.When you open your heart to patriotism, there is no room for prejudice. The Bible tells us,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God's people live together in unity."We must speak our minds openly, debate our disagreements honestly, but always pursue solidarity.When America is united, America is totally unstoppable. There should be no fear -- we are protected, and we will always be protected.We will be protected by the great men and women of our military and law enforcement and, most importantly, we are protected by God.Finally, we must think big and dream even bigger.In America, we understand that a nation is only living as long as it is striving.We will no longer accept politicians who are all talk and no action -- constantly complaining but never doing anything about it.The time for empty talk is over. Now arrives the hour of action. Do not let anyone tell you it cannot be done. No challenge can match the heart and fight and spirit of America. We will not fail. Our country will thrive and prosper again.We stand at the birth of a new millennium, ready to unlock the mysteries of space, to free the Earth from the miseries of disease, and to harness the energies, industries and technologies of tomorrow. A new national pride will stir our souls, lift our sights, and heal our divisions.It is time to remember that old wisdom our soldiers will never forget: that whether we are black or brown or white, we all bleed the same red blood of patriots, we all enjoy the same glorious freedoms, and we all salute the same great American Flag. And whether a child is born in the urban sprawl of Detroit or the windswept plains of Nebraska, they look up at the same night sky, they fill their heart with the same dreams, and they are infused with the breath of life by the same almighty Creator.So to all Americans, in every city near and far, small and large, from mountain to mountain, and from ocean to ocean, hear these words:You will never be ignored again. Your voice, your hopes, and your dreams will define our American destiny. And your courage and goodness and love will forever guide us along the way.Together, We will make America strong again.We will make wealthy again.We will make America proud again.We will make America safe again.And yes, together, we will make America great again. Thank you. God bless you. And God bless America.}

    • 2018-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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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북미정상회담, 예정대로 6월 12일 열릴 수도…北과 논의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5일(이하 현지시간) 전날 최소한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북한과 논의하고 있다. 심지어 (원래 예정대로) 다음달 12일에 열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회담 취소 선언 직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핵화 대화 의지를 밝히자, 취소한 지 하루도 안 되는 약 23시간 만에 회담을 예정대로 진행할 가능성을 밝힌 것. 북-미 정상이 하루 만에 대화 궤도로 재진입하려는 의사를 주고받으면서 벼랑 끝에 섰던 비핵화 협상의 모멘텀이 극적으로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참석을 위해 백악관을 나서면서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회담을 무척 원하고 있다. 우리도 회담을 갖고 싶다”며 이 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비핵화 대화를 놓고 북미) 모두가 게임을 하고 있다”며 “무슨 일이 있을지 지켜보자. 회담은 심지어 12일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전 8시경 트위터에 “북한으로부터 따뜻하고 생산적인(warm and productive) 담화를 받은 것은 아주 좋은 뉴스”라고 밝혔다. 그는 또 “북한의 담화가 상황을 어디로 이끌지 지켜보자. 바라건대 장구한 평화와 번영이 되길”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한 담화는 북한이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명의로 발표한 것이다. 김계관은 담화문 “(김정은의) 위임에 따른 것”이라며 담화문이 김정은의 메시지라는 점을 부각한 뒤 “우리는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 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음을 미국 측에 다시금 밝힌다”고 밝혔다. 전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 대한 공개서한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발표하자 김정은이 김계관의 입을 빌어 트럼프 대통령에게 답장을 보낸 셈이다. 담화는 이어 “‘트럼프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쌍방의 우려를 다같이 해소하고 우리의 요구조건에도 부합되며 문제 해결의 실질적 작용을 하는 현명한 방안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시기 어느 대통령도 내리지 못한 용단을 내리고 수뇌상봉이라는 중대사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데 대해 내심 높이 평가해 왔다”며 트럼프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북-미 정상이 직접 나서 상대를 향한 유화 메시지를 던지면서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보였던 북-미 회담 재개 가능성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북한의 담화문은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 발표 및 군사적 옵션 검토 발언 후 6시간 반 뒤에 나왔고, 트럼프 트윗은 담화 후 14시간에 나왔다. 북미가 하루종일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대화 복원 의지를 내비쳤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 등 양국 정상의 위임을 받은 고위급 인사들이 접촉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날선 신경전으로 북-미 간 상호 불신을 확인하는 등 살얼음 정세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회담 재개에는 여전히 난관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행정부가 다음 주 초 수십 가지의 추가 대북제재를 검토 중이라고 이날 보도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 201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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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트럼프 앞에서 하면 안 되는 ‘3NO’

    “지금 일본이나 이런 나라들이 미국 시장에 TV를 얼마나 많이 팔고 있는 줄 아느냐. 그들이 우리 기업들을 작살내고 있다(knock the hell out of our companies).” 짐작하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말이다. 미 대선 전후는 물론이고 최근까지 자주 들었던 말이다. 그런데 위 말은 30년 전인 1988년 유명 토크쇼인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한 것이다. “knock the hell out”은 요즘도 트럼프가 즐겨 쓰는 표현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은 트럼프가 예측불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트럼프의 언행을 오래 지켜보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어떤 측면에선 예측가능하다. 트럼프가 특정 언행을 최근 수년간 반복하거나 무엇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면 이는 미래에도 재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트럼프가 요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북-미 정상회담을 거론하며 “회담장을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걸 그냥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단 얘기다. 트럼프와 잇따라 ‘세기의 거래’에 나설 두 사람(문재인 대통령, 김정은)에게 그를 수년간 관찰하며 나름대로 정리한, 트럼프 앞에서 하면 안 되는 3가지를 소개한다. ①“미국 대통령이니 이래야 한다”고 강요하지 말라=트럼프는 최근까지 “참모들이 대통령다워야 한다(be presidential)고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고 말해왔다. 이건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실제 상황. 트럼프의 주장 중 하나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깨겠다”는 것이다. ‘점잖은 척하는’ 워싱턴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다. 트럼프는 이틀 전에도 트위터에 #DrainTheSwamp(워싱턴에서 오물을 빼내겠다)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이런 트럼프에게 “세계 최강대국 미국 대통령이니 비핵화 협상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며 정공법을 요구하면 오히려 탈만 난다. 지난해 9월 유엔에서 트럼프가 “북한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자, 문 대통령이 “그런 강력함이 북한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대응한 게 오히려 트럼프의 귀를 잡아끄는 방식이란 거다. ②말로만 협상하다 손에 쥐여주는 것 없이 보내지 말라=사업가 출신인 트럼프는 숫자를 사랑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손에 잡히지 않은 현란한 수사는 질색이다. 요즘 백악관이 가장 치열하게 홍보하는 것이 실업률 수치다. ‘미 실업률이 3.9%로 4% 선이 깨졌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나를 마녀사냥하고 있다.’ 사흘 전 트럼프 트윗이다. ‘완전한 비핵화’보단 언제까지, 가령 2020년까지 비핵화를 위한 액션플랜을 취하겠다는 게 오히려 협상에 지속력을 더할 수 있다. 여기에 트럼프가 최소한 손에 뭔가 쥐었다, 승리했다는 느낌을 줘야 판이 깨지지 않는다. 그는 요즘도 미 전역을 돌며 “우리는 요즘 이긴 적이 없는데 이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브랜드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도 결국 승리하는 미국을 구호화한 것이다. ③“전문가들이 그러던데…”라고 하지 말라=트럼프가 질색하는 말 중 하나는 pundit(전문가)이다. 실전 경험도 없는 학자들이 글로벌 사업체를 일군 자신에게 훈수를 둔다는 거다. “대북 협상에서 아무것도 해본 적 없는 전문가들(pundits)이 지금 와서 협상을 조언하겠다니 웃긴다(funny).” 지난달 22일 트윗이다. 오히려 그에겐 뒤에 (트럼프를 지지하는)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가 있다고 말해주는 게 훨씬 낫다. 트럼프는 만만치 않은 협상 상대다. 하지만 그는 올해 72세. 오랫동안 드러난 그의 말과 행동을 잘 들여다보면 성과를 낼 포인트도 찾을 수 있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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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정상회담, 이제 1회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이어지면서, 한반도에서 이변(異變)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올해 초부터 그야말로 기적처럼 이어져 온 한반도 대화 모멘텀이 27일 남북 정상회담으로 첫 시험대에 오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나 비핵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계기를 찾으면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외교 이벤트 중 하나로 기록될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토양을 마련하게 된다. 미증유의 일들이 계속되면서, 한때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점점 잊혀지거나 심지어 부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을 향해 ‘로켓맨’이라며 욕하고 유엔에서 ‘파멸시켜 버리겠다’고 한 게 불과 7개월 전 일이다. 지난해 말 김정은이 6차 핵실험에 이어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시험을 하며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건 몇 년 전 같다. 이럴 때는 트럼프, 김정은이 처한 진짜 상황과 속내를 짚어보면 판단에 도움이 된다. 우선 김정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체제 보장과 안정적 장기 집권 기반이다. 그런데 2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자신의 정책적 지향점이었던 병진 노선을 포기하고 핵실험 중단을 선언하면서 세상을 더 헷갈리게 하고 있다. 그가 갑자기 평화주의자가 됐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효과를 놓고 숱한 관측을 낳았던 트럼프 주도의 대북경제 제재의 여파가 심각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전히 많은 한반도 전문가들은 경제난을 무릅쓰고 어렵게 만들어낸 핵무력을 김정은이 쉽게 포기하겠느냐고 한다. 이 때문에 미국 워싱턴에선 이도 저도 아닌 김정은의 ‘시간 벌기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원칙적으로 비핵화를 언급하며 핵무기를 당장 포기하지 않으면서 경제 활성화를 위한 ‘출구’를 찾을 수 있다는 논리다. 애덤 마운트 미국 과학자연맹(FSA) 선임연구원이 CNN 인터뷰에서 “핵무기나 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최소한의 제한을 추구하면서 대북제재 완화, 한미 군사동맹 약화 등을 시도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기류를 담은 것이다. 트럼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도 시리아도 아니라 올해 11월 중간선거다. 러시아 대선 개입 의혹을 넘어 남은 임기 동안 ‘레임덕’을 피할 수 있을지, 더 나아가 2020년 재선에 도전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중간선거를 앞둔 그에게 시급한 것은 국제정치적 레거시다. 지금까지 대외적으로는 이슬람권 이민자에 대한 비자 발급 중단이나 시리아 공습 외엔 딱히 드러낼 게 없는 트럼프는 중간선거 경선이 시작될 여름이 다가올수록 북핵 이슈에서 어떻게 하든 성과를 내려고 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올해 김정은이 돌변하자 예상보다 훨씬 빨리 정상회담 문턱까지 간 것은, 한반도를 너무 사랑해서도, 북한 인민을 매우 불쌍히 여겨서도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속내는 없다. 전쟁을 막고, 그러다가 한반도 운전석에 앉을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올해는 예상 밖의 고공행진이지만, 행여 북-미 정상회담이 별 성과를 내지 못하면 군사적 긴장이 재연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 있다. 막상 회담이 다가오니 살얼음판 같은 아슬아슬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요즘 여권 인사들을 만나보면 남북 정상회담이 한반도에 코페르니쿠스적 변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더러 있다. 청와대 논평에서 “민족적 과업을 실천해 나가겠다”는 말이 나올 때는 국운(國運)을 건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항로에 막 접어든 것일 뿐이다. 다른 선수들은 우리와 다른 목적으로 이 판에 뛰어들고 있다. 너무 긴장할 필요도, 흥분할 것도 없다. 야구로 치면 이제 1회초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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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폼페이오 만난뒤 병진노선 변경… 트럼프 요구에 응답?

    김정은이 21일 새벽,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 결정서를 통해 공개한 메시지를 놓고 국제사회가 다시 한번 깜짝 놀라며 진의 파악에 분주하다. 핵심은 과연 김정은이 기만전술이 아니라 진짜로 비핵화에 나서겠느냐는 것이다. 국제사회 누구도 속 시원한 정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의 키를 쥐고 있는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근 발언 및 반응을 비교 분석해 보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우선 핵·경제를 동시에 개발하겠다는 ‘병진 노선’. 김정은은 결정서에서 “병진 노선이 위대한 승리로 결속된 것처럼 경제 건설에 총력을 집중하는 새로운 전략적 노선도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며 병진 노선을 접겠다고 밝혔다. 병진 노선은 김정은이 집권 직후인 2013년 3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채택한 방침으로 자신의 시그너처 브랜드다. 미 워싱턴에선 한국어를 그대로 살린 ‘Byungjin policy’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병진 노선=김정은’으로 통해 왔다. 김정은은 올해 초만 해도 병진 노선을 지속하겠다고 했었다. 신년사에서 “(우리의) 위대한 승리는 당의 병진 노선과 과학 중시 사상의 정당성과 생활력의 뚜렷한 증시이며 역사적 장거”라고 일갈한 게 불과 4개월 반 전이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왜 그런 병진 노선을 접고 ‘경제 올인’ 전략으로 선회하겠다고 한 것일까.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경제 제재를 견디지 못해 완성 직전의 핵무력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것 같지는 않다. 다시 김정은의 신년사를 보자. “지난해 우리 당과 국가와 인민이 쟁취한 특출한 성과는 국가 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을 성취한 것이다. 마침내 그 어떤 힘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강력하고 믿음직한 전쟁 억제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정치적 수사가 없지 않겠으나 이 말만 보면 김정은은 지난해 한반도를 전쟁 위기까지 몰고 갔던 연쇄 핵·미사일 도발을 통해 이미 충분한 핵능력을 보유했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도발은 할 만큼 했고 트럼프를 회담장 앞까지 끌고 왔으니 이제 경제 개발에 진력하겠다는, 이른바 ‘김정은 집권 2기 플랜’을 밝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핵무기 선제 이용 및 핵기술 이전 금지를 밝힌 것도 대북 특사단을 평양에서 만났을 때 “대화 진행 시 추가 핵실험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재개는 없다”고 밝힌 만큼 새로운 건 아니다. 핵 선제 이용 금지는 미국 등 핵보유국이 채택하고 있는 ‘No First Use(NFU·도발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독트린과 비슷해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강조하면서 미국과의 군축회담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핵·ICBM 실험 중단,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담은 ‘깜짝 선언’의 무게와 의미는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과소평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트럼프는 김정은 선언 직후 트위터에서 “매우 좋은 소식이다. 북-미 정상회담을 고대한다”라고 썼다. 최근까지 트럼프는 북핵 문제에 대해 긍정 전망을 내놓더라도 “지켜보자(We will see)”는 표현을 잊지 않았다. 17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자(we will see what happens)”고 했다. 거래와 협상이 끝나고 문서에 서명하기 전까지 상대를 믿지 않는 사업가 출신 특유의 감각이 묻어 있는 표현인데, 이번엔 그게 없었다. 이 때문에 워싱턴 조야에선 김정은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후보자를 이달 초 평양에서 만난 직후 이 같은 메시지를 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김정은의 선언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워싱턴-평양 간 조율을 거치지 않았겠느냐는 것. 특히 트럼프가 트위터에서 “북한이 (내 제안에) 동의해서 핵실험을 멈추었다(North Korea has agreed to suspend all Nuclear Tests)”라고 한 것은 그 단서 중 하나다.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Progress being made for all)”며 북-미 간 협상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렇게 국제사회를 다시 한번 뒤흔든 김정은의 발표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에 다층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서는 “비핵화를 해도 내가 한다. 한반도 비핵화 운전석에는 내가 앉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트럼프와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비핵화에 나설 테니 ‘정상국가’로 대접하고 경제 개발을 위해 대북제재를 완화해 달라는 ‘청구서’를 내민 것이다. 김정은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밝힌 비핵화를 위한 ‘단계적, 동시적 조치 요구’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백악관도 ‘조건 없는 비핵화’라는 공개적 입장 표명과는 달리 김정은이 실질적인 비핵화에 나선다면 어떤 선물을 줘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김정은이 전혀 엉뚱한 말을 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27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의 속내를 파악해 비핵화를 위한 컨베이어 벨트에 앉혀 트럼프에게 넘겨줘야 하는 문 대통령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지고 있다.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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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CIA와 정찰총국 사이

    “처음 뵙습니다만, 참 익숙한 목소리네요.” 얼마 전 한 여성 중진 의원은 처음 보는 중년 남성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자신이 방송에 자주 출연해 익숙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의 목소리를 ‘감시’ 차원에서 자주 들어 익숙하다는 말이었단다. 이 남성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북핵 정보 업무를 총괄하는 앤드루 김 한국임무센터장. 정치권 관계자는 “앤드루 김이 CIA 사무실 못지않게 한국 사무실에 더 자주 간다고 한다”고 전했다. 북한 김정은의 신년사로 시작된 한반도 대화 모멘텀을 맞은 지 오늘로 딱 100일. 그 사이 많은 게 변했다. 그중 하나가 미국과 북한의 정보기관이 한반도에서 공공연히 활개 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봐서 그렇지 CIA는 어떤 조직보다 보안을 중시한다. 미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는 CIA 본관 진입로 초입에 주정차라도 할 경우엔 기관총을 든 경비원들로부터 “여기는 은밀한 정부기관(clandestine agency)입니다”라는 경고를 듣는다. 그런 CIA 간부들이 요즘 수시로 광화문으로, 여의도로 향하는 것이다. 북한 전현직 정찰총국 인사들은 위장도 변장도 하지 않은 채 버젓이 한국 언론에 등장한다.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이자 전 정찰총국장은 2일 우리 예술단의 평양 공연을 취재하는 기자단을 찾아가 “천안함 폭침 주범이라는 사람이 저 김영철입니다”라고 했다. 2월 평창 올림픽 폐회식 참석차 방한했을 때 천안함에 대해 한마디도 않던 그였다. 그런 김영철은 당시 동행했던 김상균 국가정보원 2차장을 친구인 양 “상균 선생”이라고 불렀고, 평양 공연이 끝나자 그의 손을 붙잡고 노래를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CIA와 정찰총국 라인이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수차례 기밀 접촉했다는 외신보도는 어찌 보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정보기관들의 활동이 이 정도로 포착되니 드러나지 않은 활동은 더 많을 것이다. 북-미가 서로 간을 보는 수준을 넘어 정보라인을 전면에 내세워 정보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북-미 정보라인은 판을 치고 있는데 국정원은 어디 있느냐는 말을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지난달 27일 오전. 전날 밤 김정은이 특별열차를 타고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이날 오전까지 정부는 김정은이라고 확인하지 않았다. 처음엔 알면서도 보안 때문에 입을 닫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후 들어서도 대북 정보에 정통한 여야 의원들이 국정원 정보라며 “김정은이 아니라 김여정”이라고 잇따라 밝혔다. CNN이 “김정은이 확실하다”고 속보를 내던 시점이었다. 국정원이 몰랐거나 상황 관리를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인데, 여야 공히 ‘김여정’이라고 한 것을 보면 늦게 알았다는 평가가 더 많다. 청와대도 이날 오전까지 긴가민가했다는 말이 돌았다. 국정원이 지금 CIA, 정찰총국처럼 대놓고 활개 치란 건 아니다. 오히려 조용히 할 일을 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다만 미증유의 안보 상황인 만큼 국정원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우려하는 시선도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 차원에서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옮기고 이름은 무슨 싱크탱크를 연상케 하는 대외안보정보원으로 개편하려던 참이었다. 북핵 이슈가 중대 분수령을 맞는 올해만큼은 국정원을 길들이거나 뜯어고치기보단 정보기관으로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CIA와 정찰총국 틈바구니에서 존재감을 찾고 국익에 기여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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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지워지는 17, 18대 대통령의 시간

    41.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2014년 낸 책의 제목이다. 아버지(조지 부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곳곳에 묻어 있다. 처음엔 ‘아버지(dad)’라고 하려다 41을 제목으로 달았다. 아버지 부시가 41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부시는 종종 아버지와 함께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마지막에 ‘From 41 & 43’이라고 표기한다. 자신은 43대 대통령이다. “나는 42대였고, 이제 그녀가 45대입니다.” 2016년 5월 뉴욕 맨해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부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대선 지지 유세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42대 대통령을 지낸 ‘올드보이’인 만큼, 새로 45대 대통령이 되려는 부인을 지지해 달라는 것이다. 미국에선 대통령 이야기를 하면서 유달리 몇 대(代)인지를 강조한다. 대통령제의 역사가 오래돼 전직 대통령 수가 많아서 그럴 것이다. 동시에 각 대통령 재임 시기를 하나하나의 역사로 분류해 기억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링컨은 몇 대 대통령?” 식의 퀴즈를 내고 그때 역사를 자연스럽게 설명하는 장면을 본 적도 있다.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을 공식적으로 ‘대통령님’이라 부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23일 구속되기 전까지 비서를 통해 각종 성명을 내면서 꼭 마지막에 ‘대한민국 17대 대통령 이명박’이라고 적었다. 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비판하면서도 그랬다. 굳이 17대라고 밝히는 이유를 참모들에게 물어봤더니 “그렇게라도 해야 정신줄을 붙잡을 수 있었다”고 했었다. 적폐이자 파렴치범으로 몰리며 헌정사에서 사라지는 건 어떻게든 막아보겠다는 몸부림이었던 것 같다. 탄핵으로 몇 대였는지 기억조차 흐릿한 18대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검찰의 세월호 관련 추가 의혹 조사 발표로 또 한 번 결정타를 맞았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침실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오늘로 구속된 지 딱 1년 된 18대 대통령의 흔적은 헌정사에서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됐다. 검찰 수사와 재판이 더 남았으니 완전히 ‘소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최근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17, 18대의 역사는 부끄러운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리 검찰이 먼지 털기식 수사를 했다지만,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는 말을 또 입에 담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세월호와 관련해선 국민들 가슴을 시커멓게 태울 또 다른 건이 드러날까 겁부터 난다. 그렇다고 이 두 전직 대통령이 재임했던 2008년 2월 25일부터 2017년 3월 10일까지 9년의 시간 자체를 부정하고, 거론하는 것조차 터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맞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시간 역시 좋든 싫든 대한민국의 역사였다. 언젠가 적폐청산 드라이브가 끝난다면 반면교사의 교훈을 얻어낼 수도 있다. 이 글을 쓰다가 퇴임 후 친구로 지내는 빌 클린턴, 조지 부시의 근황이 궁금해서 이들이 2014년 세운 ‘대통령 리더십 연구(PLS)’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최근에도 특별 좌담회를 갖고 자신들이 재임 시 왜 이런저런 결정을 했는지 토론하고 있었다. 이들도 그리 훌륭하기만 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클린턴은 섹스 스캔들로 탄핵 문턱까지 다녀왔고, 부시는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핑계로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 그래도 이들의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기억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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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샷 타결’에 제동 건 北-中… 비핵화 수싸움 시작됐다

    어찌 보면 시간 문제였다. 북한 김정은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한미가 단계적이고 동시적 조치를 해야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밝히며 ‘비핵화 게임’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김정은은 대북특사단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전한 메시지에선 비핵화 논의를 위한 구체적인 조건을 내걸지는 않았다. 특사단을 평양으로 불러서는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만 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통해 트럼프에게 전한 메시지에는 아예 조건도 달지 않았다. 이 때문에 9일 트럼프가 김정은의 북-미 정상회담 제안을 수용한 뒤 한미를 중심으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원샷 타결’, 정상 간 합의에 따른 ‘톱 다운식’ 비핵화 가능성이 회자됐다. 청와대는 최근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 버리는 방식처럼 북핵 이슈를 한 번에 풀어보겠다”고도 했다. 이 때문에 일사천리로 북-미 간 평화협정이 체결될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김정은은 한반도 대화 프로세스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밝히면서 이 같은 전망들이 지나친 장밋빛이었음을 한 방에 증명했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비핵화 이슈에 대한 생각을 왜 지금 밝혔을까. 많은 한반도 전문가는 시점을 고민하던 김정은이 그리도 바랐던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 자리를 통해 그 폭발력을 극대화하려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은은 2011년 12월 집권 후 권력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내부 체제를 결속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방중을 추진했으나 시 주석은 허용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친중파인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할 정도로 아버지 김정일보다 더 예측 불가능한 데다 지속적인 핵·미사일 도발로 중국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5, 6차 핵실험에 이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을 거의 완성 단계까지 끌어올리면서 중국은 미국이 주도해 온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기조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따’가 됐고 적지 않은 외교적 압박까지 받았다. 그러다 보니 북-중 관계는 최근까지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올해 들어 김정은이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대화 기조를 주도하고 남북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까지 밀어붙이자 시 주석의 계산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시 주석은 정의용 실장이 베이징을 방문해 김정은 면담 결과를 설명하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그동안 ‘양회’(兩會·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및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장기 집권의 틀을 구축하는 내치에 집중해 온 시 주석은 이 작업이 완료되자마자 김정은에게 “베이징으로 오라”고 요청했고 김정은은 아버지가 타던 1호 열차를 타고 달려가 집권 7년 만에 그토록 바라던 혈맹 관계를 재확인했다. 그러고는 중국이 걱정할 정도로 급격한 비핵화 프로세스를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한미의 단계적, 동시적 조치’라는 조건을 통해 분명히 했다. 시 주석은 이를 듣고 고위급 인적 교류 확대 등 북-중 관계 개선을 위한 4대 조치를 언급했다. 조건을 까다롭게 한 비핵화는 김정은은 물론이고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패자(覇者)를 꿈꾸는 시 주석 모두를 만족시키는 구상이기도 하다. 중국은 겉으로는 한반도 비핵화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불러올 급속한 비핵화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북-중 관계를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 표현은 중국에 북한이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자산인지 보여준다. 북-미 정상회담이 잘될 경우 동북아에서의 미국 영향력이 확대될 수밖에 없고 중국은 북한이라는 국제정치적 완충망의 효용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시 주석 앞에서 한미가 상응하는 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비핵화가 어렵다고 밝히면서 한반도 비핵화 게임에 중국이라는 선수가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으로 실마리를 찾으려던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 해법도 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김정은이 ‘기브 앤드 테이크’라는 입장을 명확히 밝힌 데다 상황에 따라서는 북-중이 ‘2인 3각’ 대형으로 협상에 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선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도 전열을 재정비해 비핵화 게임에 끼어들 수 있다. 남성욱 고려대 행정대학원장은 “북-미, 남북미 간에 논의될 듯하던 비핵화 논의가 6자회담 틀로 복원하는 듯한 구도”라고 분석했다. 조건 없는 비핵화를 강조해온 미국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 미대사는 김정은의 방중 직후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김정은과의 위험한 북-미 정상회담을 몇 개월이라도 연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대화 훈풍으로 인해 넘실댔던 ‘원샷 타결’ 등의 비핵화 액션 플랜은 김정은-시진핑의 회담 결과로 재확인된 ‘단계적 비핵화’ 구상을 계기로 오히려 차분히 들여다보고 미세 조정할 계기를 갖게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아직 북한에는 미국보다 대외 교역량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한반도에 너무 빨리, 짙게 피었던 ‘장밋빛 안개’가 걷히고 비핵화 봄을 위한 진짜 게임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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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문재인의 비즈니스 마인드

    아직도 그 비아냥거림을 잊을 수 없다. 2015년 6월 16일 오전 뉴욕 맨해튼의 트럼프타워. 건물주인 도널드 트럼프 현 미국 대통령이 번쩍거리는 황금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2016년 11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CNN은 속보를 전했다. 그런데 앵커나 패널 모두 웃고 있었다. 여성 앵커는 “트럼프가 백악관에 가겠다네요, 하하”라고 했다. 한 패널은 “호텔 말고 무슨 성(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짓는다는데…”라며 비웃었다. 대선을 코앞에 둔 2016년 10월 7일. 트럼프는 지금으로 치면 초대형 ‘미투’ 사건에 연루됐다. 트럼프가 2005년 TV 프로그램에 나와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장면이 폭로된 것. 여성 성기를 뜻하는 ‘p****’가 들어간 걸쭉한 막말에 대부분의 언론은 “트럼프의 실체가 드러났고 선거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일부 트럼프 참모는 선거운동 중단을 건의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남자들이) 탈의실에서 나누는 농담이다. 왜 나에게만 이러느냐”며 억울해했다. 그런 트럼프가 주류의 상징인 힐러리 클린턴을 이기고 취임한 지 1년 2개월이 다 됐지만, 미 주류의 태도는 변한 게 없다. 대통령으로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반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10일 미 펜실베이니아주 유세에서 2020년 재선용 슬로건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를 언급한 것도 자신을 무시하는 주류사회에 대한 분노, 서운함, 인정 욕구 등이 얽혀 있다. 이런 장면들이 떠오른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북-미 중재 외교전에서 잇따라 던진 트럼프 칭찬 때문이다. 트럼프 띄워주기가 북-미 정상회담 수용에도 영향을 줬다고들 한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올해 트럼프와 전화할 때마다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줬다”고 했다. 북-미 정상회담 수용 발표 후엔 “트럼프 대통령의 지도력은 전 세계인의 칭송을 받을 것”이라고도 했다. 골수 트럼프 지지자들도 선뜻 하기 어려운 수준의 칭찬이다. 문 대통령의 이런 말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문 대통령이 명예욕에 목말라하는 트럼프의 심리를 전략적으로 제대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보니 꽤 오래전부터 트럼프의 이런 심리를 겨냥했다. 지난해 9월 뉴욕 유엔총회 기간 트럼프는 “북한을 멸망시키겠다”고 해 파장을 낳았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그런 강력함이 북한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해 주변을 더 놀라게 했다. 미국에서 “당신은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말을 주로 듣다가 문재인이란 외국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이다. 미국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던 차에 워싱턴의 지한파인 J 씨와 12일 우연히 연락이 닿았다. 자신과 동갑(72세)인 트럼프를 싫어하기로 유명한 전형적인 백인 주류다. 그는 트럼프가 새로 내건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에 대해 “그게 빌어먹을 도대체 무슨 뜻이냐?(What the f*** does that mean?) 외국인인 당신이 좀 설명해 봐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트럼프는 나 같은 노인이다. 사람이 70세를 넘으면 잘 안 바뀌고 칭찬에는 민감해진다. ‘프레지던트 문’은 인내심이 좋은 거냐, 트럼프를 좋아하는 거냐”고 했다. 문 대통령의 트럼프 공략은 일단은 성공한 듯하다. 물론 사업가 출신 트럼프가 칭찬 몇 마디에 계속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비즈니스맨 공략엔 전략적인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그 역시 수확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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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희정 수행비서 성폭행’ 폭로에 與 발칵…긴급 최고위원회의 소집

    더불어민주당 차기 유력 대선 후보군 중 한 명인 안희정 충남지사가 최근 8개월 동안 수행비서 김지은 씨를 성폭행했다는 폭로에 이어 곧 형사 고소될 것이라는 사실이 5일 알려지면서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6월 지방선거는 물론 향후 민주당 차기 대선 구도는 물론 정치 지형 전체에 적지않은 파급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오후 9시 국회본관에서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하는 등 대책마련에 나섰다. 지방선거를 100일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터진 대형 악재에 당 내부에서는 “석고 대죄해야 한다”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안 지사 측에 따르면 안 지사는 지난해 대선까지 남성 수행비서 2명과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나 지난해 4월 민주당 대선 당내 경선에서 탈락한 뒤 김 씨가 수행비서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정무비서로 일하고 있는 김 씨는 안 지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시점 등을 구체적으로 폭로했으며, 안 지사와 나눈 텔레그램 대화내용까지 공개했다. 안 지사는 성폭행 사실은 시인하면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해명했다. 안 지사의 측근은 “안 지사와 통화가 되지 않는다”며 말을 아꼈다. 안 지사에 대한 수사와는 별도로 정치적 타격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6·13 지방선거 이후 당 대표 선거 등 향후 정치 행보가 불투명해졌다. 지난해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안희정 현상’을 선보이며 차기 유력 후보군으로도 떠오른 그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안 지사는 ‘안희정’이라는 이름만으로 존재감이 있는 정치인이다. 그가 보여줬던 도덕적 고뇌가 가장 큰 강점이었는데 그게 무너졌다”고 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 관련 허물을 껴안는 등 ‘희생의 아이콘’으로 통한 안 지사인 만큼 충격은 더 하다. 안 지사 측 관계자는 “노무현의 정치자금을 모으려고 모든 걸 포기하고, 개인 사업을 하기도 했던 안 지사다. 너무 허망하다”고 말했다. 안 지사는 최근까지도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정치적 발언을 이어갔다. 김 씨의 폭로가 나온 당일인 5일 충남도청 문예회관에서 열린 ‘3월 행복한 직원 만남의 날’에서 “미투 운동은 남성 중심적 성차별의 문화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우리 사회를 보다 평화롭고 공정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 지사는 “우리는 오랜 기간 힘의 크기에 따라 계급을 결정짓는 남성 중심의 권력 질서 속에서 살아왔다. 이런 것에 따라 행해지는 모든 폭력이 다 희롱이고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안 지사의 성추문은 유력 정치인의 스캔들 이상의 파괴력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당은 문재인 대통령의 고공 지지율 속 지방선거 승리를 기대했지만, 이번 안 지사의 추문으로 인한 후폭풍에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다. 민주당 고위 관계자는 “당의 핵심자산이 큰 손상을 입었으니 지방선거 등 이후 정치 일정에 큰 악재다. 당장 지방선거에 끼칠 악영향이 적지 않을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미 한 차례 미투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과거 박원순 서울시장 선거 캠프에서 일어난 성추행을 한 여성 작가가 고발한 데 이어 당 내부 게시판에도 성추행 피해를 호소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이승헌 기자 ddr@donga.com}

    • 201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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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Team 문재인’에는 ‘영미∼’가 있나

    하도 소리를 지르기에 처음엔 ‘파이팅’ 비슷한 구호인 줄 알았다. 그러다 이게 팀원 이름이고, 나중엔 스톤의 방향과 세기를 결정하는 작전 지시라는 걸 알게 됐다. 평창 올림픽에서 ‘겨울 동화’를 써내려간 여자 컬링 대표팀인 ‘팀 킴(Team Kim)’의 스킵(주장) 김은정이 외친 ‘영미∼’ 말이다. 대표팀의 선전에 컬링 경기를 자주 보다 보니 기자는 이 구호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보게 됐다. 조직이 잘 굴러가기 위해선 효율적인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거다. 스킵 김은정의 작전 지시는 템포와 세기만 다를 뿐 대부분 ‘영미∼’다. 상황에 따라 ‘헐’ ‘업’ 등이 추가된다. 메시지가 일관되고 간결하다 보니 팀원들이 조직의 목표를 엉뚱하게 이해할 확률은 그만큼 낮다. 김은정은 스톤이 원하는 지점에 갈 때까지 30여 m 떨어진 팀원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이 터져라 ‘영미∼’를 외친다. 목표가 조직 말단까지 도달할 수 있는 전달력이다. 주로 ‘영미∼’를 부르지만 선영이나 경애가 필요하면 정확히 찾는다. 팀원들이 상황에 따라 미리 제대로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팀 킴’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자연스레 우리 정부를 ‘팀 문재인’이란 프레임으로 들여다보게 됐다. ‘스킵’으로서 문 대통령의 ‘영미∼’는 좀 헷갈리는 편이다. 처음엔 ‘촛불 혁명’ ‘적폐 청산’을 외치더니 요즘은 ‘소득 주도 성장’ ‘청년 일자리 창출’ ‘6월 개헌’을 자주 외친다. ‘적폐 청산’은 지난해까지 외치겠다고 했는데 일부 팀원들은 여전히 이 구호에 맞춰 스톤을 움직이고 있다. ‘문재인 스킵’의 지시는 팀원들에게 속속들이 잘 전달되고 있을까. 어느 대통령보다 자주 메시지를 내놓고 있지만, 조직 말단이 지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알더라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해 보인다. 이렇다 보니 사람 좋은 문재인 스킵도 종종 공개적으로 팀원을 혼쭐냈다. “청년 실업 문제가 국가 재난 수준이라고 할 만큼 매우 시급한 상황임을 내가 여러 번 강조해 왔다. 그런데 정부 각 부처에 그런 의지가 제대로 전달됐는지, 그리고 또 정부 각 부처가 그 의지를 공유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지난달 25일 청와대에서 팀원(장관)들을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혼낸 대목의 일부다. 그런데 청년 일자리라는 스톤을 제대로 못 움직였다고 팀원들만 닦달하면 될 일인지 모르겠다. 이 지시를 제대로 공유할 수 있도록 팀 차원의 소통과 노력을 했다는 말을 기자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문재인 스킵은 종종 승부처가 다가오면 결정구를 던져놓고 뒤늦게 ‘영미∼’를 외치는 경우도 있다. 평창 모멘텀을 살리기 위해 천안함 폭침의 주범인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방한을 전격 수용한 게 그렇다. 갑작스러운 수용 결정에 반대 여론이 폭발하자 팀(정부) 내부에서도 손발이 안 맞았다. 통일부, 국가정보원은 뒤늦게 ‘김영철 수용 불가피론’을 확산시켰지만 제대로 준비가 안 돼 오히려 반대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기자에게 “김영철이 갑자기 오겠다는데 안 받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하겠느냐”며 갑갑해했다. 문 대통령은 25일 트위터에서 여자 컬링 대표팀에 대해 “주전 4명이 10년 넘게 동고동락하면서 기량을 키우고 호흡을 맞춰 왔다고 하니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 난다”고 했다. 컬링 신화는 소통에서 나왔다고 스스로도 본 것이다. ‘팀 문재인’ 내부를 들여다보고 국민과 소통 강화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팀 킴’의 은메달은 스포츠를 넘어 국정 운용의 측면에서도 여러모로 의미 있을 듯하다.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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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이방카 접대 매뉴얼

    2016년 11월 말. 안호영 당시 주미대사는 편지를 써 액자에 담았다. 미국 추석인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있었다. 수신인은 이방카 트럼프. 얼마 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꺾은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의 딸이었다. 당시 이방카는 지금처럼 백악관 선임고문도 아니었다. 하지만 워싱턴에 있는 웬만한 외국 대사들은 이방카에게 선을 대라는 본국 지시를 받았다. 안 대사도 그런 경우였다. “이방카 사무실에 내가 보낸 편지와 비슷한 종이가 수천 장 쌓여 있었다고 한다”고 했던 안 대사의 씁쓸한 웃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평양 공주’ 김여정이 돌아가고 이젠 ‘워싱턴 공주’ 이방카 차례다. 평창 올림픽 폐회식 즈음 온다고 하니 2주도 안 남았다. 김여정이 김정은의 명을 받아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했고 우리는 국빈급으로 대접했다. 백악관은 문 대통령 의중이 궁금하다. 그런 와중에 트럼프의 귀를 잡고 있는 이방카가 온다. 북-미 대화의 중요성을 트럼프에게 설명하려는 청와대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은 손님도 없다. 문제는 이방카를 어떻게 대접할 것이냐다. 김여정이야 같은 한국 음식 먹고 말이라도 통했다지만 이방카는 한국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방카의 몇 가지 키워드만 알아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하는 취재차 수년간 이방카를 관찰하며 결론 낸 것이다. ①트럼프는 정말 이방카를 사랑한다=대선을 치르면서 트럼프가 이방카 자랑을 하겠다며 “내가 젊었다면 이방카랑 데이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은 진심이다. 트럼프가 지난해 11월 국빈 방한 시 국회 연설에서 프로골퍼 박성현을 언급하며 “내가 소유한 미 뉴저지주 베드민스터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열린 US 오픈대회에서 우승했다”고 말했다. 여기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이방카가 2009년 바로 이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결혼한 것. 박성현의 우승은 그래서 트럼프에게 더 특별한 것이다. ②이방카는 스포츠광이다=기자는 이방카를 2016년 7월 미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처음 봤다. 트럼프 대선 후보 지명을 위한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마지막 연설자로 나왔다. 그해 3월 셋째 아들을 출산한 지 4개월 후였다. 그런데도 분홍색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나왔다. 미 언론은 그 사진을 대서특필하며 이방카가 어떤 운동을 하는지 보도했다. 이방카는 봄가을엔 골프를, 겨울엔 스키를 즐긴다. 방한 전 평창 설질(雪質)을 미리 알아볼 수도 있다. ③여성 일자리에 꽂혀 있다=이방카가 가장 최근에 낸 책은 ‘일하는 여성(Women who work)’이다. 일하는 여성이 세상을 바꾸고 가정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 문 대통령의 일자리 창출 드라이브와 접점이 많다. ④가족이 1순위=여성 편력이 심한 아버지를 둔 탓인지 이방카는 남편 재러드 쿠슈너와 결혼한 뒤 줄곧 가족의 가치를 앞세웠다. 아이들 생일이면 스케줄을 쪼개 꼭 스파게티를 입으로 먹이는 이벤트를 갖는다. 힐러리는 일과 가정을 모두 잘 챙기는 이방카를 두고 대선 때 “트럼프가 자식들은 잘 키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즘 화두 중 하나인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과도 닿아 있다.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김여정도 그토록 잘 대접한 정부인데 조금만 준비하면 이방카 대접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행여 우리가 김여정 때와 달랐다는 말이 나오면 민감한 시기에 의외로 곤란해질 수 있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이 평창에 재를 뿌리고 갔다”는 청와대 주변 말들이 그래서 좀 걱정스럽다. 남북 정상회담 이슈는 100m 달리기가 아니다. 긴 호흡으로 한미 공조 아래 평양을 관찰해야 한다. 김여정을 잘 대접했으니 이방카도 잘 해 보내는 게 일의 순서다. 이방카 입에서 ‘환대(warm hospitality)’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이런 일로 트럼프가 토라지면 우리만 손해다.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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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승헌]빅터 차의 샌드위치, 성 김의 족발냉채

    이날도 샌드위치였다. 종류는 다양했다. 참치, 햄 앤드 치즈, 칠면조….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봤건만 그는 “Take Two. Help yourself(두 개 먹어도 돼. 많이 들어)”라고 했다. 지난해 4월 18일, 미국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1층 회의실. 빅터 차 CSIS 한국석좌 겸 조지타운대 교수가 한반도 상황을 논의하려고 만든 브라운백(도시락 점심) 세미나에서였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그와 종종 점심을 했다. 장소와 주제는 달랐지만 메뉴는 대부분 샌드위치. 신년 초와 같은 특별한 날엔 파스타였다. 한번은 그에게 “미국인도 열에 한두 번은 일식 도시락 먹자더라”고 했다. 하지만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며 들은 척도 안 했다. 차 석좌의 샌드위치 고집을 보면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정글과 같은 워싱턴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인종의 용광로? 말이 좋아 그렇지, 그 용광로 온도 조절하고 휘젓는 사람은 백인 엘리트다. 그들과 비슷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 주한 미국대사 지명설이 돌자 ‘미국식’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확정되기 전엔 아무 말도 안 하겠다는 것이다. 기자가 이날 “축하한다”고 떠봤더니 “나는 이미 정부 일(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보좌관)을 해봤다. 학교와 연구소 일에 충실하려고 한다”며 정색했다. 그랬던 차 석좌가 최근 주한 미대사 내정자 신분에서 ‘해고’되자 워싱턴에선 다양한 관측이 나왔다. ‘코피 전략’으로 불리는 대북 선제타격을 놓고 백악관과 의견이 엇갈렸다는 게 여전히 다수설이다. 충성심 테스트에서 밀렸다는 말도 있다. 닷새 전 워싱턴에서 차 석좌를 만난 외교 소식통 U 씨는 “러시아 스캔들로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부하들에게 강한 충성심을 요구하고 있는데 빅터가 의문 부호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한국 정부가 CSIS에 돈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빅터가 역할을 했는데 주한 미대사로서 이해충돌 문제가 걸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각종 ‘설’은 공교롭게 모두 그가 백인이 아닌 한국계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한 워싱턴 소식통은 “안 그래도 백인이 주도하는 워싱턴인데 백인, 미국 우선주의가 더 심해지고 있다. 가차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돌이켜 보면 한국계 최초의 주한 미대사이자 대북정책특별대표였던 성 김 현 주필리핀 미대사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활달한 성격의 김 대사는 워싱턴에선 철저히 미국인이었지만, 퇴근 후엔 종종 지인들과 한식을 먹었다. 그는 족발냉채를 좋아했다. 뼈째 뜯어 먹는 한국식 족발은 ‘징그럽다’며 미국 스타일이 가미된 족발을 찾았다. 그런데 족발냉채를 먹으려고 가까운 곳을 두고 워싱턴 국무부 사무실에서 1시간 걸리는 식당까지 나오곤 했다. 어느 날 같이 족발냉채를 먹으며 물었더니 “워싱턴 근처에서 먹다가 미국인 부하들이 보면 좀 이상하지 않겠어”라며 웃었다. 김정은의 평창 선전전에도 불구하고 한미동맹은 일각에서 우려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동시에 빅터 차의 낙마에서 보듯 미국에서 백인 이외의 ‘이방인’은 언제든 내쳐질 수 있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는 국제관계에도 적용된다. 혈맹이라고 다를 건 없다. 좋든 싫든 냉혹한 현실이다. 트럼프 시대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 2018-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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